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
현수는 전날의 기분을 완전히 털어 냈다. 그리고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다시 천에 접속하였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름 : 이현수 레벨 : 4
직업 : 무 체력 : 145
기력 : 115 공격력 : 10
방어력 : 10 순발력 : 10
민첩성 : 18 NPC와의 호감도 : 2%
경험치 : 90/100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레벨 업을 할 수 있었다. 현수는 다시 건달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목표로 했던 5레벨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미 민첩성에 스탯을 다 투자한 현수의 움직임은 건달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수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갔던 길이라, 어떻게 사냥해야 더 효율적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해진 사냥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며 무리하지 않았다.
-띠링!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이제 돈이 조금 되는 멧돼지를 잡을 수 있겠군. 방어구와 무기도 맞추어야 한다. 얼마나 중노동을 해야 할지 몰라도 말이야 .'
현수는 대장간에 가서 다시 단검의 날을 세웠다.
"여기 다 되었다."
"감사합니다. 여기 동전."
"하하. 사내는 당연히 이렇게 통이 커야지."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현수는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정해져 있는 보수보다 항상 조금씩 더 주었다.
"별말씀을 다 하세요. 다음에 올 때는 좋은 무기를 하나 부탁할게요."
"걱정하지 마라. 이곳에는 좋은 무기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네. 그럼 수고하세요."
현수는 멧돼지가 있는 낙양의 용문 석굴 근처로 향했다.
용문 석굴 근처로 이동을 한 현수는 예전에 자신이 사냥을 했던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이미 많은 유저들이 사냥 순서를 알고 있는 상황이기에 남들보다 빨리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가? 멧돼지들이 안 보이네."
몬스터보다 유저들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것을 보니 조금 갑갑했다.
다행히 그가 예전에 사냥했던 장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거기에서 2마리의 멧돼지가 좌우로 서성거렸다.
"이번에 레벨 업을 하면 순발력에 투자해야겠다."
앞으로 보다 강한 힘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발력이 필요하다.
현수는 주위에 떨어진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어 멧돼지에게 던졌다.
슈슈슈슛!
킁킁킁!
돌이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틀어 현수를 발견한 멧돼지는 곧장 돌격하기 시작했다.
현수 역시 뒤로 도망가다가 커다란 나무를 등지고는 멧돼지를 노려보았다.
"하나, 둘, 셋! 지금!"
쿵!
빠른 동작으로 멧돼지를 피했다.
달려오는 속도에 못 이긴 멧돼지는 그대로 나무에 부딪쳤다. 커다란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현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대로 부딪쳤으면 뼈도 못 추릴 뻔했다. 하여간 무식한 놈들이야."
충격이 있었는지 멧돼지는 금방 움직이지 못했다.
현수는 단검을 멧돼지에게 던졌다.
"이렇게 하면 쉽게 잡지."
현수는 예전에 썼던 멧돼지 잡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다.
역시 이번에도 효과 만점이었다.
하지만 현수가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과거 베타 시절에는 스탯 포인트를 5개 주어 힘과 민첩성, 순발력을 1 : 1 : 3의 비율로 올렸다. 하지만 정식 서비스인 지금은 스탯 포인트가 2개! 그것도 모두 민첩성에 투자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현수의 실수에 대한 대가가 찾아왔다.
킁킁킁킁!
"뭐야! 안 죽었어?"
달려드는 멧돼지를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다 결국 멧돼지의 공격에 부딪쳤다.
"악!"
멧돼지에 부딪쳐 날아간 현수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씨팔! 뭐 이따위로 만들어? 진짜 팔이라도 하나 날아가서 병신 되는 것 아니야?"
다시 돌진해 오는 멧돼지 때문에 쉴 수도 없었다.
"닝기리!"
눈앞의 나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멧돼지 역시 나무에 또 한 번 부딪치고는 쓰러졌다.
"이제 제발 죽어라."
달려 들어가 꽂혀 있던 단검을 뽑아 들고 있는 힘을 다해 멧돼지의 목을 찔렀다.
쿠에에엑! 쿠엑!
몸부림치던 멧돼지가 힘없이 쓰러졌다.
"1마리 잡기 힘드네. 작전을 다시 세워야 하나……. 일단 고기를 얻어야지."
단검으로 멧돼지의 배를 가른 후 뼈를 발라내고는 고기를 얻었다.
-생활 스킬, 도축을 배웠습니다.
