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퀘스트, 만 번 죽기 (6/57)

퀘스트, 만 번 죽기

현수의 만 번 죽기 퀘스트는 멧돼지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상당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지 않으면 구미호가 만 번을 대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크악!"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멧돼지들에게 죽는 것도 힘들게 되었다. 현수는 죽을 때마다 몸이 반응하는 것에 기이함을 느끼고 있었다.

낙양성을 스무 번 정도 들락거린 현수는 더 이상 멧돼지에게 죽을 수가 없게 되었다.

"젠장. 죽기도 힘드네. 그냥 맞아 죽으면 되는 것 아닌가?"

현수의 몸은 멧돼지들의 공격 패턴을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해 몸이 먼저 반응을 해 멧돼지들의 공격을 피하곤 했다. 현수는 멧돼지에게 죽는 것을 포기했다.

"다른 놈으로 바꿔야 하나."

멧돼지보다 한 단계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생각한 현수는 몸을 떨었다.

"그놈들, 칼 들고 설치는데. 조금 약한 것들은 없나."

강도! 다음 몬스터는 그들이었다. 하오문도 중 건달 다음의 몬스터로, 10레벨이었다.

다른 몬스터를 생각해 보았지만, 10레벨부터는 무기를 사용하는 몬스터들뿐이었다.

"젠장! 칼에 맞으면 아프겠지?"

포기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구미호가 칼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 때문에 아가씨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싫어!"

현수는 자신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를 하지 않았다.

현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과 그 여인이 구미호라는 것 그리고 구미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만 생각했다.

"까짓거! 죽으면 될 것 아니야."

낙양성의 저잣거리는 강도들의 주 활동 무대였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강도를 만날 수 있었다.

"헉!"

느닷없이 찔러 오는 단검을 본 현수는 기겁을 하며 뒤로 피했다. 지나간 일은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 한 방에 죽을 수 있었는데."

강도는 반사적으로 피하는 현수를 보자 긴장을 한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현수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수는 윗옷을 벗고는 강도를 보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기 아저씨, 이왕이면 여기를 한 번에 깊게 찔러 주세요."

그는 자신의 심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그런 현수를 본 강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손에 든 단검을 입가로 가져갔다.

"미친놈이군. 죽기를 소원하다니. 그럼."

"악!"

팔을 스치고 지나간 강도의 검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일부러 팔을 노렸다고 생각한 현수가 강도를 노려보았다. 피가 흐르는 팔을 부여잡고 가슴을 편 후 다시 강도에게 부탁했다.

"아저씨! 여기라고요, 여기!"

"실수했다."

"악!"

이번엔 다리. 다음에는 다른 팔. 또 다리. 현수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강도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화가 머리까지 치솟았다.

"씨팔. 내가 분명 여기라고 했잖아! 근데 왜 말을 안 들어?"

현수는 아픔도 잊었다. 어디서 힘이 생겼는지, 현수의 주먹이 강도의 복부를 강타했다.

"윽!"

"씨팔! 너도 아프지? 빨리빨리 죽여 주면 얼마나 좋아."

전부 민첩성으로 스탯을 올린 현수에게 강도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뿐이었다. 사정없이 주먹질을 하던 현수는 한참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사라지는 강도의 시신 밑에 무엇인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이템이다. 재수!"

떨어진 아이템을 집어 든 현수는 확인을 했다.

"아이템 확인!"

이름 : 강철검 등급 : 일반-평범

특성 : 사용자의 공격력 +3 설명 : 강철로 만들어진 검

"뭐야. 스탯의 수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격력 플러스 3뿐이야? 그나저나 이제 스무 번 죽었으니, 구천구백팔십 번이 남은 것인가. 퀘스트 창 오픈!"

진행 중인 퀘스트 : 2

대장간 주인의 부탁

내용 : 구미호 발톱 2개 구해 주기

등급 : 일반 중 보상 : 미정

만 번 죽기(강제 퀘스트)

내용 : 만 번 죽기(20/1만)

등급 : 상 중 상 보상 : ≪운중비록≫, ≪살황의 일기장≫

"아! 맞다. 구미호의 발톱."

