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절단
현수가 환희천궁으로 잠입해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체적인 지형을 살피는 일이었다. 그래야 혹시라도 빠져나가는 데 불편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수는 족히 100년 이상은 세월을 보낸 것 같은 나무 위로 올라가 위에서 환희천궁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음!'
환희천궁의 건물들은 특이하게도 모두 니은 자로 겹겹이 포개어져 있는 듯한 형태였다. 아마 침입자가 들어와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한 진법의 배열로 지어진 듯 보였다.
'천환역행수로진이다.'
현수는 환희천궁의 건물 배치를 보고 설치된 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귀곡자의 진법을 통달하고 있어도 진이 발동되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화령검객과 함께한다면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건물 사이사이로 보이는 환희천궁의 궁도들 역시 모두 고수들로 보였다.
'레벨이 90대 정도로 보이는데.'
현수는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사사혈천이 있는 내원에서 80대의 몬스터와 싸워 본 경험이 있어, 함부로 움직였다간 얼마 가지 못해 들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최대한 조심해서 화령이가 있는 곳을 찾은 다음에 애들과 다시 이야기해야겠어.'
현수는 운중무영보를 사용해서 한 건물의 지붕으로 내려갔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화령검객이 말한 정자와 화원이 있는 건물을 찾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으며 천천히 움직이던 현수는 조금 이상한 점을 느꼈다.
환희천궁의 궁도들이 모두 90대 고레벨의 고수들은 아니었다. 70대의 고수들도 보였고, 심지어는 무공을 모르는 NPC들까지 섞여 있었다.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90대의 고수들이 정예 궁도들이고 60~80대의 고수들이 일반 궁도들인가 보다.'
현수는 사사혈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다.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80레벨 대의 고수들이었다고는 하지만 사사혈천 안에는 환희천궁처럼 그들보다 낮은 레벨의 NPC들 역시 있지 않을까.
한참을 돌아다닌 현수는 화령검객이 말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화령검객의 모습을 본 현수는 어이가 없었다.
화령검객은 양쪽에 미녀들을 끼고 하하 호호 웃으며 즐거운 표정으로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다. 화령검객과 함께 있는 NPC들은 무공을 익힌 환희천궁의 궁도들이 아니었다.
-야! 즐거워 보이네.
화령검객은 현수의 전음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치겠다. 할 일 없이 이렇게 노는 것이 얼마나 지겨운지 알았다.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화령검객의 말이 엄살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화령검객의 말을 듣고 나니, 전에 다녔던 선박 회사 사장님의 말이 생각났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냐?
-글쎄요. 전 딱히 사람이 불쌍하다고 느끼지 못해서.
-난 할 일 없이 노는 사람이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해. 수억 만금이 있으면 뭐 하냐? 삶의 의미가 없잖아. 뭐, 노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것도 일이 년이지. 안 그래? 이렇게 젊었을 때 고생해 봐야 돈의 소중함도 아는 거야.
-그런 것도 같네요.
-현수야, 비록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큰일이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오물을 치우는 일을 하더라도, 내 손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껴야 진정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그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현수는 비록 게임을 통해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화령검객의 전음이 현수의 생각을 깨웠다.
-야! 언제 구해 줄 건데?
-무공도 모르는 것 같은데 그냥 혼자 도망치지 그랬냐?
화령검객 역시 탈출을 한 번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 발 못 가서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고수들이 있어, 주위에.
순간 현수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자신이 주변을 살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현수는 고수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주위를 다시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살황의 일기장의 탐지술을 사용해 다시 한 번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없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어.
-그래, 그럼 지금 시작할까?
화령검객은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현수에게 물었다.
-아니, 지금은 그냥 물러나야겠어. 소뇌음사에 갇혀있는 살검이나 역발산이 죽을 수도 있으니, 일단 위치만 확인하고 두 곳 동시에서 일을 시작해야 돼.
-빨리 좀 구해 주라. 나 정말 미치겠다.
현수는 알았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는 온 순서의 반대로 움직여 환희천궁 밖으로 벗어났다.
환희천궁 밖으로 나온 현수는 일단 친구들과 만나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강한 무력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모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소뇌음사에 들어가서 뇌옥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고 동시에 일을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소뇌음사에 들어가려고?"
현수의 생각을 읽었는지 카오스가 물었다.
"그래. 무작정 들어가면 모두 죽을 수도 있어. 일단 최대한 알아봐야지. 시간은 조금 걸려도 그게 안전할 것 같아."
"그렇게 강해 보여?"
"응, 대충 보았는데 90레벨은 되는 것 같았어."
구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다치는 이들도 없어야 된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가 혹시 1명이라도 죽는다면, 아니 한 것만 못하다.
"일단 소뇌음사가 있는 곳으로 가자. 여기서 이야기해 봤자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건의 제안으로 소뇌음사로 모두 자리를 옮겼다.
현수는 소뇌음사로 가는 동안에도 머리를 굴렸다.
높은 산 정상에 자리 잡은 소뇌음사는 마치 국경의 성벽을 쌓아 놓은 듯했다.
산 정상이라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탁 트인 전망으로 인해 경비를 서고 있는 라마승들의 눈을 피해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사사혈천의 80레벨 경비 무사들이 현수의 기척을 느낄 수 있다면, 이들 역시 현수가 숨어들어 가는 기척을 느낄 수 있다고 봐야 한다.
"더 힘들겠는데."
"입구가,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가?"
굳게 닫힌 소뇌음사의 정문을 바라보고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가 너무 급하게 행동해서 그런 거 아닐까? 사실 조금 서두른다는 생각도 들어. 한발 물러나서 생각해 보자."
