소설리스트

현수 VS 방각 (51/57)

현수 VS 방각

건과 현수 그리고 만사귀는 감숙성으로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방각이와의 일을 끝내고 바로 환희영생교의 일을 처리할 생각으로 일부러 감숙성의 난주와 가까운 돈황의 월아천으로 잡은 것이었다.

"어때? 방각이 도전에 승낙할 것 같아?"

"모르지. 방각이라면 승낙할 것 같은데 주위에 사람들이 있으니 모르지. 예전에 방각이를 봤을 때, 문파와 관련된 일은 독단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

"방각이 많이 컸지. 그러고 보면 무기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지."

건은 달라진 방각을 그렇게 평가했다.

"그런데 너 정말 방각이에게 이길 자신이 있는 거야? 솔직히 혁무기에게 당한 건을 보면 걱정이 되기는 한다."

만사귀는 현수가 아무리 살황이라고 해도 천마에게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혁무기와 건이 싸우는 것을 보고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어. 짭새 역시 10대 무공을 이었지만 혁무기한테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 10대 무공 중의 최고라고 하는 천마의 무공을 이은 방각이라 확실하게 말은 못 하겠다."

현수의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현수는 혁무기와 건의 싸움을 보기 전에는 방각에게 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건과 혁무기의 싸움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현수가 방각과의 싸움에서 믿고 있는 것은 자신의 무공이 아니었다. 현수는 바로 자신의 이름을 믿고 있었다. 틀림없이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음이든 양이든 방각에게 영향을 줄 것이고 그 틈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감숙성에 도착한 세 사람은 객잔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어수선한 감숙성이었다.

"아이고! 이놈아! 정신을 차려. 멀쩡한 놈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쯧쯧, 장거생의 둘째 아들이구먼. 환희영생교에 빠지더니 앙상한 뼈만 남았구먼."

세 사람의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결코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사내는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어디론가 가려고 했고 그를 말리는 부모는 그를 붙잡고 원성을 토했다.

"어때?"

"섭혼술에 걸린 듯하다."

"문제가 심각한가? 그런데 감숙성의 문파들이 보고만 있는 것이 이상한데. 공성을 생각한다면 결코 환희영생교를 그냥 두지 않을 텐데."

현수는 환희영생교가 활개를 치게 놓아두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혹시 알아? 그들도 환희영생교에 빠졌는지. 음양 교합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잖아."

"어두운 화면이 뭐가 좋아……."

말을 내뱉던 현수는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현수의 말을 들은 건과 만사귀는 현수에게 얼굴을 바짝 붙이고 물었다.

"왜, 왜들 이래?"

"경험해 봤냐? 어때? 좋아? 야, 말 좀 해 봐라. 응!"

현수는 두 사람의 집요한 질문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 씨, 몰라. 궁금하면 환희영생교의 신자로 들어가면 되잖아."

현수는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그때 그들에게 다가오는 여성 유저들이 있었다.

"당신들도 환희영생교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인가요?"

건은 그녀들을 보았다. 절세미인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었다.

"혹시…… 소저들이 그 환희영생교의 신도……."

만사귀는 마음속에 있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바람에 급히 입을 막았다.

"호호! 왜요? 관심 있으세요?"

세 사람은 동시에 손을 저었다. 그러고 보면 세 사람 다 임자가 있는 몸이었다. 여성들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수아. 그리고 독이라면 유저들 중에서 제일인 수진……. 비록 천에서는 이름을 알리고 있지 못하지만 만사귀에게는 현수와 건보다 더 무서운 이화가 이들의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오호! 그러세요? 아쉬워라……!"

'만약에 그 얼굴이 환희영생교의 평균 수준이면 난 절대 신도는 안 될 거야.'

만사귀는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장난 그만 해."

뒤에서 한 여성 유저가 이들을 제치고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여인천하의 문파원들이에요."

"우리에게 볼일이 있으세요?"

"혹시 환희영생교에 입교하기 위해서 왔다면 돌아가세요."

감숙성의 문파들은 환희영생교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성 유저들이 환희영생교에 빠져서 지금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문파의 운영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각 성에서 이들의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 계속해서 늘어나자 감숙성 문파들의 여성 유저들이 단합하기 시작했고 외지에서 오는 유저들을 협박하여 돌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감숙성의 여성 유저들은 자신들의 문파에서 탈퇴하고 새로운 문파를 만들어 모여들었다.

여인천하라는 문파가 바로 신생 감숙성의 패자로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들 역시 환희영생교가 오래 지속될수록 자신들의 영향력이 더 크게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심으로는 환희영생교가 천의 각 성으로 퍼지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환희영생교가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는 반대였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신들은 환희영생교를 키워 준 것밖에 되지 않고 또 그들에게 먹힐 수도 있기 때문에 가입을 위해 온 이들을 돌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막을 모르는 세 사람은 절대 가입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녀들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럼, 당장 감숙성을 떠나세요."

"웃기군요. 당신들이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우리는 일이 있어 이리 온 것이지, 당신들에게 쫓겨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니 그냥 물러들 가시죠."

건의 시비를 거는 듯한 말에 그녀들의 표정은 묘하게 변했다.

"건아, 우리 이화가 여자와는 절대 싸우지 말라고 했어. 그러니 그냥 우리가 가자."

만사귀의 말은 이들에게 기름을 부은 것과 같았다. 만사귀는 그런 뜻이 없었겠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이 여자라고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좋게 말로 끝내려고 했더니 감히 우리를 무시해!"

뒤쪽에 서 있는 여성 유저들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돌아가라. 여자의 몸에 검을 겨누는 것도 좋지 않지만 사지가 잘린 모습은 더 보기 싫다. 결코 여자라고 해서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흉측한 꼴 보기 싫으면 그냥 돌아가라."

현수의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에, 앞에 나선 여성 유저는 흠칫했다.

"당신은 누구지요? 적어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무림에서 이름을 떨칠 정도는 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앞선 여성 유저는 현수를 향해 말했다. 만사귀와 건은 설마 했다. 베타 시절 여자라고 해서 어물쩍 넘어가는 현수가 아니었기에 한편으로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성 유저를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다시 말한다. 그냥 물러나라. 우리는 우리의 일 때문에 왔지, 너희들과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끝까지 말하지. 저 밖에 사람들이 보이나? 너희들이 과연 우리에게 이곳을 떠나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나?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못할망정,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저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슨 권리로 너희가 우리를 이곳에서 떠나라고 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도 환희영생교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데."

