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포즈
현수는 다음 날 접속을 해서 령을 기다렸다. 영취 공주가 또 한 번 백성의 고통을 운운하면서 사사혈천의 무리나 독황문의 무리들을 공격하자고 고집을 피우면 아무리 현수가 당가에 도움을 준 은인이라고 해도 현수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하지만 영취 공주를 산에게 맡기고 가기에는 조금은 불안했다.
현수는 당가와 우의를 다지기 위해 왔지, 당가를 떠나보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기에 령이 황궁에서 돌아오면 공주를 맡기고 하남성 백마사에 있는 구미호의 레어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현수는 령이 오기 전까지 산에게 혹독한 수련을 시켰다. 무엇보다도 지금 천밀위사들이 다 죽고 산이 혼자 공주의 신변을 지키려면 산이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크억!"
"천하에 천밀위사가……! 황족의 수호 무사가… 고작 그것도 막아 내지 못한단 말인가!"
현수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은 일어나 현수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수빈은 그런 현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산은 현수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구나.'
천밀위 중에서 그래도 강한 축에 속하는 산이었다. 지난 2황자의 궁 사건으로 혹독하게 무공 수련에만 전념해 온 산이었다. 그런데도 산은 현수의 옷깃조차 건들지 못하고 있었다.
수빈은 과연 현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과연 그가 나선다면 사사혈천의 이벤트를 끝낼 수 있을까.
"헉,헉!"
"고작 이 정도 했는데 숨을 그리 거칠게 쉬는 것이냐, 산! 내가 너에게 무엇이라 했느냐?"
"군께서는 저에게 강해지라 하셨습니다."
"그렇다. 수신위는 천하의 그 누구보다 강해야 한다. 그래야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넌 어떠냐?"
산은 현수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2황자의 궁에서도, 지금 영취 공주를 따라 나와서도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분을 자신의 실력으로는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검을 들어라. 이를 악물어라. 한 번 더… 한 번 더 검을 휘두를 때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산은 현수의 말을 듣고 검을 쥐고 있는 손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타앗!"
산의 공격으로 다시 시작되는 두 사람의 대결은 또 그렇게 흘러갔다.
지켜보는 수빈의 눈은 현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떻게 검을 쓰고 피하는지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아!"
수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현수의 검이 어느새 산의 목에 걸려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다음에는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여 주길 바란다, 산!"
현수는 검을 거두고 자리를 떠났다. 현수가 떠나자 수빈 역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한 번의 소동으로 인해 수빈은 당분간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은 독황문에 쳐들어가 모든 것을 엎어 버리고 싶었다.
수빈은 자신이 최음제에 당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하니 그런 비겁한 방법을 사용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대비하지 않았던 것이 수빈의 행동에 제약을 주었다.
당가에서조차 수빈의 행동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었기에 당가의 가주는 당문 십이수로 하여금 공주의 주변을 지키게 했고 그로 인해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하는 수빈은 답답할 지경이었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사사혈천의 암계에 속아 전멸 위기에 놓였던 남궁세가의 정예들이 암중인 일행의 도움으로 모두 구출됐다는 소식이 그나마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다.
수빈은 그 암중인들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다. 천연장을 떠나올 때 분명 건을 비롯한 천연회의 사람들이 친구를 구하기 떠났다는 말을 들은바 있었다.
"현수를 끌어들여야 빨리 이벤트를 끝낼 수 있다."
수빈은 이벤트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지금도 연일 가상현실 천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언제 이벤트가 끝날지 물어 오는 글들로 도배되고 있었다.
수빈은 어떻게 하면 현수를 비롯한 천연회를 이벤트에 끌어들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 방법들을 제한하는 것의 중심에는 항상 용천검이 있었다.
용천검으로 인해 현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없었다. 현수가 사소한 것은 다 들어주어도 이벤트에 관련된 것은 용천검을 앞세워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가를 뛰쳐나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분명 현수는 자신에게 경고를 했다. 만약 그 경고를 무시하면 필시 현수는 황제를 제외한 다른 황족들 모두를 천금뇌옥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휴!"
생각만 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아 수빈은 일단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척하고 접속을 해제한 후, 천을 찾았다.
천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천! 현수를 끌어들여야 되는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이벤트에 관련된 이야기는 항상 용천검을 앞세워 거부하고 있어 쉽지가 않아요. 저에게 조언해 주세요."
수빈은 천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부르주아 백수 중의 1명입니다. 천에서 그의 목적은 돈입니다. 상금을 걸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을 해 보았지만 관심이 없어요. 문제는 그가 이번 사사혈천의 이벤트에 참가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에요."
수빈은 현수를 이벤트에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말들을 했다. 황궁무고를 개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황궁약고의 영약들 그리고 벼슬과 상금 등등…….
하지만 그것들로 현수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문제는 수빈의 공주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안전을 위해서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최고라 말하며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수빈은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발목이 잡힐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더욱 애가 타는 수빈이었다.
-그럼 일단 현수 님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용해 현수 님을 부추겨야 할 것입니다.
"관심을 끌 만한 것이라……."
듣고 있는 형욱이 불쑥 한마디 했다.
"혹시 현수, 그 친구에게 여자 친구가 없습니까? 한번 물어보세요. 혹시 압니까? 여자 친구가 위험에 처하면 움직일지……."
수빈은 형욱을 보았다.
'여자 친구라…….'
수빈은 당가의 명월을 떠올렸다.
"음! 혹시 독황문에서 빠져나간 NPC들과 사사혈천의 무사들이 있는 곳 중에 대치하고 있는 곳이 있나요? 천!"
-감숙성을 중심으로 그와 경계가 되는 지역이 지금 대치 상태입니다.
"그래요? 그럼 독황문에서 독을 풀어 당가의 손길이 필요하게 만들 수 있나요?"
당가가 바빠지면 결국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수빈이었다. 당가의 명월과 현수는 자신이 보기에 상당히 친해 보였기 때문에 수빈은 천에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려 주고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죄송합니다. 일단 NPC들의 행동에는 저 역시 참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수빈 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전투는 흘러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피해를 입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그런 보이지 않는 전투가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전 다시 접속을 해야겠어요. 너무 자리를 오래 비워 두면 그들이 의심할 테니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수빈은 형욱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천에 접속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한편!
