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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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다음 날, 현수는 회사에 사직서를 내기 위해 서둘러 출근했다. 그런데 회사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왠지 다들 들떠 있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가상현실 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마침 지나가던 직원 하나가 현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경리를 담당하는 선미라는 직원이었다.

"네, 선미 씨. 좋은 아침이에요."

평소보다 밝은 현수의 목소리에 선미도 기분이 좋았는지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현수 씨도 가상현실 천을 하실 건가요? 지금 회사 사람들은 죄다 그 이야기에 정신이 없어요."

현수는 선미의 질문에 의뭉스레 답했다.

"돈도 만만치 않고 잘 모르겠네요. 솔직히 조금 부담스럽잖아요."

솔직히 게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현수는 살짝 거짓말을 했다.

"아! 그리고 그동안 고마웠어요. 저 이번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둘까 하거든요."

"예?"

선미는 현수의 말에 깜짝 놀랐다. 2년 동안 결근이나 흔한 지각 한 번도 없이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현수였다. 더군다나 언제나 웃으면서 일해 은근히 회사 내에서 인기도 좋았다. 그런 현수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니 믿기지 않았다.

"정말요? 정말 회사를 그만두실 거예요? 이유가 뭐예요?"

선미는 아직도 안 믿긴단 표정으로 계속 현수에게 질문 공세를 펼쳤다.

"집안일이에요.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말하기가 조금 그러네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현수는 더 이상 말하기가 뭣해, 적당히 선미의 말을 끊고 사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똑똑.

"누구야?"

사장실 안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수는 그 목소리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까 오늘도 직원들보다 먼저 나와서 일을 준비한 것 같았다.

대개 이쪽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선박을 수리하는 이런 기술 분야의 일은 사장 역시 같은 일에 종사하다가 창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현수의 사장도 그런 경우였다.

그렇다 보니 사장이 제일 먼저 출근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항상 이렇게 그 티를 냈다. 그는 하루 일과를 체크하고 또 현장 작업에 관련된 공구나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곤 했다.

현수는 참으로 어지간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고개를 저은 다음 문을 열었다.

"접니다, 현수."

사장은 그런 현수를 보더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 일이냐?"

"회사를 그만둘까 합니다."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의 현수였지만 사장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귀찮으니까 그냥 가서 일해라."

현수는 그런 사장을 향해 다시 말했다.

"사, 장, 님! 저 이번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회사를 관둬야 한다고요!"

씨익.

사장은 그런 현수의 말을 살짝 비웃었다.

"너, 더위 먹었냐? 헛소리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서 일해라. 맞기 전에."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자 현수는 갑갑했다.

"사장님, 진짜라고요!"

"진짜야? 너 일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아니에요."

사장은 평소와 다른 현수의 표정을 보고 그제야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앉아라."

그는 현수를 앉히고 인터폰을 통해 커피 두 잔을 시켰다.

"그런데 그 개인적인 사정이란 게 뭐야?"

"죄송합니다, 사장님."

현수는 차마 사실을 말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현수야!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는 일이잖아."

자신을 다독이는 사장의 말에 현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사실 이 일을 하며 나름대로 보람도 느꼈다.

고장 나서 움직이지 못하는 배를 수리해 정상적으로 출항시킬 때면 마치 딸을 시집보내듯 시원섭섭했고 또 뿌듯했다.

"현수야! 너 조금만 더 일하면 기술자 소리 들을 수 있잖아. 그리고 이쪽 업계에서 사람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냥 대책 없이 오늘 그만둔다고 하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사장님!"

"마음 돌릴 생각은 없냐?"

사장의 입장에서는 현수를 보내기가 아쉬웠다. 2년 전 일하겠다고 찾아와 지금까지 잘해 주었다. 젊은 사람이 잔꾀도 부리지 않고 성실해, 사장은 내심 현수를 무척 아끼고 있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혹시 가상현실인가 하는 것 때문에 그만둔다는 건 아니지?"

"예. 설마 제가 게임을 한다고 그만두겠습니까?"

현수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반문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기왕지사 시작한 거짓말이다. 어차피 그만두기로 한 것, 현수는 좋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사장과 대화를 하는 동안, 현수는 역시 가상현실 천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컴퓨터와는 담쌓고 사는 사장까지 아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자식들이 가상현실 천을 할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 일단 네 뜻은 잘 알겠다."

이미 현수의 마음이 확고한 것을 확인한 사장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그 가상현실 게임 때문이라면 다시 생각을 했으면 한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발전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몰라. 준비하는 사람만이 낙오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야. 고작 게임에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까. 내 말, 알겠지?"

