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사랑?
우당탕.
호기롭게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현수는 그제야 자신의 레벨과 능력에 화가 났다.
구미호가 왜 가만히 있었는지는 이미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힘없이 당하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했다.
그럼에도 현수는 멈추지 않았다. 구미호를 희롱하는 낙양 삼걸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현수는 계속 덤벼들었다. 결국 현수는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으으음."
현수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두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구미호의 거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구미호는 옆에서 그를 살피고 있었다.
벌떡.
현수는 이를 악물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그날을 시작으로 저잣거리를 갈 때마다 같은 소동이 있었다. 그리고 현수는 매번 무참히 깨져 돌아왔다. 남정네들의 지분거림을 참지 못해 참 맞기도 많이 맞았다.
현수는 점점 악에 받쳐 갔다. 자신이 힘이라도 있었으면 구미호가 그런 짓을 당하지 않을 텐데, 억울했다. 다시는 구미호에게 집적거리지 못하게 잔뜩 혼내 주고 싶었다.
현수의 그런 행동이 거듭될수록 구미호의 눈빛이 달라져 갔다. 그리고 어느새 게임을 시작한 지 5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 구미호와 약속한 기간은 끝이 난 셈이다. 그럼에도 현수는 떠나지 않았다.
"미치겠네. 5달 동안 도대체 아무 소득도 없이 뭘 했는지 알 수가 없네."
현수는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 말이라도 한번 해 보자.'
현수는 지금 다른 무엇보다 힘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결심이 선 현수는 구미호의 방문을 열었다.
"왜?"
현수는 돌아보지도 않고 묻는 구미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털썩.
"미호 아가씨!"
"왜?"
"무공 좀 가르쳐 주세요."
무공이라는 뜬금없는 말에 구미호가 현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강해지고 싶어요. 진짜 강자가 되고 싶어요. 미호 아가씨는 강하잖아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구미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발 옷 좀 입으라고 했잖아요!"
현수는 얼른 구미호의 몸에 옷을 걸쳐 주었다.
"미호 아가씨, 저도 남자예요. 그러니 제발……."
"그렇구나. 이제껏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 때문이었느냐?"
정색을 하는 구미호의 반응에 현수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약해지지는 않았다. 현수는 오히려 그런 구미호를 강렬한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네! 처음에는 그랬어요. 그래서 몰래 조금씩 책을 훔쳐보았어요."
구미호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 내용은 따로 있으니까.
"지금은?"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함께 낙양성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아가씨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이 참기 힘들었어요. 만약 저에게 힘이 있었다면……."
현수의 얼굴에 분함이 보였다.
"이유는 저도 몰라요. 중요한 것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이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너무 싫다는 거예요. 그래서 힘이 필요해요."
구미호도 현수의 진실됨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내가 좋으냐?"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미호 아가씨를 보면 언제나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이게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구미호는 한동안 말없이 현수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현수에게 다가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랬구나. 하지만 넌 아직 많은 여자를 만나 보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다. 내일부터는 이곳에 있지 말고 사람들과 함께 생활을 하여라. 현수야, 힘은 또 다른 힘을 부르게 된다."
구미호 역시 현수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래전에 인간에게 실망해서 닫혔던 마음의 문이 현수로 인해 열렸다. 하지만 자신과 현수는 절대 이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아니에요. 설령 그렇게 될지라도 지키고 싶은 것은 지켜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 이곳을 나갈 생각이 없어요."
구미호는 현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현수는 두 눈을 감고 그런 구미호의 입술을 훔쳤다. 한참이 지나서야 둘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렇구나.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된다. 좋은 말이구나. 그럼 내가 너를 지켜 주마."
현수는 말없이 일어났다. 하지만 실망한 표정은 아니었다.
"왜, 싫은 것이냐?"
"아니에요. 단지 보호의 관계가 다를 뿐, 항상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아가씨가 목욕할 시간이에요."
뒤돌아선 현수를 보던 구미호는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을 꺼냈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지. 인간 세계를 동경해 나름대로 생활했을 때의 부산물들. 인간의 추악한 내면세계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인간들의 틈에 섞여 살고 있을 것을……. 그렇구나. 오늘 너의 눈을 보니 가식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하지만 나를 보호 대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단다, 현수야."