도축이라는 스킬을 배운 것을 확인한 현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운이 좋은 건가? 한 번에 배울 수 있다니."
다시 돌을 집어 들어 맞은편에 있는 멧돼지를 향해 던졌다. 현수는 같은 방법으로 멧돼지를 사냥했다.
달라진 것은 나무를 두 번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두 마리를 모두 잡은 현수는 앉아서 쉬었다. 그리고 멧돼지들이 리젠되기를 기다리며 체력을 비축했다.
"젠장! 빵 값이 너무 비싸."
현수는 비싼 벽곡단이나 건포를 욕하며 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리젠된 멧돼지들을 보고 똑같은 방법으로 사냥을 계속했다.
어떻게 보면 조금 효율성이 없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필드를 돌아다니면서 사냥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초반에는 몬스터 1마리를 가지고 많은 시비가 붙는다. 거기에 이놈 저놈 신경 쓰다 보면 손해였다.
차라리 이렇게 조용히, 돌아가며 2마리를 사냥하는 것이 더 나았다.
이렇게 한 장소에서 사냥하는 것의 장점은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좋은 아이템을 먹을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것이 다 베타 때부터 축적된 경험의 결과였다.
"거지들만 모였나? 그렇게 잡아도 아이템 하나 주지 않네. 이것들아, 다른 것은 안 바란다. 유니크 하나 다오. 제발 부탁한다."
멧돼지를 볼 때마다 유니크를 외쳐 봤지만 현실은 너무 냉혹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하아, 정말 순발력에 투자를 하든지 해야겠다. 아이템이 받쳐 줘야 뭐, 민첩성에 올 인하든지 하지."
현수는 순발력에 스탯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상태 창 오픈!"
이름 : 이현수 레벨 : 7
직업 : 무 체력 : 190
기력 : 130 공격력 : 10
방어력 : 10 순발력 : 10
민첩성 : 22 NPC와의 호감도 : 5%
경험치 : 3/100
생활 스킬 : 도축-가죽과 고기를 얻을 수 있다.
마음과는 다르게 본능적으로 민첩성에 투자해 버린 현수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미치겠네. 왜 손이 이리 움직였지.'
현수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멧돼지와 부딪쳤을 때에 느낀 아픔을!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민첩성에 손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아."
후회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결국 현수는 다 포기하고 다시 사냥을 시작했다. 사냥은 인벤토리가 멧돼지 고기로 가득 찰 때까지 이어졌다.
"젠장! 어떻게 인벤토리가 다 찰 때까지 아이템 하나 안 주냐!"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끝까지 개털이었다. 이건 뭐, 완전히 거지들이었다.
현수는 낙담하며 가득 찬 멧돼지 고기를 처분하기 위해 낙양성으로 향했다.
낙양성에 도착한 현수는 정육점을 찾아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혹시 멧돼지 고기 필요하지 않으세요?"
현수는 정육점 주인에게 물었다.
"미안하구나. 지금은 고기가 많이 있어 당분간은 필요가 없을 것 같구나."
"예? 피, 필요 없다고요? 하하……."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기껏 애써서 도축 기술까지 익혀 챙겼는데 허망했다. 예전에는 가져오는 고기마다 잘만 사 줬는데, 정말이지 빌어먹을 현실감이었다.
현수는 졸지에 애물단지가 된 고기들을 어떻게 처분할지 생각했다. 그렇다고 버리기는 싫었다.
"하아."
수중에 있는 돈도 이제 겨우 은전 35냥, 동전 27냥뿐이라 암담했다.
현수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대장간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혹시 고기 필요하세요? 조금 남는데 드릴까요?"
"그래? 안 그래도 고기가 떨어져서 정육점에 사러 가려고 했는데 그거 잘되었구나."
현수는 인벤토리에서 100개 묶음짜리 멧돼지 고기를 한 다발 주었다.
"여기요. 맛있게 드세요."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아저씨. 다음에 올 때 무기를 사 갈게요. 지금은 돈이 많이 없어서 사지 못하겠어요. 죄송합니다. 정육점에서 고기만 사 주어도 무기를 살 수 있었는데."
현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포목점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아저씨. 혹시 제가 입을 옷이 있나요?"
"그럼. 자, 자! 이리 들어와라."