수금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모두 나름대로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성이라는 전제를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앞서 생각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조급함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현수를 비롯한 건과 천연회의 사람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맞아, 금인이 말대로 너무 서두른 것 같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야 돼."
그들은 일단 후퇴해서 근처 객잔에 방을 잡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소뇌음사로 들어가는 것이 당면 문제였다. 쉽게 들어갈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모두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현수야, 황궁을 이용하자."
"황궁?"
건의 말은 이러했다.
중원 황궁 사자의 자격으로 소뇌음사를 방문하자는 것이었다. 예부터 중원은 변방의 나라와 형제결연을 맺어 그 우의를 돈독하게 다졌다. 말은 형제결연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형의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는 데 그냥 있을 리 만무하니 그걸 이용해 소뇌음사에 들어가 두 사람을 빼내 오자는 말이었다.
"음!"
"그렇게 하자.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사신의 자격으로 모두 들어가 구해 오는 거야."
"구한 다음에 곧바로 환희천궁으로 가서 화령이를 구하고 중원으로 넘어가면 어떨까?"
현수는 잠시 생각했다. 무엇인가 명분이 있어야 했다. 옛날 조정에서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그냥 보낸 게 아니라는 것쯤은 현수도 알고 있었다.
"명분이 없어."
"명분?"
"그래, 현실의 역사책 같은 데서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사신을 보내 감찰하거나 또 우의를 다졌지만, 지금 우리가 소뇌음사로 들어가기에는 마땅한 명분이……."
그때 카오스가 현수의 말을 끊고 이야기했다.
"왜 없어. 1황자하고 대학사가 도망갔잖아. 죄인이 세외로 도망갔으니 그들을 찾는 데 협조해 달라는 명분을 만들면 되잖아."
카오스의 말을 듣고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돌파구가 마련된 셈이었다. 현수는 이런저런 내용을 전서구에 적어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자! 우리는 연락이 올 때까지 사냥을 하면서 기다리자."
건의 말대로 모두는 오랜만에 파티를 맺고 사냥에 나섰다.
서장에 있는 몬스터는 사사혈천의 몬스터와 같은 레벨이지만, 파티형 몬스터가 아닌지 두 배의 경험치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사냥을 해서인지 사사혈천에서 주는 경험치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아이템은 한 단계 밑 등급이 나왔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건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2레벨 업을 할 수 있었다. 건은 1레벨 업을 해서 90레벨이 되었다.
"경험치는 사사혈천과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는데, 확실히 아이템은 좀 떨어진다."
"그래?"
사사혈천에 가지 못한 이들은 그곳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거긴 어때?"
아직 사사혈천에서 사냥을 못 해 본 수금인이 물었다. 아직 자세한 정보가 올라오지 않아서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곳에 있는 몬스터들은 파티형 몬스터로, 경험치를 많이 주고 아이템 등급은 일반 레어 급이지. 하지만 몬스터가 강해서 이곳에서처럼 이런 식으론 사냥을 못 해."
아이템 등급이 일반 레어 급이라는 말에 수금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야! 그럼 아이템은? 구한 거 없어?"
"장원의 창고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너희들이 필요한 아이템은 별로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가게 되면 살펴봐!"
차마 다른 사람에게 그 좋은 아이템들을 주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건이었다.
현수는 조금 찔리는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군!"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령이 도착한 것이었다.
사절단은 200명에서 300명 내외로 구성된다. 정2품에서 3품의 관리가 그 사신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황제가 전하는 내용을 말하고, 혈맹 또는 동맹을 다지는 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현수가 필요한 건 소뇌음사에 들어갈 빌미였다.
현수는 황제에게 부탁해서 역발산과 필살검 그리고 화령검객을 황궁을 모독한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미 화령검객이 있는 곳을 확인했으니, 역발산과 필살검 역시 소뇌음사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폐하께서 조심하라 하셨습니다."
"황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모두는 현수가 과연 황궁에서 어떤 위치에 올라 있는지 궁금했다.
"야! 너 정말 황궁에서 직책이 뭐냐?"
슈슈슈!
"헉!"
"군께 함부로 하지 마라. 비록 군과 친구지간이라 할지라고 군께 무례를 범하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중죄로 다스린다."
수금인은 령의 공격에 얼굴이 붉어졌다. 싸워서 못 이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능은 물러서라 말하고 있었다.
'뭐야, 이놈!'
"령, 그만 해.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막 해도 되는 사람들이야. 현의태감을 벌할 때 도와준 사람들이니까."
령은 검을 거두었다.
"하지만 군께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폐하뿐입니다."
령의 태도에 모두 어이가 없는지 현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렇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천밀위 수장인 령이야. 가끔 나타나는 것은 봤지?"
현수는 령을 소개하고도 조금 어색한지 화제를 돌렸다.
"먼저 우리 모두는 금의위가 되어 소뇌음사에 들어갈 거야. 그러고 나서 죄인을 넘겨받을 거야."
죄인을 넘겨받는다는 말이 조금 이상한지 건이 다시 물었다.
"죄인을 넘겨받아?"
"응, 내가 역발산이랑 화령이 그리고 필살검을 황궁을 모독한 놈으로 만들어 버렸거든."
또 한 번 모두의 표정이 멍해졌다.
"죄인이라… 어찌 보면 가장 안전한 방법이네."
"일단 7일 정도 소뇌음사에 머물 거니까, 소뇌음사에 대해서 최대한 알아봐!"
"이제 소뇌음사로 들어가는 일만 남았나?"
"먼저 시전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지. 다른 건 령이 다 준비해 왔으니까 객점을 잡아 하루 쉬고 내일 들어간다. 모두 책잡히지 않게 조심해. 안에 들어가서 일이 꼬이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니까."
