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피소드 2 (23/57)

에피소드 2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황궁에는 많은 인원이 부족한 상태였다. 고위 관리직에 있던 NPC들이 죽거나 감옥에 갇히게 되어 황궁의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또한 대학사의 내각은 숨을 죽였다. 황제는 그들마저 지금 처리를 하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것이라 걱정해, 인원이 채워질 때까지 그들을 감시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황궁은 과거를 치러 부족한 인원을 채우려고 했다.

현수는 황궁의 일이 끝나자 크게 할 일이 없어졌다. 진짜 지루한 황궁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미랑이 완전히 성장하는 1년이라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미랑의 수면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구미호에게는 완전한 성장을 위해서 수면기가 필요하다. 미랑은 수면기만 지나면 구미호의 어머니로서, 레벨 200대인 보스 몬스터의 제 모습을 갖출 것이다.

미령은 미랑이 잠을 많이 자는 것이 이상해 현수에게 말했다. 혹시 현수에게 미움을 받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생겼다.

"나리, 요즘 미랑이가 조금 이상합니다. 잠을 많이 자는 것도 이상하지만 몸이 무겁다고도 합니다."

임신! 미령은 미랑이 현수의 아기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미령이 사람들에게 듣기로는, 임신을 하면 잠을 많이 자고 또 몸이 무겁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임신이라는 불청객으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궁녀들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미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이 관료의 첩이 되어 황궁 밖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미랑 역시 곧 황궁 밖에서 생활할 것이라 생각하자, 미령은 그런 미랑이 부럽기도 했다.

현수 역시 수면기가 다가오는 미랑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 미령이 네가 수고스럽겠지만 미랑에게 조금 신경을 써 다오."

현수는 한 묶음의 금전을 미령에게 건네주었다.

금전 100냥!

천의 일반 서민 NPC들이 2년 동안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또한 현실에서도 1만 원이라는 큰돈이었다. 적어도 현수에게는.

금전 1냥에 현금으로 100원이 지금의 시세이다. 처음에는 1냥에 1,000원까지 했지만, 계속 하락해서 지금은 100원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저들 또한 이 이상은 가격을 내릴 생각이 없는지 거래 사이트에서 100원 이하로 내놓는 유저는 사이트 사용을 금하고 있었다.

현수는 그동안 대학사와 현의태감에게 뇌물을 받아 모은 금전의 일부를 미령에게 준 것이었다.

"나리, 이게 무엇입니까?"

"그동안 미령이 나에게 잘해 주었고 또 미랑과 친하게 지내 주어 내가 고마워서 주는 것이니 그냥 받아 두어라."

"나리! 소녀, 이런 것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미령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웠다. 어려운 집을 위해 황궁으로 팔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령이었다. 그렇기에 힘들어도 참고 황궁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미랑을 만났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아 허물없이 지냈다. 미령은 자신이 미랑에게 잘해 주는 것이 아니라, 미랑이 자신에게 너무도 잘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괜찮다. 앞으로 힘들겠지만 계속해서 나를 도와 다오."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호감도를 올릴 수 있을 만큼 다 올린 현수였지만 호감도가 게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에 계속해서 NPC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나리,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령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현의태감과 싸우면서 느낀 것을 생각하며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록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 그리고 다른 무공들을 완성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현의태감과의 싸움에서는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눈을 감고 현의태감과 싸웠던 장면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때 명상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군!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허공에서 들려온 소리는 령의 목소리였다.

"알겠다. 내 지금 준비를 하겠다."

현수는 옷을 갈아입고 황제가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황제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딱 보아도 '나 지금 걱정 많아.' 하는 얼굴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내가 그대를 부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대학사를 비롯해 1황자와 정빈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어서다."

"그들은 황궁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빠져나간 것인가? 난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대답을 하라. 그대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현수가 구미호를 죽게 한 장본인들이 황궁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그냥 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대학사가 뇌물을 주어서는 아니었다. 그들을 빠져나가게 한 이유는 다 복수 때문이었다. 자신의 행복한 생활을 망친 그들을 쉽게 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신 이현수는 아직 황궁의 난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침묵했다. 비록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종식이 되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을 벌한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대학사는 무림과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만일 대학사를 잡아 문초를 했다면 그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얼마 없었을 것이옵니다."

"그래서 그들을 황궁에서 빠져나가게 해 주었고, 그들이 무림의 세력과 손을 잡고 황궁을 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기를 원했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만일 무림의 어떤 세력과 손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면 그들을 그렇게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을 벌하면, 제 이, 제 삼의 대학사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대학사가 선례를 남겼으니 이번에는 무림에서 먼저 황궁에 손을 쓸 수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무림이 황궁의 일에 끼어들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어, 다시는 황궁의 일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잡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얼굴은 그렇게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현수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만일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수많은 백성이 고통을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중간에서 고통스러워할 백성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고래 싸움에 죽고 다치는 것은 고래들뿐만 아니라, 새우들 역시 죽고 고통당한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단 말인가?"

현수는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무림으로 나갈 빌미를 만드는 것과 구미호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미 일은 시작이 되었다. 현수 그대는 지밀원의 무사들에게 팔자영법을 빨리 가르쳐 그들이 그대와 같은 무공을 소유하게 하라."

현수는 잠시 흠칫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 무림으로 나가 반역도를 잡아 오라는 명이 떨어져야 했다.

현수는 고개를 숙였다.

"신 이현수, 폐하의 명을 받습니다."

"령! 그대는 동창을 동원해서 무림으로 도망간 반역도를 잡아 황궁으로 압송하라."

"명을 받습니다."

황제는 현수를 보았다.

황제의 눈이 조금 전과 다르게 웃고 있는 듯 보였다. 황제는 이미 현수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현수는 그런 황제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대는 물러가라."

"신 이현수, 그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결국 현수는 틀어진 자신의 계획을 다시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수가 나가자 황제가 령에게 물었다.

"그대도 보았는가, 녀석의 표정을?"

"그러하옵니다. 아마 계획했던 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조금 억울했을 것이옵니다."

"그래. 물건은 물건이야. 순식간에 어지러운 황궁을 정리하다니 말이야. 그대는 녀석을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 영취의 짝은 현수밖에 없다. 황궁이 안정되는 날 현수를 부마로 책봉하겠으니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황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현수는 자신이 생각한 일이 잘못되자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다.

"야와 함께 대책을 세우자. 에피소드 2가 내일 업데이트 된다고 하니 빠른 시간 안에 황궁을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결코 그들이 쉽게 잡혀서는 안 된다."

현수는 전서구를 천연회의 모두에게 보내었다. 그 내용은 현수만이 알고 있었다.

"결코 편하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 * *

현수는 밤을 이용해 접속을 해제하고 야를 찾았다.

야와 대화를 해 보았지만 무림으로 나갈 방법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야의 비협조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야! 그러니까 뭐가 불만인데? 나에게 가진 불만이 있으니 그렇게 삐딱하게 나오는 거잖아."

-불만 없습니다. 다만 현수 님께서 저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방법만 물으시니 저 역시 대답을 하지 못할 뿐입니다. 제가 천의 인공지능 컴퓨터입니까? 황제가 어떻게 할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차라리 황궁에서 그냥 지내시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체 뭘 원해? 하루에 한 번씩 광나게 청소해 주지. 또 너 열 받을까 봐 겨울에도 문을 활짝 열어 놓잖아."

하소연이라면 하소연일까? 요즘 들어 더욱 잔소리가 많아진 야를 보며 현수는 애원을 했다.

"야, 부탁이다. 뭔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봐! 무림으로 나가야 돼. 무림에서 할 일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 부탁하자, 야!"

부탁을 해도 야는 요지부동이었다.

-현수 님, 왜 무림에 나가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황궁에 있으면서 번 돈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그런 거 몰라. 돈은 네가 관리하잖아."

-그러니까, 짭짤하게 수입이 들어오는데 현수 님을 뭐 하러 무림으로 보내겠습니까?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현수 님께서 천을 하시는 이유는 어머님의 약값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냥 황궁에 계십시오.

현수가 황궁에서 번 돈은 실로 엄청났다. 뒷돈으로 들어오는 금전과 또 간혹 싹쓸이해서 챙긴 돈을 현금으로 환전해 보니, 무려 4,000만 원에 가까운 돈을 벌었다. 정식 서비스가 되고 나서 1년 동안 놀고먹은 시간까지 계산을 하면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황궁에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벌어들인 돈이라 생각한다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네 말이 맞아. 엄마의 약값이 목적이었어. 하지만 무림으로 나가야 할 목적이 하나 생겼어. 그러니 야, 부탁한다."

야 역시 현수가 무엇 때문에 무림으로 나가려고 노력하는지 알고 있었다.

-구미호 때문입니까?

