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드가르드 - [종장] 수정본 >
프레이는 콜록거리며 눈을 떴다.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이 매웠다······.
그 침침한 눈에 무언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적인 줄 알고 프레이는 당혹했지만, 윤곽을 보니 아니었다.
프레이에게 다가오는 것은 큰난쟁이였다.
“지금 상황이 어찌 된······”
뭔가 물으려다 말고 프레이는 땅을 나뒹굴었다. 다가온 큰난쟁이가 주먹을 후려갈긴 것이다.
그리고 발길질 두 번. 그 등을 짓밟혔다.
프레이는 노성을 내지르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눈앞의 큰난쟁이가 누구인지 보고서 당황했다.
“롤랑? 뭐하는 게냐?”
“닥치고 두 대 더 맞으시오. 제이슨이 부탁했으니.”
그리 말하더니 롤랑은 프레이의 양쪽 뺨을 후려갈겼다.
통증은 뒤늦게 찾아왔다. 끔찍하게 얼얼한 가운데 롤랑은 이번엔 프레이의 턱까지 후려쳤다.
“이건 내가 원해서 때리는 거고.”
그 충격에 비로소 시야가 회복되었다. 프레이의 눈에 롤랑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게 되었다.
지금 롤랑의 꼴을 보고서 프레이는 기겁했다.
롤랑의 몸은 재로 뒤덮인 채 불타오르고 있었다. 발에서 허리까지, 롤랑의 피부는 모조리 불타버렸다. 이제는 근육마저 불타는 중이었다.
문득 프레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존자는 조금 있었다. 발할라의 전사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화염거인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그 사이 롤랑은 죽었던 프레이를 소생시킨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프레이는 감사의 말을 던져야 하나, 아니면 갑작스레 두들겨 팬 것을 따져야 하나 고민했다. 물론 오래 고민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하반신이 뼈까지 불타버린 롤랑이 주저앉았다.
롤랑은 물끄러미 프레이를 올려다보더니, 칼 한 자루를 내밀었다. 거대한 칼집에 든 칼이었다.
“받으시오.”
그 칼을 받아든 프레이는 그저 별 생각이 없었다. 쓰던 룬검이 망가졌으니 새 무기를 주는 것이려니 했을 뿐.
그러나 롤랑의 이어진 말에 프레이는 눈을 크게 떴다.
“당신 칼이야. 옛날에 날려먹은 물건 말이오.”
“레바테인?”
롤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는 문득 생각했다. 레바테인을 되찾았다면······.
그로써 유추할 수 있는 사실에 프레이는 감격했다.
“수르트를 쓰러뜨렸군? 어떻게? 자네가?”
“그러니까 이 꼴이 되었지. 아무튼 이제 가서 할 일을 하시오.”
“그래, 저 남은 거인들마저······”
발할라의 전사들에게 가세하고자 프레이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롤랑이 말했다.
“거기 말고. 오딘께서 담당한 전장을 알겠지? 거기 가서, 펜리르를 찾아내. 그리고 죽이시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펜리르의 배를 갈라서, 그 늑대 놈이 삼킨, 반지 낀 시체를 되살려.”
“그게 뭔······”
“오딘을 되살리란 말이오. 프레이. 늑대에게 잡아먹힌 신들의 아버지를 되살리라고.”
“만약 정말 펜리르가 누군가를 집어삼켰다면······ 결코 되살릴 수 없을 텐데. 그 위액이 시체를 보존했겠나?”
“다 소화되진 않았을 거고, 그럼 되살릴 수 있소. 궁니르에 맹세코.”
오딘의 대전사가 저리 맹세했다면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이는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이내 롤랑의 몸이 무너졌다.
수르트의 불이 이제 롤랑의 상반신마저 집어삼키고 있었다.
숨 쉬기마저 버거워졌다. 그래도 참고, 롤랑이 말했다.
“후방은 걱정할 것 없소······ 저기 보이나? 수르트의 시체가 아스가르드와 연결된 세계수를 불사르고 있어. 길목이 끊겼으니, 적들은 증원을 오지 못해. 이제 로키의 괴물들은 고립되었고······ 당신이 가서, 다 죽이면 돼. 그 레바테인으로.”
프레이는 문득 레바테인에 마력을 불어 넣어보았다.
수르트의 불꽃이 그 안에 깃들어있었다. 또한 예전에 신들이 이 칼에 불어넣은 신성한 힘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옛날 종말을 막고자 신들이 준비해둔 그 힘을 프레이는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레바테인은 그 어느 것보다 강력한 병기였다.