요즘 안 그래도 게임에 빠져 인생에 소홀해진 젊은이들이 늘고 있는 추세였다. 사장은 여가 생활을 위해 하는 게임이라면 모르지만, 거기에 전념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장은 현수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와라."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래! 그리고 그만두더라도 하던 일은 끝내."

사장이 잘 나가다가 마지막으로 한 말에 현수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앞으로 남은 일주일, 한창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아니, 그게……."

현수는 사장의 말에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사장은 아예 그런 현수를 외면했다.

"저……."

결국 현수는 이틀 동안 남은 일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사장이 이것마저 양보할 수는 없다고 말해 어쩔 수 없었다.

현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현수는 계속 뭐라고 구시렁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보내주면 뭐, 어디가 덧나? 아, 니미!"

작업 현장은 군산 만석 부두였다.

현수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통선을 타고 이동했다.

수리할 선박이 보이자 기분이 착잡했다.

"그동안 즐거웠는데.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막상 그만둔다고 하니 모든 것이 다 눈에 밟혔다.

어머니의 약값과 생계유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계속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하아."

변명 같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게임 아이템 판매가 아닌 다른 일로는 도저히 고수익을 얻을 자신이 없었다.

"여어!"

어느새 통선은 수리할 배에 도착했다. 현수는 배를 옮겨 타, 수리할 배의 전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참 이야기하던 현수는 이미 한쪽에 자리를 잡고 엔진을 고치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언제 끝나요?"

"오늘 밤에나 끝이 나겠는데."

"아! 좀 빨리 해 주세요. 우리는 일이 다 끝나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에요."

"젊은 사람이 빡빡하게 구네. 우리도 나름대로 노력하니까 정 할 일이 없으면 육지에 나가 다방에서 시간이나 때우고 들어오든가."

결국 현수는 하릴없이 배에서 시간을 보냈다. 식당에 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본선 전기사가 들어왔다.

"현수 아재, 모터 하나가 안 돌아가는데 함 봐 줘!"

"그래요?"

현수는 전기사를 따라 고장이 난 모터를 향해 움직였다.

"어디 보자."

공구를 이용해서 모터의 리드 커버를 풀고는 리드선을 확인해 보았지만 별 이상이 없었다.

"전기사님, 어디 한번 돌려 봅시다."

웅-.

전원 스위치가 올라가자 모터가 잠깐 돌아가다 서 버렸다.

"전기사님이 이거 손댔죠?"

"무슨 소리고? 손 안 댔다."

"에이! 손 안 댔는데 멀쩡한 것이 왜 안 돌아가요. 솔직히 말해 봐요."

"실은 내가 결선을 했는데 그 뒤로 안 돌아가더라."

"알았어요."

현수는 밖으로 나가 전화기를 꺼내 들어 사장에게 전화를 하고는 모터의 상황을 설명했다.

한참 동안 통화한 현수는 다시 모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아날로그 테스트기를 이용해 전선들을 살펴보고는 결선을 다시 했다.

"선이 여섯 가닥이잖아요. 전기사님이 결선을 잘못했나 봐요. 자, 다시 한 번 돌려 봐요."

우우우우우우우우웅-.

모터에 전원을 넣자 이번에는 신 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선을 잘못 연결해서, 스타에서 델타로 넘어가야 하는데 넘어가지 못하니까 멈추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걸 할 때는 표시를 하면 이런 실수를 안 하죠."

"고맙다."

그 일을 끝으로 현수는 다시 시간을 죽이기 시작했다. 한참 뒹굴다 보니 밤이 되었고, 기다리던 엔진 수리도 완료되었다. 현수는 그제야 일어나 서둘러 전기선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전기선의 위치를 기록한 수첩을 보며 진행한 일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자, 끝났습니다. 어디 시운전 한번 해 보세요."

기다리던 기관장은 재빨리 시동을 걸었다.

과아아아앙!

엔진에 시동이 걸리며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관장은 잠시 기다려, 조타실에서 텔레그래프를 통해 보내진 신호에 맞춰 레버를 당겼다.

기관실 외벽을 통해 느껴지는 진동.

현수는 다행히 배가 단번에 움직이자 기분이 좋았다.

"신 나게 움직이네."

"고생 많았습니다. 시운전은 내일 오전에나 끝날 것 같으니 어디 가서 눈이나 조금 붙이세요."

현수는 기관장의 말을 듣고 식당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다행히 수리한 엔진에 이상이 없었는지 시운전은 무사히 끝났다.

"전기사님, 여기 사인 좀 부탁해요. 아! 모터는 서비스로 해 드렸습니다."