"그래. 야, 미안하다. 부탁할게. 이번에 무림으로 나가 아가씨의 복수를 갚으면 우리 모은 돈으로 다른 것을 해 보자."

-꼭 구미호의 복수를 해야겠습니까? 구미호는 이미 환생을 했습니다.

"그래, 너의 말대로 아가씨는 환생했을지도 몰라. 그리고 환생을 했다면 난 꼭 아가씨를 찾을 거야. 하지만 아가씨의 복수는 꼭 할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아가씨가 가지고 있던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을 원해서 레이드를 주선한 1황자와 정빈 그리고 대학사, 이들 3명한테는 꼭 할 거야. 그러니 한 번만 도와주라."

야는 현수의 말을 듣고 침묵을 지켰다. 답답했던 현수는 야에게 소리쳤다.

"야!"

-당분간은 힘들 것입니다. 먼저 황궁이 안정되어야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수 님께서 무림에 나가기 위해서는, 무림에서 황궁과 연관된 사건이 하나 생겨야 합니다. 아마도 에피소드 2가 시작되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 고마워!"

현수는 에피소드 2가 시작되기 전에는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다음 날, 예정대로 에피소드 2를 위한 업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업데이트를 기다리던 현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생겼다.

내일 정오부터 보름간 에피소드 2에 관련된 업데이트를 하려고 합니다. 업데이트될 것들 중 커다란 내용들만 몇 가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본토를 비롯해 4개의 영토가 개방됩니다. 이 4개 중 한 영토는 외국인들이 적응하기 위한 영토이며 또한 그들의 영토가 될 것입니다. 단, 그들이 먼저 시작한 한국 유저들의 수준과 비슷해지기 전까지 따로 서버를 관리합니다.

또 하나의 영토에서는 새로운 맵인 사사혈천의 탑리목 분지가 생겨납니다. 탑리목 분지는 사사혈천의 내원과 외곽 그리고 사사혈천의 본성인 던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다른 영토는 세외의 세력으로, 서장의 세외 무림을 구성합니다. 마지막 하나의 영토는 동영으로, 그들은 살수 무림을 구성합니다.

둘째, 2차 전직이 추가됩니다.

2차 전직은 레벨 100 이상이 가능하며 전직과 동시에 환골탈태가 가능해집니다. 환골탈태는 기존의 스탯을 초기화하여 다시 재분배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또한 생활 직업이 추가됩니다. 생활 직업은 레벨에 상관없이 얻을 수 있습니다. 대장장이 상인을 비롯한 모든 직업이 가능합니다. 생활 직업의 레벨은 10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생활 직업 레벨이 10이면 장인이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장인은 모든 물품을 30% 싸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셋째, 70까지였던 레벨의 제한을 풀어, 제한을 없앴습니다.

넷째, 문파를 창설할 수 있습니다. 단, 각 성의 성주에게 문파 창설 허가증을 받아야 합니다.

다섯째, 마천루 던전이 25층까지 개방됩니다. 20층 이상의 몬스터 레벨은 60대입니다.

여섯째, 결혼이 가능하게 됩니다. 보다 현실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유저들 간의 결혼이 가능합니다. 또한 호감도가 100이 되면 NPC와도 결혼도 가능합니다.

일곱째, 죽으면 무공을 잃게 된다는 페널티를 조정했습니다. 죽으면 무공이 초기화됩니다.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합니다. 또한 죽기 전에 익힌 무공을 포기하시면 무공서로 교환됩니다. 하나 5성부터 다시 익혀야 합니다. 만일 5성 이하의 무공이었다면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합니다.

이상, 더욱 자세한 것은 홈페이지 업데이트 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다 즐거운 가상현실을 즐길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업데이트 때문에 보름이라는 시간이 생긴 현수는 어머니에게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나갔다 올게."

-어디 가십니까?

"백화점에. 엄마한테 한번 다녀오려면 선물을 조금 사야 할 것 같아. 야, 넌 필요한 것 없어?"

-있습니다만, 현수 님께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라 여유가 생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 크게 비싼 것이 아니면 사 줄게."

-그럼 인공지능 컴퓨터 한 대만 사 주십시오. 혼자 있으니 적적합니다.

"억!"

현수는 사람같이 말하는 야를 보고만 있을 뿐 무엇이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 보십시오. 큰돈이 드니 현수 님의 입에서 억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현수 님, 돈을 절약할 방법이 있습니다.

"고물상에서 또 사 오라고? 싫다. 너 하나도 벅찬데 또 너 같은 컴퓨터가 오면 난 아마 미쳐 버리고 말거야."

-아닙니다. 수진 씨에게 이야기해서 인공지능 컴퓨터를 사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현수 님도 수진 씨와 만나고 저도 수진 씨네 인공지능 컴퓨터와 만날 테니, 잘하면 겹사돈이 되겠습니다.

"나, 갔다 올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고개를 흔든 현수는 앞으로 가 더욱 걱정이 되었다.

백화점으로 간 현수는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현수는 돈을 쓸 줄 모른다. 돈도 써 본 사람이 쓸 줄 안다. 천에 관련된 아이템이라면 수백만 원을 주고 사는 현수였지만 다른 것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물건을 쉽게 고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어머니께 가기 전에 샀던 빨간 내복을 사려고 발길을 옮겼다.

'어! 수진 씨의 어머니네?'

현수는 수진 씨의 어머니를 보자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이게 누구야? 2층 총각이잖아? 뭐 사러 왔어?"

"네. 오늘 저녁에 어머니가 계시는 남해에 내려가려고요."

"어? 아저씨!"

수진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백화점에서 큰 소리로 현수를 불렀다.

'아! 쪽팔리게!'

"수진 씨, 안녕하세요."

현수는 수진을 보자 인사를 했다.

"난 엄마랑 옷 사러 나왔는데, 아저씨는 여기 어쩐 일이세요?"

"어쩌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네요."

그렇게 세 세람은 함께 백화점의 구석구석을 다녔다.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사려고 왔다는 말을 들은 수진은 자신이 골라 준다며 앞장서서 이것저것을 골라 주었다.

그런 수진이 밉상스러운지 수진의 어머니는 수진을 보며 투정을 했다.

"수진아, 너 엄마 옷은 안 사 주냐?"

"있어 봐! 조금 뒤에 엄마 옷도 골라 줄게."

이미 수진의 어머니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현수는 그런 모습을 보니 조금 어색했다. 무엇보다 왜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수진이 고르려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현수는 아직 여자에 대해서 맹물이었다.

수진이 고른 물건을 이것저것 사자 현수의 양손이 무거워 졌다.

결국 수진 어머니의 옷은 현수의 것을 모두 사고 제일 마지막에 샀다. 현수는 졸지에 짐꾼이 되어 버렸다.

"아이! 엄마, 한참 동안 돌아다니니 배가 고프네. 우리 칼국수 먹으러 가요."

수진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백화점에서 조금 많이 떨어진 허름한 칼국수 집이었다.

"이 집이 칼국수를 잘해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할 거예요."

겉보기와는 다르게, 안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조금 기다리면 자리가 나겠네요."

현수는 칼국수를 먹기 위해 기다리는 이유를 몰랐다. 주위에 많은 칼국수 집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집들에는 이곳처럼 손님들이 많지 않았다.

현수는 칼국수를 먹으며 왜 사람들이 기다리면서까지 이곳에서 먹으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맛있네요."

"그렇죠? 어쩔 때는 1시간 넘게 기다린 적도 있어요. 오늘은 운이 좋은 거예요. 아마 아저씨와 함께 와서 그런가 봐요."

수진의 어머니는 조금 섭섭한지 수진에게 한 소리 했다.

"이 녀석아, 네 눈에는 엄마가 안 보이냐? 이래서 딸자식 키워 봐야 소용이 없다고 하나 보다. 에휴! 내 팔자야. 누구는 어머님을 만나러 간다고 선물까지 준비하는데. 에휴!"

"……!"

"엄마는!"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현수의 손에는 짐이 가득 들려 있었다. 현수가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 수진과 수진의 어머니는 집으로 들어갔다.

"이것아, 2층 총각이 좋아?"

수진은 어머니를 보고 웃었다.

"몰라. 관심은 있지. 엄마는 어때?"

"글쎄다. 착한 총각 같은데 집에만 있는 것을 보면……."

"아! 그거,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재택근무한대. 집에서 일하는 거 있잖아."

"그래? 그럼 뭐… 아이! 엄마는 모르겠다. 그저 딸 하나 있는 거,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지."

수진의 어머니는 몸을 돌려 수진이 골라 준 옷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수진은 방으로 들어가는 어머니를 보더니 미소를 짓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현수는 수진이 골라 준 선물과 옷가지를 챙기고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서 남해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남해에 도착한 현수는 다시 버스를 타고 '물건'이라는 마을로 향했다. 현수의 고향이 바로 그곳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리자 어머니가 밖으로 나왔다. 조금씩 여위어 가는 어머니를 본 현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미 방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현수가 내려온다고 해서 낮에 치워 놓으셨나 보다.