현수는 공주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주의 등장으로 현수는 더 이상 살행을 할 수 없었고 또 그녀를 지켜야 된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용천검을 앞세워 궁으로 돌려보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어차피 공주 역시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갔다가 또 나오면? 그때 나에게 오지 않고 바로 사사혈천으로 쫓아가면 어떻게 해?"
현수도 용천검을 이용해 수빈을 황궁으로 돌려보낼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현수는 영취 공주를 황궁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어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현수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번 이벤트에 뛰어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알잖아, 이번 이벤트의 단점을……. 결국 잡는 놈만 이득인 이벤트인데 벌써 나설 필요는 없지. 그리고 나섰다가 죽어 봐! 상품이고 레벨이고 다 날아가잖아."
-그럼 돌려보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현수 님께서 너무 입에만 맞추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야! 그러지 말고 좀 부탁하자. 아직 죽일 놈들이 수두룩하게 남았는데 지금 이 모양이니……. 야! 제발 부탁이다. 어떤 소리라도 다 들을 테니 답 좀 구해 주라."
현수는 야에게 부탁했다. 아직은 사사혈천과 무림이 더 싸워야 했다.
-그럼, 공주를 이용하십시오. 먼저 공주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간 후, 현수 님께서 움직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공주가 사사혈천이나 독황문과의 교전 지역으로 넘어가게 되면 자연히 유저들이나 NPC들의 시선은 공주에게 쏠릴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혈천과 독황문에서는 공주를 잡기 위해 아마 노력을 할 것입니다. 현수 님께서는 무림인들의 사기를 올려 주기 위해 공주로 하여금 포상금을 걸게 만들어 무림인들이 공주를 지키게 하면 자연히 현수 님께서는 공주의 시선에서 잠깐은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잠깐의 시간을 이용해 현수 님의 일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야의 말대로 현수는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보았다. 산과 령을 이용하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렇게 이용을 한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래, 그건 나도 생각했어. 고마워!"
-운동을 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야는 화제를 돌렸다.
"좋아, 눈도 즐겁고 마음도 즐겁고. 좋아! 조금은 귀찮은 것도 있는데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괜찮아."
-아래층 수진 씨가 싫으시다면 그곳에서 다른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만들어 보십시오.
현수는 야의 말에 그냥 웃었다.
"싫은 건 아니야. 나도 수진이가 좋아. 그런데 야! 우리 이렇게 살자. 엄마 모시고 그냥 이렇게 살자. 내가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할 테니, 야! 우리 그냥 이렇게 살자."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현수 님이 결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주는 커다란 효란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첫째가 아무 탈 없이 잘 성장하는 것이고 둘째가 결혼해서 후손을 잇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어서는 안 되는 것! 현수 님께서는 이 중 벌써 한 가지를 행하고 계십니다. 이제 두 번째 효도를 하실 차례입니다.
현수는 오늘따라 분위기를 잡는 야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때 야라면 결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대답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현수도 결혼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구미호의 복수를 하고 장사를 하면서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때 결혼이라는 것을 해 볼 생각이었다.
"야! 그동안 나도 많이 생각해 봤는데…….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나! 좋다고 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결혼할 거야.
그래, 사람들이 나보고 눈치가 없다고 하지만 나도 알아. 수진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게임으로 돈을 버는 짓은 곧 그만둘 거야. 천에서 한 가지 일만 하고 나서 다른 것을 할 생각이야."
-구미호의 복수입니까?
"그래, 남들은 다 내가 미친놈이고 NPC에 집착을 한다고 말하지만 아가씨는 처음으로 내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분이야. 그 사랑으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 그러니 야! 도와 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의 엄마, 그리고 나의 엄마! 우리 엄마를 위해서 도와주라. 엄마도 내가 그냥 물러서기를 원치는 않을 거야."
현수의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 그러다 눈물은 곧 현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 안의 분위기가 조금은 어색해졌다. 현수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접속을 하려다 그만두고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현수는 혹시나 싶어 수진이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이 수진이 역시 접속을 하지 않고 있었다.
현수는 수진이에게 잠시 밖에 나오란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수진이 나와 현수를 보고 웃었다.
"우와! 오빠가 웬일이야, 나를 먼저 보자고 하고?"
"시간 있어?"
"왜?
"나, 드라이브 좀 시켜 줄래? 괜찮으면 차만 빌려 줘도 되고……!"
"드라이브? 나랑?"
"어! 싫으면 안 해도 상관은 없는데……."
수진은 현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가요, 어디로 갈까요?"
"아무 데나……."
오늘따라 현수가 분위기를 잡는다고 생각한 수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나? 야와 싸운 건가?'
"가요."
수진의 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는 현수를 힐금힐금 훔쳐보는 수진이었다.
수진이 조금 답답했는지 현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요? 그냥 이렇게 계속해서 달려요?"
"저기……. 혹시 시간이 괜찮으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 갈 수 있어?"
현수는 바다가 보고 싶었다. 현수에게 있어 바다는 고향의 느낌을 주는 유일한 곳이었다. 어린 나이에 남해를 떠나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현수는 간혹 힘이 들 때마다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서 위로를 받곤 했다.
'오늘 진짜 이상한 것 같네. 바다라…….'
부우웅!
수진은 말없이 인천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한참을 달려온 곳은 인천 국제 여객 터미널이었다.
"월미도로 갈까요?"
"아니, 거긴 사람들이 많아서……. 이곳이 좋아."
현수는 수진과 함께 터미널의 커피숍으로 올라가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힘들 때면 이렇게 바다를 보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했어."
현수는 무턱대고 말했지만 수진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떨 때는 너무 힘이 들어서 그냥 죽고 싶은 생각을 할 때도 있지. 알고 있지? 우리 엄마가 아프신 것을?"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미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 사실, 난 아버지의 사랑을 몰라. 아니 기억도 안 나."
여전히 바다만 보고 말하는 현수였다.
"하지만 아픈 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나를 위해서 바다에 나가 돈을 버신 엄마를 생각하면 힘들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어."
여전히 수진은 말이 없었다. 오늘은 두 사람의 관계가 반대가 되어 버렸다. 항상 수진이 말을 하고 현수가 들어 주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수진이 듣고 현수가 주로 말했다.
"이제, 엄마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 몸도 많이 편찮으시고 연세도 있으시니 말이야."
"오빠! 지금… 무슨 이야기를……."
