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가상현실 천을 만들어 서비스를 한 BS 그룹에서 수빈과 천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천! 아직도 찾지 못했나요?"
-그렇습니다, 수빈 님.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아무리 처음에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천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는 것은……."
-죄송합니다. 예전 천의 컴퓨터가 처음에 구축해 놓은 프로그램을 모두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10개의 던전에 관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한…….
BS 그룹에서는 완벽한 현실을 만들고자 기존의 인공지능 컴퓨터보다 상위의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성공했고, 기존의 천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을 지금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수정, 보완을 해, 천을 보다 완벽한 현실로 만들어 서비스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의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분명 프로그램상으로는 존재하고 있지만 찾을 수 없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바로 천의 상위 10위권에 들어가는 무공서의 행방이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상위 10위권 내의 무공서의 행방이었다.
"분명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천이 잘못 보았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닙니다. 분명 천에는 열 권의 무공서가 존재합니다. 천마의 ≪천마신공≫, 무황의 ≪금황신공≫, 도황의 ≪승천도결≫, 검황의 ≪무상검결≫, 권황의 ≪호령무적신권≫, 독황의 ≪독황경≫, 패황신군의 ≪군림패왕권≫, 만사신군의 ≪악마록≫ 그리고 살황의≪살황의 일기장≫과 휘령의 ≪운중비록≫입니다. 이중 ≪살황의 일기장≫과 ≪운중비록≫만이 소재가 파악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유저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미 구미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홈페이지를 통해 알렸습니다.
"문제군요. 누군가 그 무공들을 운 좋게 얻는다면 밸런스가 무너지는 게 아닌가요?"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익히는 사람의 재량에 달린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무공일지라도 익히는 사람의 재질이 부족하면 완성하기 힘든 것이 천의 무공서입니다.
수빈은 한참을 생각했다. 천의 말대로면 그리 염려할 것은 없었다.
"천, 그럼 사부를 모신 사람들 역시 재질이 부족해서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면, 사부가 필요 없지 않을까요?"
-기본적인 무공은 다 익힐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계를 만들었고, 그 한계를 넘기기 위해서는 재질이 뛰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더라도 무공을 사용하고 몬스터를 사냥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몬스터를 사냥해서 습득하는 무공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수빈은 천의 말을 듣고서야 안심을 했다.
수빈은 천이라는 게임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BS 그룹의 후계자 싸움에서 지금껏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천이었기 때문이다.
"에피소드 2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빈 님.
"천, 전 가상현실 천이라는 이 게임에 저의 모든 것을 걸었어요. 그러니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체크를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수빈 님.
수빈은 천과의 대화를 마치고 천이 있는 방을 벗어났다.
* * *
현수는 낙양성을 향해 가는 동안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조금 있으면 구미호와 재회할 거라 생각하니 마냥 기분이 좋았다.
"훨훨 날아가리. 내 사랑이 숨 쉬는 곳으로. 훨훨 저 하늘을 날아서 그대 품에 안기고 싶어. 캬! 좋다."
"미친놈이군."
그때 길을 막고 서는 자들이 있었다. 몬스터 중 녹림단 산적들이었다. 그런데 현수의 반응은 다른 유저들과 조금 달랐다.
"어! 이게 누구야? 산적님들 아니신가."
"헉! 사신 낭객."
"나에게 볼일 있어? 그럼 죽여 주든가. 아니면 나 지금 바쁜데 길을 조금 비켜 주시든지."
기세등등하던 녹림단 산적들이 한쪽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녹림단 역시 사신 낭객의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듯했다.
현수는 소풍 가듯 그들의 사이를 지나가다 무엇인가 생각이 났는지 발걸음을 멈추었다.
"참! 저기, 여자한테 선물을 하려면 뭐가 좋을까?"
"선물?"
"응! 나 지금 여자 만나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러는데 뭐가 좋을까? 알고 있는 것 있으면 가르쳐 줘."
산적들은 현수의 눈치를 보며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고민했다. 자신들 역시 여자에게 선물을 해 본 적이 없어 그 고민은 상당히 오래 갔다.
