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친어린천룡군滅親御瞵天龍君
"꺅!"
정빈은 죽어 있는 쥐들을 처음 본 날부터 오늘까지 편히 지낸 날이 하루도 없었다.
한동안 조용했기에 더 이상 이런 장난질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또다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정빈은 밤마다 일어나는 악몽 같은 일에 몸을 떨어야 했다. 지금 정빈의 모습 어디에서도 그 옛날 황제의 마음을 빼앗았던 미모를 찾아볼 수 없었다.
황제는 동창과 금의위를 동원해 정빈의 처소에 흉물스러운 동물의 머리나 사체를 가져다 놓은 자를 잡으려 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정빈은 오늘도 피를 흘리고 있는 고양이의 머리를 보고 기절을 해야 했다.
"마마!"
정빈의 비명 소리에 상궁이 뛰어 들어와 고양이의 머리를 얼른 치워 버리고는 급히 밖을 향해 외쳤다.
"밖에 누가 없느냐? 가서 의원을 불러오너라. 어서!"
쓰러져서 상궁의 품에 안겨 있는 정빈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잠시 후에 의원이 들어와 정빈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놀라서 기절하신 것뿐입니다. 안정을 취하면 곧 깨어나실 것입니다."
의원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한 듯 몸을 돌렸다.
대학사는 정빈의 처소에 죽은 동물들의 머리가 매달리는 일이 계속 일어나자, 내심 다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현수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현수는 북방에서 후송되어 오는 중이었다.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현의태감 역시 아니다. 그는 이런 짓을 혐오스러워하기 때문에 절대 아니야. 그럼…….'
황제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내각을 견제하기 위해서 정빈을 괴롭혀 그리로 관심을 돌려놓고 다른 일을 꾸미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너무 억지 섞인 생각이었다.
'누구일까? 도대체 누구일까?'
대학사는 조금씩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 하남성주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거사를 앞둔 상황에서 전 하남성주가 죽어, 거사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변방의 각 장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장군들을 죽인 후 군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오라는 명을 전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각 부대의 대장군들이 오히려 그들을 항명이라는 이유로 참살해 버렸다.
대학사는 그동안 전 하남성주와 각 군대의 장수들에게 들인 공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분명 잘못된 곳이 있다. 그렇기에 일이 이렇게 흘러오게 된 것이다. 하나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해 봐도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모든 일이 현수가 장원급제한 후에 급속하게 변했다는 것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잘못하다간 우리가 당할 수도 있겠다. 대비를 해야겠어."
대학사는 혼자 많은 생각을 하며 훗일을 대비했다.
* * *
현수의 전서구를 받은 건을 비롯한 천연회의 남자들은 모두 황궁에 입궁한 상태였다.
그들은 천밀위의 산의 도움으로 황궁의 곳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황궁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일이 끝나는 밤이 되면, 만사귀는 모두가 모은 정보를 분석하여 다시 천연회의 모두에게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내일 현수가 황궁으로 온다."
"내일부터가 시작이라 할 수 있지. 이거, 조금 긴장된다. 그치?"
만사귀는 현수가 황궁에 도착한 시점부터 일을 벌이려고 생각 중이었다.
"역발산에게는 또 다른 일을 하나 맡겼어. 우리는 황궁의 일이 끝나면 역발산을 도와야 할 거야."
"뭐?"
천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보다 빨리, 정확하게 수집하기 위해서 역발산으로 하여금 흑사파의 내실을 다지는 한편 주변 뒷골목의 건달패를 손에 넣으라고 전했다.
하오밀문이라는 거대 문파가 있기는 하지만 몇몇을 빼고는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닐 것이라는 게 만사귀의 판단이었다.
"역발산을 너무 믿는 것 아니야?"
"잘할 거야. 황궁의 일이 끝나는 대로 우리가 역발산을 도울 것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역발산이 흑사파 애들을 데리고 뒷골목을 장악하면 우리는 하오밀문과 싸워서 하오밀문을 흡수해야 해."
"하오밀문을?"
"그래!"
"거대한 하오밀문을 꼭 건드릴 필요가 있을까?"
수금인이 조금은 불안하다는 듯 만사귀에게 되물었다.
말로는 하오밀문을 흡수한다고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야 돼. 솔직히 지금 혼자 힘으로 천의 정보를 분석하는 건 힘들어. 처음에는 몰랐는데 조금씩 변수들이 생기고 있어. 나 역시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정보들과 내가 느낀 것을 합쳐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정보가 필요해."
"그렇지만 하오밀문을 건드린다면, 잘못하면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낼 수도 있어."
건 역시 조금 불안한 듯 만사귀의 의견에 반대를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하오밀문의 모든 인원을 상대하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위의 머리들만 처리하면 돼. 물론 건이 조금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지만 그래도 천연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
"음!"
건 역시 천연회가 천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만사귀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몇몇 문파를 끌어안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건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씩 살펴보았다.
모두가 하오밀문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용했다.
"하오밀문이라……."
사람들은 하오밀문을 인간쓰레기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그들은 도둑질, 살인, 강간, 강도질 등등,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즐겨하는 집단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오밀문의 한 단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하오밀문이 가진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하오밀문에 뛰어난 고수들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오밀문은 고수들이 없는 문파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수백만이라는 개방을 능가하는 인원을 가진 문파가 바로 하오밀문이었다. 또한 정보력에 있어서도 개방을 능가하는 문파였다. 그런 문파를 상대로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겨운 일이었다.
고수는 없고 인원은 많은 문파, 그 집요함은 구파일방에서조차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럼 오히려 독이 되니까. 지금의 문제는 현수가 오는 내일이다."
만사귀의 한마디는 모두를 긴장케 했다. 하오밀문도 중요하지만, 이곳 황궁에서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천연회가 무림으로 나갈 방향이 결정된다. 성공하면 무림의 횡보가 순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하면 천을 접어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다.
"그렇지. 여기서 잘못되면 하오밀문이고 뭐고, 천을 하는 내내 숨어 다녀야 하니 말이야."
만사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까지 황궁의 고수들에 대해서 느낀 점을 이야기했다. 비록 다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몇몇 황궁 고수들의 데이터를 뽑아내었다.
"황궁의 무사들 중에 강한 고수라고 할 만한 이들은 그렇게 없어.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지. 다만 몇몇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겠지? 특히 천밀위사와 지밀원의 무사들은 우리와 맞먹는 수준이고, 그들의 우두머리는 건보다 반 수 위의 실력이다. 물론 실제로 붙어 봐야 알겠지만 말이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어."
만사귀의 말에 건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문제는 고수들이 아니라 인원이었다.
