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 (25/57)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

현수는 지밀원의 무사들을 굴리고 있었다. 천밀위사들에게 오 대 영으로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황제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현수는 마음이 불편했다.

지밀원의 무사들은 현수를 욕하며 굴림을 당하고 있었다.

"천군교두님!"

"시끄러워! 천밀위사들 중에서도 가장 무공이 낮은 애들에게 진 녀석들이 무슨 할 말이 있어?"

말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현수였다.

현수 역시 알고 있었다. 천밀위사들이 익힌 천사밀전은 지밀원의 무사들이 익힌 무공보다 한 단계 위의 무공이었다.

너무 강압적으로 대하면 불만이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시팔! 도저히 못 참겠다.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는 체력 단련밖에 없으면서!"

끝내는 평설중이 현수의 횡포를 이기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했다.

'오냐! 너 참 말 잘했다. 지금 이 시간부터 넌 지밀원에서 왕따를 당하는 거야.'

현수의 응징은 잔혹하리만큼 가혹했다. 평설중은 현수의 신형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과 동시에 정신을 잃어 버렸다.

"말했듯이 너희는 일심동체다. 고로 모두 평설중과 같은 마음을 먹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하지만… 윽!"

현수는 지밀원의 무사들을 상대로 보다 강해진 운중비록을 시험했다.

연무장에서는 비명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도망가는 것 또한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당하면서 느낀 점은, 자신을 가르치는 천군교두는 인간이 아닌 미친놈이라는 것이었다. 무공 또한 말 그대로 고금 제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사람을 굴리는 것에만 한정이 되었지만.

그렇게 지밀원의 무사들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현수에게 혹사당했다.

"헉헉!"

현수는 지칠 때까지 그들을 괴롭혔다.

"내일 다시 시작한다. 잘 들어라. 다음 주에 또 한 번 천밀위와 대련을 한다. 그때도 모두 지는 경우가 생기면 너희들 중 딱 다섯 놈을 영원히 병신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누군지는 모른다. 그날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은 평생 병신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1명이라도 천밀위사를 이겨라. 1명이라도 이기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수는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연무장에 있는 지밀원의 무사들 중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휴! 어떻게 무림으로 나가지?"

에피소드 2가 시작한 지 게임상으로 3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수는 황궁에서 무림으로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사사혈천이 있는 탑리목 분지나 동영, 세외에서 나오는 정보도 없었다. 각 문파들이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리저리 답답한 생각에 현수는 황궁 안을 돌아다녔다.

삐리리- 삐리리리!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현수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난화궁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현수는 피리 소리를 듣자 옛날 일이 떠올랐다.

구미호에게 피리를 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품속에서 하나의 피리를 꺼내었다.

구미호에게 받은 피리로 검은색이었다.

비록 황제의 명으로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으나 현수와는 상관이 없었다. 현수는 피리 소리에 이끌려 난화궁 안으로 들어갔다.

난화 군주가 자신의 정자에 앉아 홀로 피리를 불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술상이 있었다.

현수는 천에서 읽은 책들의 내용 중에서 이백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지금의 분위기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시라 저도 모르게 이백의 시가 흘러 나왔다.

동풍은 맑은 기운을 일으키고

수목은 봄빛이 무성하네

흰 날은 푸른 풀을 비치며

낙화는 흩어져서 날아다니네

외로운 구름은 빈 산으로 돌아가고

새들도 모두 다 돌아가니

그들은 모두 갈 곳이 있는데

나만이 홀로 의지할 곳이 없네

이 돌 위의 달을 마주 보며

많이 취하여 방배를 노래하네

현수가 읊은 이백의 시가 끝날 때 난화 군주의 피리 소리 역시 멈추었다.

난화 군주는 일어나서 현수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은 출입이 제한된 곳이라 사람이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난화궁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난화 군주와 전 제조상궁, 둘뿐이었다. 난화 군주의 모습에서 현수를 원망하는 기색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임을 기다리는 아낙의 모습과 같았다.

"피리 소리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발길이 이곳으로 향했습니다."

현수는 인사를 하며 난화 군주가 있는 정자로 올라갔다.

"앉으세요. 혼자 마시는 술이라 적적했는데 참으로 잘되었습니다."

술을 따르는 난화 군주의 손은 희고 고왔다.

'음!'