함께해 오면서 현수의 순수함을 느꼈다. 비록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마을에 함께 다녀 보면서 아직까지 순수함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무공을 가르쳐 주마. 하지만 배우는 것은 너의 재질에 달려 있으니, 얼마나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구미호는 현수가 입혀 준 옷을 벗고 목욕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들어오너라."
구미호가 현수를 욕실 안으로 불렀다.
"이것이 나의 본 모습이다."
백설보다 더 하얀 꼬리가 9개인 여우.
바로 모든 여우의 어머니인 구미호의 본모습이었다. 현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무공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넌 인내할 수 있겠느냐?"
현수는 말없이 구미호의 흰 털을 만지고 있었다. 그는 구미호의 몸에 머리를 기대었다.
"정녕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나가서 만 번만 죽고 오너라."
구미호의 말에 현수는 깜짝 놀랐다. 구미호는 자신이 유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왜? 만 번 죽기가 싫으냐?"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한 번 죽으면 살 수가 없잖아요."
"나 역시 알고 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몇몇이 알고 있다."
고개를 저은 구미호는 사실을 인정했다. 현수가 NPC가 아닌 유저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현수는 그들이 보스 급 몬스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만 번만 죽고 오면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 하나 보호 대상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한다."
"누구……?"
"미랑이라는, 너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다. 어디에 있는지는 나중에 나에게 무공을 배울 때 가르쳐 주겠다."
하지만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현수의 마음속은 구미호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에요, 미호 아가씨! 전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무공을 배우려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지키고자 배우려는 게 아니에요."
말을 마친 현수는 구미호의 욕실을 나와 음식을 준비했다.
"젠장. 이게 아닌데. 왜 말이 그렇게 나오는 거지."
현수는 지금 미치는 중이었다. 로또 당첨과 비등한 수준의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다.
"접속 해제."
현수 역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로 돌아왔다.
야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현수는 고마웠다. 가끔 속을 뒤집는 말을 해서 문제지만, 현수는 오히려 그런 야를 좋아했다.
"야! 한 가지 물어보자.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말이 계속 잘못 나올 때는 어떻게 해야 돼?"
-그야 말을 정정하시면 됩니다.
"아니, 말고. 난 구미호에게 무공을 배워야 하는데 입은 싫다고 말했어. 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뒷일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공을 배우면 구미호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일까?'
현수는 구미호와 함께 있으면 좋고,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 이것저것을 챙기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일까.
"야! 그럼 내가 지금 구미호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진짜 사랑이라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전 세계의 대표적인 사례 중 백만 가지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지금 현수 님의 상태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을 때와 일치합니다.
정말일까?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인 지난 5달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짧은 것만은 아니었다. 현수는 미리 주문해 놓은 국밥을 먹고는 다시 구미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가?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첫 키스 그리고 구미호가 목욕하는 장면들. 혼자 실실 웃고 있는 현수에게 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앤돌핀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성 호르몬이 과다 증가하였습니다.
"야! 너, 조용 안 할래?"
즐거운 상상에서 깨어난 현수는 방이 어지럽다는 것을 느끼고 청소를 했다. 이것저것 치우고 쓸고 닦으며 부산함을 떠는 현수의 입에서는 휘파람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방 청소를 다 끝낸 후 세탁기에 빨래를 넣은 현수는 야에게 소리쳤다.
"야! 시간 되면 전원 꺼. 나 잠시 나갔다 올게. 은행의 잔고가 얼마나 남았지?"
-지금 남은 금액은 총 420만 원입니다. 그리고 대출 한도는 1,200만 원입니다.
"그래. 뭐가 됐든 결정을 해야 될 때군. 어머니에게 돈을 드리는 날이 언제지?"
-10일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냥 돈만 드리지 마시고 이번에는 한번 찾아뵙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현수 님께서는 지난 5달 동안 어머니께 한 번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자신의 삶을 눈물로 채워도 부모님의 사랑을 다 갚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 그렇게 할게. 고마워, 야!"
-아닙니다. 사람 하나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야! 넌 어떻게 꼭 잘 나가다 다른 길로 새냐?"
-아마 저의 사고방식도 현수 님을 닮아 가는 것 같습니다.
"에휴! 말을 말아야지. 다녀올게."
현수는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아니, 모임이라기보다는 길드라는 개념이 더 강했다.