현수의 협박성 말에 건을 제외한 모두가 긴장했다. 결코 일이 꼬여 죽는 게 두려워 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 * *
천금뇌옥의 생활은 3황자에게 독기만을 남겨 주었다. 그는 충빈의 색노로 전락해 버렸다.
충빈의 하루 일과는 3황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시작해서 괴롭히는 것으로 끝났다.
"으으…으으윽!"
고통이 그를 깨웠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깨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3황자는 미약한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3황자는 이미 여러 번 이런 일을 경험했는지 고통이 줄어들 때까지 그냥 눈만 뜨고 있었다.
아마 자신은 충빈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충빈은 사람들을 시켜 자신을 거처에 던져 놓았을 것이다.
"크크크!"
3황자는 자신의 처지를 비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하면서 3황자의 의지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이곳을 탈출하여 꼭 용상에 앉으리라는 결심이 덧없게 느껴졌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탈출은 고사하고, 죽지 않기 위해서 충빈의 발을 핥고 있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죽을 생각도 해 보았지만 3황자는 결코 그러지 못했다.
죽은 어머니의 복수는 꼭 해야 했다. 아마 그런 삶의 의지마저 없었더라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크크크!"
"자신의 처지가 못마땅해서 웃는 것이냐?"
3황자는 순간 고개를 돌렸다. 몸이 으스러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참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화가 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마른 몸에 옷이라고는 하체만 가린 하의를 입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이놈!"
갑작스러운 호통에 3황자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자신이 일어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고개만 돌려도 몸이 으스러질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온몸을 움직여 일어났는데도 전혀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네놈이 정말 이 나라 황제의 아들이란 말이냐?"
"……!"
3황자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노인의 호통에 무엇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이더냐? 역모를 계획했더냐?"
"그렇습니다."
3황자는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그는 왜 자신이 처음 보는 노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인지, 놀라서 흠칫했다.
"무엇이 부족해서 역모를 계획했더냐? 아랫것들이 너를 충동질해서이더냐?"
"아닙니다, 마음이 시켜서입니다. 천하를 얻어라 마음이 시켜서입니다."
3황자는 노인을 보고 말했다. 노인은 당당하게 말하는 3황자의 모습을 보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 마음이 시키면, 그냥 하면 다 된다더냐?"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이곳에 온 것이겠지."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3황자는 소리쳤다.
"아닙니다. 그놈만, 그놈만 없었다면 틀림없이……!"
"갈!"
"커억!"
노인의 일갈에 3황자는 뒤로 밀려나 석벽에 부딪쳤다. 하지만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분명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고통은 없었다.
역모를 꾸밀 대범함이 있는 자가 변명을 늘어놓다니, 노인이 보기에는 참 못나 보였다.
그래도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는데 3황자의 모습을 보고 실망이 컸다.
3황자는 노인이 무공을 시전했다는 사실에 놀라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무공을 폐지한 후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수모를 당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왜? 내가 무공을 사용해서 놀란 것이냐?"
"……!"
3황자는 정체 모를 노인을 살피기에 급급했다. 노인이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 역시 잃어버린 무공을 되찾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하늘이 정한 사람만이 될 수 있는 것임을 아직 모른단 말이냐?"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하늘이 정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행했을 뿐입니다."
노인은 3황자의 의지를 볼 수 있었다.
"아직도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이냐?"
"죽는 날까지 가슴에 품을 것입니다."
"허허!"
노인은 3황자에게 다가가 몇 군데의 혈도를 짚었다. 그러고는 그의 뒤로 돌아가 등에 손을 대더니 진기를 불어 넣어 주는 것이었다.
"들어라. 나 역시 황제의 서출로 태어난 몸이다."
그것은 등을 통해 들어오는 막대한 진기보다 더 놀라운 말이었다.
"으응……!"
"제황력을 운기하여라!"
3황자는 제황경의 심법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진기를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굳이 황제가 될 필요는 없다. 황제는 하늘이 정한 인물만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림이라는 곳 역시 또 다른 세상이니 그곳에서 황제가 되어 보는 것도 괜찮겠지."
3황자는 노인의 말을 계속 들을 수 없었다. 충빈에게 매일같이 시달려 몸이 쇠약해진 그는 노인의 진기를 받아들이면서 기절해 버렸다.
하지만 운기하던 제황력은 계속해서 노인의 진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 무황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증손자여, 부디 황궁보다는 무림에서 그 뜻을 펼치기 바란다."
자신을 무황이라 말한 노인은 3황자의 등에서 손을 거두고, 한쪽으로 편하게 자세를 잡더니 눈을 감았다.
본신의 진기를 모두 3황자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그 역시 황족으로 황궁의 분란을 원치 않았다. 다만 자신의 증손자인 3황자가 매일같이 당하는 꼴에 연민을 느꼈다.
어차피 천수는 정해져 있으니 그래도 혈연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3황자에게 물려주고 이 세상과 맺은 인연을 끝내려 한 것이다.
고오오옹! 우드드득!
3황자의 전신에서 빛 무리가 생겨 그의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아마 환골탈태를 거치는 과정이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빛 무리가 줄어들자, 가부좌를 하고 공중에 떠 있는 3황자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연꽃이 그를 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3황자는 뱀이 허물을 벗듯 한 겹, 한 겹 벗기 시작했다.
총 네 번의 허물을 벗은 3황자는 천천히 하강했다.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3황자가 감고 있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노인을 찾았다.
"감사합니다."