현수는 7레벨이 입을 수 있는 옷들을 찾아보았다. 하나 모두 10레벨부터 입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에유! 아저씨, 죄송해요. 전 아직 입을 수 있는 것이 없네요. 그 대신 고기를 드릴게요.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꼭 좋은 옷으로 사 입을게요. 미안합니다."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허허, 없다니 조금 아쉽구나. 하지만 다음에 오면 내가 조금 싸게 주마. 그리고 고기는 잘 먹을게."
"헤헤! 고맙습니다."
이렇게 낙양성의 NPC들에게 고기를 다 나누어 준 현수는 호감도를 상승시킨 것으로 만족했다.
"무기를 샀어야 하는데. 젠장, 아무리 사실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고기는 사 줘야 할 것 아니야."
현수는 다시 멧돼지를 사냥하기 위해 움직였다.
"유저들이 쓰던 무기라도 사야겠다. 언제까지 피해 다니며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야가 10레벨 때 전직을 한다고 그랬으니 빨리 전직을 하기 위해서라도 무기를 갖추어야 한다."
현수는 조금 비싸지만 유저들에게 옵션이 달린 무기를 구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멧돼지를 잡아서 10레벨까지 올리면 매직 급이라도 사서 전직하자."
시간이 되자 현수는 일단 접속 해제를 한 후 알람을 맞춰 놓고 잠을 청했다.
* * *
따르릉-.
알람 시계가 울리자 현수는 재빨리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면대에 물을 받아 놓고 냉장고에서 꺼낸 얼음을 넣었다.
잠시 후 찬물로 세수를 하며 잠을 쫓아 버린 현수는 다시 가상현실 천에 접속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그런 현수를 야가 말렸다.
-그냥 주무시는 것이 좋습니다.
"야! 잔소리 그만 하고 아이템이나 알아봐!"
현수는 그런 야의 염려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잠까지 설치면서 게임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어."
-알겠습니다. 아이템은 아직 매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일단 순발력 옵션으로 알아봐!"
현수는 야에게 거듭 강조한 후 천에 접속했다. 그리고 10레벨을 목표로 사냥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사냥 장소는 처음부터 이용하던 곳이었다.
"헉!"
그렇게 한참 동안 사냥하던 현수는 갑자기 나타난 한 존재를 보는 순간 기겁했다.
보통 멧돼지에 비해 덩치가 3배에 달하는 녀석의 정체는 다름 아닌 대왕 멧돼지였다.
"젠장!"
지금 현수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니, 저게 왜 여기에 나타나냐고!"
현수는 그때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과 멧돼지의 치열한 추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학학! 미치겠네!"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차피 10레벨 이하 때 죽으면 페널티는 없다. 하지만 현수는 그런 것보다, 멧돼지가 줄 고통이 두려웠다.
"젠장! 젠장! 젠장!"
현수는 도망치는 내내 이 빌어먹을 상황에 대해 쉬지 않고 욕을 했다.
킁킁킁.
어느새 대왕 멧돼지가 뒤로 바짝 붙었다. 현수는 생생하게 느껴지는 대왕 멧돼지의 숨결에 미칠 것만 같았다.
"오지 마! 저리 가!"
뭐 빠지게 달리던 현수는 점점 시야가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벽이 보였다.
이제 도망칠 곳도 없었다.
용문 석굴 입구에서 한쪽 벽을 등진 현수는 재빨리 뒤돌았다.
"젠장. 저놈한테 맞으면 무지 아프겠는데."
이런 현수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왕 멧돼지는 그대로 돌진해 왔다.
킁킁킁.
"타이밍, 타이밍!"
현수는 심호흡을 했다. 점점 커지는 대왕 멧돼지의 그림자에 맞춰 공포가 더해 갔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현수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피했다.
퍼어억-.
하지만 대왕 멧돼지는 일반 멧돼지보다 덩치가 월등히 컸다. 현수는 다 피하지 못하고 결국 대왕 멧돼지의 몸통에 부딪쳤다.
"커어억!"
살짝 빗맞은 한 방에 체력이 반이나 날아갔다.
"젠장! 살짝 부딪쳤는데 반이나 깎이다니."
비싸다고 건포를 사지 않았던 게 후회되었다. 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대왕 멧돼지는 다시 달려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씨팔! 그래,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다른 선택은 없었다. 현수는 이를 악물고 대왕 멧돼지를 노려봤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빠른 발을 이용해 때리고 또 때리면 저놈이라고 안 죽겠어?'
그렇게 마음먹으니 조금 용기가 생겼다. 하지만 몸은 정직했다.
현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통을 기억하는 몸은 자꾸만 움츠러들려 했다.