현수는 난화 군주가 따르는 술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한 번에 입으로 털어 넣었다.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천군교두가 한 일이라 들었습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폐하 역시 이미 반역의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난화 군주는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황궁 이야기를 좀 해 주십시오. 이곳에 있다 보니 평소에는 궁금하지도 않던 그런 일들이 몹시 궁금합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밝게 웃는 난화 군주의 모습을 보니 반역을 일으키다 잡힌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현수는 그런 난화 군주에게 황궁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의 황궁이었지만 난화 군주에게는 중요한 이야기들이었다.

"피리를 불 줄 아십니까?"

"조금 배웠으나 잘 불지는 못합니다."

현수는 피리를 잘 불었다. 피리를 부는 모습을 보며 항상 미소를 짓던 구미호 때문이었는지 피리 하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 잔의 술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의 술이 세 잔이 되니, 난화 군주와 현수는 어느새 옆에 붙어 앉아 있었다.

"호호! 저를 위해서 피리를 불어 줄 수 있나요?"

마치 기생과 선비가 앉아 함께 노는 것처럼 보였다.

현수는 구미호가 준 피리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삐리리. 삐리리- 삐리리.

고운 소리가 난화궁 전체에서 울리는 것같이 들렸다.

어느새 달이 떠서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이제 저는 가 보아야겠습니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난화 군주에게 인사를 했다.

"호호! 많이 드셨는데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돌아가십시오. 궁은 넓고 사람은 없어, 비어 있는 방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을 하는 난화 군주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생겨났다. 현수는 그런 난화 군주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화 군주 마마, 헛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난화 군주는 흠칫했다. 순간 눈에 일던 열기가 사라졌다.

"이미 3황자님의 역모는 실패했습니다. 또한 지금 군주 마마께서 익히신 무공은 실로 천박한 것입니다. 군주 마마의 품위에 손상이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난화 군주의 몸이 휘청거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사실 그녀는 현수를 유혹해서 3황자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에게 술을 따라 주실 때 손이 유독 희고 고운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 3황자님의 궁에서 만났을 때 군주 마마의 손은 갈색의 윤기가 흐르는 손이었습니다. 이에 필시 미염공을 익히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난화 군주는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어차피 현수가 자신을 벌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조상궁이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 군주 마마께 무공을 가르쳐 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조상궁의 무공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황궁에서 어떻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니 군주 마마께서는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2황자 저하께서 보위에 오르실 때 3황자 저하와 군주 마마에게 내려진 형을 거둘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10년 정도만 참고 계시면 될 듯합니다."

웃음을 흘리며 현수를 유혹하려던 표정이 원한으로 가득 찬 얼굴로 바뀌었다. 난화 군주의 목소리에는 한이 담겨 있었다.

"흥! 난 포기 못 해. 어머니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현수는 난화 군주를 보았다. 그 모습이 참으로 불쌍하게 보였다.

"설령 마왕에게 몸을 팔아서라도 난 어머니의 원수를 갚을 것이란 말이야."

측은하다는 생각이 든 현수는 차마 왕평과의 불륜 관계로 3황자가 태어났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령! 가서 제조상궁을 데려오라."

"알겠습니다, 군!"

령이 나타나자 난화 군주는 몸을 떨었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니 자신의 앞날이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령의 손에 이끌려 제조상궁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대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

현수의 전음을 들은 순간 흠칫하는 제조상궁이었다.

-더 이상 황궁의 일에 관여치 말라. 만일 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군주 마마께 그 천박한 무공을 가르쳐 주면 너의 목을 치겠다.

-흥! 네놈이 나의 목을 치겠다고?

-분명 경고했다. 넌 3황자가 폐하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숨긴 것만으로 너의 목을 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왕평과 짜고 궁녀들을 관리들에게 팔아넘긴 것 또한 무사할 수 없는 일임을 생각하라.

-네놈이 바로……!

제조상궁은 이 말을 듣고 현수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왕평과의 잠자리가 끝난 뒤,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었던 자!

제조상궁은 현수가 황궁에 있는 이상 다시 세력을 모으는 것은 힘들 거라 생각했다.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킨 제조상궁은 이윽고 현수의 앞에 섰다.

"너를 살려 두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난화 군주 마마께서 생활하시는 데 불편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하찮은 무공을 가르치라고 살려 두는 것이 아니다."

제조상궁은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자신은 현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제조상궁은 3황자나 1황자가 역모를 성공시키기를 원할 뿐이었다. 현의태감이 없는 이상 자신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둘 중 하나만 역모에 성공하면 자신은 옛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현수는 용천검을 빼 들었다. 검이 달빛에 반사되어 빛을 흘리고 있었다.

