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연에서 기연으로! (36/57)

기연에서 기연으로!

다음 날 접속한 현수는 야에게서 들은 내용을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호면객이 자신이라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신 있어?"

"해 봐야지. 지금까지 쭉 해 왔던 일이야. 새삼 달라질 것도 없지. 뒷일은 건이 알아서 해."

결국 현수는 낮에는 소뇌음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밤에는 묵고 있는 방의 바닥을 파서 땅속에 길을 만들었다. 내력이 다할 때까지 딱 한 번만 땅을 파서 길을 만들었기에 현수가 땅을 파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수들의 눈도 피해야 하지만,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혹여 의심을 사게 될까 봐 그리했다. 다만 현수가 없는 동안 일이 생기면 건이 나서서 처리했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소뇌음사의 그 누구도 현수가 땅속에 길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결국 현수는 소뇌음사의 밖까지 길을 만들었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역발산과 필살검 그리고 화령검객이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역발산과 화령검객은 괜찮아 보였지만, 필살검은 모진 매질을 당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뭐야?"

현수의 첫마디였다.

"왔냐? 애들을 순순히 내주던데."

건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살검이는 움직일 만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냐?

조금은 힘겨운 듯 대답한 필살검의 목소리에는 왜 이제 왔느냐는 원망이 섞여 있었다.

"엄살은, 그냥 죽지 그랬냐? 그럼 몸이라도 편하잖아."

"시팔 것들이 죽지도 못하게 패더라. 그런데 더 억울한 것은 산이 저놈이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는 거지."

역발산은 조금 미안한 듯 필살검의 시선을 피했다.

"됐어, 내일 떠날 거니까 내일까지 움직일 수 있게 혜련이가 보살펴."

"야! 나도 잡혀 있었는데."

역발산이 말하자 모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산이 너, 혜련이랑 사귀냐? 한동안 같이 다니더니 그새 정 붙었냐?"

수금인이 핀잔을 주자, 혜련은 얼굴을 붉혔다.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역발산과 함께 다니면서 좋은 감정이 생겼다.

"아니, 살검이보다는 덜하지만 나도 리얼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조금 맞았거든."

현수는 역발산에게 조용히 말했다.

"조용히 해. 살검이가 내일까지 움직이지 못하면 똑같이 만들어 줄 테니까."

현수가 정색하며 말하자 역발산은 흠칫했다.

"알았다."

"그리고 변명 같은 거 하지 마.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해.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

혜련은 놀라서 현수를 보았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느낀 것이었다. 일종의 위기감 같은 것이었다.

"저기!"

혜련이 말하려고 할 때, 역발산의 입에서 먼저 말이 나왔다.

"그래, 난 혜련이가 좋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좋아. 그런데 나로 인해 혜련이가 너희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것은 싫어. 난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놀림받는 건 싫어."

혜련은 역발산의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안 놀리면 되지."

정작 다른 사람들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고는, 죄인이 된 세 사람과 혜련을 남겨 두고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역발산, 잘해 봐라.

현수의 전음이 역발산에게 들려왔다.

-고맙다, 현수야.

-하지만 너희 둘의 문제를 떠나, 일단 살검이가 내일까지 움직일 수 있어야 된다. 그것부터 해결하고 너희 둘이 알아서 해.

더 이상 현수의 전음이 들리지 않았다.

혜련은 가만히 역발산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래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미, 미안해."

"뭐가요?"

"그냥. 오늘 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살검이 좀 봐 줘."

혜련은 피식 웃고는 필살검을 치료했다. 화령검객은 혜련을 보는 역발산의 옆으로 다가가 옆구리를 툭 치고는 미소를 머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좋냐?"

"응, 일단 말은 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겠지. 저 봐라. 예쁘지 않냐?"

덩치에 안 어울리는 소리를 하는 역발산이 귀여워 보였다.

"잘해 봐라. 현수가 돗자리까지 깔아 주었는데 잘못되면 넌 현수에게 죽은 목숨이다."

"그렇지. 그런데 전에 보았던 수진 씨 있잖아."

"수진? 아, 수진 씨. 왜?"

"현수랑 뭔가 있는 것 같지 않냐? 그래서 현수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화령검객은 현수를 떠올렸다. 역발산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베타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순한 양에 불과한 현수다. 화령검객은 필살검을 치료하면서 역발산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혜련에게 시선이 향했다.

'여자는 요물이라고 하더니, 진짜 현수가 여자 때문에 많이 변한 건가? 건이도 만사귀도 모두 조금씩 변한 것 같아. 그럼…….'

역발산을 보는 화령검객은 역발산도 변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놈이 변해 봤자 더 이상 어떻게 변해?'

화령검객은 조금씩 변한 친구들이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보기 좋았다.

'여자 하기 나름이라더니, 현수 같은 놈도 변하게 만드는데 나도 여자 친구를…….'

이렇게 천연회는 '천의 연애 모임'이라는 이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 날 필살검은 혜련의 도움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들은 소뇌음사를 벗어나기 전에는 죄인이었다. 죄인이라 손과 발이 묶인 채 천연회의 다른 일행의 중앙에 서 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께서는 결코 소뇌음사의 도움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귀 국의 죄인이 우리 서장에서 죄를 짓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파라극을 보며 필살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성질 같았으면 지금 면상을 한 방 날리고 싶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그는 죄 없는 두 손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현수는 파라극을 뒤로하고 소뇌음사를 떠났다. 그리고 소뇌음사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미리 파 놓은 땅굴을 찾아갔다.

현수는 주위를 살펴본 다음,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땅속의 통로로 몸을 숨겼다.

통로의 끝에 다다른 그는 방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다.

'아직 방을 치우지 않은 모양이네.'

현수는 조금 기다리기로 하고, 최대한 자세를 편하게 한 뒤 쉬었다. 방을 청소하는 시비들이 무공을 알지 못한다는 걸 이미 확인한 상태라 통로를 들킬 염려는 없었다.

한참 뒤에 방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아마 방을 치우는 시비들인 것 같았다.

시비들이 방을 다 치우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현수는 방으로 올라갔다.

'밤이 되면 움직이는 게 좋겠다.'

현수는 다시 침대 밑으로 들어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미 경장각과 약당이 어디에 있는지 숙지한 상태라 몰래 숨어들어 가기만 하면 된다. 그는 최대한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머릿속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려 보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자, 현수는 호면을 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중비록의 운중무영보와 은신술을 함께 사용해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경장각으로 향했다.

'헛!'

현수는 그 자리에 정지했다. 경비를 서는 라마승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수들이다. 사사혈천의 경비 무사들보다 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사사혈천의 경비들이 현수의 은신술의 찾아내고 공격까지 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경장각에 숨어들어 가기 위해서는 저들의 이목을 속일 필요가 있다.'

하나 주위에는 그들의 이목을 끌 만한 것이 없었다. 현수는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교대 시간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한 번의 교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본 현수는 그때부터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타임.'

현수의 눈앞에 현재의 시간이 표시된 시계가 나타났다. 그는 시간을 재며 교대 시간을 기다렸다. 현수가 기다리는 동안 또 한 번의 교대 시간이 왔다.

'3시간마다 교대가 이루어진다.'

시간을 확인한 현수는 다음 교대 시간에 경장각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긴장을 풀며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한 번의 교대 시간이 다가오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4명의 라마승이 경장각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천운일까? 경비를 서고 있던 라마승들이, 교대하기 위해 다가오는 라마승들에게 가는 것이었다.

'지금이다!'

현수는 지체 없이 경장각 안으로 숨어들어 갔다. 다행히 경장각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힘들다."

경장각 안의 책 냄새가 피로를 잊게 만들어 주었다.

"여기가 소뇌음사의 경장각이란 말이지."

현수는 책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경장각 안에서 책을 보는 재미에 빠져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대단하다."

현수가 몇 권의 책을 읽고 느낀 것이었다. 구파일방이 그냥 생겨난 문파가 아니듯이, 이곳 소뇌음사 역시 그냥 생겨난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조금은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

현수는 책 보는 것을 그만두고, 책장에서 한 권 한 권 책을 빼내 조심스럽게 바닥에 놓았다. 혹시나 밖에서 경비를 서는 라마승들이 알아차릴까 싶어 조심해서 행동했다.

책장 속에 책을 넣어 두고 불을 지르면 많은 책을 태울 수 없다고 생각한 현수는, 상당한 양의 책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불을 붙이고는 은신술을 사용해 입구 근처에 숨었다.

분명 연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경비를 서는 라마승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불이 나면 자신을 발견할 경황이 없을 테니, 그 틈을 타서 경장각을 빠져나가 약당으로 갈 생각이었다.

현수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4명의 라마승 중 3명이 경장각으로 들어왔다. 1명은 불이 난 사실을 알리러 간 모양이었다.

'지금이다!'

현수는, 웃통을 벗어 불을 끄려는 라마승을 뒤로하고 경장각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많은 라마승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현수는 약당으로 몸을 돌렸다.

경장각의 소동으로 많은 인원이 빠져나간 후라 그런지 약당으로 침입하기는 수월했다.

"약당이라… 영약 같은 것은 없나?"

아무리 소뇌음사라 할지라도 살황의 일기장의 탐지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 영약, 영약."

현수는 약당에서 영약들을 찾아내 먹어 대기 시작했다. 구미호의 내단과 적룡의 영약으로 인해 음기의 영약과 양기의 영약을 모두 소화할 수 있다.

-내력이 30 상승합니다. 내력이 30 상승합니다. 내력이 10 상승합니다.

현수는 그 자리에서 심법을 사용해 복용한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많은 영약을 복용했기에 몸에 완전히 흡수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현수는 영약들의 기운을 흡수하고 나서 눈을 뜨고 자신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상태 창 오픈!"

이름 : 이현수 레벨 : 69

직업 : 멸친어린천룡군(전직할 수 없음)

체력 : 1,075(+197) 기력 : 1,945

공격력 : 10(+30)(+30) 방어력 : 10(40)

순발력 : 10(+130) 민첩성 : 146

인내 : 70 맷집 : 71

NPC와 호감도 : 100% 황제의 신임도 : 100%

경험치 : 34/100

생활 스킬 도축-가죽과 고기를 얻을 수 있다.

현수는 부쩍 늘어난 자신의 기력을 보고 미소 지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체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일단 약당에 불을 붙이고 자리에서 벗어나 약당을 빠져나왔다.

"누구냐!"

"이런, 뇌전류!"

"헉!"

현수는 자신을 발견한 라마승을 공격하고 달아났다.

"놈이다! 약당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다!"

라마승은 소리치며 급히 현수의 뒤를 쫓았다.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라마승들은 약당이 타고 있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화재를 진압하는 한편, 한 무리는 현수의 뒤를 쫓았다.

현수는 영약을 복용해 기력이 늘어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탈출로가 봉쇄되어 애를 먹었다. 쫓아오는 라마승들로 인해 탈출로가 있는 방까지 도주하지 못하고 포위를 당했다.

현수는 할 수 없이 주위의 숨을 데가 많은 곳을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영약을 흡수하느라 시간을 너무 보냈어. 대충 하고 다음에 흡수해야 했는데."

현수는 별채의 한 방으로 숨어들어 갔다.

"헉! 당신은……!"

현수는 방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잠시, 현수의 몸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네, 네놈은……!"

정빈이었다. 이 별채는 정빈이 묵고 있는 곳이었다.

라마승들이 별채로 들이닥치자 현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정빈을 향해 검을 찔렀다.

"악!"

정빈의 비명 소리가 별채에 울렸다.

슈슈슈슈슈! 콰앙!

정빈의 방문이 날아가자, 안의 모습이 라마승들의 눈에 들어왔다. 정빈은 가슴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호면을 쓴 사내는 창문을 통해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쫓아라!"