파바박-!
땅을 박차고 돌진하는 대왕 멧돼지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현수와 대왕 멧돼지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떨어진 체력도 조금씩 차올라 이제는 체력 게이지가 꽉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지치는 것과 체력 게이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현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헉! 젠장."
준보스 급 몬스터라 그런지 체력이 엄청 강했다.
현수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지금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런 현수를 구경하는 유저들이 생겨났다.
"화이팅!"
그리고 이어진 응원에 현수는 깜짝 놀랐다. 한창 집중하고 있느라 누가 구경하는지도 몰랐다.
현수의 고개가 자연스레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때맞춰 대왕 멧돼지가 현수를 받아 버렸다.
"악!"
현수는 이번에도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에 붕 떴다가 바닥을 굴렀다.
"아!"
구경꾼들 사이에서 아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젠장! 쪽 다 팔았네! 이놈 하나 가지고……."
이제 아프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현수에게는 구경하는 유저가 더 신경 쓰였다.
사실 대왕 멧돼지는 7레벨에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적어도 전직을 해야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바로 대왕 멧돼지였다.
현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그저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제발 죽어라! 죽어! 헉헉헉."
그때부터 현수는 고통을 잊은 채 대왕 멧돼지와 맞서기 시작했다.
승부는 점점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현수의 발이 느려졌고, 대왕 멧돼지도 움직임이 둔해져 갔다.
"젠장!"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대왕 멧돼지의 어금니가 스쳐 지나갔다. 이제 남은 체력은 10, 한 방만 스쳐도 끝이었다.
"학학."
덕분에 한창 흥분했던 현수는 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좀 더 지능적으로 대왕 멧돼지를 상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돌진해 오는 멧돼지를 최대한 피해 살짝 단검으로 긋고 지나갔다. 그런 현수의 행동이 반복되자 대왕 멧돼지의 행동이 점점 둔해졌다.
느낌이 왔다!
계속된 출혈로 인해 대왕 멧돼지가 점점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죽어라! 죽어!"
현수는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왕 멧돼지가 알아서 죽을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우우."
구경하던 유저들의 야유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죽고 사는 문제에서 조금의 야유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디 엔드."
이제 완전히 지쳐 쓰러진 대왕 멧돼지를 향해 현수가 단검을 던졌다.
푸욱.
현수가 던진 단검이 대왕 멧돼지의 목에 깊숙이 박혔다.
꾸웨엑!
약간 몸부림을 치던 대왕 멧돼지는 이내 멱따는 소리를 끝으로 죽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상태 창 오픈!"
이름 : 이현수 레벨 : 9
직업 : 무 체력 : 220
기력 : 140 공격력 : 10
방어력 : 10 순발력 : 10
민첩성 : 26 NPC와의 호감도 : 15%
경험치 : 40/100
생활 스킬 : 도축-가죽과 고기를 얻을 수 있다.
이번에도 역시 전부 민첩성이었다.
현수는 재빨리 죽은 대왕 멧돼지의 목에서 단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도축을 시작했다.
"아싸!"
현수는 도축하던 도중에 아이템을 발견했다. 천을 시작한 후 처음 얻은 아이템이었다.
현수는 보는 눈이 많아 아이템을 확인하지 못하고 바로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행히 도축이 끝나지 않은 덕분에 다른 유저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도축이 끝나 갈 때쯤이었다.
"축하합니다. 벌써 전직하셨나 보네요."
"네?"
다가와서 물어보는 사내는 안경을 쓰고 있는 유저였다. 안경 안으로는 조금 날카롭게 보이는 눈. 그리고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아닙니다. 전 이제 9레벨입니다. 이곳에서 사냥을 하다 우연히 마주쳐서 싸웠을 뿐입니다."
현수의 말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9레벨 유저가 대왕 멧돼지를 잡았다는 소리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현수구나."
현수는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건!"
"너도 이벤트에서 떨어졌냐?"
"일황!"
유저들 중 1명이 건을 알아보고 외쳤다. 그리고 유저들은 둘의 대화에 다시 놀랐다.
베타 시절의 전설을 마주한 것이다.
"일마!"
현수는 사람들의 외침에 씁쓸했다.
"한때 그렇게 불린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저기 일황이라 불렸던 최건처럼 여러분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유저입니다."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최건에게 집중되었다.
마도를 대표하는 일마와 정도를 대표하는 일황.