"엄마, 힘든데 왜 이렇게 치웠어. 그냥 두지."

"오랜만에 오는 아들인데 어떻게 그러냐. 난 괜찮아. 그런데 이것들은 뭐냐? 어디 보자."

현수의 어머니는 수진이 골라 준 선물들을 살펴보고는 현수를 보았다. 들고 온 선물이 여느 때와 달랐다.

"어쭈, 아들! 너 여자 사귀냐? 아니면 나이를 먹더니 생각의 깊이가 달라졌나? 예전에는 올 때 항상 내복 같은 것만 사 오더니, 오늘은 옷을 다 사 왔네."

현수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약은 계속 먹고 있지?"

"그래, 꼬박꼬박 먹고 있다. 이거 얼마짜리냐?"

현수는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현수는 알고 있었다. 지금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 약병 보여 줘."

"이것아! 세상에, 어미 말도 못 믿냐? 먹고 있다면 있는 줄 알아."

현수는 어머니의 말을 뒷전으로 하고 방에서 약병을 찾았다. 약은 아직 많은 양이 남아 있었다.

"엄마!"

현수는 약병을 보는 순간 화가 나서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괜찮다. 너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는데 어미가 그 비싼 약을 막 먹어서야 되겠니? 이제 난 다 나았으니 약 안 먹어도 된다. 약보다 고기가 먹고 싶다, 이 어미는! 그러니 앞으로는 약보다는 그 무엇이냐? 미국 애들이 키운 소갈비… 아! LA 갈비! 그거나 보내 다오. 요 옆에 사는 독일 사람들이 먹던데 어미는 그거 한번 먹고 싶다."

어머니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은 현수는 더 속이 상했다.

현수라고 왜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세상에 가족이라고는 단 둘뿐이었다. 현수는 어머니가 오래오래 살기를 원했다. 결혼해서 아들딸 많이 낳아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이 현수의 꿈이었다.

"내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산 약이야. 그러니 매일 꼬박꼬박 먹어야지, 이게 뭐야? 그러다 더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하려고 해! 내가 엄마한테 말했잖아. 돈 걱정 하지 말라고! 그냥 매달 부쳐 주는 돈으로 약 사 먹어. 괜히 동네 아주머니들이랑 고스톱 치지 말고."

현수의 마음은 이게 아니었다.

이런 게 어디 한두 번 있었던 일인가? 아마 현수의 어머니는 매달 부쳐 주는 돈을 모았으리라.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모두 같지 않은가?

게다가 약의 양을 보니 아마도 이틀 걸러 하루씩 먹은 것 같았다.

"엄마, 앞으로 그러지 마. 매일 꼬박꼬박 먹어. 알았지?"

"염병! 이 어미가 고스톱 치는 재미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 정 고스톱 치는 것이 마음에 안 들면 결혼해서 손자를 데리고 와."

"몰라! 그냥 약 꼬박꼬박 먹어."

현수는 소리를 질렀다.

"쫀쫀하긴! 사내가 여자처럼 소리나 지르고. 에라! 그러니까 네가 아직 결혼을 못 하는 거야."

현수는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현수는 어머니 곁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현수는 몸을 돌려 어머니를 보았다. 앙상한 어머니의 손목을 보니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엄마! 제발 오래 살아. 난 그것밖에 원하는 게 없어.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가 나 키우면서 고생 많이 했잖아. 이제 내가 다 해 줄게. 엄마가 원하는 것 다 해 줄게. 그러니 제발 오래오래 살아.'

다음 날, 현수는 눈이 부은 채로 일어났다.

곁에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아침을 준비하려고 일찍 일어났나 보다.

"에이!"

현수는 부엌문을 열었다. 역시나 어머니는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할게, 이리 줘! 뭐 하러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을 해."

현수는 어머니가 잡고 있던 부엌칼을 빼앗아 아침을 준비했다.

그러고 나서 함께 밥을 먹는 동안, 현수는 많이 먹으라는 어머니의 말을 수십 번은 더 들었다.

"엄마가 많이 먹고 힘을 내야지. 난 괜찮으니까, 이것도 엄마가 먹고 이것도 또 이것도 좀 많이 먹어."

현수는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여 어머니가 식사하는 것을 도왔다.

식사를 다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어머니에게 현수는 조금의 거짓말을 더해 이야기해 주었다.

"아들, 너 엄마에게 거짓말했다가 나중에 들통 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둘째한테 확인한다."

둘째는 야였다. 현수의 어머니는 야를 아들로 생각했다.

야는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컴퓨터였다. 혼자 생활하는 아들을 옆에서 돕는 야는 현수의 어머니에게 기계가 아니었다.

"아니야. 진짜라니까."

"현수야!"

"응?"

어머니는 정색을 하며 현수를 불렀다. 현수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 내심 긴장을 했다.

"너, 내려온 김에 선 한번 봐라."

"안 봐!"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입에서 나오는 말 그대로 대답해 버렸다.

"그러지 말고 한번 봐라. 그럼 내가 약을 꼬박꼬박 먹을게. 선 한번 봐라."

결국 현수는 어머니의 약을 먹는다는 말에 선을 보기로 결심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약을 챙겨 먹으면 건강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그럼 약속해."

"쯧쯧!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미 말도 못 믿고. 그래, 약속하마."

현수가 선을 보게 될 사람은 남해 독일 마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고 했다.

남해에는 독일 마을이라 하여, 조그마한 터에 독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있었다. 현수의 어머니가 한국의 민속놀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며 말도 안 통하는 독일 사람들을 붙잡고 고스톱을 친 것이 인연이 되어 알고 지내는 사람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고스톱의 재미에 빠졌으나 말이 안 통하니 무조건 현수 어머니가 이겼다.

속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독일 사람들은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모시고 와 통역과 함께 고스톱을 치곤 했다.

"잘해. 이제 이곳에서의 일이 끝나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더라."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럼 내가 연락한다. 오후에 만나 봐라. 서로 시간이 없으니."

결국 현수는 뜻하지 않게 선을 보게 되었다.

옷을 갈아입는 현수를 본 어머니는 현수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었다.

남면이라는 곳은 남해에서는 그래도 번화가였다. 현수는 커피숍에서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10분이 지나서야 상대가 도착했다.

"이현수 씨?"

"김지현 씨?

"네, 안녕하세요."

썩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리 빠지는 외모도 아니었다. 현수와 지현은 서로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공통 관심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지현은 현수의 어머니와 처음 만난 일부터 시작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현수는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남들은 선을 보면 말이 막 나온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 막 하는 걸까? 할 말도 없는데.'

현수에게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지현은 말없이 앉아 있는 현수를 보고 웃었다.

"풋!"

"왜요?"

"아니에요. 전 여기 나오면서 현수 씨 어머니를 생각했어요. 재미있으신 분이니까요. 그런데 현수 씨는 조용하네요."

"……!"

현수는 식은땀이 흘렀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현수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치겠네.'

-안녕하세요. 게임 포 유의 하나예요.

그때 티브이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자극했다.

-오늘은 앞으로 달라질 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고요.

티브이 화면이 바뀌면서 천의 동영상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왔다.

"천이네."

먼저 입을 연 것은 지현이었다.

"혹시 천을 하세요?"

"네, 조금."

둘은 드디어 공통된 관심사를 찾았다.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은 업데이트에 관한 것들이었다. 지현은 현수의 레벨을 물었다.

"레벨이 어떻게 되세요?"

"낮아요. 지현 씨는요?"

"네, 전 46레벨인데 지금 천지회 소속이에요."

'46레벨이면 중간이네.'

"가끔 시간이 남아서 천을 하고 있어요. 독일 마을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에요. BS 그룹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아직 서비스를 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몹시 궁금해해요."

"네."

현수는 지현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자신과 나이 차이가 세 살이나 나는데도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엄마한테는 미안한데 지현 씨는 조금 힘들겠다.'

현수는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혼자 생활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먼저 가정 형편을 생각했다.

어머니와 자신! 앞으로 얼마나 더 들지 알 수 없는 어머니의 병원비와 직업 없이 게임으로 돈을 버는 자신에 비하면 지현은 당당했다. 현수는 자신이 지현이에게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수 씨는 문파에 가입을 하셨어요?"

"네. 조그만 친목 문파에요. 인원은 딱 문파를 만들 수 있는 수예요."

이미 업데이트의 내용을 알고 있던 현수는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다.

-참! 또 있어요. 문화 방송국에서 천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만들기로 전격 발표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티브이로 향했다.

-제목이 궁금하시죠? 전 드리마의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바로 천상지애라고 하더군요. 너무 예쁘죠?

