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63화 (163/164)

< 아스가르드 - [2] 수정본 >

미드가르드의 뱀, 요르문간드가 세계수를 타고 올라오자 세계수는 거세게 흔들렸다. 세계수와 연결된 아스가르드 또한.

지진이 거세질수록 그 바다뱀이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진은 빠른 속도로 거세졌다. 요르문간드는 나무 위를 악착같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중력이 그 거체를 짓누르기에 뭍에서는 시시각각 죽어가는 몸뚱이였다. 남은 시간 동안 요르문간드는 임무를 다해야했다. 그렇기에 그 바다뱀은 같은 목적으로 나아가던 다른 군대와 합을 맞추지 못했다.

요르문간드는 그 누구보다 먼저 아스가르드에 다다랐다.

모든 신들과 전사들이 넘어지지 않고자 중심을 잡고 있을 때, 요르문간드는 기어이 그 대가리를 천상에 들이밀었다.

성채보다 거대한 뱀의 눈이 모두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모두 뭔가 잡아!”

요르문간드의 거대한 턱이 아스가르드에 닿은 순간, 아스가르드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요동쳤다. 얼핏 보기에도 그 주둥이부터가 아스가르드보다 거대했다······.

모두들 쓰러지지 않고자 노력하며 천둥신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토르가 달려 나갔다. 오딘의 장남. 옆 대륙의 천둥신이 흔히 그렇듯 다른 모든 신들을 합친 것보다 강력한 신.

“내 오랜 세월 네놈을 기다렸다, 요르문간드!”

토르가 그 유명한 망치 묠니르를 던졌다. 천둥과 벼락, 찬란한 빛에 이어 굉음이 모두의 귀를 멀게 했다.

이마가 뭉개진 요르문간드가 비명 질렀다.

그러느라 크게 벌린 주둥이 사이로 독액이 분출되었다. 주둥이 크기가 크기인 만큼 아스가르드를 뒤덮고도 남을 양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수호자 토르는 그 독액이 다른 신들의 코와 입에 들어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토르가 입을 크게 벌려 숨을 들이쉬었다. 그 소용돌이 같은 들숨이 사방에 퍼지려던 독액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입술부터 푸르죽죽하게 변색되는 가운데 토르는 달렸다.

이내 도약한 토르가 요르문간드의 머리 위에 닿았다. 요르문간드는 계속 독액을 내뿜고 있었으므로, 토르 또한 계속해서 들이마셔야 했다. 이미 분사된 독액의 양이 호수를 채우고도 남을 터였지만 토르에게 감당하지 못할 양은 아니었다. 한때 해수면을 낮추어버린 토르의 위장이기에.

그러나 역시 독은 치명적이었다. 이제 머리뿐만 아니라 목까지 변색되었지만, 토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묠니르 망치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내리찍었다.

천둥소리와 바다뱀의 비명이 길게 울리는 가운데 번개와 독이 서로 섞였다.

이내 거듭된 천둥신의 망치질은 수십 개 계곡을 만들어낼 위력이었다. 이내 뇌가 완전히 찌그러진 요르문간드는 힘을 잃고 세계수에 달라붙은 채 축 늘어졌다.

그렇게 요르문간드가 죽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토르는, 강적을 쓰러뜨렸노라 소리 높여 함성을 내지르지 못했다. 함부로 입을 벌렸다가는 기껏 빨아들인 독액이 몸 밖으로 빠져나갈 터였다.

토르는 입을 굳게 다물고 모든 독을 체내에서 녹여내고자 애썼다. 하지만 결국 그 몸이 녹아내리더니, 이내 토르는 푸른 웅덩이로 화했다.

토르가 장착했던 근력을 증폭시켜주는 허리띠도, 장갑도 주인과 함께 녹아내렸다. 묠니르만은 남아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우러 다가가지 못했다. 토르였던 웅덩이의 독기가 너무나도 지독했기에.

그리하여 가장 강력했던 괴물과 신이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다.

지켜보던 신들과 전사들은 슬퍼하거나 환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잠자코 무기를 들어올렸다.

아스가르드의 수호자가 죽었으니, 이제부터 적들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

나글파르의 거대한 그림자가 병사들의 위에 드리워졌다.