전설을 마주한 유저들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최건은 그런 사람들의 눈이 불편했다. 그래서 현수에게 먼저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자리를 옮기자. 눈이 많다."
"그래."
현수와 최건은 낙양성으로 이동했다.
"전직은 했나?"
"아니, 이제 9레벨이야."
"뭐? 지금쯤 15레벨은 되어야 하는 거 아냐?"
현수는 건의 말에 속이 쓰렸다.
자신 역시도 잘 알고 있는 문제였다.
사실 순발력에 스탯을 투자했다면 적어도 15레벨은 무난히 됐을 것이다. 하지만 손이 본능적으로 민첩성을 찍어 댔으니 어쩔 수 없었다.
몸이 거부하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 답이 안 나온다. 맞는 것이 아파 민첩성을 올렸더니 한 방이 없다. 또한 고기도 이제 잘 안 사 주니 아이템 맞추기도 힘들고, 이래저래 답답한 상황이다."
현수는 최건에게 하소연했다.
서로 정점에 있었던 사람들이라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현실에서 역시 상당히 가까운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차라리 목표를 정해 노려 보지 그래?"
"목표?"
"그래. 이번에 대왕 멧돼지를 잡은 것처럼 준보스 급 몬스터나 보스 급 몬스터로."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대왕 멧돼지 하나를 잡은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 아예 그것을 노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지금 순발력이나 다른 스탯을 올리면 나중에 게임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알아본 결과, 스탯 포인트 하나 때문에 캐릭터가 망가질 수도 있어. 새로운 무공 시스템 때문에 말이야."
"그럼 민첩성을 계속 올리면 캐릭터가 안 망가지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기와 무공만 받쳐 주면 괜찮아."
현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뒷받침할 무공을 과연 구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최건은 그런 현수의 생각을 짐작하고 다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니까 노리고 들어가란 말이지. 일반 몬스터보다 준보스 급이나 보스 급에서는 아이템이 떨어질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알아봤는데 저레벨대 준보스 급 몬스터는 그렇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야. 다만 체력이 조금 강하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야. 그리고 나 역시 초반에 노리고 들어가서 기본 장비를 다 맞출 수 있었다."
현수는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너나 해라. 난 싫다. 그냥 돈 주고 아이템 사서 맞출 거다."
"뭐, 네 마음대로 해라. 참고로 난 17레벨이다. 넌 이제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 앞으로 쭉. 혹시 무기를 구해 열렙한다면 몰라도 영영 날 따라올 수 없을 거야. 하긴 너와 나에게는 레벨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장식품이긴 하지만 말이야."
"젠장!"
"친구, 그럼 난 가네. 오늘은 무척 기쁘다네. 친구 또한 나처럼 이벤트에서 떨어졌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편안하다네. 사실 친구가 이벤트에 당첨이 되었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말이야."
최건은 사냥을 하기 위해서 필드로 나갔다.
"아 씨! 사람 속 다 뒤집어 놓고 가네."
현수는 한참 동안 투덜대다 자신이 챙긴 아이템이 생각났다.
"아, 맞다! 아이템 확인!"
이름 : 녹옥 반지
등급 : 레어-하급
특성 : 착용자의 체력 회복 속도 2% 증가, 순발력 2 증가
설명 : 녹옥으로 만들어진 간단한 모양의 반지
"아싸!"
현수에게 꼭 필요한 아이템이 나왔다.
비록 무기는 아니었지만 순발력 플러스 2에 체력을 2%나 빨리 회복시켜 주는 반지니, 대박이었다.
적어도 순발력이 부족한 현수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아이템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희희낙락하던 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젠장! 1마리 잡는 데 벌써 하루가 가 버렸단 말인가! 에이."
허기가 느껴진 것이다.
현수는 어쩔 수 없이 접속을 해제하고 야를 찾았다.
현수에게 있어 야는 정보 창고와 같은 역할을 했다.
"야!"
-말씀하십시오. 오늘도 국밥을 시켜 드릴까요.
"아니, 밥은 나가서 먹고 올게. 하나 물어보자."
-어떤 것을 말입니까?
현수는 건에게 들은 내용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 역시 이야기해 주었다.
-건 님의 말씀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역시 건 님께서 현수 님보다 머리가 좋은 것 같습니다. 사법 고시를 2차까지 패스했으면서 게임만 하고 있다는 점은 이해가 안 되지만, 확실히 건 님은 현수 님보다 한 수 위에 있습니다.
