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
현수는 미령을 불렀다.
"나리, 부르셨사옵니까?"
"그래. 내 너에게 긴히 물어볼 것이 있다."
현수는 환관들이 궁녀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물었다. 어찌 보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인 절차였다.
"간혹 사라지는 궁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궁녀들이 워낙 많아 곧 잊혀집니다."
"그래?"
"왜 그런 것을 물으시는지요?"
"아니다. 넌 나가서 너의 일을 보아라."
미령은 나가려다가 현수에게 말했다.
"나리! 미랑은 참 좋은 아이입니다."
"……!"
현수는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밤에 미랑과 함께 있을 때 가끔 기웃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령이 오해를 하고 있구나. 그래, 너 역시 좋은 아이다.'
현수는 경계가 심해진 황궁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황제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영취 군주와 2황자뿐이다. 2황자는 군천령에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영취 군주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경계가 느슨해졌을 때 자연히 영취 군주를 노릴 것이다.'
"그런데 만사귀는 어떻게 되었지?"
그때 전서구가 현수에게 날아왔다. 만사귀가 보낸 것이었다.
"후후! 양반 되기는 틀렸군."
전서구를 읽은 현수의 머릿속에 그들이 어떻게 일을 했는지가 그려졌다.
"흑사파라… 머리를 굴리는군. 잠시 대학사의 이목을 돌릴 필요가 있다."
현수는 만사귀에게 다시 전서구를 보내었다.
"건이는 어떻게 하고 있지?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나?"
건에게 시킨 일이 조금 걱정되었다. 건이라고 해도 혼자하기에는 조금 힘든 일이 분명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일단 나 역시 움직인다."
현수는 살황의 일기장의 은신술을 사용해 방을 빠져나갔다. 금족령이 내려진 황궁이라지만 살황의 일기장을 익힌 현수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현수가 간 곳은 제조상궁의 거처였다.
현수는 제조상궁의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순간 제조상궁의 고개가 돌아갔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음! 제조상궁 또한 무공을 익히고 있구나.'
현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자칫 잘못하다간 발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조상궁은 별다른 행동이 없었다. 올라오는 각 부서 궁녀들의 보고를 듣고 인상을 찡그렸다 폈다 하는 것이 다였다.
그때 한 궁녀가 제조상궁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시게, 부제조상궁!"
"부르셨사옵니까?"
"그래! 내 긴히 물어볼 것이 있어 불렀네. 다름이 아니라, 이현수라는 관리에게 배당된 궁녀들이 누구인가?"
부제조상궁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제조상궁에게 말했다.
"미랑과 미령이옵니다."
"미랑과 미령?"
수백 명이나 되는 궁녀들을 다 알고 있을 리 만무한 제조상궁이었다. 또한 그런 사소한 것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그냥 물어보면 답을 얻을 수 있기에 굳이 신경을 쓰려 하지 않았다.
"그러하옵니다."
"자세히 말해 보게."
"미랑과 미령은 궁녀로 함께 들어온 동기생입니다. 그리 미모가 출중한 것은 아니지만 부지런한 아이들입니다."
부지런한 아이들이라 함은 그저 그런 아이들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궁녀들의 미모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전국에서 고르고 고른 여자 아이들을 뽑아 데려오기 때문에, 그녀들이 황궁을 나가면 그 지역의 제일미라는 소리를 듣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미모였다.
"그래? 혹시 그녀들과 이현수 사이에서 이상한 말들이 나오지는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이상한 말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제조상궁은 조금 난색을 했다. 현의태감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약점을 잡으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알았네. 나중에 그 애들에게 내가 보잔다고 전하게."
"왜 그러시는지요?"
"자네는 알 필요 없네. 그냥 애들에게 그렇게 전하게."
"알겠습니다."
부제조상궁이 나가자 제조상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수가 제조상궁을 제압하려 움직이려고 할 때 뒤에 있는 병풍이 갈라지면서 한 사람이 나왔다. 현의태감이었다.
지켜보던 현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현수는 제조상궁이라면 사라진 궁녀들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해서 찾아왔는데 뜻밖의 대어를 낚은 셈이었다.
"뭐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군."
현의태감의 손이 제조상궁의 어깨를 따라 가슴으로 내려왔다.
"그놈이 고자인지, 아직 궁녀들을 건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고자라 말하는 제조상궁에게 현수는 내심 욕을 퍼부었다.
"그놈도 환관의 끼가 다분히 있나 보군. 그럼 그놈도 황제 폐하께 주청을 해서 불알을 잘라 버려야겠군그래."
"호호! 영감님도. 농담을 잘하십니다."
"하지만 내 속은 타들어 가고 있다네. 그놈 생각만 하면 골머리가 다 아프다네. 하루 빨리 약점을 쥐고 흔들어야 속이 풀리겠네."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그렇게 되어야지. 그래야 그대와 내가 편히 잘 살 것이 아닌가?"
"호호! 오늘 밤에 저를 그냥 두는 것은 아니겠지요."
"벌써 동하나 보군."
현수는 그들의 대화에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짐작했다.
현의태감의 손이 제조상궁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훗훗! 오늘 내 눈이 호강을 하겠군.'
하지만 그게 다였다. 현수는 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참 후에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아 씨! 사람을 놀리나. 현실처럼 만들었는데 왜 안 보여 줘!'
현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때 그들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나왔다. 바로 구미호에 관한 이야기였다.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만 얻었어도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현의태감의 말에 현수는 흠칫했다. 이들에게서 구미호와 관련된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현의태감이 현수가 있는 곳을 보았다.
현수는 흠칫했다. 현의태감 역시 상당한 고수라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우리가 한발 늦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구미호를 공격한 그들 역시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을 얻지 못했다고 하니 아직 그리 늦은 것은 아니지요."
현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말하는 그들이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야 했다.
"10개의 전설 중에 두 가지를 놓쳤다. 8개 중 최소한 3개는 우리가 얻어야 해. 세력이 강해도 주인이 강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성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BS에서 숨겨 놓은 10개의 던전을 전설이라 칭하고 있었다.
"곧 그리될 것입니다.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암! 그래야지. 늙은 황제를 보내고 3황자가 황제가 되어야 우리가 편할 수 있으니 말이다."
"호호! 너무 심려 마십시오."