뒤에 있는 여성 유저들이 검을 뽑아 현수를 향해 찔러 왔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건과 만사귀는 뒤에 일어날 상황을 알고 있었다.

"캬악!"

뾰족한 비명 소리가 객잔 안을 진동시켰다. 언제 움직였는지 현수의 손에는 용천검이 들려 있었다.

현수를 공격한 여성 유저는, 현수의 말대로 검을 잡은 팔이 몸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너도 이들과 같은 생각인가?"

여전히 감정이 섞이지 않은 현수의 목소리였다. 앞에 있던 유저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권리를 앞세우기 위해서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라. 알량한 문파의 명성을 믿고 설치지 말고. 돌아가라!"

여성 유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세요.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을 테니."

원성이 섞인 그런 목소리였다.

"천에서는 나를 사신낭객이라 부른다."

그녀는 놀라 다시금 눈을 크게 떴다.

말로만 듣던 신비이객 중 1명인 사신낭객을 직접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또한 그의 무공은 듣던 것보다 더 빨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문파원들이 당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

"사신낭객!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겠어요."

그녀는 고통에 인상을 쓰고 있는 문파원들을 데리고 객잔을 벗어났다.

"야, 괜찮겠어?"

"뭐가?"

"여자와 원수를 지면 오뉴월에도 함박눈이 내린다고 하잖아."

만사귀는 걱정이 되는지 현수에게 물었다.

"상관없다. 백성이 고통 받고 있는데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은 죽어 마땅하다. 난 황궁인이기에 그들을 벌할 권리가 있다."

그놈의 황궁인은 마치 현수에게 살인 면허와 같은 것이라고 만사귀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감숙성에서 한 번은 부딪쳐야 할 것 같은데."

건도 걱정이 되는지 현수를 보았다. 남자들이라면 몰라도 상대는 여자들이었다. 아무래도 조금은 꺼림칙한 무엇이 있었다.

하나, 현수는 상관이 없다는 듯 말했다.

"남녀가 평등한 시대에 여자라고 해서 봐주는 것이 어디 있어!"

베타 시절 수빈에게도 아흔아홉 번의 패배를 안겨 준 현수였다.

"참, 진짜 가끔은 현수 너의 머리를 연구해 보고 싶다."

만사귀는 그런 현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감숙성에서 새로운 적을 만든 것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옥문관에서 여인천하의 문파원들과 부딪쳤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만사귀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여인천하의 문파원들을 보며 구시렁거렸다.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랑 싸운다는 일 자체가 그리 즐겁지 못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경고가 가벼웠던 모양이군."

현수가 한발 나섰다.

건과 만사귀가 여자와 싸우는 것을 그리 내키지 않아 한다는 것을 현수도 알고 있었다.

"우리를 무시하고 무사히 돌아갈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겠지?"

현수에게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한 그녀였다.

"그래서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왔나?"

현수의 말이 그녀들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처음부터 현수가 그녀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말을 한 것도 원인이 되었다.

"흥! 잠시 후에도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지 두고 보면 알겠지."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적어도 하나는 알겠군. 원래 너희들은 그렇게 입으로 싸우나? 이왕 검을 겨눌 생각이었으면 말이 필요 없는 것 아닐까?"

현수가 그녀들을 향해 먼저 검을 뽑아 들었다. 현수의 기세에 흠칫하는 그녀들이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고수라 여기고 있고 또 많은 인원을 믿었다.

"건아, 현수의 말을 듣고 있으니 피할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현수에게 무엇을 바라겠냐. 아마 방각이와 싸움을 앞두고 있어서 자신을 더 채찍질하는 것 같다."

건이 현수를 볼 때 꼭 그러했다.

"그렇지, 저놈도 방각이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지? 지금의 모습을 보면 꼭 베타 때와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자신감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지?"

"그래, 우리는 빠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현수가 위험하면 도와주기로 하고 말이야."

만사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건 역시 뒤로 물러서자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천하의 문파원들이 이들을 비웃었다.

"흥! 친구들은 뒤로 빠지겠다는데, 어떻게 하나?"

조롱이 섞인 목소리였다.

"거참, 진짜 말 많네. 싸우려면 검을 들고, 아니면 비켜서!"

현수의 말에 그녀들이 이를 갈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현수는 운중난화무를 밟아 공격을 피하며 가끔 검을 움직여 그녀들의 공격을 차단하기도 했다.

"진짜 저 움직임은 환상이지!"

만사귀는 현수의 보법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건 역시 현수가 부러운 점이, 바로 지금 눈에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근데, 살황이라면 저런 화려함보다는 은밀함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야?"

"그렇지. 그러니 현수가 무서운 거지. 내가 혁무기와 싸울 때 현수가 떨거지들을 맡아 처리했는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어. 순식간에 정리해 버린 놈이야. 파괴력에 있어 최강이라는 천마의 무공이라고 해도, 현수의 저 화려함과 은밀함을 쉽게 깨뜨리지는 못할 거야."

만사귀는 현수와 여인천하 문파원들의 싸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여인천하의 문파원들이 감숙성에서 영향력을 얼마나 발휘하는지 모르는 현수였지만 그가 싸워 온 유저들이나 NPC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실력들이었다.

"후후! 고작 이 정도의 실력으로 큰소리를 치기는. 너희들의 문주가 누구인지 모르나 실수했다는 것만 알아 두어라."

드디어 현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환영사사연혼술!"

순간 주변이 변하자 여인천하의 문파원들은 당황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캬악! 배, 뱀들이……."

"쥐, 쥐……. 꺄악!"

순간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만 싸움터였다. 지켜보고 있는 건과 만사귀는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환술이지."

"그래, 그런 것 같다. 아마 살황의 비기에 환술이 섞여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한 번 약점을 잡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현수에게는 싱거운 싸움이 되어 버린 것 같고."

환술이라면 만사귀 역시 알고 있었다. 부적으로 환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과연 현수가 그냥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모두 죽일 것인가가 문제네."

"난 모두 죽인다에 한 표."

"나 역시. 무엇보다 현수에게는 옛날의 카리스마를 찾을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야."

둘의 생각대로 현수는 그녀들에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 검에 심장과 목을 노려 고통 없이 그녀들을 쓰러트리는 모습에서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악!"

여인천하의 문파원들이 현수의 환술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이미 많이 동료들이 쓰러져 있었다.