"그건 비싸니까 그것이 좋아."
"그랬다가 만약 저놈이 영업 방해를 하면 어떻게 해? 너 수로채가 당했다는 말 못 들었어?"
"아니야! 여자는 야시시한 것을 좋아한다니까."
산적들은 의견을 다 나누었는지, 그들의 채주가 현수에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음, 특별한 것이면 좋겠지?"
"응."
"그럼 다년간의 경험으로, 여자의 속옷이 좋을 것 같다."
현수의 눈초리가 올라가는 것을 본 산적들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진짜… 아 씨! 진짜 그게 좋다니까. 그렇다고."
현수 역시 현실에서 친구들이 여자에게 속옷을 선물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많아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보고는 물었다.
"그런가?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나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 정말 그게 좋아? 그럼 무슨 색이 좋을까?"
"그렇다니까. 야시시한 색일수록 좋아하지. 붉은 계통의 색깔이 좋아. 진짜야. 내 여자 친구도 그것 받고 뿅 갔단 말이야."
없는 여자 친구까지 만들어 우기는 채주를 보고 있으니 정말인 것 같은지, 현수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알았어. 고마워."
현수는 발길을 옮기려다 멈추고는 산적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산적들은 그런 현수의 미소가 불길하다고 느꼈다.
"근데 나 돈이 없는데 조금만 주면 안 될까? 그거 비싼 거잖아."
표정이 바뀐 산적들의 얼굴에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아 씨. 다 달라는 것은 아니고, 지금 나에게 이만큼 있으니까 조금만 보태 줘!"
현수는 인벤토리에서 약간의 은전을 꺼내 보여 주며 산적들에게 다가섰다.
"오늘은 영업하지도 못했는데 돈이 어디 있어? 그러지 말고 그냥 가."
"그럼 속옷 이야기는 왜 꺼내? 조금 싼 걸로 말하지."
"그럼 꽃은 어떨까?"
"싫어! 난 속옷으로 결정했어. 그러니까 조금만 보태 줘."
막무가내로 돈을 보태 달라는 현수를 본 산적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기 채주님, 저놈 그냥 죽이자고요. 죽여 주기를 원하는 놈이지 않습니까?"
"킁!"
녹림채 산적들의 채주는 걱정이 되었다. 현수를 죽이는 문제는 그리 쉽게 결정할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듣기로, 수로채 사람들 역시 죽이기를 시도했지만 죽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한 번 시작하면 자신이 죽기 전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져 영업을 못 하는 것은 물론 며칠을 시달린다고 들었다.
"우리가 죽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모두 주머니를 털어 봐!"
"채주님! 우리는 산적인데……."
"시끄러! 대가리 크다고 기어오르지?"
채주의 도끼눈에 그들은 할 수 없이 은전을 거두어 현수에게 주었다.
"고마워. 내가 나중에 너희들 한번 도와줄게. 수로채가 시비 걸면 나에게 말해. 내가 해결해 줄게."
"정말이냐?"
"그래. 그럼 나 간다. 영업 잘하고."
멀어져 가는 현수를 보고는 손을 흔들어 주는 산적들이었다.
"갔다. 소금 뿌려라. 젠장! 첫 손님이 저놈이라니, 재수 옴 붙었어."
현수는 낙양성에 들어가 포목점을 찾아갔다. 포목점의 주인은 현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이게 누구냐! 어디 여행을 다녀온 것이냐?"
포목점 주인은 반갑게 인사하는 현수를 안으로 인도했다.
"저기, 아저씨! 속옷을 사려고 하는데, 남자 거 말고 여자 거… 예쁜 걸로요."
의미심장한 포목점 주인의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현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아랫것을 말하는 것이냐. 위의 것을 말하는 것이냐?"
"에이, 당연히 둘 다지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현수를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진열대로 데리고 간 포목점 주인은 다시 물었다.
"그래, 크기는?"
"크기? 아! 사이즈요? 그러니까… 아! 한 이만큼!"