"야! 너, 본론만 말해."
현수는 길어지는 야의 말을 막았다.
요즘 들어 야가 하는 말들이 조금씩 삐딱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현수였다.
-무슨 말을 못 하게 하십니까? 지금 저의 말을 듣기 싫다는 것입니까?
"킁! 그게 아니고! 야, 말이 그렇잖아. 건이가 사법 고시를 패스한 거랑 준보스를 노리는 것은 상관이 없잖아. 안 그래?"
-알겠습니다.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래저래 현수 님의 캐릭터를 지우는 것이 좋습니다!
"야! 한번 봐주라, 응?"
사실 다시 캐릭터를 만든다고 해서 별다른 변화가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이 총체적인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야의 조언이 필수였다.
-건 님의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몬스터의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건 님의 말씀을 따를 것 같으면 파티원 8명을 더 구해야 합니다. 천의 전 필드에서 준보스 급 몬스터의 수는 총 80여 개입니다. 또한 보스 몬스터는 적룡과 사신수 그리고 만 년을 산 구미호를 제외하고 30여 종입니다. 미발견 던전까지 치면 더욱 늘어납니다.
현수는 야의 말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놈은 어떻게 저런 것까지 다 알고 있지?'
-하지만 현재 현수 님께서 잡으실 수 있는 몬스터는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때?"
-생각할 가치도 없습니다.
현수는 오늘도 야의 말에 침묵했다.
"그래, 네 똥 굵다. 나, 나가서 밥 먹고 올게."
현수는 옷을 대충 챙겨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가끔 가는 정식집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현수가 일할 때 항상 점심을 먹던 곳이었는데 4,000원에 여섯 가지 반찬이 나오는, 상당히 깔끔한 곳이었다.
"어머! 현수 총각 왔네? 한동안 안 보이더니. 그래, 지방 출장 갔다 왔어?"
"아니에요. 저 일 그만두었어요. 다른 일 하려고요. 그래도 가끔 이곳에 와서 밥 먹을게요."
"그래!"
형식적인 말이었지만 그래도 관심을 가져 주는 아주머니가 고마웠다.
밥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레이드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렇게 사냥을 해서 아이템을 하나씩 장만하며 올라갈 것인가.
"후."
암만 생각해 봐도 결국 건의 말이 맞았다. 그래서 현수는 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좋아! 건이 말대로 노려서 잡아 주지. 그리고 오늘 받은 것도 꼭 돌려주겠어!"
마치 건을 씹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찬을 꾹꾹 씹으며, 현수는 자신의 다짐을 굳게 다져 갔다. 그리고 대형 마트에 들러 몇 가지 생필품을 샀다. 끝으로 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컴퓨터 크리너를 구입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현수는 먼저 야의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리고 다시 야를 불렀다.
"야! 천에서 준보스 급 몬스터를 검색해 줘! 그리고 지금 내 레벨이 9이니까, 잡을 수 있는 몬스터를 검색해 줘!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상관없어. 참고로 스탯 전부를 민첩성에 투자했고, 순발력 플러스 2에 해당되는 아이템을 차고 있다."
-알겠습니다, 현수 님! 지금 검색하겠습니다.
세척을 해 줘서인지 야는 고분고분하게 준보스 급 몬스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현수 님께서 잡을 수 있는 준보스 급 몬스터로는 대왕 멧돼지와 구미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제대로 한 방 맞을 경우 골로 가는 수가 있으니 십분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구미호는 환상술법을 사용하니, 현수 님의 정신 상태를 한번 점검하고 사냥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현수는 야의 말에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현수는 야를 보고 쏘아붙였다.
"야! 내 정신 상태가 어떤데? 이만하면 건전하지. 그리고 만 년을 산 구미호는 잡지 못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내가 구미호를 어떻게 잡아?"
-100년에서 500년 산 구미호는 잡을 수 있습니다. 다만 현수 님께서는 스물아홉 살이 되도록 여자 손목 한 번 잡아 보지 못했기에, 제 생각으로는 구미호에게 헤벌쭉하고 웃으며 맞아 죽을 확률이 70% 이상입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왕 멧돼지 잡기를 권장합니다. 이왕이면 전직 후에 하시는 게 좋다고는 판단되나, 현수 님의 성격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야! 너,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초등학교 다닐 때 여자 손 잡아 봤어. 짝꿍도 여자였고. 그리고 세 살 때 엄마 따라 여자 목욕탕에 간 적도 있어. 게다가 100년을 살았는지 만 년을 살았는지 어떻게 알아?"