현수는 그녀들을 향해 말했다.

"다시 시작해 볼까?"

그런 현수의 음성이 두렵게 들리기 시작했다. 뒤에 빠져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 역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제야 그들이 자신들을 두려워해서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사신낭객 혼자서 충분히 자신들을 상대할 수 있기에 물러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이……."

마치 사신낭객이 자신들을 보고 비웃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함부로 달려들 수 없었다. 이미 사신낭객의 실력을 확인했기에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물러날 때라는 것을 알았다.

"두고 보자."

살아남은 여인천하의 문파원들은 현수를 뒤로하고 자리를 떠나갔다. 현수는 그런 그녀들에게 손을 쓰지 않았다.

곱게 보내 주는 현수를 보고 건이 고개를 흔들었다. 베타 시절의 현수로 다시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방각이와의 싸움은 예상하지 못하겠는데."

건의 말에 만사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사귀 역시 건이 느낀 것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예전의 현수라면 그냥 저렇게 보내 주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뒤에 들려오는 현수의 말을 듣고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기다려, 가서 뿌리 뽑고 올게."

현수는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달아나는 여인천하의 문파원들의 뒤를 쫓았다.

"확실히 현수가 이길 수 있겠다."

"독한 놈이야. 상대가 여자인데도 어떻게 저렇게 매정할 수가 있냐."

두 사람은 사라져 가는 현수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들 역시 결과가 궁금했는지 현수가 사라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숙성의 난주에 자리 잡고 있는 여인천하라는 문파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현수는 문파의 현판과 문을 부숴 버리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난리를 치고 있었다.

"어딜!"

찔러 오는 검을 피한 현수는 용천검의 검 자루로 한 여성 유저의 뒷머리를 사정없이 가격해서 기절시켰다. 건과 만사귀는 문파의 지붕 위에서 현수가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신 나게 싸우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동안 현수가 잠잠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만사귀는 싸우고 있는 현수가 이때까지 어떻게 저 성질을 참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기에 그런 거야. 수진 씨를 만나고 조금씩 변했잖아."

건은 현수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구미호에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남들에게 하지 않았다. 대신 수진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랑이라……. 그러고 보면 현수, 저 녀석은 복 받은 거지."

"현수가 어때서?"

만사귀의 말에 건이 물었다.

"생각해 봐라. 성질머리 개떡 같은 놈을 누가 좋아해 주겠냐. 난 아직도 수진 씨가 현수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짚신도 제짝이 있다고 하잖아. 인연이 닿았으니까 그런 거지. 또 현수가 그 인연을 놓치지 않은 것이고. 덕분에 그동안 편히 지냈잖아."

만사귀는 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정말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밑에서는 한창 싸우고 있는데 구경을 하던 두 사람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법 고시는 자신이 있는 거야?"

"해 봐야지. 솔직히 자신은 없는데……. 한 2년 정도 하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넌? 시간 강사라고 해도 어느 정도 준비해야 되는 것 아니야?"

"해야지. 가을 학기부터니까, 슬슬 준비해야지."

"어떻게 변하게 될지 궁금하네."

건의 말에 만사귀는 자신들이 없어지면 천이 어떻게 변할지 생각했다. 훗날 자신들이 다시 복귀할 때쯤이면 이미 다른 유저들과의 차이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을 것이다. 과연 그때도 일마와 일황 그리고 정보통이라는 자신들이 천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절로 고개가 흔들어졌다.

"많이 바뀌어 있겠지. 아마 그때쯤이면 우리는 명암도 내밀지 못할 거야."

건은 만사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복귀를 해도 레벨 업이며 기타 다른 것을 지금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때는 부르주아 백수로서가 아닌 여가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접속하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여기서 뭐 하세요?"

쟁반에 옥 구슬이 굴러 가는 소리가 이런 것일까? 건과 만사귀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인이었다. 두 사람이 본 여자들 중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웠다. 첫 번째가 바로 영취 공주였고 그다음이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였다.

잠시 당황한 두 사람은 내심 놀랐다. 아무리 살기를 느끼지 못했다고 해도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도록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눈앞에 보이는 여성이 고수라는 이야기다.

"보시다시피 싸움 구경 중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 그래요. 그럼, 나도……!"

태연하게 건의 옆에 앉는 그녀는 아래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흥미롭게 보는 듯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굴까요?"

현수를 지켜보며 묻는 그녀였다. 그녀도 현수가 움직이는 현란함에 반한 듯했다.

"사신낭객이라고 하더군요."

건은 남 이야기하듯 말하며 그녀가 누구일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 신비이객 중의 1명인 사신낭객이 바로 저 사람이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만사귀는 의아했다.

-건아, 저 여자 조금 이상한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이곳에 있다면 여인천하라는 문파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두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네. 전 이 여인천하의 문주인 진소려예요."

진소려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조금 황당했다. 자신의 문파원들이 당하고 있는데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문주라니,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상관없어요. 제가 비록 여인천하의 문주를 맡고 있지만 그리 내키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여자가 검을 들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도 싫고요."

조금은 모자라는 듯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었다.

'뭐야! 얼굴만 예쁘지, 생각은 어리잖아.'

만사귀는 진소려라는 여자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래도 문파원들이 당하는데 말리거나, 아니면 저 사내를 물리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상한 생각이 든 나머지, 오히려 만사귀가 그녀에게 싸움을 부추기고 있었다.

"뭐, 싸우다 지치면 그만두겠죠. 제가 나서 봐야 저 사람에게 이기지도 못할 것 같고, 이번 기회에 문파원들에게 하늘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나저나 사신낭객의 무공은 듣던 것과는 천지 차이네요. 움직임이 예술 그 자체예요."

만사귀는 그녀와의 대화를 포기했는지 이내 밑에서 싸우고 있는 현수를 보기 시작했다.

"캭!"

현수의 주위에는 이미 10여 명의 여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현수는 죽이는 것을 주저하는지 그녀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옛날로 돌아오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만사귀의 말에 건은 고개를 저었다. 진소려는 만사귀를 보았다.

"저게 저놈의 특기야. 모두 쓰러트리고 나면 그때부터 가차 없는 징벌이 시작된다."

"저기, 징벌이라는 것이 뭐예요? 그리고 두 분은 사신낭객과 친구 분들이세요?"

현수에게 너무 몰입한 나머지,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진소려가 배운 무공이 바로 공령문의 공공허무진결이었다.