라마승들은 호면을 쓰고 달아나는 사내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정빈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빈은 억울했다. 더 살고 싶었다. 이제야 여자로서의 기쁨을 알았기에 그 기쁨을 더 누리고 싶었다.

그때 파라극이 보였다.

"사, 상공!"

말을 하기조차 힘겨운 듯 정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파라극은 자신을 보곤 몸을 돌렸다.

"사, 상공!"

떠나가는 파라극을 잡으려고 정빈은 기어서 부서진 방문이 있는 곳까지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뿐, 정빈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정빈은 눈이 감겨 오는 것을 느꼈다.

"아가, 아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눈을 떠 보려고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대신 1황자가 떠올랐다. 어찌 보면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빈은 아버지와 아들을 배신했다. 차라리 둘 다 그 사실을 모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악마록≫을 찾으러 간 아들이 보고 싶어졌다.

"아…버지… 죄송……!"

정빈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빈의 시체를 안아 든 대학사는 말이 없었다. 다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파앙!

현수는 라마승들을 피해 소뇌음사를 휘젓고 다녔다. 이미 소뇌음사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터라,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라마승들이 길목 곳곳에 나타나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게 만들 뿐이었다.

현수는 이들을 피해 다니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마치 사냥꾼이 토끼몰이를 하듯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잠시 후 현수의 느낌은 현실로 다가왔다. 이미 많은 라마승들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현수는 그들의 앞에 내려섰다. 그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나 현수가 움직이면 그들 역시 현수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 움직일 것이다. 현수는 선택해야 했다. 순순히 잡힐 것인가, 움직일 것인가를!

대충 90~100레벨 대의 라마승들이었다. 이 정도의 레벨이면 두세 명은 어찌해 볼 수 있지만, 수십 명은 조금 힘들 것 같았다.

포위하고 있던 라마승들이 한쪽으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파라극이 다가오고 있었다.

현수는 파라극을 보는 순간 흠칫했다. 그동안 보아 왔던 파라극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걸어오는 파라극의 레벨은 100이 훨씬 넘어 보였다. 그는 진짜 파라극이었다.

파라극은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경장각의 일과 약당의 일도 참기 힘들었지만, 그를 정말 화나게 한 것은 정빈의 죽음이었다.

파라극에게 정빈의 가치는 엄청난 것이었다. 파라극은 1황자를 움직일 수 있는 정빈을 이용해 중원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1황자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1황자가 황궁을 장악하면 정빈을 내세울 생각이었다.

그런 훌륭한 꼭두각시를 없앴으니, 자신의 계획에 차질을 준 현수를 그냥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중원의 신비 이객 중 1명인 호면객인가?"

현수는 침묵했다. 지금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의 말대로 일단 빠져나가야 계획은 성공할 수 있었다.

'믿는다. 변해 버린 몸과 운중비록 그리고 스탯의 민첩성을!'

현수는 몸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말이 없군."

"후후!"

현수는 용천검을 빼 들었다. 순순히 잡힐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자, 라마승들 역시 공격할 움직임을 보였다.

"팔다리는 잘라도 좋다. 숨만 쉬고 있으면 된다."

라마승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타 시절에 경험한 소림의 백팔나한진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두 개의 원진을 짠 라마승들은 뒤쪽에 원진을 짠 자들이 앞의 라마승의 어깨로 올라가 함께 공간을 줄이며 공격해 왔다.

현수는 라마승들에게 받는 압력으로 인해 중심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당할 수 없기에 현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변화무쌍한 구름을 본떠 만든 운중난화무와 변해 버린 몸이 일치가 되어 라마승들의 공격을 피해 내고, 피하지 못하는 공격은 용천검을 들어 올려 막아 냈다.

"운중비록 운중탄영신!"

라마승들은 자신들의 공격이 막혔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할 시간조차 없었다. 순간 호면객이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마치 시위를 떠난 활처럼!

"내려오라! 천살일환!"

파라극이 손을 하늘로 뻗은 동시에 손가락에서 빛과 함께 무엇인가가 현수를 향해 쏘아졌다.

"윽!"

현수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파라극의 공격은 현수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현수는 충격으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건물의 지붕 위로 떨어졌다.

쿵!

"윽!"

현수는 떨어진 충격에 더 큰 고통을 느꼈다. 그는 고통을 참고 일어나 파라극을 보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날아와 자신을 한 방 먹였는지 궁금했다. 파라극의 손가락에는 3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각기 다른 색의 반지였다.

'시팔, NPC들은 반지를 3개까지 착용하는데 왜 우리는 하나밖에 착용을 못 해?'

현수는 별것을 다 투덜거렸다. 그만큼 파라극이 끼고 있는 반지가 위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현수는 충격을 입은 어깨를 보았다. 팔이 빠진 모양이었다. 이놈의 게임은 참 별것이 다 된다는 생각을 하며 벽을 손으로 짚고는 어깨를 털어 빠진 팔을 맞추었다.

"순간적으로 도망치는 솜씨는 일품이야."

"……!"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지 보지. 천살이환!"

파라극의 손이 움직이면서 2개의 빛이 쏘아져 나가 현수에게 쇄도했다.

현수는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현수는 움직이면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 변해 버린 몸을 믿고 그냥 서 있었다.

팟팟!

현수의 몸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2개의 빛을 피해 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최소한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죽음마저 거부한 자신의 몸을 믿었다.

현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망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주위로 몰려든 라마승들을 향해!

"믿는다. 몸은 피하고 머리는 공격한다."

현수는 그냥 몸에 맡겼다. 라마승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혹시나 그들의 허점이 드러나면 검을 휘둘렀다. 무공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검을 휘둘러 공격할 뿐이었다.

이들을 향해 얼마나 많은 검을 피하고 휘둘렀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었다.

몸과 생각이 일체가 되었다. 몸이 반응하는 속도 역시 빨라졌다. 라마승의 공격을 피하고 허점이라는 생각이 들면 몸을 움직여 공격했다. 검을 움직이려고 의식하지 않아도, 몸은 현수의 생각을 따라 반응했다. 현수는 즐거웠다.

파라극은 그런 현수를 보고 있으니 짜증이 났다. 호면객이 철저하게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직접 나섰다.

또 다른 위험을 느낀 현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아앙!

"하하하하!"

모습을 드러낸 현수는 오늘 이들로 인해 배운 바가 있어서 무척 즐거웠다.

"천살삼환, 천살무적환!"

현수의 웃음소리에 더욱 화가 났는지 파라극이 공격했다. 손가락에 낀 3개의 반지가 파라극의 손에서 벗어나 현수의 얼굴과 가슴 그리고 배를 향해 쏘아졌다.

"흥!"

현수는 이전의 공격보다 느린 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비록 찬살일환이나 이환보다는 늦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헛!"

하나 반지를 피하던 현수는 놀라 헛바람을 마셨다. 반지는 현수를 쫓아 방향을 바꾸어 같은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운중탄영신!"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현수의 신형을 쫓아 그 반지들과 함께 따라올라 왔다.

"완전히 열 추적 미사일이네!"

자세를 바꾸어 용천검으로, 날아오는 반지들을 쳐서 방향을 바꾸었다. 그것도 잠시, 반지들은 다시 현수에게 달라붙었다.

"이런 찰거머리!"

현수는 반지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땅으로 내려오자마자 라마승들이 공격해 왔고, 반지는 현수의 빈틈을 노리고 공격해 왔다.

'어! 검술과 같은 기술이다.'

현수는 파라극을 보았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반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현수는 빠르게 파라극을 향해 몸을 날렸다.

라마승의 검은 그런 현수를 제지하려 했지만, 운중광속신형보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파라극은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는 현수를 보고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순간 현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유마대수인!"

"헉! 천밀밀!"

번개와 같은 빠른 속도로 쌍 장을 내미는 파라극의 두 손은 이미 현수의 면전에 다다랐다.

콰아아앙!

"크윽! 악!"

현수는 비록 천밀밀을 사용해 파라극의 유마대수인을 막았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인지라 그 충격은 상당했다. 뒤이어 반지들에게 가격당했다.

쿠아앙!

현수는 건물의 벽에 부딪쳤다. 건물이 마치 무너질 것처럼

크게 흔들렸지만 다행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으으……!"

스탯 맷집!

현수가 그 정도의 공격을 맞고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맷집이라는 히든 스탯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지만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라마승들과 현수를 향해 다가오는 파라극은 결코 그를 살려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현수는 충격으로 인해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벽을 의지해 신형을 세운 현수는 다가오는 파라극을 보았다.

'적어도 한 문파의 수장이라면 산전수전 다 겪었을 텐데, 그 점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현수는 베타와는 달리 NPC들도 꼼수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소뇌음사에서 알게 된 것이 많았다.

"강하군. 신비 이객이라는 호면객이 이렇게 강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

"아직 애송에 불과할 뿐이다."

현수는 지금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터진 상처는 많아도 다행히 출혈을 일으키지는 없었다.

'벽곡단으로 체력을 회복하고 일단 시간을 번다.'

파라극의 주먹이 현수의 복부를 강타했다.

"윽!"

현수의 허리가 꺾였다. 또다시 등에 충격을 받았다.

현수는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힘들게 벽곡단을 먹었다.

순간적인 고통만 있을 뿐 지속되지는 않았다. 현수의 몸은 이미 고통에 내성을 가졌기에, 파라극의 무수한 주먹 세례와 발길질을 맞아 가면서도 벽곡단을 복용할 수 있었다.

죽으면 가진 무공 중 하나는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죽으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에 죽을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가야 한다.

최소한의 체력을 남겨 두어야 했다. 파라극은 구타를 견디는 현수를 보자 더욱 화가 났는지 계속해서 손과 발을 놀렸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 현수에게도 기회가 왔다. 고수라고 해서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파라극 역시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육체적인 힘만으로 현수를 구타해서 그런지 지친 기색을 보였다.

'지금이다!'

"현천파열권!"

"헛!"

기습에 가까운 공격에 놀랐지만 파라극은 뒤로 물러나며 현수의 공격을 막아 낸 후 그를 보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 현수는 떨어진 검을 주워 들고 다시 파라극을 향해 공격했다.

"뇌전류!"

"윽!"

파라극은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어깨에 생채기가 났다.

"운중비록, 운중무영신!"

"쫓아라!"

8개의 환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솟아올라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 파라극이 소리쳤다.

운중무영신! 2개의 경신술 중 하나의 경신법인 운중무영신은, 땅속으로 몸을 감추는 무공이었다. 여덟 방위에서 사라지는 것 모두는 환영이었다.

평소라면 파라극도 알아차릴 수 있었겠지만, 현수의 검에 베여 어깨에 상처를 입은 것이 화가 나 주위를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또한 파라극은 현수가 땅속으로 숨어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현수는 운중무영신를 사용하고 나서 곧바로 은신술을 사용해 자신의 기척을 지워 파라극을 속이려 했다. 다행히 파라극은 자신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젠장! 놈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숨어 있는 것은 가능하지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움직이면 파라극이 바로 눈치를 챌 것 같았다.

파라극은 현수를 쫓으러 간 라마승들의 보고가 있을 때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놓쳤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직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잡아라! 온 절을 다 뒤져서라도 잡아라!"

"옛!"

파라극은 현수를 놓친 것에 화가 났는지 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윽!'

땅이 울리는 진동에 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강한 충격이었다.

'제길, 저런 무식한 놈을 봤나!'

현수는 파라극의 무식한 무공을 향해 욕을 해 댔다. 결국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상대라 생각한 현수는 자신의 낮은 레벨을 떠올렸다.