1년 전에 대장간 주인에게서 받은 퀘스트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 하지만 구미호의 발톱은…….

"일단 그냥 두고 만 번 죽기부터 끝내자."

그렇게 낙양성에 현수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신 낭객! 죽음을 찾아다니는 사람!

죽이기 위해서가 아닌 죽기 위해서 다니는 미친놈으로 소문이 났다.

현수는 수로채에 가서 죽기로 마음먹고 수로채가 활동하는 장강삼협으로 향했다.

* * *

장강삼협은 구당협과 무협 그리고 서릉협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당협은 웅위롭고 무협은 은은하고 수려하며, 서릉협은 여울이 많고 험준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수로채! 장강의 서릉협에 본거지가 있고 또한 장강을 주 활동 무대로 삼아 사람들은 그들을 장강 수로채라 불렀다.

이들은 총채주 1명을 두고 그 밑으로 18명의 채주가 있어, 삼협을 중심으로 그 위를 오가는 배들을 노략질하곤 했다. 하지만 가진 무공이 강해 무림인들이라도 수로채와 싸우기를 꺼렸다. 이유는 그들을 상대하려면 육지가 아닌 물 위에서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현수는 그런 수로채에 달려들어 죽기 시작했다.

"나를 좀 죽여 줘!"

첫마디부터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로채의 수적들은 어이가 없었다.

"꼬마야, 그냥 가라. 이 아저씨들은 상당히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러니 가서 엄마 젖을 더 먹고 와! 그럼 그때 죽여 줄 테니."

"아 씨! 그냥 죽여 달라니까. 그리고 나, 꼬마 아니야.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죽여 줘!"

현수는 검을 빼 들었다. 그러고는 그들을 향해 휘둘렀다. 하나 레벨이 20이나 되는 수로채의 수적들은 그런 현수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헉헉! 피하지 말고 나를 그냥 좀 죽여 줘!"

현수는 힘이 드는지 주저앉아 사정했다.

"집에 가라, 꼬마야. 미친놈 죽이면 재수 옴 붙는다."

"잠깐!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수적 중의 1명이 현수에게 다가오더니 손과 발을 묶었다.

현수는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죽여 준다니 순순히 응했다.

하나 이내 후회를 했다.

"하나! 둘! 셋!"

풍덩!

그들은 현수를 묶어 강에 던졌다. 현수는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어 몸부림을 쳤다. 수적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웃고 즐기고 있었다.

"욱!"

현수는 결국 죽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수로채로 향했다.

계속되는 죽음 속에서, 현수는 몸이 자신도 모르게 변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들아! 빨리 안 죽여 줄래?"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현수였다. 수로채의 수적들은 현수를 보며 기가 질린 듯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고통 없이 죽여 달라고."

하나 수로채의 수적들은 현수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처음에 수로채의 수적들은 평소와 같이 현수의 목에 돌을 매달아 강에 던지고는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 악몽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현수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현수는 자신을 죽여 달라며 수로채의 수적들을 못살게 굴었고 또한 영업을 하지 못하게 방해를 하곤 했다. 수적들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했지만 눈앞에 있는 인간을 죽일 수가 없었다.

"아 씨! 영업해야 돼! 저리 가!"

수적들은 장강을 통해 다니는 배를 보고 소리쳤지만 현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죽이고 영업해."

"우리랑 무슨 원수가 졌기에 우리를 핍박하느냐!"

수적들은 사정을 했지만 현수는 한사코 죽여 달라고 소리쳤다.

"대인! 제발 부탁드립니다. 대인께서 자비를 내리시어 우리도 먹고살게 해 주십시오."

수적들은 모두 현수에게 빌기 시작했다.

"여봐라! 준비한 것을 가져와라."

하나의 상자를 들고 나오는 수적들이 보였다.

현수의 앞에 상자를 가져다 놓은 수적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요즘 대인께서 계신 통에 영업을 하지 못해 준비한 것이 적습니다. 대인께선 이해를 해 주시고 그만 노여움을 푸십시오."

현수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이게 뭐야?"