은밀함으로 따지면 살황의 일기장과 쌍벽을 이루는 무공이었다. 다만 공공허무진결은 살황의 일기장이 가지는 파괴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살황의 일기장과 차이 나는 부분이었다.

두 사람은 내심 당황했다.

여인천하 문파의 문주라고 밝힌 이 진소려라는 여인이 너무 태평했기 때문이다.

그때 밑에서 현수가, 쓰러진 여성 유저들을 응징할 것처럼 한쪽에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설마 저것으로?"

진소려는 때리는 시늉을 했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캬악!"

밑에서는 현수가 나뭇가지를 들고 유저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그때 진소려가 내려가서 현수의 앞을 막았다.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요."

"누군가?"

여전히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이곳의 문주예요. 애들이 귀인을 몰라보고 함부로 대한 모양인데, 이제 화를 풀고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어때요?"

현수는 진소려를 보았다. 그러고는 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한쪽으로 던졌다.

위에서 지켜보는 건과 만사귀는 여인천하를 떠나가는 현수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은 왜 현수가 그냥 나왔는지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분명히 너희들과 함께 있는 것은 봤는데 내 앞에 나타날 때까지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 못했어."

현수의 말에 두 사람은 놀란 듯했다.

"뭐야? 그럼, 엄청난 고수란 말이야?"

"아니, 엄청난 고수는 아닌 것 같고, 아마 신법에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확실히는 잘 모르겠어. 어차피 그 정도에서 끝내려고 했으니 그냥 나온 거야."

만사귀와 건은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진소려가 막지 않았다면 비 오는 날 먼지 털 듯 한바탕했을 것 같았다.

"거짓말! 솔직히 말해 봐. 너도 여자를 때리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여자? 아! 난 그 애들을 경험치로 생각했는데……. 그리고 여자를 어떻게 때리냐! 세상에서 가장 몹쓸 놈이 여자 때리는 놈이야. 난 절대 여자 안 때려."

현수의 말에 고개를 젓는 두 사람이었다. 조금 전까지 사정없이 때려 놓고서 남 이야기를 하는 현수의 모습이 오늘따라 왠지 친근해 보였다.

"너, 완전히 베타 시절로 돌아온 것 같구나."

"조금은 그런 것 같다. 최소한 방각에게는 안 질 것 같다."

건은 현수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믿을 수 있었다. 현수는 최소한 방각이에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여인천하라는 문파를 쑥밭으로 만들었으니 환희영생교를 상대할 문파가 없어졌잖아. 들어 보니 남자들은 모두 입 벌리고 침 흘린다고 하던데."

"일단 넌 제마수혼가 하는 거나 잘 찾아봐. 부수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말이야."

건은 현수를 가리키며 만사귀에게 말했다. 만사귀는 현수가 보여 준 행동이라면 충분히 음양환희교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탁이 하나 있다."

"……!"

"이곳에서 기다려 줄래?"

건과 만사귀는 현수가 무슨 의도에서 한 말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할게. 행여나 조심해. 너 죽으면 우리는 그날로 쫄딱 망하는 거니까."

만사귀가 현수의 긴장감을 풀어 주기 위해 농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듣는 현수의 얼굴에는 좀처럼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건과 만사귀는 현수의 부탁으로 방각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을 포기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현수가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지켜본다는 부담감이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두 사람은 감숙의 난주로 다시 돌아갔다.

현수는 월아천에서 방각을 기다렸다.

저벅저벅!

방각이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현수는 그런 방각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역시 방각은 혁무기와 달리 음흉한 구석이 없는, 남자다운 그런 사내였다.

"그대가 호면객인가?"

다가서서 현수에게 물어 오는 방각은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손에 든 술병을 현수에게 던졌다. 현수는 술병을 받아 들자,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건이냐, 현수냐? 혁무기와 통화했다. 혁무기는 너를 건이라고 하던데 솔직히 난 널 현수라고 생각한다."

현수는 방각의 말을 듣고는 쓰고 있던 호면을 벗었다.

"역시……!"

이미 짐작했다는 듯 방각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랬군. 우리가 애들에게 접촉해서 보복에 나선 거야?"

방각은 결국 호면객은 건과 현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혁무기와 자신에게 도전장을 보낸 이유가 예전의 애들을 빼 가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현수에게는 그것 외에도 또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자신과 건 그리고 만사귀가 빠진 천연회를 그냥 두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구미호의 무공이 결코 10대 무공 중 가장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의무가 있었다.

분명 구미호는 자신의 무공이 결코 10대 무공 중에서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길 원해 뇌전검류의 두 초식인 뇌전탄검과 뇌전파천황을 현수에게 전해 주었으니까…….

"그건 애들의 마음이니 나와는 상관이 없지. 난 10대 무공을 모두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난 건이랑도 싸워야 한다. 그러니 애들을 빼 가려고 한 것과는 상관이 없다."

방각은 현수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했다. 만약 보복 차원에서 나섰다고 하면 천마회와 천연회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10대 무공이라……. 좋군. 말을 들어 보니 한 번쯤은 겨뤄 본 것 같군."

"그래, 금황신공과 패왕신권과 싸워 봤다. 그리고 검황의 무공은 눈으로 보았고 천마의 무공은 이미 내가 베타 시절에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난 살황의 전진을 이었어."

"그렇겠지. 일마니, 당연히 천마의 무공을 알겠지. 하지만 베타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너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된다. 현수! 도전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나, 천마의 후예인 방각이 살황의 후예인 현수에게 한 수의 가르침을 청합니다."

현수는 방각이 멋진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무인이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황묵혈소와 용천검을 빼 들었다. 방각은 한 자루의 도를 현수에게 겨누었다.

"천마신도?"

"당연하지. 조심해라. 어떻게 생각해 보면 베타 시절 사부에게 도전하는 제자니……. 그리고 오늘로써 현수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를 벗을 것이다. 천마군림 연환각!"

곧바로 공격해 오는 방각이었다. 마치 곡예를 넘듯 앞으로 회전하여 오른발을 허공에서 찍어 오며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좋구나!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현수는 빠르게 보법을 밟아 가며, 방각이 찍어 오는 다리 공격을 좌우로 움직이며 피했다. 방각의 발이 찍힌 월아천 주위의 바닥에 금이 가서 움푹 파여 들어갔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는 방각임을 알 수 있었다.

"피하는 것만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파천일도!"

방각은 찍어 오는 연환공격을 순간 멈추고 그 힘을 얻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현수를 향해 일도를 내리그었다.