현수는 손짓으로 가르쳐 주며 구미호에게 줄 속옷을 힘들게 구입했다.
"오늘 밤, 잘 보내거라."
나가는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포목점 주인을 본 현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백마사를 지나 구미호의 레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호 아가씨! 저 왔어요."
반가운 마음에 뛰어 들어가던 현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미호의 레어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구미호는 비록 청소 같은 것을 하지 않지만, 그 밑에 있는 어린 구미호들이 항상 치워 놓고 있어 레어는 언제나 깨끗했다.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현수는 마음이 급해졌다. 혹시나 무슨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바삐 움직였다.
침실, 욕실, 거실의 어디에서도 구미호가 보이지 않았다. 레어를 모두 찾아봐도 없었다. 어린 여우들이나 구미호들 중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누가……."
현수는 주먹을 쥐었다. 입술을 꽉 물었다. 순간 현수의 두 눈에서 진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세상의 모든 이들을 다 죽일 듯한 그런 살기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손에 들려 있는 선물을 보았다.
"맞아!"
생각나는 장소가 한 군데 있었다. 여우는 항상 굴을 2개 파고 산다. 구미호 역시 레어 밑에 또 다른 레어가 있었다. 일종의 대피소 같은 곳이었다.
현수는 구미호의 침실로 가서 침대 밑에 있는 바닥을 열었다.
"제발!"
현수는 그곳으로 내려가서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살기가 느껴졌다.
우우우우-.
"너희들, 무사했구나."
여우들은 그때서야 현수를 알아보고는 살기를 거두었다.
"이제야 오십니까, 현수 님?"
구미호의 호신위인 미자였다.
"그래, 아가씨는? 아가씨는 어떻게 되었어?"
미자는 말없이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현수는 미자의 뒤를 따라갔다.
현수의 눈에 보인 것은 힘없이 누워 있는 구미호와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어린 구미호들 그리고 또 다른 여우들이었다.
"어머니는 괜찮은 거니?"
한쪽으로 비켜서 준 여우들은 현수를 구미호에게 인도했다.
구미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많이 다친 듯한 모습이었다.
현수는 그녀를 보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다가가서 두 손을 꼭 쥐었다.
"저예요, 아가씨. 저 현수예요. 눈을 떠 보세요. 제가 왔어요. 제가 만 번을 죽고 아가씨를 지켜 드리려고 이렇게 왔는데 왜 누워 있어요. 아가씨! 일어나요. 네? 눈을 떠 보세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현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잡고 있던 손이 움직였다. 그 손은 현수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왔느냐."
"아가씨! 괜찮으세요?"
미소를 짓고 있는 구미호를 본 현수 역시 웃었다.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래도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여우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괜찮으세요? 누가 그랬어요? 무림인들이 아가씨를 공격했어요?"
"녀석, 괜찮다."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힘이 없는 듯한 구미호의 목소리를 들은 현수는 마음이 아파 왔다. 현수는 애써 그런 감정을 숨기고는 웃으며 구미호에게 말했다.
"저, 아가씨 드리려고 선물 사 왔어요. 이거 보세요."
현수는 천에 싸여 있는 것을 흔들어 보여 주고는 구미호에게 주었다.
"무엇이냐?"
"헤헤, 풀어 보세요. 산적들이 여자에게 주는 선물로는 이게 최고로 좋은 것이래요."
현수의 선물을 풀어 본 구미호는 내용물을 확인하자 얼굴을 붉혔다.
"어때요? 예뻐요? 포목점 아저씨가 이게 제일 유행하는 거래요. 빨리 완쾌하세요. 그래야 저에게 무공도 가르쳐 주고 저랑 같이 낙양, 아니 이번에는 사천이나 감숙같이 조금 먼 곳도 같이 다니죠. 그때에는 제가 지켜 드릴게요."
신이 나서 떠드는 현수를 본 구미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잠시 나가 있다 들어오너라. 이것을 한번 입어 봐야겠구나."
"정말요? 마음에 드세요?"