"문제는 인원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수가 없다고 해도 그 많은 인원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어. 저들을 모두 상대하다간 결국 우리가 지쳐 당하게 된다."
필살검이 황궁의 많은 무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게 문제지. 현수가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우리는 천에서 참 피곤한 삶을 살아가게 될 거야. 하지만 무엇인가 생각을 하고 있으니 우리를 불렀겠지."
만사귀의 말을 들은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올 인이라… 좋은데!"
화화공자는 모두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다른 이들 역시 웃었다.
"일단 현실에서 만나서 이 일에 관해 의논을 하고 처리하자. 어떻게 보면 이제부터 시작인데 여기서 잘못되면 상당히 피곤해질 것 같아. 일이 일인 만큼 한두 번 다시 점검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
화화공자는 먼저 현수의 생각을 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그렇게 하자. 현수에게 전서구를 보내서, 오페라 하우스에서 보자."
"좋아!"
그들은 동시에 접속을 해제했다.
건은 혼자 남아 현수에게 전서구를 보내고는 역시 접속을 종료했다.
"자식들, 모두 조금씩 걱정이 되나 본데."
현수는 건에게서 받은 전서구를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현수 역시 궁 안의 모두를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내각은 일단 두고 황궁에 주 세력이 모여 있는 환관들을 먼저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제조상궁이 협조를 잘해 주었는지 모르겠네."
현수는 북방으로 떠나기 전에 현의태감과의 일을 빌미로 제조상궁에게 정빈을 계속해서 괴롭히라 했다. 상궁을 관리하는 제조상궁이 도와준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제조상궁은 자신의 목을 움켜잡고 있는 현수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왜 이런 일을 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생각해 봐도 정빈을 괴롭히면 1황자를 지지하는 대학사가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제조상궁은 정빈의 상궁을 시켜 시간이 날 때마다 괴롭혔다.
정빈의 상궁 역시 여자였다. 그녀는 이미 남자를 알아 버렸기에 제조상궁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녀는 제조상궁의 제안이 참으로 입에 맞았다. 다 늙어 빠진 영감들이 아니라, 젊은 장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또한 그녀 역시 권력이라는 것을 맛보았기에 제조상궁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비참한 미래를 상상하기 싫었다.
"제조상궁이 잘해 주었다면 일단 내각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황궁에서 주 권력을 잡고 있는 현의태감이 쫓겨난다면 내각의 대학사도 자연히 숨을 죽일 수밖에 없겠지."
현수는 2황자가 비록 군천령을 가지고 전대의 천밀위사들에게 보호를 받고는 있지만, 그렇게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결국 현의태감을 황궁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천연회의 힘이 필요했다. 각 기관의 우두머리 급을 잡고 천밀위를 움직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물론 그전에 꼭 손에 넣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용천검이었다. 현수는 이미 황제에게 내각의 동조 세력의 연판장을 넘겨줌으로써 용천검을 손에 넣기 위한 계획을 실행했다.
문제는 현의태감이 반란을 시작한 후에 막을 것이냐 아니면 시작하기 전에 막을 것이냐였다.
1명씩 각개격파를 한다면, 천연회의 사람들이 충분히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의태감이 아닌 천연회가 먼저 일을 시작해야 했다.
* * *
현수는 밤이 되자, 접속을 해제하고 오페라 하우스로 향했다.
"다 모였네."
"어서 와라."
"자! 그럼 현수가 왔으니 바로 시작하자."
만사귀는 회의의 주체를 현수에게 넘겼다. 현수는 가지고 온 종이를 돌렸다.
"읽어 보고 생각을 말해."
모두는 현수가 준 종이를 보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런데 여기에 적혀 있는 것에 따르면, 현수 넌 감옥에 수감될 것이 아니라 나와야 한다. 하지만 넌 황궁에 도착을 해도 진상 조사를 위해 당분간 감옥에 있어야 되잖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적혀 있는 이들은 모두 레벨이 60대야. 건이는 문제가 없겠지만 만사귀를 비롯해 나머지는 조금 버거울 거야. 하지만 꼭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사람들이야."
현수가 넘겨준 종이에는 현의태감의 세력인 동창과 금의위의 총수, 또한 그들에게 중요한 인물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천연회의 사람들은 이미 예상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 레벨이 60대라고 해도, 유저 레벨 60대와는 차이가 있다. 그동안 시험을 해 보았는데, 5레벨의 차이까지는 유저가 이길 수 있다. 물론 선명제가 무공을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지만."
"그래?"
모두는 처음 듣는 소리인 듯 만사귀를 보았다. 만사귀는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느낀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는 마천루에서 만난 흑밀사의 무사들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었다.
"또 있어. 레벨이 높다고 해서 다 강한 것은 아니야. 사회적 지위나 명성 때문에 레벨이 높은 자들도 있어. 그리고 공격력은 약한데 방어력이 높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로 공격력은 강한데 방어력이 약한 놈이 있어. 물론 부딪쳐 봐야겠지만 말이야."
"그래? 그럼 모두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네?"
현수는 자신 있게 말하는 만사귀를 보며 말했다.
"그래. 다만 여기 적혀 있는 것을 보면 화화가 제조상궁을 맡았는데, 좀 불안하다."
"내가 왜?"
화화공자는 발끈했다.
"넌 여자라면 그저 헤벌쭉하잖아. 그리고 내가 먼발치에서 봤는데, 제조상궁의 미모가 장난이 아니야. 그러니 조금 불안하다는 거지."
"야, 만사귀! 너나 잘해. 모산의 부적술로 상대를 죽일 수 있겠냐?"
"걱정 마. 꼭 무공이나 부적술로 죽이란 법은 없으니까. 머리만 잘 굴리면 그 정도는 별것 아니니까."
현수는 두 사람의 말을 들어가며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만사귀! 그러니까 우리 레벨이면 5레벨 차이가 나는 몬스터도 이길 수 있단 말이지? 그리고 너희들도 맡은 NPC들을 처리할 수 있단 뜻이고?"
"그래! 그리고 우리가 함께하면 힘은 조금 들겠지만 10레벨 차이까지는 잡을 수 있다. 물론 역발산이 있으면 그 레벨 차이는 더 올라간다."
함께 파티를 하며 손발을 맞춰 온 이들에게 역발산이라는 존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엄청났다.
"그런 건 빨리빨리 말을 해 주어야지."
현수는 그런 중요한 정보를 이제야 알려 주는 만사귀를 보고 투덜거렸다.
"너와 건은 제외다.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베타 시절을 기준으로 데이터를 뽑아 보면, 레벨 차가 조금 더 나도 상관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어."
현수는 생각이 정리되었다.
"모두들, 어때? 자신 있지?"
천연회의 사람들은 모두 미소를 지었다. 아마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뜻일 것이다.