'정빈이 이곳에 있었으니, 1황자와 대학사 역시 이곳에 있는 게 분명하다. 문제는 아직 이들을 상대할 레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단 이번 일이 끝나면 레벨을 올린다.'

현수는 이번에 세운 작전이 끝나면 레벨 업에 목숨을 걸 생각이었다.

"흔적도 없습니다."

"뭐야?"

라마승들이 속속 도착해서 모두 현수를 놓쳤다고 말하자 파라극은 몸을 떨었다. 그러곤 현수가 있던 곳을 보았다.

"찾아라! 놈을 찾으란 말이야!"

라마승들은 파라극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했다. 세워 놓았던 계획이 한순간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니 파라극은 몸이 떨렸다.

"놈을 놓친 것 같군요."

아나타가 파라극에게 다가왔다.

"놈은 아직 빠져나가지 못했다. 걱정 마라. 곧 잡을 것이다."

"호호! 아쉽군요. 저에게는 참으로 좋은 일을 해 주신 분인데."

"그게 무슨 소리냐?"

파라극을 정빈에게 빼앗긴 아나타였다. 정빈을 죽이고 싶지만 파라극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그녀는 정빈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현수가 정빈을 죽여 주었으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리석은 계집!"

자신의 생각을 몰라주는 아나타가 야속했던 걸까? 아니, 사실 파라극은 경박하게 웃음을 흘리는 아나타보다 조용한 정빈이 더 좋았다.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밤이 되면 불처럼 타오르는 그런 정빈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호! 오늘 밤은 어때요?"

"천박한 년!"

파라극은 아나타를 밀치고 자리를 떠났다. 라마승들도 아나타를 힐끗 보고 파라극의 뒤를 따라 떠났다.

아나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수하들이 있는 곳에서 자신을 모독한 파라극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였다.

"호호호! 그래, 파라극. 내 오늘 너에게 받은 이 수모는 꼭 돌려주마. 기다려라. 결국 넌 나의 치마폭에서 죽을 운명이다."

한참을 웃던 아나타는 현수가 숨어 있는 곳을 보았다.

"이제 나오는 것이 어떨까요, 호면객 나리?"

'뭐야, 알고 있었던 거야!'

현수는 자신이 숨은 곳을 보고 있는 아나타를 보자, 더 이상 숨어 있을 수가 없어 모습을 드러냈다.

"호호! 천하의 호면객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군요. 그래도 서장의 패자라고 하는 파라극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니 말이죠."

"……!"

정확하게 말하면 빠져나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눈만 속였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현수는 아나타를 보았다.

'젠장! 이 NPC가 파라극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전 아나타라고 해요. 파라극의 첫 번째 부인이죠."

'빌어먹을! 계획이 실패했군. 애들에게 잔소리를 듣겠는데?'

현수는 아나타가 파라극의 부인이라는 말을 듣고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다.

"욱!"

현수는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냈다.

"저런… 내상을 입으셨나 봐요."

아나타는 다가가서 현수를 부축했다. 현수는 아나타가 왜 자신에게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좀 쉬면서 내상을 치료하세요."

팟팟팟!

아나타는 현수의 몸을 몇 군데 짚었다.

-혈도가 제압되었습니다.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하루가 지난 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알림 메시지를 본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유저와 NPC의 다른 점 중 하나는, 유저는 혈도를 점혈당해도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곧 풀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NPC들은 방심할 테니, 그 틈을 타 빠져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루 동안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아나타의 말을 듣는 순간, 현수의 입가에 생긴 미소가 사라졌다.

"왜?"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 처소는 다른 이들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랍니다. 제 처소에서 호면객 님의 내상을 치료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나타는 움직이지 못하는 현수를 둘러메고 사라졌다.

아나타는 라마승들의 눈을 피해 현수를 자신의 처소까지 데리고 왔다. 현수는 아나타의 무공을 보고 내심 놀랐다. 현수를 찾거나 혹은 소뇌음사의 경비를 서는 라마승들 중 아나타의 기척을 느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분명 파라극보다 강하다. 그런데 왜?'

현수는 왜 아나타가 파라극의 밑에 있는지 궁금했다. 분명 부부라고 말했지만 그리 좋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만약 부부라면 그 자리에서 파라극에게 알려 주어야 했다.

현수는 아나타의 처소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이들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아나타가 파라극에게 무공을 숨길 이유도 또 자신을 몰래 이곳으로 데리고 올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심은 신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런 욕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인간을 속일 수 있다면 신도 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수는 야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의 욕심이라… 그렇지. 이들도 천에서는 한 인간에 불과하니까. 욕심이라…… 아나타가 가진 욕심은 뭘까?'

현수는 아나타가 가진 욕심이 무엇인지 알면 소뇌음사를 빠져나가는 것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아나타가 환희천궁의 궁주란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나타가 다시 들어왔다.

"헉!"

"갑갑하지 않으세요. 그 호면을 벗는 것이 어때요?"

현수는 고개를 돌려 아나타의 시선을 피했다. 참으로 보기에도 민망한 모습이었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옷을 입고 현수에게 웃음을 흘리는 아나타의 모습은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호호! 이런, 천하의 호면객 님께서 부끄러움을 타시는 건가요?"

아나타가 현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호호호!"

아나타의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현수는 약간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현수는 인상을 썼다. 이와 같은 일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내력이 10 줄었습니다. 내력이 10 줄었습니다. 내력이 50 줄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았다. 어떻게 모은 내력인데!

현수는 BS에 항의할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모니터링이 불가능해서 흔적이 남지 않으니 증거 자료가 없다. 말해도 믿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을 했다가 자신에게 친 방호벽을 풀면, 이제껏 천에서 일어난 일이 그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는 방호벽을 못 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럼 행동에 제약을 많이 받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제길!"

현수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이런 말들뿐이었다.

다시 화면이 밝아지더니 정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아나타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당신, 최고였어요."

아나타는 현수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BS 그룹을 욕했다.

"내력을 빼앗아 가면서 보여 주기라도 하면 덜 억울하지. 젠장, 이건 말 그대로 눈을 감긴 채 내력을 빼앗아 가는 거잖아."

결국 아나타의 욕심은 현수의 내력이었다.

아나타의 침대에 누워 있는 현수는 답답했다. 접속을 해제하고 난 뒤, 이 억울한 일을 야와 이야기해서 BS 그룹에 항의할 생각이었다.

"야!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

-무슨 말입니까?

현수는 천에서 아나타와 있었던 일들을 모두 야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내력을 빼앗겼단 말씀입니까?

"그래! 그게 말이 돼? 내가 어떻게 모은 내력인데 그것을 빼앗아?"

-무림이니까 가능합니다. 음양의 교합으로 상대의 내력을 빼앗거나 다시 주는 것은 흔한 설정이지 않습니까? 혹시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까?

"알지. 그래도 유저잖아. 개인의 재산을 말없이 가져가다니 그게 말이 돼?"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유저들 중에서는 그렇게 내력을 모으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저는 되는데 NPC라고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현수는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 달라고 말했지만 야는 그런 현수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뭐야? 유저들 중에 그런 놈이 있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굳이 음양화합을 하는 건 아니지만, 차기흡성술 같은 방법으로 상대의 내력을 흡수하는 유저가 있습니다. 그 양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있기는 합니다.

"야! 그거랑 이거랑 같아? 내가 당했단 말이야, 내가."

-현수 님께서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계신 듯합니다. 게임에서는 누구나 평등합니다. 현수 님이 아니라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도 상황이 그리되면 내력을 빼앗길 것입니다.

야의 말을 들으니 현수는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얼마나 빼앗겼습니까?

"응? 몰라. 화가 나서 확인하지 않고 그냥 나왔어. 그럼 어떻게 빼앗긴 걸 찾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했습니다. 당연히 음양화합으로 빼앗겼으니 음양…….

"야!"

현수는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아직 그는 총각이었다.

-왜 소리를 지르십니까? 그렇게 된 일을 그럼 어떻게 합니까? 빼앗긴 내력을 찾기 싫으신 것입니까?

현수는 자신이 소리 지를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내력을 찾긴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알았어. 그럼 빼앗긴 내력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 혹시 나도 그 이상한 걸 배워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난 움직일 수 없어. 혈도가 제압되어 있단 말이야."

-그럼 그 여자에게 하나 가져다 달라고 하십시오.

"누구? 아나타?"

아나타라는 말에 놀랐는지, 현수에게 다시 물어보는 야였다.

-현수 님의 내력을 빼앗은 NPC가 아나타입니까?

"응, 그 여자 이름이 아나타야."

혹시나 야가 아나타를 알까 싶어 되물었다. 현수 역시 그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아나타는 환희천궁의 궁주입니다. 현수 님께서 이번엔 상대를 잘못 만나신 것 같습니다.

"뭐? 환희천궁의 궁주야?"

-그렇습니다. 현수 님, 포기하십시오. 그냥 자살하는 편이 내력을 조금이라도 덜 빼앗기는 방법입니다.

"안 돼! 내가 개고생해서 모은 내력이야. 난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사실 정말 아나타라면 힘듭니다. 괜히 환희천궁의 궁주겠습니까? 그쪽 방면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하는 여자입니다. 그러니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야의 조언에도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현수는 아나타가 환희천궁의 궁주라는 말을 듣고 왜 자신을 파라극에게 넘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해소되었다.

내력을 빼앗기 위해서 자신을 파라극에게 넘기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내력을 다 빼앗으면 결국 파라극에게 넘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에 해답을 찾아야 한다.

"나 접속한다. 야, 너도 방법을 한번 찾아봐."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시는 게…….

현수는 더 이상 야의 말을 듣기 싫었다.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에 다시 접속한 현수는 자신의 상태 창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력이 620이나 줄어 있었다.

"안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찾을 거야."

현수는 이를 물었다. 잃어버린 내력을 찾기 위해서 온갖 생각을 다했다.

"호호!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아나타는 조그만 상을 들고 현수의 머리맡에 앉았다.

"시장하실까 봐 죽을 조금 가져왔어요. 아직 내상이 낫지 않아서 온전한 식사를 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아나타는 현수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호면을 벗겼다.

"아!"

괜히 호들갑을 떠는 아나타를 보자 현수의 입에서는 욕지거리가 나왔다.

팟팟!

아혈을 짚은 아나타는 현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 하세요."

아나타는 숟가락으로 죽을 떠 현수의 입으로 가져갔다. 입을 벌리지 않자, 손으로 현수의 양 볼을 잡고는 힘을 주었다.

"아이, 착해라."

아나타의 힘에 의해 현수의 입이 벌어졌다. 아나타는 그 속으로 숟가락을 밀어 넣고 말했다.

"우웁!"

현수는 끝내 아나타가 가져온 죽을 다 먹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어두워지는 화면!

'젠장!'

곧이어 알림 메시지가 전해 오는 소리!

-내력이 10 줄었습니다. 내력이 10 줄었습니다.

현수는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진짜 야의 말대로 자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자, 아나타는 다시 혈도를 짚어 현수를 꼼짝 못 하게 했다.

"휴!"

자신의 몰골을 보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조금씩 기력을 빼앗겨서 몸이 말라 간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야위어 갔다.

"죽자. 젠장! 괜히 미련을 두는 바람에 얼마나 기력을 빼앗긴 거야?"

현수는 자살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변해 버린 몸이 자살을 거부했다. 현수는 환장하는 마음으로 그냥 누워 방 천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호호!"

"빌어먹을."

현수는 또다시 아나타에게 기력을 빼앗겼다. 곧 죽을 때가 된 것 같았다.

"상태 창 오픈!"