"대인, 저희가 가진 것이 그것뿐입니다. 그러니……."

현수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비록 이것을 원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수입이라고 생각하니 상당히 많은 돈이었다.

정색을 한 현수는 상자에 있는 금전을 인벤토리에 옮겼다.

"이것들아! 바르게 살고 영업 잘해. 나중에 다시 올 테니까!"

현수는 그길로 수로채를 떠났다.

현수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환호하는 수로채의 수적들이었다.

현수는 어느새 사천까지 도착해 있었다. 당가의 세력권 안에 크고 작은 방파들이 존재했다.

"죽기도 힘들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퀘스트 창 오픈!"

진행 중인 퀘스트 : 2

대장간 주인의 부탁

내용 : 구미호 발톱 2개 구해 주기

등급 : 일반 중 보상 : 미정

만 번 죽기(강제 퀘스트)

내용 : 만 번 죽기(3,536/1만)

등급 : 상 중 상 보상 : ≪운중비록≫, ≪살황의 일기장≫

"휴! 얼마나 남았지? 죽었던 것보다 더 많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구나."

현수는 열심히 옮겨 다니며 여기서 죽고 저기서 죽었다. 사천에서는 조금 빨리 죽을 수 있었다.

아니, 죽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빨리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비록 9레벨이라고 하지만 한 방에 죽었던 것이 점차 여러 방에 걸쳐 죽었다. 몸이 이제 어느새 맞는 요령을 알아 버린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새로운 멘트가 떴다.

-띠링! 히든 스탯 '인내'가 생겼습니다.

-띠링! 히든 스탯 '맷집'이 생겼습니다.

"상태 창 오픈!"

이름 : 이현수 레벨 : 9

직업 : 무 체력 : 220

기력 : 140 공격력 : 10

방어력 : 10 순발력 : 10

민첩성 : 28 인내 : 50

맷집 : 48 NPC와의 호감도 : 55%

경험치 : 80/100

생활 스킬 : 도축-가죽과 고기를 얻을 수 있다.

"뭐야? 맷집? 인내? 뭐, 아무튼 좋아!"

현수는 점점 더 강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수치화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외공이 분명했다.

계속 죽지 않는다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덕분에 현수는 처음 맞았을 때 느꼈던 고통조차 덤덤해지고 있었다.

"아무튼 이거,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죽는 방법을 택할 걸 그랬어."

현수는 모르고 있었다. 구미호가 넘겨준 내단의 존재를.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금 현수의 변화를 가능하게 했음을.

사실 구미호에게 있어 생명의 원천은 다름 아닌 내단이었다. 그런 내단을 현수에게 준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현수의 몸도 점점 담금질되어 강해져 갔다.

어느새 현실에서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 * *

"야! 어떻게 되었어?"

-지금 현수 님의 신용 등급은 A+에서 C+까지 떨어졌습니다. 또한 은행에서 더 이상 현수 님에게 대출을 해 줄 수 없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은행 잔고는 바닥을 보였고, 이미 아이템을 맞추려고 대출 받은 것마저 써 버린 상태였다.

아무래도 뭔가 결심이 필요했다.

"할 수 없지. 집을 옮기는 수밖에. 야! 너와 내가 들어갈 만한 집을 하나 찾아 줘. 싼 것으로. 그리고 이제 백 번만 죽으면 되니까 아이템을 빨리 알아봐!"

-계속해서 알아보고 있지만 매물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는?"

-아이템의 새로운 형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베타 때에 수치로 나오던 공격력이나 방어력이 이제 스탯 플러스 효과로 바뀌어 그런 것 같습니다. 상급의 아이템이라고 해도 공격력에 더해진 플러스 수치가 낮으면, 공격력이 없더라도 플러스 수치가 높은 것을 사용하기에 지금 매물은 현수 님에게 그다지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왜?"

-이유는 현수 님이 민첩성 스탯에만 투자를 하고 있고, 또 ≪운중비록≫이라는 무공 비급 때문입니다.

현수는 알 수 있었다.