단지 그 말뿐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진기를 운용해 보던 3황자는 크게 웃었다. 그는 머릿속에 기억된 수많은 무공을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제발……."
한 여자가 한 남자의 발밑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3황자와 충빈이었다.
3황자가 무공을 찾은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천금뇌옥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놈들을 쳐 죽이는 일이었다.
"살고 싶으냐?"
3황자의 질문에 충빈은 고개를 들었다.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마치 야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려 주세요, 황자님!"
"벗어라!"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고 있는 충빈은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미 자신의 몸은 여러 사람이 거쳐 갔다. 충빈은 수치심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살아야 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걸치고 있던 옷을 다 벗고 3황자를 보았다.
"핥아라!"
3황자는 엎드려 있는 충빈의 얼굴에 자신의 발을 가져다 놓았다.
자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3황자였다. 만약 무황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충빈은 두 손으로 3황자의 발을 감싸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악!"
3황자의 발이 충빈의 얼굴을 후려 차 버렸다. 하나, 충빈은 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어 와 3황자의 발을 감싸 잡았다.
"하하하하하!"
천금뇌옥에서 일어난 작은 혈풍이 곧 세상을 뒤집을 만한 혈풍으로 바뀔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은 천금뇌옥에서 혈풍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 * *
소뇌음사에 들어온 현수를 비롯한 천연회의 사람들은 소뇌음사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현수는 소뇌음사의 주지인 파라극을 만나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했고 협조를 부탁하는 중이었다.
"이거,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서장의 패자이신 파라극 님의 도움 부탁드립니다. 여기 폐하의 서신이 있습니다."
현수는 황제가 보내 준 서신을 파라극에게 넘겨주었다. 현수는 파라극이 과연 얼마나 강한 고수인가를 한번 가늠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이들이 역발산을 비롯한 다른 이들을 풀어 주지 않으면 어차피 한 번 소동이 일어나야 했다. 현수는 그때를 기다렸다.
파라극은 서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황실을 모독하고 역모를 꾸미던 1황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놈들입니다. 사전에 역모가 차단되어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1황자를 잡기 위해 보냈던 황궁의 고수들을 죽여 1황자가 세외로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음, 반역이라니… 간악무도한 놈들이군요."
"그러니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저녁에 만찬을 준비했으니 참석하시어 오시는 동안 쌓인 여독을 푸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준비가 끝나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현수는 파라극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일행이 모여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모두 소뇌음사를 이미 한 바퀴 돌아보았는지 서로 알아 온 정보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왔어? 어때?"
"도와준다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 일단 우리끼리 모르게 최대한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현수는 파라극에 대해서 느낀 것을 모두에게 말해 주었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 조금은 이상할 정도였다.
"그래? 혹시 잘못 본 것 아니야?"
"아니, 그렇게 강한 것 같진 않았어. 그 자리에서 한번 붙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니까."
한 지역의 패자에게서 강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런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정말 강하지 않거나 아니면 당사자가 아닌 경우.
"파라극이 아닐지도 몰라. 우리를 방심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보냈는지도 모르지."
"건아, 그것도 이상하잖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줄 모르고 있는데 우리의 방심을 유도한다는 말은 조금 이상한데?"
"그건 금인이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카오스 역시 수금인의 말에 찬성했다.
"그렇게 생각해?"
"우리를 경계할 이유가 없지. 고작 죄인을 잡으러 왔는데 경계를 한다. 그럴 이유가 있나?"
무슨 생각으로 말했는지 궁금한 듯 모두 건을 재촉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에서는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냈지.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들의 말은 한결같았어.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났어."
"이건 다른 문제라고 보는데?"
카오스가 다시 물었다.
"아니야, 동영이나 서장은 중원을 침략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그런 시점에서 우리가 황제의 명으로 이곳에 왔는데, 전부를 보여 줄 수는 없지. 그리고 황군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 무림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상대하려면 숨기는 것이 맞아."
혜련은 이들의 입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파티를 해서 사냥을 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혜련은 점점 천연회라는 모임에 빠져 들고 있었다. 확실히 천연회는 천연회만의 매력이 있었다.
"오빠들, 잠시 제 생각을 한번 말해도 돼요?"
혜련의 말을 듣고 모두의 시선이 혜련에게 집중되었다.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혜련은 얼굴을 붉혔다.
"당연하지, 혜련이 역시 우리 천연회의 가족이니까."
"처음에 에피소드 2는 사사혈천을 막는 스토리로 전개될 거라 했잖아요?"
"그랬지."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소뇌음사와 사사혈천이 붙게 하는 거예요."
혜련의 말을 듣고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련이 말한 방법을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역발산 오빠랑 다른 오빠들을 구해 낸 후, 약간의 소란만 일으키고 사사혈천으로 도망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싸움을 붙인다, 이 말이냐?"
"네."
그런대로 괜찮은 생각이지만 확실한 계획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혜련이 말한 방법은 다소 위험부담을 안고 실행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혜련이도 머리가 좋은데? 하지만 문제가 있어. 아직 우리의 실력으로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고, 두 번째는 추격전이야. 사사혈천까지 가는 거리를 생각하면 힘들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혜련이 너를 보호해 줄 수가 없어. 솔직히 우리들 역시 이들과 부딪쳐 싸우게 되면 이긴다는 보장은 없거든."
수금인은 혜련이 말한 계획이 실행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수는 아니었다.
운중비록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리고 확실히 이들의 힘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아니, 가능해. 내가 계획을 세우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 줄게. 혹시 모르니 다들 한번 생각해 봐. 그리고 만찬을 열어 준다고 했으니 오늘은 쉬고 내일 움직이자."
"정말 가능하겠어?"
"힘들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일단 쉬자."