이름 : 이현수 레벨 : 69

직업 : 멸친어린천룡군(전직할 수 없음)

체력 : 1,075(+197) 기력 : 660

공격력 : 10(+30)(+30) 방어력 : 10(40)

순발력 : 10(+130) 민첩성 : 146

인내 : 70 맷집 : 71

NPC와 호감도 : 100% 황제의 신임도 : 100%

경험치 : 34/100

생활 스킬 도축-가죽과 고기를 얻을 수 있다.

기력 수치가 660으로 줄어 있었다.

현수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죽어도 레벨 업을 하기는커녕 영약을 사기 위해 시간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

황궁에 연락하는 건 조금 두려웠다. 황궁에 연락해서 혹시 영약을 얻는다 해도, 과연 황제가 다시 무림으로 보내 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 황제는 결코 무림으로 다시 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현수는 멍하니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젠장, 돈도 벌어야 하고 아가씨도 찾아야 하는데. 빌어먹을!"

현수는 구미호가 생각났다.

"아, 맞다! 아가씨의 서재에서……!"

현수는 구미호의 서재에서 보았던 방중 비술의 책을 기억해 냈다. 현수는 책의 내용을 떠올리기 위해서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 와중에도 아나타는 한 번씩 들러 현수의 기력을 탐해 갔다.

음양의 조화는 천지의 기운을 파생시켜 만물의 균형을 이루어 간다. 하물며 인간의 몸에도 음양의 조화가 존재하니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이 조화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본녀는 그러한…….

≪소녀진경≫

현수가 구미호의 서재에서 보았던 책의 제목이었다.

소녀는 상고 시대의 사람이다. 황제와 소녀의 대화는 유명한 일화가 되어 아직도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또한 하나의 설화가 되기도 했다.

현수는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천지에는 열림과 닫힘이 있고 음양에는 추이推移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음양의 법칙을 쫓아…… 연기縯氣의 방법을 행함으로써 낡은 기운을 몰아내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다.

현수는 책의 내용을 조금씩 생각해 냈다. 궁지에 몰린 현수에게는 실로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소녀진경≫의 내용을 기억해 내는 것뿐이었다. ≪소녀진경≫을 당장 익힐 수는 없었지만 그저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현수의 신체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나타와 내력을 밀고 당기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나타는 호기심으로 현수와 내력을 밀고 당기기 시작했다. 환희밀교의 흡정술은 최고라는 자부한 데서 온 호기심이었다. 현수는 더 이상 내력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보는 이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현수에게는 목숨을 건 사투가 되어 버렸다.

아나타 역시 그런 현수가 마음에 들었는지 기꺼이 응수해 왔다. 아니 응수했다기보다 가지고 논다는 말이 정확했다.

세상 만물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있다. 비단 남자의 정액 역시 이 에너지를 농축하고 있음이다. 에너지라는 것은 쓰면 쓸수록 고갈되어 버리는 게 당연하다. 연기의 방법으로 재생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부로부터 받아들여 모으는 것 또한 중요하다. 외부에서 생명의 에너지를 모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음양의 교합이다. 음양의 교합은 서로의 수명을 늘여 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낳게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방법을 환정법이라 한다. 환정법의 방법은…….

현수는 환정법을 생각해 내고, 주저 없이 떠오르는 대로 실천했다. 현수는 깜깜한 어둠의 상태라 알 수 없었지만 아나타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동안 현수에게서 갈취했던 내력이 자신의 몸을 돌고 돌아 다시 현수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나 이것도 잠시, 다시 현수의 몸으로 들어간 내력은 그의 몸을 돌고 돌아 아나타에게 들어갔다.

아나타는 현수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다지 싫지 않은 듯 현수에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현수는 어느 정도 내력이 다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호호! 상공, 식사할 시간이옵니다."

아나타는 소반에 죽을 가져와서 현수에게 먹였다.

-내력이 3 상승합니다.

현수는 알림 메시지를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병 주고 약 주는 아나타를 보자 화가 났다.

"호호! 몸에 좋은 녹용과 산삼을 조금 넣었습니다, 상공."

'그래, 기력을 찾으면 보자.'

현수는 환정법을 믿고 있었다. 사실 지금은 환정법 말고는 어떠한 답도 나오지 않았다.

또다시 시작되는 사투에 현수는 최선을 다했다.

두 사람의 내력은 서로의 몸속을 돌고 돌아 위치를 바꾸어 가며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다.

어떻게 보면 아나타에게는 기연이었다. 유저인 현수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NPC인 아나타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흡정술로 모은 내공이 현수의 환정법으로 인해 더욱 정순해져 내력 역시 크게 늘어나 있었다.

현수도 줄어든 내력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상태 창 오픈!"

이름 : 이현수 레벨 : 69

직업 : 멸친어린천룡군(전직할 수 없음)

체력 : 1,075(+197) 기력 : 1,364

공격력 : 10(+30)(+30) 방어력 : 10(40)

순발력 : 10(+130) 민첩성 : 146

인내 : 70 맷집 : 71

NPC와 호감도 : 100% 황제의 신임도 : 100%

경험치 : 34/100

생활 스킬 도축-가죽과 고기를 얻을 수 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잃었던 내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력이 원활하게 돌아가자 점혈당했던 혈도를 풀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현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욕심을 냈다. 계속 이렇게 하다 보면 자신의 내력을 모두 찾을 뿐만 아니라 더 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후! 나도 속물이란 말이지. 그나저나 볼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인데."

현수는 아나타와 싸울 때마다 어두워지는 게임의 시스템을 욕했다.

* * *

한편, 현수의 연락을 기다리던 천연회의 사람들은 사사혈천의 내원에서 사냥을 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현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야?"

"모르지. 늦는 것을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현수에게 연락이 오기 전에는 움직이지 못해. 그리고 우리는 최대한 레벨을 올려야 하니, 일단 현수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필살검은 현수가 조금 걱정되었다. 아무리 현수라고 해도 자신이 느낀 소뇌음사의 라마승들은 조금 강한 축에 들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라. 일마 이현수다. 생각 안 나? 베타 때 랭커 100명에 둘러싸여도 다 죽이겠다고 설친 놈이 바로 현수다. 건이만 없었다면 다 죽였을지도 모를 무식한 놈이다. 고작 소뇌음사에 당할 현수가 아니란 말이지."

역발산이 거와를 상대로 선두에 서서 공격하던 중에 말했다.

쿠에에엑!

"그렇지. 괜찮겠지. 그래도 걱정이 되기는 해. 만사귀가 모산으로 가고 그 다음 화화가 사라졌어. 그리고 지금은 현수에게 연락이 되지 않고……."

필살검은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후! 걱정 마라. 만사귀는 모산을 장악하기 위해 갔고 화화는 숨어서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저곳에 쉽게 들어가서 한바탕 휘젓고 도망갈 능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건은 사사혈천의 건물을 가리켰다. 잿빛 하늘에 우뚝 솟은 사사혈천의 건물은 보기만 해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힘들겠냐?"

"들어가는 것이라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안에 얼마나 강한 놈들이 있는지 모르는 이상,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지. 일단 레벨 업에 신경 써."

모두 다시 사냥을 시작했다. 혜련은 역발산에게 체력을 보충해 주면서 함께 레벨 업을 했다.

혜련은 대장금을 이해하지 못했다. 현수와 건에게 그렇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보였는데 현수 혼자 소뇌음사에 두고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천연장을 다 부숴 버릴 듯 난리를 친 것도 그렇고, 함께 사냥을 하면 레벨 업을 하는 게 상당히 빠른데도 천연장에 남아 회복제를 만드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천연회에는 이해 못 할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장금이와 무슨 일이 있었어요?"

"어? 아, 장금이? 베타 시절에 일이 조금 있었어. 그래도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거야. 장금이가 얼마나 속이 깊은 아이인데."

건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했다.

* * *

현수가 ≪소녀진경≫의 환정법으로 인해 잃었던 내력을 완전히 찾아갈 때쯤, 아나타가 다시 현수에게 흡정술을 사용해 내력을 갈취해 갔다. 환정법은 근본적으로 양생술이지 흡정술이 아니었기에, 현수는 아나타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현수는 자신의 욕심을 자책했다. 대충 내력을 되찾았을 때 도망갔더라면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아나타는 더욱 정순해진 내력으로 인해 더 젊어진 듯 보였다. 현수는 소반을 들고 오는 아나타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냥 하나 달라고 하십시오.

야의 말대로 한번 말이나 해 볼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있다 가는 게임을 접어야 할 판이었다.

"저기 아나타, 이렇게 누워만 있는 것이 심심해서 그러는데 읽을 만한 책이라도 가져다주겠소?"

"어머, 너무 제 생각만 한 것 같군요."

아나타는 콧소리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웃으며 현수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고, 소반에 담아 가져온 죽을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래, 어떤 책을 원하세요? 무공서?"

"내 비록 아나타에게 잡혀 있지만 나도 무공이라면 자신이 있는 놈이오."

"호호! 그렇겠지요. 중원의 신비 이객 중 한 분이신 호면객이니까요."

귀에 거슬리게 비꼬며 말하는 아나타였다.

"지금 아나타와 하는 짓이라고는 그 짓뿐이니, 그와 관련된 책이라면 좋겠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소."

"호호! 어리석군요. 제가 그 말에 넘어갈 것 같은가요, 서방님?"

"이렇게 제압된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하겠소. 나 역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혹시 아오? 그대가 풀지 못하는 것을 내가 풀어 줄지."

"그럼 한번 생각해 보겠어요."

아나타는 자신의 일을 마저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미치겠네. 현실에서 애들에게 말해야 되는 것 아니야? 손해가 큰데. 조금 더 기다리다가 안 되면 애들에게 연락할 수밖에……."

무작정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와서 자신을 구해 주든지 아니면 계획을 원점으로 돌려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현수의 일이 되어 버렸다. 아나타는 정확하게 현수의 내력 수준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현수를 이용해 자신이 복용한 영약의 기운을 더욱 정순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과 현수가 먹는 죽에 환희천궁의 영약들을 조금씩 섞어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현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아나타에게 다 빼앗기니 아나타에게만 좋은 일이었다.

아나타는 현수의 요구대로 한 권의 책을 가져다주면서 현수의 내력을 거의 다 빼앗아 가 버렸다.

"호호! 보시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세요. 그리고 내일부터 또 내력을 조금씩 돌려 드릴게요."

아나타에게 현수는 내력 정수기나 마찬가지였다. 현수의 환정술로 인해 서로의 몸을 돌고 돌아 내력이 정순해지니, 아나타에게 현수는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현수는 아나타가 가져온 책의 제목을 보았다. ≪환락만화천변술≫이라는,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책이었다.

"환희천궁의 무공서인가?"

현수는 지체 없이 무공 창에 저장했다.

"후후!"

현수는 아나타를 상대로 이것을 익힐 생각이었다. 그 방면에서는 아나타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테니, 익히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무공 창 오픈!"

만자무서 등급 : 무

설명 : 두 가지 이상의 무공을 합쳐 새로운 무공으로 만들 수 있는 무공서.

환락만화천변술(남자는 익힐 수 없음) 등급 : 절정

설명 : 환희천궁의 초대 궁주인 만화색요가 남긴 무공들 중 하나로, 주안술과 흡정법 그리고 미염술과 섭혼술이 기록되어 있는 무공서.

-주안술

기력을 사용해, 보다 젊어 보일 수 있다.

-흡정법

기력을 사용해 상대의 내력을 빼앗을 수 있다.(동성은 불가)

-미염술

기력을 이용해 상대의 넋을 빼앗아 장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다.(상대의 기력이 높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섭혼술

기력을 사용해 상대의 이지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단 상대의 무공보다 높아야 한다)

-역용술

기력을 사용해 모습을 바꿀 수 있다.(기력이 다하면 자동으로 풀린다. 풀린 후에는 일주일간 사용할 수 없다)

현수는 무공 창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비급이라고는 하나 결국 현수가 익히지 못하는 무공이었다.