"그냥, 답답해서…….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겠는데 마땅히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서. 미안해."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가 어색해서 수진이 무엇이라 말하려고 할 때 다시 현수가 입을 열었다.
"수진이는 왜 나에게 잘해 주는 거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수진은 무엇이라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고마워!"
"아니에요. 왜 잘해 주냐고요? 당연히 이웃이니까요. 그리고……. 아니에요."
수진은 입에서 말만 맴돌 뿐, 끝내 말하지 못했다.
"좋다. 바다는 사람을 속이지 않아. 묵묵히 침묵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니까."
"그런가요?"
수진은 현수에게 물었다.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바다였기에 수진에게는 그 존재감이 그리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수는 또다시 창을 통해 바다를 보았다. 수진은 오늘 현수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조금은 당황스럽고도 놀랐다.
'뜬금없이 바다 타령에, 신세타령, 오늘 무지 이상한데……. 야한테 한번 물어봐야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수진이 역시 바다를 보았다. 낮은 파도가 부두에 부딪쳐 부서져 흩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바다였다.
"가자."
현수는 수진이에게 가자는 말을 하고는 일어났다. 수진은 현수의 뒤를 쫓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빠! 그런데… 있잖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생선회나 조금 사서 들어가요. 엄마, 아빠가 생선회를 무지 좋아하시거든요."
"어? 아! 그래."
그제야 현수는 너무 자신만 생각했다는 것을 느꼈다. 수진이와 함께 수산 시장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을 하며 돌아다녔다.
"젊은 부부! 여기 싱싱한 해물 있어. 한번 보고 가."
젊은 부부란 말에 수진은 현수를 보았다. 그러고는 팔을 당겨 팔짱을 끼고는 현수와 더욱 가깝게 붙었다.
현수 역시 평소와는 달리 팔을 순순히 수진이에게 내주고는 수진을 보고 미소 지었다.
아마 자신의 넋두리를 들어 줬다는 고마움의 표시였을까? 현수는 수진이와 수산 시장을 다니며 회 센터에 도착했다.
조금은 많은 듯한 양의 생선회를 산 후, 다시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수진은 본래의 성격을 찾았는지 차에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현수는 오늘 그런 수진이 참으로 고마워 보였다.
현수는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수진의 말을 들으면 기분이 조금 풀릴까 해서 수진에게 바다로 가자고 부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모아 놓은 아이템들을 모두 경매 사이트에 올려놓았거든요. 얼마나 벌까요?"
현수는 조금 어이없는 말에 수진을 보았다.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것들?"
"그냥, 이것저것 사냥하면서 획득한 거요. 엄마가 통장에 돈이 들어온 것을 보더니 놀라는 거 있죠."
"게임은 즐기는 거야. 그렇게 돈을 보고 게임을 하면 못 써."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말하는 현수였다.
두 사람이 차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오빠, 씻고 내려오세요. 이거 같이 먹어요."
"그래!"
현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수진은 현수의 뒷모습을 보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야! 나, 나왔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어! 바다를 보고 왔어."
-어머님이 생각나셨습니까?
야도 현수가 바다를 보러 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바다를 보러 갔다가 빨리 돌아온 경우였다. 보통 날이 지나서 들어오곤 하는 현수였다.
"어, 이제 괜찮아. 나 씻고 아래층에 가서 밥 먹고 올게. 수진이랑 함께 갔다 왔는데 생선회를 사 왔거든."
-수진 님이랑 함께 가셨습니까?
"어! 갔다 올게."
-다녀오십시오.
현수는 샤워를 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수진의 부모님들이 모두 계셨다.
"어서 오게."
"안녕하세요."
현수는 수진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수진이와 수진의 어머니가 상을 들고 나왔다. 생선회와 술잔이 상 위에 올려 있었다.
"자! 한잔하게나."
현수는 수진의 아버지가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그러곤 현수도 아버지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지난번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이 마신 건가?"
현수는 고개를 숙였다.
"괜찮네. 젊었을 때는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니 말이야. 그래도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네."
"죄송합니다."
"자, 자! 마시게나. 생선회에는 소주가 최고지."
잠시 후 수진의 어머니와 수진이 앉았다. 수진이 현수의 옆에 앉았다.
수진의 아버지는 왜 그리 앉느냐는 듯 수진을 보았다. 하지만 수진은 모른 척 술병을 들어 어머니께 건넸다.
"자! 엄마도 한잔하세요. 아빠도… 그리고 오빠도… 마지막으로 나도……."
술병을 들어 모두의 잔을 채우는 수진이었다.
어느새 세 병의 술을 비워 버렸다. 현수는 밥을 먹기 위해 간 것이지만 술로 배를 채워 버린 셈이었다.
수진의 아버지는 술기운 때문에 얼굴이 조금은 붉게 물들었다. 수진의 어머니도… 수진이도……. 멀쩡한 사람은 현수뿐이었다.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자네가 꼭 내 사위가 된 것같네. 이보게, 자네 내 사위 될 생각 없는가?"
"아빠!"
수진이 아버지를 불렀다.
"당신도 술은 이제 그만 먹어요."
"아니, 왜? 내가 못할 말을 했나."
말리는 두 사람을 야속하게 바라보는 수진의 아버지였다.
"사실 자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네만 내가 보기에는 괜찮아."
뜬금없는 수진의 아버지의 말에 현수는 잠깐 당황했다.
"아빠, 오빠가 무안해하잖아요. 그리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수진은 아버지가 혹시나 현수에게 실수를 할까 봐 말렸다. 수진의 아버지는 수진을 보며 눈을 흘겼다.
"말만 한 처녀가 집에서 놀고 있는 것이 보기가 싫어서 그런다. 왜, 요즘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냐. 그리고 너! 입만 열면 2층 아저씨, 아저씨……. 어? 그런데 너 언제 오빠로 바뀌었냐?"
수진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수진이가 아저씨, 아저씨 하는 말이 오빠로 바뀌었네?"
"그만 해요."
현수의 눈치를 보며 수진이 말했다. 혹시나 현수가 언짢아할까 봐 조마조마한 모양이었다.
"이보게, 자네는 우리 수진이가 싫은가?"
"아닙니다."
"봐라, 이것아. 2층 총각도 좋다고 하잖아."
"언제……."