시간이 흐르자 만찬이 곧 열릴 거라고 한 사람이 알려 왔다. 대충 의복을 갖추어 입고 그와 함께 만찬이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소뇌음사가 절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모두 만찬이라고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찬이 열리는 연회장에 도착한 모두는 입을 크게 벌렸다.
온갖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고 악사들이 연주하는 곡에 맞추어 무희들이 현란하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헛! 야! 이게 다 뭐냐? 여기가 절이 맞냐?"
"환희천궁과 관계가 있다고 하잖아. 이 정도는 기본이지."
수금인은 웃는 얼굴로 춤을 추고 있는 무희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음!"
현수는 무희들이 추는 춤을 보고 빠져 드는 자신을 느꼈다.
'헛! 보통 춤이 아니다.'
고개를 흔든 현수는 친구들을 보았다.
정상적인 사람은 둘뿐이었다. 건과 혜련은 무덤덤하게 서 있었고, 나머지는 침까지 흘리면서 무희들의 춤을 구경했다.
현수는 건의 옆으로 가서 조용하게 속삭였다.
"어때?"
"섭혼술이 가미된 춤같이 보인다."
이미 건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현수는 조금 전 건이 언급한 방심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자식들, 아예 턱이 빠질 것처럼 보는구나. 깨워야 되는 것 아니야?"
"그래야지. 혜련아, 가서 오빠들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어."
건은 혜련에게 모두를 깨우라고 시켰다. 아무래도 여자인 혜련이 이들을 깨우는 것이, 섭혼술이 가미된 춤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을 알리는 한편,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이 연출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혜련은 사정없이 꼬집어 넋이 나간 사람들을 깨웠다.
-조심해라. 섭혼술이 가미된 춤이다. 그리고 긴장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여차하면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
겨우 정신을 차리는 이들에게 건과 현수는 전음을 보냈다. 소뇌음사가 이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에 가서 앉았지만 약간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티 내지 마.
현수는 모두에게 다시 전음을 보내고 주위를 살폈다. 현수의 옆에 파라극이 앉아 술을 권했다.
"자, 한잔 드십시오. 우리 서장과 중원을 위해 술잔을 들어 올립시다."
"하하! 좋습니다. 자, 모두를 위하여!"
현수는 자연스럽게 잔을 높이 들어 모두에게 권했다.
만찬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현수의 옆에 앉아 있는 파라극과 똑같이 생긴 자와 대학사였다.
"저놈은……!"
"아는 놈입니까?"
알다마다. 놈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는데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대학사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놈 때문에 우리가 이리로 피신했습니다."
"오호! 그래요? 저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군요."
"네?"
대학사가 파라극을 보았다. 파라극의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놈 덕분에 나의 두 번째 부인을 얻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건……!"
대학사는 파라극의 두 번째 부인이라는 말에 인상이 구겨졌다.
"걱정 마십시오. 두 번째 부인이라고 해도 사실 첫 번째와 같지 않습니까? 환희천궁의 궁주인 아나타가 첫 번째 부인이라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정략적인 것뿐이니까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장인어른? 저들을 그냥 죽여 드릴까요?"
조금은 비꼬는 듯 말하는 것이 대학사의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힘이 없는 자신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만사신군의≪악마록≫을 얻기 위해 떠난 1황자가 그것을 얻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저놈을 여기서 죽이면 중원의 황제가 군대를 일으켜 이곳을 짓밟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조용히 물러가게 해야 합니다."
"음!"
파라극 역시 아무리 강해도 중원의 군대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 저들이 찾는 인물들을 넘겨주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들이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 우리가 들킬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파라극은 현수를 보았다. 연방 웃고 즐기는 모습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현수보다 그 옆에 있는 놈이 더 위험하게 보였다.
"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1황자님은 보이지가 않는군요."
"중원으로 보냈습니다. 예전에 친분을 다졌던 무림의 문파들을 둘러보고 올 것입니다. 변장을 했으니 걱정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하하! 전 또 파사의 신전에서 1황자님과 비슷한 모습을 한 사람을 보았다는 정보가 있어 잠깐 놀랐습니다. 하하하!"
파사의 신전이라는 말을 들은 대학사의 얼굴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소뇌음사의 경장각에서 만사신군의≪악마록≫이 파사의 신전 지하에 묻혀 있다는 정보를 얻은 1황자가 그리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혹시 모든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대학사는 파라극을 보았다. 마치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니 내심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시지요. 이미 확인할 건 다 했으니, 전 부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겠습니다."
대학사는 몸을 돌리면서 말하는 파라극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부디 1황자가≪악마록≫을 얻기를 소원하며 파라극의 뒤를 따랐다.
현수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찾기는 힘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누굴까?'
연방 잔을 들어 올리는 가짜 파라극의 행동에 따라, 현수 역시 이내 생각을 접고 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만찬을 마친 현수는 생각을 정리했다. 혜련이 언급한 사사혈천과 소뇌음사의 격돌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건이 현수의 옆으로 다가왔다.
"낮에 혜련이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
"사사혈천이랑 싸움을 붙이는 것?"
"그래, 파라극이 심적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일이면 좋겠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 그것만 찾는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
건은 현수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다. 심적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봤자 한정되어 있다. 혈연이나 지연에 관련된 사람이거나, 소뇌음사의 신물.
"소뇌음사의 신물을 탈취하는 건 힘들고 주위 사람을 노리는 것이 어떨까?"
"주위 사람?"
"그래, 혹시 아냐? 숨겨 둔 아들이라도 하나 있을지. 허구한 날, 응응 하는데."
