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이 되다
현수는 구미호가 죽은 뒤부터 천에 접속을 하지 않았다. 아니 천을 하기가 싫었다.
현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방에 보이는 것은 술병이 전부였다. 현수는 비닐봉지에서 술을 꺼내어 뚜껑을 열고는 병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현수야, 현수야. 정신을 차려라.'
현수 역시 냉정하게 생각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생각나는 구미호였다.
현수는 구미호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술이 떨어지자 다시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들어오는 현수의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또 술입니까?
"그래."
-건 님께서 찾아오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현수는 몸을 돌렸다.
-현수 님! 이제 잊어버리십시오. 어차피 게임 속의 인물입니다.
현수의 눈초리가 조금 올라갔다.
"야! 너, 그 말 하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해야겠습니다. 현수 님의 건강 상태가 지금 어떤지 아십니까? 현수 님 혼자 아픈 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남해 고향에 계신 어머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 마!"
현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현수 님의 모습을 보신다면 쓰러지실 것입니다.
꽝!
현수는 전화기를 야에게 던져 버렸다.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현수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제발! 야! 나 정말 미치겠다. 미안하다. 이게 내 마음이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 나이 서른 살이야. 근데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 여자가 좋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 너의 말대로 사람이 아니야. 현실도 아니고 고작 게임이야. 그런데 있잖아, 그런데 내가 고작 게임에서 사람도 아닌 구미호를 좋아했어. 아니 사랑했어. 솔직히 사랑이라는 감정, 난 몰라. 그런데 말이야, 야. 함께 있으면 좋아. 그냥 좋아! 알아? 구미호가 웃으면 나도 웃고, 울면 나도 울었어. 그런데 나 때문에 죽었어. 나 때문에 죽었다고."
현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잊으려고 노력도 해 봤어. 그런데 말이야, 그게 안 돼! 내 의지로 구미호를 잊을 수가 없어. 야! 넌 사람이 아니라 지금 나의 기분을 모르겠지만, 나 솔직히 죽으려고 했어. 바보라고 해도 좋고 멍청이라고 해도 좋아. 그런데 야! 너도 알잖아. 우리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때문에 나 그냥 마지못해 살고 있어. 알아? 야, 너는 진짜 이러는 내 마음 모른다."
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 지금 힘들어. 그러니 그냥 있어 줄래?"
현수는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건이 현수의 집으로 찾아왔다. 건이라면 현수의 마음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 생각해, 야가 연락을 한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건 님!
"현수는?"
-방에서 줄곧 술만 마시고 계십니다. 건 님께서 현수 님을 좀 말려 주십시오.
"그래, 알았다. 야, 고생이 많다. 지랄 같은 주인하고 생활하느라."
건이 현수의 방문을 열었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술병 때문에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잘한다. 혼자 궁상떠니 좋냐?"
"왜 왔어?"
"그냥. 너 혼자 궁상떨고 있을까 싶어서."
건은 현수의 옆에 앉아 벽에 기대었다. 그러고는 소주병을 따고 역시 병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역시 술은 시원한 소주지."
현수는 건을 보며 웃고는 술을 들이켰다.
"그냥 아무 말 말고 술 마시다 가."
"병신. 고작 이 모습을 보려고 왔겠냐? 일어나라. 나랑 나가자."
"싫다. 그냥 가라."
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현수를 실망스럽다는 눈으로 보았다.
"그래, 갈게. 하지만 할 말은 하고 가지. 난 말이야, 최소한 일마 이현수라는 사내가 여자 때문에 이렇게 지낼 줄은 몰랐다."
현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야에게 대충 들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라고 본다. 물론 너의 입장도 이해한다. 그렇지만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말이야. 최소한 복수는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야? 너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녀를 죽인, 아니 공격을 한 이들이 있을 거 아냐? 내가 아는 일마 이현수는 최소한 그런 놈으로 알고 있다. 받은 것을 열 배, 백 배로 갚아 주는 그런 사내,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러섬이 없는 저돌적인 그런 사내 말이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야?"