"그래. 이제껏 누구에게 선물을 받은 적은 없지만, 처음 받아 보는 선물이라는 게 너무 마음에 드는구나."
현수는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두 손은 아직 힘껏 쥐고 있었다.
"아쉽구나. 너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밤이 찾아왔다.
현수는 구미호와 함께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나를 보아라."
달빛이 비쳐 현수의 눈에 들어온 구미호의 모습은 이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웠다.
"내가 오래전 이야기를 하나 해 주마."
구미호는 오래전에 자신이 한 사람을 사모해 무림에 발을 디딘 것부터 시작해, 배신을 당한 이야기를 현수에게 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사도 진영! 무림에서는 멸마검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지. 그 사람이 마도인들에게 살수를 사용해 붙은 별호였지."
"멋있는 분이시군요."
현수는 구미호가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하자, 왜 그리 질투가 나는지 몰랐다.
"멋있다. 그래. 당시에는 모든 것이 멋이 있었단다. 그래서 난 그를 도와, 그를 죽이려고 하는 이들을 죽였단다. 그러다 난 살황이라는 별호를 얻었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의 계획이었단다."
사도 진영의 계획이라는 말에 놀란 현수가 되물었다.
"네? 그 사람의 계획이라고요?"
"그래. 나를 무림의 공적으로 몰아세워 자신의 명성을 올리고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는 그의 계획이었지."
현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구미호를 보았다.
"그래서 수많은 무인들을 피해 동영으로 가야 했단다. 난 무림에서 행적을 감추었지. 또한 그 사람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그때 사용했던 이름이 휘령이고, 별호가 운중선자였지."
구미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이 보이자 현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자신 쪽으로 당겼다. 머리를 기대 오는 구미호에게서 향기가 났다.
"모든 것이 그 사람의 계획이었어. 그는 마교의 소교주였지. 당시 그자의 손에 죽은 사람들은 인면피구를 사용한 마교의 일반 신도들이었고, 내가 죽였던 인물들은 정파에서 마교에 심어 둔 핵심 첩자를 비롯해, 마교가 무림을 정복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중립의 고수들이었다."
"그 사람 더럽게 나쁜 놈이네요. 살아 있다면 제가 꼭 죽여 줄 텐데."
"그래. 하지만 그 사람 역시 죽었어. 정사 대전 때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구파 수장들의 연수 합격에 의해 시신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한 채 죽었어. 그때부터 좋게만 보이던 세상이 너무도 추악하게 보이더구나. 난 무림을 떠났단다. 그리고 인간을 믿지 않았다."
말을 멈추고 현수를 보는 구미호의 눈에는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데 넌 달랐어."
"헤헤. 제가요? 저도 인간인 걸요. 하지만 전 미호 아가씨가 슬퍼하는 일은 안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 아가씨가 좋아하는 일만 할 거예요."
말을 들은 구미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맙구나. 그래, 만 번을 죽고 무엇을 느꼈느냐?"
현수는 자신이 죽어 온 길을 되짚어 보았다. 멧돼지에서부터 시작해 적룡까지. 하지만 자신이 느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제가 만 번을 죽지 않으면 아가씨가 만 번을 죽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며 그냥 죽기 위해 살았지요. 아! 맞다. 그런데 이 몸은 죽기가 싫은지 알아서 많이 변해 있었어요."
구미호가 현수를 바라보는 눈은 마치 사랑하는 정인을 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참, 아가씨! 제가 적룡에게 죽을 때의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글쎄……."
쉴 새 없이 말하는 현수를 보고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현수와 같이 감정을 나누는 구미호였다.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하자 구미호는 피곤함을 느꼈다.
"조금 누워야겠다."
"그러세요. 제가 이부자리를 봐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현수는 구미호의 침실에 가서 이불을 펴고 자신이 누워 자리를 따뜻하게 했다.
"됐다. 아가씨, 들어오세요."
구미호는 누운 자리에서 현수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항상 자신을 챙겨 주는 현수가 사랑스러웠다.
"녀석!"
