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궁의 세력들 (13/57)

황궁의 세력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실패했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마마!"

"누구입니까? 누구이기에 영취를 죽이려고 한 것을 막았단 말입니까?"

황궁 제일미로 알려진 영취 군주는 군부의 젊은 장수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또한 황제를 유일하게 곤란케 만들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 존재를 죽이다니? 혹시 이들이 역모를 꾸미는 것은 아닐까?

"아직 확인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밀원의 무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자객들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겁을 먹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음! 소화궁에 이어 영취궁까지 실패를 하다니……. 누군지 찾으세요. 혹시 의외의 인물이라면,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면 끌어들여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마마! 하지만 한동안은 조심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야겠지. 지금 우리의 세력은 어떻습니까?"

"예! 아직까지 조금은 부족합니다. 천밀위를 끌어들이면 거사의 성공 확률이 높아지지만 천밀위를 움직이는 게 힘들 것 같습니다."

"음! 하지만 우리에게는 내각이 있지 않습니까?"

"내각의 힘으로는 힘듭니다. 황궁에서 동창과 금의위를 움직이는 환관들의 힘에 비해 너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마마, 지금은 몸을 추슬러야 할 때입니다. 이번 기회에 무림과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무림인들과?"

"그렇습니다. 무림인들과 손을 잡아 천하를 어수선하게 만들어 황궁의 관심을 그리로 돌리는 한편 우리의 거사를 시작하면, 7할 이상의 승리를 점할 수 있습니다."

예부터 무림과 황궁은 서로 존중해 주었다. 한데 이들은 역모를 성공시키기 위해 무림과 손을 잡으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제가 몇 군데의 세력을 뽑아 놓았습니다. 황궁이 잠잠해 지면 제가 그들과 교섭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런 그렇고, 그것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아직 찾지 못했단 말인가요?"

"죄송합니다, 마마. 구미호를 사냥하러 간 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마 구미호 역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오나, 곧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황자에게는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세력이 있어도 힘이 없으면 그 세력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래서 자신이 낳은 황자에게 ≪살황의 일기장≫과 ≪운중비록≫을 구해 주어 그것을 익히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원 무림에 숨겨진 열 권의 무공서들 중 오직 두 권의 단서만이 존재했다. 정보를 무림인들에게 흘려 구미호가 가진 무공서를 빼앗으려 했지만 그것 역시 실패했다. 하나 자신에게 그 무공서가 돌아오리라 믿고 있었다.

"음!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행방을 알아보세요."

"맡겨 주십시오. 마마와 황자님의 품에 천하를 안겨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계획은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 * *

똑똑똑!

야심한 밤에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천밀위의 령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죄송합니다, 이 공! 영취궁에서 조금 전에 약간의 소란이 있었습니다."

현수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비록 영취 군주는 없었지만 자신이 자객들을 상대했으니 말이다.

현수는 모른 척 되물었다.

"그런데 왜 저를……?"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준비해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현수는 의관을 차려입고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대전으로 가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현수는 침착하게 황제의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어 부복하고는 황제께 예를 갖추었다. 오매불망과 슈우엔 역시 함께 했다.

"어서 오라. 그대를 부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 군주의 궁에 자객들이 침입해 군주를 납치하려고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밀원의 무사들이 궁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그대는 그 시간에 어디에 있었는가?"

그러니까 군주를 납치하라고 시킨 인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준 인물을 찾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은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었나 보다.'라고 생각한 현수는 서둘러 변명을 했다.

"전 오늘 저녁에 저의 시비인 미랑이라는 아이에게 황궁의 예법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폐하!"

"사실인가?"

"미랑이라는 시비와 함께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영취궁에서 이 공의 거처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라 시간 차가 생깁니다."

"도대체 그자는 누구인가!"

그때 현수의 귀에 믿지 못할 외침이 들렸다. 아니,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폐하! 군주님을 위기에서 구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평 장군의 자제인 평설중이라고 하옵니다."

순간 대전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황제는 반색을 하면서 서둘러 그를 불렀다. 이것을 보더라도 황제가 영취 군주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오호! 그를 불러라!"

현수는 속으로 자신이 한 일을 대신했다고 하는 평설중이라는 자를 씹고 있었다.

'후후. 웃기는군. 누가 감히 내가 한 일을 사칭해? 이로써 2명인가? 현의태감과 평설중!'

현수는 곱게 씹고 있었다.

들어오는 평설중이라는 자의 인상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호남형으로 생겼지만 눈초리가 조금 올라간 것이, 여자를 밝히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군주를 좋아했다.

아니, 군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밤마다 영취궁 주위를 기웃거렸다.

만일 군주의 환심을 얻어 부마가 된다면 출세가 보장될뿐더러 또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너무도 많았기에 오늘도 영취궁을 기웃거리며 군주의 환심을 사려 했으나, 군주는 그를 외면했다.

그러던 중 영취궁에 침입하는 그림자들을 보았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이길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기척을 죽이고 영취궁으로 들어가 안을 살피던 중 또 다른 그림자에 의해 그들이 공포에 젖어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조금 있다 지밀원의 무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그림자 하나가 다른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떳떳하면 저렇게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그자의 공을 가로채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틀림없이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그가 나서도 상관하지 않았다. 평설중은 자신의 배경을 믿었다.

평 장군가라는 든든한 배경을.

"어서 오라. 그대가 평 장군의 아들이라 했는가?"

황제는 들어오는 평설중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군주가 살았다고 하니 참으로 대견해 보였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호부의 밑에 견자 없다고 하더니, 그대는 오늘 과인의 목숨을 구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였도다. 그래,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보아라."