"한번 알아봐야겠네. 참, 그리고 난 이곳에 있을 동안 지둔술을 사용해서 밖으로 탈출로를 만들 거야."
"탈출로?"
"응, 일을 벌이려면 먼저 모두가 소뇌음사를 빠져나간 후가 좋을 것 같아. 여러 사람이 움직이면 아무래도 불편하겠어. 특히 혜련이는 의원이니 보호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건은 현수를 보았다. 항상 일을 시작하면 그가 앞에서 움직인다. 물론 자신이 있어서 선뜻 나서는 이유도 있겠지만, 결코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자신 있어? 몬스터 NPC들은 장난이 아니던데. 절정의 고수들을 상대해야 돼."
"부딪쳐 봐야지. 그리고 싸운다면 몰라도, 그냥 피하기만 하면 아마 가능할 것 같다."
"그래, 그럼 우리가 도와줄 것은?"
"사사혈천의 입구를 뚫어 주었으면 해. 내가 사사혈천으로 소뇌음사의 NPC들을 끌고 갈 때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서 말이야. 그리고 귀환 부적을 사용해서 귀환해 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참, 그리고 앞으로 건이 네가 소뇌음사의 사람들을 만나. 난 이곳의 주요 시설을 파악할 거니까."
"음!"
건은 현수의 생각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확실히 성공을 한다는 말은 할 수 없어도, 막연하게나마 가능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현수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다음부터는 건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의 몫이다.
"우리는 여기서 나가는 대로 준비하고 있을게. 그래도 조심해라."
"알았어. 내가 전서구를 보낼게."
"걱정 마라. 확실하게 살길을 만드는 데 신경 써. 사실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뜬금없는 건의 말이었다.
"뭐가?"
"한 10년만 젊었어도 이 재미를 더욱 오랫동안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가상현실 천!
게임 전문가들은 천을 최고의 게임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70년대는 새로운 예술과 산업을 위한 무대가 마련된 시기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각 분야에서 초기 개척자들이 미래를 향해 불확실한 항해의 첫걸음을 딛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전자 게임이었다.
1972년, 놀란 부쉬넬은 자신의 첫 게임으로 퐁이라는 전자 게임을 선보이며 전자 게임의 열풍을 몰고 왔다. 그리고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전자 게임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1990년대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비롯해 RPG(롤 플레잉) 게임과 퀘스트를 주로 이룬 어드벤처 게임 등 게임의 바다를 이룰 만큼 중흥기를 맞았다.
2000년대에 한국은 IT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불법 복제와 오토 마우스라는 자동 사냥 프로그램의 등장으로 생각지도 못한 타격을 입었다.
자동 사냥 프로그램으로 인해 자신이 게임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게임을 실행하니 자신의 여가 생활을 즐기는 유저들은 자동 사냥 프로그램의 사용자에게 밀려 그 흥미를 잃어버렸고 점점 유저들은 떠나갔다.
그 후로 게임 산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2020년, 일본이 처음으로 가상현실을 이용한 대전 격투 가상현실 게임 '무사도'를 선보였다. 사람들은 무사도에 열광했고 그 사건으로 인해 다시 게임 산업은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가상현실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불법 복제와 오토 마우스라는 자동 사냥 프로그램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유저의 뇌파를 이용하기 때문에 유저가 접속해야만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때부터 전 세계의 게임 산업은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IT 강국인 한국 역시 가상현실 게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2030년, 가상현실 천이라는 게임으로 그 꽃을 다시 한 번 피웠다. 사람들은, 이런 게임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가상현실 천을 능가하는 게임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다만 비슷한 수준의 게임이 나올 것이라 예측했다. 하나, 세상은 1등이 아니면 알아주지 않는다는 정설에 입각해 게임 전문가들은 천을 최고의 게임이라고 인정했다.
"아직 미련이 남아?"
"당연하지. 재미있잖아. 세상에 어떤 게임을 이렇게 머리 싸매 가면서 하냐?"
"그렇긴 하다. 나 역시 천이라는 게임이 처음이지만 어쩔 때는 온몸에서 전율을 느낄 때도 있지. 성취감 같은 거 말이야."
"말 나온 김에 사법 고시 때려치울까?"
건의 너스레에 현수는 웃었다.
"수아는 어떻게 하고?"
"아! 그게 문제다. 한 2년 죽어라 공부해서 시험 치고 다시 복귀해야지."
"고맙다."
"뭘, 친구잖아."
현수는 알고 있었다. 왜 건이 자신에게 이런 넋두리를 하는지. 그런 건이 항상 고마웠다.
"간다. 밤늦게 머리 굴리면 머리카락 다 빠진다. 막히는 것 있으면 서로 의논하면 되니 오늘은 그냥 쉬어라."
"그래."
현수는 접속을 해제했다.
확실한 퇴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야와의 대화가 필수였다. 혼자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하는 게 편했고 또 야의 조언을 구해 계획을 마무리할 심산이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조심스럽게 말한 현수는 혹시 야의 잔소리를 들을까 봐 눈치를 살폈다.
-그냥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래, 소뇌음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뭘까? 그것이 알고 싶어."
이제껏 야에게 당해 온 경험의 노하우로 가장 먼저 중요한 부분을 물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소뇌음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주인인 파라극입니다.
"그건 아는데, 아직 내 실력으로는 파라극을 어떻게 해 볼 자신이 없어. 아니, 싸우면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데 온전하게 이길 수 없다는 거지. 그럼 나 역시 소뇌음사 라마승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돼. 그것 말고 또 다른 것은 없을까?"