전기사는 현수의 호의에 감사하며 사양서에 사인을 받아 가지고 왔다.

"그럼 수고하세요."

현수는 사양서를 받자마자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통선에 몸을 실었다.

통통통.

재촉한 덕분에 통선은 다행히 알맞은 시간에 현수를 육지에 내려 주었다.

곧바로 회사로 복귀한 현수는 사양서를 선미에게 건넸다.

"현수 씨, 정말 그만두세요?"

아직도 안 믿기는지 선미가 자꾸 물어 왔다.

"하하, 예. 그럼 선미 씨, 수고하세요."

현수는 그런 선미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집으로 달렸다.

가상현실 천! 오픈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닷새 남짓,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

* * *

오픈 하루 전. 이날 거리는 한산했으며, 집집마다 가상현실 천을 하기 위해서인지 불이 켜져 있었다.

현수도 마찬가지로 온 신경을 시계에 쏟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궁금했는지 야를 불렀다.

"야! 다시 홈페이지에 접속해 봐."

-천의 홈페이지로 접속합니다.

야는 현수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런데 동시에 많은 사람이 접속하고 있어서 그런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삐-. 접속 완료되었습니다.

현수는 야의 말이 끝나자 추가 지시를 했다.

"천의 변경 사항은?"

-검색을 시작합니다.

곧이어 야의 화면에 수많은 정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어느 한 장면에서 움직임을 멈춘 후, 야가 말했다.

-삐-.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한번 읽어 줄래?"

현수는 으레 그렇듯 귀찮아서 야를 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야가 현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직접 읽어 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야의 말에 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딱 보니,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많이 변해서 내용이 많다는 뜻이었다.

무슨 인공지능이 귀찮은 것도 아는지.

"쩝. 알았다, 알았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건 숫제 자기가 상관이야. 아주 엉망이라니까."

현수는 결국 변경 사항을 나중에 필요할 때마다 야에게 묻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수많은 내용을 직접 다 보고 외울 자신도 없었다.

"그나저나 야, 너 요즘 들어 더 건방진 것 같아."

잠시 투덜거려 봤지만 야는 현수의 불만을 가볍게 씹었다.

-삐-. 12시가 되려면 이제 10분 남았습니다. 지금은 접속 준비가 우선인 것 같습니다.

"그래그래! 졌다, 졌어! 마지막으로 내가 천 번째 안에 들기 위한 확률적 시간을 계산해 봐."

-알겠습니다.

이어서 수많은 숫자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삐비빅-.

딱딱한 기계 음과 함께 야의 계산이 끝났다.

-대략적인 시간상 12시 오픈 이후 2초 안에 접속하셔야만 합니다.

"뭐? 그렇게나 빨리?"

현수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수많은 사람이 몰리면서 서버 과부하가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리라 판단했는데, 현실은 아니었다.

-BS 그룹은 이번에 바뀐 인공지능 컴퓨터를 이용해 그런 기초적인 문제는 해결하였습니다.

이어진 야의 설명은 현수를 급하게 만들었다.

"젠장! 그 말은 지금부터 로그인을 준비해야 된다는 것이잖아!"

현수는 손과 발 그리고 머리에 접속을 위한 장치를 착용했다.

"후우."

잠시 심호흡을 한 후 고글을 눈에 착용하는 순간, 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입니다!

동시에 현수의 접속이 이어졌다.

"천 접속!"

잠시 시간이 지나자 곧 현수의 머리에 접속했음을 알리는 멘트가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새로운 세계 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계정 확인을 위해 홍채 인식과 뇌의 주파수를 확인하겠습니다.

"똑같군. 이건!"

오랜만에 들어 보는 멘트는 그대로였다.

-이현수 님, 접속을 환영합니다. 지금…….

현수는 급한 마음에 멘트를 중간에 끊고 곧바로 게임 실행을 선택했다.

"게임 실행!"

-게임을 실행합니다. 행운이 있기를…….

파앗-.

강렬한 빛이 눈앞을 가렸다.

순간 어지러움이 밀려와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새 익숙해져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곧이어 시야가 밝아지자, 주변의 사물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현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이런."

아무도 없었다.

"늦었잖아! 젠장!"

현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뭐야, 이것도?"

개털이었다. 한마디로 이벤트에서 다 떨어진 것이다. 그 쉬울 듯하던 2만 명 안에도 못 들었다는 말이었다.

"허어! 이럴 수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노력한 결과가 꽝이라는 사실에 급기야 상실감마저 들었다. 그냥 한마디로 허탈했다.