병사들은 그 배가 성벽 위로 훌쩍 날아올라 이곳의 병력을 무시하고 지나가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배 안에 탄 망자들이 세상에 퍼지든 말든, 당장의 싸움을 피할 수 있길 간절하게 바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 되지 않았다. 나글파르의 주인 헬은 여기 모인 병력들을 곧 아스가르드의 지원세력으로 파악했다.

나글파르는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충각전술. 그리 결정한 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성벽의 관문이었다. 굳건하게 만들어져 있었지만 어쨌건 저것이 가장 약한 부위였다.

“떨어져!”

성벽 위 전사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가운데 나글파르는 기어이 관문에 뱃머리를 부딪쳤다.

굉음이 울리고, 산산이 부서진 관문 파편과 사람의 살점들이 나뒹굴었다. 그리하여 관문을 관통한 나글파르 위에서 망자들이 뛰어내렸다.

혼령 전사들. 그들은 살아생전 전사였지만, 싸우다 죽지 못했다. 이후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비로소 싸우다 죽을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혼령들이 사방으로 달려들었다. 성벽 위로, 평원으로 달려가 산자들에게 돌격했다.

제이슨이 자리 잡은 성벽 위로도 혼령들이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정말이지 질릴 정도로 많았다. 누군가가 저 사이에서 용맹을 떨친들 그러다가 지치게 될 것이다.

저들과 맞서려면 최대한 체력을 온존해야겠지만, 뒤에서 안전하게 병력을 보충할 수 있는 소환사라면 특히 그래야겠지만, 제이슨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지금 승천하고 없는 제이슨의 동료는 언제나 맨 앞에서 싸웠다. 그렇기에 모두 따라 달렸음을 기억했다.

제이슨이 외쳤다.

“헤임달, 피리 불어!”

헤임달이 지시를 따른 가운데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하는 소리가 한없이 길게 울렸다. 혼령들이 일순 멈춘 가운데, 제이슨은 예의 동료가 한때 사용했던 칼을 쥐고 달려들었다.

*******

바다뱀 다음으로 아스가르드에 도착한 적들은 늑대와 서리거인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로키였다.

롤랑과 눈을 마주친 로키가 웃었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물러나려는 차, 헤임달이 외쳤다.

“어디 가나? 대장이 먼저 본을 보여야지. 덤벼라, 수말이랑 붙어먹는 거인잡종아!”

아스가르드의 선봉장으로서 헤임달이 앞으로 나섰다.

헤임달이 도발적인 몸동작으로 손가락을 까닥이자, 로키는 피식 웃으면서 역시 앞으로 나섰다.

두 신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검사 대 검사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동시에 서로 칼을 놓치더니, 다시 주울 시도도 하지 않고 박투를 시작했다. 그렇게 발과 주먹을 오가다가, 마지막에는 그마저 너덜너덜해졌다.

서로의 멱살을 틀어쥔 로키와 헤임달은 서로에게 박치기했다. 그리하여 서로의 몸통에 서로의 머리가 쑤셔 박힌 채 죽었다.

로키의 죽음을, 자기 원수의 죽음을 롤랑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는 롤랑이 직접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롤랑이 나설 경우, 롤랑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는 로키가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 싸움을 회피할 경우 로키는 라그나뢰크 이후로도 생존할지 모른다.

그래서 헤임달이 싸우도록 했더니, 과연 죽었다. 예언대로 죽었다.

‘역시 운명은······.’

롤랑이 생각에 잠기려던 차,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금 롤랑이 증오하던 신이 죽었다. 그리고 이제, 롤랑을 증오하는 거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트가르—트에 영광—을—!”

아스가르드가 흔들리도록 전투함성을 내지르더니, 분노에 찬 서리거인들이 돌진했다. 로키가 내준 거대한 늑대들을 타고서.

서리폭풍 같은 진군이었다. 서리거인들보다 훨씬 세련된 전투기술을 지닌 발할라의 전사들이지만, 서리거인들은 그 기술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도록 무작정 밀어닥쳤다.

길게 울리는 늑대 울음소리.

늑대들은 무거운 기수를 태우고도 힘껏 내달렸다. 서리거인들은 그 충돌의 힘과 무게를 실어 거대한 무기를 부딪쳐왔다.

“로키—왕에게 영광—을—!”