천마신공!

야가 천에서 최강이라 말을 하기에 추호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강맹했다.

"피할 생각은 없다. 맞받아친다. 호심발도술!"

슈슈슈슈!

현수의 검기는 방각의 도기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현수의 사방을 조여 오던 방각의 도기는 현수의 검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월아천의 잔잔한 수면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내력은 주위에까지 서서히 영향을 미쳤다. 현수는 새삼 방각의 내력에 놀라고 있었다. 유저들 중에서 자신보다 내력이 높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방각은 자신과 비슷한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 문파의 수장이니 마음만 먹으면 영약은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는 방각이었다.

"고작, 일마 이현수의 이름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냐."

현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방각은 충분히 자신에게 소리칠 자격이 있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현수가 한 발 뒤로 밀렸던 것이다.

방각은 처음부터 될 수 있으면 현수와 떨어져서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붙으면 무공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붙을수록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거리를 벌리고 무공으로 승부를 낼 생각이었다. 이와 반대로 현수는 계속해서 방각에게 붙으려고 노력했다.

"운중비록, 운중광속신형보!"

쏜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현수의 신형을 보고 방각은 주먹을 쥐고는 앞으로 강하게 뻗었다.

"천마군림 격공파쇄권!"

허공을 격해서 상대를 공격하는 격공장의 일종으로 천마가 남긴 무공 중에는 권강을 뿌릴 수 있는 무공이 바로 천마군림 격공파쇄권이었다.

달려가는 현수는 순간 두 발을 교차해서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달려가는 속도가 있었기에 이내 방각의 머리 위를 돌아 방각의 뒤로 떨어져 내리며 몸을 돌려 용천검을 휘둘렀다.

"뇌전류!"

순간 빛과 함께 용천검에서 강력한 검기가 방각의 허리를 자를 듯 쏘아져 나아갔다 .

"어림없다. 천마호신갑!"

콰아아앙!

"윽!"

현수는 천마호신갑의 반탄지기에 뒤로 여섯 걸음이나 물러섰다. 현수에 비해 몸으로 뇌전류를 막은 방각은 옷자락이 베이는 정도뿐이었다.

"여전하구나. 순간 판단 능력은……!"

"대단해, 베타 시절 내가 사용했던 천마의 무공과는 전혀 다르다. 역시 천마의 무공이 10대 무공 중의 으뜸인 것 같다. 하지만 난 살황이야, 방각! 지금부터 나 살황 이현수가 살수비기를 보여 주마."

현수는 순간 모습을 감추었다. 비록 현수의 모습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지만 방각은 자신 있었다. 이미 현수와 한 번의 격돌로 자신감을 회복한 그였다. 그리고 천마가 살수 나부랭이에게 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팟팟팟!

순간 모래 바람이 일어나며 방각의 시야를 가렸다. 땅이 갈라지며 한 자루의 검이 땅에서 쏟아 올라 방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면 보이게 하면 된다. 천마군림각!"

강하게 땅을 박차는 방각이었다.

순간 땅이 갈라지면서 일어나, 다가오는 검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콰아앙!

방각의 앞에 방패가 되어 주던 땅이 갈라지며 현수가 검과 한 몸이 되어 방각의 심장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방각은 거의 수평이 될 정도까지 허리를 뒤로 젖혀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천마신도를 바닥에 내려쳐 반탄력을 얻어 뒤로 쏘아져 가는 현수의 위로 이동했다. 이어 천마신도를 현수의 등을 향해 찍어 내렸다.

퍼억!

방각은 순간 놀라 주위를 살폈다. 자신이 등을 찍는 현수는 환영이었다.

슈슈슈슛!

강한 검기가 사방에서 몰아쳐 방각을 압박해 들어갔다.

"어림없다. 천마군림 선풍각!"

마치 소용돌이가 땅에서 일어나 하늘로 솟아 올라가듯 방각의 신형이 회전하면서 사방에서 몰아쳐 오는 검기를 발로 분쇄해 버렸다.

현수가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놓치기 않고 허공에 떠 있는 방각을 향해 솟구쳐 올라 검으로 찔러 갔다.

방각은 허공에서 회전하며 현수의 검을 쳐 내는 동시에 다시 돌아 발로 현수의 가슴을 차 버렸다.

천마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절묘한 공수였다.

땅으로 내려온 방각은 현수에게 소리쳤다.

"그따위 장난으로 날 시험하지 마라. 예전의 너의 모습을 보여라, 이현수!"

방각이 현수라는 이름에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면 현수는 천마의 이름에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강해졌구나. 역시 가르친 보람이 있어. 하지만…… 뇌전탄검!"

기습을 하는 현수의 공격에 방각은 흠칫했다. 일반적으로 경험해 오던 그런 류의 공력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말 그대로 10대 무공 중의 하나인 무공이라는 것을 느꼈다.

강한 뇌기를 머금고 방각을 향해 뻗어 나가는 용천검이었다.

찌이이이지! 지이잉!

"천마천강수!"

방각은 뻗어 오는 용천검을 박수를 치듯 잡아 세웠다. 용천검의 뇌기는 천마천강수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용천검은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하고 힘을 잃고 있었다.

현수는 그런 방각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환영무적!"

순간 환사의 수법이 방각을 뒤엎었다.

용천검에 심력을 소비한 방각은 생각지도 못한 환영에 어리둥절했다. 그다음, 귀에 울리는 현수의 외침을 들었다.

"뇌전파천황!"

츄츄츄츄츄!

현수의 손에서 살황묵혈소가 떠나 허공을 가로지르며 방각을 향했다.

방각은 순간 당황하긴 했지만 가진 내력으로 쉽게 환영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방각의 행동 또한 빨랐다.

방각은 두 손으로 잡고 있는 용천검을, 자신에게 날아오는 살황묵혈소를 향해 놓았다. 용천검은 순간 살황묵혈소를 향해 뻗어 나갔고, 방각은 천마신도를 들어 두 무구를 향해 일도를 그었다.

"천마혼혼진천도!"

쇄아아아앙!

강력한 도강을 실은 용천검이 날아오는 살황묵혈소를 강타했다. 현수는 순간적인 방각의 판단에 감탄을 하며 방각에게 달라붙었다.

"현천파열권!"

"윽!"

현수의 주먹이 방각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방각은 인상을 쓰며 현수를 향해 발차기를 시도했다. 하나, 현수는 한 팔로 방각의 발을 감아올리고는 발을 사용해 남아 있는 방각의 한 발을 걷어 올렸다.