"남녀가 평등한 시대에 남자는 익힐 수 없는 무공이 왜 있는 거야? 젠장!"

아나타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자 더욱 화가 나는 현수였다.

"야에게 물어보면 또 잔소리할 것 같은데. 아, 미치겠다."

현수는 누워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아! ≪만자무서≫로 합치는 거다! 설마 내시만 익히는 무공서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환락만화천변술, 무공서로 환원!"

-무공서로 환원하시면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합니다. 그래도 무공서로 환원하시겠습니까?

"환원!"

-무공서로 환원합니다.

현수는 아나타에게 이번에는 남자가 익힐 수 있는 것으로 가져다 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현수는 아나타가 들어오자 ≪환락만화천변술≫의 책을 전해 주며 남자가 익힐 수 있는 것으로 하나 구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나타는 내심 놀라 현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책을 가져다준 시간이 불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책의 진위를 파악했다는 것이 아나타를 놀라게 했다.

유저와 NPC의 차이를 모르는 아나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호호! 상공께서는 정말 천재이신가 보군요."

미소를 짓는 아나타의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으나, 현수에게는 나찰보다 더 흉악하게 느껴졌다.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하면 호면객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소."

"호호! 그 말도 맞긴 하네요."

아나타는 현수에게 ≪환락만화천변술≫에 대해서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 환희천궁의 무공인 것 같소. 만화라는 이름이 들어가니 환희천궁의 초대 궁주인 만화색요가 남긴 것 같은데, 익힐 수 없으니 자세히는 모르겠소."

아나타는 순간 살심이 생겼다. 그냥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렇다고 섭혼술을 사용해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면 계속해서 양생법을 사용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호호! 알겠어요. 남자가 익힐 수 있는 것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그건 알아 두셔도 상관없을 거예요."

결국 아나타는 현수의 요구에 응했다. 아무리 뛰어나도 무공이 갖는 우선순위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아나타의 생각이었다.

그만큼 환희천궁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여인이었다. 환락만화천변술이 초대 궁주의 무공서이지만 환희천궁의 정예 무사들은 의무적으로 익히는 무공서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현수는 아나타가 가져다준 환락만화천변술과 ≪환희옥보단심서≫라는 책을 ≪만자무서≫와 합쳐 새로운 무공서를 만들었다.

-새로운 무공 만화천변단심술이 만들어졌습니다.

현수는 알림 메시지를 보고 방이 떠나갈 듯 웃었다.

현수는 무공 창에 만화천변단심술을 저장하고 자신의 무공 창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만화천변단심술 : 1성

제작자 : 이현수 등급 : 초절정

설명 : 환희천궁의 무공서인 ≪환락만화천변술≫과 소뇌음사의 ≪환희옥보단심서≫를 ≪만자무서≫를 통해 만든 무서.

-주안술

내력을 사용해 젊어 보이게 하는 방법. 한 번 사용하면 계속해서 유지됨.

기력 소모 -1,000

-천변환희미소

내력의 사용해 상대의 넋을 빼앗아 장시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상대의 내력이 사용하는 사람보다 높을 때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동성은 불가)

기력 소모 -1,000

-만화염매술

내력을 사용해 상대의 이지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상대의 내력이 사용하는 사람보다 높을 때는 반대로 자신의 이지를 상실한다.

기력 소모 -2,000

-단심흡정술

내력의 사용에 상관없이 음양 교합으로 상대의 내공을 빼앗을 수 있다. (동성은 불가)

-천변변환역용술

기력을 사용해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 기력이 다하면 절로 풀린다. 이성으론 모습을 바꿀 수 없다.

기력 소모 -500

"성공했다. 단지 기력의 사용이 많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그렇게 기력이 많이 들지 않으니 상관없다. 아나타여, 우리 다시 한 번 뜨거운 밤을 보내 보자꾸나."

현수는 아나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나타에게 잡힌 이후 처음으로 스스로 아나타를 기다리는 현수였다. 방심을 유도해 한 번에 단심흡정술을 사용해 잃어버린 내력을 찾아야 한다.

환희천궁의 궁주를 상대로 단심흡정술을 처음부터 사용했다간 내력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당하기 십상이다.

아나타가 소반에 죽을 가지고 와 현수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죽을 입 안에 넣어 주는 동안, 현수의 몸은 긴장하고 있었다.

"호호!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봐요?"

"좋은 일은 항상 있지 않소. 이렇게 아름다운 아나타가 재워 주고 먹여 주고 밤마다 그 좋은 짓을 해 주는데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호호! 그런가요? 그런데 왜 파라극은 싫어할까요?"

"병신이라 그런 거요. 인생의 참다운 즐거움을 나 역시 이제 알았소. 그는 인생의 즐거움을 알기도 전에 권태기가 왔을 것이오."

드디어 아나타와 한판 승부를 벌일 때가 왔다. 현수는 화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두 주먹을 쥐었다.

-내력이 10 줄었습니다. 내력이 20 줄었습니다. 내력이 30 줄었습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현수는 아나타가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자신의 내력을 한 번에 가져가는 양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내력이 10 줄었습니다.

'지금!'

"단심흡정술!"

순간 내력이 아나타의 몸에서 현수의 몸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아나타는 현수와의 음양 교합으로 인해 몸이 나른함을 느끼고 있는 터라 현수의 반격에 놀라 소리쳤다.

"이런, 개……!"

아나타는 현수의 몸으로 빠져나가는 내력을 잡기 위해 환희천궁의 비전을 사용했지만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아나타의 몸은 이미 음양 교합에서 주는 쾌락으로 늘어진 상태였고 또한 급작스럽게 사용한 흡정술이 아직 완전히 펼쳐지지는 못했다.

현수는 몸의 내력을 많이 빼앗긴 후에 아나타의 흡정술을 제대로 시전하였다.

현수가 아나타에게 빼앗은 내력으로 두 사람의 내력의 수준이 비슷했는지 본격적인 사투가 벌어졌다.

도검이 어울리고 권각이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싸움은 그 무엇보다 치열했다.

고오오오옹!

현수는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집중할 수 있었다.

-만화천변단심술이 2성이 되었습니다.

알림 메시지 역시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현수는 지금 상황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이게……!"

아나타는 분한지 연방 현수를 향해 욕하며 소리를 질러 댔다. 아나타의 처소는 두 사람의 내력으로 인해 부서질 듯 흔들렸다. 그러나 금지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뇌음사의 라마승들은 알지 못했다.

-만화천변단심술이 3성이 되었습니다.

현수의 만화천변단심술의 성취가 올라갈수록 아나타는 힘겨워했다. 그렇다고 물러날 아나타가 아니었다.

선공을 빼앗겨 힘겨운 싸움을 계속했지만 지금은 평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에는 자신이 이기리라고 믿고 있었다.

현수는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단심흡정술만 생각했다.

-강제 종료 시간이 30분 남았습니다.

순간 현수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저와 NPC의 차이점이 유저에게 마냥 유리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젠장!"

"호호호호!"

아나타는 승기가 자신에게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았는지 실내가 떠나갈 정도로 웃었다.

'어떻게 하지? 제길, 하필……! 일단 버틴다. 강제 종료가 될 때까지.'

현수는 30분이라는 시간을 버티기로 했다.

아나타의 도움(?)으로 만화천변단심술의 성취가 빨라졌다.

-강제 종료 시간 10분 남았습니다.

현수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팽팽하게 맞서던 현수의 내력이 아주 조금씩 아나타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강제 종료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빌어먹을!"

-강제 종료합니다. 하루 동안 접속하실 수 없습니다.

"호호호호!"

아나타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현수는 현실로 돌아왔다.

장비를 벗어 던진 현수는 연방 '빌어먹을!'을 외치며 신경질적으로 야를 불렀다.

"야!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 빌어먹을 강제 종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아나타에게 얻은 환락만화천변술하고 환희옥보단심술을 ≪만자무서≫로 합쳐서 새로운 무공을 만든 후에 아나타와 흡정술로 대결하는 중이었는데, 그 빌어먹을 강제 종료 때문에 졌어."

화를 내며 말하는 현수는 몹시도 억울했는지 야에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때 강제 종료가 걸리냐, 이 말이야. 어떻게 그때……!"

-저기, 현수 님. 지나친 흥분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흥분한 현수를 진정시키며, 야는 그가 조금 불쌍해 보였는지 이런저런 소리로 위로했다.

현수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소파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다시 접속할 때까지 그 상태로 있을 것입니다. 다만 현수 님의 내력은 접속했을 때에 비해 아나타에게 상당량 빼앗겼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접속했는데 뼈만 남아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렇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좋은 수가 없을까? 아나타가 이번엔 모든 내력을 다 빼앗아 가려고 할 텐데."

현수는 잃어버린 내력에 대한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현수 님께서도 그와 같은 흡정술을 익히지 않았습니까? 다른 NPC들을 상대로 빼앗는 것이…….

"야! 다른 건 몰라도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현수 님께서는 많이 변하셨습니다. 베타 시절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긴 지금의 모습이 인간적이긴 합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잖아. 그리고 베타 시절의 내가 어때서? 그때는 요령을 몰라서 그런 거잖아."

현수는 변명 아닌 변명을 야에게 했다.

-제가 생각해 볼 테니, 현수 님께서는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습니다. 수진 씨와 함께 한강이 보이는 다리 위를 걸으면 머리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야! 부탁한다."

-일단 식사부터 하십시오. 그리고 여자의 심리에 대해서 공부를 한번 해 보십시오.

"여자의 심리?"

-네! 수진 씨는 현수 님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현수 님은 그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생각해 보고. 그리고 제발 부탁하는데, 수진 씨와 나를 연결 짓지 마. 예부터 짝은 하늘이 정해 준다고 했어. 그러니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마."

더 이상 야의 말이 들려오지 않자 현수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밥을 시켜 먹는 것보단 밖에 나가서 먹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현수가 찾아간 곳은 솔미의 커피숍이었다.

"누나!"

"어? 아저씨!"

수진이 솔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참으로 이상했다. 우연이라고는 해도 수진과 밖에서 너무 자주 마주쳤다.

"현수 왔네? 마침 잘 왔어. 우리 밥 먹으려고 했는데 현수도 같이 먹자. 아직 안 먹었지?"

"네.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누나랑 밥 같이 먹으려고 왔어요."

"그래? 잘됐다. 와서 앉아. 내가 천에서 배운 비전의 볶음밥을 해 줄 테니."

"와! 언니, 천에서 그런 것도 배워?"

"그래, 생활 직업으로 숙수를 선택해서 요즘 요리하는 걸 배워. 우리 자기는 내가 해 주는 게 맛있대. 아마 강소성에 객점을 하나 내게 될 거야."

솔미는 자랑하듯 말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현수는 수진의 맞은편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수진은 현수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봤지만 특별히 볼 것은 없었다.

"저기, 아저씨.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아! 네, 어떤 거요?"

"다른 게 아니고 아저씨네 문파 있잖아요, 천연회."

"네, 천연회가 왜요?"

성의 없이 말하는 현수를 보고 수진은 입이 조금 나왔다.

"아직 천에 문파 등록을 안 한 것 같아서요."

"아, 그건 아직 찾을 사람이 몇 명 더 있어서 그래요. 사람들만 다 찾으면 등록할 거예요."

"찾는 사람이 누구예요? 그 사람들도 건 아저씨처럼 강한 사람이에요?"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한 수진의 입은 모터를 단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쏟아 냈다.

"모르겠어요. 베타 시절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아마 다른 사람들보다 실력이 조금 낮지 않을까 해요."