현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현실이라면 복수하는 것이 힘들지도 모르지. 하지만 천에서는 가능하다고 본다. 누가 있어 일마 이현수의 손을 피해 갈 수 있을까? 넌 그 정도의 능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놈이다. 함께할 괴물 같은 친구들도 있다. 설령 무림 전체가 적이라고 해도 이길 수 있는 그런 친구들 말이다."
"아아아아아!"
현수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 실컷 울어라. 천에서 보자."
그 말을 남긴 건은 현수의 방에서 나갔다.
현수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마치 구미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손에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가 욕실로 들어갔다.
-건 님!
"그냥 있어. 곧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그리고 현수에게 잘해 줘. 비록 게임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작 게임의 NPC인데 말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천 안에서는 그들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지. 더욱이 현수는 천을 하고 나서부터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르지. 나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건 님.
"뭐! 친구잖아. 저런 찔찔이 같은 놈을 친구로 둔 내 탓이지."
건이 돌아갔다.
욕실에서는 한참 동안 물소리가 들렸다.
현수가 욕실에서 나왔다.
"야!"
-말씀하십시오.
"앞으로 이런 짓 하지 마."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하지 마. 그리고 부탁이 있다. 구미호의 레이드를 주선한 놈을 찾아 줘! 또한 레이드에 참석한 이들까지."
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탁한다. 아가씨를 찾아 줘! 분명 나와 약속을 했다. 다시 만나기로. 그리고……."
현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구미호는 천에서 환생을 했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현수는 들어가려는 걸음을 멈추었다.
-구미호는 분명 환생을 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더 이상은 야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현수는 천천히 야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다, 야!"
현수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다음 날, 현수는 불러도 말이 없는 야가 걱정이 되어 컴퓨터 수리를 의뢰하고는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딩동! 딩동!
현수가 문을 열어 주자 컴퓨터 수리 기사가 들어와 이것저것을 물어보고는 야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는 듯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기사가 가는 것을 보고 문을 잠근 현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한쪽에 치워 놓은 천의 접속기를 꺼내었다.
손질을 하기 시작한 현수는 한참이 지나서야 접속기를 다시 한쪽으로 치워 놓았다.
"야!"
대답이 없는 야를 부르는 현수였다.
"야! 너 이상이 없다고 하잖아. …정말! 이제 말 안 할 거야? 야!"
현수는 소리를 질렀다.
-현수 님은 잠도 없습니까? 왜 자는 저를 깨우십니까?
순간 현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야와 다시 이야기를 하면 잘못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야의 말에 순간 멍해진 현수였다.
-현수 님께서 저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천에 접속해서 팔미호를 찾든 구미호를 찾든 알아서 하십시오. 전 잠 좀 자야겠습니다.
자신의 할 말만 해 버리고는 다시 조용해지는 야였다.
"하하하! 그래, 알았다. …야, 고맙다."
현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천에 접속을 했다. 밖에서 나는 야의 소리를 현수는 듣지 못했다.
-알고 있습니다. 현수 님의 마음을……. 현수 님께서 저를 얼마나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고맙습니다, 현수 님!
* * *
한동안 천에 접속하지 않았던 현수는 구미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천에 들어갔지만, 그에게는 천의 세상이 너무 낯설게만 보였다.
"상태 창 오픈!"
이름 : 이현수 레벨 : 9
직업 : 무 체력 : 220
기력 : 360 공격력 : 10
방어력 : 10 순발력 : 10
민첩성 : 28 인내 : 55
맷집 : 68 NPC와의 호감도 : 55%
경험치 : 80/100
생활 스킬 : 도축-가죽과 고기를 얻을 수 있다.
"무공 창 오픈!"
운중비록 : 10성
-보법 : 운중난화무, 운중무영보, 운중광속신형보
-경신법 : 운중탄영신, 운중무영신
살황의 일기장 : 10성
-지둔술, 추적술, 탐지술, 은신술, 잠입술(운중비록을 토대로 사용할 수 있음)
-뇌전류 : 기력을 사용해 적에게 타격을 준다. 한 줄기 빛과 같은 빠름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
민첩성 플러스 300%
살황의 일기장에서 공격 무공이라고는 뇌전류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무공 창을 본 현수는 주먹을 쥐었다.