가상현실 천의 랭커들의 모임. 일마 시절에 만든 모임으로, 가입 인원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매달 한 번 있는 모임은 항상 오페라 하우스라는 카페에서 열렸다.
현수가 모임 장소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반기는 사람은 최건이었다.
"어이! 여기."
10명 정도가 자리에 있었다.
현수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는 최건을 보았다. 왜 이들밖에 모이지 않았나 하는 궁금증에서 본 것이다.
"왜? 묻지 마!"
현수는 정보통이라는 만사귀를 보았다.
"다들 탈퇴하고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어. 과거가 아닌 현재 천의 랭커 모임을! 우리의 옛 모임을 동경하던 사람들 중에 랭커로 진입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는데, 모두 그리로 옮겼어. 그리고 여기 모인 모두는 너와 비슷한 처지지. 웃기지 않아? 한때 최강이었던 10명이 이렇게 청승 떨고 있으니 말이야."
모두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옛날에는 이 장소가 좁을 정도로 많이 모여 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또 삶을 이야기했는데……. 인생은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건이라면 한자리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넌?"
"뭐, 간신히 랭커에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최건에게 향했다. 건 역시 사부도 없고 아이템도 없다. 모여 있는 이들은 건을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열심히 했지. 비록 사부니 아이템이니 해도 기본 틀은 그대로야.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그랬겠지만, 각 레벨별 사냥터에서 열심히 했지. 난 운 좋게 무공 비급을 하나 얻었어."
무공 비급이라는 말에 모두 또 한 번 부러운 시선을 던졌다.
"근데 현수! 넌 어떻게 된 거야? 너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는데. 보통 이때쯤이면 랭커에는 못 들어가도 어느 정도 올라왔을 거 아니야?"
할 말이 없어진 현수였다. 구미호에게 잡혀 식모가 되었다는 말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아직 레벨이 9라는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그냥 이번엔 조용히 게임하려고. 너무 알려지니 사냥하기가 많이 불편해서."
어쭙잖은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현수였다.
"야! 너 어떤 아가씨랑 같이 낙양성을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연애하냐?"
말을 하는 사람은 정보통 만사귀였다.
"봤냐? 예쁘지? 삶을 전부 여자로 채워도 그런 여자는 못 만날 것 같지 않냐? 설령이 저리 가라지, 그렇지?"
"어쭈! 너, 진짜 연애하냐? 그럼 힘든데. 우리는 지금 너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고."
"무슨 희망?"
"네가 있으니까 우리도 아직 결혼하지 않고 있는 것이잖아. 우리들 중에 네가 제일 늦게 장가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내가 어때서? 최소한 저놈 역발산보다는 빨리 갈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옛날을 생각하고 회상하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갔으면 하는 꿈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현수야, 네가 오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의논을 했다. 아까 한 너에게 희망을 걸었다는 말……."
순간 모두가 진지해졌다.
"너 진짜 연애하는 거야? 아니면 나름대로 방법을 구상하고 있는 거냐?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게임으로 먹고사는 처지다. 최건 저놈이야 지금은 어느 정도 레벨이 올라가 별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지만 우리는 다르다."
백수! 이 땅의 청년 실업은 30만이 넘어간다. 머리에 든 것이 많아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들, 반대로 머리에 똥만 차 만사가 귀찮아 노는 이들, 가진 부모 만나 돈 걱정 안 하는 이들 등등 사람에 따라 이유는 다르겠지만, 게임 역시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게임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백수 중에서도 부르주아 백수라고 부른다.
게임이라는 것은 희소성의 가치로 인해 돈을 많이 버는 이들은 많이 벌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10원짜리 하나 벌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비공식적으로 천에서 아이템이나 게임 머니를 팔아 돈을 버는 이들은, 1만여 명이 조금 넘는다고 추정되었다. 지금 모인 이들 역시 부르주아 백수들로, 모두가 게임으로 먹고사는 이 시대의 백수들 중 하나였다.
"근데?"
"넌 걱정이 안 되냐?"
현수 역시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답답하다. 벌써 놀고먹은 지 3달이 되어 간다. 은행 잔고는 비어 가지, 신용 등급은 낮아져만 가지, 또… 말을 말자!"
이들 중 현수의 말을 사실이라 믿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현수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야! 같이 먹고살자."
"좋아! 그럼 해결책 제시하는 데 건이 빼고 1명당 2만 원! 그리고 약간의 정보!"