수진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공으로 수진은 낭패를 당했다. 두 분의 합공은 실로 무서웠다. 함께 있는 현수조차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세상은 변하고 변해. 그 변화에 적응해야 살아갈 수 있어. 똑똑한 사람이 그 변화에 적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부지런한 사람,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 변화에 적응하며 세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 자네는 어떤가? 부지런한 사람인가? 아니면 노력하는 사람인가? 한번 생각해 보게.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현수는 수진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과연 자신은 노력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부지런한 사람인지. 그러나 확실한 답은 내릴 수 없었다.
"난 만약에 자네가 그 두 부류 중의 한 사람이라면 난 수진이를 자네에게 줄 수도 있지."
"아빠, 이제 그만 해요. 술 많이 드셨어요. 엄마! 뭐 해요, 아버지 방에 모시고 들어가요."
"아니다, 수진아. 이 아빠, 아직 안 취했다. 이것아, 넌 그렇게도 아비 마음을 몰라 주냐. 이 아빠나 엄마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 너 시집가서 잘 사는 것만 보면 당장이라도 소원이 없다."
현수는 순간 흠칫했다. 항상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낮에 야가 한 말 중에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말을 상기했다.
"호호! 걱정 마세요. 처음에는 아저씨, 아저씨 하다가 그다음에는 오빠……. 그다음에는 여보, 당신 하는 것이 순서니 곧 영감 소원 이루어지겠네요."
수진의 어머니조차 한 팔 거들고 나서니 수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 해, 오빠가 진짜 무안하잖아."
"녀석! 알았다. 그만 하면 되지. 할망구! 우리는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 줍시다."
수진의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고 뒤를 이어 수진의 어머니도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디 가요?"
"이것아, 이 엄마가 아빠랑 데이트하는 것도 싫으냐?"
어머니의 말에 말문이 막힌 수진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수진이가 부모님의 성격을 많이 닮았구나. 아니, 똑같아.'
수진의 부모님들이 밖으로 나가고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오빠, 미안해요. 아마 심심하셔서 그랬나 봐요. 오빠가 이해해 주세요."
"아니! 난 괜찮아. 오늘 울적한 기분이었는데 수진이 부모님 덕분에 다 날아갔어. 고마워!"
오히려 현수는 수진이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술잔에 찬 술을 비웠다.
현수는 옆에 앉아 있는 수진을 보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수진이 예뻐 보였다.
수진의 부모님은 진짜 데이트를 하러 간 것인지 시간이 흘러도 오지 않았다.
"나! 갈게."
"이거, 마저 비우고 올라가세요."
조금 남아 있는 술을 흔들어 보이더니 수진은 현수의 잔에 술을 채웠다.
"오빠! 그런데 진짜 사귀는 사람 없어요?"
"현실에는 없어. 천에서는 NPC를 좋아했어."
"NPC요?"
수진은 현수의 말을 들었다. 현수는 구미호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다. 왠지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무공에 관한 것과 자신이 호면객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호면객이 구미호의 복수를 한다고 들었는데 그럼 오빠가 호면객?'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은 부분을 물어보는 것이 실례가 된다는 것쯤은 수진도 알고 있었다.
"그렇구나. 나 좋아하는 NPC는 없나? 접속하면 물어봐야지."
수진의 말에 웃을 수밖에 없는 현수였다.
"나, 이제 갈게."
"네!"
일어나는 현수는 술기운에 비틀거렸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서니 조금 취한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니 좋았다.
"조심하세요."
수진이 일어나 현수를 부축했다.
"어! 고마워, 괜찮아."
수진은 현수의 팔을 잡고 현관이 있는 곳까지 부축을 했다.
"어!"
쿠당탕!
신발을 신기 위해 한쪽 팔을 드는 순간, 현수는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부축을 하고 있는 수진이 역시 현수와 함께 넘어졌다.
"미안, 미안……. 평소에는 별로 안 취하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미안!"
현수는 다시 중심을 잡고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갈게."
"같이 가요."
수진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현수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구르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현수를 부축하고 함께 현관을 나섰다. 그러고는 계단을 조심해서 올라가서 문을 열고 현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잠시만 계세요."
수진은 현수를 잠시 앉혀 놓고는 이불을 깔았다.
현수는 앉아서 수진을 보고 있었다.
"수진아!"
"네!"
현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현수를 보았다.
"오늘 너 참 예뻐 보인다."
오늘따라 현수가 뜬금없는 소리를 많이 한다고 수진은 생각했다.
"원래 예뻐요. 오빠가 몰라서 그런데 밖에 나가면 내가 인기가 얼마나 좋은데."
수진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현수는 수진이라면 어머니도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수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현수는 살아가면서 수진에게 맞추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는 수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저기 수진아!"
"네!"
불러 놓고 말하지 않고 있는 현수를 보며 수진은 눈만 깜박였다.
"나! 가진 것도 없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어. 그래서 남들처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누구나 하는 말이겠지만 하루 세 끼 밥은 안 굶길 자신은 있거든……."
두근두근!
"내가 싫지 않으면 2년만 기다려 줄래?"
수진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2년을 기다려 달라는 현수. 수진은 그를 바라보았다. 눈은 반쯤 풀려 있었고 취기가 많이 올랐는지 혀가 조금 꼬여서 말하는 모습이었다.
"2년요?"
분명 현수가 하는 말이 프러포즈라는 것은 알겠는데……. 수진은 무엇이라 대답할 수 없어 다시 현수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현수는 대답을 회피했다.
"나! 자야겠다."
현수는 자신의 말만 하고 눈을 감았다.
수진은 그런 현수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이불 위로 현수를 눕혀 놓고 방을 나왔다.
"야!"
-말씀하십시오, 수진 님.
"사실대로 이야기해 줘!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없었습니다. 주기적인 현수 님의 감정 변화입니다. 항상 이맘때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바다를 찾곤 합니다.
참으로 야라는 컴퓨터는 신기했다. 분명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진짜처럼 말하는 야였다.
누가 있어, 컴퓨터가 거짓말을 할까 생각하겠지만 분명 야는 거짓말도 능숙하게 하는 컴퓨터였다.
"오빠가 나보고 결혼하자는데 고작 주기적인 감정 변화라고? 너! 거짓말이지."
-현수 님께서 수진 님께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거 축하합니다. 자고로 나이가 차면 결혼해서 아들 딸 놓고 사는 것이 인생의 최대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말을 돌리는 것도 이 정도면 최상급에 속했다.