평설중은 마치 진짜 자신이 한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 내기 시작했다.

"달을 보기 위해 산책을 하던 중에 괴한들의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을 본 신은 그들 중 1명을 잡아 문초를 해 본 결과, 군주 마마의 납치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호! 그래? 평 장군은 무예가 뛰어난 장수인데 그의 자제 역시 무예가 출중한 모양이로고."

"감사하옵니다, 폐하! 영취궁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살수들은 궁 안으로 침입을 한 후였습니다. 할 수 없이 무례를 각오하고 영취궁으로 들어가 자객들과 싸웠습니다. 다행히 군주 마마의 신변을 지킬 수가 있었사옵니다."

현수는 속이 쓰려 왔다. 그리고 조금은 웃기기도 했다. 누가 평설중의 말을 믿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꾸며 낸 이야기가 엉성해!'

하지만 모두 그를 믿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평 장군의 자제라는 것 때문이었다.

"하면 그대는 왜 지밀원의 무사들이 도착했을 때 자리를 피하였는가?"

"군주 마마도 무사한 데다 지밀원의 고수들이 자객의 잔당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저는 이 사실을 숨기려 하였사오나, 저로 하여금 다른 이들이 불편을 겪을까 싶어서……."

모든 것이 맘에 든 황제는 평설중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짐이 그대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그대는 원하는 것을 말해라."

더욱 배가 아파진 현수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금전을 1만 냥 이상은 받을 수 있는 건수를 놓쳤다는 것이 더욱 배를 아프게 했다.

평설중이라는 인물에게 한 방 날려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폐하! 상이라니 천부당만부당하십니다. 다만 소생에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폐하의 곁에서 폐하를 지키는 것이옵니다."

"하하. 과연 평 장군의 충성심이 그 자제에게도 전해졌나 보구나. 그대의 뜻대로 될 것이다. 지밀원주는 평설중을 지밀원에 배속하고, 그에게 지밀원의 무공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라."

지밀원!

천밀위가 황족의 수호 기관이라면 지밀원은 수도 수호 기관이었다. 물론 다른 군대 역시 수도를 지키지만, 지밀원은 수도 중 황궁만을 지키는 군사 집단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늘은 참으로 즐거운 날이로다. 그대들은 그만 물러가라."

현수는 재빨리 자리를 떠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생각할수록 배가 아파 오는 것을 꾹 참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참기가 힘들었다.

"신이 자객을 잡아 문초를 해? 웃기는군. 다음에는 어떤 거짓말을 꾸며 댈까 궁금하네. 이 게임, 정말 잘 만들었어. NPC가 유저의 공을 가로챌 생각까지 하는 것을 보니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야. 그런데 군주는 분명 그 자리에 없었는데, 마치 모두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이야. 혹시!"

불현듯 현수는 황제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령이 자신을 찾아온 것도 조금 이상했다.

영취궁과 현수가 묵고 있는 방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 먼 거리를 빨리 움직일 수 있게 해 준 것은 바로 운중비록이었다.

"좋아, 황궁 자객을 모조리 다 죽이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현수는 황궁 자객을 보이는 대로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또한 평설중에게 작은 경고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키키. 재미있겠군."

그때 현수의 앞에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이템이 도착하였습니다. 개봉 시 수수료로 금전 10냥이 소모됩니다.

아이템 택배 시스템은 약간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원하는 사람에게 아이템을 보낼 수 있게 만든 것으로, BS 그룹이 유저들을 위해 서비스 차원에서 만든 방법이었다.

수수료를 지불한 현수는 아이템을 확인했다.

"아이템 확인!"

아이템 : 현수 부적 등급 : 레어-최상급

특성 : 순발력+15 제작자 : 만사귀

설명 : 모산파의 비전인 팔괘 부적술로 만든 부적

부적 두 장! 모두 순발력 플러스 15인 최상급 레어 아이템이었다. 만사귀에게서 온 것이었다.

"작명 센스하고는. 현수 부적이 뭐야? 쪽팔리게."

이름 : 이현수 레벨 : 30

직업 : 서생 체력 : 550

기력 : 640 공격력 : 10(+5)

방어력 : 10 순발력 : 10(+34)

민첩성 : 68 인내 : 55

맷집 : 68 NPC와의 호감도 : 72%

경험치 : 85/100

생활 스킬 : 도축-가죽과 고기를 얻을 수 있다.

현수는 상태 창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무공 창 오픈!"

운중비록 : 10성

-보법 : 운중난화무, 운중무영보, 운중광속신형보

-경신법 : 운중탄영신, 운중무영신

살황의 일기장 : 10성

-지둔술, 추적술, 탐지술, 은신술, 잠입술(운중비록을 토대로 사용할 수 있음)

-뇌전류 : 기력을 사용해 적에게 타격을 준다. 한 줄기 빛과 같은 빠름으

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

민첩성+300%의 타격을 준다.

팔검수화진검류 : 1성

제작자 : 이현수

등급 : 절정

설명 : 구파일방의 무공들 중 검법만을 모아 ≪만사무서≫를 통해 합쳐 만든 무공으로, 일초식의 검법이지만 여덟 가지의 변화가 숨어 있다.

기력을 사용해 적에게 타격을 준다.

순발력+100%의 타격을 준다.

현천파열권 : 1성

제작자 : 이현수

등급 : 절정

설명 : 구파일방의 무공들 중 권법만을 모아 ≪만자무서≫를 통해 합쳐 만든 무공. 일초식의 권법으로, 총 여덟 번의 주먹을 빠르게 휘두를 수 있다.