"잘 보아라. 이 무공을 능가하는 무공을 알고 있을 때는 가르쳐도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시에는 난화 군주 마마께서 생활하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전심을 다하라. 그러지 않으면 너와 관계된 사람들 모두 이렇게 될 것이다."

현수는 달을 보았다. 그러고는 달을 향해 용천검을 휘둘렀다.

"뇌전류!"

그러자 달이 갈라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달이 갈라졌다. 갈라진 달은 촌각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이것을 본 령을 비롯한 제조상궁과 난화 군주의 얼굴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명심해라."

현수는 몸을 돌려 난화궁을 벗어났다. 난화 군주와 제조상궁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현수는 난화궁에서 일어난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령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그것은 현수가 난화 군주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난화 군주 역시 피해자였다.

현수는 거처로 돌아와 접속을 해제했다.

현수는 혹시나 사사혈천이 있는 탑리목 분지나 동영, 서장에 관한 정보가 있을까 싶어 천과 관련된 사이트를 야와 함께 찾았다.

"휴! 독한 놈들이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무력으로는 아직 사사혈천의 외곽에서조차 사냥을 하지 못합니다. 거대 문파의 몇몇 고수들만이 파티를 이루어 외곽에서 사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무림에 나오면 동영상에서 보여 준 것처럼 피바다를 이루겠지?"

-꼭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유저들이 빠르게 적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정도나 사도의 사부를 모신 유저들이 하나 둘 무림에 출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부터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레벨이 낮아 당분간은 레벨 업을 해야 되는 것 아니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공을 배우고 나온 이들이 레벨 업을 하면, 사부를 모시지 못한 유저들에 비해 레벨을 2배는 더 빨리 올릴 것입니다.

"그래? 하긴. 나도 레벨 업을 하는 것이 두세 배는 빨랐으니까. 그럼 랭킹이 바뀌겠네?"

-아마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랭킹과는 상관이 없는 현수 님이 아니십니까.

현수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랭킹 안의 유저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현수의 현재 레벨은 지금 62였다.

레벨에서 밀려 랭킹에 들지 못했지만 무공만으로 치면 10위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무공을 대성한 유저들은 조금 있으나, 11성이라는 성취를 가진 유저는 현수뿐이었다.

"휴!"

현수는 황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길이 요원했다. 황제는 자신을 무림으로 보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방법이 없을까?"

다시 한 번 무림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무림과 황궁에 연관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는 말을 야에게 들었지만 너무 뜬구름을 잡는 기분이었다.

-없습니다. 그냥 황궁에 계심이 마땅한 줄로 아룁니다.

현수는 야가 자신을 약 올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노려보았다.

-그런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눈길은 수진 씨에게 보내 주십시오.

말로는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현수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디 나가십니까?

"너랑 할 이야기가 없으니 학교 운동장이라도 돌아야지. 참, 은행 잔고는 얼마나 남았지?"

그동안 현수는 금전을 팔아 돈을 조금 많이 모은 상태였다.

-6,538만 2,240원입니다. 대출 한도는 1,600만 원입니다.

하지만 이사하기 전에 까먹었던 돈에 비하면 조금 모자란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 나갔다 올게."

현수가 접속을 해제하고 하는 일은 항상 같았다. 운동 삼아 학교 운동장을 뛰거나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하는 일이 다였다.

밖으로 나온 현수는 학교 운동장으로 가지 않고, 시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혹시나 싶어, 황궁에서 관리로 임명받아 무림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역사책을 보자 눈이 감겨 오는 것을 느꼈다.

참으려고 했지만 한계에 부딪쳤다.

"저기."

현수는 감고 있는 눈을 뜨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주무시고 계시네요."

현수는 그때서야 자신이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수는 미안해서인지 바로 밖으로 나갔다.

"아 씨, 왜 책만 보면 잠을 자지? 천에서는 안 그런데."

현수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이현수 씨!"

'어?'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책과 친한 사람들은 없었다. 건이와 만사귀를 제외하고는 도서관에 와서 책을 보는 이들은 없었다.

현수는 자신을 부르는 사람을 보았다.

'아!'

수빈이었다. 지난 날 도서관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수빈의 도움으로 깨어난 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또한 천에서 자신에게 구십구 번이나 진 장본인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현수 씨는 볼 때마다 주무시고 계시네요."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잠을 잔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황궁에 대한 연구는 끝이 난 건가요?"

"……!"

"시간 있으면 어디서 차라도 한 잔 했으면 하는데 어떠세요."

"왜요?"

"제가 현수 씨에게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건가요?"