현수는 1 : 1로 싸워서 누구에게 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 이 두 무공과 자신이≪만자무서≫로 만든 무공이라면 레벨이 낮아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다수와의 싸움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저 몸만 빼는 것이라면 가능해도, 싸워서 이기기에는 레벨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어 무엇이라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그냥 소뇌음사의 보고를 터는 것이 어떻습니까? 무공서나 영약실, 기타 등등을 털면 눈이 뒤집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냥 훔쳐?"
-꼭 훔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훔쳐 낸다고 해도 팔지 못합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태우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현수 님께서 소뇌음사의 무공서를 한 번 정도 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소뇌음사의 무공서는 훔쳐도 팔지 못한다. 그랬다간 BS에서 당장 추적해 들어온다. 그렇다고 태우는 것 또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련을 두면 결국 아무것도 못 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현수의 마음을 알아차린 야였다.
"그래, 예전엔 이런 생각조차 안 했어. 네가 괜히 생각 없는 놈이라고 구박해서 미련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잖아."
사실 현수도 이런 게 싫은 건 아니었다.
이제 살살 다른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여기서 얼렁뚱땅 질문하면 틀림없이 야의 잔소리가 나올 것이다.
"야, 그런데 10개의 던전 중에서 몇 개나 나왔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현수 님께서는 2개나 갖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2개나 1개나 별 차이가 없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어. 살황의 일기장 역시 운중비록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잖아."
-그렇긴 합니다. 그래도 2개와 하나는 기분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야, 다른 무공들로도 소뇌음사에서 소동을 벌이고 도망칠 수 있을까?"
현수는 말을 해 놓고도 야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잔소리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야의 잔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내심 쾌재를 부르는 현수였다.
-충분합니다. 같은 10개의 무공이라고 해도 살황의 일기장과 운중비록이 다른 무공들에 비해 한 수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무공들을 12성까지 완전히 익히면 그냥 쳐들어가서 부숴 버리고 나올 수 있습니다.
현수의 눈이 반짝였다. 야는 알고 있었다. 10개의 무공이 12성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12성? 10성까지잖아."
현수는 모른 척 물었다.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은 11성인 상태에서 아무리 사용하고 숙달해도 12성으로 올라가기는 요원했다. 혹시나 야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떠본 것이다.
-12성까지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10개의 전설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초절정의 무공은 천에서 넘쳐 납니다. 그럼 10개의 전설이라 불리는 무공들은 그 무공들과 차별을 두어야 한는데 가장 쉽게 차이를 둘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무공의 성취도입니다. 이건 무협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다 짐작하는 것입니다.
'젠장.'
졸지에 세 살짜리 어린아이보다 못하게 된 현수가 연방 투덜거렸다.
-그리고 벌써 일을 벌여 놓고 탈출로를 생각하고 물으신 것 같은데, 그런 잔머리는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킁!"
역시나 야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현수는 야를 살 때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위로했다. 거금 100만 원이라는 돈을 주고 샀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래그래, 야! 좋아, 다 좋아. 잔소리하는 것은 좋은데 하고 나서 가르쳐 주라. 잔소리만 하고 끝내지 말고."
결국 현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야에게 하소연했다.
"지둔술로 땅을 파서 소뇌음사의 밖까지 탈출로를 만들 생각이야. 한데 소뇌음사의 고수들이 과연 그것을 모를까?"
-은밀히 진행한다면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연회의 모든 사람이 움직인다면 힘들 것입니다.
"땅을 파서 일단 길을 만든 후 돌아가는 척하고, 내가 다시 소뇌음사에 잠입해서 네가 말한 것처럼 일을 벌일 생각이야. 그래야 의심을 덜 받을 것 같아. 그러고 나서 건이랑 다른 애들이 사사혈천의 입구를 뚫는 동안 내가 소뇌음사의 고수들을 그리로 유인해서 싸움을 붙인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생각이야."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 돌아간 후에 일이 벌어지면 과연 소뇌음사에서 현수 님을 쫓으려고 하겠습니까?
현수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다 돌아가고 나서 일이 벌어졌는데, 과연 누가 현수 일행이 한 것이라 생각할까?
"혹시 탈출로가 발견되면?"
-다 만들기 전에 들통 날 겁니다. 혹여 일을 벌이고 나서 탈출로가 들킨다고 하더라도 많은 차이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곧바로 현수 님을 추격할지 아니면 힘을 모아 중원으로 쳐들어올지 예상하기 힘듭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난제를 만났다. 현수는 야의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경험상 지금쯤 야에게서 해답이 나올 시간이었다. 역시나 현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야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호면을 이용하십시오. 호면객이라면 처음부터 현수 님께서 무공을 숨길 필요도 없습니다. 소뇌음사에서도 호면객의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서 사사혈천으로 들어가면, 사사혈천과 관련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호면객을 사사혈천과 연관 지을 것입니다. 혹여, 호면객이 사사혈천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유저들 역시 호면객을 잡기 위해서 사사혈천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야의 말을 들은 현수의 눈에서 빛이 났다. 일석삼조라는 말은 여기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모두의 힘을 줄인단 말이지? 소뇌음사와 사사혈천 그리고 유저들까지?"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소뇌음사의 힘을 줄이는 건 조금 힘들 것입니다. 추격대라고 해야 소뇌음사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궁극적으로는 사사혈천과 유저들의 힘을 줄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고마워!"
현수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충분했다. 소뇌음사의 등장은 어차피 에피소드 3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시간은 있다. 최대한 레벨 업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레벨 업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니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현수는 컴퓨터 클리너로 야를 광나게 닦아 주었다.
"기분 좋지?"
-이왕이면 속의 먼지도 털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휴대용 에어 청소기가 얼마 안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그래, 나중에 내가 백화점이나 공구상에 가서 하나 사 올게. 또 필요한 거 있어?"