'천상지애?'

현수는 구미호가 생각이 났다.

-여자 주인공은 국민 배우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설령 씨가 맡았는데, 실제로도 천에서 상당한 고수라고 합니다. 설령 씨는 보타산에서 무공을 사사받았대요. 사부를 모시는 건 힘들다고 하는데 설령 씨는 정말 좋겠어요. 아! 하나도 사부님을 모시면 좋겠는데 이미 늦어 버렸죠. 누구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 유저 분 안 계시나요? 그럼 저의 사랑을 듬뿍 담아 드릴게요.

"재미있겠네요. 천상지애라……."

"네, 기대가 되네요. 그러고 보면 가상현실 천이라는 게임이 세상을 많이 바뀌게 한 것 같아요."

"네에?"

현수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바뀐 것이 없었다. 그냥 백수들이 조금 더 늘었다는 것 외에는.

"가상현실을 이용한 실험들이 많이 개발되고 있거든요. 가령 임상실험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에요."

"그래요?"

"그나저나 남자 주인공은 누굴까요?"

현수는 임상실험이라는 것에 대해서 더 듣고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현의 궁금증은 티브이에서 곧바로 해결해 주었다.

-애석하게도 남자 주인공은 아직 결정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 남자 주인공은 천을 직접 하는 분으로 캐스팅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 배우를 직접 구한다는 말에 현수는 임상실험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현수는 천상지애에서 배우를 하면 얼마나 벌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남자 배우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압축했다.

'베타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천연회와 랭커 40위 안팎의 유저들, 지금은 무기나 방각이가 유력하겠네.'

더 이상 할 말이 없자, 현수와 지현은 형식상의 말만 하고는 헤어졌다.

"다음에 또 봐요. 천을 한다고 했으니 언젠가 만나겠죠. 전 독일선생님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해요."

"네! 전 저의 이름을 사용해요."

아마 지현이 베타를 했다면 현수를 보는 눈이 달라졌으리라. 애석하게도 그녀는 베타 때를 겪지 못했다.

현수는 지현과 헤어진 후 장에 들러 이것저것을 사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를 위해 식사를 준비했는데, 어머니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엄마가 실망할 것 같구나.'

저녁을 준비한 현수는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선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는 어머니에게 또 한 번 약간의 거짓을 더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래, 또 만나기로 했어?"

"응."

"정말이냐, 아들? 너, 거짓말 자주 하면 안 좋다. 네 어디를 봐서 좋다고 또 만나자고 하겠냐?"

"아니야. 진짜야.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어. 난 마음에 드는데 아직 상대방의 마음을 모르잖아. 그러니까 조금 더 만나 보고 판단할게."

모처럼 현수 어머니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현수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 아들이 장가만 간다면 이 어미는 죽어도 소원이 없구나."

"에이! 그게 무슨 말이야? 장가가서 내가 아들딸 낳으면 손자들이 재롱떠는 것도 봐야지."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밤이 되자 현수는 어머니의 곁에서 잠을 청했다.

현수의 어머니는 그의 머리맡에 앉아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쌍한 놈! 부모라고 있는 것이 너에게 도움은 주지 못하고 고생만 시키는구나. 현수야, 미안하다. 이 어미가 못나서 그런 것이니, 어미를 용서해라.'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현수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현수의 어머니도 대충 알고 있었다. 자신의 병으로 인해 학업까지 포기하면서 돈을 벌었던 현수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달에 400만 원이라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그렇기에 현수의 어머니는 현수가 보내 주는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현수의 어머니에게는 한이 맺힌 돈이기도 했다.

떠나는 날 현수는 어머니의 손에 약간의 용돈을 쥐여 주었다.

"엄마! 이거 얼마 안 되는데……."

용돈을 받아 든 현수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액수를 세었다.

"아들, 남자가 쫀쫀하게 이게 뭐야? 만 원짜리 두 장만 더 줘 봐."

"……."

현수는 어머니께 2만 원을 더 드렸다. 그리고 약을 꼬박꼬박 드시라는 말과 함께 어머니를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 * *

집으로 들어온 현수의 어깨는 힘이 없어 보였다.

"야, 나 왔어."

-이제 오십니까? 어머니께서는 건강하십니까?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약을 잘 안 드셔. 약만 꼬박꼬박 먹어도 악화는 안 될 텐데."

-현수 님,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현수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 드릴 수는 없었다.

"그럴 생각도 했는데, 지금 내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 드렸다가는 나는 물론 너 역시 분해될지도 몰라."

-그렇군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참 세 곳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디?"

-BS 그룹과 문화 방송국 그리고 건 님에게 왔습니다.

문화 방송국에서 전화가 온 이유는 짐작이 갔다. 하지만 BS 그룹은 의외였다.

"내용은?"

야는 문화 방송국에서 온 전화 내용을 먼저 이야기했다.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잘되면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돈을 벌어야 했다.

"안 한다고 해. 1달에 200만 원을 벌려고 그 고생을 해? BS에서는 뭐 때문에 전화가 왔어?"

-동영상 판매 문제 때문입니다.

"동영상?"

조금 생소했다. 간혹 유저들은 자신이 플레이하는 것을 동영상으로 담아 홈페이지나 BS의 게시판에 올리고는 했다. 현수는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해서인지 게임을 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지는 않았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황궁에서 일어난 일을 BS에서 동영상으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동영상은 2시간 40분으로, 판매 수익의 7%를 현수 님의 몫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돈이 들어오자 현수는 마음이 가벼웠다.

"그래. 그럼 계약서 작성해서 BS에 전해 줘."

-다른 분들은 몰라도 현수 님께서는 얼굴이 그대로 찍혔습니다. 그렇기에 편집을 하지 않으면 천에서 활동을 하는 데 곤란을 겪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럼 알아서 전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수는 가상현실을 이용한 임상실험에 대해서 야에게 물었다.

-동물을 이용한 임상실험을 통해 과연 어떤 약이 병에 효과가 있는지를 실험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약의 효과를 실험해서인지 특이체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가끔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개발되었고 또 그것이 발전을 해서, 지금은 가상현실에서 동물이 아닌 사람에게 약을 실험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약들은 부작용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 엄마의 병은 고칠 수 있어?"

현수는 기대를 했다. 얼마 안 가서 곧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개발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치료약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 중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치료약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기대를 했다. 현수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약이 나왔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도 곧 나오겠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래. 난 잘게. 그런데 야, 어머니가 너보고 둘째란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저를 막내라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 쉬어라. 난 잔다."

현수는 방으로 들어가 기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또 다짐을 했다. 최소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나왔을 때, 돈이 없어서 사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 * *

BS 그룹에서 판매하는 동영상은 불티나게 팔렸다.

서비스 차원에서 내놓은 것이라 비싸게 파는 건 아니었다.

동영상의 판매로 인기가 급격하게 올라간 이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화화공자였다. 제조상궁과의 대결은 BS그룹의 게시판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동영상을 본 유저들은 복면을 한 화화공자의 얼굴이 궁금한지 연일 정체를 밝히자는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

* * *

가상현실 천의 에피소드 2는 한 편의 동영상으로 시작이 되었다. 현수는 동영상을 보고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을까 해서 야와 함께 동영상을 보았다.

카악! 카악!

불길한 징조를 알린다는 까마귀 떼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까마귀 떼가 하늘에서 땅으로 하강을 하기 시작하면서 땅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건물들이 불에 탄 흔적이 보였고,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곳곳에 주인을 잃은 병장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까마귀들은 죽어 있는 사람들의 위로 내려앉아 시체를 부리로 쪼았다.

카악! 카악!

저벅저벅저벅저벅!

푸드드득! 푸드드득!

시체를 부리로 쪼고 있던 까마귀들은 들려오는 발소리에 놀라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천하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린단 말인가?'

사내는 죄 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것 또한 한 개인의 욕심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며, 더욱 가슴이 아프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응애! 응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 서서 죽어 있는 아낙을 보았다. 아낙의 품에는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아기는 배가 고픈지 아낙의 젖을 물고는 연신 빨고 있었다.

'천하가 무엇이기에 죄 없는 이 갓난아기까지 고통을 주는가?'

사내는 아기를 들어 올렸다.

응애! 응애!

죽음만이 있는 곳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사내는 자신의 약지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아기에게 먹였다. 끈끈한 액체가 입으로 들어가자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연신 사내의 약지를 빨았다.

"대형!"

사내는 고개를 돌려 대형이라 부르는 사내를 확인했다.

뒤에서 사남일녀의 모습이 모였다.

"왔는가?"

사내는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무엇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앞으로 사내가 어떤 일을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당마저 무너졌습니다. 이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무림인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소림으로 모였습니다. 그곳에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할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으로 사사혈천을 막기에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사파의 움직임은?"