-대단하십니다, 현수 님! 그럼 대왕 멧돼지만 잡으시면 됩니다.
현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참! 어머니께 돈을 부쳐야 할 날이 내일입니다.
"벌써 그렇게 된 거야? 요즘 들어 통 벌이가 시원치 않았는데……. 야! 내 통장 잔고가 얼마지?"
-현수 님의 통장에는 지금 총 3,400만 원이 있으며 대출 한도는 1,200만 원입니다.
남은 액수를 들으니 고민되었다.
초반에 게임을 하려면 꽤 많은 돈이 필요했다.
특히 자신처럼 빈 몸으로 시작했을 때는 더욱 그랬다.
현수가 생각하는 궤도 이상으로 올라서야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아, 할 수 없지. 야! 내일 엄마에게 돈 보내 드리고,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검 중에 좋은 것은 얼마나 하는지 알아봐 줘! 그리고 회사에서 아직 퇴직금 안 들어왔지?"
-그렇습니다. 퇴직금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음 달 10일에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나 접속한다."
-고생하십시오. 득템만이 오늘의 고생을 보상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야. 너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넌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야. 제발 바른말, 고운 말!"
현수는 다시 천에 접속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왕 멧돼지를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먼저 벽곡단을 50개나 샀다.
벽곡단 한 알이면 체력을 모두 채울 수 있어 무척 비쌌지만 과감히 질렀다.
대장간에서 단검 역시 새로 10자루를 구입했다. 그 결과 수중에 있던 돈이 바닥났다.
"젠장! 뭐가 이리 비싼지."
필드로 나와 대왕 멧돼지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그림자도 안 보였다.
결국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일단 나올 때까지 멧돼지 사냥을 하기로 했다.
쿠엑!
"죽어라! 돼지 새끼들아!"
순발력 플러스 2는 비록 작은 수치지만 레벨이 낮은 몬스터에게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쿠에엑. 쿠엑.
한창 사냥을 하다가 주위가 조용해지자, 현수의 얼굴에 미소가 생겼다. 드디어 기다리던 대왕 멧돼지가 등장한 것이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그러니까 한 자리에서 죽치고 있으면 된다, 이거지?"
씩 웃은 현수는 나타나는 대왕 멧돼지를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한 번 잡은 경험도 있어 이제는 무섭지도 않았다. 그래서 현수는 침착하게 대왕 멧돼지의 공격에 대비했다.
휙-휙.
현수는 이리저리 날뛰는 대왕 멧돼지를 피해 다녔다. 그리고 순간순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사실 발광하는 대왕 멧돼지의 모습이 섬뜩하기도 했다.
사냥은 꽤 치열했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 체력이 있는 몬스터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힘이 많이 들었다.
이제 준비한 단검도 2개밖에 안 남았다. 그리고 벽곡단 역시 7개나 먹었다.
"조심, 또 조심!"
달려오는 놈을 보고 현수 역시 같이 달려갔다. 그리고 미끄러지듯 슬라이딩하면서 놈의 아랫배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쿠에에에엑!
고통이 심했는지 몸부림치는 놈에 의해 주위의 나무들이 쓰러져 넘어졌다.
현수는 쓰러지는 나무들을 보고 미소 지었다.
이것 또한 놈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현수는 달려가는 속도를 더해 힘껏 단검을 던졌다.
단검은 정확하게 놈의 정수리에 꽂혔다. 현수는 멈추지 않고 뛰어올라 단검을 발로 더 밀어 넣었다.
쿠에에에! 쿠엑!
쓰러진 대왕 멧돼지를 본 현수는 긴장이 풀렸다. 그래서 천천히 다가가 놈의 몸에 박혀 있는 단검을 뽑았다.
그런데…….
"이런!"
퍼억!
짧은 방심이 불러온 결과였다.
죽은 줄 알았던 대왕 멧돼지가 두 눈을 번쩍 뜨며 그대로 현수를 받아 버린 것이다.
"크악!"
멧돼지는 죽을 때 배를 드러내고 죽는다는 것을 잊은 대가치고는 너무 컸다. 현수는 날아가며 재빨리 줄어드는 체력에 맞춰 벽곡단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큭!"
땅에 떨어진 충격에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다행히 급하게 내려가던 체력이 20에서 멈췄다.
아직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현수는 누워서 대왕 멧돼지를 노려봤다.