현수의 말에 모두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고 만사귀 네놈만 털어놓으면 돼."
만사귀는 조금 억울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마치 정확한 통계를 내듯 베타 시절과 지금을 비교 분석까지 하며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현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좋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최건을 빼고 9명이지. 너희들은 지금부터 함께 다니면서 같이 사냥해. 그리고 레벨을 너무 빨리 올리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레이드를 해."
"레이드?"
"그래."
"말이 된다고 생각해? 레이드를 하는 유저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우리 9명으로는 부족해."
최건은 현수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분명 그도 현수에게 레이드를 노려서 사냥을 하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누가 레벨이 높은 놈으로 잡으래? 9명이서 잡을 수 있는 몬스터로 레이드를 해. 대충 레벨들이 어떻게 돼?"
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20∼22레벨 안팎이었다.
"그럼 딱 좋네. 내가 알아본 결과 아이템이 떨어질 확률은 10%. 레벨 차이는 3! 그러니 9명이 레이드를 백 번만 하면 모두 아이템 하나를 얻는다고 보면 되지. 그럼 레이드를 백 번 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한 일주일?"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건을 제외한 모두는 현수를 기대에 찬 눈으로 보았다.
"아니, 하루면 돼. 지도를 보면 각 지역에 보스 급 몬스터가 5마리에서 많게는 10마리까지 있지. 그중에서 잡을 수 있는 몬스터는 2∼3마리. 1마리 잡는 데 필요한 시간은 대략 20∼30분. 현실의 하루는 가상현실에서 3일이니까 답이 나오지."
모두가 현수를 보았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정도는 다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몬스터는 자신들만 잡는 게 아니었다.
"알아. 이것까지는 다 생각을 해 보았을 테니까. 아니, 생각을 안 했으면 너희들이 부르주아 백수들이 아니지. 하지만 고려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리젠되는 시간이야."
"시간?"
"하루에 한 번 리젠되는 몬스터는 보스 급이란 말이야. 준보스 급은 아니야. 그들은 하루에 세 번 리젠돼!"
"아!"
그때서야 그들은 현수의 말을 이해했다. 보스 급이 아닌 준보스 급은 어디에 가도 널려 있다. 현수의 말대로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좋은 아이템을 구하기는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는 장만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레벨을 올려! 이렇게 해서 상급의 아이템을 맞추든지 아니면 사서 하든지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리고 밀어주기로 아이템을 장만하면 시간도 많이 줄어들 거야. 안 그래? 자신감을 가져. 사부에게 무공을 사사했다고 해서 강한 것은 아니야. 우리가 누구야?"
"백수들이지."
"저놈이 한때 일황이고 내가 일마야. 그리고 저놈이 천의 최고 정보통 만사귀야. 역발산 알지? 모두가 한 번 갔던 길인데 너무 일찍 포기하는 건 조금 자존심 상하지 않아?"
현수의 화술은 순식간에 주위를 장악했다.
"하찮은 삼재검법으로도 충분히 랭커에 들 수 있다. 현실감! BS 그룹에서 실수한 게 그것이야. 재능이 없으면 사부고 무공 비급이고 다 말짱 도루묵이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재능하면 최재능이지."
"넌 빠져!"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도전! 게임하는 데 무슨 도전이냐고 말하겠지만, 삼재검법도 천에서는 최상급의 무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면 되는 거야."
할 수 있다. 현수는 이들에게 자신감을 다시 찾게 해 주었다. 현수 역시 이들 없이는 천에서 버틸 수 없었다.
"우리 다시 모임을 결성하자. 역시 정 사로 따로 분리되어 있지만, 어때?"
"만사귀, 이름만 말해.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절대 사양할 인간들이 아니니까."
만사귀는 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만일 모임을 다시 만들면 건을 주축으로 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수가 모든 것을 주재하지만 대외적인 얼굴 마담은 건이 되어야 했다.
"랭커님께서 부지런히 도와주셔야 합니다. 모임의 이름은 천백회! 천의 백수 모임. 어때?"
"미친놈! 우리, 현수를 장가보내기 위해 천연회는 어때? 낙양성에서 연애한다고 바쁜 현수를 위해서, 천연회."
"빙고!"
이렇게 모임의 이름이 정해졌다. 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자들만 있는 이 삭막한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 느꼈다.