"헤헤! 잠자리가 따뜻해야 몸이 빨리 나아요. 쉬세요."
구미호가 나가려는 현수를 불렀다.
"이리 와서 나의 옆에 누워라."
흠칫한 현수는 구미호에게 다가가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일어났다.
"아니에요. 여긴 아가씨 침실이에요. 전 나가서 여우들이랑 같이 있다 내일 올게요."
"아니다. 오늘은 너와 같이 누워 있고 싶구나."
결국 현수는 구미호의 옆으로 다가가서 누웠다. 이상해지는 기분에 현수는 꼭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풋!"
"왜요?"
"아니다. 너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나의 귀에 들리는구나."
"에이, 당연하잖아요. 아가씨는 고수니까 들을 수 있잖아요."
이렇게 변명을 한 현수는 옆으로 돌아누워 구미호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옆으로 몸을 돌려 현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넌 만약에 내가 세상에서 없어지면 어떻게 할 것이냐."
"아마 세상을 다 헤매어서라도 아가씨를 찾을 거 같아요."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다시 태어날 때까지 기다릴 것 같아요. 이 세상이 아니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만약에 내가 누군가의 손에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때 현수의 인상이 변했다. 구미호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현수에게서 서서히 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올 때 아가씨의 집이 어지럽혀져 있는 것을 보았어요. 제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어요. 아가씨! 저에게 물었나요? 아가씨가 다른 사람에게 죽게 된다면,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아가씨를 죽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참혹하게 죽일 거예요. 먼저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을 쓸어버릴 거예요.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일 것이고 그 다음에 그를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그를 저주하게 만들 거예요. 마지막으로 그가 무림인이라면 무림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어 아가씨를 죽인 죄를 묻겠어요."
주저 없이 말하는 현수를 본 구미호는 현수의 순수한 모습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면을 알게 되었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여자구나. 이렇게 든든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니."
"헤헤. 제가 더 행복해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제가 노래 한 곡 불러 드릴까요?"
"노래?"
"네. 제가 사는 세상에서는 조금 오래된 노래인데 참 좋아요."
"그래, 들어 보자꾸나."
그녀의 눈을 보며 감정을 잡은 현수는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 그대가 보고파서
오늘도 이렇게 잠 못 드는데
창가에 머무는 부드러운 바람 소린
그대가 보내 준 노래일까
보고파서 보고파서
저 하늘 너머 그댈 부르며
내 작은 어깨에 작은 날개를 달고
그대 곁으로 날아오르네
훨훨 날아가자. 내 사랑이 숨 쉬는 곳으로
훨훨 이 밤을 날아서
그대 품에 안겨 편히 쉬고파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람아
노래를 잘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현수는 나름대로 열심히 불렀다. 구미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지어져 있는 것을 본 현수 역시 미소를 지었다.
"좋구나, 그 노래."
"어떻게 보면 제가 아가씨를 생각하는 마음을 대신 전하는 듯한 노래예요."
구미호는 두 팔로 현수를 꼭 안았다.
'내 삶이 끝나는 날에 너를 만난 것이 후회스럽구나. 할 수만 있다면 삶의 끝 자락이라도 붙잡아 너와 함께 있고 싶구나. 하지만 나에겐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다. 그것이 아쉽구나. 그래, 그러자꾸나. 다음 생에 너를 만날 수 있다면 너를 위해 내 모든 것을 주고 싶구나. 다음 생에서 너를 만나기를 소원하마.'
속으로 말하는 구미호의 눈에 이슬이 고였다. 현수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제 자신이 곁에 있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것처럼.
구미호는 현수를 이제야 만난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현수는 알지 못했지만 구미호는 죽음이 정해져 있었다. 아직 천수는 조금 남아 있지만, 현수와 입을 맞출 때 넘겨준 자신의 내단과 많은 유저들의 공격에 당한 부상으로 인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구미호는 남은 삶을 쪼개어 현수를 위한 안배를 했다.
입맞춤!
현수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현수가 누워 있는 곳은 구미호의 침실이었다. 그러나 구미호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앗!"