충돌로 말미암아 발할라의 전사들이 여럿 죽었다. 그 와중에도 반격하여 부딪쳐온 거인을 역으로 죽인 전사들이 더 많았지마는.

“발할라를 위하여!”

롤랑이 그러했다. 노성을 내지르며 도끼를 내리찍어온 거인보다 먼저 뒤랑달을 휘둘렀다. 그리하여 거인의 무릎과 그가 올라탄 늑대의 두개골을 동시에 부수었다. 거인은 고통을 참고 계속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롤랑이 보이지 않았다.

롤랑은 거인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늑대의 배를 갈라버렸다.

늑대에서 떨어진 거인의 목을 찌르려던 차, 거인과 눈이 마주쳤다. 거인은 쓰러진 채로도 포효했다.

“죽어라, 광견—아!”

결국 목이 찔려죽은 거인의 눈은 부릅뜬 채였다.

그리 한 명 죽였지만, 롤랑은 애도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었다. 또 다른 거인들이 덮쳐왔기에.

롤랑은 그에 맞서 반격자세를 취하려다 말고 땅을 굴러야 했다.

저 멀리서 거인궁수들이 쏜 거대한 화살이 날아왔다.

폭음, 파편이 거인과 전사들의 몸을 두들겼다.

신나게 거인들을 몰아붙이던 발할라의 전사들에게, 그리고 밀리던 거인들 모두를 향해서 거대한 화살들이 날아왔다.

화살이 닿을 거리에 자기 동포들이 있었지만 서리거인 궁수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활을 쏘았다. 서리거인 전사들 또한 그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눈앞의 전사들과 근접전을 벌였다.

그리 죽고 죽인 끝에, 쳐들어온 서리거인들은 전멸했다.

그리고 그 사실 때문에 아스가르드의 손실이 커졌다. 최후의 거인까지 활을 쏘고, 도끼를 휘둘러왔기에. 예상보다 더 많이 죽었다.

어쨌건 결국 아스가르드가 승리했다. 롤랑은 살릴 수 있는 부상자와 전사자들을 소생시키고 발할라 궁전에 돌아왔다.

롤랑을 기다리고 있는 신이 있었다. 승리하고 돌아온 대전사를 오딘이 반겨주었다.

“이번 전쟁 또한 네 전쟁신을 즐겁게 하였다. 네가 죽여 내게 보낸 영혼들을 빚어 룬을 빚어두었다. 뒤돌아서라, 롤랑. 어느 가호를 원하지?”

롤랑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미 생각해둔 것이 있었으므로.

“화완의 가호를······.”

“또?”

어쨌건 오딘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오딘이 롤랑의 등에 손을 대고,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하여 새겨진 룬을 롤랑은 느꼈다. 바란 가호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롤랑은 지상에 내려가기 전의 힘을 되찾았음을, 현성 식으로 표현하자면 최고 레벨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롤랑은 머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것을 오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이제 종말의 날, 전쟁신을 지켜줄 대전사가 힘이 모자랄까봐 고민할 필요는 없군.”

오딘의 말에 롤랑이 대답했다.

“말씀드리기 외람되오나 주여, 저는 그날 다른 전장에 있어야 할 줄로 아옵니다.”

오딘은 외눈을 크게 떴다. 황당하다는 듯이 롤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의 옆에서, 주를 지키는 게 아니라?”

롤랑은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롤랑이 변명하고자 했지만, 눈살을 찌푸린 오딘이 말을 끊었다.

“안다. 방금 받은 가호만 보아도 네가 뭘 원하는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테니. 기필코 수르트와 맞서야겠노라 이거냐, 롤랑?”

“예, 주여.”

“주를 내버려두고 그래야 할 만큼, 놈이 그리도 미우냐?”

롤랑은 대답이 없었다.

문득 배신감을 느낀 오딘은 잔인하게 대처할 방법을 떠올렸다. 라그나뢰크가 닥쳐왔기에 오딘은 아직 롤랑이 빈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 소원을 수르트에게 보내는 것으로 대체하도록 요구한다면······.

그러나 오딘은 이내 한숨 쉬었고, 주먹을 쥐었지만, 결국에는 말했다.

“정 원한다면, 그래라. 롤랑. 그 전쟁이 정말 가치 있기를 바란다마는.”

롤랑은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하여 끝내 자기 대전사의 뜻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자, 오딘은 실망을 내보이며 뒤돌아섰다.