"너! 아직 나를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난 예부터 누가 거짓말하면 그걸 알아차릴 수 있었거든. 사람들은 여자의 직감이라고 말하는데……. 그리고 오빠가 나보고 결혼하자고 했으니 이제 너와 내가 남은 아니지. 난 옛날부터 널 한번 분해해 보고 싶었어."
은근한 협박에 야는 위기감을 느꼈다. 현수의 어머니 이후로 최대 난적을 만난 것이었다. 야는 그런 수진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수진은 야의 말을 듣고는 미소를 지었다.
"야! 앞으로 잘해 보자."
수진은 다시 현수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자고 있는 모습이 평안해 보였다.
수진은 그런 현수의 머리맡에 앉아 현수를 내려다보았다.
"남들은 프러포즈도 정말 멋있게 하는데 고작 소주 세 병 먹고 이렇게 어설프게 프러포즈를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수진은 조용히 자고 있는 현수를 보며 말했다.
현수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즐거운 꿈을 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수진은 그런 현수의 입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현수의 팔이 수진의 목을 감아 왔다. 수진은 당황해서 입술을 떼려고 했지만 현수의 팔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첫 키스는 어설픈 프러포즈와 마찬가지로 어설프게 끝이 났다. 수진은 현수가 잠자고 있는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휴!"
한숨이 나오는 수진이었다.
"오빠! 나, 실은 오빠 많이 좋아해요.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 아마 운명이니 인연이니 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데 오늘은 화가 나요. 프러포즈의 환상도, 첫 키스의 환상도 오빠가 다 깨 버렸으니까요."
자고 있는 현수에게 말하는 수진이었다.
"2년을 기다릴게요. 그런데 그 2년 동안 절 실망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오빠의 이런 생활은 엄마나 아빠가 아시면 결코 좋아하시지 않을 테니까요."
수진은 현수의 뺨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는 방에서 나왔다.
"야!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보고해."
-그게.
"너! 말 돌리는 버릇 안 좋다. 하라면 해. 내 일생이 걸린 문제고 또한 너의 일생이 걸린 문제니 말이야.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러고는 수진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자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끌어들인 셈이군.
현수의 어머니를 사자, 수진을 호랑이에 비유하는 야였다. 야는 생각지도 못한 천적의 등장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눈을 뜬 현수는 한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제 수진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한 것에 대한 자책이었다.
"휴!"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씻으러 나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래층에 수진 님께서 북엇국을 가져와 식탁에 놓아두었습니다.
"어, 그래……. 야! 있잖아."
현수는 야에게 어제 수진에게 한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야에게 무슨 놀림을 당할지 몰라서였다.
-그런데 어제 수진 님께서 뜻 모를 말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일생이…….
"휴! 그런 거 있어. 별거 아니야. 신경 안 써도 돼."
현수는 야에게 말을 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세면을 하는 동안 현수는 천에서 어떻게 수진을 볼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 미치겠네. 어떻게 하지?"
현수는 욕실 한편에 붙어 있는 작은 거울을 보며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았다. 접속해서 수진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 씨! 괜히 말을 해 가지고. 술이 문제였어. 아아아!"
현수는 답답한 마음에 욕실에서 소리를 지르고 나왔다.
-왜 소리를 지르십니까?
"그냥 답답해서. 그리고 야! 어제 나한테 한 말!"
-어떤 것을 말하시는 겁니까?
"사사혈천으로 공주를 데리고 가 보상을 하는 이야기."
-네,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 줘!"
야는 현수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래, 자연스럽게 데려가는 것이 문제겠네?"
-그냥 가자고 하면 갈 것입니다. 그래도 뭐, 자연스럽게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알았어. 그리고 사사혈천이 어디까지 밀려왔지."
-아직은 특별하게 감숙에서 이동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섬서 지역과 인접한 곳곳에서 조금씩 마찰이 있기는 합니다.
"그래, 나 밥 먹고 접속한다. 그리고 아가씨의 유물에 대해서 알아봤어?"
-특별하게 나온 것은 없습니다. 살황의 반지가 있으니 아마 목걸이와 팔찌도 있을 것입니다. 방어구 역시 있을지 모르니 현수 님께서 구미호의 레어로 한번 찾아가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현수는 밥을 먹고는 천에 접속을 했다. 천에 접속을 하자마자 수빈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는 산과의 대결을 시작으로 천의 하루 일과를 진행했다.
수진은 멀리서 그런 현수를 보고 있었다. 현수의 프러포즈를 받은 후라 그런지 몰라도 현수를 보는 수진의 눈에는 따스함이 묻어났다.
수진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현수와의 키스가 생각났는지 피식 웃고는 당가의 가주를 찾아갔다.
"어서 오너라."
"가주님, 무슨 일로 저를……!"
"명월이, 네가 수고를 좀 해 주어야겠다."
"무슨!"
사사혈천과의 대립으로 인해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곳에서 빠져나간 독황문의 무사들이 쓰는 독에 의해 낭패를 당했다고 한다.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현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명월을 비롯한 몇몇의 당가 무사들을 보낼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진이 역시 지금 현수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잠시 그곳으로 가서 감정을 다스리고 돌아오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월의 말에 당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월아!"
"네, 가주님!"
당시현은 명월과 현수의 관계가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은공과는 어떤 관계냐?"
"네에? 그러니까 그게……!"
"왜?"
"휴!"
참으로 신기했다. 현실에서 프러포즈를 받고 난 다음 날, 당시현의 물음이라… 참으로 절묘하다기보다는 이들 NPC들이 마치 자신의 감정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오라버니는 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 중의 한 분이세요. 그리고 장래를 약속한 사이기도 합니다."
쿵!
당시현은 조금은 놀란 듯했다. 두 사람이 친하게 보여 속으로는 명월과 짝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막상 듣고 나니 기쁨보다는 놀람이 더 컸다.
"그렇구나. 사실 나 역시 은공이 명월이의 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직접 들으니 기쁘구나."
"가주님! 부탁이 있습니다. 행여, 오라버니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씀 말아 주세요. 오라버니는 황궁에 몸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소문으로 오라버니의 입신의 양명에 누가 될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허허! 알았다, 그렇게 하마. 그럼 넌 이번 출정에서 빠져라. 네가 다칠까 걱정이 되는구나. 혹여 다치기라도 한다면……."