'그래! 시작한다. 아가씨를 찾는다. 그리고 복수 또한 한다. 아가씨는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라 했지만 힘이 생긴 이상 복수를 한다.'
현수는 잃어 가는 투지를 일깨웠다. 천의 하늘이 어느새 석양으로 물들고 있었다.
현수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빼어 허리에 찼다.
"뇌전류!"
빛과 같은 속도로 빠져나온 현수의 검은 석양을 베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였다.
* * *
이제 1레벨만 업을 하면 전직을 할 수 있게 된 현수는 야에게 직업에 대해 상담하고 있었다.
"야, 무엇으로 했으면 좋겠어? 지금 9레벨이니까 1레벨만 더 올리면 1차 전직을 해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무사가 제일 무난하겠지?"
-그냥 내키는 대로 하십시오. 그게 제일 좋습니다. 참고로 1차 전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알아. 무사랑 의원 그리고 서생."
현수 역시 들은 풍월이 있기에 전직을 하는 직업군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무사는 2차 전직을 할 때 보다 세부적으로 나뉩니다. 창, 검, 도, 권으로 나뉘는데, 여기까지는 정파와 사파가 같습니다. 3차 전직에서는 보다 많은 직업으로 세분화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구현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에피소드 2에서 구현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의원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침술을 사용해서 아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의원과 약사, 다시 말하면 체력 회복약이라든지 기력 회복약을 제조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의원으로 나뉩니다.
"회복이라……. 좋군. 서생은 고리타분하겠지?"
-현수 님께서는 '고리타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야! 너 제발 그냥 한 번에 잘 나갈 수 없겠냐?"
현수는 꼭 한 번씩 속을 뒤집는 야를 보고 소리쳤다.
"헛소리 좀 하지 말고 서생에 대해서나 말해 봐!"
-서생으로 전직을 하시면, 2차 전직 때 병법가와 책략가로 전직을 할 수 있습니다. 전직을 하지 않아도 또 다른 길이 있는데, 그것은 황궁에서 과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급제를 할 경우 나라의 관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수 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보입니다.
"과거? 그럼 황궁에 입궁할 수 있단 말이야?"
미랑이 황궁의 시녀로 있다는 것은 구미호의 서찰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또한 황궁에서 줄만 잘 서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 현수 님께서는 황궁 생활을 하실 경우 배알이 뒤틀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야, 이걸 어째? 난 서생으로 전직할 거다. 그래서 수많은 궁녀들과 짝짜꿍하며 살 거야."
구미호는 완전히 성장하기 전까지 인간의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오만 군상의 인간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으로는 황궁이 적격이기에, 구미호들은 완전히 성장하기 전까지 대대로 황궁에서 생활했다.
"야, 그럼 난 1레벨을 올리고 전직하고 올게. 과거 문제를 요점 정리해 봐! 이건 천의 인공지능 컴퓨터와 야 너의 자존심 싸움이야. 누가 더 상급의 컴퓨터인지."
-현수 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더 안쓰러워 보입니다. 그냥 도와 달라고 말씀하십시오.
"야! 너 진짜 고물상에 다시 팔아 버린다."
-전직 잘하십시오. 그럼.
"어찌 갈수록 다루기가 힘들어지냐. 이제 저게 나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놀려고 하네."
방으로 들어가는 현수였다.
-지금 이 모습이 바로 현수 님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수 님을 통해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을 한번 느껴 보고 싶어졌습니다. 복수를 할 수 있게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미 방으로 들어간 현수는 야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다시 접속한 현수는 낙양성을 벗어나려고 했다.
"엇!"
객점의 지붕에 걸려 있는 검은 천이 보였다. 천연회의 모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천연회를 결성할 때 각 성의 객점에 자신을 나타내는 천이 걸리면 약속 장소로 모이기로 했었다. 현수는 객점에서 천을 회수하고는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이게 누구야? 그 이름도 쟁쟁한 사신 낭객 님이 아니신가?"