-아시지 않습니까? 왜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킁!"
인공지능 컴퓨터를 사는 건 조금 무리였다. 솔직히 야 하나도 벅찬 감이 있는데, 또 한 대를 사 와서 야에게 물들면 그때는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야! 그것 말고 다른 것 없어? 인공지능 컴퓨터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러니까 아래층 수진 씨에게 말씀을 드려서…….
현수는 그냥 못 들은 척했다. 현수의 불만 아닌 불만이, 야가 항상 아래층의 수진과 자신을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놈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환희천궁에 있는 놈과 뇌옥에 있는 놈의 말이 일치합니다. 모두 1황자를 돕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합니다."
파라극과 또 1명의 파라극 그리고 대학사가 한자리에 있었다.
"현수라는 사신이 말하기를, 놈들이 황궁의 고수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대학사는 가짜 파라극의 말을 들으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궁의 일은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끝났다. 자신들이 세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현수와 제조상궁!
하지만 제조상궁이 무림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대학사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황궁에서 보낸 그녀가 무림과 연관이 있을 리가 만무하니, 당연히 현수에게 의심이 갔다.
하나, 말을 하진 않았다. 현수가 원하는 사람들은 뇌옥에 갇혀 있는 자들이다. 원하는 것을 빨리 주고 돌려보내는 것이 더 이익이다. 잘못해서 현수에게 자신들이 발각되면 아마 황군을 대동하고 잡으러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그럼 그자들을 더 이상 잡고 있을 필요는 없겠군."
"그렇습니다."
"대학사 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대학사는 파라극의 질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히 왜 그들이 우리를 찾았는지 안 이상, 잡아 둘 필요는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놈이 있으면 불안합니다. 우리를 돕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은 고마우나, 현수 놈이 나선 이상, 오히려 우리에게는 방해가 될 뿐입니다."
파라극은 현수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그리 대단한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공 역시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아 보였다.
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될 문제다. 지금은 대학사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좋을 듯해 보였다.
"그렇게 하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사신의 자격으로 왔다지만, 부인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대학사는 파라극에게 그들을 풀어 준다는 말을 듣고 물러났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다. 대학사가 물러나자 파라극이 다시 물었다.
"1황자는 파사의 신전으로 들어갔나?"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 찾고 있지. 그것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걸 말이야."
파라극은 만사신군의 ≪악마록≫이 파사의 신전에 있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넌 알 필요 없다. 고수들을 대기시켜 1황자가 파사의 신전에서 나오면 제압해서 아무도 몰래 나에게 데려와라."
파라극은 ≪악마록≫에 대한 사실을 숨겼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악마록≫이 서장에서 갖는 의미는 상당했다. 아니 서장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악마록≫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악마록을 익히는 동시에 절대군림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렇기에 파라극은 수하들에게까지 이 사실을 비밀로 했다.
파라극이 사실을 알면서도 파사의 신전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익힌 유마신공으로는 파사의 신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파사의 신전은 사의 기운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어찌 보면 파사의 신전이 악마록을 봉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 1황자는 다르다. 그는 제황경이라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제황경의 무공이라면 파사의 신전 역시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결국 1황자는 ≪악마록≫을 손에 넣을 것이고 또한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파사의 신전에서는 ≪악마록≫을 익힐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 그때를 노려 그것을 손에 넣으면 된다.
파라극은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환희천궁의 궁주인 아나타가 수작을 부린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결국 아나타 역시 모든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부인으로서 생을 마감할 것이라 생각했다.
"돌아가라. 그들이 돌아가는 날에 그자들을 넘겨주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파라극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정빈이 있는 처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정빈은 일어나서 파라극을 맞이했다. 그녀는 예전의 미모를 되찾았는지 아름다웠다.
"어서 오십시오."
"그대의 아들이 파사의 신전으로 들어갔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그럼 곧 ≪악마록≫을 얻을 수 있겠군요. 축하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알면 변한다는 말이 있다. 정빈이 그러했다. 황제의 여인이라는 자존심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정빈은 황제의 여인이라는 것보다 파라극의 여자라는 게 더 좋았다.
간혹 가졌던 황제와의 잠자리는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황궁에서는 황제의 여인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불평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하나 정빈은 파라극과 함께 생활하면서 진정한 여자로서의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
파라극! 탄드라 밀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방중 비술을 모두 터득한 그는, 서장에서 탄드라 밀교를 믿는 여성 신도들에게 초야권을 행사하면서 나름대로 독창적인 방중 비술까지 체득했다.
또한 환희천궁의 비전인 환희심의술을 아나타에게 배워 여자를 다루는 데 있어 최고봉에 올랐다고 할 수 있었다.
정빈은 하루하루 자신을 즐거움으로 빠트려 주는 파라극에게 몸도 마음도 모두 줘 버렸다. 정빈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은 아들도 아버지도 아닌 바로 파라극이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1황자가 ≪악마록≫이 있는 장소를 알고 찾으러 떠난다는 말을 들은 정빈은, 더 나은 쾌락을 얻기 위해 파라극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
파라극의 손이 어떻게 했는지, 정빈이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후후! 어미가 되어서 자식의 행동을 고하니 당신은 참으로 못된 여자구나."
"그깟 황제의 아들이 뭐가 대수라고요. 전 그보다 당신의 여자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답니다."
"하하하! 네 그 말이 나를 즐겁게 해 주는구나. 오냐! 내가 오늘 너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내려 주겠다."
정빈은 파라극이 주는 쾌락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만일 이와 같은 사실을 대학사나 1황자가 알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