"대체 누구야? 아니, 얼마나 몰렸기에 내가 개털인 거야? 하아! 미치겠네!"

이 잔혹한 현실에 현수는 한동안 게임을 진행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만큼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다. 자신은 당연히 이벤트에 당첨되리라 생각했기에 아쉬움도 컸다.

"하아! 뭐, 어쩔 수 없지."

잠시 시간이 지나자 현수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늦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다른 사람보다 늦었는데 여기서 시간만 죽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현수는 마을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사냥을 하러 나섰다.

"하하! 반갑다. 이 자식들아!"

현수는 눈앞에 있는 하오문도들을 보며 씩 웃었다. 옛날 생각이 난 것이다.

가상현실 천은 세 종류의 AI로 구분되어 있었다.

일반 NPC, 몬스터 NPC, 마지막으로 일반 몬스터, 이렇게 크게 세 종류다.

일반 NPC는 천에서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한 번 죽으면 다시 리젠이 되지 않는다.

구파일방을 비롯해 무림을 구성하는 NPC들과 뒷골목 건달 등은 몬스터 NPC라 한다. 이들은 유저들과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또한 적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반 몬스터는 야수형 몬스터와 인간형 몬스터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은 오직 레벨 업을 위한 AI였다. 그래서 죽어도 다시 리젠이 되어 나타난다.

지금 현수가 보고 있는 건달은 일반 몬스터였다.

"어라? 그런데 어째 덩치가 조금 커진 것 같네."

달려가며 보니 뭔가 이상했다.

"뭐, 그래 봐야 건달이 어디 가겠어!"

현수는 주먹을 쥐고 눈앞에 있는 건달을 향해 힘껏 뻗었다.

휘이익-.

그런데 쉬울 거란 처음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건달은 손쉽게 몸을 움직여 현수의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곧바로 반격이 이어졌다.

퍼억!

둔중한 음색과 함께 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억!"

베타 시절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이건 뭐, 느낌의 차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예전에는 그냥 맞아도 툭툭 친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진짜 주먹으로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현실에서 맞은 것과 같은 충격에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현수는 재빨리 건달과 거리를 벌렸다.

"아 씨, 진짜 아프잖아! 이거 칼 맞았다간 정말 죽는 거 아냐? 미치겠네!"

암만 봐도 승산이 없었다.

이제 옛 생각에 젖어서 게임을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이벤트를 놓친 일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젠장!"

현수는 어쩔 수 없이 건달을 피해 도망쳤다.

다행히 건달들은 일정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는 잠시 멈추어 자신의 상태를 살피기로 했다. 뭐가 바뀌었는지 제대로 알아야만 했다.

"상태 창 오픈!"

이름 : 이현수 레벨 : 1

직업 : 무 체력 : 100

기력 : 100 공격력 : 10

방어력 : 10 순발력 : 10

민첩성 : 10 스탯 포인트 : 2

경험치 : 0/100

딱 봐도 한숨만 나왔다. 과거에 비해 초보자의 시작 포인트가 너무 적었다.

"이건 뭐, 처량 그 자체네. 그래도 예전에는 스탯 포인트라도 많이 주더만."

암만 봐도 암담했다.

특히 베타 시절에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생각하니 지금 모습이 너무 서글펐다.

"힘내자. 천이 나를 속일지라도."

현수는 스탯 포인트를 모두 민첩성에 투자했다.

예전에는 순발력에 투자를 많이 해서 크리티컬 히트를 높여 몬스터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꿈도 못 꾸었다. 주먹에 맞았을 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일단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면 민첩성을 올려야 했다.

이게 다 게임이 너무 사실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수는 잠시 머리를 흔들어 분위기를 환기시킨 후 다시 건달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신중했다.

"합!"

재빨리 주먹을 뻗어 건달의 얼굴을 노렸다. 하지만 건달은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달의 공격이 복부를 가격했다.

퍼억!

"윽!"

현수의 몸이 움찔하며 뒤로 밀렸다.

'아프다.'

하지만 이번에는 꾹 참고 다시 움직였다.

휘리릭-.

현수의 두 손이 건달의 허리를 잡아챘다.

우당탕.

건달이 바닥을 구르며 넘어지자 현수는 재빨리 그 위에 올라탔다.

퍽! 퍽! 퍽! 퍽!

그리고 이어진 현수의 주먹세례가 연달아 건달의 얼굴을 가격했다.

"제발 좀 죽어라!"

한참을 두들겨 패자 어느새 건달은 회색으로 변해 사라졌다.

-띠링! 레벨 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막 알려 오는 정겨운 소리를 즐기기도 전에 근처에 있던 다른 건달이 현수에게 달려왔다.