기력을 사용해 적에게 타격을 준다.

순발력+100%의 타격을 준다.

호심발도술 : 1성

제작자 : 이현수

등급 : 초절정

설명 : 구파일방의 무공들 중 도법과 살황의 일기장의 뇌전류를 합쳐 ≪만자무서≫를 통해 만든 도법.

기력을 사용해 적에게 타격을 준다.

민첩성+100%의 타격을 준다.

천밀밀 : 1성

제작자 : 이현수

등급 : 절정

설명 : 구파일방의 무공들 중 호신기공으로 만든 무공으로, 검으로 검막을 만들어 적의 공격을 방어한다.

기력을 사용해 방어한다.

방어력+100%

≪만자무서≫

등급 : 무

설명 : 두 가지 이상의 무공을 합쳐 새로운 무공으로 만들 수 있는 무서.

기력이나 민첩성, 공격력, 방어력, 순발력 등으로 데미지를 주는 무공들을 보고, 현수는 더욱 자신감을 가졌다.

특히 호심발도술은 구미호를 생각해서 만든 무공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다른 무공과는 달리, 민첩성으로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무공이 되었다.

현수는 호심발도술이 뇌전류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좋아. 이렇게 간다."

현수는 아이템을 모두 순발력으로 채우고 있어, 무기와 방어구만 제대로 갖추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판단을 했다.

"퀘스트 창 오픈!"

완료한 퀘스트 : 2

-대장간 주인의 부탁

-만 번 죽기

진행 중인 퀘스트 : 1

미랑의 보호

내용 : 여우들의 차기 어머니로 내정이 된 미랑이 성장할 때까지 보호해야 한다. 수많은 인간 군상이 모여 사는 황궁에서 1년간 무사히 미랑을 보호하면 퀘스트를 성공할 수 있다.

등급 : 무급

보상 : ?

진행 : 12일/365일

현수는 다음 날부터 자정에는 미랑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고, 낮에는 자신의 무공을 익히는 동시에 몸에 아직 흡수되지 않은 적룡의 영약을 흡수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황궁에서는 현수의 신분이 명확지 않다는 이유로 아직 관직을 허락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황궁에 입궁한 지 2달이 지나갔다.

미랑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다. 간혹 황궁 자객들이 나타나 현수의 무료함을 달래어 주었기에 그리 심심한 편은 아니었다.

현수는 황궁 자객을 사냥하면서 황궁에서 일고 있는 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음! 황궁 역시 묘한 세력의 움직임이 보인다. 재미있군. 황궁은 심심할 줄 알았는데. 미랑 님에게 물어 자세하게 알아보아야겠다.'

현수는 그동안 자신의 무공을 모두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줄만 잘 서면 진짜 황궁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레벨이 문제가 되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지금 현수의 레벨은 34였다. 황궁 자객들을 사냥하고 올린 경험치 덕이었다.

자정이 되자 미랑이 현수의 방에 찾아왔다. 현수는 일어나서 미랑을 맞이하며 자리를 권했다.

"저기, 미랑 님! 오늘은 저에게 황궁의 상황을 조금 알려 주십시오."

뜬금없는 말에, 미랑은 잠깐 생각을 하다가 그동안 황궁에서 보고 느낀 것을 현수에게 알려 주었다.

"현재 황궁의 상황은 조금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군요. 저도 세력이 셋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미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세력은 모두 황자 저하들의 세력입니다. 황제는 늙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황제를 정하는 문제로 인해 세력이 갈라졌습니다."

"조금 이상합니다. 원래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지 않습니까?"

장자 계승의 원칙은 무림의 모든 세력에 통용되고 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1황자는 제왕의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황제는 2황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 합니다."

"그럼 3황자 역시 가만히 있지 않겠군요."

"그렇습니다. 둘만의 싸움에 3황자까지 끼어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 모두가 그들의 어머니들에게서 파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다. 현수는 지금 황궁의 상황이 꼭 그 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들의 세력 분포를 아십니까?"

미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잘 모릅니다만, 대신 황궁의 세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랑은 황궁의 모든 세력을 현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먼저 최상위에는 황제가 있습니다. 그 밑으로는 3명의 황자와 2명의 군주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곁에는 희빈들이 있습니다. 지금 있는 황후의 몸에서 태어난 것은 영취 군주인데, 그녀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황후 역시 황자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뒤로 물러나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 그 누구도 황후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황후이기 때문입니다."

현수는 미랑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고 있었다.

"집권의 중심에는 내각과 환관이 있습니다."

"내각과 환관?"

"그렇습니다. 먼저 내각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본시 내각은 국정을 총괄하는 황제를 보좌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전각대학사라는 직책을 만들어 전국의 관리를 통솔하게 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현수는 전국의 관리들을 통솔하기 위해 만든 전각대학사가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랑 님, 조금 생소합니다. 나라에서 관리를 관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관리들이 모두 한곳 출신입니다. 아버님께서는 혹시 천유 서림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들치고 천유 서림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천유 서림은 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하나 천유 서림은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배우고 나오는 것은 더 힘들었다.

천에서 관직을 원한다면 천유 서림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천유 서림의 학자들이 대거 관직에 오르며 그들만의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이 나라는 천유 서림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현수는 그때서야 미랑의 말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황제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시고 그들에게 집중된 과도한 권력을 막고자, 정4품의 관직으로 제한하셨습니다. 하나 천유 서림의 학자들을 무시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 세 황자들 중에 천유 서림과 관계를 가진 황자가 있을 것입니다."

'음! 그 정도의 세력이라면 파리가 안 날아들 수 없겠지. 천유 서림이라!'