"이미 하늘이 움직였습니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듣고만 있었다. 아니 여인을 보고 있었다. 사내는 미안한지 그녀에게 다가갔다.

"미안하구려, 운설! 그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구려."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내는 갓난아기를 여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떠나가는 사내를 보는 여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부디 무사하십시오.'

두두두두두!

다섯 필의 말이 오솔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말 위에는 모두 고강한 무림인들처럼 보이는 이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급한지 달리는 말을 재촉했다.

"이럇! 이럇!"

다섯 필의 말은 이내 빠른 속도로 오솔길의 끝에 다다랐다. 다른 한쪽에서 역시 다섯 필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무리는 두 무리였지만 그들이 가는 곳은 한 방향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같은 길을 마치 경쟁하듯 달려갔다.

길을 벗어나자 더 넓은 초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초지가 눈에 들어오자 10명은 달리는 말을 세웠다.

푸히히힝!

분명 두 무리의 무사들인데도 서로 말이 없었다.

"이럇! 이럇!"

서로를 한 번 마주 본 이들은 다시 말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던 말들은 언덕의 위에서 정지했다.

"음……."

생각보다 많은 수의 무리라 그랬는지 아니면 저들의 기세를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나, 열 필의 말 위에 있던 이들은 조금 긴장한 듯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준비하라!"

검은색 갑주를 입고 있는 사내의 외침에 따라 한쪽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기들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점점 다가오는 저들을 보고 있으니 손에서 땀이 절로 배어 나왔다. 그들은 지금 눈앞에 있는 무리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사혈천!

그들은 죽음의 대지인 탑리목 분지에서 출발해 이곳까지 살아 있는 생명을 모두 잠재우고 이곳 숭산의 초입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사사혈천의 마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였으나 그러지 못했다.

무림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이들을 막았지만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파 역시 그들의 무력에 무릎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무위를 자랑하듯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이들 앞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져야 했다.

곧 무림이 사사혈천의 수중에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저들이 아무리 강해도 중원 무림에는 벌써 하늘이 되어 버린 10명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주십천!

정과 사를 대표하는 명실 공히 천하 제일인들이었다.

사사혈천을 막아선 이들 10명의 사내들에게 무림은 신주십천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이미 하늘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었다.

"일마! 그대와 이렇게 손을 잡을 줄은 생각도 못 했소. 더구나 무림의 안녕을 위해서 말이오."

백색 무복이 잘 어울리는 이가 한 사내에게 말했다. 한 쪽의 무리를 대표하는 듯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사내였다.

일마 이현수!

그는 오직 강함을 추구하는 사도의 하늘이었다. 그는 천마의 후신이라 불리며 사도를 대표하는 무인이었다. 패기가 넘쳐흐르는 그의 모습에서 일파의 수장다운 면모가 드러났다.

"훗훗, 나 역시 일황 그대와 함께 싸우게 될 날이 올지는 몰랐다. 그대와의 못 다한 승부는 저들을 처리한 후로 미루지."

일황 최건!

천선문의 후예로 정도의 하늘이라 불리는 자였다. 그는 무황의 후신이며 또한 정도를 대표하는 무인이었다.

일황 최건과 일마 이현수!

명실 공히 무림의 정도와 사도를 이끌어 가는 두 기둥이었다. 이들 뒤에 선 8명의 인물들 역시 정도와 사도로 나뉘어 둘의 뒤에 서 있었다.

일마는 다가오는 사사혈천의 무리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신의 애도인 천마도를 빼 들어 일황을 보았다.

"내기를 할까?"

"어떤……?"

일마가 일황에게 제안을 했다.

"누가 많이 죽이는가. 내기에서 진 쪽은 이긴 쪽이 하루 동안 마실 술을 준비하는 것이다. 죽엽청으로!"

내심 긴장한 일황은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마치 시작도 하기 전에 이긴 것처럼.

"하하하. 좋소이다."

일황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도의 다섯 하늘은 사사혈천의 무리들을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우리가 누구인가?"

일마 이현수에 말에 4명의 사내가 뒤에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사도의 하늘입니다!"

"가자! 우리가 꼭 한 놈을 더 죽여야 한다. 만약 죽엽청을 우리가 사는 날에는 모두 장강에 머리를 박고 죽어야 할 것이다."

"크크! 대형도 참으로 걱정이우. 곱상한 정도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우리들이잖우."

사도를 대표하는 이들이 먼저 달려 나갔다.

그런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 일황 최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에게는 걱정이 없는 듯 보였다.

"우리가 이제껏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네. 저들 역시 중원인이라는 것을 이제야 느끼게 되다니 말이야."

"대형, 저들은 사도인이라고 해도 이미 사를 초월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훗훗, 갑시다. 우리가 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더러 곱상하다고 했는데, 왜 우리들이 정도의 하늘이 되었는지 저들에게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일황 역시 정도의 네 하늘과 함께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럇!"

두두두두!

혈전의 전주곡이 울렸다. 차원이 다른 무위를 선보이며 전진해 오는 사사혈천의 무사들을 막아선 신주십천의 인물들!

그들은 하늘이 되기에 충분했다.

고작 10명으로 인해 사사혈천의 전진이 막혔다.

일황의 일 수에 산악을 허물어지고, 일마의 일 검에 바다가 갈라진다는 무림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들은 다른 신주십천의 인물들보다 한 수 위의 무위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들은 사사혈천의 무사들을 바람에 낙엽 떨어지듯 쓰러뜨리며 나아갔다.

사사혈천은 일을 순조롭게 진행하던 가운데 뜻밖의 복병을 만나 고전하고 있었다.

사사혈천의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매서운 눈으로 자신의 행진을 막는 이들을 노려보았다. 그 얼굴에서는 미묘한 감정들이 표현되고 있었다.

"누구냐, 저들은?"

"신주십천이라는 중원의 하늘들입니다."

하늘이라는 말에 발끈하는 그였다.

"하늘? 웃기는 소리. 하늘은 하나뿐이다. 나, 사혈마 광소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 누구도 하늘이 될 수 없다. 저들에게 보여 주어라. 왜 내가 하늘인지를!"

사혈마 광소!

사사혈천의 주인이자 이번 혈겁의 주인공이었다.

"헉헉! 끝이 없군."

"조심해라!"

아무리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보는 관점에서 그렇다. 그들 역시 인간임에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신주십천은 끝없이 몰려드는 적들에게 점점 지쳐 갔다. 하나 이들은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 저기 검상을 입은 모습만이, 이들이 얼마나 지쳤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크악!"

"너희들이 다 죽으면 누가 술을 사겠나?"

사사혈천의 무리를 베어 넘기는 일지 만사귀였다. 사도의 머리로, 사도의 다섯 하늘 중 둘째였다.

"살아생전에 그대들에게 목숨 빚을 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빚은 꼭 살아서 갚아 준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저들을 보아라."

일마와 일황의 앞을 막아선 사사혈천의 무사들은 힘없이 쓰러져 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조금씩 행동이 둔해져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자. 도와야지."

만사귀가 광소를 향해 나아가는 일마와 일황의 뒤로 따라 붙자, 다른 이들 역시 뒤따라 붙었다. 그러고는 사사혈천의 무사들을 처리해 가며 일황과 일마가 사혈마 광소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길을 넓혀 주었다.

"대형이 가는 길을 넓혀라."

사도의 하늘인 4명은 오른쪽을, 정도의 하늘인 4명은 왼쪽을 맡아, 대형인 두 사람이 나아가는 길을 도왔다.

피슝!

신궁 카오스! 궁으로는 중원 최고라고 듣는 이였다. 정도의 다섯 하늘 중 둘째였다.

그는 순간 세 대의 화살을 광소에게 쏘았다.

"타앗!"

광소의 좌우에서 호법들로 보이는 이들이 두 대의 화살을 쳐 냈다.

"크크! 재미있군."

날아오는 한 대의 화살을 손으로 잡고 조소를 띠고 있는 광소였다. 그는 낚아챈 화살을 만지며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윽!"

1명, 1명, 신주십천의 인물들이 쓰러져 갔다.

수천의 무리에 에워싸여 싸우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꼭 이겨서 중원을 지켜 다오."

쓰러지는 필살검 한상의 소리가 모두에게 들렸다.

"한상! 한상!"

일황은 눈을 감는 그를 보고 외쳤다. 하나 적은 일황을 그냥 두지 않았다.

"천무신공, 천무만화낙뢰!"

일황의 머리 위에서 수많은 점들이 생겨나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에게 쏟아졌다.

콰과과광! 찌이이이익!

떨어지는 뇌전의 힘은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일황의 독문무공인 천무신공의 위력이었다.

일황은 눈을 감은 한상에게 다가가 그를 안았다.