호들갑을 떨며 현수를 반기는 사람은 역시 최건이었다.
"바보."
"괜찮냐?"
"고맙다."
구체적인 말은 없었지만 둘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모두 모였다. 만남을 주최한 것은 만사귀였다.
"왜 모이라고 했어?"
"빅뉴스가 있어."
"역발산이 아가씨라도 데리고 가입한대?"
가만히 있던 역발산은 눈을 부라리며 현수를 노려보았다.
"사신 낭객이 죽을 자리를 잘 찾아왔구나. 크하하하."
주먹을 쥐고 이리저리 흔드는 역발산이었다.
"조용히 해. 그런 것이 아니야. 이번에 에피소드 2가 업데이트된대. 또한 문파를 공식으로 인정해 주는데, 문제는 정파는 정파만, 사파는 사파의 문파만 생성할 수 있어. 또한 정파와 사파가 같이 문파를 생성할 수 있는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해. 정파나 사파, 어느 쪽에도 가입을 하지 못하는 완전한 중립."
심각한 이야기였다. 현재 천연회의 수는 총 10명. 그중 정파가 5명, 사파가 5명이었다. 현수는 아직 전직을 하지 않았기에 정파와 사파로 나뉘지 않았다.
"큰일이군! 모임 자체가 흔들리겠는데."
"맞아."
중립! 한마디로 심심풀이 땅콩이다. 정파가 사파에 밀리면 화풀이로 중립을, 사파가 정파에 밀렸을 때 또한 화풀이로 중립을 치기 때문이었다. 정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중립을 지키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문제였다.
"힘만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아."
"무식한 놈. 야, 역발산! 이건 힘과는 또 다른 차원이야."
"크하하하하. 난 그런 것 모른다. 나는 오직 힘만이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저놈에게 누가 여자 좀 소개해 줘!"
역발산이 외치는 소리에 모두가 짜증이 났는지 서로 한마디씩 했다.
"그만 하고. 현수 넌 어떻게 생각해?"
현수는 건을 보았다. 그리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옛날 우리의 방식대로 결정하자."
만사귀는 미리 준비했는지 종이를 돌렸다. 한 장씩을 받아 들고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모두 적었지? 다수결이다."
결과는 만장일치! 모두가 중립을 선택했다.
"역시!"
"내 생각을 먼저 말할게."
만사귀는 중립이 된 천연회가 대처할 방법을 말했다.
"좋은데, 다소 걸리는 것이 있다. 첫째는 우리는 소수라는 것, 둘째는 아직 힘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최건은 만사귀의 생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을 말했다.
"알아. 하지만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모두 아이템을 어느 정도 장만했기에 지금부터 치고 나갈 자신이 있다. 다만 문제는 아직 레벨이 약한 현수다."
모두는 현수가 아직 9레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뭐가 걱정이야. 난 말이야, 베타 시절 일마였고 지금은 사신 낭객이야. 누가 날 죽일 수 있겠냐?"
"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구심점은 건과 현수다. 건은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현수 넌 그렇지 못하다. 지금은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죽으러 다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야."
만사귀는 둘의 행보에 천연회의 존재 여부가 달려 있다고 믿었다. 만사귀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수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건을 보았다.
"건! 나와 한번 붙어 볼래?"
"장난하냐, 인마! 넌 한 방에 골로 가!"
"진짜야. 나를 죽이면 너에게 1달치 생활비를 준다. 만약 죽이지 못하면 1달치 생활비를 내게 줘. 어때?"
현수의 호기로 건의 호승심이 발동했다. 또한 베타 시절에 가리지 못한 승부를 가리고 싶었다. 건은 현수가 레벨은 낮지만 저렇게 나올 때는 무엇인가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무공을 사용하겠다. 이것은 과거 일마 이현수, 나의 적수에 대한 예의이다."