미랑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다음에는 환관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환관의 세력이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알 안 달린 친구들이 가장 강하다고?'

"환관의 정점에는 지금의 현의태감인 왕평이라는 환관이 있습니다. 황제는 내각을 견제하기 위해 환관에게 많은 권력을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황궁의 정보를 담당하는 금의위와 동창이 환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그들이 남의 비리를 잡고 위협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음! 치사한 놈들이네요."

"하지만 환관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환관들 역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자 3명의 황자들 중 1명에게 붙었을 것입니다."

"그렇겠군요. 자고로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은 그 달콤함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드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다음으로 큰 세력인 군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랑은 군부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는 그 외 천밀위나 지밀원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모든 말을 다 들은 현수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그냥 돌아가십시오."

미랑은 현수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재미있네. 불알 달리지 않은 친구들이 조금 걸리는군."

그때,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냐!"

파앗!

"흥! 놓칠 줄 알고!"

현수는 창문을 넘어 달아나는 자의 뒤를 쫓았다. 빠른 경공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수에게는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거리가 좁혀지자 현수의 검이 움직였다.

"뇌전류!"

슈슈슈슈!

"윽!"

도망가던 사내는 뇌전류를 어깨에 맞고 땅으로 떨어졌다. 현수는 그의 앞에 내려섰다.

"꼬락서니를 보니 금의위겠군. 그래, 어디까지 들었지?"

"네놈이… 윽!"

현수의 발이 사내의 얼굴을 강타했다. 사내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일어섰다.

"내가 누군지 알고도 이러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뒤가 있는 놈이 분명하군."

"그래? 내 뒤에 누가 있는데?"

사내는 갑자기 현수를 향해 검을 뽑아 들어 공격했다.

현수는 놈을 비웃으며 몸을 옆으로 피하고는 주먹으로 사내의 얼굴을 또 한 번 가격했다.

"윽!"

"이봐! 말하기 싫으면 그냥 죽어. 나 역시 물어보기 귀찮으니까."

현수는 사내를 향해 검을 움직였다.

"잠깐!"

"왜?"

"궁녀를 야심한 밤에 끌어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죄인지 아느냐?"

"중죄? 음! 그렇군. 궁녀는 폐하의 여자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나 역시 알고 있는 게 있는걸? 너희들 역시 여자 장사하잖아. 그걸 폐하께 고해바칠까?"

사내는 현수의 말에 흠칫했다.

황궁에서 생활하는 사내들 역시 피가 끓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궁의 사람은 남자건 여자건 모두 황제의 사람이라 허락이 없이는 만날 수가 없다.

궁녀들을 관리하는 제조상궁과 현의태감은 이런 점을 이용해 둘이 짜고서 서로에게 복면을 씌워 끓는 피를 달래 주고는 했다. 서로가 좋아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또한 약점을 잡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컸다.

"또 하나 알고 있는 게 있지. 너희들 중 몇 놈은 거세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현수는 간혹 티브이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이야기한 것에 불과했지만 듣는 이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현수가 말한 내용은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넌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그 실력으로 나를 죽여?"

현수는 조금 어이가 없었는지 그에게 되물었다.

"물론 나 혼자면 힘들겠지만 여기 있는 이들이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

주위에서 나타난 이들은 황궁 자객들이었다. 그들을 본 현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언제?"

"크크크크!"

사내는 일어나서 현수를 보고 웃었다. 현수는 당황한 척하며 물었다.

"하나 물어보자. 이제까지 황궁에서 나타난 자객들은 전부 너희들 일당이냐? 그럼 저들은 동창의 인물들이겠군."

"…이제 죽어라."

자객들이 현수를 향해 검을 움직였다. 쾌속하기 그지없는 검이었지만 운중비록을 따라잡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현수는 자객들의 공격을 피하며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자객들은 빠르게 따라붙었다.

"뇌전류!"

"컥!"

"살황의 일기장, 은신술!"

현수의 신형이 사라지자 모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 정보는 고마웠다. 대충 한번 찔러본 것이었는데 네 덕분에 확신이 섰다. 그 대가로 모두 고통 없이 죽여 주겠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자객들은 모두 긴장했다. 목소리는 들려오지만 방향이 어딘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런 고수였다니!"

번쩍!

빛과 함께 잘려 나가는 머리통은 그들에게 충분히 공포를 느끼게 해 주었다.

"조심해라. 놈은 주위에 있다!"

그들은 영취궁의 자객들을 처리한 것이 평 장군의 자제인 평설중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라는 것을 알았다.

현수는 싸우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궁 안에서 이렇게까지 싸운다면 누군가가 와야 했다. 하나 아무도 근처에 오지 않았다.

'음! 환관들이 황궁을 전반적으로 장악했다는 말이군.'

-레벨 업을 하였습니다.

현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들을 처리했다.

그렇게 모두를 죽이고 나서야 현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재미있군. 경험치도 올리고 말이야. 후후! 미랑 님이 완전히 성장하고 나면 뭘 할까 고민했는데 잘됐군. 그나저나 찔러본 것이 맞아떨어졌단 말이야. 중국 역사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겠는데."

현수는 처소로 돌아와 접속을 종료했다. 지금 황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잘만 이용하면 진짜 황궁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수는 황궁의 힘을 얻기 위해서 야와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관의 힘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현수 님께서 천에서 느낀 것과 같이, 지금까지의 역사를 거슬러 살펴보면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 그럼 역사서에 그들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을 것 아니야. 나라가 바뀌고 왕조가 바뀌었으니 말이야."

-당연합니다. 환관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또 그와 반대되는 세력이 생겨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점점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있는 천이었다.