수진은 현수를 생각해 보았다. 베타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현수는 전설과 같은 인물이었다. 지금은 그에 대해서 특별히 말이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사신낭객이 주는 이름의 무게는 천에서 무시하지 못했다.

특히나 남궁세가에서 보여 준 한 수의 무공은 이미 무림에 소문이 자자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레스 언니의 남편도 아저씨가 찾고 있는 사람이에요?"

"네! 악비 형님은 우리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에요. 아직 우리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곧 우리와 함께할 거예요."

"와! 그렇게 강해요?"

현수는 솔미가 빨리 나와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솔미는 나올 생각이 없는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에요. 물론 악비 형님도 강하지만 우리가 악비 형님을 원하는 이유는 문파의 수장을 맡길 생각이라 그래요."

"남궁세가의 사람인데 어떻게……."

"상관없어요. 말지기 한 사람 정도 빠져도 남궁세가에는 아무런 표도 나지 않을 테니."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이 들었다. 현수는 수진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구나."

현수의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수진은 그 뒤로 질문하지 않았다. 아니, 현수가 조금은 귀찮아하는 것을 느끼고 수진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현수는, 창문을 보며 앞에 앉아 있는 수진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함께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이야기하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수진을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수진은 혼자서 미소를 짓고 있는 현수를 보고 또 궁금해졌는지, 아니면 입이 심심했는지 다시 현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결국 현수는 그런 수진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나타와의 일로 나빠진 기분이 수진을 보고 나서 회복되었다. 한편으론 수진이 같은 사람과 사귀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웃어요?"

"아니에요. 그냥 혼자 잠시 생각했어요. 수진 씨, 그럼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돼요?"

수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현수가 자신에게 질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자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뭐예요?"

"살아가면서요? 글쎄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 아닐까요? 그럼 아저씨는 생각이 늘 한결같아요?"

도리어 질문하는 수진이었다.

"글쎄요, 수진 씨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전 철이 들면서 한 가지 생각밖에 못 하고 살았어요."

"에이."

수진은 현수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현수는 철이 들면서부터 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일을 해 왔기에 생각하는 게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사실이에요."

"음! 지금은 엄마한테 시집가란 소리만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아직 청춘인데."

현수는 그런 수진을 보고 또 한 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어?"

솔미가 볶음밥을 다 만들었는지 쟁반에 올려 가지고 나왔다. 현수는 그 모습이 아나타가 소반에 죽을 담아 가지고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왜? 볶음밥 싫어?"

솔미의 눈치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천에서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잠시 그 일이 떠올랐어요. 내가 볶음밥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현수가 천에서 안 좋은 일도 있어?"

현수는 더 이상 말하기 싫은지 시선을 볶음밥으로 돌렸다.

"보기에도 맛있겠네요. 진짜 누나가 만든 거예요?"

"녀석,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내가 요리를 얼마나 잘하는데. 우리 자기는 내가 해 주는 거 아니면 안 먹어."

"하하! 악령이가요? 에이, 그놈 입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너, 방금 놈이라고 했어?"

솔미가 현수를 노려보았다.

"그럼 언니 애인이 아저씨 친구야? 그럼 언니가 아저씨한테 제수씨가 되는 거네."

"이것들이 그새 친해졌다고… 밥 먹지 마!"

"하하! 누나 왜 그래요, 애처럼. 주세요, 맛있게 먹을게요."

현수는 자신의 몫으로 보이는, 양이 많은 접시를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야! 그건 수진이 거야."

"그래요?"

"아니에요. 내가 무슨 돼지예요? 저렇게 많이 먹게. 전 이것도 많아요."

솔미가 오니 현수의 말이 많아졌다. 수진은 그런 현수에게 섭섭했는지 입이 조금 나왔다.

"호호! 수진이가 삐쳤나 보다. 입이 한 자나 나와 있네?"

현수는 솔미의 말뜻을 이해 못 했는지 수진을 보았다. 자신이 보기에는 조금 작아 보이는 입이 예쁘기만 한데, 한 자가 나왔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현수는 여자에 대해서 조금 알 필요가 있어. 뭘 알아야 연애도 한번 해 보지."

"풋!"

수진은 솔미의 말을 듣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몰라서 그런다는 말이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현수는 장사에 대해서 솔미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지만 수진이 함께 있어 그냥 다음으로 미루고, 수진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동안 접속하지 못한 현수는 야와 보다 세밀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먼저 접속해 봐야 알겠지만, 내력을 다 빼앗겨 움직일 수 없다면 그냥 아나타에게 죽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런데 아나타 역시 한 번에 많은 양의 내력을 빼앗아 가지 않고 조금씩 빼앗아 갔어. 그런 걸 생각해 보면 다 빼앗기지는 않았을 거야."

현수는 아직도 미련이 남는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상하군요. 아나타가 한 번에 내력을 빼앗지 않고 조금씩 가져가다니, 그건 현수 님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환희천궁의 흡정술은 상대의 내력이 많고 적음을 떠나 모두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현수 님께서는 저에게 뭔가 숨기는 게 있습니까?

"숨기기는. 내가 너에게 숨길 게 뭐가 있어. 참! 그러고 보니 내력을 거의 빼앗겼을 때 아가씨의 서재에서 읽은 ≪소녀진경≫의 환정법을 생각해 냈어. 그거랑 관련이 있을까?"

-소녀가 지은 소녀진경의 환정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현수는 야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아나타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알아?"

-소녀의 ≪소녀진경≫은 어떻게 보면 불로장생의 묘를 담고 있습니다. 환정법은 흡정술이 아닌 양생술입니다. 혼자 사는 법이 아니라 둘이 사는 법을 말합니다. 아나타는 현수 님의 환정법을 통해 불순한 내력을 정순하게 바꿀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뭐야? 내가 요물을 하나 만들었다는 소리야?"

-아마도요. 근래에 들어 현수 님의 내력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먹이지 않았습니까?

"맞아, 인삼이나 녹용. 내력을 크게 올려 주는 영약은 아니어도 몸보신에 도움이 된다고 그런 걸 죽으로 만들어 와 나에게 먹였어."

야의 말을 들어 보니 확실히 고수를 하나 만들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물론 내력이 높다고 해서 다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나타의 경우엔 처음부터 고수였다. 그런 고수가 내력이 늘어나고 정순해지다니 현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살기 위해 기억해 낸 환정법이 아나타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아나타에게 이기기 힘들잖아."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환희천궁의 무공이 무섭기는 하지만 운중비록이나 살황의 일기장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환희천궁의 무공 원류가 미염술이나 섭혼술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의 실력으로는 현수 님께서 이기지 못합니다.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니었다. 부정적인 말보다는 희망적인 말을 원했다.

"야! 그럼 다시 내력을 찾을 수 없단 말이야?"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현수 님께서 마음을 조금 독하게 먹을 필요가 있기에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현수는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내력을 빼앗는 건 못해."

-현수 님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써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차라리 깨끗하게 아나타에게 죽고 다른 사람들의 내력을 빼앗는 것이 더 빠른 길입니다.

결국 원점이었다. 현수는 다시금 정리했다.

"야, 내가 익힌 흡정술로 아나타에게 이기기는 힘들어.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미련 없이 내력을 버리고 새로 내력을 모으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시중에 영약이 나온 것 있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현수는 구미호를 생각했다. 자신의 내력에는 구미호의 내단이 섞여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구미호와 관련된 것은 하나도 잃기 싫었다. 그래서 현수가 내력에 집착하는지도 몰랐다.

"좋아, 한번 부딪쳐 보는 거야. 까짓것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잖아."

-현수 님, 정 내력을 포기하지 못하시겠으면 아나타와 협상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협상?"

-그렇습니다. 그들도 천에서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니 무엇이 이득인지는 알 것입니다. 1달에 한 번이나 3달에 한 번 환정법으로 아나타의 내공을 정순하게 만들어 준다면 아나타 역시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나타도 언제까지 소뇌음사에서 현수 님을 숨겨 둘 수는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싫어! 타협은 없어. 난 말이야, 일마 이현수야. 비록 현실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놈이지만 천에서는 아니야. 그리고 천에서 난 타협해 본 적이 없어. 죽이고 빼앗기는 했지만 타협은 안 해. 이게 나의 자존심이야."

현수는 더 이상 야와 대화를 나누기 싫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쪽박이지 않습니까? 자고로 사람은 현실을 인정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수는 야의 매정한 말을 듣고 몸을 떨었다.

"난 몰라, 난 옛날을 꿈꾸며 또다시 천에서 하늘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거야."

현수는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저 할 일이 없을 때는 잠이 최고였다. 그래도 야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가장 현수 님다워 보입니다. 내일 접속할 때까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현수는 듣지 못했지만 야는 이미 현수의 반응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일찍 잠을 잔 탓일까? 현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접속할 때까지 시간이 아직 남았기에 현수는 문을 열 시간에 맞추어 마트에 들러 생필품들을 조금 사 왔다.

-이제 오십니까?

"그래, 점심은 집에서 만들어 먹어야겠다. 밥도 사 오고 여기 고기도 조금 사 왔으니 말이야."

-현수 님, 생각해 보니 전혀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현수는 마트에서 사 온 물건을 정리하다 야를 보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잠시만. 나 밥부터 먹고."

-현수 님께서 따로 생각하신 방법이 있으신 듯합니다. 그럼 그 생각대로 한번 해 보십시오.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일을 성취했을 때 보람이 더욱 큰 법입니다.

"하하, 그렇지."

현수는 야의 말을 들을 준비를 했다.

"난 말이야, 네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거든."

어떻게 보면 뻔뻔한 모습이었다.

-먼저 접속해서 내력을 확인한 다음 살려 달라고 비시면 됩니다.

"킁!"

현수는 말없이 야를 보았다. 집 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 야는 잠시 후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나, 일단 현수 님은 접속하시면 내력을 먼저 확인하십시오. 만약 내력이 남아 있다면 아나타는 또다시 내력을 빼앗으려 할 것이니 이번에는 처음부터 흡정술을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아나타를 상대로 최대한 흡정술을 빠르게 해야 합니다. 지금의 상태로는 힘드니 솔직하게 아나타에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현수 님께서 만든 흡정술의 성취도가 10성이면 아나타의 흡정술을 이길 수 있다고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좋습니다. 아나타 역시 무인입니다. 그러기에 호승심이라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환희천궁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 또한 있을 것이니 현수 님께서는 이것을 잘 이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현수 님께서 만드신 흡정술이 환희천궁의 흡정술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일단 붙으면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기세도 필요할 것입니다.

현수는 야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했다.

"야! 고마워."

결국 현수가 야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고맙다는 것뿐이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인공지능 컴퓨터를 한 대 살 거라고 말할까? 아니지, 벌써부터 말할 필요는 없으니, 나중에 장사를 하게 되면 그때 말하자.'

현수는 야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접속 제한 시간이 풀린 현수는 즉시 천에 접속해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영화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미라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하하하! 그래도 기대는 했는데."

현수는 조금 실망했다. 내력은 232만 남아 있었다. 야의 말대로 환정법이 필요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력의 한계가 있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상공, 깨어나셨군요."

"내가 진 것이오?"

"사실 소녀도 놀랐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흡정술을 익힐 줄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소반에 죽을 가져와 자신의 입에 넣어 주며 눈웃음을 흘리는 아나타였다.

"왜 날 살려 두는 것이요? 환정법 때문이오?"

"아! 그 술법을 환정법이라고 하는군요. 소녀는 그 신묘한 술법의 도움을 얻고자 해서 상공을 살려 두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럼 다시 하시겠소? 나 역시 아직 성취가 미비하나 흡정법을 알고 있으니 그것을 사용할 것이오. 불안하면 그냥 날 죽이는 것이 어떻소?"