"지랄! 나 역시 무공을 사용할 것이니까 덤비기나 해. 참고로 난 9레벨이지만 그냥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왜 내가 죽으러 다니는 기행을 했는지 가르쳐 주지. 혹시나 랭커가 9레벨에게 졌다는 소리 안 들으려면 잘해라!"
모두 현수가 무공을 배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현수의 말이 약간은 기뻤다. 하지만 최건과의 레벨 차이는 무려 50.
"간다. 승천도법 출룡!"
무공명을 말함으로써 그 무공의 모든 초식을 사용할 수 있는 무공과 초식 하나하나를 따로 말해 사용하는 무공,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뉜 것이 정식 서비스에서 달라진 천의 스킬 시스템 중 하나였다.
"아예 죽이려고 작정을 했군.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뇌전류!"
현수는 운중비록에 의해 변화된 자신의 몸을 날렸다.
≪살황의 일기장≫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일초식의 검법을 사용해 맞부딪쳐 나갔다.
콰과과과광!
"크윽!"
현수의 패배였다. 레벨의 벽은 뛰어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무공과 변해 버린 몸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졌군!"
"대단하다. 내가 이긴 이유는 레벨의 차이 때문이다. 너 역시 나와 동 레벨이었으면 이렇게 허무하게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내가 졌을지도 모른다."
최건은 찢어진 자신의 소매를 보았다.
"1달치 생활비는 우리 천연회의 회비로 전환하겠다."
모두가 회비라는 말에 반색을 했다.
"건, 뭔가 잘못 알고 있는데, 나 안 죽었어! 생활비는 내가 아니고 네가 내야 해."
그때서야 모두는 현수가 살아 있다는 것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능성이 있군. 고마워, 건! 중요한 건 레벨의 차이야. 그리고 난 진 것이 아니야. 레벨에 밀렸을 뿐이다. 그 이유는 건의 무공과 맞서 싸웠기 때문이지."
건은 그런 현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죽었다고 느낀 것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 9레벨 맞아. 그리고 건이 네가 약한 거야. 이 일은 이렇게 넘기고, 앞으로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자. 나의 생각을 말하지. 건은 최대한 레벨을 올려라. 일단 천연회의 모든 모임에서 제외한다."
건 역시 현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임에 고수가 1명이라도 있어야 한다. 최고 레벨이 된다면 다른 문파와의 대립에서 먹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 대상이 과거의 일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또한 너희들은 각자의 사냥을 자제하고 파티 플레이로 호흡을 맞추어라."
현수와 건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호흡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두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서생으로 전직을 해서 황궁과의 끈을 만들어 놓겠다."
갑자기 서생이라는 말에 모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현수가 공부와 담을 쌓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서생? 현수가! 푸하하하! 그건 나 역발산이 미스 코리아와 사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씨! 할 수 있어. 꼭 해야 할 일이고. 이건 우리 모임의 존재 여부가 달린 것이니 내 한 몸 희생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너희들 중에 천을 게임으로 생각하는 사람 있어?"
모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은 게임이었다. 하나 천 안의 생활은 현실이었다.
"무림과 관은 별개라고 하지만 그래도 황궁의 힘이 가장 크다. 이 사실에 이견 있는 사람?"
최건과 모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현수는 진지했다.
"황궁에 연을 만드는 것 또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분명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만사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만 현수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각자 한 번씩 갔던 길이니 긴말은 필요 없겠지."
"알겠다. 난 간다. 모두 에피소드 2에서 보자."
최건은 떠나갔다. 현수를 제외한 모두도,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떠났다. 현수 역시 사냥을 해서 레벨을 올리고 전직을 하기 위해 낙양성에 있는 추림 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기, 배움을 얻고자 왔습니다."
"무엇을 배우려고 하느냐?"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옆의 서재로 가서 ≪도덕경≫을 한번 읽어 보아라. 그다음에 용문 석굴로 가서 대왕 멧돼지를 잡아 그 증표로 대왕 멧돼지의 송곳니를 가져오너라."
-퀘스트! 전직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도덕경≫을 한 번 읽고 대왕 멧돼지를 잡아 송곳니를 추림 서원의 원주에게 주어야 합니다.