"문제는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행해야 한다는 거야. 또한 동시에 일이 진행되어야 해. 다들 알겠지만 머리들만 잡으면 돼. 나머지는 황궁의 병사들이 다 알아서 할 거니까."
현수는 같은 날 동시에 일을 벌이기를 원했다. 무엇 하나라도 빠지면 곧바로 반역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럼 더 많은 NPC들과 싸워야 하는데, 그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내가 도착하고 나서 3일이 지난 후에 시작하기로 하고, 모두들 3일 동안 처리 대상의 습관이나 행동을 파악해."
"오케이!"
모두들 자신 있게 말했다. 천연회가 비상을 하느냐 아니면 추락하느냐가 3일 후에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 처리하면 조용히 황궁을 떠나! 전에 말한 것처럼 그때부터 우리는 바로 공성 체제에 들어가야 하니까."
"그냥? 아무 소득도 없이?"
이해타산이 빠른 수금인은 '왜?'라는 의문이 들어 현수에게 물었다. 아무 소득이 없이 하는 일치고는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그래, 아무 소득 없이 그냥 빠져나가. 우리는 앞으로 공성을 위해 준비해야 돼. 만약 황궁의 일이 유저들에게 알려지면 우리의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그냥 나오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다른 건 몰라도 황궁 무고에는 한번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카오스 역시 약간의 불만을 토했다.
"내가 알아서 너희들 모두에게 황궁 무고를 보게 해 줄게. 약속해. 그러니 이번에는 그냥 빠져나가.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는 만사귀가 알려 줄 거야."
현수는 만사귀에게 바통을 넘겼다. 만사귀는 자신이 조사한 현 무림의 실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재 유저들이 만든 가장 큰 방파는, 정도의 천지회와 사도의 천마회 그리고 중도의 천중연맹이야. 만일 이번 일로 우리의 행적이 노출되면 우리는 세 곳에서 공격을 받을 수도 있어."
"왜?"
"쉽게 말하면, 자신들보다 강한 문파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조금 전에 몬스터와 같은 레벨이라 해도 유저가 조금 더 강하다는 말을 했지?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았는데, 천을 유저들끼리 만들어 가게 하기 위해 BS 그룹에서 꾸민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유저들이 천을 만들어 나간다고?"
필살검이 되물었다.
"그래. NPC들은 유저들과 달리 죽으면 끝이지. 천 안에서 다시 NPC를 만들어서 키우려면 아무리 빨라도 20년이 걸려. 현실로는 약 7년이라는 말이지. 만약 그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모두는 만사귀의 말에 빠져 들었다.
"그 시간 동안 천에서 새로이 생겨난 NPC들은 유저의 제자가 될 수도 있어."
"왜 그렇게 하는 거지? 그냥 고수 NPC들을 만들어서 천에서 활동하게 하면 되는데."
카오스가 다시 물었다.
"그건 천이 강조한 현실감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만약에 유저들이 만든 문파가 그 지역에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NPC들은 그 문파에 자신의 아들딸을 보내 무공을 수련시키지 않을까? 또 어떤 유저가 한 NPC가 마음에 들었어. 그럼 그 NPC를 거두어 제자로 삼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음!"
"추측이야.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해. 왜? 그게 무림이니까. 또한 그게 현실이고. 이야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최대한 힘을 숨겨야 해. 그리고 또 힘을 길러야 되지. 방각이나 혁무기가 우리를 그냥 두는 이유는 아직 우리의 힘이 자신들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직접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베타 시절을 우리와 함께 보낸 이들은 우리를 경계하고 있어. 만일 우리에게 조금 힘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면 가차 없이 밟아 버리려고 할 거야."
만사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최소한 천 안에는, 이들에게 힘이 실리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은 없었다. 특히 방각이나 혁무기 같은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천연회와 싸우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방각과 혁무기는, 다른 이들은 몰라도 현수와 건에게는 등을 질 생각이 없었다. 다만 힘이 생기면 막대한 돈을 풀어 이들을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두 명으로 천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들은 부르주아 백수, 쉽게 말하면 돈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방각이나 혁무기는 부르주아 백수들이 돈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 역시 부르주아 백수들이기에.
"그러니까 우리는 힘을 기를 때까지 숨어 있어야 된단 말이지?"
"그래."
"그래도 그렇지, 이건 조금 아까운데. 아무 소득도 없이 힘을 빼야 되는 거잖아?"
현수가 대신 대답을 했다.
"아무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지. 개인적으로는 몰라도, 천연회가 황궁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얻을 수 있게 될 거라는 점을 잊지 마. 그리고 황궁의 힘은 우리가 공성에서 100% 승리를 점할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 되기도 해. 그런데 혹시 모르니 얼굴을 가리는 게 좋을 것 같다."
괜히 얼굴이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참, 그리고 우리가 황궁의 일을 끝내고 나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천에서 조금 이야기했지만 현수는 못 들었으니까 다시 말할게."
"뭔데?"
"정보를 얻기 위해 하오밀문을 수중에 넣어야 해."
"정보?"
현수는 정보에 대해서라면 만사귀가 있기에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정보가 조금 더 필요해. 사실 이제껏 난 우리가 필요한 정보만 모아 분석을 했는데, 정보 분석이 틀릴 때가 간혹 있었어. 어떻게 보면 이건 나비 효과로 오는 것들이란 생각이 들어."
"나비 효과?"
현수가 만사귀에게 다시 물었다. 야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유저들과 NPC의 판단으로 상황이 변할 수 있다는 말을.
"그래, 처음에는 나 역시 느끼지 못했는데, 미묘한 차이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어."
"어떤 것들 말이야?"
"지금의 황궁을 예로 들어 보면, 현수가 우리에게 황궁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황궁의 변화를 모르고 그냥 넘어갔을 거야."
"그랬겠지."
모두는 만사귀의 말에 동조했다.
"그럼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그냥 지금까지와 똑같지 않을까?"
카오스는 황궁과 자신들은 별개라 생각했는지 쉽게 답을 했다. 하지만 만사귀는 고개를 흔들었다.
"달라. 누가 황제가 되고 누가 권력의 중심에 서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조금씩 변하게 되어 있어. 가령 대학사라는 놈이 무림의 문파를 등에 업고 역모를 꾀해서 성공을 했다면, 무림은 대학사를 도운 문파가 주도하게 되어 있지. 그들 뒤에는 황궁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있을 테니 말이야."
"음!"
"그러니까 만사귀 너의 말은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고, 상황이 계속해서 변화되어 간다는 뜻이지?"