정도의 다섯 하늘 중 살아 있는 이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자네의 무공을 다른 사람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일세. 잘 가게나, 친구."

일황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평생을 함께해 온 친구에게 보내는 일황의 마음이었다.

사도 쪽에서도 죽어 가는 이들이 생겨났다.

"천마신공, 천마군림, 파천혈류!"

부서진 하늘에 피만이 흐른다는 일마의 독문 무공인 천마신공의 파천혈류였다.

한 줄기의 선이 일마의 앞에 생겨났다. 그 선은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선에 부딪치는 모든 것이 절단되었다.

"역발산, 눈을 떠라!"

천하제일의 신력을 가진 역발산은 차디찬 땅에 쓰러져 눈을 감았다.

일마 이현수는 몸을 떨었다.

정도와 사도의 사람들은 동료의 죽음 앞에서 다시 몰려오는 사사혈천의 무리들을 보고 검을 고쳐 잡았다.

먼저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무영객 화령이었다.

"왜 내가 신주십천에 드는지 지금 보여 주겠다. 무영신공, 무영보!"

순간 사라지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 뒤에서 들려오는 사사혈천 무사들의 비명 소리에, 그의 무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놈들아! 내가 바로 신주십천의 악마소 수금인이다. 크 하하하하!"

수금인의 광천소에 사사혈천의 무리들은 귀를 막아야 했다. 순간 카오스가 화살에 내공을 가득 주입해 적들을 향해 날렸다.

"파아앙!"

"크아아악!"

카오스의 화살은 사사혈천의 무사들을 꼬챙이에 꽂듯 관통하며 직선으로 날아가 적의 목숨을 앗았다.

사혈마 광소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들의 손에 벌써 수천의 수하들이 희생되었건만 저들은 고작 3명만이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악마소 수금인의 광천소에 자신의 수하들이 힘을 못 쓰는 것도 못마땅했다.

"갈!"

허공에서 광소와 수금인의 내공이 격돌했다.

콰아아앙!

"커억!"

광소는 수금인의 광천소에 대항해 소리쳤다. 수금인은 심한 내공의 소모로 인해 광소의 사자후에 내상을 입었다.

적들을 베며 달려오는 일마를 본 그는 손을 저였다.

"시팔. 나, 저놈 꼭 죽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대형이 꼭 저놈의 목을 따 주시기를……."

"알았다. 조금 쉬어라. 만사귀, 수금인을 보호해라."

"알겠습니다, 대형!"

일마 이현수는 광소를 노려보았다. 서서히 그의 몸에서 뻗어 나가는 살기가 순간 주위를 장악했다.

"크크. 이보게, 수금인. 대형이 화가 무지 났는가 본데?"

"맞소. 저 지독한 모습에 내가 대형에게 무릎을 꿇었잖소. 저 모습은 그날 이후 처음 보는 것 같수다."

일황 역시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내공을 끌어 올렸다.

이제 신주십천 중 살아 있는 사람은 5명뿐이었다. 그중 두 명은 내상으로 인해 움직이지 못했다.

만사귀는 2명을 보호하며 방어만 하고 있었고 일마와 일황은 자신의 모든 내공을 격발해 살기를 피워 주위를 장악했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기의 성질로 인해 심한 바람이 불었다.

마치 대막에서 휘몰아치는 용권풍과 같았다. 사사혈천의 무사들은 기의 소용돌이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기 시작했다.

연수 합격!

최고의 위치에 올라선 두 사람이 펼치는 연수 합격의 공격은 실로 무서웠다. 아니 두 사람의 연수 합격은 마치 천하 제일의 신공처럼 보였다.

"왜 내가 사도의 하늘인지를……."

"왜 내가 정도의 하늘인지를……."

두 사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죽기를 각오했는지 이제껏 아껴 두었던 내공을 모두 사용하는 듯했다. 몰아치는 폭풍에 사사혈천의 무리들은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물러서라!"

고작 10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 자체가 사혈마 광소의 자존심에 금이 가게 했다.

더 이상 피해를 입으면 소림을 치기 어렵다고 판단을 했는지 드디어 광소가 나섰다. 이번 중원행에서 처음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일마의 검이 광소를 향해 직선으로 뻗어 나갔고, 일황의 검이 광소의 모든 방위를 차단했다.

"이런!"

사혈마 광소는 일황과 일마를 과소평가를 했다. 아니 이제껏 싸웠기에 지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친 몸으로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게 실수였다.

놀란 광소는 검을 들어 방어를 했지만, 일마의 검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컥! 이런!"

일황의 검 또한 그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회를 잡은 두 사람은 자신의 최고 무공을 펼쳤다.

"천무신공 낙성류!"

"천마신공 파천일검!"

광소 역시 두 사람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자신의 방어 무공을 전력으로 펼치며 보호했다.

"사사광신무, 사천혈갑!"

콰과과광- 쾅!

"크아아악!"

자욱한 먼지가 일어나 주위를 볼 수가 없었다. 하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먼지가 걷히며 광소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지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내가… 당하다니……. 나 광소가 저런……."

내공을 심하게 소모해 힘들어하는 두 사람은 검에 의지해 두 발을 땅에 버티고 있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며 들렸다. 뒤에서 구파일방을 비롯해 오대세가와 사천왕의 깃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산인해를 이룬 그들이 사사혈천의 무리들을 덮쳐 갔다.

광소는 뒤에 오는 무림인들을 보고 하늘을 향해 절규했다. 하늘이 왜 자신과 함께 저들을 보내었는지.

"크하하하하! 나 광소는 다시 돌아온다! 그날, 무림의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이다. 크하하하하하!"

사사혈천의 무사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마와 만사귀는 움직이지 못하는 수금인을 안고는 몸을 돌렸다. 일황 역시 움직이지 못하는 화령을 안아 들고 몸을 돌렸다.

이들의 모습이 화면을 채우며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

동영상은 여기에서 끝났다. 마치 한 편의 무협 영화를 보는 듯했다. 이대로 극장에 상영을 해도 대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영상은 외국에서 광고하는 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안의 인물들은 모두 천연회의 사람들이었다.

동영상이 끝나자, 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영상에서 보면 나오지만, 이번에 새로운 맵인 사사혈천 대지의 탑리목 분지가 열립니다. 뿐만 아니라 세외와 동영 역시 함께 나옵니다.

"그래! 동영상을 보면 에피소드 2는 사사혈천이 메인인 것 같아."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외 무림이나 동영 무림 역시 이번 에피소드에 간접적인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에피소드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생소한 영토들이라 고수들은 한 번씩 가 보겠지?"

-그렇습니다. 이미 문파는 만들어졌습니다. 에피소드가 시작하는 동시에 천에 정식 등록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 문파들의 수장은 고수들을 데리고 사사혈천이나 동영, 세외를 먼저 경험해 볼 것입니다. 각 영토에서 사냥을 한 후 드롭되는 아이템의 분포와 경험치의 비율을 놓고 비교해 득이 된다 싶으면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겠지. 야, 넌 어디가 나을 것 같아?"

현수 역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뭐든 처음 나오는 맵에서는 아이템이 잘 나오기 때문이었다. 또한 상급의 맵일수록 고가의 아이템이 나오기에 현수도 황궁의 일만 아니라면 경험해 보고 싶었다.

특히 세외는 대학사와 1황자가 숨은 곳이기 때문에 더욱 간절했다.

-저 같으면 세외나 동영보다는 사사혈천을 노리겠습니다.

"음, 그럼 사사혈천 고수들의 평균 레벨은 어떻게 될 것 같아?"

-이번에 레벨 제한이 풀려서 잘 알 수는 없지만 만약 100레벨을 최고로 놓고 본다면, 70레벨에서 90레벨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영상에서 보여 준 것과 비교해 보면, 신주십천이라는 인물들은 80레벨 정도일 것이고 일마와 일황은 90레벨 대 수준일 겁니다. 하나 단지 짐작일 뿐입니다. 어떻게 업데이트되었는지는 현수 님께서 직접 그곳으로 가서 확인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에피소드 2에서는 레벨의 제한이 풀린다. 이미 공지에 올라온 이야기지만 지금 62레벨인 현수에게는 조금 답답한 소식이었다. 황궁에서는 이제 거의 레벨 업을 할 수가 없었다.

황궁이 정리된 상황에서 황궁 자객을 기대하는 건 어려웠다. 또한 현수의 레벨이 높아, 황궁 자객을 죽여 봤자 경험치가 표도 나지 않을 만큼 적게 나왔다.

그나마 북방에서 어느 정도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럼 방법이 없을까?"

현수는 은근슬쩍 무림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물었으나 야는 현수의 생각을 읽었는지 말을 돌렸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현수 님께서 무공을 탈취해 친구 분들에게 전해 준 일입니다. 에피소드 2가 시작되고 나서 그 무공들을 사용하면, 각 문파로부터 쫓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들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난 황궁에 있어. 알잖아? 도와줄 수도 없다고."