정면 승부를 해서 호승심을 일으켜라. 야의 특명이었다.

"호호!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 환정법이란 것을 먼저 하신다음 흡정술을 사용하시지요."

그렇게 아나타와 2차전에 돌입했다. 현수는 환정법을 이용해 아나타의 내공이 자신의 몸을 돌아 다시 아타나에게 들어갈 때 단심흡정법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현수의 내력이 올라가더니 멈추었다. 다시 아나타에게 빼앗기는 것을 멈추었다가 자신의 내력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지금 아나타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승심을 자극하고 방심까지 유도하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현수는 단심흡정법의 성취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시간만 나면 아나타와 그 짓을 하니 안 올라가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 현수의 만화천변단심술은 10성을 이루었다.

"후후! 오늘 결판이 난다."

현수는 그동안 완전히 익힌 만화천변단심술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방심하고 있는 아나타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또 한 번 접속 시간을 넘겨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맞추어 접속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여 준비를 끝냈다.

아나타가 들어오자 지겨웠던 둘만의 싸움이 종국을 향해 치달았다.

"단심흡정술!"

현수는 환정법을 사용하는 대신 곧바로 단심흡정술을 사용했다. 아나타가 지금 그만큼 방심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역시나 아나타의 내력이 물밀듯이 현수에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나타 역시 고수였다. 처음엔 많이 당황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 대응이 늦었지만, 한번 경험하고 난 뒤부터 아나타의 대응은 신속했다.

하지만 현수의 성취를 모르는 것은 아나타의 실수였다. 현수가 처음부터 흡정술을 극성으로 사용했으면 아마 남아 있던 내력까지 모두 빼앗겨 버렸을 것을. 자만하고 있던 아나타에게서 이미 현수에게로 많은 내력이 넘어온 상태였다.

"하하하하!"

현수는 성공하여 큰 소리로 웃었다. 비록 아나타가 보이지는 않지만 일그러진 아나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이이……!"

내력이 생기자 현수는 점혈되었던 혈도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내력이 상대적으로 많아지니 혈도를 푸는 것도 쉬웠다.

-점혈되었던 혈도가 풀렸습니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의 욕심은 또 한 번의 좌절을 가져올 것이라 여긴 현수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앞이 안보이는 현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악!"

화면이 밝아지면서 주위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현수는 아나타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입을 벌렸다.

"아나타?"

"죽어라!"

아나타가 손을 쓰자 현수는 놀라 공격을 피하고 주먹을 쥐어 그녀의 배를 강하게 때렸다.

"악!"

"아나타, 그러게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하는 거야."

순간, 많은 내력을 빼앗긴 아나타의 주안술이 풀린 것을 보니 조금은 불쌍했다. 하지만 아나타는 곧 회복할 것이다. 비록 현수에게 많은 내력을 빼앗겼다고 해도, 처음에 현수가 가진 내력을 생각하면 많은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놈을 갈아 마시겠다."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현수는 달려드는 아나타를 피해 내고 검을 뽑았다.

"헉!"

"죽고 싶지."

뒤에서 아나타의 목에 용천검을 겨눈 현수가 잔인하게 웃었다.

"우리 다시 이야기해 볼까?"

"무슨……!"

"정빈은 나의 손에 죽었다. 1황자와 대학사는 지금 어디 있지?"

현수는 지난날 자신의 손으로 정빈을 죽이면서 너무 편하게 죽였다고 생각했다.

"파라극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보아 아나타가 얼마나 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그래? 궁금한 점이 있는데, 넌 분명 파라극보다 강해 보이는데 왜 파라극의 밑에 있는 거지?"

분명 현수가 느끼기에는 아나타가 파라극보다 더 강했다. 그런 현수에게 아나타는 짧게 대답했다. 그녀의 음성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세력이 약하니까."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답이었다. 천연회의 입장도 다른 문파들과 비교해 보면 지금 아나타와 파라극의 입장과 똑같았다.

"강해지면 파라극을 칠 생각이군그래?"

"흥!"

아나타는 어느새 평상심을 회복했는지 몸을 돌려 현수를 보았다. 현수 역시 겨누고 있던 검을 거두었다.

아나타는 현수로 인해 깨어진 주안술을 사용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고생한 대가를 얻어야지. 아나타가 조금만 도와주었으면 해. 소뇌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뭐지?"

"내가 왜 너에게 알려 주어야 하지?"

"너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소뇌음사의 힘을 줄이는 일이기도 하니 나에게 말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몇날 동안 한 침상을 쓴 사이니까."

"호호! 그렇구나. 어때? 다시 한 번 붙어 보는 것이? 그럼 알려 줄 수도 있는데."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아나타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게임상으로 2주일이 현수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나타, 내가 미염술을 모르면 너에게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 그런 썩은 미소는 지우지그래. 그보다 말하는 게 좋아. 아니면 파라극에게 달려가 네가 나를 숨겼다고 말해 버릴 테니까."

"호호! 호면객, 실로 대단하구나. 그 짧은 시간에 흡정술을 익혀 나의 내력을 빼앗다니."

"아나타, 너의 내력이 아니야. 나의 내력을 되찾은 것뿐이야. 물론 내력이 조금 상승했지만 너 역시 내공이 정순해졌으니 손해는 아니라고 보는데. 그리고 시간을 끌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현수의 경고에 아나타는 파라극이 아끼는 것을 이야기했다.

"파라극이 키우는 무사들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환희영생단! 남녀 각각 1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목적은 중원에 음양교라는 신생 종교를 퍼트려 혼란시키는 것으로, 소뇌음사가 중원을 침공할 때 교두보 역할을 하기 위해서 훈련 중에 있다."

"환희영생단?"

"그렇다. 그들은 방중술과 미염공 그리고 섭혼술을 익혀 일반 양민을 대상으로 빠르게 음양교의 교리를 전파해서……."

"그럼 그들만 없애면 파라극은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겠군."

"너의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소뇌음사의 라마승들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그들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그들을 처리할 거라는 말은 안 했다. 그들의 거처는?"

아나타는 현수에게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현수는 그런 아나타를 보며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뇌음사의 본전 지하에서 그들을 양성하고 있다."

현수는 아나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천변환희미소였다. 순간적으로 방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현수는 그간 쌓인 아나타와의 정을 생각해서 아나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럼 쉬어라."

현수는 현천파열권이 실린 주먹으로 아나타의 복부를 때렸다.

"윽!"

"후후!"

고수라고 하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맞은 아나타는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현수는 아나타를 죽이지 않고 이용해서 파라극과 싸움을 붙일 생각이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의심을 많이 하는 자들이라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될 것 같았다.

"아나타의 거처에는 보석들이 있다네."

노래를 부르듯 아나타의 보석들을 챙긴 현수는 아나타의 거처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현수는 환희영생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소뇌음사의 경계는 이미 풀려 있었다. 이들은 아마 현수가 소뇌음사를 빠져나갔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커다란 환희불만이 소뇌음사의 본전을 지키고 있었다.

현수는 살황의 일기장의 추적술을 이용해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를 찾았다. 시선이 환희불로 향하자 현수는 지체 없이 환희불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참 별걸 다 만들어 놓았다니까. 엘리베이터를 다 만들다니."

정작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현수는 긴장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환희영생단에게 갔다는 것을 아나타가 파라극에게 알리는 날에는 진짜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에 그들을 베고 소뇌음사를 빠져나가야 했다. 사사혈천에서 대기하고 있는 천연회를 생각해서라도 현수는 이번에 빠져나가야 한다.

내려가는 동안 탐지술을 사용해 밑을 살핀 현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지하로 내려서자마자 몸을 숨겼다.

소뇌음사의 지하 광장은 현수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환희불이 음양 교합을 하는 동상 앞에는 단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 청동 향로가 놓여 있었다.

양쪽의 커다란 방에서 남녀가 나뉘어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문적으로 무공을 익힌 자들이 아니라 그런지 현수를 찾아내는 사람은 없었다.

댕댕댕!

커다란 종소리와 함께 양쪽 방에서 쉬고 있는 남녀가 단상 앞에 모여들었다.

현수는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을 훈련시키는 라마승이 단상의 향로에 향을 피우며 이상한 주문을 외우자, 모여 있던 남녀가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상대를 찾아 섞여 들더니 서로의 몸을 탐하는 장면이 보였다.

현수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옷을 벗으면 화면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느끼고, 곧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화면이 어두워지면 그만큼 무방비할 수밖에 없으니 현수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슈우우우!

파공성과 함께 단상에 있는 향로를 향해 강기가 날아오는 것을 본 라마승은 깜짝 놀라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강기는 단상의 향로를 부숴 버렸다.

"꺄아악!"

순간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향로에서 피워진 향과 라마승의 주문이 그들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남녀는 머리를 잡고 괴로운 듯 비명을 지르며 지하 공간의 바닥을 뒹굴었다.

현수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라마승을 제압하기 위해서 공격했다. 방중술이나 섭혼술은 몰라도 바닥에 뒹굴고 있는 남녀의 무공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뇌전류!"

"헉!"

향로가 깨져 긴장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빠른 검이 자신을 향해 쇄도해 오는 것을 보고 라마승은 놀라며 급히 단상 위로 굴러 피해 냈다.

"호심발도술!"

하지만 라마승은 자세도 잡기 전에 연이어 공격해 오는 괴한의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이미 선공을 빼앗겨 버린 라마승은 전세를 뒤집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몸을 굴려 고통에 신음하는 자들 사이로 피했다.

"팔검수화진검류!"

"크아아악!"

현수는 라마승을 죽이기 위해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그는 사람을 방패로 피해 다녔지만 현수의 검은 일절 망설임도 없었다. 어차피 그들 역시 죽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매서운 살수를 뿌렸다.

현수가 아나타와 함께 환정법을 사용해 얻은 무공은 기존의 무공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현수는 내력을 되찾은 기분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네, 네놈은!"

라마승은 사람을 방패로 삼아 조금씩 여유를 찾았기에 자신을 공격해 오는 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파라극이 말한 호면객이었다. 경장각을 불태우고 약당을 태운 바로 그놈이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기에 빠져나갔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이곳에 숨어 내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밀수인!"

라마승이 처음으로 현수의 공격에 반격을 했다. 그만큼 여유를 찾았다는 증거였다.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현수는 라마승의 공격을 피하고는 다시 거리를 줄여 갔다. 레벨은 높았지만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놈은 소뇌음사에서 맡은 직책으로 인해 레벨이 높을 뿐이다.'

현수는 레벨의 허와 실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라마승으로 인해 확인했다.

"뇌전류!"

"이놈!"

자신의 공격을 쉽게 피하고 다시 공격해 오는 놈을 보자 노기가 일었는지, 호통을 치고는 양손을 앞으로 뻗어 현수의 공격을 무마시키려 했다.

"대수인!"

콰아아앙!

뇌전류와 대수인의 충돌로 인해 지하 대전이 흔들렸다. 그 여파로 인해 남녀는 쓰러졌는데 괴로움을 호소하는 그들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쿨럭!"

라마승 역시 온전치 못했다. 가슴이 길게 베인 자신의 승포 자락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놈을!"

입에서 이상한 주문을 외우자 라마승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덩치가 더욱 커지고 온몸은 근육 덩어리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현수는 기가 질렸다.

"크크크크!"

강신술을 사용했는지 라마승의 눈은 붉게 변해 있었다. 또한 주변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쓰러진 남녀가 앞에서 거치적거리면 그들을 죽이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게 내 경험치를 먹어?"

현수는 공짜나 다름없는 경험치를 주는 상대를 라마승이 죽이는 것을 보고 맹공을 퍼부었다.