"그래. 지금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일들이 나중에 한 번에 터질 수도 있어. 지금은 충분히 막을 수도 대비할 수도 있는 일이 그때는 막지 못하는 거대한 폭풍이 되어 버릴 수도 있겠지. 천의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필요가 있어."
"그렇기 때문에 하오밀문의 정보력이 필요하다는 거야?"
현수는 만사귀의 말뜻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것은 야가 계속해서 이야기해 주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역발산에게 맡겼어? 그 중요한 일을?"
현수는 못 미덥다는 듯 역발산을 보았다.
"무시하지 마라. 그래도 내가 이들의 대형이 아니냐. 내가 나서면 모두 켁 하고 죽는 거지."
"휴!"
"그래. 사실 역발산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황궁에서는 역발산이 그리 필요 없고 또 밖에서 잘해 주고 있으니까 맡기는 거지."
"난 도와줄 수 없다. 황궁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현수는 하오밀문과의 싸움을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을 하며 자신은 뒤로 빠졌다. 야를 통해 모든 것을 알아본 후에 끼어들 생각이었다.
"그래. 하지만 알고는 있어라. 그리고 혹시 나오게 되면 도와라. 사실 건이 혼자서 맡기에는 조금 버겁다."
"나갈 방법이 있으면 나가서 도와줄게."
그 뒤에도 앞으로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모두가 돌아가고 현수와 건만 남았다.
"베타 때와는 전혀 다른 재미를 느낀다."
"나 역시 그래. 건이 네가 제일 중요하니 실수 없이 해야 돼?"
다시 강조하는 현수였다. 현수는 건에게 동창의 제독을 맡겼다. 현수는 동창 제독의 무공 역시 무시할 게 못 된다고 생각했다.
"해 봐야지. 정면 승부도 아니고 암살인데. 그리고 정면으로 붙어도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그런데 넌 어떻게 감옥에게 나와 현의태감을 제거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을 안내해 준 NPC 있지? 그가 나를 도울 거야. 그러니 건이 네 일이나 확실히 해."
"걱정 마. 그런데 내각은 어떻게 하려고?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조금 수를 써 두었어. 아마 이쪽에는 신경을 쓰지 못할 거야. 하지만 눈치를 채면 곤란하니까 한밤을 이용해서 빠르게 끝내야 돼. 다음 날 내각에서 알아도 일을 벌일 수 없게 말이야."
제조상궁이 잘만 처리해 준다면 내각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다. 그럼 천에서 보자. 오랜만에 아버지한테나 가 봐야겠다. 같이 갈래?"
"아니, 난 그냥 돌아가서 오늘 이야기 나눈 것들을 정리해야지. 또 야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알겠다. 나 먼저 간다. 천에서 보자."
현수는 건과 함께 오페라 하우스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현수는 야에게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물었다.
-생각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몇 가지 변수를 고려해 두시면 됩니다.
"변수?"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완벽함이 없다. 끝없이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현수 님께서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 맞아떨어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현수 님께서는 제조상궁에게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야 역시 현수가 정빈을 괴롭히라며 제조상궁을 협박한 일을 알고 있었다.
-제조상궁이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내각은 틀림없이 현수 님의 뒤를 칠 것입니다. 또 현수 님께서 오시니 내각과 환관이 손을 잡았을 수도 있습니다. 적의 적은 곧 친구라는 말이 있듯이 말입니다.
현수는 야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변수라…….'
"고마워."
사실 현수는 변수라는 것에 대해 야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또 야의 잔소리를 들을까 봐 그만두었다.
-오늘은 안 물어보십니까?
"뭘?"
-변수 말입니다. 이제껏 현수 님께서 그냥 넘어간 적이 없어, 당연히 물어봐야 할 내용 같아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킁! 벌써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섰나? 아니면 내가 너무 속이 보였나?'
"아니야. 참! 전에 말한 황궁 삼보 말이야. 하나는 영취 군주 또 하나는 군천령 그리고 마지막 용천검이랬나?"
-네.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용천검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느냐, 그 말 아닙니까?
"응!"
-황제의 신임을 받으면 됩니다.
"신임이라고? 나 황제의 신임도가 90인데 왜 안 줘?"
-그것을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한번 달라고 해 보십시오.
"아 씨! 그냥 예전처럼 나 보고 알아서 하라고 말해. 그렇게 말 돌리지 말고."
-용천검을 얻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으니 현수 님께서 노력을 하시면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천을 즐기는 방법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베타 때와는 다릅니다. NPC는 하나의 일정한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현수 님께서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생각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꼭 한 가지의 방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 많은 생각을 해 보지. 그리고 야, 내일까지 방어구를 알아봐 줘. 현의태감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방어구를 입어야겠어. 방어력 플러스 5짜리 이상으로! 흥정을 잘해서 100만 원 선에서 알아봐."
아무리 스탯을 전부 민첩성에 투자했고 운중비록을 믿는다고는 해도, 황궁 최고 고수 중의 1명인 현의태감을 상대하는 일이라, 방어구의 도움을 받기를 바랐다.
-그러지 마시고 수진 씨에게 부탁을 하시지 그러십니까?
"왜?"
-왜는 무슨 왜입니까? 그렇게 해서 친해지는 것 아닙니까? 사실 플러스 5짜리를 사도 나중에 팔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수진 씨에게 식사를 한 끼 사 주시고 잠시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100만 원과 한 끼의 식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현수는 명월, 아니 수진을 떠올렸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입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음… 그래. 알겠다. 그게 싸게 먹히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은 알아봐."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비싼 걸로 사 드리고 얻으십시오. 분위기가 좋은 곳에서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건 님의 아버님께서 운영하시는 백화점의 스카이라운지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킁!'
"내가 알아서 할게."
현수는 천에 접속을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황궁에 도착을 하고 나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 * *
대학사와 현의태감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현수가 눈에 걸렸기 때문에 잠시 손을 잡을 필요를 느꼈다.
이번 기회에 제거를 할 수 있으면 하려고 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듯,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짜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대학사님,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습니다."
현의태감은 웃었다. 대학사와 공통분모를 찾았기에 지금은 싸울 필요가 없었다. 또한 이번 거사를 진행하기 위한 모든 준비도 끝났다. 다만 현수라는 골치 아픈 놈이 죽는 것을 보아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 사실 영감님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편의상의 말이다. 서로 얼굴 붉힐 일을 만들어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게 대학사의 생각이었다.
"오호, 그래요?"
"제가 왜 영감님을 싫어하겠습니까? 다만 반목이 있어야 발전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반목이 있으면 더 좋은 의견을 낼 수 있으니, 당연히 반목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지요. 호호! 전 대학사님께서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왜 제가 폐하께 주청을 드릴 때마다 반대를 하시는지 알았습니다. 오해가 풀렸습니다."