야의 말대로 민첩성에만 투자한 캐릭터의 특성과 ≪운중비록≫이 지금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지금 매물로 나온 아이템 중에 순발력의 스탯을 올려 주는 아이템은 없습니다. 또한 있다고 해도 최고치가 플러스 5까지입니다. 지금 당장은 현수 님께서 이런 것들로 효과를 볼 수가 있지만 레벨이 20만 올라가도 무용지물입니다. 또한 그때에 다시 판다고 해도 그다지 좋은 값을 받지 못합니다.

"야! 그럼 내 캐릭터의 밸런스를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돼?"

-지금은 스탯을 여러 군데 투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순발력에 집중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타격의 데미지는 조금 떨어져도 크리티컬 히트를 생각한다면 순발력에 투자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레벨 업을 해서 얻는 수치는 민첩성에 투자하고, 아이템은 순발력을 높이는 것으로 맞추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순발력이라……."

-최소한 5레벨을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아이템의 총수는 방어구 네 종류, 무기 한 종류 그리고 액세서리가 세 종류, 부적이 두 종류 등 총 열 가지입니다. 이 아이템들 모두에 순발력 플러스 10이라는 기능이 있어야 그나마 부족한 수치들을 메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이제껏 나온 아이템의 기능은 최고치가 순발력 플러스 10이며, 최상급 유니크 아이템은 플러스 25까지라고 합니다만, 아직 하급을 비롯해 최상급 유니크 아이템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래저래 답답한 현수였다. 빨리 죽어서 구미호에게 무공을 배운다 해도 레벨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자신을 죽여 줄 대상을 찾기도 힘들었다.

9레벨!

초라한 자신의 성적표였다.

"알았어. 최대한 빨리 죽어서 무공을 배우고, 그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지. 그리고 집을 빨리 알아봐! 전세나 월세도 상관없어. 집부터 매물로 먼저 내놓고."

-알겠습니다. 아담한 것으로 하나 구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현수 님께서 어머니께 할 변명도 만들어 놓겠습니다.

"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넌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어떻게 시간이 갈수록 나를 닮아 가냐?"

-제가 보고 배우는 사람이 현수 님뿐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현수는 다시 접속을 하고는 남은 백 번을 죽기 위해 노력을 했다. 급해진 현수는 마지막 몬스터를 찾아갔다. 자신을 백 번 죽여 줄 적룡을!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현수의 귀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궁금증이 현수를 그리로 인도했다.

4명의 사내가 1명의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내놓아라!"

"흥!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잡은 몬스터에서 나왔단 말이야."

"몬스터는 우리 것이었다. 우리가 끌고 와서 잡으려고 한 몬스터였다."

현수는 그들이 아이템 때문에 저리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흥! 차라리 날 죽여. 혹시 아니? 내가 죽으면 아이템이 드롭될지."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아느냐?"

"그래! 날 죽여 봐, 병신들아. 고작 여자 하나가 무서워서 함께 다니는 것들이."

현수는 거칠게 말하는 여자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적룡의 레어로 갈 생각이었다. 그때 현수의 귀에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싸우나 보네. 구경이나 하다 가자."

현수는 다시 싸우는 것을 보았다. 근데 오히려 4명의 사내가 밀리고 있었다.

"음!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 이벤트에서 사부를 얻은 유저인가?"

"커억!"

"뭐 해! 아까 그 기세는 다 어디로 갔지?"

1명의 사내가 쓰러지자 흠칫하는 이들이었다.

"안 덤벼? 그럼 내가 간다?"

"잠깐!"

여자는 움직이려는 신형을 멈추어 세웠다.

"왜?"

"이거나 받아라."

갑자기 날아오는 주머니를 향해 검을 내리그은 여자는 순간 당황했다. 모래주머니였다. 3명의 사내는 빠르게 달려들어 여자를 공격했다.

"악!"

모래에 의해 눈을 잠시 뜨지 못해서인지 여자는 사내들의 공격에 당하기 시작했다.

"비겁한 놈들이네. 불알 차고 태어나서 암수나 쓰고. 그것도 사내가 아닌 여자에게 말이야."

들려오는 소리에 손을 멈춘 사내들이 현수를 보았다.

"꺼져라."