왕조의 몰락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환관들의 권력조차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하니, 진짜 역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야, 그럼 천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마 일어날 것입니다. 현수 님께서는 NPC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들은 천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천에서도 역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나도 황궁의 힘을 얻으려면 줄을 잘 서야 되겠네?"

-그렇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황자들의 편을 들 것이 아니라, 황제의 편에 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늙은 황제의 편에 서라는 야의 말에 현수는 그 이유를 물었다. 이왕이면 황제가 밀어주는 2황자의 편에 서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야, 황제보다 황제가 다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는 2황자의 편에 줄을 서는 게 더 좋은 것 아니야? 비슷한 나이라 말도 통할 거고, 또 어차피 황제의 편에 서나 2황자의 편에 서나 같을 것 아니야."

-아닙니다. 크게 보면 같을지 모르나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현수는 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현수는 야에게 묻는 방법을 사용했다.

"어떻게?"

-사람의 머리는 쓰라고 있는 것입니다. 현수 님께서는 머리를 전혀 쓰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저의 책임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현수는 잠시 야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머리는 장식이 아닙니다. 그러니 현수 님께서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왜 2황자의 편이 아니라 황제의 편에 서라고 했는지.

야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현수는 야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너, 지금 나 욕한 거지? 내 머리는 액세서리라고."

-제가 미개인입니까? 전 욕할 줄 모릅니다.

현수는 야를 노려볼 뿐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인간도 아닌 컴퓨터에게까지 무시당하고 사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다.

"휴! 말을 말자. 나 나갔다 올게."

-다녀오십시오.

현수는 가벼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집의 문 앞에서 명월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어디 나가시는 길인가 봐요?"

"네! 운동 좀 하고 오려고요."

가벼운 인사를 나눈 현수는 그냥 대문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저씨!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네? 그게……."

"아니에요. 운동 열심히 하고 오세요. 그리고 한집에 사는데, 앞으로 자주 봐요."

현수는 고개를 숙이고는 근처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조깅을 30분쯤 하다가 가까운 목욕탕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는 시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현실감을 강조했으니 옛날의 일을 토대로 만들었을 거야.'

현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역사책을 훑어보았다. 천에서는 몰라도, 현실에서 책은 현수에게 수면제의 역할을 확실히 했다.

"저기요, 이봐요."

현수는 감긴 눈을 뜨며 자신을 깨우는 사람을 보았다.

"누구세요?"

현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때서야 자신이 도서관에 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이 조금 부족해서 졸았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코까지 골며 주무시는 것을 보면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네요. 밖에서 잠시 바람을 쐬고 들어오는 것이 어떠세요?"

현수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 쪽 다 팔았다. 천에서는 책 보는 것이 즐거운데 현실에선 아닌가 보구나. 그나저나 어떻게 다시 들어가지? 그냥 집에 갈까?'

혼자서 생각하고 있는데 현수의 눈앞에 캔 커피가 보였다.

"어?"

"드세요."

자신을 깨워 준 그녀였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아, 예. 감사합니다."

현수는 커피를 받고 그녀를 보았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근데, 혹시 저 아세요? 안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요? 저도 그런데. 제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았어요.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천에서는 구십구 번을 보았지요. 혹시 가상현실 천을 하세요?"

현수는 구십구 번이라는 말에 그녀를 자세히 보았다. 구십구 번이라는 지겨운 악연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아이디가 하나 떠올랐다.

"그럼 혹시 아란이라는 아이디를 가지신……?"

"네! 제가 그 아란이 맞아요. 혹시나 했는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일마 이현수 씨."

수빈이었다. 시립 도서관은 BS 그룹의 사회사업 중 하나로, 그룹에서 도서관을 짓는 경비의 70%를 내어 만들어졌다. 수빈은 1달에 한 번 도서관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과 그 외의 일들 때문에 이곳에 들른다.

"미안해요. 천에서는……."

"아니에요. 그나저나 현수 씨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조금 생소하군요. 베타 시절처럼 게임만 하는 줄 알았는데."

현수는 할 말이 없었다. 수빈뿐만 아니고 베타를 경험한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실제로도 현수는 베타 시절에 게임만 했다.

"역사책을 보는 것 같던데요?"

"네! 천을 보다 재미있게 즐기려고요."

수빈은 조금 이상해서 되물었다. 천을 즐기는 것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과거를 보아서 황궁에 들어갔거든요. 천 역시 현실과 비슷하니 역사와 관계있지 않을까 해서요."

수빈은 현수를 다르게 보았다. 그냥 게임으로 먹고사는 백수 중 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궁금해졌다. 과연 지금까지 흘러온 인간의 역사와 천이 관계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요? 그래서 성과는 있었나요?"

"조금요. 환관의 권력이라든지 내각의 권력 등이 비슷하거든요. 어떻게 하면 황궁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까지도요. 혹시 천을 하세요?"

"아니요. 이제 안 해요. 현수 씨에게 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어 하기가 싫어지더라고요."

"미안해요."

"호호! 아니에요. 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 못 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요."

수빈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현수는 손에 들린 캔 커피를 마저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미안해서 다시 못 들어가겠네. 그냥 야에게 물어보아야겠다."

현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야와 이야기를 나눈 현수는 다시 천에 접속을 하기 위해 접속기의 장비들을 챙겼다.

"황제의 편이라……. 야의 말을 듣고서 잘못된 적은 한 번도 없으니 이번에도 야의 말을 들어야겠지. 천 접속!"

현수는 천에 접속을 하며 황제와 가까워지는 방법들을 생각했다.