"하하! 사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영감님께서 제조상궁과 짜고 궁녀들을……."
갑자기 현의태감의 인상이 변했다.
이미 궁내에서는 비밀이 아닌 비밀이 된 사실이었다. 다만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좋지 않기에 황제만이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황제 역시 알고 있었다. 다만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현의태감은 대학사가 유치한 협박을 협상의 수단으로 택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흥! 감히 나를 협박한단 말인가! 어리석은 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대학사님?"
"비밀이 아닌 비밀이 되어 버렸는데 굳이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영감님. 저 역시 나이는 조금 먹었지만 아직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사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듣는 현의태감은 심기가 불편했다.
'이놈이……! 오냐, 현수라는 애송이를 처리하고 나서 너 역시 그의 곁으로 보내 주마.'
"대학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준비는 확실하게 해야지요? 놈은 폐하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어영부영하다가는 또 놈을 살리게 될 것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확실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영감님 쪽에서도 차질 없이 준비를 하시리라 믿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다른 증거들까지 만들어 두었으니 놈은 필히 죽게 될 것입니다."
"하하! 역시 영감님께서는 철두철미하십니다. 그럼 전 영감님만 믿고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가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학사가 돌아가자, 현의태감의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어리석은 놈! 감히 나에게 협박을 하려고 하다니. 그래, 좋은 수가 생각났다. 너의 운명은 결정이 되었다. 복상사로 말이다. 호호!"
기분이 좋은지 한참 동안 웃는 현의태감이었다.
대학사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따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현의태감이 꼭 무슨 일을 벌일 것만 같았다.
"나리! 제조상궁이 찾아왔습니다."
제조상궁이라는 뜻밖의 이름에 대학사는 당황했다. 현의태감이 자신의 말을 진짜 믿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안으로 모시어라."
스르르륵!
문이 열리자 제조상궁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던가? 현수가 제조상궁을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아름다기도 했지만 이전보다 더욱 젊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제조상궁."
대학사는 자신보다 품은 낮지만 모든 궁녀를 관리하는 제조상궁에게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정쩡한 말투로 제조상궁을 대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대학사 어른."
"저야 그저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제조상궁은 더욱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호호!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조상궁의 눈웃음에 대학사는 저도 모르게 따라 미소를 지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조상궁이 말을 잇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자, 대학사는 주변을 물리쳤다.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마라."
"네, 나리!"
"이제 말씀을 하시지요, 제조상궁."
제조상궁은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대학사 어른께선 현의태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능한 분이십니다. 폐하께 충성하고 말입니다. 왕평 대인께서 황궁의 전반적인 업무를 맡아 처리하시니 이렇게 태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의상의 발언이었다. 대학사는 제조상궁과 현의태감이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호! 농담도 잘하십니다."
"농담이라니요, 정말입니다. 저와는 간혹 다툼이 있지만 왕평 대인처럼 유능한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제조상궁은 그간 현의태감의 뒤를 조사했다. 현수의 거짓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뜻밖의 사실을 알아내었다.
현의태감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3황자가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 현의태감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자칫 현의태감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구족을 멸할 사건이었다. 황제가 알고 있고 없고를 떠나 현의태감과 한 배를 타기에는 너무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제조상궁은 현의태감이라는 거대한 배를 버리고 대학사라는 배로 바꾸어 타려고 대학사를 찾은 것이었다.
정색을 하면서 대학사를 주시하는 제조상궁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대학사 어른의 편에 서고 싶습니다."
대학사는 내심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떠 보기 위한 현의태감의 계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학사는 학문을 공부한 사람이다. 사람의 심리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럴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왜요? 제조상궁은 현의태감과 한 배를 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얼마 전까지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놈이 저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습니다. 다행히 청부금의 5배와 궁녀 2명을 주고 자객을 매수해 놈을 죽이라 하였습니다."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학사는 제조상궁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대학사 어른."
제조상궁은 대학사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 배를 바꾸어 타겠다고 하니 어찌 쉽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제조상궁이 그동안 현의태감과 함께해 온 시간이 얼마입니까?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저에게 그런 말을 하면 제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해합니다. 사실 지금도 왜 왕평이 절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저 또한 처음에는 대학사 어른이 시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왕평이 요즘 저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점점 그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대학사는 저도 모르게 제조상궁에게 반문을 했다. 제조상궁의 말이 진실이라면 황궁의 전반을 잡고 있는 환관 세력의 3분의 1을 줄일 수 있었다.
그만큼 제조상궁의 힘은 황궁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더욱이 지지 세력이 각 성과 지방에 있는 내각으로서는 어떻게 보면 하늘이 돕는다고 해야 옳았다.
대학사는 목으로 침이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결정적으로 정빈 마마를 괴롭히고 있는 사람이 바로 왕평입니다."
"뭣이!"
순간 대학사는 강한 분노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한……."
"또한?"
대학사는 말을 끊은 제조상궁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 제조상궁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조상궁의 조심스러운 행동이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여전히 주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제조상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3황자는 폐하와 정난 희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닙니다. 그는 정난 희비와 왕평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대학사는 이 충격적인 말을 듣고 무엇이라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왕평이 저를 왜 죽이려고 했는지 알 수 없어 몰래 뒷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정난 희비와 왕평이 함께 잠자리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 역시 무공을 알고 있기에 둘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평 역시 무공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왕평에게 들켰습니다. 그런데도 놈이 지금 저를 살려 두는 이유는 바로 역모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저를 죽이면 그만큼 힘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왕평이기에, 역모가 끝난 후 절 제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학사 어른, 절 살려 주십시오. 황궁의 관리들에 대한 비리나 궁녀들과 간음한 증거 등을 모두 대학사 어른께 넘기겠습니다."
지금 제조상궁의 모습은, 강한 바람에 이기지 못하고 떠는 한 송이의 꽃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대학사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자신이 1황자에게 붙은 이유는 적자 계승이라는 대의명분과 그가 하나뿐인 외손자라는 점 때문이었다.
가늘게 떨던 대학사는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떨고 있는 제조상궁을 보았다.
제조상궁의 모습은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그게 사실입니까, 제조상궁?"
"그렇습니다. 왕평 그놈이 저를 죽이려 했는데 무엇 때문에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대학사 어른, 제가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대학사는 마음이 진정되자 빠르게 머리가 돌아갔다. 제조상궁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황궁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왕평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제조상궁이다. 게다가 지금 제조상궁의 모습을 보니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뜻 믿어서도 안 될 인물이다. 생각 끝에 대학사는 제조상궁에게 말했다.
"음… 알겠습니다, 제조상궁. 그럼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제조상궁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줄은 아나, 지금 저와 했던 이야기를 서류로 증명할 수 있도록 글로 써 주십시오."