말을 마친 현의태감 왕평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제조상궁의 얼굴은 몹시 편해 보였다.
현수는 주위를 살펴본 후 아무도 없는 것을 느끼자, 호면을 쓰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뇌전류!"
제조상궁이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알기에 빠르게 제압했다. 그녀는 결코 현수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조용히 해라. 너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을 때 네 목이 바로 날아갈 것이다."
제조상궁은 흠칫했다.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본능적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죽일 때 주저함이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난 말이지, 검이 상대의 목에 걸려 있을 때는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지."
제조상궁은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곧 눈앞에 영화가 보이는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을 원하느냐?"
"별로 원하는 것은 없다. 다만 오늘 못 볼 것을 본 것이 조금 흥미롭더군."
제조상궁은 흠칫했다. 현의태감과 자신이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뜻하는 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무, 무슨……!"
"후후! 무슨 말이라니, 불알 달린 환관과 재미를 보는 것이지. 한 번 더 손을 움직이면 머리통을 떼어 주마. 못 믿겠으면 시험해도 상관없고."
제조상궁은 손에 모으려고 했던 내공을 풀었다.
자객이라 불리기에는 조금 강한 듯하지만, 누군가의 사주로 인해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청부한 사람이 바로 대학사라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죽이라 한 놈이?"
"글쎄, 청부자를 숨기는 것이 이쪽의 관례라 말이지."
"나의 청부 금액이 얼마인가? 내가 2배로 주지."
"오호! 제조상궁이라는 직책은 돈을 모으기에 참 좋은 자리인 것 같군. 하긴 여자 장사를 하니 많은 돈을 벌었겠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돈이라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얼마든지 회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한 자신은 수천 궁녀의 수장이었다. 원하면 궁녀 한둘은 빼 줄 수 있었다. 제조상궁은 현수와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얼마면 되지? 2배? 3배? 그대 역시 남자이니 여자가 필요하겠지? 이렇게 청부를 끝내고 난 후에 말이야. 그러지 말고 나랑 협상을 하는 것이 어떤가? 알겠지만 황궁의 궁녀는 어디에 가도 찾기 힘든 미모를 가지고 있지. 또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특별히 방중술에도 뛰어나다네. 어떤가?"
"하지만 청부자는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아."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청부금의 3배를 주겠네. 나를 청부한 자를 죽여 달라고 다시 그대에게 청부를 하지. 그리고 궁녀 중에서 가장 예쁜 아이들 2명을 주지! 어떤가?"
현수는 잠시 생각을 하는 척했다. 그런 현수를 본 제조상궁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못을 박으면 살 수 있었다.
"좋아! 4배를 주지."
"오호! 너의 청부 금액이 얼마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몰라도 상관없다. 그대는 곧… 악!"
"나의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군."
현수는 검으로 제조상궁의 목에 상처를 내었다.
"죽고 싶은 모양이군. 하긴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자, 잠깐……! 5배를 주겠다. 살려 다오."
현수는 못 이기며 다시 생각에 잠기는 척을 했다. 제조상궁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 번 더 움직이면 진짜 죽일 것 같았다. 다만 평소에는 자주 들락거리는 상궁들이 오늘따라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좋아! 너의 청부 금액은 금전 만 냥이었다."
"그렇게나 많이……!"
금전 1만 냥이라면 큰 액수가 아니지만 금전 5만 냥이면 상당한 액수였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제조상궁은 현수에게 금전 5만 냥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현수는 꿈의 던전이라는 황궁에서 속칭 대박을 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될까?"
"무엇이냐. 이미 돈을 주지 않았느냐?"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들은 누가 가지고 있지."
제조상궁은 낭패한 기색을 떠올렸다.
"걱정 마라. 너도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에게 말을 할 것이니. 너를 죽이라 청부한 사람은 바로 현의태감이었다."
제조상궁은 현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보았다.
'어차피 거짓말! 끝까지 거짓말이지. 혹시 이들의 관계에 또 다른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지.'
"믿지 못하는 얼굴이군. 내가 어떻게 여기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숨어 들어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고수라면 몰라도 제조상궁은 자신의 무공을 믿고 있었다.
"후후!"
제조상궁은 혼자만의 상상에 잠겼다.
"그럼 그때……?"
"그렇다."
제조상궁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이봐! 목이 떨어지기 전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나의 검이 목을 떨어뜨릴 수도 있으니 말이야."
제조상궁은 믿었던 자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 억울했는지 쉽게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렇게 어수선할 때 그대 같으면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것들을 남겨 둘 것 같은가? 다른 상궁들이 제조상궁이 되어도 현의태감은 별로 손해를 보는 것이 없지. 권력을 이용하면 간단하거든! 아니, 오히려 더 좋아할 수도 있겠군. 노리갯감이 바뀌었으니 말이야."
아직 분을 참지 못하는 제조상궁을 본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라! 내가 곧 죽여 주지. 불알 달린 친구와 거래를 하는 것이 나 역시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니 말이야."
제조상궁은 구미호의 일에 관련된 이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좋은 정보군. 아직 주인이 없단 말이지."
"그렇다."
"좋아! 궁녀 2명은 현의태감을 처리하고 받지."
현수의 말에 안심이 된 제조상궁은 현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호호! 그럼 우리는 동업자가 되는군요."
마음이 편해졌는지 제조상궁의 말투가 바뀌었다. 음탕한 목소리였다.
"어때요, 저의 몸은?"
"늙어 가는 몸은 필요 없다."
현수는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라지는 현수를 보고 이를 가는 제조상궁이었다.
"그래! 나를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 주마."
제조상궁은 현수의 몇 마디에 현의태감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현수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랑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고는 다시 방을 빠져나갔다.
* * *
"꺄악!"
정빈의 궁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정빈은 1황자를 낳은 황제의 후궁이었다.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정빈의 상궁이 들어와 방을 살폈다. 쥐가 죽어 있었다. 그것도 수십 마리가!
죽은 쥐들은 글자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가씨의 복수를!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만 정빈의 상궁은 쥐들을 치우기 위해 사람들을 불렀다.
정빈의 궁에서 일어난 일은 궁녀들의 입을 통해 순식간에 번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대학사의 거처에도 똑같은 문구와 함께 쥐들이 죽어 있었다.