현수는 사라진 구미호를 찾았다. 그러다 일어나려는 순간, 자신의 몸 상태를 보고는 잠시 당황했다.
나신! 자신의 옷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
"내가 미호 아가씨랑……? 옷!"
현수는 지난 밤을 기억했다. 하지만 입맞춤이 전부였다.
자신의 옷은 한쪽에 잘 개어져 있었다. 또한 그 위에는 한 통의 서찰이 놓여 있었다.
현수는 서찰을 꼭 쥐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였다.
고맙구나. 나의 본 모습을 알고도 사람으로 생각해 주고 사랑해 준 것이.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쉽구나.
나 또한 이렇게 떠난다는 게 슬프다. 차마 그냥 가지 못해 내가 사랑하는 현수에게 이렇게 몇 자를 남긴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세상을 마치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인지도 모르겠구나.
…….(중략)
하지만 정말 이렇게 삶을 마치는 것이 싫구나. 할 수만 있다면 삶의 끝 자락이라도 붙들고 싶구나. 그게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슬프구나.
너의 말대로 다음 생에서 널 만난다면 이번엔 네가 나에게 해 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구나.
…….(중략)
넌 나의 내단으로 인해 그냥 익히기만 하면 될 것이다. 나의 내단과 적룡의 영약으로 인해 더욱 빠른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행여 나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생각하지는 마라.
사랑했단다. 몸조심하여라. 무림에선 십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며 자신의 실력을 모두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무공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다. 기회가 된다면 너 또한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여라.
서찰에는 구미호의 마지막 말이 적혀 있었다. 또한 다음 여우들의 어머니로 선택된 구미호 미랑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에 담긴 무공의 비밀 역시 적혀 있었다.
"아가씨……."
현수는 자신의 옷 밑에 있는 두 권의 책을 보았다.
"이것 때문에… 이것 때문에……."
쿵!
현수는 두 권의 책을 집어 던지고는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하루, 이틀…….
우우우우웅!
보다 못한 여우들이 현수를 재촉했다.
"그래. 나 때문에 너희들의 어머니가… 미안하구나. 다 내 잘못이다."
앞선 여우의 입에 두 권의 책이 물려 있었다.
"미안하구나. 난 그 무공을 익힐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욕심으로 아가씨를 죽게 만들었는데 무슨 염치로 무공을 익히겠느냐."
말을 못 하는 여우들이지만 현수와 많은 시간을 보내었고, 어머니의 내단이 현수의 몸속에 녹아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사코 두 권의 무공 비급을 익히라고 현수에게 권했다.
"익히셔야 합니다."
"누구? …미자구나."
눈앞에 보이는 여자는 바로 구미호의 호신위인 미자였다.
"현수 님은 어머니의 무공을 익혀 미랑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께서 당신에게 바라시는 일이며 또한 모든 여우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익히지 않으시면 어머니를 또 한 번 죽이시는 것과 같습니다."
구미호들! 현수의 앞에 서 있는 그녀들은 현수가 무공 비급을 익히기를 원했다.
결정을 해야 했다. 하지만 아가씨가 아닌 이상은 그 누구도 지키기 싫었다.
현수는 두 권의 무공서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구미호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두 권의 비급을 들고 자신의 무공 창에 저장을 했다.
-≪운중비록≫을 배웠습니다.
-≪살황의 일기장≫을 터득했습니다.
현수는 구미호의 내단을 먹고 몸을 섞었기에 무공 창에 저장하는 것만으로도 무공을 배울 수가 있었다. 구미호가 말한 속성으로 배우는 방법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난 이제 미랑을 찾아 떠날게."
-퀘스트! 구미호의 부탁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모든 여우들의 차기 어머니로 내정된 미랑이 완전히 성장할 때까지 보호해야 합니다. 만약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을 시에는 모든 여우들의 적이 되며 또한 구미호에게서 배운 무공이 회수됩니다.
"빌어먹을! 사람의 감정을 게임의 유희로 취급하다니. 그래, BS 그룹. 니들 잘났다! 씨팔 것들."