제조상궁은 대학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순간 대학사는 저도 모르게 제조상궁의 미소에 빠져 드는 것을 느꼈다.
사실 제조상궁은 대학사를 만날 때부터 소소환희공을 사용했다. 그녀가 가진 무공의 원류는 소녀궁의 소소환희공이었다. 그것은 미염공의 일종으로, 상대가 모르는 사이에 펼쳐지는 것이 장점인 무공이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만일 상대가 경계를 하는 데다 약간의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잘 걸려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알고서도 당한다는 것이 소소환희공의 또 다른 장점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대학사는 소소환희공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호호, 대학사 어른. 문서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순간 대학사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제조상궁의 옷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조상궁을 보고 있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할 수 없는 몸매를 가진 제조상궁을 본 대학사는 저도 모르게 입 안이 타는 것을 느꼈다.
"문서보다는 이렇게 몸으로 도장을 찍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사실 한 가지 더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왕평 그놈이 대학사 어른에게 소개해 줄 궁녀를 물색해서 보내라고 하더군요. 복상사를 가장해서 죽이려고 말입니다."
대학사는 분명 자신에게 다가오는 제조상궁을 밀치려 했으나 생각과는 반대로 제조상궁의 허리를 두 팔로 안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제조상궁의 두 손이 대학사의 목을 감고 있었다.
몸이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자 대학사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헉!"
"호호! 심려 놓으세요. 전 이제 대학사 어른과 한 배를 탔습니다. 사실 소녀궁의 미염공은 상대가 알지 못하게 시전을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전 대학사 어른께 해를 끼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대학사는 이미 제조상궁의 미염공에 빠져 들고 있었다. 방에서 때 아닌 훈풍이 불었다.
* * *
현수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황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옥에 수감이 되었다.
황제가 날이 밝으면 진무 장군을 왜 죽였는지 심문할 것이라 했기 때문이었다.
"허허!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구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현수가 보내온 연판장의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었습니다."
황제와 천밀위의 령은 대화를 나누었다. 산이 무사히 현수와 사마장준에게서 받은 것들을 황제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황제는 따로 조사를 해서 연판장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변방 군대의 장군들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조치를 취했다. 그 때문에 현수를 부르는 것이 조금 늦었다.
"령, 재미있지 않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렇습니다. 특히 권력에 집착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닌데 왜들 그렇게 집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권력이 그리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하는 령이었다. 령은 과연 권력의 단맛을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 권력이라는 건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지. 자네는 지금 황궁의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령은 생각해 보았다. 천밀위를 움직이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천밀위가 움직인다는 것을 대학사가 알면 피해 달아날 수도 있고 또한 현의태감 역시 견제를 할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황제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와 같은 생각을 해, 황제와 함께 의논을 나누고 있었다.
"신은 아둔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는 그저 일을 벌인 이가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 그대는 현수를 너무 믿고 있는 것 같군. 상대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야. 또한 현수는 혼자이고 그들은 다수이지 않나?"
"아닙니다, 폐하. 이번 일을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두 사람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이곳에……!"
령의 얼굴에서 놀라움이 묻어났다. 자신의 이목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현수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중원의 무공과는 다른 살수의 무예를 익히고 있었기에, 자신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을 거라 여겼다.
사실 현수는 북방에서 레벨 업을 하며 무공을 익히는 데 중점을 두었기에, 이제 레벨에서 오는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현수의 레벨은 이제 60이었고 또한 무공 역시 모두 10성을 이룬 상태였다.
"하하! 그대는 정말 짐을 놀라게 하는구나."
"신 이현수, 폐하께 인사를 드리옵니다. 그간 평안하셨사옵니까?"
"하하! 그래, 그냥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인 내가 몸이 불편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현수 그대에게 이번 일을 맡기라 함은 자신이 있다는 소리인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대가 만약 실패를 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가?"
현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 결과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물었다."
"최소한 천밀위사들보다는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고 있습니다."
현수의 말을 들은 령은 조금 인상을 썼다. 방금 현수의 말은 누가 들어도 령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그대를 신임한다고 해서 너무 자신하는군."
"자신이라… 최소한 령 그대보다는 이번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소."
"뭐라!"
현수를 노려보던 령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강하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신과는 다른 무공을 사용하는 현수를 아직 자신의 적수로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황제 폐하의 곁에서 안일하게 대처했기에 작금의 상황에 이르렀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나? 천밀위라 하는 자들이 고작 호위 무사에게 당할 정도의 무공 실력을 가지고서 제 세상인 것처럼 행동하는 게 말이 되는가?"
령은 현수의 말에 분노를 느꼈다. 그는 황제가 있는 곳에서 천밀위 전체를 깔아뭉개는 현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오냐오냐하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나 보구나, 애송이."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신 이현수가 감히 폐하께 청하옵니다. 천밀위의 수장인 령과의 비무를 허락하시어 무공 수련에 게으름을 피운 죄를 물으소서."
"무엇이라! 네 이놈을……!"
령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었다. 황제는 그 모습이 재미가 있는지, 입가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하하! 그대는 오자마자 또 사고를 치려고 하는구나. 좋다. 내가 허락한다. 단 두 사람은 서로의 목숨을 빼앗지는 마라. 팔과 다리는 잘라도 좋다."
황제는 마치 두 사람의 싸움이 황궁의 안녕과는 상관이 없다는 듯 말했다.
"신이 이기면 한 가지 청을 들어 주시옵소서."
"청이라… 생각해 보지."
"내 그대를 최소한 범의 새끼라고 생각했다. 하나 알고 보니 자신의 주제도 모르는 개새끼로구나."
령이 황제와 떨어져 한발 앞서 나와 현수를 노려보았다.
"령! 그대는 싸울 때 말로 싸우는가?"
령과 현수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애송이!"
"시끄럽다. 폐하의 옆에 있어 자신이 고수인 줄로 알겠지만, 무림에는 지금의 그대보다 더 높은 경지의 고수들이 널려 있다. 내가 폐하를 지키는 천밀위의 직책에 만족해 무공 수련을 등한시한 그대에게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교훈을 내릴 것이다."
현수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령을 이겨야 했다. 자신의 레벨과 순발력에 옵션이 붙는 플러스 15짜리의 부적 2개와 2짜리의 반지라면 해 볼만 했다.
게다가 자신이 가장 믿는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이 있었다. 그동안 현수는 이 두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난 자객이다. 따라서 자객의 방법으로 그대를 상대하겠다."
령은 현수의 앞에서 자신의 무덤을 팠다.
"좋을 대로. 그대가 동영의 자객이라 했나? 그럼 나 역시 살수의 무예로 상대해 주지. 느껴 보아라. 하수와 고수의 차이를."