황제는 놀라 쓰러진 정빈의 궁에 다녀갔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분명 1황자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 * *
건은 홀로 현수의 전서구를 받자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건이 한 일은 다름이 아닌 전 하남성주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비록 현수에 의해 하남성주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가 내각에서 가지는 영향은 무시하지 못했다. 만사귀는 관과 구파일방이 관계가 없을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그동안 하남성주가 이루어 놓은 것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 찾기 힘드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건은 현수가 알려 준 장소를 모두 찾아다니다 결국 천유 서림까지 왔다.
"이곳이 마지막인데. 없으면 골치 아픈데. 어?"
건이 발견한 사람은 만사귀를 비롯한 천연회의 인물들이었다.
"건아!"
만사귀가 건을 보고 먼저 불렀다.
"어쩐 일이냐?"
"넌?"
현수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는 건이었다. 만사귀 역시 현수에게 들은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 우리도 마찬가지야. 현수에게 천유 서림과 연관된 것을 알아보라고 연락이 와서 흑사파를 접수했거든. 그랬더니 천유 서림에서 우리를 한번 보자고 하네. 그래서 이곳에 한번 들르는 길이야."
"그래? 잘됐다. 그럼 같이 들어가자. 난 놈만 잡으면 되니까."
"중요한 건 역발산 저놈이 우리의 대장이라는 거야."
건은 역발산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움직이는 폭탄과 같은 역발산이 잘할지 걱정이 되었다.
"일단 들어가자."
모두는 천유 서림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안내를 받아 지객청으로 향하며, 그들은 새삼 놀라고 있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누가 선비가 돈이 없다고 했어?"
"그러게. 바닥이 다 대리석이야."
"촌티 좀 내지 마라."
모두는 역발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발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천연회의 일행을 맞은 사람은 천유 서림의 부림주인 천유문성이었다.
"반갑소이다."
"안녕하슈!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불렀수!"
모두는 역발산의 말투에 고개를 흔들었다. 말투 자체에서 무식이 흘러넘쳤다.
'무식한 건달패 같으니라고.'
천유문성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사실 오래전부터 천유 서림과 흑사파는 관계가 깊었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이것들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역발산의 대꾸에 천유문성은 점점 인상이 변해 갔다.
"그래서라니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랫동안 흑사파와 친분이 깊었으니 흑사파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와 지금 싸워 보겠다는 말이오? 글이나 읽는 나부랭이들이?"
천연회의 사람들은 모두 인상이 변해 갔다. 목적은 천유 서림에 협조를 하는 척하고 정보를 빼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지금 역발산이 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허! 보자 보자 하니 너무 안하무인이군."
"방금 뭐라고 했소? 안하무인? 난 무식해서 그런 것 모르오. 싸울 거요? 말 거요?"
어차피 이미 물 건너간 것, 모두는 싸우기 위해 준비를 했다.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진짜 무뇌충이다. 씨팔! 내 앞으로 역발산에게 뭘 맡기면 손에 장을 지진다.'
화화공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만사귀와 건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제법이야. 만사귀를 따라다니다 보니 많이 배웠는데.'
"이런 벌거숭이 같은 놈들이……!"
역발산의 손이 움직였다. 천유문성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대장! 그래도 우리는 손님인데, 그렇게 다루면 안 되지. 아직 이들이 우리 소문을 못 들어서 그러는 것이니 대장의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어 줘!"
만사귀가 옆에서 역발산을 말렸다. 역발산이 천유문성을 들어 올릴 때 건과 다른 이들은 옆에서 움직이는 기척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하지. 나의 넓은 아량으로 말이야."
역발산은 천유문성을 내려놓았다.
"고작 그 일로 오라 했으면 나는 돌아가겠소."
"허허! 잠시 오해를 했나 봅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림주님!"
천유문성은 그 사람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직 제가 부족하여 아랫사람을 잘 다스리지 못한 탓이니 기분을 푸시기 바랍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는 림주의 모습에 역발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역발산이라고 합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역발산의 또 다른 모습을 본 모두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사실 흑사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흑사파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말입니다."
"왜 글을 읽는 선비들이 뒷골목의 건달들과 손을 잡고 있는 것입니까? 고고한 학은 진흙탕에서 놀지 않는 법입니다."
만사귀가 림주를 향해 물었다. 역발산은 만사귀의 말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고한 학은 진흙탕에서 놀지 않는다. 음! 역시 저놈, 많이 배운 티를 내는군. 나중에 써먹어야지.'
"그렇지요. 학은 진흙탕에서 놀지 않습니다. 학문에 정진을 하여 위로는 황제 폐하를, 아래로는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 선비의 본분이 아닙니까?"
"황제 폐하와 백성을 위하는 것이 건달패와 손을 잡는 것입니까? 우리 역시 건달로서 나름대로의 규칙을 정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렇겠지요. 이곳 천유 서림이라는 곳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그런 것은 모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것이라고는 싸우는 것밖에 없었고 또한 싸우면서 컸습니다. 제가, 아니 저와 동생들이 조금 편하게 살고자 흑사파를 접수한 것뿐입니다. 전 어려운 말은 모릅니다. 결론만 말씀하시지요."
림주는 화를 낼 법도 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요. 보상을 해 드릴 테니 흑사파를 예전의 주인에게 돌려 주셨으면 합니다."
천연회의 모두는 난색을 했다. 애써 장악한 흑사파를 그냥 돌려주라니, 아니 될 말이었다. 또한 목적이 있어 장악한 것이니, 소득 없이 보상을 받고 물러날 이들이 아니었다. 천유 서림의 무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농담도 잘하십니다. 그래, 보상을 얼마나 해 주실 작정이십니까?"
퍽!
"윽!"
"지금 윗분들께서 대화하시는 중이다. 수하는 빠져라."
수금인은 얼떨결에 한 방을 허용해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씨팔! 대장, 서림이고 지랄이고 뭉개고 그냥 가자. 고리타분하게 글쟁이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
수금인은 자신을 공격한 사내를 노려보았다.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래, 내 동생 말대로 얼마나 주시려고 합니까?"
"허허! 얼마나 원하십니까?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음! 한 사람당 금전 10만 냥이면 될 것 같은데… 전 대형이니 15만 냥으로 하고."
천연회의 모두는 역발산이 미쳤다고 생각을 했다.