오딘의 뒷모습을 롤랑은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종말의 예언대로 오딘은 죽을 터였다. 펜리르 늑대에게 잡아먹혀서.

오딘도, 다른 신들과 롤랑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예언이 최대한 빗나가도록, 오딘은 가장 신뢰하는 대전사가 그날 자신을 지켜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롤랑도 그러기를 바라왔다. 사실 지금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롤랑은 여전히 오딘에게 충성했고, 흠모했다. 그러나 그날 요툰헤임 앞에서의 일 이후, 롤랑이 오딘에게 보내는 시선은 보다 객관적이 되었다.

그날 오딘은 실책을 저지르다 못해 정신병적인 추태를 보여주었다. 그로써 확인한바, 오딘의 명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롤랑은 생각했다.

예언대로라면 오딘은 죽을 것이다.

그리고 롤랑은, 오딘이 죽게 내버려두어야 했다.

운명대로.

*******

다시 공중에 떠오른 나글파르 아래에서 혼령들이 날뛰었다.

혼령이 한 병사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겁에 질린 병사가 필사적으로 자기 가슴을 찌르든 말든, 혼령은 병사의 머리통을 깨물었다. 그 가공할 악력에 병사의 두개골이 드러났다. 그 안에 든 송과체를 게걸스레 집어삼키던 혼령은, 이내 다른 병사가 휘두른 칼에 목이 달아나 죽음을 맞이했다.

많은 병사들이, 그만큼 많은 혼령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제이슨이 세계수에서 마주쳤던 혼령들만큼 강한 적들은 아니었다. 세계수에 속박된 그 혼령들은 아마도 결전의 날 도망친 전사들이었으리라. 강했지만 도망쳤기에 저주받은 자들.

지금 이 혼령들을 상대로는 인간 병사들도 어찌어찌 맞서 싸울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리 이어진 싸움이 너무 길었다.

이 혼령 군세는 너무 수가 많았고 역시나 잘 죽지 않았다. 원래 죽은 자들이기에.

어떤 혼령은 목을 베면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몇몇 혼령들은 머리를 부숴도 움직였다. 각기 가진 집착도, 욕망도 다른 혼령 전사들은 무규칙했고 지치지 않았다.

수많은 망자들에 맞선 인간 전사들은 혼란스러운 가운데 지쳐가고 있었다.

제이슨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태양을 노려보았다.

어두워지면 인간 전사들은 피아구분도 되지 않을 것이다. 어두워지면 싸우는 와중에도 졸려질 것이다. 그러나 혼령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미 너무 오래 계속된 싸움이었다. 제이슨마저 지친 와중이었다. 그보다 덜 열심히 싸운 병사들이라고 해서 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망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산자들마저 망자가 될 시간이.

그 전에 무언가 해야 했다. 제이슨은 입술을 깨물며 발키리에게 명령했다.

“나 좀 안아! 그리고 저기로······”

그러고는 지팡이를 들어 공중을 가리켰다. 그 방향을 바라본 발키리의 눈에,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떠있던 나글파르 배가 보였다.

“망자의 배가 목적지란 말인가?”

발키리가 물었고 제이슨이 외쳤다.

“그래, 저기 내려!”

헤임달은 눈살을 구기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미쳤나? 여왕의 호위대가 타고 있을 텐데, 혼자 뭘 어쩌겠다고?”

“누가 혼자 간대? 당신도 가는 거야!”

“누구 맘대로······.”

“왜, 그냥 여기서 뿔피리나 불고 있게? 그러고 싶음 그러든가!”

그리 말하며 제이슨은 발키리에게 몸을 맡겼다. 그리고 소환사를 안아든 발키리는 저 망자의 배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헤임달은 한숨 쉬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방금 전, 헤임달은 천상에 있는 진정한 자신의 죽음을 느꼈다. 그로써 영혼의 주도권이 이쪽에 넘겨진 지금, 이제 여기 있는 이 조그만 인간크기의 헤임달이 진짜 헤임달이 되었다.

이제 헤임달은 한낱 소환물이 아니었다. 지금 죽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죽음이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겨난 잡생각을 헤임달은 머리를 흔들어 떨쳐냈다. 로키마저 도전을 회피하지 않았다. 아스가르드의 일원이라면 언제나 그래야 한다.