문득 깨달은 사실에 프레이는 중얼거렸다.
“이 때문에 오딘의 곁을 벗어나 이곳에 합류했나? 내게 레바테인을 주려고?”
롤랑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러했다.
롤랑은 오딘의 죽음도, 프레이의 죽음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죽음 이후 되살릴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옛날의 롤랑이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다른 계획이 있다는 이유로 오딘께서 한 번 죽도록 내버려두다니.
하지만 롤랑 속의 현성은 목적에 충실했다. 그 한국인이 주장하기를, 오딘을 살리려면 일단 죽게 해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그것은 신앙 따윈 없는 제3자로서의 주장, 혹은 소생이 자유로운 RPG 감각에 가까운 주장이었을지도 모른다.
롤랑은 그 주장을 따랐다.
어쨌건 여기까지는 성공한 것 같았다. 앞으로의 일은 프레이에게 달렸다. 저 헐벗은 개자식에게 뒷일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영 껄끄럽지만······.
롤랑은 문득 메데이아를 떠올렸다. 한때 연모했으나 결국 저 벌거숭이 신이 가로채버린 공주. 그리고 그 후손인 자신의 종자를 떠올렸다.
그들과 오딘에게도, 저 개자식이 필요했다.
이내 불꽃이 가슴까지 차올랐다. 성대마저 불타기 전, 롤랑은 멀어져가는 프레이의 등에 대고 중얼거렸다.
“프레이? 당신 아내에게 잘해줘. 그리고 당신 후손인 메디아 여왕······ 살리지 못해 미안하오.”
문득 프레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롤랑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 할 말은 이게 다요. 이제, 가. 가서 할 일을 해. 오딘을 구하고, 라그나뢰크를 막아.”
그리하여 내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라.
내 주변에서 일어난 그 모든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라.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폐가 이미 연기와 불꽃으로 가득 찼기에.
이제 롤랑의 상반신은 절반가량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꼴은 처절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모습.
그러나 프레이는 그 모습에서 더없는 오만을 느꼈다.
오만한 귀족기사?
아니, 저것은 오만이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실 된 자신감으로 흘러넘치는 기사가 저기 있었다.
프레이는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는, 달렸다. 칼집에 꽂혀있던 레바테인이 저절로 뽑혀 나와 프레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적이 다가온다면, 레바테인은 저절로 휘둘러져 적을 불살라버릴 것이다.
*******
수르트가 죽어가며 남긴 불꽃은 세계수와 거기 달라붙어 있던 요르문간드의 시체마저 집어삼켰다.
세계수도, 거대한 바다뱀의 시체도 불탔다. 산산이 부서져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 요르문간드의 거대한 몸을 모두 불사르고도 불꽃은 계속해서 세계수를 불살랐다. 그렇게 세계수를 모조리 집어삼킬 것 같던 불꽃은, 요툰헤임의 서리바람을 쐬고서야 꺼졌다.
*******
오랜 전투가 끝나고, 비프로스트의 사막에서 사람들은 그저 쓰러지듯 잠을 청했다.
날이 밝고 보니 비프로스트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사방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지만 어쨌건 관문을 제외하고는 성벽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제 살아남은 병력을 끌고 메디아를 지원하러 가야할 터였다. 앞서 달려간 발할라의 전사를 따라서.
그러나 당장 그 일처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메디아에 지원을 가는 것, 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 지원군의 대표는 누구인가?
본래 대표이던 제이슨은 맹주직을 반납하고 사라졌다. 이제는 남겨진 지휘관들끼리 새로운 맹주, 그러니까 비프로스트 원정대 총사령관을 정해야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쟁쟁한 지휘관들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누군가 투표를 통한 선출을 주장했지만, 그 합당한 의견은 각하되었다. 신들의 운명마저 걸린 전쟁이거늘, 그 총사령관을 한낱 인간들끼리 합의하여 선출하자니 신성모독이라는 주장이 나왔으므로.
결투나 마상시합 따위 힘겨루기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당장 선출이 급했기에 지휘관들은 이내 신성하게 결정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웬 지휘관은 탐탁찮은 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저놈의 칼을 뽑으면 원정대 총사령관이자, 비프로스트의 백작이 된다 이거요?”
그 말에 롤랑 추종자는 버럭 고함질렀다.