"허허! 자신들을 너무 과하게 평가하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역발산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럼 그 정도의 대가도 못 받으려고 우리가 노력을 했다고 보시우? 점잖게 나와서 말이 통하나 싶었는데, 역시 선비들은 앞뒤가 꽉 막혔어. 야! 금인아! 우리가 흑사파를 접수해서 1년간 벌 수 있는 돈을 계산해 드려라."
돈이라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금인이 나섰다.
"흑사파에서 우리가 1년 동안 벌어들일 수 있는 금액은 금전 1만 냥이 조금 넘습니다. 기루와 도박장 그리고 상인들의 자릿세, 이권 다툼 같은 부수적인 것도 많습니다. 우리의 나이를 계산해 볼 때 10만 냥이라는 돈은 결코 큰돈이 아닙니다."
림주는 인상을 썼다. 진짜 건달로 보일 뿐이었는데 의외로 예리했다.
"말로 해서는 아니 될 사람들 같군. 조용히 다루어 쫓아내어라."
림주는 간단한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샤샤샤샤샤!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군."
"귀찮다. 빨리 처리하고 기루에 가서 기생들을 끼고 즐겁게 놀아 보자. 동생들아, 나 역발산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큰지 보여 주어라."
팟팟팟팟!
건이 앞서서 이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승천도법, 출룡!"
콰앙!
"컥!"
"고작 이 실력으로 우리 형님들께 까불었소?"
그냥 건달이라 생각한 림주의 표정이 바뀌었다. 비록 일류 고수는 아니지만 건달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천유 서림의 무사들이었다.
"허허! 숨은 고수들이었구려. 그럼 부득이하게도……."
림주가 손을 들어 올리자 천유 서림의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나타났다.
"몬스터 레벨 40대의 서생 무사들이다. 한번 놀아 보자."
만사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역발산이 한 발 앞서서 나아갔다.
"크하하하! 이것이 흑사파를 제압한 천하제일 신공인 광란의 분노이다. 광란의 분노!"
"씨팔! 또 시작했다."
모두는 일제히 역발산을 향해 달려드는 서생 무사들을 보고 함께 공격하기 시작했다.
채채챙!
"금강부동심결!"
채채채챙!
"비검유수!"
"승천도법, 파멸겁!"
"폭열부!"
일행은 각자의 무공을 사용해 역발산에게 몰려 있는 서생 무사들을 사냥해 나갔다.
림주는 상황이 생각과 반대로 벌어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무엇 하느냐!"
"하하하! 나의 광란의 분노 앞에 모두 무릎을 꿇어라. 광란의 분노!"
역발산이 서생 무사들을 잡고 있으니 다른 이들이 빠르게 그들의 수를 줄여 나갔다.
마지막 남은 서생 무사의 허리를 양팔로 감은 역발산은 팔에 힘을 주었다.
뿌드득 뿌득!
"컥!"
허리가 꺾이며 마지막 남은 서생 무사 역시 회색빛으로 사라졌다.
"더 없소? 고작 이들로 우리를 잡으려 했단 말이오?"
다가오는 역발산을 본 림주는 주먹을 쥐었다. 건이 위험하다는 것을 역발산에게 알려 주려 할 때, 검이 날아왔다.
"누구냐?"
역발산은 검을 보고 피했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검을 피했다. 수많은 실전 경험으로 얻어 낸 감각이었다. 역발산은 물론 천연회의 구성원 모두가 개개인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이러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제법이군. 이런 뒷골목 건달과는 어울리지 않아. 더구나 그 대형이란 놈은 소림의 금강부동심결을 익히고 있으니 말이야."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전 하남성주였다.
"너희들은 누구냐?"
"이건 뭐 하는 개살구야?"
건은 현수가 가르쳐 준 인상착의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고 앞의 사내가 전 하남성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후후! 그러고 보니 언젠가 무림의 문파에서 누군가 무공 비급을 탈취한 사건이 있었지. 누구냐? 누가 사주했지?"
전 하남성주는 잃어버린 연판장을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런 고수들이 고작 흑사파라는 건달패를 장악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것 모두가 천유 서림을 공격하기 위한 핑계라 생각을 했다.
"뭐? 누가 사주를 해? 감히 이 역발산 님께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했더냐?"
"그럼 제압을 하고 물어보면 되겠지. 매화검법!"
"흥! 금강부동심결!"
콰아아앙!
"화산의 매화가 선비들과 어울리고 있다니 재미있군. 야, 막내야!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내가 저놈과 싸우면 내공이 줄어든다."
비록 고고한 학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멋진 대사를 읊는 역발산이었다.
역발산은 뒤로 빠지면서 건을 보았다. 졸지에 천연회에서 막내가 되어 버린 건이었다. 건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역발산과 위치를 바꾸었다.
"조심해라. 놈은 장난이 아니다. 한 번의 공격으로 체력의 3분의 1이 날아갔다. 방어 무공인 금강부동심결을 사용하고도 말이다."
역발산은 하남성주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 중 최고수인 건에게 넘긴 것이었다.
"후후! 걱정 마라."
이들의 나지막한 대화를 전 하남성주는 듣지 못했다.
'이왕이면 빠르게 죽이는 것이 좋겠군.'
건의 목적은 전 하남성주를 죽이는 것이었다.
무대가 만들어졌으니 최대한 빠르게 죽여서 자신들의 무위를 보여 주어 주위를 장악해야 했다.
분위기가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동굴이나 성만이 던전이 아니란 것을, 이미 건은 파악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천유 서림 역시 하나의 던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시간을 끈다는 것이 얼마나 불리한지 잘 알고 있었다.
전 하남성주는 건을 향해 검을 추켜올렸다.
"타앗!"
"이얏!"
채채챙 챙!
검과 도가 부딪쳐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이번의 격돌이 서로의 실력을 알아보는 것이었다면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십사수매화검법!"
"승천도법, 출룡!"
콰아아앙!
보는 이들 역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공격이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승천도법, 파멸겁!"
콰아아아앙!
땅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모두는 두 사람의 무위에 놀라고 있었다.
'역시 건은 우리보다 한 수 위다. 재능은 노력으로 따라갈 수 없는 것일까?'
아마 천연회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재능은 노력으로 따라갈 수 있다. 하지만 재능이 있는 자가 더욱 발전하고자 노력을 한다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재능이 있는 자를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매화삼십육신검형!"