"좋아. 정확한 정보 수집이 먼저다."

현수는 듣는 것보다 직접 체험하기로 하고는 자신의 방을 나섰다.

"어디 나가십니까?"

"미령이구나. 내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

그길로 현수가 찾아간 곳은 지밀원의 무사들이 사용하는 연무장이었다.

탓!

지밀원의 무사들이 연습을 하는 것이 보였다. 화산의 무사들이 연무장에서 무공 수련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모두 고수들이라 그런지 조금은 산만하게 보였다.

"음! 고수들이라 다른가 보네."

"이곳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그대는 돌아가라."

현수의 앞을 막은 사람은 설중이었다.

'핏! 뭐, 대단한 무공이라고 이리 보여 주기 싫어하는지.'

현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한참을 걸어 다녀 보니 정원이 잘 가꾸어진 궁이 보였다.

"음! 여기가 3황자의 궁인 영민궁이구나. 3황자는 꽃을 좋아하나 보군."

아무리 황궁에서 생활을 한다 해도 황자궁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현수는 발길을 돌렸다.

"나리!"

"누구?"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현수는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궁녀를 볼 수 있었다.

"황자 저하께서 나리를 청하십니다."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녀를 따라 황자궁으로 들어갔다. 화원의 사이에 나 있는 조그만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정자가 하나 보였다. 정자 위에는 2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게."

"신, 이현수! 3황자 저하를 뵈옵니다."

"이리 와서 앉으시게나."

현수는 자리를 권하는 3황자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우린 초면이군. 난 영민이라고 하네. 알고 있다시피 3황자지. 그리고 이쪽은 난화, 나의 여동생이지."

현수는 일어나 또 한 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신, 이현수가 난화 군주님을 뵙습니다."

"하하! 그래, 그대는 이곳에 왔으면서 왜 그냥 돌아가려 했는가?"

현수는 생각보다 소탈하게 느껴지는 3황자를 보았다.

'음! 만일 자신의 내심을 숨길 수 있는 거라면 일대 효웅이 분명하다.'

"사실 폐하께서 명하신 팔자영법을 수련하려고 지밀원의 연무장을 찾아갔다가 쫓겨났습니다. 그냥 발길 닫는 대로 걷다 이곳까지 왔습니다. 황자궁은 허락 없이 출입을 할 수 없기에 발길을 돌리려 했습니다."

"영민 오라버니, 이분이 과거에서 장원을 하신 분이신가요?"

"그렇다. 또한 상당한 무공 고수이시지. 하하! 그러고 보니 난화 군주가 제대로 된 적수를 찾은 것 같구나."

현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이 공! 사실 난화 군주는 황족 제일의 재녀일세. 3일이 멀다 하고 글 선생들을 돌려보내곤 했다네. 자네 역시 문에는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이 공, 우리 난화를 위해 시 한 수만 읊어 주게나."

현수는 잠시 당황했다. 3황자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현수는 알고 있는 노래 가사들을 모두 생각했다. 그러나 뾰족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귀를 어지럽힐까 두렵습니다."

"하하! 그대와 같은 이가 귀를 어지럽힌다면 누가 있어 시를 한 수 들려주겠는가?"

"부탁합니다."

현수는 조금 생각을 하다가 한번 찔러보자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동녘의 하늘 저편에 동이 트면

길을 찾아 떠나는 철새처럼

마음 줄 곳을 찾아 떠나리라

마음 줄 곳을 찾아 날개를 접어

기쁨으로 맞으리라

생은 무엇이고 삶은 또 무엇인가

날 알아주고 날 반기는 그곳에서

천년만년 임 오실 날을 기다리리

현수의 시를 들은 3황자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하하! 그대의 마음을 잘 알려 주는 것 같구나. 난화야! 시를 들었으니 답을 해 주어야지."

난화 군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곧 조용한 음색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 마음 줄 곳 어디 있고

이 마음 줄 곳 또한 어디 있소

마음 편한 곳, 그곳에

그대 마음을 내려놓으시구려!

마음 편한 곳 그곳에서

그리운 사람 그리워하며

세상 시름 잊고 사시오

세상 편한 곳

내 마음 편한 곳이면 되지 않소

난화 군주의 시가 끝났다. 3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난화의 시가 참으로 적절하구나. 나의 동생인 난화의 시가 어떠한가?"

현수는 잠시 당황했다.

'자신의 편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인가? 나의 실력을 알고 있다면 필시 금의위나 동창이다. 그럼 환관들이 3황자의 뒤에 있다는 말이군.'

현수는 자신을 감시하던 자를 죽인 것을 생각했다.

"참으로 듣기가 좋은 것 같습니다. 소신이 군주님을 따라가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옵니다, 저하!"

"하하! 오늘은 즐겁구나. 그대는 한 잔 받으라."

3황자는 현수에게 술을 따라 주고는 담소를 계속해서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현수는 3황자에게 빠져 들었다. 만일 현수가 황궁의 상황을 아무것도 모른다면 3황자를 위해 일을 했을 정도로.

밤이 깊어지자 현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갔다.

"난화야, 넌 이 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난화 군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라버니 역시 짐작했을 것입니다. 이 공이 읊은 시를 유추해 보면, 그는 아마 황궁에서 일고 있는 기운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역시 개인의 영달을 찾고자 황궁에 들어왔으니 아마 누구의 편에 줄을 대려고 하겠지요. 지밀원의 이야기는 오라버니를 만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뜻을 오라버니에게 전하는 것을 보면, 아마 이 공 역시 황궁에 대한 조사가 다 끝났을 겁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하! 지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당돌한 놈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구나."