"근데 우리는 남자들뿐이잖아. 그럼 앞으로 수를 맞추기 위해서 여자만 부를까?"
"좋지. 근데 제한을 두는 것이 어때? 아무나 다 가입을 시킬 수는 없으니까."
일사천리였다. 모임의 회칙이라든지 조건들이 순식간에 다 정해졌다.
"한마디 충고하지. 다 좋은데, 내 여자를 건들면 국물도 없다."
말을 한 사람은 천에서 가장 무식하다는 역발산 이상중이었다.
"미친놈! 네 여자는 아무도 안 건드린다. 그러니 제발 데리고만 와라."
그렇게 모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를 보내었다.
현수는 집으로 돌아와 만사귀에게 들은 많은 내용에 대해 야에게 물어보았다.
"어때?"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맞는 것 같습니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내가 무공을 배워서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를 정리해 줘. 무공은 ≪운중비록≫과 ≪살황의 일기장≫이야."
-저기, 현수 님!
"왜?"
-그 정도의 무공을 배우시면 아무 몬스터나 그냥 잡으셔도 됩니다. 다만 현수 님의 눈에 콩깍지가 씌어 구미호에게서 안 떨어지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미호가 예쁘긴 한가 봅니다. 뭐, 여자를 처음 본 현수 님의 눈에 어떤 여자가 안 예쁘겠습니까마는.
"야! 너 꼭 끝에 가서 그렇게 말을 해야겠냐. 지금 설령이를 한 트럭으로 갖다 줘 봐라. 내가 눈이 돌아가나. 미호 아가씨가 얼마나 예쁘고 착한데."
-어련하시겠습니까. 참, 설령이라는 영화 배우 역시 천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디는 이름 그대로 설령을 사용하고 있으며 보타신니를 사부로 모셨고, 지금은 무예 수련 중이라고 합니다. 아마 곧 출도할 것입니다.
"너! 혹시 스토커 아니야?"
-아닙니다. 방송에서 연일 떠들고 있지 않습니까? 아, 늦게 접속하시면 미호 아가씨께서 화를 내십니다.
"꼭 할 말 없으면 말을 돌리지. 어쨌든 요즘 컴퓨터들은 스토커 짓도 하다니… 세상 좋아졌다. 그리고 미호 아가씨 역시 내가 유저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오늘은 그냥 푹 쉬고 내일 접속하련다."
-그렇게 하십시오. 가끔은 푹 쉬는 것이 현수 님의 정신 건강에도 좋습니다.
"그런 소리 마! 야, 넌 컴퓨터야. 부탁하는데 그 딱딱한 음향으로 제발 사람처럼 말하지 좀 마!"
야는 아무 말도 없었다. 현수는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현수는 몸이 개운한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오랜만에 긴 시간 동안 잠을 잔 것 같았다. 그는 가상현실 천의 접속기를 보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접속을 했다.
"그래. 오늘은 결정을 하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천 접속!"
언제나 그렇지만 접속할 때 느끼는 약간의 어지러움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제 오느냐?"
구미호 역시 현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미호 아가씨, 목욕하셔야죠."
현수가 몸을 돌려 구미호의 욕실로 가려고 할 때, 구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나를 지키기 위해서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처음에는 무공 비급을 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무공 비급을 얻기 전에는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니, 중간에 기회가 오면 아가씨에게서 무공 비급을 훔쳐 가려고 기회만 보고 있습니다. 하나 5달! 그 5달이라는 시간이 생각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냥 미호 아가씨가 좋습니다. 1,000년이고 1만 년이고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호 아가씨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에게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전 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가씨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미호 아가씨가 아닌 다른 분을 보호해야 한다면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다른 세계에서 조금은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겠지만, 이곳에서 아가씨와 함께 있는 동안은 행복할 것이니 말입니다."
현수를 보던 구미호는 말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구미호가 이틀이 넘게 보이지 않자 현수는 걱정이 되었다. 요즘은 레이드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혹시 나갔다 그들에게 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갔을까?"
그때 나타난 그림자! 현수는 누구의 그림자인지 알고 있었다.
"어디를 그렇게 다녀오세요. 얼마나 걱정했는데."
"들어가자."
그녀의 가슴에는 다리를 다친 새끼 여우 1마리가 안겨 있었다.