"젠장!"

현수는 잔뜩 긴장하며 건달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리고 건달이 공격하기 전에 재빨리 움직여 공격을 피하고는 건달의 눈을 노려 주먹이 날렸다.

퍽!

건달은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고개를 돌렸다.

'성공이다!'

현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이용해 건달을 공격했다. 한참 동안 현수의 주먹과 발이 난무하자, 건달은 이번에도 경험치를 바치고 사라졌다. 하지만 현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젠장!"

많이 맞지 않아 좋았지만 사냥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렸다. 이래서야 언제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역시 순발력에 투자를 했어야 하나."

괜히 자신의 선택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현수는 이내 머리를 털며 마음을 다잡았다. 생각해 보니 얼마 안 있으면 칼 들고 설치는 몬스터를 사냥해야 했다. 괜히 칼에 찔리느니 차라리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게 나았다.

-띠링!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탯을 확인하고 올려 주시면 보다 쉬운 사냥을…….

"알아. 안다고."

현수는 재빨리 무시하고 민첩성에 2개의 스탯을 더 투자했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상태 창을 확인한 다음, 접속 해제를 외쳤다.

"접속 해제!"

곧이어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잠시 후 접속 종료 안내 문구가 떴다. 현수는 신경질적으로 장비를 벗어 던지며 게임에 대해 평했다.

"젠장! 이거 영 할 맛이 안 나네. 누구는 이렇게 두들겨 맞으면서 힘겹게 키워야 하고, 누구는 사부에 유니크 아이템에… 하아."

그토록 기다렸던 게임이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현수는 야를 불렀다.

"야! 천의 시스템을 말해 줘. 간단하게 요약해서!"

-알겠습니다, 현수 님. 천은 옛 무림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판타지 게임입니다. 베타 때와는 달리 완벽하게 현실을 구현했습니다. 쉽게 말해 베타가 게임이었다면 지금은 현실이라 불릴 정도로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대립 관계입니다.

"대립 관계?"

-그렇습니다. 천에는 정파와 사파가 서로 대립한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정사 중간, 즉 중립이 있습니다. 참고로 제 생각에 중립을 선택하는 것은 최악입니다. 자칫 어느 쪽에서건 화풀이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겠군. 또?"

-전직이라는 것이 이번에 새로 생겼습니다.

"전직?"

-그렇습니다. 퀘스트를 통해 이루어지는 전직을 통해 상급 단계로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전직을 안 하면?"

-현수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컥! 이게! 그건 그렇고 히든 클래스나 뭐, 좀 특별한 것은 없어?"

-있습니다만 현수 님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선착순으로 선택된 1,000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휴-. 그럼 베타 때와 마찬가지로 중노동을 해야 된다는 말이네."

-그렇다고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부에게서 무공을 배운다 하더라도, 결국 그 사람의 능력 밖이라면 그것은 무용지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유는?"

-너무 현실성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무공을 살펴보면, 베타 시절에는 오직 기력을 사용해 공격력에 데미지를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공의 특성을 고려해 각 스탯에 의한 추가 데미지를 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

-만일 쾌검의 무공이면 민첩성에 의한 데미지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 그럼 강하고 패도적인 무공은 공격력 위주겠네?"

-그렇습니다. 방어 무공들은 방어력에 의해, 호신강기나 반탄강기 같은 무공은 기력에 의해 데미지를 주거나 방어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멋이 난다고 합니다. 스탯을 잘못 올려 익히지 못한 무공서들이 하나 둘 나올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야는 힘이 빠진 현수를 위로했다.

"야! 넌 말이야, 가끔은 인공지능 컴퓨터가 아니라고 생각될 때가 있어. 비록 내가 너를 고물상에서 주워 왔지만, 넌 어떻게 보면 꼭 사람 같아."

-감사합니다, 현수 님.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또한 10개의 던전이 아직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레벨이 되어야겠지만 10개의 던전 중 하나를 얻는다면 현수 님께서는 순식간에 십대고수의 반열에 들어설 것입니다. 물론 재능과 운이 있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야의 설명이 계속되자 현수는 졸음이 몰려왔다.

"야! 잠이 와서 안 되겠다. 내 말을 들어 보고 너의 생각을 말해 봐!"

-알겠습니다.

"지금 스탯을 모두 민첩성에 투자했어. 현재 레벨은 2. 처음에 받은 포인트 2에 더하여 총 4의 포인트를 민첩성에 투자했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닙니다만 무기만 뒷받침이 되어 준다면 괜찮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포인트를 올 인했을 때의 문제점이…….