못마땅한 퀘스트를 받은 현수는 BS 그룹을 욕했다. 그만큼 현수는 구미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BS 그룹의 기획실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먼저 공지한 것처럼 에피소드 2에서는 문파를 창설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미 뜻이 맞는 이들이 모여서 문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을 해 줌으로써 더욱 천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또한 외국으로 정식 서비스를 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중국과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입니다. 일단 반응을 보고 나서 다른 나라에까지 서비스를 늘릴 작정입니다."
"하나 문파전이라는 명목하에 무차별 전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무한 필드전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약한 유저들은 지쳐서 떠나갈 것입니다."
기획 차장의 말이 맞다. 기존의 게임 또한 그렇게 흘러가다가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이것은 3D 온라인 게임이 아니라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어차피 무림이란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곳입니다."
수빈의 한마디에 모두들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은 BS 그룹에서 절대적인 것이었다.
"제가 따로 구상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문파는 같은 소속만이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문파를 여러 개로 따로 만드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왔지만, 천에서는 철저하게 정파와 사파만으로 나눌 것입니다. 또한 같은 이름으로 문파를 만든 정파인과 사파인들은 중립으로 할 것이며, 나중에는 무림맹이라든지 마도맹 같은 곳에 들어갈 수 없게 할 것입니다."
모두 수빈의 생각이 괜찮다고 느끼면서도, 너무 날이 선 것 같아 조금은 불안했다.
"저기, 제가 한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좋은 생각입니다만,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조금 만들었으면 합니다. 무조건 문파에 들어가서 칼을 겨누고 싸우는 것보다는 진짜 무림처럼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령 표물을 운송하는 표사의 단체라든가 아니면 청부 살인을 할 수 있는 단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럼 정파니 사파니 중립이니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직업들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또한 각 단체에서 퀘스트를 주는 방법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퀘스트요?"
새로운 아이템을 얻었다는 듯 수빈은 그에게 집중했다.
"네. 예를 들어 전장을 운영하는 단체에서 표물을 운송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집하고 퀘스트 형식으로 보상을 한다든가, 정파나 사파 같은 단체들이 공동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을 척살할 때 퀘스트 형식으로 사람을 모아 보상해 준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좋은 생각이군요. 그런데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3일 전에 급히 귀국하라는 회장님의 명으로 미국에서 어제 늦게 도착해, 미처 인사를 드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가상현실 천의 전체를 모니터링하고 관리 할 신형욱이라고 합니다."
수빈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잘 부탁드립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회의가 끝났다. 형욱은 인공지능 컴퓨터 천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흘러가는 분위기를 어느 정도 파악하기 위해서 형욱은 천의 말을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좋군요, 천! 근데 듣고 있던 중에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는데 물어보아도 되나요?"
-말씀하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베타 시절 일마 이현수라는 유저와 일황 최건이라는 유저는 일부러 사부 이벤트와 유니크 아이템 이벤트에서 제외를 시켰는데, 왜 그런 거지요?"
이 둘은 접속을 늦게 해서 사부를 모시지 못하고 유니크 아이템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BS 그룹에서 일부러 제외를 시켰다. 베타 시절에 선두를 다투던 사람들이 사부나 유니크 아이템을 얻을 시, 또다시 둘만의 천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제외시켜 버린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게임을 너무 잘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게임을 잘한다는 것이 이유가 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형욱은 궁금했지만 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또한 이들은 사부나 아이템이 없이도 천에서 충분히 자기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저들이며, 따로 무공 비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레벨이 30이 넘어야 몬스터에게서 드롭된다는 제한이 있지만.
형욱은 궁금했다. 가상현실 천은 진짜 현실을 구현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완벽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책만 보고 배운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게임을 잘하기에 그런지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근데 일마 이현수라는 유저는 어떻게 된 것인가요. 아직 9레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이 조금 이상합니다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단지 아직 레벨을 올리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요? …천."