"그만큼 무서운 심계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오라버니. 끌어들일 수 없다면 그 누구의 편에도 서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조금 더 지켜보자꾸나."

두 사람은 이렇게 결정을 하고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건은 수아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레벨이 비슷해 함께 사냥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또 현실에서도 사귀기로 이야기가 되어 지금은 연인 사이로 발전된 상태였다.

"안 힘들어?"

"응! 오빠랑 있으면 안 힘들어요."

두 사람은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팔짱을 끼고는 좁은 산길을 걷고 있었다.

"오빠! 근데 왜 소림으로 가세요? 소림에는 몬스터가 없잖아요."

"아니, 있어.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나와 현수 그리고 몇몇은 알고 있지. 소림 안에 또 하나의 소림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또 하나의 소림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몬스터야. 아직 확실치 않아서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는데, 베타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어서 확인차 들르는 거야."

수아는 새로운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그럼 숨겨진 던전이란 말인가요?"

"글쎄? 숨겨진 던전이라고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소림에 몬스터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찾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그렇겠네요. 그런데 그 소림 안의 소림이라는 곳에 있는 몬스터는 강한가요?"

건은 베타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몬스터 레벨이 최하 50이나 되는 고수들이었다.

"소림 안의 소림을 밀소림이라고 해. 그곳의 몬스터들은 최하 레벨 50대의 고수들이야. 우리 레벨이 60대이니 크게 긴장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을 거야."

건과 수아는 밀소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산을 올랐다.

눈에 들어오는 소림의 편액 글자는 실로 힘차 보였다.

"저기가 소림이지. 하지만 밀소림은 소림사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쪽의 소실봉 끝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참마동이라는 곳에 있지."

"참마동이오?"

"그래. 전대 마두를 잡아 가두어 참회를 시키는 곳이라고 하면 쉽겠구나."

수아는 건과 함께 다니면 다닐수록 천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혼자서 많은 여행을 다니고 또 무수한 몬스터를 사냥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은 지극히 일부분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건과 수아는 참마동 앞에서 잠시 앉아 쉬었다. 수아는 건에게 기대었다. 건은 항상 사냥을 하기 전에 앉아서 쉬는 것이 버릇이었다.

"저기, 오빠?"

"왜?"

"저 있잖아요, 오빠에 대해 집에 이야기했어요."

순간 건의 표정이 바뀌었다. 수아는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런 수아를 본 건은 수아의 부모님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금했다.

"그래? 부모님께서 뭐라고 하셔?"

"사실 저 오빠에게 거짓말한 게 있는데 용서해 줄래요?"

"뭔데?"

수아는 건을 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건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우리 집, 조금 잘살아요. 전에 제가 생선 가게 한다고 했잖아요. 사실은 원양어업을 하는 회사예요. 대한 수산."

대한 수산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첫 번째로 큰 수산 회사였다. 건은 대한 수산이라는 말에 조금 흠칫했다. 한국에서 현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회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 대단하네, 우리 수아? 그럼 오빠가 봉 잡은 거야?"

내심 당황한 건이었다. 하지만 수아에게는 표 내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오빠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아빠가 물어보시기에 그냥 제 마음대로 이야기했어요. 미안해요, 마음대로 이야기해서."

건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건 역시 수아가 좋지만 수아네 부모님을 속여 가며 만날 생각은 없었다.

건은 같은 수준의 사람끼리 만나서 결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다면 더더욱 잘못된 만남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수아는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래? 그럼 수아가 오빠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이야기해 줄래? 그래야 오빠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력하지."

"그게, 오빠가… 그러니까 뭐라고 했냐면, 그냥 사법 고시를 준비한다고 했어요. 미안해요, 오빠! 생각나는 게 그것뿐이었어요."

건은 수아의 말을 듣고 조금 당황했다.

"음! 그건 조금 힘들겠는데?"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건이었다. 수아 역시 자신이 이야기를 해 놓고도 후회를 많이 하고 있었다. 그 많고 많은 것들 중에 왜 하필이면 사법 고시를 준비한다고 말했을까.

"미안해요. 그리고 부모님께서 오빠를 집에 한번 데리고 오라고 하시는데,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어떡하긴, 그냥 만나 뵙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지. 그런 일이 있으면 오빠에게 이야기를 하지 그랬어. 그러면 이런 실수 안 하잖아. 언제 오라고 하셨어?"

"미안해요. 아빠가 오늘 한번 보자고 하시던데……."

건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조금은 화가 나기도 했다.

"오빠! 미안해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는 수아를 본 건은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수아야, 사람은 있잖아. 가끔은 상대방의 사정도 존중해야 돼. 혹시 내가 다른 일이 있어 오늘 약속을 못 지키면 어떻게 되겠어?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 때 그 속에서 믿음이 생기는 거야. 오늘은 수아가 잘못했다."

"미안해요, 오빠. 다시는 안 그럴게요!"

"수아야, 사냥은 다음에 하고 일단 현실에서 만나자. 그래도 수아의 부모님을 뵈러 가는데, 때는 빼고 가야지. 아버님께서 뭐 좋아하시는 것 없어? 선물이라도 들고 가야지."

"술을 좋아하세요. 아빠는 항상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이 마셨다는 술만 드세요."

"그래, 알았다. 그리고 수아, 너! 이번에 잘 넘어가면 오빠에게 밥 한 끼 사라."

"네! 그렇게 할게요."

접속을 해제한 건은 먼저 샤워를 했다. 그러고는 서재로 가서 자신의 앨범을 꺼냈다. 앨범의 겉에 한국 대학교 법학과라고 적혀 있었다.