쓰러져 있는 그들은 현수에게 경험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게임이라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현수는 지금까지 자기 앞을 막는 자들은 모두 경험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베타 시절에 그만큼 악명을 떨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부담감도 줄일 수 있었다.

현수의 손에서 쏟아지는 무공들은 변해 버린 라마승에게는 크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는 있었다.

"시팔, 뭐야? 금강불괴라도 되는 거야?"

"크크크크크!"

강신술을 사용해서인지, 단순한 주먹질에 불과한 공격이지만 그 파괴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주먹에 가격당한 바닥과 벽이 부서져 나갔다.

현수는 그의 공격을 피하며 생각을 달리했다. 강신술이라는 것이 한도 끝도 없이 사용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목표를 바꾸어 쓰러져 있는 남녀를 향해 검을 움직였다.

이지를 상실했지만 요리조리 피하며 쓰러진 자들을 죽이는 놈을 보자 라마승은 더욱 흉포한 괴성을 질렀다.

"염병! 넌 나중에 처리해 줄게."

현수는 그런 라마승이 미쳐 날뛰는 것과는 상관없이 쓰러진 자들을 향해 살수를 뿌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비록 무공은 높지 않지만 쓰러진 자들의 레벨은 상당히 높았다. 아마 에피소드 3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현수는 레벨이 오르자 더욱 신이 나 날뛰었다.

"안 돼! 내 거란 말이야!"

앞에서 자신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남자를 죽이려는 라마승을 보고 현수는 검을 움직여 그를 먼저 죽였다.

200여 명의 환희영생단은 현수의 손에 그렇게 피어 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제 네놈만 남았나?"

현수는 강신술이 풀리기만을 기다리며 그의 공격을 피해 다녔다.

"크크크크!"

입에 거품을 물고 악착같이 현수의 뒤를 쫓던 라마승의 행동이 점점 둔해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강신술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뇌전류!"

"크악!"

"바보 같은 놈! 나 같으면 달아나 밖에 알렸을 것이다. 하긴 그렇게 하게 둘 나도 아니지만."

"네, 네놈에게……."

현수는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고레벨이라고 해도 이런 놈들이 많으면 별것 아닌데, 파라극이나 아나타는 정말 강해 보였어."

현수는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확인했다.

"무공서?"

현수는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주워 들고 확인했다.

"아이템 확인!"

아이템 : 환사의 술법서

등급 : 레어-최상급

설명 : 환술의 종주인 환사의 술법이 기록된 술법서.

현수는 입이 찢어져라 벌어졌다. 살황의 유일한 천적이 바로 환사였다. 그 이유는 환사의 술법에는 살황의 일기장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만일 라마승이 환사의 술법서를 완전히 익혔으면 이렇게 허무하게 현수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질도 재질이었지만, 기본적으로 환사의 술법은 무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환영술과 같은 술법이었다. 주위에 많은 환각을 만들어 내, 적을 혼란케 만드는 무공이었다. 살황의 일기장에서 환사의 술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단일 무공으로는 크게 위력이 없으나 다른 무공을 함께 겸비하면 충분히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무공이라고 했다.

구미호가 경계하는 무공을 얻었으니, 환사의 술법에 뇌전류가 가미되면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현수는 한동안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일단 무공 창에 저장해 놓고 빠져나가자."

현수가 무공 창에 환사의 술법서를 저장하고 자리를 이동하려고 할 때 라마승들이 들이닥쳤다.

현수는 살황의 일기장의 은신술을 사용해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

파라극은 지하 광장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말을 못 했다. 그의 옆에는 아나타가 함께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파라극은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는지 바람도 없는 지하 광장에서 자신의 옷이 펄럭일 정도로 기를 발산했다.

"호면객, 네 이놈!"

그 모습을 본 아나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생겼다 지워졌다.

"찾아라! 놈을 찾으란 말이다!"

콰아아앙!

성질 난 놈 옆에 있다가 뺨 맞는다고 했다. 파라극은 괜히 옆에 서 있는 라마승을 향해 일 장을 날렸다.

파라극에게 맞은 라마승은 지하 광장의 벽에 부딪쳐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다.

'빌어먹을 놈, 성질 한번 지랄이네.'

아나타는 현수가 숨어 있는 곳을 주시했다. 현수는 아나타와 시선이 부딪치자 가슴이 덜컥했다.

'혹시 내가 숨어 있는 걸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현수는 지금 움직일까도 생각했지만 상대는 아나타와 파라극이다. 아나타 역시 파라극에게 그리 좋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냥 조용히 넘어가 주기를 바랐다.

"호호호! 상공께서 아끼시는 환희영생단이 무너졌으니 소녀의 가슴이 실로 아플 뿐입니다."

아나타의 목소리는 결코 가슴 아파하는 것이 아니었다. 파라극을 조롱하는 소리였다.

파라극은 아나타를 노려봤지만 결국 아나타에게 손을 쓰지 못했다. 파라극 역시 아나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환희천궁의 힘은 서장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이라 당장 쳐 죽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이 물러가자 텅 빈 지하 광장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렇지만 현수는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다.

혹시나 모를 소뇌음사의 경계 때문이었다. 자신이 빠져나갔다고 믿었다가 당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모습을 드러낸 현수는 자신의 무공 창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환사의 술법

환영환희만술 : 1성

설명 : 적의 기억에서 가장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 적의 방심을 유도할 수 있다.

내력 -50 소모

환영사사연혼술 : 1성

설명 : 적의 눈을 속여 환상의 늪으로 인도한다. 분당 10의 체력과 내력을 줄여 적에게 상처를 입힌다.

내력 -100 소모

환영연환사혼술 : 1성

설명 : 적의 기억에서 가장 괴로운 기억을 연속적으로 떠올리게 만들어 심마에 빠져 들게 한다. 분당 10의 체력과 내력을 줄여 적에게 상처를 입힌다.

내력 -100 소모

환영무적 : 1성

설명 : 환영환희만술, 환영사사연혼술, 환영연화사혼술이 10성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사용하는 환사의 마지막 술법.

내력 -1,000 소모

현수는 환영무적을 제외하고는 지하 광장에서 한 번씩 사용해 보고 위의 분위기를 살폈다.

위에선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현수는 환사의 술법과 살황의 일기장을 함께 사용해 빠져나가려고 했다. 환사의 술법을 익히는 동시에 이 둘을 연계로 사용해서 몸에 익숙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환영사사연혼술!"

"허억!"

"뇌전류!"

"커억!

순간 덮쳐 오는 환영에 눈을 크게 뜨고 대항하는 라마승을 향해 뇌전류를 시전하며 지하 광장을 빠져나온 현수는 다시 한 번 검을 더 뿌렸다.

"크아악!"

요란하게 죽여야 이들을 데리고 사사혈천으로 들어갈 수 있어, 은밀함보다는 환사의 술법을 익히는 데 주력했다.

환사의 술법은 현수의 생각대로 참으로 멋진 무공이었다. 현수는 살황의 은신술을 사용해 몸을 숨기고 뒤이어 환사의 무공을 사용해 연속으로 공격해서 라마승들을 죽여 나갔다.

기분으로는 그냥 이들을 다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사의 술법이 성취가 낮아 라마승들은 금방 벗어났지만 그 잠깐의 틈이 현수에게는 천금과 같은 시간이었다.

라마승들의 비명이 소뇌음사에 울려 퍼지자,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 라마승들은 현수의 뒤를 쫓았다. 이들의 경신술이 빠르기만으로 최고라 할 수 있는 운중탄영신을 따라잡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이놈!"

파라극의 외침이 들려오자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머물렀던 방을 찾았다. 진으로 방비하고 있는 이상 소뇌음사의 담을 넘어 도망간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환사의 술법이 성취가 높으면 상관이 없지만, 아직 1성인 성취라 진을 뚫고 담을 넘는 것은 무리였다.

현수는 미리 준비했던 탈출로를 이용해 재빨리 소뇌음사를 빠져나갔다.

방으로 들이닥친 파라극은 탈출로를 보고 망연자실했다. 하나 이것도 잠시, 곧이어 추격 명령을 내렸다.

소뇌음사의 정문이 열리자, 많은 이들의 라마승들이 현수를 잡기 위해서 움직였다.

"훗훗! 모두를 데리고 갈 필요는 없겠지."

현수는 도망가는 도중에 그들의 수를 줄일 생각이었다. 파라극이 직접 쫓아오지 않는 이상 자신의 은신술이 들킬 염려는 없었다.

이번 기회에 레벨 업을 해서 파라극과의 차이를 줄일 생각이었다.

"크악!"

현수의 공격에 라마승 1명이 당하자, 그들은 서둘러 현수가 사라진 방향으로 쫓아갔다.

쫓고 쫓기는 상황에서는 현수는 야밤을 틈타 착실히 라마승들의 수를 줄여 나갔다.

드디어 길고 긴 여정의 끝이 보였다. 사사혈천의 현수는 탑리목 분지로 들어섰다.

현수는 천연회의 사람들에게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약속을 내일로 맞추고 실수 없이 사사혈천의 입구를 뚫고 들어가란 내용이었다.

* * *

"들어가서 바로 귀환 부적을 사용해서 귀환해. 쓸데없이 그들과 싸울 생각은 하지 말고."

건은 다시 한 번 이들에게 주의를 주고 기다렸다.

드디어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시작하자. 역발산은 놈들의 시선을 잡아. 혜련이는 역발산을 지원하고 살검이와 상검이 그리고 카오스는 놈들을 잡아. 나와 나머지는 입구를 부순다, 가자."

역발산이 먼저, 사사혈천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지키는 자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광란의 분노!"

경비 무사들이 역발산을 향해 검을 들어 공격해 들어왔다.

"금강부동심결!"

역발산을 선두로 한 세 사람은 각각 1명씩 맡아 경비 무사들의 움직임을 막고 나머지는 입구의 문을 향해 공격했다.

파앙! 파앙! 파앙!

사사혈천의 내원에서 사냥하는 유저들의 시선이 사사혈천으로 들어가는 다리로 향했다.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인가?"

방각은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또한 혁무기 역시 알고 있었다.

"크악!"

경비 무사 하나가 쓰러지자 보다 쉽게 그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콰아아앙!

"입구가 뚫렸다, 들어가자."

입구가 무너지면서 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천연회의 사람들은 지체 없이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이때를 맞추어 호면을 쓴 사람이 입구를 향해 날아왔다. 뒤에는 라마승으로 보이는 자들이 따라오고 있었고, 외곽에서 사냥하던 유저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호면객이다."

사냥을 하고 있던 유저의 외침이 사사혈천의 내원을 울렸다.

방각은 호면객을 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혁무기까지 움직였다. 호면객의 목에는 금전 5만 냥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금전 5만 냥! 그 유혹을 벗어날 수 있는 유저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수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라마승과 유저들을 보고 미소를 짓고 사사혈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쫓아라! 호면객이 사사혈천으로 들어갔다."

유저의 외침이 자극이 되었는지 사사혈천과 탑리목 분지에서 사냥하는 유저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사사혈천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있다 당한 것은 사사혈천의 광소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다. 그는 황궁에서 1황자가 쫓겨난 이후 자신이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크크! 지루했단 말이지."

광소는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자들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잘 보이지도 않던 사사혈천의 무사들이 곳곳에서 나와 유저들을 상대했다. 사사혈천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이미 천연회의 사람들은 입구를 뚫고 들어가 귀환 부적을 사용해 귀환해 버린 상태였고, 현수 역시 몸을 숨기고 호면을 벗었다. 그러고는 이들만의 잔치를 틈타 사사혈천을 빠져나온 뒤 천연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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