-이미 화화공자 님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공을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혹시 현수 님께서 준 무공만 익혔다면 필시 무공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에피소드를 시작하기 전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럼 BS 그룹에서 눈치를 챌 것이고 모니터링에 들어갈 것입니다.

"알아서들 해결해야지."

정작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현수 역시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궁을 벗어나기 전에 현수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내일 오픈하는 에피소드 2를 기다리며, 현수는 혼자 머리를 굴렸다.

다음 날, 현수는 천의 오픈 시간에 맞추어 접속을 했다.

현수가 접속을 하자 미랑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미랑 님."

"이제 전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미랑은 이제 성장 준비를 끝내고 수면을 취하기 위해 돌아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현수는 아가씨가 준 퀘스트를 무사히 마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을 했다. 그때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를 종료합니다. 보상으로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의 영구 소유권을 가집니다.

영구 소유권이라는 말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의 무공이 1성씩 올라갑니다.

-천에서 존재하는 여우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우들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으나, 늑대를 비롯해 다른 야수형 몬스터는 비호감을 나타내게 됩니다. 우선적으로 야수형 몬스터의 선공 대상이 됩니다.

현수는 알림 메시지를 보고 놀랐다.

다른 건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이 1성씩 올라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보상이었다. 그리고 야수형 몬스터에게 선공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생각지 못했다.

미랑은 현수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황궁에서 자신의 친구였던 미령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미령이에게는 따로 보답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미랑 님!"

"네, 아버님."

익숙하게 들어서일까? 그렇게도 어색하던 아버님이라는 소리가 친숙하게 들렸다.

"미랑 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시는 이유를 미령이에게 제가 말하는 것보단 직접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미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랑은 일어나서 현수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현수는 그런 미랑을 보고 같이 절을 했다.

미랑이 나가자 현수는 자신의 무공 창을 확인했다.

"무공 창 오픈!"

운중비록 : 11성

-보법 : 운중난화무, 운중무영보, 운중광속신형보

-경신법 : 운중탄영신, 운중무영신

살황의 일기장 : 11성

-지둔술, 추적술, 탐지술. 은신술 잠입술(운중비록을 토대로 사용할 수 있음)

-뇌전류 : 기력을 사용해 적에게 타격을 준다. 한 줄기 빛과 같은 빠름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

민첩성 +400%의 타격을 준다.

-축골공 : 기력을 사용해 몸을 자유자재로 줄일 수 있다. (기력이 다하면 자동으로 축골공이 풀린다.)

팔검수화진검류 : 10성

제작자 : 이현수

등급 : 절정

설명 : 구파일방의 무공들 중 검법만을 모아 ≪만자무서≫를 통해 합쳐 만든 무공으로, 일초식의 검법이지만 여덟 가지의 변화가 숨어 있다.

기력을 사용해 적에게 타격을 준다.

순발력 +250%의 타격을 준다.

현천파열권 : 10성

제작자 : 이현수

등급 : 절정

설명 : 구파일방의 무공들 중 권법만을 모아 ≪만자무서≫를 통해 합쳐 만든 무공의 일초식 권법으로, 총 여덟 번의 주먹을 빠르게 휘두를 수 있다.

기력을 사용해 적에게 타격을 준다.

순발력 +250%의 타격을 준다.

호심발도술 : 10성

제작자 : 이현수

등급 : 초절정

설명 : 구파일방의 무공들 중 도법과 살황의 일기장의 뇌전류를 합쳐 ≪만자무서≫를 통해 만든 도법.

기력을 사용해 적에게 타격을 준다.

민첩성 +300%의 타격을 준다.

천밀밀 : 9성

제작자 : 이현수

등급 : 절정

설명 : 구파일방의 무공들 중 호신기공으로 만든 무공으로, 검으로 검막을 만들어 적의 공격을 방어한다.

기력을 사용해 방어한다.

방어력 +180%의 방어력을 가진다.

≪만자무서≫

등급 : 무

설명 : 두 가지 이상의 무공을 합쳐 새로운 무공으로 만들 수 있는 무서.

분명 대성했다고 구미호가 말했다. 또한 현수 역시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을 대성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무공 창에 보이는 것은 11성이었다.

"보통 무공은 10성까지다. 11성이 있다면 12성까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무협 소설에서는 보통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어 한계의 벽을 허물고 더 나아가면 11성 12성에 도달한다고 했다."

그때 현수는 천에 존재하는 전설이라는 무공들 역시 11성이나 12성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음! 그럼 전설이라는 다른 무공들 역시 마찬가지겠구나.'

기연이었다. 아니 구미호의 안배였다.

천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 이유는 내공심법으로 내공을 축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명상이나 무공에 대한 생각들을 잘 안 하게 되어, 깨달음을 얻는 것이 힘들었다.

현수는 또 하나의 발견에 기뻐했다. 또한 살황의 일기장에 없었던 축골공이 11성이 되자 새로 생긴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에피소드 2가 기분 좋게 시작된 것이다.

현수는 기쁜 마음으로 연무장으로 뛰어갔다. 빨리 11성의 무공을 펼쳐보고 싶었다.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운중난화무는 바람에 의해 구름이 변하는 것을 본떠서 만든 보법으로, 대성을 하면 어떠한 공간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운중비록, 운중무영보!"

구름은 눈에는 보이지만 다가서면 보이지 않는다. 운중무영보 역시 이 점을 본떠서 만든 보법으로, 대성을 하면 신형이 8개로 늘어난다. 하지만 현수의 신형은 8개가 아닌 16개로 늘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운중비록, 운중광속신형보!"

운중광속신형보는 몰아치는 강한 바람의 도움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을 보고 만든 운중비록의 마지막 보법으로, 그 빠르기가 활을 힘차게 당겨 쏘아지는 화살과도 같았다.

"뇌전류!"

콰아아앙!

휘둘러지는 용천검에서 마치 가느다란 실이 뻗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헉!"

현수는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보고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지밀원에서 사용하는 연무장으로 들어가는 벽이 무너져 내렸다.

"운중비록, 운중탄영신!"

현수는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순간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현수는 방으로 돌아와 달라진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또한 이런 무공을 자신에게 준 구미호를 떠올렸다.

"아가씨!"

마지막으로 구미호의 레이드를 주선한 1황자의 일행이 생각났다. 순간 현수의 몸에서 강한 살기가 일어났다. 살기는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안정되자 현수는 평상시로 돌아왔다.

현수는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방을 나갔다. 지밀원의 무사들에게 팔자영법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현수는 지밀원의 담장이 무너진 것이 보이자 모른 척하고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지밀원의 모든 이들이 모여 있었다. 눈에 익은 평설중 역시 그곳에서 현수를 잡아먹을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지난 날 자신의 집에 숨어 들어와 기둥과 기와만을 남기고 싹 쓸어가 버린 장본인이 현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물증이 없기에, 이만 갈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이제는 직책 역시 현수가 평설중보다 높았다.

이들은 현수가 멸친어린천룡군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와 령 그리고 현수, 이렇게 셋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오직 용천검의 손잡이에 감추어져 있는 인장만이 현수가 멸친어린천룡군이라는 사실을 말해 줄 뿐이었다.

현재 현수의 직책은 천군교두였다. 황제의 명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기에 지밀원의 무사들은 현수의 말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반갑습니다. 전 오늘부터 여러분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 이현수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무공 수위를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지밀원의 사람들은 모두 현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설중이 로비를 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이들은 아직 현수의 진정한 실력을 몰랐다. 또한 팔자영법이라는 무공보다는 자신들이 배우고 익힌 무공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지밀원의 무사들은 자신들을 가르치려 하는 현수에게 시비를 걸었다.

"가르치는 사람의 무공 수위부터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안면이 있는 평설중이 모든 이들의 총대를 메고 현수에게 말했다. 그는 현수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군요. 저의 무공 수위라……."

현수는 잠깐 말을 멈추고 모두를 살펴보았다.

"전 고금 제일입니다."

현수는 장난처럼 말했다. 어이가 없는 현수의 말에 지밀원의 무사들은 그거 실없이 웃을 뿐이었다.

고금 제일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나와서일까? 아니면 현수를 얕보았기 때문일까? 순간 정렬했던 대오가 무너졌다.

현수는 그런 그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믿지 못하겠으면 저와 한번 대련을 해 보시겠습니까? 진검으로 팔과 다리를 잘라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숨만 쉬고 있으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황제 폐하의 사람이기에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사람 역시 황제 폐하뿐입니다. 목숨만 살려 주는 것을 조건으로 저와 대련을 할 사람이 있으면 나와 주십시오."