"후후! 오랜만에 보는군. 내가 법대를 나온 것은 어떻게 알고. 일단 아버지를 만나야겠다."

건은 옷을 갈아입고는 차를 몰아 집을 벗어났다.

건이 간 곳은 명성 백화점이었다. 건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랑과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31층 부탁합니다."

안내양은 조금 어리둥절한지 다시 물었다. 31층은 백화점의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었다.

"손님! 죄송합니다. 몇 층이라고 하셨습니까?"

"31층입니다."

"그곳은 백화점의 관계자만 출입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네. 사장님 좀 만나 뵈려고 왔습니다. 괜찮으니 이제 올라갔으면 합니다."

"손님,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예쁜 아가씨.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전 이 백화점 사장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랍니다. 그러니 그냥 올라가 주세요."

백화점 사장의 아들이라 말하는 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안내양은 31층을 눌렀다.

"정말 사장님의 아드님이신가요? 그럼 반대쪽의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는 게……?"

"전 백화점 직원이 아닙니다."

띵!

문이 열렸다. 건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안내원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죠? 가슴에 명찰이 없는데요?"

"아! 저기, 이거 다른 사람한테 말씀하시면 안 되는데……."

안내원은 조금 당황하며 가슴 위의 주머니 속에 있던 명찰을 빼서 달았다.

"아! 현진 씨군요. 고마워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건은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가,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했다. 건은 책상에 앉아 있던 비서에게 물었다.

"저기, 사장님 계신가요?"

"어? 건이 오빠!"

"안녕하세요? 아버지 계세요?"

"네, 계세요.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저기압이세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침에 사모님과 말다툼을 하셨나 봐요."

건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사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버지!"

"어, 왔냐?"

"어머니와 싸우셨어요?"

"아니다, 싸우긴. 그냥 사소한 말다툼을 한 것뿐이란다."

그 사소한 말다툼의 내용이라는 게 조금 황당했다.

건의 나이는 서른 살. 건의 부모님이 건을 낳으셨을 때 아버지의 나이가 스물한 살이었다. 사고를 치는 바람에 건을 일찍 낳은 것이다.

그간에는 일 때문에 건의 동생을 낳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건의 동생을 하나 갖자고 말했다가 싸운 모양이었다.

"아버지도 참! 어머니 나이가 있으시잖아요."

"야! 아이하고 나이는 아무 상관 없다. 그리고 네 엄마 나이는 마흔여덟밖에 안 됐어. 아직 청춘이야."

"참! 아버지, 괜히 아기 가질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입양하세요."

"싫다. 난 꼭 네 동생을 만들 거다. 그런데 왜 왔어?"

"혹시 대한 수산에 대해서 아세요?"

건의 아버지는 '네가 대한 수산을 어떻게 알아?'라는 눈으로 건을 보았다.

"알지. 왜, 그 짠돌이 회사에 무슨 일 있냐?"

"아니요. 사귀는 사람이 그 회사 회장의 딸이라고 해서, 그냥 아버지께서 아시는가 하고 여쭤 본 거예요."

"대한 수산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지. …잠깐, 뭐? 대한 수산의 진 회장 딸과 사귄다고?"

"아세요?"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 어르신은 짠돌이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래도 사회복지사업을 많이 하시는 분으로 소문이 나 있다. 그래,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지. 근데 아들! 너 사귀는 애가 그 어르신의 딸이야? 그럼 봉은 봉인데 잡기 힘든 봉이구나."

"우리하고 비교하면 어때요?"

"새 발의 피지. 우리가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전 세계를 상대로 생선을 파는 가게와 구멍가게는 차이가 있다."

"그래요? 음… 그럼 인사만 하고 올까요?"

"왜? 한번 만나자고 해? 언제?"

"오늘요. 그냥 인사만 하고 올게요. 참! 아버지, 시바스 리갈이 한 병 필요해요. 오래된 걸로."

시바스 리갈은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마시던 양주였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좋아했던 술은 바로 막걸리였다. 차마 선물을 하는 술로 막걸리를 가져가기가 뭣해 양주를 생각한 건이었다. 건의 아버지 역시 시바스 리갈을 즐겨 마시는 편이었다.

"왜?"

"선물로 준비하게요."

"알았다. 기다려라."

건의 아버지는 금고에 숨겨 놓았던 시바스 리갈을 한 병 꺼냈다.

"이건 우리나라에 네 병뿐인 술이다."

아버지는 시바스 리갈을 건네주며 아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양주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비싼 것은 당연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사무실을 나가는 건을 보며 조금은 아쉬워하는 아버지였다. 자신의 아들이 아무리 사법고시를 2차까지 패스하고 마지막을 남겨 두고 있다지만, 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가는 건의 뒷모습을 본 건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구나, 건아. 최소한 너만큼은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아무런 문제 없는 결혼을 시키려고 했는데, 이번엔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구나. 그래도 힘내라, 아들아."

건의 아버지 역시 건의 어머니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 굉장한 고생을 했다. 그가 스무 살 때 건의 어머니는 열여덟 살, 고 3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좋아하니 졸업하면 결혼을 시켜 달라고 말했다가 반대에 부딪쳤다. 건의 아버지는 할 수 없이 건의 어머니와 야반도주를 하는 해프닝까지 벌였다. 그리고 건의 어머니가 건을 가지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친정에서는 건의 아버지를 아직도 미워하고 있었다. 고 3이 아이를 가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 때문에 건의 아버지는 평생 동안 죄인처럼 건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백화점에서 나온 건은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함께 수아의 아버지를 뵙기 위해 수아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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