“저놈의 칼이라니? 성검 발뭉이오! 롤랑 경께서, 카를 대제의 후손 아서 왕께서 쓰시던 칼! 그 성검을 뽑아낸다면 롤랑 경의 후계를 주장할 수 있는 셈이오. 오딘에게 인정받은 셈이란 말이야!”
성검은 얼마 전,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러니까 세계수 위에서. 앞서 떨어져 내린 재와 파편들을 치워내고 보니 저 성검이 바위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모두 그 성검의 권위를 인정했기에, 자격 있는 자들 모두 앞 다투어 성검을 뽑아내고자 시도했다. 인류 원정대의 맹주라면 그 권위는 가히 카를 대제를 자처해도 좋을 터였다. 역사서를 넘어 교회 태피스트리에 그 이름과 얼굴이 새겨질 기회였다······.
성검을 뽑아내느라 온힘을 쏟기 바쁜 지휘관들을, 아말릭은 가면 너머로 더없이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말릭은 마음이 급했다. 당장 메디아로 달려가 제이슨 경을 원조해도 모자랄 마당에······.
다행히 아말릭에도 성검을 뽑을 기회가 주어졌다. 롤랑을 따르던, 전 청소부 출신의 병사들은 아말릭에게 남겨져 있었다. 덕분에 아말릭은 이천 명의 병력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말릭 경, 당신 차례요.”
아말릭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들 숨죽인 채 성검 앞에 선 아말릭을 바라보았다.
저 가면 쓴 사제가 롤랑을 따라다니며 온갖 이적을 베풀었음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 거느린 병졸들은 보잘것없다. 혹시 저 사제가 성검을 뽑아낸다면,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척하면서 직함뿐인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다니는 것도······.
그러나 지휘관들이 짧은 시간 궁리한 모든 계획이 무색하게도, 결국 아말릭은 성검을 뽑아내지 못했다.
아말릭이 안간힘을 썼지만 그저 칼자루를 꿈틀거리게 하는 것이 한계였다. 사실 다른 지휘관들은 그마저 못했다······.
모두들 안도와 왠지 모를 실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아말릭의 퇴장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야유하려던 그때였다.
지휘관들의 위에 그림자가 깔렸다.
말의 그림자. 마치 하늘에서 그림자를 드리운 듯 더없이 거대한 그림자였다. 그림자의 말발굽은 여덟 개, 말 두 마리인가?
고개를 들어본 지휘관들은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다리 여덟 개 달린 말 위에 올라탄, 고깔을 쓴 노인이 하늘에 있었다. 붉은 창을 든 노인. 수많은 영혼들이 노인과 신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모두들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자리에 무릎 꿇었다. 각자의 신앙이야 어쨌건, 모두들 저 노인을 향해 크게 절했다.
하늘 위에서 오딘이 입을 열었다.
“이 중에 아말릭이 있느냐?”
아말릭이 고개를 들었다. 그 가면 쓴 남자를 향해 오딘이 내려왔다.
이내 바닥에서 일 미터쯤 떠오른 채, 오딘이 아말릭을 내려다보았다.
“제게 무슨 용무신지요, 위대한 분이시여?”
아말릭의 말에 오딘은 중얼거렸다.
“잠시 기다려라······”
오딘은 소매를 뒤적이더니 웬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사과를 꺼냈다.
황금사과. 그것을 아말릭에게 휙 하고 집어던졌다.
아말릭의 손에서 사과가 빛나는 가운데, 오딘이 말했다.
“내 대전사가 네게 주라더군.”
“롤랑 경이?”
“그래. 그게 날 구출한 대가로 빈 소원이었다. 그런데 미드가르드에도 전투가 벌어졌다니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르겠더군. 그리 되면 어이없을 정도로 들어주기 쉬운 소원을 들어주지 못할까 두려웠다. 어쩔 수 없이 내 몸소 강림하는 성의를 보이기로 했지.”
아말릭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황금사과를 눈앞에 들어올렸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좌중의 모두가 홀린 듯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말릭은 예전 세계수에서 이런 황금빛이 사람들을 어찌나 비정상적으로 만들었는지 떠올렸다. 그래서 얼른 없애기로 했다.
와삭, 하고 황금사과를 베어 물었다. 아말릭이 사과를 먹어치우는 동안 오딘이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사과를 다 먹어치운 아말릭은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본 바, 더 이상 가면을 쓸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어느 전설적인 기사의 표현에 따르면 ‘좀 가려울 것 같은 피부병’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말릭은 한껏 감격을 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딘이 먼저 물었다.