"이리 온! 지금 엄마가 몹시 피곤한 것 같지? 이 오빠가 재미있게 해 줄게."
손을 내밀자 여우는 구미호를 한 번 보더니, 현수의 품으로 옮겨 갔다.
"방에 옮겨 놓고 나의 방으로 오너라."
현수는 여우의 볼을 쓰다듬으며 밖으로 나갔다.
"여기가 앞으로 너의 방이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어."
우우.
여우의 울음소리를 뒤로한 현수는 다시 구미호의 방으로 갔다.
"앉아라."
식탁에는 술병과 약간의 음식이 놓여 있었다. 현수는 구미호가 술을 마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마실 줄 아느냐?"
구미호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현수의 잔을 채웠다.
"그럼요. 술 하면 저 현수잖아요."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한 병이 되어, 한 병이 어느새 세 병으로 늘었다.
"아가씨! 이제 그만 주무세요. 많이 취하셨어요."
반쯤 감긴 채 현수를 보는 구미호의 눈은 마치 사랑하는 정인을 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그래, 지금도 같은 생각이냐? 나를 지켜 주기 위해서 무공을 배우겠다는 게?"
침묵은 긍정이라고 했던가. 현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정말 내가 좋으냐?"
또 한 번의 침묵.
"나를 취할 자신이 있느냐?"
놀란 현수는 눈을 크게 떴다. 취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를 취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에이! 지금 많이 취하셨어요. 주무세요, 아가씨."
그런데 구미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나에게서 무공을 배우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으로, 나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만 번만 죽어라."
첫 번째는 조금 황당했다. 하지만 두 번째는 더 황당했다.
"그냥 죽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요?"
"왜 나를 취하지 않으려고 하지? 이제껏 내게 했던 모든 말이 거짓이었더냐?"
"아니에요. 잘은 모르지만 그런 것이 있대요. 남자는 한 번 같이 잔 여자에게는 조금 소홀해진다는. 전 그게 싫어요. 아가씨에게 소홀해지는 것이. 지켜 주고 싶어서 무공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지, 소홀해지기 위해서 배우는 무공이 아니니까요."
구미호의 얼굴은 이미 현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일어서는 구미호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조심하세요."
비록 레벨 9라고 하지만 스탯 전부를 민첩성에 투자한 현수의 신형이 빛을 발했다. 현수는 넘어지려는 구미호를 부축했다.
"고맙구나."
"많이 취하셨어요. 그리고 아가씨, 지금은 주무실 시간이에요."
현수는 구미호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일어나려는 현수의 목을 구미호가 팔로 감아 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만났다. 현수는 무엇인가가 구미호의 입을 통해 나와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현수는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자야겠구나."
구미호의 말이 현수를 깨웠다.
"편히 주무세요."
"내일부터는 이곳을 떠나 만 번만 죽고 오너라.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
-퀘스트! 강제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만약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을 시에는 퀘스트를 준 이가 대신 수행해야 합니다.
흠칫한 현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구미호가 보였다.
그는 곁으로 가서 구미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할게요, 아가씨. 남들이 그러는데 이게 사랑이라고 하네요. 내가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확신했어요. 빨리 끝내고 올게요. 전 아가씨가 다치는 것을 볼 수 없을 테니까요."
현수는 뒤를 돌아 구미호의 방을 벗어났다.
현수가 방을 벗어나자 구미호가 눈을 떴다. 취해 있는 눈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정인을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넌 정이 깊어 어쩔 수 없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게 만드는구나. 하지만 약속하마. 만약 만 번을 죽고 나서 나의 내단을 녹일 수 있다면, 그 이후로는 너를 죽일 수 있는 자가 없게 만들어 주마."
* * *
현수는 낙양성으로 향해 발길을 돌렸다. 낙양성에서 찾아간 곳은 전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왜 오지 않았느냐."
현수는 이렇게 말하는 전장 주인의 속을 알고 있었다. 고기! 한동안 현수에게서 받은 고기 때문에 포식을 할 수 있었기에 전장 주인뿐만 아니라, 낙양성의 모든 NPC들이 현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되었어요, 헤헤. 근데 이곳에 물건을 맡기려면 얼마나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돈은 무슨. 고기가 먹고 싶으니 고기를 조금 구해 주면 그냥 보관해 주마."