"나 좀 죽여 줄래?"

"이놈이!"

현수는 자신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사내를 비웃었다. 그러고는 살짝 피한 후 여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누구……?"

"지나가는 길손이에요."

자신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현수를 본 사내들이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수는 여자를 안아 들고는 그 검들 사이로 피해 다녔다.

변해 버린 자신의 몸을 믿고 한 행동이었다. 몸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냥 가라. 아니면 너희들, 나에게 다 죽는다."

현수의 엄포에 서로 눈치만 보는 그들이었다. 한 사람을 안고서 자신들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보고, 상당한 고수라고 생각했다.

"안 갈래? 그럼 내가 죽여 줘?"

"누구냐?"

"알아서 뭐 하게. 그냥 갈래 아니면 죽고 사라질래?"

사내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사실 현수 역시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고작 9레벨이라는 실력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수였다. 그래서 피하기만 하고 따로 공격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괜찮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전 이만."

현수는 뒤돌아 산길을 타고 올랐다.

"저기, 전 명월이에요! 사천당가에 있어요."

현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이름이라도 가르쳐 주면 어디가 덧나나!"

투덜거린 명월은 자신이 주운 아이템을 확인했다.

"아이템 확인!"

이름 : 명주 반지 등급 : 레어-중급

특성 : 착용자의 체력 회복 속도 5% 증가

체력 10 증가

설명 : 명주로 만들어진 간단한 모양의 반지

"헛!"

명월은 순간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자신이 듣기로, 지금까지 나온 아이템 중에서는 스탯 플러스 10짜리가 최고였다. 자신에게도 이런 행운이 올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 * *

동굴. 지금까지 천의 최고 몬스터인 적룡의 레어였다. 베타 시절 상위 랭커 1,000명이 적룡에게 도전했다가 모두 전멸한 기억이 떠올랐다. 현수는 안으로 들어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봐! 빨간 지렁이! 나를 죽여 줘! …컥!"

눈앞이 깜깜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보이지도 않고 고통도 없었다. 다시 살아난 곳은 동굴의 입구였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이곳에서 만 번 죽는 것인데."

땅을 치고 후회를 해도 이미 지나간 후였다.

현수는 부지런히 죽기 시작했다. 고통 없이 죽으니 이제 죽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퀘스트 창 오픈!"

진행 중인 퀘스트 : 2

대장간 주인의 부탁

내용 : 구미호 발톱 2개 구해 주기

등급 : 일반 중 보상 : 미정

만 번 죽기(강제 퀘스트)

내용 : 만 번 죽기(9,999/1만)

등급 : 상 중 상 보상 : ≪운중비록≫, ≪살황의 일기장≫

한 번만 더 죽으면 된다.

현수는 구미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곧 구미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현수는 지금 즐거웠다.

"가자! 한 번이다."

현수는 동굴의 안쪽으로 들어가 또다시 소리쳤다.

"어! 지금쯤 죽어야 되는데."

반응이 없자 현수는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에서 거대한 1마리의 용이 현수를 보고 있었다.

"뭐 해?"

-크크. 그냥 어떤 놈인지 보고 싶어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오는 모습이었다. 천에 존재하는 몬스터의 로드답게 무식하게 생겼다.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적룡에게 말을 걸었다.

"빨간 지렁이, 생긴 건 무식한데 사람 죽이는 건 깔끔하네. 이봐! 이제 깔끔하게 죽여 주었으면 하는데, 어때?"

-크크. 죽음에 대한 면역이라… 좋군. 근데 누구에게 이런 것을 받았지?

현수는 흠칫했다. 구미호가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생활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화룡 역시 알고 있었다.

"알 것 없잖아. 그냥 나를 죽여 주면 되는 것이니까. 안 그래?"

-그렇군. 근데 왜 내가 너를 죽여야 하지.

"그냥!"

-귀찮게 하지 말고 나의 집에서 나가라.

적룡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돌렸다. 현수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 정말 날 죽일 생각이 없는 거야?"

-물론! 그러니 그냥 가. 귀찮게 하지 말고.

"그럼 넌 나에게 죽어."