당시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수진은 현수와 일을 연관시키는 것이 싫었다.
"아닙니다, 가주님.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다만 이곳에 오라버니가 계시는 동안만 부탁드립니다."
당시현은 수진의 말을 듣고 내심 기뻤다. 수진이 당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분명 그녀는 당가의 젊은이들 중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감으로 해서 당가의 식구들도 어느 정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무사히 다녀오너라."
수진은 당시현에게 인사를 하고 당가의 고수들과 함께 당가의 진형을 벗어나 사사혈천과 무림맹의 혈전 지역으로 떠나갔다.
현수가 산과의 대결을 끝내고 쉬고 있을 때 황궁으로 간 령이 돌아왔다.
"군!"
"폐하께서는 무탈하시더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내리신 무공 비급입니다."
령은 현수에게서 한 권의 무공서를 받아들었다.
패력권왕의 패력신권이었다.
소림사의 금강부동심결에 비해 한 수 떨어지는 무공이지만 어떻게 보면 역발산에게 더욱 잘 어울리는 외공의 무공서였다.
"폐하께서는 군께 영취 공주 마마의 안전을 다시 한 번 부탁하셨습니다. 또한 군에게 다치지 말라 명을 내렸습니다."
"그래, 령! 나는 하남성에 잠시 다녀올 일이 생겼다. 내가 다녀오는 동안 공주 마마를 지켜라."
"하남성에 말입니까?"
"그래, 혹시 공주 마마를 지키는 것이 힘들 때는 당가의 가주인 당시현에게 말해서 사천 당가의 본가로 옮기도록 해라."
령은 무엇 때문에 하남으로 가려고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한 2주 정도 걸릴 것 같다. 그동안 공주 마마를 부탁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현수는 수빈 몰래 당가의 진지를 떠났다. 혹여나 따라간다고 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가의 진지를 떠나 하남성으로 가는 동안 현수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들었다.
푸드드득!
현수에게 전서구가 날아왔다.
하오밀문에서 얻은 정보를 모아 만사귀가 알아보기 쉽게 분류한 것들이었다.
"음! 끝없는 소모전이란 말이지."
현수는 사사혈천과 유저들의 싸움이 길어지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말을 적어 만사귀에게 보내었다. 계획을 수립하고 다시 보내어 줄 것을 요구했다.
하남성에 도착한 현수는 장신구점에서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되는 머리핀을 하나 사고는 백마사에 있는 구미호의 레어를 찾아갔다.
"여전하네."
변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버님!"
언제 나타났는지 현수의 앞에는 미자가 서 있었다.
"어, 그래. 미자는 잘 있었어?"
미자에게 아버님이라는 말을 듣고 현수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적응을 했다.
"네! 미랑 님께서 깨어나시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미자는 현수가 미랑을 보기 위해서 온 것이라 생각했는지 현수에게 미랑은 아직 수면 중이라고 말했다.
"그래, 알고 있어. 참! 사사혈천의 난으로 다른 여우들은 어떻게, 모두 무사해?"
"일상의 반복을 계속할 뿐입니다. 다만 1,000년 이상을 산 구미호들은 미랑 님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고생이 많다. 사실 내가 온 이유는 아가씨의 유물 때문이야. 아가씨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무림에 살황의 반지라는 기보가 등장했어. 혹시 아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 줘!"
미자는 현수를 구미호의 서재로 데리고 갔다. 현수는 구미호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소녀진경≫이라는 책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미자는 차를 가지고 나와 현수에게 건네주고는 구미호의 유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유물은 모두 아홉 가지입니다. 그중 아버님께서 두 가지를 얻었습니다.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 그리고 휘령의 경장과 장갑, 신발, 또 살황의 목걸이, 반지, 팔찌입니다. 나머지 하나에 대해서는 저 역시 모릅니다."
현수는 구미호의 유물이 그렇게 많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살황의 반지는 오래 전에 무림에서 활동하실 때 누군가에게 주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유물의 행방에 대해서는 저 역시 모릅니다."
현수는 미자의 말을 듣고 조금은 실망했다.
"그래, 일단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지금부터 찾으면 되겠지. 그리고 혹시 내가 아가씨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 줘!"
미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현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미자야, 너! 사귀는 여우 없어?"
"……!"
"예뻐지는 것 같아서."
미자는 현수의 어이없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랑 님을 한번 보시고 가시겠습니까?"
"그래, 이곳에 또 언제 올지 모르는데 보고 가야지."
미자가 현수를 데리고 간 곳은 구미호가 쓰던 침실이었다.
새하얀 흰 털이 곱게만 보이는 여우가 자고 있었다.
"미랑 님이 편해 보이는구나."
"줄곧 저런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황궁에서의 생활이 즐거웠던 모양입니다."
현수는 미랑에게 다가가 흰 털을 쓸어 담았다. 현수는 미랑과 함께했던 1년간의 황궁 생활을 떠올렸다.
현수의 손길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잠버릇인지 미랑은 꼬리를 움직여 현수의 손을 뚝뚝 쳤다.
"하하! 미랑 님이 내가 온 것을 아는가 봐!"
"잠버릇입니다."
할 말 없게 만드는 미자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미자야, 이곳을 지켜 주어서 고마워! 내가 할 일인데……. 자, 선물!"
현수가 미자에게 선물이라며 준 것은 머리핀이었다.
"미자에게 참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하나 사 왔어."
미자는 현수가 내미는 머리핀을 받았다.
"나 갈게. 다음에 올 때는 정말 예쁜 걸로 사 올게."
떠나가는 현수를 본 후, 손에 쥐인 머리핀을 보았다. 미자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머리핀을 머리에 꽂고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동경에 비추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 * *
현수는 구미호의 레어에서 떠나 사사혈천과 대립 중인 한 곳인 섬서성으로 향해 갔다.
감숙성과 청해를 차지한 사사혈천의 다음 목표가 섬서성이었다. 사천은 일단 독황문에게 맡겼으니 사사혈천이 섬서성을 차지하면 중원의 1/4을 차지하는 셈이 되었다.
하지만 중원 무림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다. 먼저 이벤트에 불참을 선언한 문파들이 속속 이벤트에 참여했다. 그동안 사사혈천의 무사들과 함께 싸워 온 유저들과 NPC들의 호흡이 조금씩 맞아 가고 있었다.