"……."

"가요."

현수는 다시 시립 도서관으로 수빈과 함께 들어갔다. 시립 도서관의 한쪽에는 휴게실이 있었다. 차를 파는 것이 아니라 자판기 여러 대가 준비되어 있고,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왜요? 자판기 커피는 입에 맞지 않는가요?"

"아닙니다. 왜 저를 불렀는지 아직 이유를 몰라서……."

수빈은 그런 현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상한가요?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일마 이현수인데 말이에요."

"저를 놀리시는 것이라면 그냥 가겠습니다."

그렇게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현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싫었다.

현수 역시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또한 평생 자신과 마주칠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호호! 놀리다니요. 현수 씨는 잘 모르시나 본데요. 천의 베타 시절에 현수 씨가 여성 유저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데요. 어떻게 보면 일황 최건이라는 사내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지요. 여성 유저들 중에 일마 이현수와 사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현수 씨에게 구십구 번이나 도전을 했잖아요. 물론 현수 씨는 그 사정도 모르고 저에게 관심조차, 아니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요즘 신랑감 후보 영순위가 천의 랭커들이에요."

현수는 농담처럼 말하는 수빈이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나간 일입니다. 전 지금 천에서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호호!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혹시 천의 신비 이객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

"호면객과 사신 낭객이죠. 그런 사신 낭객께서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자신을 보는 수빈의 눈길에 현수는 마치 병원에서 X-ray 사진을 찍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 대해서 알려진 것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는 자신이 알려지는 걸 꺼렸다. 이미 베타 시절에 한 경험이라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저에 대해서 많이 알고 계신 듯하네요."

"현수 씨에게 관심을 가지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왜 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겁니까? 제가 그쪽에게 잘못한 것이라고는 베타 시절에 대결에서 이긴 것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전 누구에게 관심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현수 씨가 천을 하는 여성 유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요."

현수는 더 이상 수빈과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전 가 보겠습니다."

"앉으세요. 저 역시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것은 체질에 조금 맞지 않네요. 사실대로 이야기할게요. 현수 씨가 저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당해요. 어떻게 보면 제 인생의 전부가 흔들릴 수 있을 만큼 말이에요."

현수는 수빈의 말을 믿지 않았다. 대BS 그룹의 후계자가 자신으로 인해 인생이 흔들린다고 말한 것 자체가 자신을 놀리는 거란 생각을 했다.

"전 아직까지 저를 놀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랍니다. 현수 씨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저의 운명이 현수 씨에게 달렸으니까요. 전 욕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모를 말이었다. 무엇이 부족해서 BS 그룹의 수빈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겠는가!

다만 현수는 가진 사람의 오만이라 생각했다. 여럿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아도 항상 같았다.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유희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동물원에 갔을 때 동물을 보고 가지는 관심과 같다.

"저기, 수빈 씨.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빈 씨의 운명과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전 수빈 씨가 관심을 가질 만큼 대단한 인물도 아닙니다. 천의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방각이나 무기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은 지금 천에서 최고수들이니까요."

"그렇지요. 방각 님이나 혁무기 님은 천의 최고수입니다. 하지만 저의 모든 것을 걸 만큼은 되지 않아요. 현수 씨는 달라요. 제가 현수 씨 때문에 얼마나 조마조마한 줄 아세요? 이번 황궁의 일도 마찬가지였구요."

현수는 순간 흠칫했다. 모니터링이 불가능한 자신의 행적을 BS에서 알고 있다면 계약 위반에 해당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황궁의 난에서 찍힌 동영상을 보고 확인한 것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수빈은 그간 자신이 짐작만 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꺼내었다. 수빈에게는 확신과도 같은 짐작이었다.

현수는 수빈의 말을 모두 듣고는 내심 흠칫했다.

"아시겠어요? 전 가상현실 천이라는 것에 모든 걸 걸었어요. 위험 상황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무사히 넘어갔지요. 아니 오히려 유저들의 반응이 더 좋아졌으니 저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졌어요."

"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베타 시절과 같은 모습이 싫어서 황궁을 택했을 뿐입니다. 이미 치고 박고 싸우는 것에 지쳤다고 해야 옳습니다. 전 조용히 그냥 배우고 싶을 뿐입니다. 천이라는 또 하나의 세상을 말입니다. 그래서 가끔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할 뿐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현수의 모습을 본 수빈은 미소를 지었다.