“그런데 지금 뭐하려던 거지? 그 검을 뽑으려던 건가? 뽑지 않고 뭐하나?”
아말릭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뽑으려다······ 실패한지라.”
“이제는 다를지도 모르지. 다시 뽑아봐라, 어서.”
그 말에 아말릭은 성검에 손을 가져갔다. 충만감, 새로이 몸을 채운 신성이 왠지 모를 자신감을 주고 있었다.
이내 뽑혀 나온 성검을 보고서 아말릭이 환호했다. 그리고 오딘이 미소 짓자, 지휘관들마저 환호성을 내질렀다. 기쁘든 그렇지 않든 모두 함께.
마침내 새로운 롤랑의 후계자가 탄생했다. 원정군 총사령관, 그리고 롤랑이 비프로스트의 군주였으며 지금 그 자리가 공석임을 감안하면 아말릭은 이제 비프로스트의 군주이기도 했다.
환희에 젖어있던 아말릭은 문득 물었다.
“지존자 오딘이시여,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어라.”
“저희 미천한 것들이 추측하기로 천상은 지금 전쟁 중인 줄로 아옵니다.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그리고 롤랑 경은······”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사실상 끝났노라. 로키와 그 자식들이, 그리고 종말의 거인 수르트가 죽었다. 뭘 더 두려워하겠느냐? 그리고 롤랑은, 전사했다. 명예롭게.”
그 헌신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부활했음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주신으로서 체면이 상하는 일이니.
한편 아말릭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가면을 벗은 지금, 그 어두운 표정이 오딘의 외눈에 잘도 보였다.
“그렇다면······ 되살아날 수······”
“없다. 육이 모조리 태초의 불꽃에 불타버렸으니.”
아말릭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오딘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다시 만들어야 하리라. 먼 옛날 내가 너희 조상들을 포도나무와 물푸레나무로 만들어냈듯, 완전히 불타 없어진 내 대전사의 몸을 다시금 깎아 만들어 내리라. 허망하게 죽은 내 아들 발두르도 다시금 그 육을 주리라. 모두 한 번 종말을 맞이했으나, 새로운 생명을 얻으리라.”
“가능한 일입니까? 신들이라도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다른 신들은 못하지. 하지만 나는 오딘이다. 그 의미를 모르는가? 나는 신들의 아버지다. 낳을 수 있는 존재다!”
아말릭이 다시금 미소 지은 순간, 오딘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서 다들, 뭐하고 있나? 너희야말로 전쟁 중 아닌가? 그럼 모두, 진군하라! 가서 적들을 죽여! 내가 앞장설 테니, 모두 뒤따라 달려라!”
그리 말하더니 오딘을 태운 슬레이프니르가 비행을 시작했다. 수많은 영혼들을 이끌고 멀어져가는 군신을 지휘관들은 멍하니 지켜보다가, 그 명령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병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메디아를 향해 행군하기 시작했다.
*******
하늘을 날며 오딘은 지상을 정처 없이 떠돌던 혼령들을 보았다. 헬을 따라왔다가 이내 목적을 잃어버린 망자들.
오딘이 그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혼령들은 군말 없이 오딘에게 절하더니, 무릎 꿇고 그 영혼을 바쳤다.
그렇게 수많은 영혼들을 이끌고 오딘은 날았다.
마침내 메디아에 다다랐다.
사방에 혼령들의 시체가 깔려있었다. 그 위로 말발굽이 깔린 것을 보니 일단의 무리가 밤새 이 땅을 누비며 수호자를 자처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원래 죽은 혼령인지라, 아직 숨이 붙어 흐느적거리는 혼령들이 있었다. 오딘은 그들의 영혼마저 모두 회수했다.
오딘과 영혼들은 계속해서 비행했다.
멀리 보는 옥좌 흘리드스캴프마저 파괴된 지금, 아스가르드에서 미드가르드를 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프레이가 오딘에게 부탁한바, 그 후손들의 나라는 어떠한지 살펴 봐주십사 했다.
원래라면 들어주지 않을 청이었으나 이번은 기꺼이 따라주기로 했다. 어쨌건 그 벌거숭이 신은 늑대의 배를 갈라 자신을 꺼내 소생시킨 것이다. 비록 오딘의 대전사가 지시한 대로 따른 것이라지만 그 공로는 인정해줄 만했다······.
잠시 후, 오딘은 메디아 궁성을 바라보았다.