현수는 이런 식으로 대립이 지속되면 크게 득이 없을 것 같았다. 사사혈천이 깨지든지 유저들이 깨지든지 둘 중 하나가 박 터지게 깨져야 했다. 물론 유저가 깨지면 금상첨화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2주라는 시간 동안 사사혈천이 섬서성에 들어설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전혀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섬서성에는 구파일방 중 2개의 문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종남파와 화산파!
종남파는 전진교의 영향으로 도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문파였으나 이상하게 군문에 투신해서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종남파의 무공을 보다 실전적이고 강맹하게 발전시켰다. 그런 연유인지 지금의 종남파는 도가의 성향보다는 속가적인 성향이 강한 문파로 변모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파인 화산파!
구파일방 중의 하나이며 또한 중원 오악검파의 수장 역할을 하는 문파로, 검공에 조예가 깊어 화산검파라 불리기도 하는 문파가 섬서성에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사파의 사왕천 중 하나인 혈왕천이, 유저들의 문파들 중에서는 천지회가 섬서성 장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종남과 화산 그리고 혈왕천과, 비록 이벤트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천지회가 섬서에 있는 이상, 제아무리 사사혈천이라고 해도 쉽게 달려들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소모전만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현수는 호면을 쓰고 은신술을 사용해서 무림맹의 진형으로 접근해 가장 큰 막사를 찾았다.
"사사혈천의 기세도 한풀 꺾였습니다."
화산파의 장로인 진현이 회의를 이끌고 있었다.
"하하! 아무리 사사혈천이라고 해도 이곳 섬서는 넘지 못할 것입니다."
종남파의 장로가 자신 있게 소리쳤다.
"후후! 과연 그럴까?"
순간 화산의 장로인 진현과 종남파의 장로가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슈슈슛!
"이런!"
현수는 종남파의 장로를 향해 뇌전류를 사용했다.
"커억!"
진현은 고수였다. 현수가 종남파의 장로를 공격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상황을 파악하고 현수를 향해 공격해 왔다.
매화검법!
현수 역시 잘 알고 있는 검법이었다. 현수는 진현의 검을 피하면서 종남파의 장로를 몰아붙였다.
"팔검수화진검류!"
"커억!"
"이놈!"
기선을 빼앗긴 종남파의 장로는 현수의 검을 피하지 못하고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진현은 종남파의 장로를 구하기 위해 현수를 공격했지만 현수는 유유히 진현의 공격을 피해 종남파 장로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크아악!"
현수는 막사를 벗어나기 위해 막사의 천장을 뚫고 솟아올랐다.
이미 밖에는, 막사 안의 싸움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호면객이다."
순간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다시 호면객의 출연으로 인해 사람들은 저마다 호면객을 잡기 위해서 움직였다.
"만상대진을 발동하라."
순간 사사혈천의 기습을 대비해 만든 만상대진이 호면객으로 인해 펼쳐지고 있었다.
유저들은 전과 달리 호면객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 NPC들과 함께 만상대진을 이루며 현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현수는 막아서는 유저들과 NPC들을 베며 무림맹의 진형을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현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달려오는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끝내고 가려고 했다. 하나, 이렇게 나온다면 모조리 다 죽여 주마."
현수는 계속해서 피해 다니다 지쳐 당하는 쪽보다는 모두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현수는 은신술을 사용해 다시 무림맹의 진형 안으로 들어갔다.
스걱!
소리 없이 1명의 유저가 쓰러졌다. 호면객의 무공에 대해서 조금씩 알려졌는지, 유저들은 쓰러진 유저를 보며 소리쳤다.
"저기다. 호면객이 다시 중앙으로 들어갔다."
빠르게 대응하는 유저들과 NPC들은 현수가 모습을 보이면 바로 공격해 들어왔다.
"어림없지. 고작 이 정도에 죽을 거라면 동영의 살수들의 손에서 살아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공격을 피하고 다시 모습을 감추는 현수였다.
"커억……. 왜?"
옆에 있는 NPC가 자신을 향해 검을 찌르는 것을 보며 묻는 유저였다.
"후후! 내가 호면객이거든."
천변변환역용술을 사용해 NPC의 모습으로 바꾼 현수는 다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호면객이 뒤를 쫓다 피해가 커지자 진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호면객이 역용해서 우리들 사이에 숨어들었다."
그 한마디의 외침이 서로를 경계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서도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서로의 믿음이 깨어지자, 유저들은 유저들끼리 다시 모였다.
"크아악!"
"아가씨가 너로 인해 죽었다. 너 역시 죽어 마땅하다."
현수는 유저들이 몰려 있어도 상관이 없는 듯 자신의 목표를 죽여 나갔다.
"빌어먹을! 이 개 쓰레기 같은 놈아! 모습을 드러내 정정당당하게 한번 붙어 보자."
호면객의 모습을 찾을 수 없어 화가 났는지 유저들은 저마다 호면객을 욕하며 나타나라고 외치고 있었다.
"사사혈천의 무사들이 쳐들어온다."
진현은 그 한마디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호면객……. 호면객, 네 이노옴!"
화를 주체할 수 없어 소리치던 진현은 일단 NPC들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오는 사사혈천을 막으러 나섰다.
사사혈천은 무림맹의 진형에서 소동이 일어난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진격해 들어온 것이었다.
"크아악!"
사사혈천과 NPC들의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유저들은 호면객이 심어 준 불신으로 인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젠장!"
유저들은 지금의 상황을 욕하며 1명씩 사사혈천과의 싸움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현수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하나, 현수는 지금 멈출 수가 없었다. 일단 시작하면 끝을 보는 것이 현수였다.
현수는 호면을 벗고는 사사혈천과의 싸움에 참가했다. 많은 유저들이 있는 상황이라 일일이 따져 보지 않으면 누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무림맹의 편에서 사사혈천의 무사들을 죽여 나갔다.
무공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고 단순히 검만을 휘둘러 사사혈천의 무사들을 상대했다.
혹시나 자신의 무공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니 현수는 철저하게 자신의 무공을 감추며 사사혈천의 무사들을 상대했다.