"현수 씨는 아직 거짓말이 서툰 것 같아요. 표정이 다르잖아요. 현수 씨, 제가 현수 씨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으니 그냥 우리 편하게 말해요. 제가 손해를 조금 보죠."

"……."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제가 저녁을 살게요."

현수는 싫다는 말을 했지만 수빈은 현수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현수는 시간이 아까웠다.

지금은 접속해서 지밀원의 무사들을 굴려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현수는 끝내 수빈과 함께 저녁을 먹어야 했다.

"현수야! 제발 다른 유저들처럼 그냥 지내 주면 안 되니?"

'현수 씨'가 '현수야'로 바뀌었다. 현수는 그런 수빈을 보았다.

"전 그냥 천을 즐길 뿐입니다."

"야, 그냥 편하게 말해. 우리는 피를 튀겨 가면 싸운 사이잖아. 현수야, 넌 그냥 즐길 뿐이지만 보는 이들은 안 그래. 너를 비롯한 건 씨와 다른 8명은 요주의 대상이란 말이야."

요주의 대상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모니터링은 불가능했다. 자신이 천 안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었다.

"요주의 대상이란 말은 좀 이상하네."

현수 역시 수빈에게 말을 놓았다. 수빈은 그런 현수를 보고 웃었다.

"그래, 이상하지. 무슨 테러 단체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있잖아, 나한테는 너희 10명이 테러 단체보다 더 무서워. 그러니 제발 그냥 남들처럼 해."

"난 그런 거 몰라. 너는 나에게 천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말했지만 나 역시 지금은 천에 모든 것을 걸었어. 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 절대 포기 못 해."

원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자 수빈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였나? 현수 역시 부르주아 백수이니 돈이 목적이었나?'

수빈은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

"돈이 목적이야? 그럼 얼마를 원해?"

"……!"

"목적이라는 것이 돈밖에 더 있어? 말해. 타협하자. 큰 액수는 힘들지만 내 재량으로 해 줄 수 있으면 해 줄게. 그리고 원하면 BS 그룹에 직장도 주선해 줄게. 아니 직장도 구해 줄게. 대우는 우리 그룹의 과장 급. 어때?"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가진 사람들은 이것이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일어나?"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수빈은 정색을 하고 말하는 현수를 보았다.

"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렇게 돈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 맞습니다. 수빈 씨가 말한 것처럼 전 돈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하지만 말입니다, 전 남에게 구걸할 정도로 궁핍하게 세상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닙니다. 수빈 씨는 세상에서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간혹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사람의 감정은 돈으로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원하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수빈 씨는 생각지도 못할 것입니다. 주위에 수빈 씨와 결혼을 하려고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아 수빈 씨는 그런 감정들을 모를 것입니다. 만약 제가 수빈 씨에게 돈을 받고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면 천이 조용해질 것 같습니까? 제2, 제3의 인물이 나옵니다. 그럼 그때마다 수빈 씨는 돈으로 그들을 매수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수빈 씨의 제안은 저에게 참으로 훌륭한 타협안입니다. 하지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번 타협을 하면 계속해서 타협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왜? 타협을 하면 그게 편하다는 것을 알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수빈은 현수를 보고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저녁 잘 먹었습니다. 앞으로는 볼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현수는 몸을 돌렸다. 혼자 남은 수빈은 현수의 말을 곱씹었다.

"한 번 타협을 하면 계속해서 타협을 해야 한다."

그것이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다.

오늘 현수를 만난 것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다.

수빈이 시립 도서관에서 현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현수를 떠올리며 한 번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시립 도서관에 연락을 했다. 사진 한 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 그 방법을 사용했다.

"좋은 말이군요, 이현수 씨. 전 모든 것을 걸었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오늘 만나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수빈은 혼잣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현수라는 사내가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현수는 가끔 건과 함께 술을 마시던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기분이 안 좋았다. 아니 더러웠다고 해야 옳았다.

현수는 평소보다 빨리 취했다. 술에 대해서 자기 절제 정도는 할 수 있는 현수였지만 오늘은 절제가 되지 않았다. 현수는 술에 취해 있었다.

"시팔! 얼마가 필요하냐고?"

쪼로록! 쪼로록!

"그래! 100억이 필요하다. 어쩔래?"

그는 혼자 소리쳤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는 술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어 버렸다.

"너는 몰라, 사람의 감정을. 하긴 가진 것이 많으니 몰라도 되겠지. 젠장!"

감정이 격해져서일까? 술에 취해서일까?

현수는 비틀거리며 계산을 하고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소리 내어 외쳤다. 그럴수록 구미호가 생각났다. 그리고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지금 이 모습이 부끄러웠다.