당장은 무사해 보였다. 밤새 잘 지켜낸 덕분이리라. 그러나 또 다른 혼령의 군대가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또 다른 적도 걱정되었으니, 지하로 뚫린 구멍을 통해 저승의 용 니드호그마저 뛰쳐나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한 파수꾼이 성벽 위에 서서, 하늘과 땅 양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오딘은 그 파수꾼의 얼굴을 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기에 오딘은 그 옆으로 다가갔다.
“헤임달? 죽은 줄 알았다마는.”
인간 크기의 헤임달이 오딘을 보았다. 망자들을 경계하다 말고 놀라움을 드러냈다.
“아버지? 어떻게? 절 찾으러 오신 겝니까?”
“아니. 방금 말했듯 네가 그저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영혼이 보이지 않더라니, 여기 있었구나. 본신이 죽어 그 영혼이 그 조그만 분신에 옮겨간 게냐?”
“예, 그리 되었습니다. 혹시 원래 몸을 되찾을 방법이······.”
“가능이야 하겠다마는, 그보다 다른 전사자들의 몸부터 다시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당장 작아진 모습으로나마 살아남은 네 차례는 한참 뒤에야 오겠군. 그때까지는 차라리 이 미드가르드에서 지내도록 해라.”
몸집만큼이나 신들은 그 목소리도 크다. 둘이 대화 나누는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그래서 궁성 안에 있던 두 명이 문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이슨과 한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제이슨이었다.
“오딘?”
“그래, 그다지 오랜만은 아니군. 제이슨.”
오딘은 다시 헤임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지상에서 지내는 동안은, 신으로서의 권위를 저 제이슨에게 내세우지 말도록. 지상에서 지내려면 저자와 함께 지내야할 것 아니냐? 어쩌면 한 명의 인간으로서.”
헤임달은 억울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절 여기 남겨두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용맹하게 싸운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유배형을 내리시는 겝니까? 절 데려가주십시오, 아버지!”
“슬레이프니르에 둘이서 타고 천상까지 가기는 힘든 일이다. 조금만 참아라. 어차피 몇 년 정도만 지내면 될 일 아니냐? 혹여 계집질을 하고 싶거든, 차라리 참지 말거라. 고귀한 신이라지만 성욕은 본능인 법, 결국에는 지상의 여자와 관계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손이 지상에 퍼지겠지. 프레이가 그랬듯, 네 후손들 또한 지상에 나라를 세울지 모르겠구나. 좋은 경험이 되리라.”
그리 덕담을 던지더니 오딘은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네게는 신세를 졌지. 새삼 감사를 표하노라, 제이슨.”
“잠깐! 롤랑은?”
오딘은 시적인 구절을 읊어 화답했다.
“육은 덧없으나 영은 영원하도다. 한 번 불탔으니, 다시 생겨날 일만 남았도다.”
그리 말한 차였다. 제이슨 옆에 있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노인께서 바로 오딘이신가요?”
오딘은 소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지만, 소녀는 멋대로 계속 말했다.
“방금 말씀하신 건 롤랑 경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뜻이에요? 그럼 다시 만날 수 있나요?”
오딘은 그 말마저 무시하려 했다. 용무도 없이 인간 꼬마와 말 섞고 싶지는 않았다.
오딘은 자기 용건이나 꺼냈다.
“프레이의 후손은 어디 있느냐?”
오딘의 물음에 방금 그 소녀가 대답했다.
“저예요, 오딘이시여. 전 오스마 여왕이에요.”
그 말을 듣고서야 오딘은 오스마를 유심히 살폈다. 난리통에도 불구하고, 멀쩡해 보였다. 보아하니 그 옆에 붙어있는 제이슨이 밤새 지켜주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오딘은 모든 할 일을 마치게 되었다. 한결 너그러워진 오딘은 이내 저 소녀를 대화상대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방금 롤랑과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물었느냐? 나중에 가능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네가 아스가르드에 오게 된다면 말이다.”
그리고 오스마가 물었다.
“지금 데려가주실 수는 없나요? 전 반신이니까 천상에 가도 될 거 같은데······ 몸이 작으니까 뒤에 태워주셔도 말이 힘들어하지 않을 것 같고······.”
“뭐 하러 벌써 천상에? 네겐 여기 왕국이 있지 않으냐.”
“왕좌 따윈 필요 없어요!”
철없는 어린 여왕의 말이었지만 오딘으로서는 가슴에 박혀오는 말이었다.
오딘이 침묵하는 차 오스마는 계속 말했다.