달려 나간 헤임달이 펄쩍 뛰었다. 그리하여 헤임달은 푸른 야수 위에 올라탔다.

“짐승놈, 가자!”

헤임달의 명령에 따라 푸른 야수는 성벽 위를 가로질러 달려 나갔다. 그리고 성벽 끄트머리에서 야수가 도약했다.

그리하여 신과 야수가 나글파르 배 위에 안착한 순간, 뒤늦게 발키리와 제이슨이 그 위에 올라섰다.

“왜 날아온 놈이 늦나?”

헤임달의 핀잔에 제이슨이 대꾸했다.

“저 망자 새끼들이 우리한테 쏘는 화살 피하면서 다가오느라 그랬지. 애초에 당신 편하게 올라온 것도 우리가 시선 끌어준 덕분인데 어디서······”

실랑이는 짧았다.

배 위에 남겨진, 가장 오래 묵은 혼령들이 침입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혼령 호위병들 너머에서 그들의 여왕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신은 아름다우나 반신은 썩어문드러진 저승의 여왕.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왓 더 헬?”

외국 욕인지라 상황에 맞는 욕인지 스스로 내뱉어놓고서도 알 수 없었다. 뭐 어쨌건 괜찮겠지마는.

지금 눈앞에 진정한 헬이 있으니.

*******

이후로도 온갖 괴물과 거인들이 덮쳐왔다. 로키가 죽은 지금, 그 후손 되는 괴물들은 그 통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모두들 로키가 죽기 전 내린 명만큼은 기억했다.

아스가르드를 침공하라.

그 명에 응하고자 달려드는 오만가지 괴물들에 맞서, 아스가르드의 일원들은 몇날며칠을 싸웠다.

수많은 신들이, 전사들이 죽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적들을 죽인 지금, 최후의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수 너머에서 시뻘건 광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스펠헤임의 거인들, 그리고 그들의 왕이 다가오고 있었다.

*******

지금 아스가르드의 전선은 두 곳이었다.

우선은 괴물들이 몰려온 전선. 자잘한 괴물들, 그리고 거대한 나무늑대들과 늑대인간들, 그리고 그 모두를 이끄는 펜리르 늑대의 전선이었다.

오딘은 펜리르와 맞서고자 전사와 신들을 거느리고 그 전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프레이가 맡은 전선은 그보다 험했다. 수르트와 무스펠헤임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이 전선의 지원군으로 롤랑이 참전했다.

“로키는?”

프레이가 물었고 롤랑이 대답했다.

“죽었소. 헤임달과 서로 박치기 하더니, 로키의 머리가 헤임달의 몸통에 박히더군. 헤임달은 그 반대로 죽었고.”

“망할, 헤임달도 그리 죽었나? 그리 죽었으면 소생도 못 시키겠군. 죽어도 왜 그딴 식으로 죽나.”

한탄하는 프레이를 롤랑은 분노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에 맞서 프레이도 지지 않고 롤랑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전에도 둘은 다퉜다. 프레이의 여동생, 프레이야 여신은 발할라 궁전에 절반의 전사들을 남기고자 했다. 전사들은 그 결정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병력을 다른 전술에 투입하겠거니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롤랑이 결사반대하여 기어이 모든 전사들을 전장으로 내보내게 만들었다.

롤랑은, 그러니까 현성은 북유럽 신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라그나뢰크를 겪고도 살아남을 신 중에 프레이야가 있음을 안다. 바나 신족인 프레이야는 자기 고향 바나헤임으로 도망치기 때문이다.

굳이 프레이야의 도주를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여신의 지휘를 기다리던 전사들이 그저 궁전에서 멀거니 서있게 만들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은 막아내고, 어떤 일은 내버려두어야 했다.

롤랑이, 현성이 알고 있던 모든 일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라그나뢰크의 예언은 널리 알려진바, 예정된 종말을 막고자 신들은 노력해왔다. 종말을 일으키리라 예언된 로키의 자식들을 유폐한 것처럼. 물론 그 조치는 로키와 그 자식들에게 신들을 몰살시킬 이유를 제공했을 뿐이었다.

그처럼 예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수많은 신화에 정통했던 현성이 그 사실을 알았기에, 롤랑은 오딘이 펜리르에게 잡아먹히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곁에서 지키고자 하지 않았다.