쿠웅!

방각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렸다. 현수는 팔꿈치를 이용해 넘어진 방각의 얼굴을 향해 내려찍었다. 방각은 두 팔을 들어 올려 현수의 공격을 방어하는 동시에 두 발로 현수를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빠르게 물러나려는 현수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아직까지 박투술에는 현수가 한 수 위였다.

"파천일도!"

"운중비록, 운중무영보!"

현수는 방각의 도를 피하는 동시에 용천검과 살황묵혈소가 떨어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 후 양손에 두 검을 쥐고는 있는 내력을 다해 방각을 공격했다.

"뇌전탄검! 환영 무적! 뇌전파천황!"

연속으로 자신의 비기를 모두 선보인 현수는 다시 방각을 향해 빠르게 달려 들어갔다.

"운중비록, 운중광속신형보!"

방각은 순간 갈등에 사로잡혔다. 현수의 공격을 막자니 현수가 붙을 것 같고 뒤로 물러서자니 현수의 공격이 심상치 않았다.

방각은 결정을 했는지 주먹으로 엑스 자를 교차하고는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놓았다.

"천마호신갑!"

쿠우우아아앙!

현수의 공격을 막아 내고는 가슴에 모아 둔 두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천마군림 격공파쇄권!"

달려가는 현수를 향해 앞으로 뻗었다.

퍼억!

현수는 방각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았는지 몸이 허공에 떠서 날아갔다.

방각은 순간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예감하고 미소를 보였다. 그때 현수의 손에 용천검이 돌아오고 그의 신형이 뒤집히면서 용천검이 방각을 향해 검을 쏘아 보내었다.

"뇌전탄검!"

미리 승리를 자축한 방각이 방심한 탓도 있긴 했지만 현수의 공격은 예상 밖이었다.

"커억!"

현수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 현수의 공격이 방각의 왼쪽 가슴을 뚫었다.

쿠엉!

공중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현수는 고개를 들어 방각을 보았다. 방각이 이번 공격도 막았으면 자신의 패배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방각은 자신의 가슴에 꽂힌 용천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했다. 무공으로는 역시 천마의 무공이 최고다."

현수는 천마의 무공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하지만 방각은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진 거냐?"

"당연히……. 내가 분명 너에게 말했다. 상대가 쓰러져 사라질 때까지 미리 승리를 짐작하지 말라고……. 넌 또 한 번 너의 자만으로 인해 나에게 패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현수는 방각의 가슴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아냈다. 방각의 피가 솟아 나와 월아천을 물들였다.

"역시……!"

방각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현수는 많이 지쳤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현수는 방각이 익힌 천마의 무공이라는 중압감을 벗어던질 수 있었지만 방각은 현수라는 이름이 주는 중압감을 벗어 버리지 못했다. 방각은 앞으로도 현수에게 이기지 못할 것이다.

건과 만사귀가 기다리는 난주로 돌아가는 현수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는 악마록을 익힌 1황자만 남았다. 물론 다른 10대 무공들은 아직 남아 있다. 10대 무공 중의 최강이라는 천마신공과 악마록. 하지만 현수의 머릿속에 이미 천마신공은 지워져 버렸고 악마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현수는 감숙성의 난주에서 건과 만사귀를 만났다. 다행히 방각을 이길 수 있었다는 말과 함께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고 접속을 종료했다.

* * *

현수는 룸넷의 인테리어 공사비의 선금 30%를 건의 아버지에게 건네주기 위해 통장의 잔고를 확인했다.

"야, 인테리어 공사비의 선금을 건의 아버지에게 드려야 하는데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있어? 부족하면 은행 대출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현수 님의 통장에는 총 8천6백4십2만 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인테리어비가 2억2천만 원이 나왔습니다. 일단 30% 선입금을 내시고 현수 님께서 빨리 천을 마무리 지으시면 대출은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 야! 그런데 공사 기간은 얼마나 된다고 했지?"

생각보다 공사 기간이 오래 되어 현수는 인상을 썼다.

-현수 님의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이유가 백화점의 이미지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백화점의 규정에 맞는 소방 설비 그리고 BS 그룹에서 지원되는 장비들이 따로 있어 공사 기간이 늘어난 것입니다.

"그래, 야! 미안해, 내가 신경을 못 쓰는 동안 네가 신경 좀 써 주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수 님의 동생이 저입니다. 그러니 염려 놓으십시오.

"고마워! 내가 죽으면 그 룸넷을 네 앞으로 해 놓을게. 넌 가족이니."

현수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디 가십니까?

"응, 수진 씨 부모님과 저녁을 먹으려고 약속해 놓았어. 필요한 것 있어?"

-없습니다. 이왕이면 즐겁게 보내시다 늦게 들어오십시오.

야의 말에 조금 의아했는지 현수가 야에게 물었다.

"왜?"

-아래층의 인순이가 조금 내성적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수진 씨와 부모님이 계셔서 그런가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인순이는 얼마 전에 수진이의 집에 설치된 인공지능 컴퓨터의 이름이었다.

"야, 너 괜히 순진한 컴퓨터 물들이지 마.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

현수는 솔직히 인순이도 야처럼 될까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뭐! 처음부터 물이 들겠습니까? 물이 들 때쯤이면 아마 아래층의 수진 님과 부모님께서도 적응을 하실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킁! 휴……. 야, 다녀올게. 건의 아버님에게 인테리어 공사비 선금 주는 거 잊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모처럼 수진의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간 곳은 생선회 뷔페였다. 수진 씨의 부모님이 생선회를 좋아하신다는 말을 기억하고는 조금 비싸긴 하지만 그리로 모셨다.

"와! 오빠, 이런 곳도 알고 있었어요?"

수진이 뷔페에 들어서자 입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현수는 웃었다. 이상하게도 요즘은 수진의 모든 것이 좋게만 보였다.

차려진 음식을 접시에 조금씩 담는 현수와 달리, 수진은 생선 초밥만 가득 담아 왔다. 현수는 그런 수진을 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아, 이런 곳에 처음 오냐. 촌스럽게……."

수진의 어머니는 수진을 보고 면박을 주었지만 수진은 꿋꿋하게 자신의 접시 위에 있는 초밥을 먹었다.

"난 뷔페 가면 초밥만 먹어."