“주변 모두가 시끄럽고······ 여왕이고 뭐고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어제는 웬 과잉 충성하는 신하 놈이 제 서재에서 모든 기사도 소설을 불태웠어요. 광란의 아마디스만 빼고요. 기사도 소설 따위는 제 여성성 향상에 도움이 안 된답시고 말이에요. 그리고 제 몸에 코르셋을 입히지 않나, 사내새끼들이랑 나랑 만나기만 하면 아름다운 폐하 어쩌고 하면서 내 손목에 입 맞추질 않나······”
새삼 생각하자니 소름이 끼치는 듯 오스마는 몸을 떨었다. 오스마는 계속 외쳤다.
“그저께는 궁성에서 여왕의 배필을 정하랍시고, 저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돼지새끼랑 독대하게 했어요. 끔찍해요! 여기 생활은 역겨워요! 롤랑 경이랑 같이 다닐 때가 제일 좋았어요. 여왕보다 종자가 나아요! 아스가르드에서 뭔 굳은 일이든 할게요. 피혁손질이든 뭐든 다. 그러니 제발······.”
오스마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 조그만 어깨를 제이슨이 쓰다듬으며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잘 되지 않았지마는.
오딘은 둘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삶이 괴로운가?”
오스마가 대답했다.
“예······.”
“원래 다 그런 법이다. 삶은 언제나 전쟁이니. 그리고 아스가르드는 전쟁을 피한 자들을 반기지 않는다. 아스가르드에 오고 싶거든, 싸우다가 와라. 무기를 휘두르는 전쟁이든, 다른 방식의 전쟁이든 다 치러낸 뒤에야 와라. 그때가 되면 분명 내 대전사가 반겨줄 테니.”
오딘의 말뜻은 명백했다. 당장은 데려가주지 않겠다고, 앞으로도 살다가 죽은 뒤에야 받아줄지 어떨지 결정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낙담한 오스마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용건은 끝났다. 오딘이 헤임달과 눈으로 인사하더니,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슬레이프니르가 높이 솟아올랐다. 수많은 영혼들과 함께, 오딘은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그 순간 지상에 남겨진 세 명은 각자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헤임달이 제 아버지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어린 오스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처량한 소녀를 제이슨이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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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프로스트 주변에서 며칠 내내 재가 떨어져 내렸다.
세계수의 일부였고, 바다뱀의 시체였던 재였다. 말 그대로 산더미 같은 재.
재는 비프로스트와 그 인근 전역을 뒤덮었다. 그리하여 세계수 뿌리가 고갈시킨 건조한 흙에 재가 섞였다.
재는 흙에 섞여 영양분을 불어넣었다. 그로써 비프로스트 인근에서 농사가 가능해지더니, 도시의 영역은 갈수록 넓어져갔다.
그리하여 성지 비프로스트는 왕국이 되었다.
아말릭은 그 군주였다. 비프로스트 변경백, 롤랑의 정통한 후계로서.
아말릭 왕은 선정을 베풀고, 아들을 낳았다. 발할라에 승천하기 전, 기쁜 마음으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감염경로는 알 수 없지만, 그 나병마저도.
그리하여 비프로스트의 2대 왕은 나병왕으로 유명해졌고, 병을 이기지 못해 젊은 나이에 죽어갔다. 모든 신하들이 지켜보는 삶의 마지막 순간, 나병왕은 왕위계승 방법을 마음대로 선언할 수 있었다. 나병왕은 그 병 말고도 쌓아온 업적과 전공으로도 유명했기에, 그 권위를 아무도 무시하지 못했다.
나병왕이 병석에서 유언하길, 비프로스트의 왕위를 이을 자는 성검을 뽑아내야 한다고 했다. 영원한 전설이 된 기사, 롤랑의 유산이 그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고.
나병왕으로서는 제 아들마저 나병으로 일찍 죽어버린 탓에 심술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모두들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결국 그 결정은 번복되지 않은 채, 비프로스트 왕의 자리는 수십 년간 공석으로 남았다.
아무나 그 자리를 잇겠노라 선언할 수는 없었다. 비프로스트의 선왕들, 그러니까 나병왕과 그 아버지는 너무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행적과 업적이 두 나병환자에게 신화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후로 세월이 흘러, 성검을 뽑아 왕이 되겠노라는 순례자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된 왕국에,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섬에서 왔다.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절친한 친구에게서 받은 검을 찾아서.
*** 완결 ***
< 미드가르드 - [종장] 수정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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