내심 기뻤지만 현수는 은전 1냥을 주고 아이템들을 맡겼다. 가진 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지는 혹여 죽다 떨어뜨릴까 봐 전장에 맡겼다.
"고기는 다음에 올 때 드릴게요. 지금은 가진 고기가 없어요."
"그래. 대왕 멧돼지 고기가 참 맛있더구나. 하하하."
인사를 하고 나온 현수는 용문 석굴로 향했다.
"일단 고기를 조금 구하고 시작하자."
멧돼지를 사냥하는 건 쉬웠다. 어느 정도 고기를 구했을 때 현수의 앞에 또다시 대왕 멧돼지가 나타났다.
"저놈의 송곳니는 언제나 무섭게 보이는군."
대왕 멧돼지와 한, 두 번의 사투로 얻은 경험으로 인해, 현수는 보다 빨리 대왕 멧돼지를 잡을 수 있었다.
"자, 이제 죽자!"
현수는 이제 말도 되지 않는 퀘스트를 시작하려고 했다.
천연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조직에서 현수와 건을 제외한 회원들은, 현수의 말대로 함께 준보스 급의 몬스터를 사냥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야, 만사귀! 여기가 틀림없어?"
"그래! 조금만 더 가면 호족이라는 금수족이 나와. 레벨은 15인데 사냥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그리고 다들 알겠지만 잡고 있으면 준보스 급 몬스터인 백호가 나올 거야. 백호의 레벨은 비록 35이지만 일반 몬스터보다 강하니까 이번에는 조심해야 할 거야."
만사귀의 말대로 조금 더 들어가니 호족이라는 몬스터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생긴 건 호랑이와 비슷했지만, 직립보행을 한다는 게 달랐다.
3∼4마리씩 무리를 짓고 다니는 그들에게 달려 나가는 이가 있었다. 바로 역발산이었다.
"미친다, 저놈!"
"야! 그게 천성이다. 그리고 얼마나 듬직하냐. 혼자 두들겨 맞아 주잖아. 우리도 빨리 가자."
7명은 역발산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그러고 보면 8명 중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객이와 필살검을 제외하고, 다들 나머지 놈들을 막고 있어. 빨리 처리하고 한 놈씩 잡게!"
"알았어."
선두에 선 역발산과 화령검객, 필살검은 만사귀의 말에 따라 눈앞에 보이는 호족들을 공격했고, 다른 사람들은 호족들을 따로 상대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것들, 15레벨이 맞아? 더럽게 아프게 들어오는데."
"참아! 곧 도와주러 올 거야."
호족들의 움직임은 같은 레벨의 몬스터들보다 훨씬 빨랐다. 또한 공격력 역시 높아, 천연회의 멤버들은 사력을 다해 이들이 뭉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하지만 강한 공격력과 재빠른 민첩성을 가지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체력은 같은 레벨의 몬스터들보다 다소 떨어졌다.
역발산은 호족들의 강한 공격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며 탱커의 역할을 다했다.
크아아아!
호족이 쓰러지자 역발산은 빠르게 다른 호족의 앞을 막아섰다.
"크하하하! 내가 바로 역발산 님이시다."
역발산이 오자 호족과 싸우고 있던 화화공자가 한숨을 돌리기 시작했다.
"무식한 놈!"
"화화공자! 다른 쪽을 도와!"
쉴 틈도 안 주는 만사귀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화화공자였다.
"그놈의 아이템이 뭔지."
4마리의 몬스터가 하나하나 죽어 가자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지금부터는 각자 1마리씩 맡으면 되니까 빠르게 처리하고 쉬기로 하자."
4마리의 몬스터가 1마리씩 리젠이 되자 싸움은 더욱 편해졌다.
"안 나오려나?"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백호를 생각하며 환상검이 말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수금원은 다시 리젠되는 몬스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언제나 몬스터가 나타나면 역발산이 선두에 섰다.
갑자기 날이 흐려졌다. 모두는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큰 포효와 함께 나타나는 백호를 보며 모두는 오금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강한 놈이다."
"이거, 정보가 잘못된 거 아니야?"
"몰라! 다만 저놈이 이들의 대장은 맞나 본데.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다."
백호를 보며 자신 있게 소리치는 사람은 역발산뿐이었다.
"아이템 하나만 거창하게 떨어뜨려 주라. 이놈, 하얀 고양이야!"