순간 전 하남성주의 검이 늘어나 주위를 차단했다. 36개의 검기가 형성되어 건을 향해 쇄도해 왔다.
건은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승천도법, 승천도!"
팟아!
츄츄츄츄!
건의 도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건의 도는 회전을 하며 쇄도해 오는 검기들을 무참히 깨트리고 있었다.
"헉! 이기어도!"
천유 서림의 림주와 부림주인 천유문성은 건의 무공에 놀라 입을 벌렸다.
"크악!"
흑랑도가 건의 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전 하남성주는 무너지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고작 건달패가 이기어도를… 쿨럭!"
입에서 피를 쏟아 낸 전 하남성주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건은 자신에게 들려오는 메시지에 미소를 지었다.
"크하하하! 역시 별것도 아닌 게, 우리 막내도 못 이기면서 깝죽대기는. 웃기는군."
할 말을 잃어버린 천유 서림의 림주는 고개를 숙였다.
"이것 보시오. 보아하니 돈이 많은 것 같은데, 매달 금전 1,000냥을 흑사파에 보내시오. 그러지 않으면 이곳의 기둥뿌리를 뽑아 버릴 것이오. 동생들아, 가자."
역발산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천유 서림은 혹을 때려다 혹을 하나 더 붙인 꼴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부림주님!"
"하하! 꼴이 많이 아니군."
림주가 부림주인 천유문성에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숙부가 알면 난리가 나겠군. 그토록 공을 들인 것을 고작 건달패들에게 빼앗기다니 말이야."
"고작 건달패라 하였더냐."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두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허름한 촌로의 모습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다름 아닌 천유 서림의 실질적인 주인인 천유민이었다.
"아버님! 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천유문성은 천유민을 아버지라 불렀다.
"숙부께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괜찮다. 다소 차질이 생겼지만 우리는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흑사파에 매달 금전 3,000냥을 보내 주어라. 그리고 친분을 쌓도록 해라. 동생에게는 내가 잘 말하마.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대학사를 동생이라 칭하는 천유민이었다.
"황궁에서 역시 좋지 못한 소식이 들리는구나. 각별히 조심을 하고 때를 기다려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 하남성주의 죽음으로 무림의 방파와 친분을 유지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친분이야 다시 쌓으면 되는 것이지. 암!"
고개를 든 천유민은 오늘따라 유독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 * *
황궁은 난리가 아니었다. 소화궁의 사태로 어지러웠다가 군천령으로 한숨 돌리는가 했는데, 이번엔 정빈의 처소에서 밤마다 괴이한 일들이 일어났다.
시작은 쥐들의 죽음이었다.
정빈은 얼마나 많은 고통에 시달렸는지 해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학사 역시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다만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 때문에 대학사가 조금 나을 뿐이다.
"마마! 심려를 놓으십시오. 곧 범인을 색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언제입니까?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저는 일주일째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마마! 오늘은 폐하께 간청을 하시어 함께 보내시옵소서. 놈이 폐하의 침소까지는 침입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만약 놈이 폐하의 침소에 침입을 한다면 천밀위 수장인 령의 손에 잡힐 것이오니 오늘은 그렇게 하시옵소서."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놈을 빨리 잡아 주세요."
정빈은 상궁으로 하여금 제조상궁에게 연락을 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또 놈이 말하는 아가씨라는 년이 대체 어떤 년이기에 날 이리도 못살게 군단 말인가?"
시간이 지나자 상궁에게서 연락이 왔다. 황제 폐하께서 침소로 드는 것을 허락했다는 교지와 함께!
정빈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폐하께 잘 보여야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수욕을 해야겠다."
상궁은 준비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정빈 역시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자신의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정빈은 심신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빈은 비린내가 나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꺄악! 꺄악!"
"마마!"
밖에 있던 상궁이 놀라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정빈이 몸을 담그고 있는 욕조의 물이 붉은색이었다.
돼지 피가 피부 미용에 좋다고 하더이다.
상궁은 놀라서 정신을 잃은 정빈을 업고 방으로 돌아갔다.
현수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너희들을 편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후 정빈은 황제의 옆에서 오랜만에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황제의 사랑을 받으면 더없이 기쁘련만, 황제는 정빈을 불쌍하다는 듯 보다 잠이 들어 버렸다.
* * *
전서구를 통해 건과 만사귀의 일이 잘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들은 현수는 복수를 당분간 자제하기로 했다.
눈앞의 복수도 복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힐 수도 있다.
현수는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 생각하여, 지밀원의 연무장에서 그동안 합친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천천히 한 동작 한 동작 펼쳐 보이며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그런 가운데 무공의 또 다른 맛에 빠져 들었다.
"하면 할수록 색다른 느낌이다."
무공을 대하는 현수의 생각이었다. 과연 완성이라는 것이 있을까? 운중비록이나 살황의 일기장은 모두 익혔지만 할수록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완성이란 있을 수가 없다. 다만 그 완성에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현수는 대부분의 무공을 대성했다. 무공 패치로 인해 하루 종일 죽어라 무공만 익힌 현수였기에 가능했다. 또한 이미 대성한 무공을 2개나 보유하고 있었기에 더욱 빠른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수가 빨리 무공을 익힐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구미호의 내단과 적룡의 영약 그리고 만년설련실로 인해서였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때, 멀리서 연무장을 향해 오는 인물이 있었다.
"호오! 평 씨가 오는군."
예전에 군주 납치 미수 사건의 공을 가로챈 NPC 평설중이었다.
"요즘 NPC들은 유저들의 공을 가로채기나 하고, 참 잘 만들었지."
모르는 척 팔자영법을 연습하고 있는 현수였다. 팔자영법 역시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구파일방의 검법이 팔자영법 속에 모두 녹아 있었기 때문에 지금 팔자영법은 완전히 다른 무공이 되어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황궁의 빈대 이현수 공이 아니신가? 그래! 그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는가?"
현수를 보고 빈정거리는 평 씨. 하나 현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관직으로는 그가 상관이기에 속은 조금 아프나 어쩔 수 없었다.
"오셨습니까? 폐하께서 명하신 팔자영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다. 그래, 그 팔자영법이라는 검법을 한번 견식해 보고 싶구나."
"재주가 미천하여 대인의 눈을 어지럽힐까 두렵사옵니다."