현수가 사사혈천 무사들의 체력을 줄이면 유저들이나 NPC들이 마무리를 했다. 그래서인지 유저들은 현수의 주위에서 사사혈천의 무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사사혈천의 무사들을 가장 많이 죽인 유저에게는 최상급 레어 아이템 세트가 상품으로 주어지기에 현수의 옆에 있으면 힘들이지 않고 킬 수를 올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현수는 지금 이들에게 병 주고 약 주는 모습이었다.
현수는 유저들이 몰리자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 유저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현수를 따라 적진의 깊숙한 곳에 들어와 버렸다.
"멈추어라! 방어진을 구축하고 오는 적들을 막아라."
진현이 적진으로 들어가는 유저들을 향해 급히 외쳤지만 이미 상당수의 유저들이 적진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후였다.
'후후!'
현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들을 비웃은 다음, 은신술을 사용해 모습을 감추고는 다시 NPC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 버렸다.
"크아아악!"
적진에서 포위당한 유저들은 사사혈천의 무사들에게 속절없이 당했다.
"적들의 손에서 아군을 보호하라."
진현은 당하는 유저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구축하고 있는 방어진을 풀고 적진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크아아악!"
수비에서 공격으로 바꾼 무림맹의 무사들은 빠르게 사사혈천의 무사들을 가르며 유저들을 구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크아악!"
현수는 NPC의 뒤에서 그들을 따라가며 비웃었다. 결코 NPC들이 유저들을 구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환영무적!"
NPC들 뒤에서 환사의 술법을 사용하는 현수였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잔인한 생각이었다.
"헉! 이게……."
순간 환영에 당황한 무림맹의 NPC들은 환영에 대항하기 위해 내력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사사혈천의 무사들이 달려오다 멈춘 그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바보들이 아니었다.
"크아아악!"
그때부터 사사혈천의 일방적인 도륙이 시작되었다.
"미안하다."
현수는 무림맹의 무사들을 보고 한 마디를 던진 후, 그곳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찾아간 곳은 사도련과 사사혈천이 대립하고 있는 곳이었다.
* * *
"무엇이든 의견들을 내 보세요. 그렇게 조용히 앉아 있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BS 그룹 가상현실 천의 관계자들은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없었다.
호면객으로 인해 섬서성에 대치하고 있는 사도련과 무림맹이 대패를 하고 섬서성의 일부를 내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이벤트가 장기화될수록 유저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싼 계정비를 주고 게임을 하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벤트에 대해서 환불을 요구하는 유저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호면객에 의해 계속해서 유저들이나 NPC들이 죽임을 당하자, 유저들은 호면객에게 제재를 가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 모인 사람들은 해결책은 고사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여는 사람도 없었다.
수빈은 그들을 보자 답답한지 서둘러 회의를 마쳤다.
"휴! 할 말이 없으면 회의를 마치기로 해요. 그리고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환불해 주세요. 그리고 약정에 준해서 조치하세요. 또 호면객의 대해서는,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행동이니 우리가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공지 사항에 적어 유저들에게 알리세요. 자! 다들 그렇게 풀 죽은 모습을 하지 말고 힘들 내자구요."
수빈은 임원진들과 더 이상 할 말이 없자, 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휴! 몇 명인가요?"
-400명이 조금 넘습니다.
"그래도 그 정도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수가 생각보다 적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일단 환불을 하게 되면 더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당연한 거죠. 우리는 약정에 따라 행하면 돼요. 다섯 배의 환불을 해 주고 그들의 계정을 앞으로 1년간 등록하지 못하게 하고, 기다려 주는 유저들에게는 나중에 고마움을 전하면 됩니다."
-힘내십시오, 수빈 님!
"괜찮아요, 이번 이벤트를 빨리 마무리 지어야겠어요. 당가의 명월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섬서 남부의 대치 지역에 있습니다.
"음, 상황은요?"
-그리 좋은 것은 아닙니다. 독황문의 무사들에 비해 당가나 성약부의 사람들이 부족하기에 힘든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번 호면객의 사건으로 인해 방어선이 무너졌습니다.
지금 수빈이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현수뿐이었다. 현수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당가의 명월이 위험해져야 한다.
"그럼 현수가 그곳에 간다고 가정을 하고 계속해서 그를 이벤트에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세요."
-일단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서 현수 님께서 그들을 이끌게 해야 합니다. 유저들보다는 NPC를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유저들은 조금의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유저들보다 NPC를 선동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NPC를요?"
-그렇습니다. 섬서에는 종남파가 있습니다. 종남파는 군부와도 무관하지 않으니 그들을 부추기면 될 것 같습니다.
과연 그렇게 해서 현수가 움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마 이현수는 남에게 휘둘릴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수빈은 또 다른 방법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지만 수빈 님께서 직접 뛰어드시면 현수 님 역시 수빈 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장에 뛰어들 것입니다. 그 역시 황궁에 소속된 인물이라 수빈 님께서 뛰어들면 어쩔 수 없이 이벤트에 참가하게 될 것입니다.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 용천검이 현수의 손에 있어요. 저 역시 천에서는 NPC라 용천검을 거부할 수가 없어요. 만약 현수가 용천검으로 저에게 명령을 하면 어떻게 하죠?"
용천검이 문제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 역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수빈은 용천검에서 일단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만약에 용천검이 현수의 손에 있다고 소문을 내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들의 손에 용천검이 들어가도 검의 효용성을 모르니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럼 현수가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을까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수빈 님께서는 현수 님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고 계신 듯합니다. 현수 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남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전을 해 오는 자들에게는 열 배로 보복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베타 시절 일마라는 호칭을 유저에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용천검을 노려 현수 님을 죽인 후, 용천검을 빼앗는다면… 아마 천은 지금 사사혈천이나 호면객보다 현수 님을 더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수빈은 자신이 말하고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의 무공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독황문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 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겠군요. 알겠어요, 일단 처음 천이 가르쳐 준 대로 한번 시행해 볼게요. 그리고 이번 이벤트 동영상 제작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이벤트의 동영상은 BS 그룹에서 유저들에게는 무료로 전해 주는 대신 해외에서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호면객의 등장으로 인해 상황은 별로 좋지 않지만 그래도 동영상의 사실감 하나만큼은 일반 영화를 능가하고 있습니다. 예고편을 보고 벌써 해외에서 1,000만 장이 선주문된 상태입니다.
수빈은 그마나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사사혈천의 이벤트가 끝나 주면 더욱 좋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수빈은 조금은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