역발산이 달려들자 모두 함께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구나."
백호의 손이 올라갔다. 달려오는 역발산을 보고는 미소를 짓는 백호였다.
"컥!"
순간 역발산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모두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역발산은 힘겨운 듯 자리에서 일어나 벽곡단을 입 안으로 넣었다.
"장난 아닌데. 나의 체력이 거의 다 날아갔어. 한 방에!"
역발산의 말에 또 한 번 멍해지는 이들이었다. 만사귀는 백호를 보자 생각나는 몬스터가 있었다.
"제기랄!"
갑작스럽게 '제기랄!'을 외치는 만사귀를 보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모두들 백호를 보았다.
"호족의 백호가 아닌 사신수의 백호 같다."
"씨팔! 만사귀! 어떻게 안 되겠냐?"
"아마 여기서 한 번은 눕겠지."
모두는 이길 수 없는 적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이래저래 죽기는 마찬가진데 한 번 칼질이라도 해 봐야지."
필살검이 달려들었다. 양손에 들린 단검을 어지럽게 움직였다. 백호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피하기만 했다.
"기개는 좋으나 실력이 따라오지 않는군!"
"우엑!"
아무도 백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 백호의 주먹은 필살검의 복부에 박혀 있었다.
"씨팔!"
필살검은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고통이 상당했다.
"살검아!"
역발산은 필살검을 부르며 백호를 상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주먹이 아니라 무작위로 상대를 보고 치는 주먹이었다. 백호의 입가에는 조소가 피었다.
"윽! 사신수고 오신수고, 몬스터는 몬스터잖아. 다 덤벼!"
한 방에 나가떨어져야 할 역발산이 이를 악물고 소리치는 것을 보자 백호의 눈빛이 빛났다.
"오호! 이거 물건이네. 좋아! 내, 좋은 것을 보여 주지."
백호의 손이 순간 빠르게 움직였다.
"호조십팔연환권!"
순간 백호의 손톱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컥!"
역발산을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 백호의 손톱에서 일어나는 불꽃에 적중당해 땅에 뒹굴어야 했다.
"크윽!"
죽지는 않았는지, 모두 백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백호는 오히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 그들을 보았다.
"음! 1성의 호조십팔연환권에 맞고도 살았군. 2성으로 올리면……."
말을 줄이는 백호였지만, 모두는 백호가 자신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고 생각했다.
"좋아! 250레벨의 보스 몬스터라 이거지."
화령검객이 검을 의지해 일어났다. 그러자 하나 둘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으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왕 죽는 거 멋지게 죽어 보자."
화령검객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비록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고는 하나, 베타 시절 상위 랭킹에 들어갔던 실력자답게 날카롭게 백호의 빈틈을 파고 들어갔다.
"이거나 먹어라."
필살검의 양손에 들려 있는 단검이 백호를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그래! 남자는 깡이다!"
역발산이 피하는 백호를 보고 달려들어 허리를 잡았다.
"이아아아아!"
역발산은 있는 힘을 다해 양팔에 힘을 주었다.
"지금이다."
역발산이 외치자 모두는 백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쾅!
"윽!"
"커억!"
"젠장! 호신강기라니!"
백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으로 옷을 만지고 있었다.
"후후! 호신강기가 아니라 선천강기다."
"닝기리! 그냥 우리를 죽여! 가지고 놀지 말고."
화화공자가 화가 나서 외쳤다.
"안 그래도 지금 모두 죽여 주려고 했다. 이제 재미없거든! 그리고 나의 아이들을 함부로 죽이지 마라."
"개뿔! 내가 다시 와서 다 쓸어버릴 거니까 그때마다 날 죽여."
환상검이 외치자 백호의 손이 움직였다.
"컥! 언제……."
환상검이 쓰러졌다. 도저히 자신들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었다.
"가라, 어리석은 인간들! 호령밀수인!"
순간 백호의 손에서 무수히 뻗어 나온 기운들이 한 가지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천연회의 사람들에게 쇄도해 나갔다. 모두는 그 모습을 보고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백호가 내지른 한 번의 손짓으로 모두 죽어 버렸다.
"후후! 다음에 또 오려나? 그나저나 한 놈의 눈빛은 마음에 들어."
백호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날씨는 언제 그러했냐는 듯 푸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