현수는 서재로 향하면서 서생이 왜 대왕 멧돼지를 잡아야 하는지 이유를 생각했다.
"그나저나 ≪도덕경≫이 어디에 있지."
한참을 찾아 헤맸지만 현수는 ≪도덕경≫이 어느 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문에는 까막눈인 현수는 책을 찾기 위해 서재에서 한참을 헤맸다.
"미치겠네. 한문을 알아야 찾지."
서성이는 현수를 본 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필요한 책이 있으신지요?"
가뭄에 단비를 맞은 듯 사내를 반긴 현수는 그 사내에게 ≪도덕경≫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하하. 바로 앞에 두고 찾으셨습니다."
사내는 현수의 눈앞에 있는 책을 빼어서 건네주고는 다시 자신의 볼일을 보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씨팔. 지가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다고."
표지만 한문일 뿐, 안의 내용은 다행히 한글로 쓰여 있었다. 현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는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하암!"
연방 하품을 해 댄 현수는 어느새 책에 머리를 묻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의 머리다. 너도 기회가 된다면 배우도록 하여라.
현수는 구미호가 자신을 걱정하며 적은 서찰의 내용이 떠올라 눈을 떴다.
"아가씨!"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안 현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혼자 되뇌었다.
"그래요. 할게요. 나 공부할게요. 다음에 아가씨를 만날 때 아가씨가 나를 글도 모르는 무식쟁이라고 놀릴 수도 있으니까 할게요. 이왕이면 최고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현수는 ≪도덕경≫을 다 읽고는 그길로 대왕 멧돼지를 잡으러 용문 석굴 근처로 향했다.
"있냐?"
크르릉. 크르릉!
"아니, 니들 말고, 니들 아빠!"
현수는 마치 대화를 하듯 멧돼지에게 말했다. 그저 장난처럼 말했지만 멧돼지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현수는 멧돼지를 쫓아 달렸다.
"있구나!"
6명의 유저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대왕 멧돼지를 본 어린 멧돼지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구나. 여우들 역시 아가씨가 사람들에게 공격당할 때 이렇게 안절부절못했겠지. 기다려라. 난 기억하고 있으니까. 누가 공격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밤을 무서워하게 될 것이다. 나의 할 일이 끝날 날……."
현수의 눈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순간 살기를 느낀 멧돼지들은 현수의 곁에서 떨어졌다. 현수는 안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쓰고는 어린 멧돼지를 보며 말했다.
"걱정 마라. 나 호면객이 너희 아빠를 구해 주마."
현수가 쓰고 있는 가면은 여우 가면이었다. 살황의 유물 중 하나인 호면은, 착용하고 PK를 하면 카오틱 수치가 올라가지 않는 부가 옵션이 달린 아이템이었다. 현수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였다.
현수는 6명의 유저들에게 조용히 접근해서 검을 뻗었다.
"컥!"
"누가 이를 이렇게 만들었나?"
지극히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한 유저들은 어이가 없었다.
"누구냐! 누군데 우리를 방해하느냐?"
자신들을 공격한 현수의 모습에 잠시 당황한 그들이었지만, 낙양성 필드에서는 PK를 하면 관의 수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리를 쳤다.
"호면객!"
"미친놈, 우리의 일을 방해하지 말고 비켜라."
"그냥 돌아가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들은 이곳에서 죽는다."
현수의 1차 경고를 무시해 버린 그들은 계속해서 대왕 멧돼지를 잡으려고 했다.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릴 인간들이군.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뇌전류!"
순간 현수의 신형이 흐려지며 사라졌다. 그러고는 들리는 비명 소리에 모두 행동을 멈추었다. 현수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는 살기에 유저들은 흠칫했다. 이내 뒤를 돌아 달리는 유저들이었다.
"나 호면객은 모든 여우의 지킴이! 기억해라."
현수는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완전히 사라지자 호면을 벗었다. 대왕 멧돼지에게 달려온 새끼 멧돼지들은 대왕 멧돼지의 상처를 작은 몸으로 감쌌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똑같은 것이군."