"젠장!"
정말 빌어먹을 현실성이었다.
떨어지면서 어디 한 군데 이상이 생겼는지,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몰려왔다. 다행히 조금 전의 공격이 마지막 발악이었는지 대왕 멧돼지는 움직임이 없었다.
현수는 기어서 대왕 멧돼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
"뭐야? 개털이야?"
아이템을 찾아보았지만 이번에는 없었다.
"젠장! 돈만 날렸군."
도축 스킬을 사용해 누운 채 단검을 들어 대왕 멧돼지를 도축했다.
"모두가 주는 것은 아니구나. 그래도 확률이 높으니 해 볼 만하겠어. 이제 민첩성에 조금만 더 투자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겠는데."
조금 누워 있으니 그런대로 고통이 사라졌다.
현수는 일어나 앉아 체력을 채웠다.
"이번 사냥은 은전 12냥 손해다."
움직일 수 있게 되자 현수는 다시 낙양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왕 멧돼지의 고기를 팔기 위해 정육점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저기, 고기 필요하세요?"
"아니, 필요 없단다. 요즘에는 고기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마을 사람들이 고기를 잘 사 먹지 않으니 당분간 필요 없을 것 같구나."
현수가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고기를 나누어 준 결과였다. 그래도 호감도가 중요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현수는 이번에도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대장간부터 향했다. 그리고 대왕 멧돼지 고기를 대장간 주인에게 주었다.
미소를 지은 대장간 주인은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받아 챙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와 다르게, 대장간 주인이 놀라며 물었다.
"이게 뭐냐! 혹시 이 고기는 대왕 멧돼지 고기가 아니냐?"
무슨 표시라도 있는지 대장간 주인은 정확히 고기의 종류를 알아봤다.
"이게 대왕 멧돼지 고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세요?"
"하하. 정말이구나. 여기 있는 힘줄이 달라서 그럴 줄 알았지만 놀랍구나. 혹시 너, 이놈을 사냥한 거냐?"
"네. 우연히 마주쳐서 하루 종일 그놈이랑 씨름했어요."
대장간 주인은 현수의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물어 왔다.
"그럼 혹시 이놈의 송곳니를 가지고 있냐?"
"네. 있어요. 도축할 때 따로 빼놓았으니까요. 왜요? 필요하세요?"
"내가 1개당 금전 1냥에 사마."
대장간 주인의 말에 현수는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금전 1냥이면 손해를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현수는 인벤토리에서 얼른 대왕 멧돼지의 송곳니 4개를 꺼내 주었다.
"아저씨, 여기 4개가 있어요."
"하하하, 그럼 금전 4냥이구나."
대장간 주인은 금전 4냥을 현수에게 건네주었다.
현수는 이번에도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금전 3냥만 받고 나머지는 단검을 구입했다. 그것도 은전 50냥만큼만 구입하고 나머지는 받지 않았다.
역시 그의 생각대로 호감도가 상승했다.
"아저씨, 그럼 또 구해 오면 사 주실 건가요?"
"아니다. 지금은 필요가 없다. 나중에 필요하면 또 말하마. 그런데 너 혹시 구미호의 발톱을 구해 줄 수 있느냐?"
구미호라는 말에 현수는 반색했다.
야의 말에 의하면 분명 자신이 잡을 수 있는 준보스 급 몬스터 중 하나였다.
"힘들지만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구미호의 발톱을 2개만 구해 주지 않겠느냐. 그것에 따른 보상은 내가 따로 해 주마."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이 단검들의 날을 세워 주세요."
대장간의 주인은 기쁜 마음으로 현수의 단검들을 수리해 주었다.
-퀘스트! 대장간 주인의 부탁이 발동합니다.
'아! 퀘스트구나. 예전에는 이렇게 퀘스트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좋아! 다른 NPC들과도 친해져야겠군.'
현수는 서둘러 퀘스트 내용을 확인했다.
"퀘스트 확인!"
진행 중인 퀘스트 : 1
대장간 주인의 부탁
내용 : 구미호 발톱 2개 구해 주기
등급 : 일반 중
보상 : 미정
퀘스트 내용을 확인한 현수는 이번에는 잡화점으로 갔다. 그리고 벽곡단 20개를 새로 구입하고 사냥 준비를 마쳤다.
이번에는 대왕 멧돼지가 아닌 구미호다!
현수는 당당한 포부와 함께 새로운 사냥터를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