현수는 한번 튕겨 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내가 보아 줄 수 있느니라."
"그러면 그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과연 팔자영법이 나리의 눈에 찰는지 잘 모르겠사옵니다."
현수는 일부러 엉성하게 팔자영법을 시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무공을 옆에서 본다는 것은 무림에선 금기시되어 있지만 황궁에서는 가능했다. 물론 시전하는 사람은 전심으로 펼치지 않았지만, 고수가 보면 대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음! 조금은 엉성하군. 그걸 검법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냐? 차라리 그냥 때려치우고 문에나 집중하지 그러나. 요즘 폐하께서도 자주 찾으시니 말이야."
현수는 언성을 높였다.
"대인,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소생의 사부님께서 전해 주신 무공입니다. 비록 제 자질이 모자라 형편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무공 자체는 일류입니다."
"일류는 개뿔! 그게 일류면 삼재검법은 초일류가 될 것이다."
"모욕은 삼가하여 주십시오."
현수는 또 한 번 언성을 높였다. 그 결과,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감히 나에게 소리를 쳤단 말이냐."
평 씨의 호통에 조금 수그러든 척했지만 관객이 모였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무공을 욕하는 것은 곧 사부님을 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제가 비록 대인의 적수는 될 수 없으나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무공에는 소질이 없사오나 대인께 비무를 요청합니다."
비무라는 말에 콧방귀를 뀌고 몸을 돌리는 평설중이었다.
"너 같은 놈과 비무를 하면 칼날이 무디어진다. 그리고 네가 나의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무서워서 그러시는 것이 아닌지요. 하긴 군주 마마를 구한 무공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가 싫을 것이옵니다."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아야 했다. 그래야 전날 공을 가로챈 것에 대해 복수를 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흥!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 안달을 하는구나."
"그럼 대인께서는 저와의 비무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도발하는 현수를 그냥 두고 넘어갈 평설중이 아니었다.
"오냐, 오늘 네놈의 팔을 하나 잘라 상관을 무시한 죄를 묻겠다."
서로 목검을 겨누자 연무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록 비무라고는 하지만 기를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라 진검과 다름이 없었다.
"타앗!"
공격해 오는 것을 본 현수는 재빨리 무공을 시전하며 설중의 검을 피해 버렸다.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팔검수화진검류!"
가볍게 검을 피한 현수는 뒤로 돌아가 목검을 엉성하게 내려쳤다.
"흥!"
하나 그것은 그만의 착각이었다. 분명 피할 수 있는 검이었는데 그의 어깨가 현수의 목검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컥! 이놈이!"
자신이 당했다는 걸 믿기가 어려웠는지, 평설중의 기세가 돌변했다. 그는 현수를 죽이려 하는지 눈에 살기를 띠었다.
츄츄츄츄츄! 파파팟!
검기가 목검을 감쌌다. 현수는 또 한 번 그를 보고 소리쳤다.
"이것은 비무입니다, 대인!"
모두가 보고 있는데 설마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설중은 진짜 현수의 한 팔을 가지고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것은 네놈이 자초한 일이다. 받아라!"
평산일파도법!
황궁에 충성한 평무헌이 황제에게서 받은 황궁 무공 중의 하나였다. 많은 세대를 거치며 더욱 발전된 평산일파도법은 본래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월래의 평산일파도법보다 파괴력을 더욱 높인 무공이었다. 사람들이 평가의 독문 무공으로 인정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후후!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이 어떻게 나의 공을 가로챌 생각을 했을까. 이해를 못 하겠군.'
현수는 속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아직 다스리지 못하는 평설중을 욕하고 있었다.
설중은 아는지 모르는지, 이리저리 피해만 다니는 현수가 얄미웠는지 혼신의 힘을 다해 무공을 펼쳤지만,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피하는 현수를 잡을 수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현수가 피하는 모습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현수를 잡지 못하는 평설중의 무공 또한, 대련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별것이 아니라 느껴졌다.
"헉헉! 피하지만 말고 맞서 싸워라."
"헉헉! 그거 한 방 맞으면 관직이고 뭐고 바로 이승에서 하직인데, 제가 미쳤다고 대인과 싸웁니까."
설중은 속이 타들어 갔다. 분명 엉성하게 보이는데 자신의 도를 다 피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들에게 망신은 다 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그만두려고 생각해 보아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다시 도를 고쳐 잡았다.
"대인, 이놈이 졌습니다."
현수는 검을 던지고는 줄행랑을 쳐 버렸다.
"이놈! 감히 나를 놀려?"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 버렸다.
오늘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설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못난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인상을 쓴 사람이 있었다.
"고작 저런 놈을 이기지 못해 웃음거리가 된단 말인가!"
호통에 놀라 고개를 돌린 평설중이 고개를 숙였다.
"원주님을 뵈옵니다."
"못난 놈! 어떻게 네놈이 군주 마마를 구했는지 짐작을 할 수가 없구나. 연무장을 100바퀴 달려라. 그리고 끝이 나면 나에게 곧장 달려와라. 대련을 할 것이다."
평설중은 앞이 막막해져 왔다. 하나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네 이놈을 필히 갈아 마시리라.'
연무장을 달리는 내내 평설중은 속으로 현수를 욕하고 있었다.
황제는 낮에 있던 사실을 천밀위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하하하. 그래, 그놈은 참으로 괴짜 같은 놈이구나."
황제는 오늘 낮에 있었던 현수와 평설중의 비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기분이 좋아 크게 웃었다. 요즘처럼 어수선할 때도 황제는 가끔 현수의 기행으로 웃을 수가 있었다.
"폐하! 하지만 이현수는 아직 관직이 없습니다. 평 밀위를 욕보인 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짐은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대도 생각을 해 보아라. 비무에서 내공을 사용해 이현수를 해치려 하지 않았느냐. 이현수는 짐의 사람이다. 짐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짐뿐이다."
"그러하옵니다만……."
"그럼 되었다. 그만 하라. 오늘은 그 때문에 한번 웃어 보는구나. 혹시 평 밀위가 이현수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그의 가문은 물론이며 그의 친구까지 황명을 거역한 것으로 간주하고 단죄하겠노라. 하하하하! 고놈!"
이것이 바로 황제와의 신임도의 위력이었다. 신임도가 높은 현수를 황궁에서 어떻게 하기는 힘들었다.