그런 수진이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다. 현수는 자신의 그릇에 놓인 랍스타 스틱을 수진의 접시 한쪽에 올려놓았다.

"여기는 그런 뷔페와 다른 곳이라 상관없어. 모두 그날 만든 음식이고 남는 음식은 바로 버리기 때문에 전부 신선하고 맛있어. 그러니 초밥만 먹지 말고 이것도 좀 먹어 봐."

초밥을 먹던 수진은 현수를 보았다. 예전 백화점의 라운지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수진의 부모님은 두 사람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 이거 맛있네. 오빠, 이거 어디서 가지고 온 거야?"

수진은 자신의 그릇에 남아 있는 초밥을 현수와 부모님의 접시에 몇 개씩 올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날 태세였다.

"이것아, 넌 예의도 모르냐!"

수진의 어머니는 호들갑을 떠는 수진을 나무랐다.

"엄마는……. 그래도 이거 굉장히 맛있어. 엄마도 한 번 먹어 봐."

수진은 어머니에게 현수가 준 랍스타 스틱을 조금 떼어 주었다.

"자네가 이해하게. 딸아이 하나라 버릇없이 키웠네."

수진의 아버지가 현수에게 조금은 미안한 듯 말했다.

"아닙니다. 전 지금 수진의 모습이 좋습니다."

어느새 수진이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뭔가, 나에게 할 말이……."

"사실, 저의 어머니께서 몸이 불편하십니다. 그리고 연세도 많이 드셨고 해서…….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내년에 결혼식을 올렸으면 합니다."

현수는 수진에게 2년이라고 말했지만 어머니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말없이 그냥 내려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빨리 결혼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석 달, 넉 달이면 룸넷을 오픈할 수 있다. 처음에는 경험이 없어 힘들겠지만 그래도 수진이와 함께 룸넷을 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간이 자신이 접속할 때 수진이 룸넷을 보면, 게임으로도 어느 정도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진의 아버지는 현수의 말에 한 마디 이유도 물어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나.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었네. 그래 가게를 하나 내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도와줄 일은 없는가?"

수진의 아버지가 더 기분 좋게 말을 꺼내자 현수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없습니다. 그냥 지켜만 봐 주시면 됩니다."

그때, 노년의 신사가 다가왔다. 바로 BS 그룹의 회장인 최석호였다.

"이게 누구야, 나의 그리운 친구 아닌가?"

수진의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현수 역시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현수 군이 아닌가?"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회장님!"

최석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살아 있는 눈빛이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다.

"나야, 호의호식하면서 지내지. 그나저나 이곳까지 어쩐 일인가? 이 친구가 여길 올 리는 없고. 현수, 자네가 모시고 온 건가?"

"아니, 이 친구야! 내가 어때서 이런 곳에 못 오나. 서서 말하지 말고 앉아."

최석호는 손짓으로 자신과 함께 온 사람을 불렀다. 그러고는 무엇이라 말해서 돌려보내고 수진의 아버지 곁에 앉았다. 수진이와 수진의 어머니는 접시에 요리를 가득 담아 와, 최석호를 보고 멋쩍은 듯 웃으며 인사했다.

"제수씨는 여전합니다. 수진이도 어머니를 닮았고……."

접시에 담아 온 음식을 살며시 테이블 위에 놓고는 최석호를 한번 노려보고 앉는 수진의 어머니였다. 모두가 함께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하, 그러고 보니 현수가 이 친구의 사위가 된 것처럼 보이는군."

최석호의 말에 수진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이 사람아, 사위가 된 것처럼이 아니라 이미 사위일세. 내년 봄에 두 사람, 결혼하기로 이미 약속했다네."

최석호는 수진의 아버지가 한 말을 듣고 더욱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하하, 그래? 그럼 주례는? 설마 구한 것은 아니겠지? 없으면 내가 하면 안 되겠나? 이래 봬도 주례 경력이 무려 4년이나 된다네."

주례를 서 주겠다고 선뜻 말하는 최석호였다. 그러고 보면 주례 선생님으로 최석호만 한 사람도 현수 주위에 없을 것 같았다. 현수는 건의 아버지에게 부탁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최석호가 선뜻 말을 꺼내자 고마웠다.

그렇다고 수진의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장자가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혹시 술 먹고 주례를 서는 것은 아니겠지."

"이 사람은, 세상에 주례 보는 사람이 어떻게 술을 먹고 보는가? 원한다면 내 기꺼이 술을 먹고 주례 설 용의도 있네."

현수는 한 번에 일이 풀리자 앞으로 룸넷도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수진이 평소와 달리 얌전히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낯설어 보였지만, 그래도 현수는 오늘 참으로 즐겁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 현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다름 아닌 수빈이었다. 최석호는 수빈과 이곳에서 저녁을 함께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서 오너라. 이쪽은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구고 이분은 부인 그리고 여긴 딸, 이쪽은 사위!"

"안녕하세요."

수진은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는 최석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수진의 옆 자리였다.

"수빈아, 오늘은 즐거우니 내일 따로 이야기하자. 오늘은 이 아버지가 친구를 만났으니 한잔 거하게 해야겠다."

"네,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수빈은 현수를 보자, 천에 관해서 물어볼 것이 생겼다. 그렇다고 수진이 있는 자리에서 현수를 부를 수는 없어 잠시 생각했다. 이내 수빈은 최석호에게 말했다.

"아버지, 젊은 사람들은 저쪽에 가서 따로 이야기 나눌게요."

현수는 수빈을 보았다. 그리고 최석호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최석호는 그런 현수의 바람을 거절하고는 수진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우리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데 불편하겠구먼. 이보게, 젊은이들은 보내고 옛날이야기에 빠져 보는 것이 어떤가?"

수진의 어머니가 옆구리를 꼬집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는 수진의 아버지였다.

수빈은 모두의 음식 값을 계산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현수는, 그런 수빈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수진을 보았다.

"수진이는 어떻게 할 거야? 그냥 집에 돌아갈 거야?"

"아니, 전 괜찮아요. 아저씨는 알겠는데……. 집에 자주 오시거든요. 딸은 처음 보는데……."

"BS 그룹의 가상현실 천 담당자가 바로 저 여자야. 이름은 수빈이지."

수진은 현수의 대답에 놀라 눈을 끄게 떴다. 남루한 옷차림에 가끔 집에 오는 아버지의 친구 분이 BS 그룹의 회장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 현수 역시 수진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빠는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눈이 옆으로 가늘어지는 수진을 보고, 현수는 수빈이 기다린다며 일단 가자고 말하고는 수진을 데리고 수빈에게 갔다.