"아니! 좋다, 안 좋다. 그 말만 해 줘!"

-일단 지금은 좋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거기까지! 일단 무슨 말인지 알았어. 이제 그만 자야겠어. 야! 내일 스케줄은?"

-현수 님의 내일 스케줄은 방콕입니다. 그러니 하루 종일 천을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이게! 너, 너무 사람처럼 말하지 마! 너라도 좋은 말, 바른말을 사용해야 나도 배울 것 아니야."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만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럴 경우 현수 님께서 알아들으실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 이상 말을 해 봤자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현수는 그냥 포기하고 방에 들어가 버렸다.

-편히 주무십시오, 현수 님!

다음 날, 현수는 아침 일찍부터 천에 접속했다.

어차피 사부도 없고 아이템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부지런한 중노동뿐이었다.

"천 접속!"

-보다 즐거운 천을 누리시길…….

"즐겁기는 개뿔! 아이템이나 하나 주고 저런 말 하면 밉지나 않지."

전날 접속 종료했던 곳에 나타난 현수는 마을로 들어갔다. 어제 사냥한 결과, 지금 현수의 인벤토리에는 동전이 50냥 있었다.

예전 기억으로는 50냥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무기가 있기는 있었다. 그래서 현수는 일단 대장간을 찾아가기로 했다.

천의 화폐는 동전, 은전, 금전이었다. 그리고 동전 100냥이 은전 1냥, 은전 100냥이 금전 1냥이라는 비교적 간단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대장간에 들어간 현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동전 50냥으로 살 수 있는 검이 있을까요?"

이미 베타 시절부터 호감도라는 걸 무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현수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대장간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다행인지 대장간 주인은 아무 말 없이 현수의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물론 있지. 어디 한번 구경해 보아라. 저쪽에 있는 것은 다 30냥짜리고, 이쪽에 있는 것이 50냥짜리다."

현수는 진열되어 있는 무기들을 살펴보았다.

"역시 50냥짜리라 그렇게 좋은 무기들은 없구나."

현수는 30냥짜리 무기 중에서 단검을 집어 들었다. 날이 조금 나가 있었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단검이었다.

"이것으로 할게요."

"그건 30냥이다."

대장간 주인의 얼굴에는 50냥짜리가 있냐고 물어봐 놓고 30냥짜리를 사는 현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가 역력했다. 하나 현수는 이미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헤헤, 50냥짜리 무기들은 아직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 저기, 50냥을 드릴 테니 날을 갈아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자 대장간 주인의 인상이 풀렸다. 그는 마치 인상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절히 대답했다.

"하하하. 물론 되지. 되고말고. 이리 가져 오너라."

현수는 단검을 넘겨주고는 잠시 기다렸다.

"자, 다 되었다."

"우와! 완전히 새것 같아요. 아저씨는 낙양에서 제일가는 장인일 거예요."

현수의 아부성 발언에 대장간 주인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리고 당연하게 하나의 멘트가 따라왔다.

-띠링! NPC와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역시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기본 틀은 그대로구나. 그렇다면 할 만하다!'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기본 틀이 그대로라면, 한 번 갔던 길을 다시 가는 것이라 보다 빠르게 레벨 업을 할 수 있을 듯했다. 현수는 대장간 주인에게 건네받은 단검을 챙겨 다시 사냥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 * *

낙양성. 대다수의 유저들이 처음에 스타팅 포인트로 지정하는 곳이었다. 현수 역시 같았는데, 이곳에서 초보가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는 일단 건달뿐이었다.

"자, 단검도 구했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현수는 어제보다 사냥 속도가 충분히 빨라졌을 것이라 기대하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눈에 바로 보이는 건달의 복부를 단검으로 찔렀다.

푸욱-.

예리하게 날이 갈린 단검은 손쉽게 건달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동시에 건달의 비명이 터졌다.

현수는 지체하지 않고 재빨리 발로 복부를 걷어차며 단검을 회수했다. 그러자 건달은 버티지 못하고 회색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손쉽게 한 놈을 처리하자 현수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어제와는 달리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현수의 좋았던 기분도 잠시였다. 워낙 많은 유저들이 사냥하고 있다 보니 사냥감이 부족했다.

"크악!"

게다가 종종 스틸도 있었다. 현수가 잡고 있는 건달을 옆에서 기다렸다 주먹으로 치는 유저가 있었던 것이다.

"젠장!"

현수는 화가 났지만 참았다.

이런 유저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는 시간도 아까웠다. 차라리 몬스터 1마리라도 더 잡고 보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가뜩이나 갈 길이 바빠 죽겠는데 별 거지 같은 놈들이 자꾸 건드네.'