황제는 미소를 띠며 둘의 상황을 지켜보다 말했다.
"시작하라!"
두 사람은 먼저 황제에게 고개 숙여 사죄를 했다.
"감히 폐하의 안전에서 검을 뽑는 것을 용서하시옵소서."
말이 끝남과 동시에 령의 신형이 바닥으로 사라졌다.
"지둔술인가? 좋아. 살황의 일기장, 추적술!"
령의 흔적을 좇아, 현수는 숨을 죽였다. 기의 파장, 맥박의 소리, 체향과 체온 등 현수는 모든 것을 천밀위의 령에 맞추고 있었다.
팟팟팟!
"어딜!"
뒤로 회전을 하며 솟아오르는 령의 검을 피하고는 그의 신형을 쫓았지만, 그는 금세 또 사라졌다. 하나 한때 동영의 지존이었던 령조차 살황의 추적술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거기더냐? 팔검수화진검류!"
츄츄츄츄!
"이런!"
대전의 기둥에 흠집만 내었을 뿐 아무 소득이 없었다. 령이 순간 현수의 검을 피해 다른 곳으로 숨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빠르군."
"호오! 이현수의 무공도 대단하군. 점점 흥미 있어지는데? 역시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어."
지금 황제는 마치 세상에 아무 걱정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런!"
령은 현수의 뒤에서 빠른 속도로 찔러 갔다. 현수는 몸을 바닥에 눕히고는 검을 위로 올려, 스쳐 지나가는 령을 향해 뻗었다. 령 역시 현수의 검을 막으며 그 반동을 이용해 옆으로 몸을 비키며 바닥에 착지했다.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얏!"
령은 허공을 가르며 현수를 향해 검을 뻗었다. 최단 거리로 찔러 오는 령의 검에는 일격필살의 기세가 담겨 있었다.
령은 현수라면 최소한 자신의 일격필살에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직까지도 현수의 검이 검갑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본 령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찰깍! 번쩍!
"애송이! 그대가 졌다."
령의 검이 현수의 목에 걸려 있었다.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의식하듯 그는 현수를 비웃었다. 하지만 현수는 오히려 그런 령을 비웃었다.
"아니, 진 것은 그대이다. 그대의 가슴을 보라."
자신의 가슴을 본 령의 인상이 변했다. 옷이 검에 찢겨 있었다. 령은 조금 전에 들린, 검이 검갑에서 나오는 소리를 떠올렸다.
"언제……! 그럼 방금 그 소리는……?"
현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령은 고개를 숙였다. 방금 보여 준 현수의 일초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무공보다 빨랐다. 그는 현수의 무공을 보고 한 가지를 떠올렸다.
'뇌력검과 비슷하다.'
뇌력검은 동영 살수들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뇌력살천의 독문 무공이었다. 어떻게 보면 뇌력살천에 의해 동영의 살수 무공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뇌력살천의 무공을 익힌 동영의 인물은 없었다. 만일 동영에서 뇌력살천의 무공을 익힌 자가 있다면 동영은 더 이상 중원으로부터 오랑캐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뇌력살천의 무공은 동영에서 실전되어 버렸다.
지금 동영에 전해져 내려오는 살수 무공은 모두 뇌력살천이 제자에게 전해 준 무공들뿐이었다.
"그대는 자신의 무공을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간 무공 수련을 등한시했다.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더욱 정진해 폐하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수의 무공은 분명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이는 자신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대화만이 오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황제는, 그저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해 달라는 눈으로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폐하! 신이 졌사옵니다."
령은 패배를 인정하고 황제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무엇 때문에 그대가 졌다고 인정을 하는가? 내 보기엔 그대가 이긴 것 같은데……."
보이는 상황으로는 분명 령의 승리였다. 현수의 검이 이미 령의 가슴 옷깃을 벤 것을 황제는 보지 못했다.
"폐하, 이현수의 검이 먼저 저의 가슴을 베고 지나간 후였습니다. 그의 검은 소리보다 빨랐습니다."
"검이 소리보다 빠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현수의 검은 발검과 착검이 한 번에 끝나는 쾌검이었습니다. 검이 검갑에서 나오는 소리와 들어가는 소리가 겹쳐질 정도로 빠른 검입니다."
황제는 령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나오는 소리와 들어가는 소리가 겹친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니, 그대가 말을 해 보라."
잘 알아듣지 못하겠는지 황제는 현수에게 다시 물었다. 현수는 대전 한쪽에 놓여 있는 병풍을 보았다.
"폐하! 신이 저 병풍을 갈라 보겠사옵니다."
"허락한다."
심호흡을 한 현수는 검에 손을 가져다 놓았다.
찰깍!
조용한 대전에 검갑에서 검이 나오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현수의 검은 그대로 검갑 안에 들어 있었다.
갈라져서 천천히 옆으로 떨어져 내리는 병풍. 현수의 검이 나올 때 들리는 소리가 뇌전류를 시전하고 나서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와 맞물려 한 번만 들리는 것이었다. 황제는 보고도 믿지 못하겠는지 놀라고 있었다.
"오호! 이런 검술이 있었단 말이냐?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도다. 그대는 어떻게 이런 검법을 알고 있느냐? 아니다. 그대는 팔자영법과 그 검법 또한 짐의 군대에 가르쳐라."
-황제의 신임도가 10 상승했습니다.
흥분에 휩싸인 황제가 뇌전류를 지밀원의 무사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하는 것을 본 현수는 고개를 숙였다.
현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빌어먹을! 황제면 다야? 확 죽여 버리고 내가 황제 될까 보다.'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현수는 참고 있었다.
"신 천밀위의 령이 폐하께 아뢰옵니다. 무인에게 있어 독문 무공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 무공을 다른 사람 1명도 아닌 수백 명에게 가르치라는 것은 과한 처사인 줄 아옵니다."
천밀위의 령 역시 살수라고는 하지만 천생 무인이었다.
"그런가? 하지만 짐은 탐이 난다. 짐의 말은 곧 천명이다."
"그럼 이현수를 평생 곁에 두시는 것이 현명한 줄 아옵니다."
현수는 평생이라는 말에 기겁을 했다. 10년이 지나면 황궁을 떠나 아가씨를 찾아 나서야 하는데 평생이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절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미랑이 거의 다 성장을 했기에 황궁에 더 머물 생각도 없었다. 이제 구미호의 레이드를 주선한 대학사와 정빈을 처리하고 무림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신 이현수, 폐하와 약속한 기간은 10년이옵니다. 그중 1년이 지나가옵니다, 폐하! 저는 무림으로 나가 한 사람을 찾아야 하옵니다."