세 사람이 간 곳은 어느 재즈 바였다.

간단하게 술을 시켜서 먹는 세 사람이었다. 다행히 수빈이 현수를 상대로 먼저 물어 오는 것이 아니라, 수진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서로의 어색함을 없애려고 했다. 덕분에 현수는 술만 한 잔, 두 잔 혼자서 마시고 있었다.

"오빠!"

"어, 왜?"

"진짜예요? 언니에게 아흔아홉 번을 이겼다는 것이?"

그새 친해졌는지 수진이 수빈을 언니라고 불렀다. 현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여자인데 봐주는 것도 없이……. 오빠, 다시 봐야 겠는데……."

죄인이 아닌 죄인이 되어 버린 현수는 술잔을 들이켰다. 수빈은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상현실 안에서보다 지금의 모습이 더욱 다정하게 보였다. 셈이 날 정도였다.

"현수 씨가, 게임에서는 인정사정없어. 그래서 베타 시절에 유명해질 수 있었던 거야."

"네, 오빠 어머님께서도 게임에서 내가 잃거나 아니면 모두 따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어요. 오빠가 그렇게 했을 거예요. 오빠는 어머님을 많이 닮으셨거든요."

수진은 현수 어머니가 예전에 올라오셔서 10원짜리 고스톱을 치며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에 끼워진 옥 반지를 오른손으로 만져 보았다.

"현수 씨는 지금 천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수의 입장에서 한마디만 해 주세요. 사실 여러 가지 일들이 한 번에 터져 골치가 아프거든요."

수빈이 말을 돌려 했지만 현수는 자신이 일으킨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들렸다.

"글쎄요, 그냥 두면 흘러가지 않을까요? 때로는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그냥 지켜만 볼 때도 있어야 되거든요."

수빈은 현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마음 편히 있을 형편이 아니다. 불과 며칠 전에 사사혈천의 이벤트가 끝이 나 한숨을 돌렸나 싶었는데 서장에서 1황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의 첫 번째가 지금 감숙성을 빠르게 잠식해 들어가는 환희영생교였다.

게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천지회의 혁무기가 호면객에게 깨졌다는 사실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호면객의 현상금이 45만 냥으로 뛰더니, 오늘 방각 역시 호면객에게 깨졌다는 말을 천에게 들었다.

수빈은 더 이상 호면객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최석호를 만나 누군지 알아보고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다. 천이 최석호는 예전의 인공지능 컴퓨터의 소재를 알고 있다고 수빈에게 말한 적이 있기에 최소한 자신의 아버지인 최석호는 호면객이 누구인지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 씨가 만약 베타 시절의 일마였다면 호면객을 잡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예요."

현수 역시 혁무기와 방각의 일로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수진은 호면객이 현수라는 것을 알고 있어, 현수가 또 천에서 무슨 사고를 쳤는지 궁금했다.

"언니, 호면객이 무슨 사고를 쳤어요?"

"응! 천지회의 혁무기랑 천마회의 방각을 깨 버렸어. 지금 명실상부한 천의 제일인자가 바로 호면객이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혁무기랑 방각이 깨지면 안 되거든……. 그래서 골치가 아파."

수진은 수빈의 말을 듣고 현수를 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실수를 알고 다시 수빈을 보았다. 수빈 역시 수진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수진의 말을 듣고 의아함을 지웠다.

"오빠, 그럼 오빠가 호면객을 잡아 주면 되겠네. 오빠는 황궁에서 한자리하잖아."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호면객은 나 혼자서 잡진 못해. 그리고 혁무기와 방각이 진 상황에서 애들이 함께한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어. 방각이나 혁무기는 10대 무공 중 한 가지씩을 익히고 있었기에 그들을 이긴 호면객 역시 10대 무공을 익혔다고 봐야지. 특히나 이때까지 호면객의 행동으로 봤을 때, 10대 무공 중 살황의 무공을 익힌 것 같아. 그렇다면 은신과 암살에 있어 그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내가 덤벼도 그를 찾기 전에 내가 먼저 당할 거야."

이 정도면 자화자찬도 수준급이었다. 수진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수빈 씨, 그냥 두세요. 그럼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거예요. 만약에 운영진에서 개입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거예요."

수빈은 현수가 사사혈천의 이벤트 때처럼 끼어들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게 할 거예요. 그래도 조금은 답답하니 이것이 문제예요."

더 이상 현수는 말이 없었다. 수진은 자신이 호면객을 잡아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수빈을 위로했다.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 다른 아닌 호면객이었기에…….

결국 수빈은 현수에게 그냥 흘러가게 두라는 말만 들었을 뿐, 실직적인 소득 없이 이들과 헤어졌다. 수진은 현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수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지금 건이 만사귀하고 난주에 있어. 환희영생교에 만사귀의 중요한 퀘스트가 있어. 그것을 함께하고 난 후에는 서장으로 갈 생각이야. 건과 내가 공동으로 받은 퀘스트가 있는데 만사귀가 도와주기로 했거든……. 그리고 그 퀘스트가 끝나면 룸넷을 해야지."

수진은 현수의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결국 현수가 모든 일의 주범이었고 또 해결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오빠가, 수빈 언니에게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거구나. 그나저나 수빈 언니의 말을 듣는 동안 나 웃음 참느라고 죽을 뻔했어. 앞에 호면객을 두고 호면객을 욕하는 언니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고……."

수진은 현수의 팔을 당겨서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려놓고는 현수의 옆에 바짝 붙었다.

"어……. 추워라. 가을이라 그런지 이제 바람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

현수는 수진을 보며 대답 대신 수진의 어깨 위에 놓인 팔에 힘을 주어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수진은 그런 현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직 수진의 부모님이 오시지 않았는지 불이 꺼져 있었다. 수진은 1층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수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야, 나 왔다."

수진은 야를 부르고 야의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넌, 이렇게 재미있는데…… 우리 인순이는 왜 저리 딱딱하지?"

-걱정 마십시오, 수진 님. 제가 지금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 하지 않습니까?

"호호! 그래그래. 야, 너도 우리 인순이랑 결혼해라."

수진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야와 대화하며 웃고 있었다. 현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밖에서 수진의 부모님께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는지 수진은 간다는 말을 남기고는 내려가 버렸다.

-많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고마워."

현수 역시 야에게 그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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