결국 현수는 옆에서 시비를 걸고 있던 유저를 피해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건달이 씨가 말랐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건달들은 죄다 유저들이 하나씩 붙어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다 거의 다 죽어 가는 건달을 발견했다.

"오 예! 공짜!"

현수는 잽싸게 달려가 건달을 베었다.

어차피 피가 얼마 없었기에 쉽게 회색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경험치가 적게 들어왔지만 상관없었다. 일단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좋아! 시간이 걸려도 여기서 레벨 5까지 올린다!"

현수는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건달 바로 위의 몬스터는 멧돼지였다. 물론 다른 몬스터들도 있다. 하지만 멧돼지는 고기를 주기 때문에 많은 이득이 있었다. 그래서 유저들이 초반에 선호하는 몬스터 중 하나였다.

"좋아, 좋아!"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며, 현수는 곧 리젠될 건달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사냥하다 죽은 유저가 다시 왔다.

"저기, 여기는 제 자리예요!"

현수는 유저를 돌아보았다.

참 어이가 없는 유저였다. 세상에, 죽었으면 그만이지 다시 와서 자리를 내놓으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현수는 가볍게 무시해 주기로 했다.

"증거 있어요? 없죠? 그럼 그냥 가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하지만 이 유저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꾸준히 현수의 사냥을 방해하며 계속 스틸했다.

덕분에 현수의 레벨 업 속도는 무척이나 느려졌다.

'미치겠네! 베타 때는 얼굴도 못 들던 것들이!'

속에서 천불이 났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PK를 뜨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레벨 업이고 뭐고 득보다 실이 많았다. 한마디로 벙어리 냉가슴 앓는 격이었다.

'젠장!'

베타 때를 생각해 봤자 가슴만 더 아팠다.

"아 씨! 왜 그래요?"

결국 현수는 그 유저에게 따졌다. 하지만 그 유저는 정말 뻔뻔하게도 오히려 현수에게 따졌다.

"아까 말했죠. 여기는 제 자리라고!"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현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은 억지로 누르며 자신이 포기하기로 했다.

이건 뭐, 말로 해서 들을 놈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 자리를 벗어나던 현수의 귀를 그 유저의 목소리가 자극했다.

"짜식! 꼭 성질도 없는 게 버틴다니까. 아우! 진짜 뭐, 저런……."

현수의 얼굴은 이내 화를 참느라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두고 보자!'

으드득.

저절로 이가 갈리게 만드는 놈이었다.

현수는 다음을 기약하고 천천히 사냥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간혹 발견하는 주인 없는 몬스터를 사냥했다.

"젠장! 이렇게 해서 언제 레벨을 올리지."

잔뜩 느려진 속도가 답답했다. 하지만 무슨 뾰족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 무슨 몬스터들이 죄다 거지였는지, 나오는 아이템도 없었다. 주는 것이라고는 달랑 동전뿐이다 보니 상황은 점점 암울해졌다.

"하아."

조금 전의 호기는 어디로 갔는지, 현수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뭐, 아이템이 귀한 거야 그렇다고 쳐도, 이건 뭐, 동전 주는 것도 이렇게 짜서야."

한참을 그렇게 우울하게 사냥하던 현수는 문득 자신이 과거 베타 때 사냥하던 장소가 떠올랐다. 그곳은 건달과 강도가 나오는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현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있다, 있어!"

다행히 이곳에는 유저가 없었다. 그리고 더욱 좋은 건 건달이 한 번에 2명씩 리젠된다는 점이었다.

한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강도가 달려들어 공격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그 정도는 상관없었다. 그때부터 현수는 신 나게 단검을 휘두르며 사냥을 시작했다. 빨라진 사냥에 흥이 나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 갑자기 느껴지는 허기에 인상을 구겼다.

"젠장! 한창 신 났는데. 접속 해제!"

현수는 밥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가상현실 천의 시스템 중에서 어떻게 보면 이것이 가장 중요했다.

BS 그룹은 지나친 게임의 몰입으로 인해 몸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게임 시간으로 하루가 되면 현실에서 식사를 해야만 접속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2시간이 지나서야 접속을 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2시간은 가상현실에서 6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모든 NPC들이 잠을 잤다.

간혹 접속 시간대가 달라진 사람들은 그런 NPC들 때문에 손해 보는 것도 있어 건의했지만, BS 그룹 측에서는 전부 정책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뒤 유저들은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타를 겪으면서 NPC에게 맞추어 생활하는 게 가장 이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수 역시 그 점을 잘 알았기에 항상 시간을 맞추었다.