강하게 나오는 현수를 보고 모두들 긴가민가했지만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병신이 되면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수에게 무공을 배우라고 한 황제의 명을 거역한 것이 되기에 멸문지화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럼 자신들의 무공 수위를 말하든지. 그리고 이제부터는 예의상의 말은 하지 않는다. 왜? 난 너희들의 사부이니까."

한 번 기를 죽이면 끝까지 죽여야 앞으로 편하다. 살기를 띠는 그들을 본 현수의 신형이 움직였다.

"윽!"

"눈깔 깔아라. 그리고 너희 같은 하수를 가르치려는 나의 고생을 생각해서라도 말을 잘 듣기를 바란다. 아니면 단체로 골병이 들 테니까."

언제 움직였는지 알 수도 없었다. 다만 현수가 사라지고 나서 자신의 앞에서 나타나 주먹으로 복부를 가격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평설중은 복부에 닿은 충격에 먹었던 것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렇게 현수는 지밀원의 무사들에게 팔자영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동작이 굳었다. 붓이 딱딱해서야 어떻게 종이에 글씨를 쓸 수 있겠느냐?"

"윽!"

평설중은 현수의 구타 대상이었다.

"왜 또 저입니까?"

참다 못해 한마디 하면 현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 마음이다. 그리고 동료는 일심동체다. 너의 아픔이 곧 동료의 아픔이 될 수 있다. 자, 보아라. 너의 고통으로 인해 동료들이 더욱 열심히 수련을 하지 않느냐?"

말도 안 되는 억지에 평설중은 미칠 것 같았다. 황궁이고 지밀원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 시작하라."

계속해서 한 가지 동작을 반복하는 다른 이들 역시 미칠 지경이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승 무공을 익혀도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현수는 기초를 수련하고 있는 지밀원의 무사들에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내일 천밀위사들과 대련을 하겠다. 지는 놈이 있으면 알아서 각오를 해라."

현수의 말을 들은 지밀원의 무사들은 순간 표정이 바뀌었다. 천밀위사들은 지밀원의 무사들과는 수준이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이제껏 기초 훈련만 한 자신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그런 말도 되지 않는 대련을 준비한다며 모두 현수를 저주했다.

현수는 미령에게 줄 선물로 화장품과 장신구 그리고 비단옷을 준비했다.

천에서 최신 유행하는 것들로, 유저들은 물론 NPC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미령이는 밖에 있느냐?"

"네, 나리."

미령이 방으로 들어와 현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불러 계셨사옵니까?"

고개를 드는 미령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화장품과 장신구 그리고 비단옷이었다.

'아! 나리께서 미랑이에게 줄 선물을 샀나 보구나. 좋겠다, 미랑은. 하긴 아기까지 가졌으니 당연하겠지. 나도 멋진 황궁의 관리를 만나 미랑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곧 있으면 나리와 미랑이 혼례를 올리겠구나.'

미령은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심란해졌다. 힘든 황궁 생활을 하는 미령에게는 미랑이 유일한 말 동무였기 때문이었다.

'미랑은 나리와 몰래 혼례를 올리면 황궁 밖에서 살겠지.'

궁녀는 황제의 여자였다.

궁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황궁에서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궁녀들이 황궁에서 관리와 눈이 맞아 황궁 밖에 살림을 차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제조상궁에게 조금의 뇌물만 주면 그 정도의 편의는 언제든 봐 주었다.

미령은 앞에 놓여 있는 비단옷과 화장품을 보았다. 한번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들은 미랑의 것이라 생각했기에 조금 아쉬웠다.

"앉아라."

"괜찮습니다, 나리."

"앉아라. 그렇게 서 있으면 내가 불편하다. 그러니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

미령은 현수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니 비단옷과 화장품을 보고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다. 미랑을 보살펴 준 것과 나에게 잘해 준 것이 고마워 오늘 너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미령은 고개를 들어 현수를 보았다. 미랑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혹시 나리가 미랑이 임신을 해서……!'

혼자만의 오해로 상념이 깊어지는 미령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미랑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미령은 몸을 움츠렸다.

"너의 집안 사정은 미랑에게 들었다. 해 줄 수만 있다면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은 미령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긴장을 풀지 않는 미령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미령아. 그리고 이제 미랑은 곧 황궁을 떠나 고향으로 갈 것이다."

"……."

"섭섭해하지 마라. 미랑은 우리와 다른 존재이다. 나 역시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미랑을 부탁받아 이제껏 지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혼인하게 되어 미랑이 황궁 밖에서 생활한다고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을, 괜히 말을 돌리는 현수를 보고 미령은 다시 물었다.

"우리와 다른 존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리, 미랑은 저의 단 하나뿐인 친구입니다."

"미랑이 너에게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자세한 것은 그때 듣도록 하여라. 자,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선물을 받아야지."

미령은 비단옷과 화장품에 손을 대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주저 말고 말해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면 들어주겠다."

"없습니다, 나리."

"괜찮다. 이것은 미랑이 너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어서 나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러니 말해라. 그러지 않으면 미랑이 섭섭해할 것이다."

미랑이 섭섭해한다는 소리를 들은 미령은 힘든 생활을 하는 부모님과 동생 이야기를 했다.

현수는 잠시 생각을 하다 천연회에서 사들인 장원을 떠올렸다. 모두 바빠서 장원에 사람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장원을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현수는 미령에게 물었다.

"알겠다. 그럼 장원을 관리하는 일은 어떠하냐? 나와 친구들이 생활하는 장원이 한 채 있다.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알아서 할 것이니. 다만 모두가 장원을 비우는 날이 많아, 관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구나. 이왕이면 너의 식구들이 모두 와서 장원을 관리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또한 동생들에게 무공을 원하면 무공을, 학문을 원하면 학문을 익힐 수 있게 해 주마. 이것은 내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미랑이 해 주는 것이다."

뜻밖의 말을 들은 미령은 현수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현수를 의심하던 생각은 이미 저 멀리 날려 보냈다.

"감사합니다, 나리! 세상에서 저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나리!"

"그렇게 생각해 주니 나 역시 고맙구나."

미령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오랜 황궁 생활을 한 자신에게 이렇게 배려를 해 주는 관리는 없었다. 음탕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보거나 음담패설을 던지는 관리들뿐이었다. 미령은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이곳 생활이 조금 힘들겠지만 참고 견디어라."

"알겠습니다. 그럼 전 미랑에게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리 하여라."

미령이 나가고 나자 현수는 호면을 꺼내었다.

"아가씨, 조금만 있으세요. 이제 미랑 님이 다 성장했어요. 황제에게 이야기를 해서 아가씨를 찾아 나설게요. 전 기억하고 있어요, 아가씨의 모습을. 그리고 아가씨를 공격한 그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예전에 말했잖아요. 누군가가 아가씨를 해치면 전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울 거라고. 저, 이제는 무공 실력도 굉장히 강하거든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음 날, 현수는 지밀원의 무사들과 천밀위사들의 대련을 주선했다.

황제는 그간 현수에게 훈련을 받은 지밀원 무사들의 성과를 보기 위해 지밀원의 연무장을 찾았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지밀원의 연무장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황제를 보자 일제히 부복을 하며 외쳤다.

황제는 연무장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지밀원 무사들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평설중의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과 같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알고 있을까? 이들이 천밀위사들에게 지는 날에는, 현수의 무지막지한 구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리라. 이 모든 것이 현수가 훈련을 잘 시켜 그런 줄 알고 있으리라.

"하하! 짐이 보기에도 지밀원 무사들의 눈빛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참으로 든든하다."

현수가 한 발 나와 황제께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폐하의 은혜입니다. 이들은 그간 폐하께 충성하고자 뼈를 깎는 수련을 해 왔습니다. 폐하, 만일 지밀원의 무사들이 천밀위사들과의 대련에서 이긴다면 그간의 노고를 생각하시어 3일간 휴가를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독하게 굴리기만 하던 현수가 자신들을 위해 이런 말을 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그저 생색을 내어 지면 더욱 독하게 굴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길! 어떻게 천밀위사들에게 이길 수가 있겠어?'

평설중은 투덜거리며 후에 있을 현수의 괴롭힘에 대해 생각했다. 구타 대상 0순위인 평설중은 예전에 영취궁의 사건을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허락한다. 만일 지밀원의 무사들이 천밀위사들을 이기면 3일간 휴가를 주겠다. 또한 금전 1,000냥을 상으로 내리겠다."

천밀위사들은 그런 지밀원의 무사들을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산과 령은 그들을 비웃지 못했다. 그들을 가르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련은 5판 3승제의 승부로, 먼저 세 번을 이기는 쪽이 승리를 하게 됩니다. 진검 대신 목검을 사용할 것이며, 내공의 사용은 가능하나 손 속에 사정을 두기 바랍니다."

현수의 말이 끝나자 대련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지밀원의 악몽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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