연방 주먹질에 칼질을 해 봤지만 적룡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잔뜩 귀찮아했다.

-꺼져라!

"싫어. 나를 죽여 주기 전에는 가지 않는다."

적룡과 생활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같은 일상의 반복으로 둘은 지쳐만 갔다.

현수는 적룡에게 사정을 해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오히려 적룡이 현수에게 사정을 했다.

"제발 부탁이야. 나를 죽여 줘. 응?"

-나도 부탁하자. 제발 나의 집에서 나가 줘!

"안 돼. 나를 죽여 줘! 그럼 갈게. 응? 적룡, 부탁이야. 한 번만, 많이도 안 바랄게. 한 번만."

-나 역시 안 돼! 그러니 제발 나의 집에서 가 줘!

서로가 부탁을 했지만 둘은 여전히 같은 생활이었다.

그렇게 1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현수는 한 번만 더 죽으면 구미호를 만날 수 있는데 죽이기를 거부하는 적룡에게 짜증이 났다.

"씨팔! 진짜 독한 놈이네. 그냥 두 눈 감고 한 번 죽여 줘! 그럼 귀찮게 하지 않을게."

-닝기리! 이 미친놈아! 그냥 목에 돌 하나 매달아서 바다에 뛰어들어. 그럼 되잖아.

"씨팔! 수로채에서 벌써 그 과정을 거치고 왔어. 그러니 너에게 매달리지, 미쳤다고 내가 1달을 넘게 너에게 매달리겠냐? 그리고 넌 태생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잖아."

-지랄! 딴 놈은 다 죽여도 넌 죽이기 싫어. 그리고 구십구 번이나 죽여 주었으면 되었지, 뭘 더 바라? 그러니 그냥 가라. 제발 부탁이다. 나가면 사신수도 있잖아. 왜 나한테 와서 지랄이야.

"싫어! 그러니 나 좀 죽여 주라."

툭!

보기에도 좋은 보검이었다. 하지만 현수는 보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거 먹고 떨어져.

"햐! 씨팔! 너, 말 참 무식하게 한다. 그런다고 내가 먹고 떨어질 것 같으냐? 이제 오기가 생겨서 못 나가, 죽여 주기 전에는. 괜히 내가 일마 이현수인 줄 아냐?"

-미친놈!

그렇게 적룡과 현수의 밀고 당기는 싸움이 이틀 동안 계속됐다.

-졌다. 씨팔. 닝기리.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방법으로, 가장 잔인하게 죽여 주마!

"고맙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좋았잖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수는 욕설을 퍼붓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당한 죽음의 고통은 이제껏 당한 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번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크크크. 재미있지?

"씨팔! 빨리 죽여."

사슬에 사지를 묶어 놓고 현수의 피부를 한 겹 한 겹 벗겨 낸 적룡은 그 위에 소금을 뿌려 고통을 주었다. 죽었다 싶으면 다시 영약을 먹여 살리고 또 고통을 주고 살리곤 했다.

"아아아아아!"

현수의 비명 소리만이 적룡의 레어에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현수는 수없는 고문으로 진짜 미쳐 가고 있었다. 고문을 당하면 당할수록 고통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도 해 봤지만 적룡은 여전했다. 면역이 되어야 하건만 고통은 여전했다.

그렇게 1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자 현수의 몸이 서서히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 2달이 지나자 오히려 현수가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크크. 이봐, 빨간 도마뱀! 조금 더 강도를 올려 주면 좋겠는데. 이게 뭐야? 간지럽잖아. 그리고 이제 레퍼토리를 조금 바꾸지그래. 그게 창의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닝기리, 이제 재미없다. 죽어라.

적룡의 발이 현수의 머리로 올라갔다 그대로 내려왔다.

"고맙다. 적룡. 다음에 올 때는 내가 당한 만큼 돌려 주겠다."

-오지 마라, 제발! 부탁이다.

다음에 온다는 현수에게 사정을 하는 적룡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현수는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살아난 현수의 눈에 화룡의 레어 입구가 보였다.

-만 번 죽기의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를 준 이를 찾아가 보상을 받으십시오.

"이제 끝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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