황제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황제의 말은 곧 황궁 전체에 퍼졌다.
자정이 넘어 미랑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고 있는 현수에게까지 소식이 들렸다.
"하하하. 평 씨 고것, 참으로 안되었구나. 하지만 이렇게 넘어갈 내가 아니지."
현수는 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님, 이 부분이 조금 어렵습니다."
혼자서 연습을 하던 미랑은 현수에게 무공을 배우다 막힌 부분을 물어보았다.
"한번 펼쳐 보십시오."
미랑은 막히는 것을 펼쳐 보이며 힘들어했다.
"아! 여기서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현수는 미랑의 뒤에서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동작을 함께 펼쳤다.
미령은 밤마다 현수에게 가는 미랑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따라와 훔쳐보고 있었다.
'어머!'
처음부터 보지 못하고, 현수가 뒤에서 미랑의 두 손을 잡는 것부터 본 미령은 또 한 번 오해를 하고 있었다.
"어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더니."
둘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무공 연습의 열기로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현수가 미랑의 팔을 돌려 고개를 앞으로 숙이는 것을 본 미령은 기분이 이상해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황궁의 관리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궁녀 지침을 잊을 애가 아닌데. 호호! 나리가 좋긴 좋은가 보다, 미랑은. 하긴, 저 정도면 미남은 아니지만 추남 또한 아니지. 뭐! 관직을 기다리고 있으니 출세도 보장이 되어 있고, 미랑이 나리와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 나의 님은 어디에 있는 건가요."
황궁의 사람은 모두 황제의 사람이다. 여자는 물론 남자들까지.
하지만 남몰래 궁녀들을 만나는 관리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궁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궁녀 지침에 관리와 사랑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적혀는 있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사람을 잘 만나면 팔자를 펼 수 있는데 그것을 마다할 궁녀는 몇 되지 않았다.
미령은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혼자만의 착각 속에 오늘도 행복해진 미령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현수는 얼마 남지 않은 미랑의 동면 기간에 맞추어 무공 수련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미랑 역시 힘들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열심히 수련에 임했다.
"힘이 들어도 해야 합니다. 다시는 여우들이 다른 이들에게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힘든 것을 참으셔야 합니다."
"헉헉. 알겠습니다, 아버지!"
미랑은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하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있다.
현수가 미랑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이 점점 소문이 나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허허! 고놈! 그래, 궁녀의 무공 수위는 어떻게 되느냐?"
황제는 화를 내기보다는 흥미를 느꼈다.
팔자영법을 익혀 군대를 가르치란 명을 내렸지만, 현수는 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황궁의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녔다.
또한 2황자의 궁에서 보여 준 무위를 봤을 때 충분히 군대를 가르칠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이유로 이래저래 여유를 부리고 있는 현수였다.
시키는 것을 하지 않고 시간이 있다는 이유로 버티는 사람은 현수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현수가 마음에 들었다.
"폐하, 궁녀의 무공은 일류를 넘어섰습니다. 또한 이현수의 무공은 예전에 보여 준 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습니다. 2황자 저하의 궁에서 보여 준 무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기간에 일류를 넘어선 무공을 가르쳐 주려면 그 자신 또한 초일류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배우는 이의 자질이 비범하면 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오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그래? 그놈! 그런 무위를 가지고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는 천밀위의 수장인 령의 말을 듣고는 현수가 어느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또한 궁녀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무공 또한 궁금했다.
황제가 되고 나서 이렇게 궁금증을 유발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혹시 어떤 무공인지 알 수 있겠느냐?"
"어떤 무공을 가르쳐 주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접근을 하는 것을 아는지, 어느 정도의 거리밖에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령의 말을 듣고 있으니 더더욱 궁금해졌다. 령이 비록 무림에서 최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황궁에서 령을 이길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자네보다 무공이 강하단 말인가. 그러니 자네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신이 생각하기에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현수는 저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전 무인이 아닌 살수이기 때문입니다."
천밀위의 수장 령은 살수 출신의 무인이었다. 중원에 건너오기 전에 그는 동영 용천비가의 당주였다.
중원을 치기 위해 동영의 많은 무인들과 닌자들을 대동하고 건너왔지만 중원의 무예는 동영에서 생각한 것보다 더 강했다.
중원의 무인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황궁까지 숨어들었고 1만여 초만에 패해 전대의 천밀위 수장에게 잡혀 황제의 수신위가 되었다.
"그래, 내가 알기로는 무림의 살수들 중에는 살황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와 너를 비교한다면?"
"저의 패배입니다. 하지만 살황의 후예라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는 아직 경험이 저보다 적기 때문입니다."
령이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본 황제의 입가에는 미소가 생겨났다.
"경험이라… 짐은 이현수에게 짐의 군대에 팔자영법을 가르치라 했는데, 아직 그러지 않고 있으니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는 그를 골탕 먹일 방법을 말하라."
황제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묻어났다. 자신이 황제가 되고 나서 지금까지 현수와 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미 황궁에 입궐했을 때부터 자신의 사람이었다. 문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무 역시 뛰어난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황제였다. 현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황궁에 들어왔는지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현수는 문과 무에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경험이 없을 줄 아옵니다. 이번 기회에 변방으로 한번 보내어 보심이 어떠합니까?"
"변방이라… 그럼 조금 긴장감이 있는 곳이 좋겠지."
"신은 북방의 오랑캐들이 있는 곳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호전적인 데다 거친 자들이라, 이현수를 심심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북방의 오랑캐!
천에는 본토를 제외한 4개의 지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3개의 지역은 아직 구현이 되지 않았지만 하나의 지역, 아니 다른 하나의 나라인 북방은 구소련 정도의 크기로, 에피소드 2에서 외국인들의 지역이 되는 나라였다.
황제와 천밀위가 말하는 곳은 본토와 북방의 중간 지역으로 인간형 몬스터보다는 야수들이 더 많이 존재하는 지역이며, 인간형 몬스터의 레벨은 40대에서 최고 60대였다. 황제와 천밀위는 인간형 몬스터를 오랑캐라 칭하고 있는 것이었다.
"북방의 오랑캐라… 좋군! 기왕이면 이현수의 시비들도 함께 보내는 것이 좋겠군. 그들 또한 짐의 사람이니."
"그렇게 하시옵소서, 폐하."