"한창 열 올랐는데."

그래도 내심 아쉬웠다.

-현수 님, 밥 먹을 시간이군요.

"응. 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지?"

-그야 현수 님께서도 잘 아시는 라면이 있으며 또 햄버거라든지…….

"아니, 이제 물려. 그런 거 말고."

-그럼 중국집에서 자장면이라도…….

"야! 나 밥 먹고 싶어."

-그렇다면 국밥을 시키는 것은 어떻습니까?

"젠장. 그렇게 해 줘! 그리고 너, 밥은 어떻게 할 수 없냐?"

-정 밥을 드시고 싶으시다면 어머님께 전화를…….

현수는 어머니라는 말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오직 자식 하나만 바라보고 계시는 어머니. 지금 어머니는 자신이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줄로만 알고 계신다.

베타 시절에는 게임으로 번 돈을 집에 부쳐 주었다. 그리고 서비스가 중단되었을 때는 그나마 고수익이라는 선박 수리 일을 해서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일하면서 버는 돈으로는 도저히 약값을 충당할 수 없었다. 다행히 베타 때 조금 벌어 놓은 돈이 있어 겨우겨우 돈을 맞출 수는 있었다.

그래서 현수는 아끼고 아껴야 했다. 그렇게 조금 부족하게 생활을 해서라도 현수는 항상 어머니 약값을 잊지 않고 부쳤다. 현수에게 어머니는 그런 존재였다. 괜히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졌지만 소중한 존재.

"야! 그냥 국밥으로 시켜. 그리고 앞으로 엄마 이야기는 하지 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근데 천의 시스템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는데, 기본적인 룰은 그대로인 것 같아."

현수는 야에게 조언을 구했다.

야는 지금 시중에서 시판되고 있는 인공지능 컴퓨터보다 성능이 뛰어났다.

현수는 야를 고물상에서 발견하고 100만 원에 구입했다. 혼자 있는 것이 심심해 가끔 대화나 하려고 산 것이었다. 처음에는 현수가 야를 많이 가르쳤지만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다.

-물론 기본 뼈대는 바꾸기가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현수 님께서 예전과 같은 명성을 얻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사부라는 시스템이 도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현수의 명성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당당히 천의 상위 10위 안에 들어가는 랭커였으며, 일마 또는 천마라 불리며 은연중 1위로 인정받았다. 확실한 서열이 정해지지 않은 천에서 그 정도면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100명의 유저와 맞서 싸웠던 설산 대전은 아직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었다. 물론 그때 현수의 호적수라 불리던 일황 최건에 의해 승부의 결말이 나지 않았지만 그것만 해도 엄청난 위업이었다. 그야말로 당시 현수의 명성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 사부를 얻은 1,000명의 유저들과 최소한 비슷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현수 님이 하시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게임에 지나치게 몰입을 하면 몸에 안 좋다는 것입니다.

"야!"

현수는 또 다른 무엇인가를 말할 줄 알았다.

"나도 알아. 그래서 이렇게 꼬박꼬박 밥 먹으러 나와서 먹잖아."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것과 그냥 나오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 씨! 그래, 네 똥 굵다. 야! 난 돈을 벌어야 돼! 너도 알잖아. 내 꿈이 무엇인지. 나, 울 어머니 편하게 모시고 싶어. 그래서 난 개처럼이라도 많이 벌어야 해.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넌 나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 이게 다 네가 날 꼬여서 그런 거잖아. 안 그래?"

-현수 님, 시킨 국밥이 배달되었습니다.

"너! 꼭 할 말 없으면 말을 돌리는데, 그거 안 좋은 버릇이다."

답답한 놈이 참아야 된다는 말이 동서고금의 진리로 다가오는 현수였다.

"너, 혹시 천의 퀘스트 중에 돈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 * *

밥을 먹고 난 현수는 옷을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천 역시 현실에서의 건강을 중요시했다. 현실에서 건강이 좋지 않으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접속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상태가 천에서 건강지표로 반영되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헬스장이나 도장 같은 곳에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다. 현수는 그런 곳에 투자할 돈조차 아까워 그냥 달리기로 운동을 했다.

현수는 근처 학교를 찾아가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걷고 달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땀으로 젖은 현수는 학교의 벤치에 앉았다. 적당히 바람이 불어 땀이 식는 느낌이 좋았다.

"그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그것 말고는 방법도 없잖아. 아자!"

현수라고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변한 가상현실 천은 더 이상 현수의 무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현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잠시 쉬었던 몸을 일으키며 오히려 이를 악물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현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속으로 목 놓아 불러 보았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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