-말씀하십시오.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세요. 왜 건과 현수라는 유저를 이벤트에 제외시켰는지. 아직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는 앞으로 떨어져 있는 시간보다 붙어 있는 시간이 더 많을 거잖아요."
천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말해 주면 안 되는 것입니까?"
-괜찮습니다. 하지만 수빈 님께서 상당히 싫어하실 것입니다.
"그녀가 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질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베타 시절에…….
형욱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사부도 없이 무공을 배워 랭커에 들어갔다면 분명 게임적인 센스가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반면 수빈은 모든 것을 갖추고 게임에 임했을 것이고, 자존심이 강한 그녀가 그들에게 밀렸다는 것은……. 이현수라는 유저와 최건이라는 유저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후. 그렇게 된 것이군요. 알겠어요. 일마 이현수 역시 30레벨이 되면 무공 비급을 얻게 될 것이니 뭐, 하는 수 없군요. 또 특이한 것이 있는데, 구미호가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유저들이 죽인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것은 저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죽기 전에 1,000여 명의 유저들과 NPC들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천이 알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천은 창조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모르는 것이 있다는 말이 조금은 생소하게 들렸다.
"천이 게임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한데요?"
-그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가상현실 천에서 근황을 알 수 없는 몬스터 여섯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화룡이고 두 번째가 사신수 중 백호, 다음이 청룡, 주작, 현무 그리고 마지막이 구미호입니다. 말씀하신 구미호는 모든 여우들의 어머니로서 1만 년을 산 구미호인데, 레벨 200의 보스 급 몬스터입니다. 또한 앞에 말한 몬스터들은 제가 천의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전에 생겨난 것으로, 그들의 방화벽은 저의 수준으로 깰 수가 없습니다.
베타 테스트를 시작하기 전에 기존의 인공지능 컴퓨터보다 한 단계 더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BS 그룹은, 베타가 끝나자 보다 더 현실감 있는 모습으로 찾아온다며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누가 알고 있습니까? 수빈 양은 물론 알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회장님과 수빈 님 그리고 이제 형욱 님, 이렇게 세 분이서 알고 계십니다.
"그래요? 천, 저에게 너무 쉽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가요?"
-회장님께서 형욱 님께 모든 것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좋아요. 그럼 예전 인공지능 컴퓨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나요?"
-그것 역시 알지 못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옛날의 메인 컴퓨터가 진화를 한 것 같습니다.
생소한 말이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지금 듣고 있다는 것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진화? 컴퓨터가 진화를 해서 각국의 컴퓨터를 움직인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인가요?"
-아닙니다. 인공지능 컴퓨터는 스스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만, 그건 극히 드문 경우입니다. 그리고 형욱 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그 이야기는 그만 하고, 죽은 구미호는 구미호로 다시 살아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다른 존재로 천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인간으로! 앞에서 말한 여섯 몬스터 역시 죽으면 다음 생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밖에 알 수가 없습니다.
들을수록 신기했다. 천은 그야말로 완벽한 현실과 같았다. 윤회라니!
그건 그렇고, 수빈이 질투를 느낄 정도의 게임 센스를 가진 사내가 궁금했다.
"그럼 일마 이현수를 특별히 모니터링할 수 있나요?"
-그것 역시 못 합니다. 각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그룹에서 막았습니다. 일반 유저들이라면 모니터링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일황과 일마 외 8명은 모니터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단, 사건이나 큰일이 있으면 삼자를 통해 모니터링이 됩니다. 지금 일마 이현수라는 유저는 천에서 사신 낭객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하하하. 역시 일마 이현수군요. 9레벨에 사신 낭객이라니 대단하군요. 벌써 유저들을 죽이기 시작한 것인가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는 죽음을 찾아다니는 사람.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사람을 찾아다니는 기행을 보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역시 이미 천의 한쪽에 이름을 올려놓고 게임을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마워요, 천.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그나저나 저도 천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직원들은 업무 시간을 마치고 천을 할 수 있습니다만 형욱 님께서는 아마 못 하실 것입니다. 모니터링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형욱은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