현수를 북방으로 보내려는 황제는 재미있는 유희거리를 찾은 듯 기뻐했다.
* * *
"그래, 그놈이 시비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도련님!"
설중은 현수에게 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벼르고 있던 중에 황제의 명이 떨어져 속으로 참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찾았다는 듯 설중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났다.
"좋아! 그년을 괴롭혀 복수를 해야겠다. 친구들과 함께 즐기면 딱 좋겠군. 그런데 그년은 예쁘냐?"
"황궁의 시비들은 다 예쁘다는 것을 도련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전국에서 고르고 골라 올라온 이들이니."
"하긴 그렇지. 나 역시 그것 때문에 황궁에 남아 있는 것이니."
설중은 미랑을 납치해 욕을 보이기로 결정을 했다. 혼자가 아닌 친구들 여럿과 함께 욕을 보여 현수에게 본보기로 삼아 주기로 결정을 했다.
"내일 밤까지 날쌘 놈에게 그년을 잡아 오라고 한 후 별채에 가두어라."
"조심하셔야 합니다, 도련님. 이번에도 나리께서 아신다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평 장군은 늦게 본 자식을 고이 키워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늦게서야 후회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괜찮다. 자식 이기는 부모를 보았느냐."
집사는 걱정이 되었지만, 설중에게 잘 보이는 게 장수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장 중 한 사람을 시켜 미랑을 납치해 오라 전했다.
자정!
미랑이 현수에게 무공을 배우기 위해 현수의 방으로 찾아가는 시간이다.
미랑의 앞에 복면을 쓴 사내가 나타나 다짜고짜 공격을 했다.
미랑은 운중비록의 운중난화무를 펼쳐 피하고는 소림의 소림오권으로 사내의 가슴을 쳐서 사내와 거리를 벌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해서 반격한 것이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사내는 다시 거리를 좁혀 왔다.
"누군데 저를……!"
"그냥 조용히 가기만 하면 된다."
미랑은 사내의 검을, 허리를 숙여 피하고는 다시 몸을 회전시키며 뒤로 계속해서 물러나 사내의 검을 피하고 있었다.
턱!
복도의 끝!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었다. 미랑은 입술을 꼭 물고는 사내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 바빠서 당신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게다가 칼을 들고 저를 찾아왔으니, 분명 좋은 일로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흥!"
미랑은 운중난화무를 최대한 펼치며 사내의 품으로 파고들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을 강하게 가격했다.
"컥!"
충격으로 허리가 숙여진 그를, 미랑은 발을 올려 돌려 차 버렸다.
"윽!"
다시 얼굴이 돌아가는 사내의 머리를 한 번 더 돌려 차고는 사내에게 따라붙었다. 사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는 무릎으로 강하게 얼굴을 올려쳐 마무리를 했다.
"크악!"
사내는 연환 공격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짝짝짝!
현수는 미랑이 싸우는 것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미랑이 올 시간에 또 다른 기척을 느껴, 와서 보니 미랑이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도와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연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미랑의 실전 경험을 위해서라도 그냥 보고만 있었다.
"훌륭한 연환 공격이었습니다, 미랑 님!"
"아직 미숙합니다, 아버님!"
"이놈이 아직 하수라 다행히 미랑 님께서 이길 수 있었지만 무림에는 많은 고수들이 존재합니다. 그들로부터 모든 여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해지셔야 합니다."
칭찬은 칭찬이고 가르침은 가르침이다. 한 번의 승리로 교만해질 수 있는 정신을 바로잡아 주어야 했기에 현수는 조금 독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오늘은 혼자 연습을 하십시오. 전 이놈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미랑은 현수의 방을 찾아 들어가 연습을 했다.
현수는 쓰러져 있는 사내를 데리고 후원으로 나갔다.
"이봐! 이제 일어나."
정신을 잃은 그를 깨우기 위해서 미랑의 타격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도의 주먹질이 동반되었다.
"으으윽!"
"일어났나? 그럼 시작해 볼까. 참고로 내게 무엇을 말할지를 생각해 두게."
퍼벅! 퍽퍽!
묻지도 않고 구타를 시작하는 현수는 신이 났다.
"이 맛이야. 황궁에서는 주먹맛을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검은 너무 시시해."
손에 전해져 오는 짜릿한 기분에 도취해 있는 현수였다.
"말을 할 생각이 들었어?"
"저의 이름은……."
퍽퍽퍽.
원하는 대답은 이것이 아니었다.
"전 평 장군가의 사람입니다."
퍽퍽퍽.
이렇게 시작된 현수의 고문에 그는 견딜 수가 없었던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내용들을 모두 말하고는 쓰러졌다.
"평 씨란 말이지? 무슨 악연이 있기에 이래?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나도 아니지만. 이번 기회에 한몫 챙겨야겠다."
현수는 그길로 북경의 장물아비들을 만나고는 평 장군가로 잠입해 들어갔다.
"운중비록, 운중무영보! 살황의 일기장, 잠입술!"
소리 없이 잠입한 현수는 모두가 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평 장군의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후후! 아이템이 별거 있나! 이렇게 싹쓸이하는 거지."
현수는 싹쓸이해 온 물건들을 장물로 팔아 단단히 챙기고는, 일부의 금액을 현금으로 교환하기 위해서 로그아웃을 한 후에 거래 사이트에 올려놓았다.
다음 날, 평 장군가는 소란으로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다.
도둑!
모든 것을 싹쓸이해 가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집의 기둥뿌리와 기와가 전부였다. 집 안의 물건들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누가……."
평 장군은 할 말을 잃었는지, 넋을 놓고 텅 빈 방 안을 보고 있었다.
설중은 별채에 미랑 대신 납치해 오라고 보낸 놈이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놈, 이현수!"
도둑이 누구인지 알고는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 * *
현수는 시비들과 함께 북방으로 황명을 받고 떠나갔다.
현수의 임시 관직은 북방 순찰사!
관직을 주지 않으면 죽어도 가지 않겠다는 현수의 고집에, 황제는 직인을 찍어 현수에게 임시 관직을 주었다.
"허허. 고놈! 재미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폐하. 이제껏 이 순찰과 같은 인물은 처음입니다."
"그렇지."
황제와 천밀위는 현수의 기행을 보며 북방으로 가서는 또 어떤 일들을 벌이고 올까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