"알고 있다. 하나 탐이 난다. 그래서 문제이다. 짐의 말은 곧 천명이다. 짐은 이제껏 탐낸 것을 못 가져 본 적이 없다."
"하오나……."
황제는 막무가내였다.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짐이 그대에게 명한다. 그대는 짐을 도와 이 나라의 황권을 수호하라."
"폐하!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현수가 황제에게 다시 말해 보았으나, 황제는 말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싫다. 또한 령을 비롯해 천밀위사들은 더욱 무공 수련에 열중하라."
"명을 받습니다."
현수는 령을 노려보았다. 령은 그런 현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젠장! 왜 이렇게 꼬이지?'
이미 명이 떨어진 후였다. 현수는 황제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이들을 죽이고 도망가고 싶었다.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던 황제는 현수에게 물었다. 마치 현수가 왜 황궁으로 들어왔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 그대가 나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역시 황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신 이현수, 폐하를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황궁으로 왔습니다."
"약속?"
"신 이현수는 무림에서 사신 낭객이라 불리는 무림인입니다. 죽음 속에서 기연을 얻을 수 있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 죽기 위해 무림을 떠돌았습니다. 그러다 진짜 죽음이 찾아왔을 때 기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후에는 모든 것이 필요 없다는 것 또한 느꼈습니다. 그렇게 삶에 미련이 생겼을 때 저의 목숨을 살려 준 분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현수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심호흡을 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생명의 빚을 졌으니 자신의 딸을 지켜 달라는 부탁을 저에게 하였습니다. 백방의 수소문 끝에 그 여인의 딸이 황궁의 궁녀로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황궁으로 과거를 보고 들어왔단 말인가? 그대의 무공 실력이라면 과거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궁으로 잠입할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을 짐작했다는 듯 묻는 황제였다.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저에게는 ≪만자무서≫라는 무공서가 필요했습니다. 저의 부족한 부분을 ≪만자무서≫를 통해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자무서≫가 황궁 무고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과거를 보아 폐하의 신임을 얻고, 황궁 무고의 ≪만자무서≫를 얻을 생각이었습니다."
황제는 현수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을 했다. 참인지 거짓인지 현수의 얼굴을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여인의 딸은 찾았느냐?"
"이미 죽었사옵니다. 오래전 황궁의 소화궁에 자객이 침입하였을 때, 2황자 저하를 대신해 검을 몸으로 막은 궁녀가 그 여인의 딸이라 들었사옵니다."
영취궁과 소화궁은 여러 번 자객의 침입을 받았기에 현수는 거짓말을 했다. 황제는 천밀위의 령을 보았다.
"당시 그 궁녀에게는 일가친척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 궁녀의 어머니가 되시는 분은 무림의 공적인 백발 마녀입니다. 그렇기에 그 궁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떳떳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짐은 그대가 어떤 상황이든 상관이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짐이 그대를 탐낸다는 점이다. 나에게 잘 보인 그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라. 짐은 그대를 절대 보내 줄 수가 없다. 만일 그대가 짐을 피하여 도망을 간다면 짐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그대를 제외한 무림인을 모두 죽일 것이다. 나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천명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금의 모습,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이 모습이 황제의 진면목이었다.
"폐하!"
현수가 황제를 불렀지만, 그는 현수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 계속 이었다.
"또한 그대에게 한 자루의 검을 내릴 것이다. 여봐라! 용천검을 가져오라!"
용천검이라는 말에 령의 안색이 변했다.
현수는 령보다 더 흠칫했다. 그러고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용천검을 원해서 일부러 령을 도발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황궁이 어수선할 때는 그게 가능할 거라는 야의 말을 믿고 일을 벌인 것이었다. 황제에게 들어 달라고 했던 한 가지 청 또한 바로 용천검을 달라는 것이었다.
용천검! 황실의 황권을 수호하는 자에게 내리는 검.
하지만 용천검을 얻기 위해서 벌인 일치고는 손해가 너무 컸다.
'젠장! 변수라는 것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황제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용천검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용천검을 본 령은 무릎을 꿇었다. 현수 역시 분위기상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용천검을 검갑에서 천천히 빼내었다.
"그대 이현수는 명을 받으라."
"신 이현수, 명을 받사옵니다."
천천히 용천검을 들고 현수의 앞으로 다가오는 황제였다.
"그대에게 용천검을 내리겠다. 이는 황권을 수호하는 임무를 그대에게 내린다는 뜻이다. 또한 그대에게 멸친어린천룡군이라는 직책을 내린다."
"헉!"
령이 놀라는 소리와 함께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직업이 변경됩니다. 서생에서 멸친어린천룡군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앞으로 이현수 님께서는 전직을 할 수 없습니다.
멸친어린천룡군!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도 죄가 있으면 처벌을 할 수 있는 직책! 설령 대상이 황자나 황후라 할지라도 죄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었다.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였다. 이는 선대 때부터 내려오는 황권 수호 직책이었다.
"폐하!"
령이 놀라서 황제를 불렀지만 이미 명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대는 지금 황궁에서 일어나는 반란의 징조를 잠재워라. 또한 그대에게 군천령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과 더불어 천밀위와 지밀원의 무사들을 모두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그리고 황궁의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함께 부여한다. 그대는 반역의 무리로부터 황권을 수호하고 황궁을 평화롭게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상당한 부상을 얻었지만 현수의 마음은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황궁에서 평생 갇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현수는 어떻게 하면 황궁을 빠져나갈 것인가를 생각했다. 무턱대고 도망갈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만일 황궁에서 도망간다면 황제가 800만 황군을 움직일 것이기에 속이 타들어 갔다.
황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천밀위의 령은 들어라."
"명을 받습니다."
"그대는 앞으로 멸친어린천룡군과의 연락을 담당하라. 그 누구에게도 오늘의 일을 알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설령 그 대상이 황후나 희빈들 그리고 황자들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는 영원한 비밀로 간직해야 할 것이다."
"명을 받사옵니다."
일사천리! 한 번에 시원스럽게 모든 명을 내리는 황제를 보며 괜히 황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현수였다.
"그대의 활약을 지켜보겠다. 짐의 믿음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신 이현수,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할 것이옵니다."
"그대를 내일 풀어 줄 것이다."
"폐하, 저를 3일만 더 감옥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황제는 그 이유를 물었다. 현수는 3일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 말할 뿐이었다.
"좋다. 그대의 뜻대로 해 주겠다. 부디 짐을 실망시키지 마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현수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그런 현수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취와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가?"
"신이 보기에도 그러하옵니다. 영취 군주 마마와 참으로 잘 어울릴 것 같사옵니다."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현수는 황제의 마음속에서 부마로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