현수는 대왕 멧돼지의 송곳니를 잡아당겼다.
쿠에엑! 쿠엑!
"미안, 이것이 필요하거든. 그래도 나 때문에 살았으니 매일반이지. 나 간다."
-전직을 할 수 있습니다. 추림 서원의 원주를 만나세요.
현수는 백마사의 구미호 레어로 향했다. 예전에 대장간 주인에게서 받은 퀘스트를 완료하기 위해 구미호의 발톱을 구해야 했다. 구미호의 레어에 도착한 현수는 안으로 들어갔다.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다만 그곳에 좋아하는 구미호가 없을 뿐이었다. 곳곳에서 구미호의 손길이 느껴졌다.
"미자야!"
미자. 1,000년을 산 구미호 중에 유독 현수를 따르는 여우의 이름이었다. 현수는 그 구미호의 이름을 미자라 지어 버리고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현수 님!"
"잘 있었어? 이제 미랑에게 갈 수 있는 단서를 얻었어. 황궁이라는 곳에 있는데,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곳이야."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모두 그곳에서 성장을 하기에……."
미리 알고 있는 듯 말하는 미자를 보며 현수는 살짝 웃어 주었다.
"나, 구미호의 발톱이 2개 필요한데 줄 수 없어? 이유는 묻지 말고."
황궁으로 가는 것과 자신의 발톱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을 알고 있는 미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앞으로 자신들의 어머니가 될 미랑을 지켜 줄 유일한 사람이며 어머니의 정인인 현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자신의 발톱 2개를 빼어서는 현수에게 주었다. 미자의 발톱이 있던 곳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뭐야, 지금!"
현수는 미자의 발을 잡고 당황했다. 이렇게 자신의 발톱을 통째로 뽑아 줄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냥 발톱을 깎아 조금 떼어 줄 줄 알고 부탁을 한 것인데, 피가 배어 나오는 미자의 발을 보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자야, 누가 이렇게 다 뽑아 달래? 조금만 잘라 주면 되는데. 안 아파? 잠시만."
인벤토리를 열어 상처를 싸맬 천이 있는지 확인을 했다. 다행히 천이 있었다. 오기 전에 객점에서 회수한 천이 보였다.
"바보야, 다시는 그러지 마. 알았지? 이게 뭐야!"
천으로 미자의 발을 감싸고는 알밤을 주었다.
"아앗!"
"하하하. 나 간다."
현수는 그길로 구미호의 레어를 떠나 낙양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대장간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정말 오랜만이죠."
현수를 보고 깜짝 놀라 하던 일을 멈춘 대장간 주인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사실 현수가 없는 동안 고기 구경을 하지 못했다. 내일이면 오겠지, 다음 날이면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제껏 버티고 있던 낙양성의 NPC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NPC들 역시 독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동안 왜 오지 않았느냐?"
"사실은 이것 때문에……."
현수가 내민 것은 미자의 발톱이었다. 고기를 얻기 위해 기다린 대장간 주인은 구미호의 발톱을 보고는 반색을 했다.
"구했구나.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하하하. 다행히 구미호의 발톱이 꼭 필요할 때 구해 와 주었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먼저 할 일부터 하고."
"네!"
-대간장 주인의 부탁을 완수했습니다.
망치 소리가 마치 타악기를 치듯이 경쾌하게 들려왔다.
땅! 땅! 땅아앙, 땅!
현수는 망치 소리에 맞추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소리를 들어 보니 무척 신이 나 있는 모양이네."
한참이 지나서야 나온 대장간 주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하하. 고생했다. 이것은 나의 작은 보상이란다. 자, 받아라!"
대장간 주인이 준 보상은 검이었다. 일반 검이 아닌 매직 급 검이었다. 현수는 보상으로 무기를 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매직 급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또 부탁할 것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힘 닿는 데까지 도와 드릴게요."
"그래. 말이라도 고맙구나, 하하하. 그럼 다음에도 부탁하마."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서생으로 전직을 하게 된 현수는 황궁에서 과거를 치는 날까지 구미호의 레어에서 책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