"천상에서 다시 만나면, 그대를 다시 만나면, 지상에서 못 다했던 그 사랑을 영원히 함께 할래요."

현수는 왜 수빈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난 살아가기 위해서 게임을 했단 말이야.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면, 난 삶의 목적을 위해 게임을 했다는 것뿐이란 말이야."

현수는 어머니의 약값을 벌어야 했다. 그것이 현수의 삶의 목적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 게임을 하다 하나가 더 추가되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젠장!"

현수는 집 앞에서 주저앉았다.

쿵!

몸을 가누지 못해 문과 부딪쳐 넘어졌다.

"젠장!"

현수는 연신 '젠장'만을 외쳤다. 밖에서 소리가 들리자 수진의 아버지와 수진이 나왔다.

문을 열고 밖을 보니 현수가 문에 기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보게."

"어!"

"아버님, 제가 술을 조금 마셨습니다."

현수는 수진의 아버지에게 주정을 했다. 수진의 아버지는 현수의 모습에 조금 인상을 썼다.

"이보게. 무슨 일이 있어서 술을 그렇게 마셨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

"아버님! 세상 살기가 참 힘듭니다."

현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야와 대화를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컴퓨터일 뿐이었다. 현수는 사람과의 대화를 원하고 있었다.

"아저씨, 일단 집으로 들어가세요."

수진은 비틀거리는 현수를 부축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야! 나 왔다."

-이제 오십니까?

"그래, 나 오늘 한잔했다."

수진은 현수를 소파에 앉혀 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현수는 혼자 뭐라고 떠들다가 그냥 잠이 들어 버렸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럴 수도 있지. 그런데 아저씨는 평소에도 술을 많이 마셔?"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술을 많이 드시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런 모습이야?"

-아마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보아 온 현수 님은 감정을 잘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수진은 잠들어 있는 현수를 보았다.

"시팔! 100억이 필요해. 왜!"

잠꼬대를 하는 현수를 보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현수 님께서 평생 쓸 돈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 갈게."

-죄송합니다.

"몰라, 사람의 감정은 돈으로 계산하는 게 아니야. 네가 BS 그룹의 후계자면 다야?"

"응?"

야는 현수의 잠꼬대를 듣고 상황을 짐작했다.

-아마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 그래도 깨어나면 술 좀 자제하라고 해."

"엄마, 미안해. 미안해."

"어?"

-아직 안 내려가셨습니까?

야가 물었지만, 수진은 재미있다는 생각에 다시 현수의 곁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현수는 옆에서 수진이 자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수진은 미소를 지었다.

"야! 지금 아저씨가 하는 말 헛소리가 아니지?"

-아마도…….

"그래, 나 간다."

수진은 더 이상 들을 내용이 없는지 내려가 버렸다.

"아이, 머리야."

-일어나셨습니까?

"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집에 들어왔지? 집 앞에 온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수진 씨가 현수 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자세한 이유는 저 역시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혹시 집에서 실수를 했어?"

-아닙니다. 다만 현수 님께서 술에 취해서 수진 씨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 현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수진 씨에게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농담입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다만 수진 씨 아버님께 장인어른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야! 너, 지금 나 놀리고 있는 거지?"

-그렇습니다.

"뭐?"

현수는 쉽게 답해 주는 야를 노려보았다.

-이제껏 현수 님께서는 술에 취하신 모습을 보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현수 님의 어제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습니다. 이제껏 제가 보아 왔던 현수 님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어제 분명 현수 님께서는 수진 씨와 수진 씨 아버님께 실수를 했습니다.

현수는 할 말이 없었다. 분명 그랬다면 자신의 실수였다.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내려가서 변명을 하시는 것보다는 수진 씨에게 조금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게 이미지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잠시 반성을 한 현수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는 다시 천에 접속을 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물론 야의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현수는 수진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들어와 곧장 쓰러져 잠이 들어 버렸다. 중간에 잠꼬대를 하긴 했어도 수진에게 사랑한다고 하거나 수진의 아버지를 장인어른이라 부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야가 거짓말을 한 이유는 현수 어머님의 협박 때문이었다. 현수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어머님은 야에게 특명을 내렸다.

야에게서 수진의 이야기를 들은 현수의 어머니는 2년 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현수를 결혼시키라고 말했다.

이 명령은 야의 생존과도 직결이 되었다. 만일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머니께서 아시면 야는 그날로 분해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현수는 한동안 집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나가다 수진과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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