토르가 요르문간드와의 싸움에서 죽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벌어진 싸움을 보니 역시나 막아낼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롤랑이 끼어들었다면 휘말려 죽을 뿐이었으리라.

마찬가지로 오딘의 최후 역시 간섭할 수 없을 터였다. 또한 다른 신들의 최후 역시.

운명에 거스를 수는 없다. 뭔가 바꿔보려거든 그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롤랑과 눈씨름 하던 프레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항복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다가온 적들을 바라보았을 뿐.

보기만 해도 눈이 아파오는 적들이었다.

불타오르는 군세, 무스펠헤임의 거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화염거인들의 중심부에 태초의 불꽃 수르트가 우뚝 서있었다.

수르트가 든 화염검, 그 물건은 본디 프레이의 것이었다. 종말을 막기 위해 벼려낸 레바테인. 그러나 프레이의 실수로 종말의 거인에게 넘어가버렸다.

롤랑은 수르트와 프레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결국 레바테인이 없기에 프레이는 수르트와 싸우다 죽는다고······.’

그런 프레이와 함께, 롤랑과 전사들은 지금 수르트와 그 군세를 막아야 했다.

프레이는 입술을 혀로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저것들만 이겨내면 나머지는 막을 만해. 트롤들은 싹 다 전멸했고, 서리거인들은 큰난쟁이 원정대를 신경 쓰느라 방어병력을 남겨야했고······ 헬의 망자들은 지상에서 싸우느라 바쁜 와중이니. 그 누가 알았겠나? 큰난쟁이들이 이토록 도움 될 줄이야······.”

그 말을 받은 것은 카를이었다.

“큰난쟁이가 아니라 인간이오, 프레이.”

“아, 실수했군. 하지만 이 정도 실수는 넘겨주지 그러나? 시시껄렁한 지적은 하지 말고 이제부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고르게. 유언이 될지도 모르잖은가. 어쩌면 난 죽을지도 몰라. 자네도, 그 잘난 성기사들도 모조리 죽을지 몰라.”

카를이 웃으며 물었다.

“지금 겁먹었노라 고백하는 건가?”

실제 심정이야 어떻건, 아스가르드의 전사가 내놓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프레이는 난폭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아니.”

그리고는 레바테인이 아닌 룬검을 들고서 프레이가 달려 나갔다. 모든 불꽃 거인들보다 눈에 띄는 수르트를 향해서.

프레이를 뒤따라 카를도 말을 달렸다. 그 성기사들이 그 옆에 바짝 붙은 가운데, 다른 발할라의 전사들도 달려 나갔다.

“아스가르드를 위하여!”

이내 발할라의 전사들은 화염거인들과 충돌했다.

불타오르는 적들 앞에서 전사들은 불타오르고, 짓이겨지며 죽어나갔다. 그리고 비슷한 비율로 화염거인들을 죽여 나갔다. 전사도, 거인들도 불타오르며 싸웠다.

그리 서로 죽고 죽이고 있었다.

“내 오랜 세월 너를 기다렸지, 수르트!”

마침내 프레이와 수르트가 칼을 맞부딪쳤다. 그 충돌로 생겨난, 불꽃으로 번뜩이는 진공파를 느끼며 롤랑은 카를의 등을 보았다.

롤랑은 카를이 이끄는 결사대였다. 프레이가 수르트에게 패할 경우 카를과 그 기사들은 프레이의 못 다한 임무를 대신하기로, 그러니까 프레이를 대신하여 수르트를 처치하기로 되어있었다.

물론 롤랑은 자기네 차례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화대로, 프레이는 수르트에게 패할 테니까.

결국 몇 합의 충돌 이후, 불꽃의 거인 수르트가 포효했다.

뒤로 밀려난 프레이가 신음했다. 넋 나간 얼굴. 레바테인과 여러 번 부딪친 끝에 프레이의 룬검이 녹아내린 것이다.

수르트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거칠게 휘둘러진 레바테인 검이 프레이를 불태우려던 그때, 롤랑과 손잡고 있던 모지가 입술을 달싹였다.

공간이동 주문. 둘은 순식간에 프레이와 수르트의 결투장, 그 격전의 도가니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모지가 중얼거렸다.

“이러면 되나?”

“그래!”

그리고 롤랑이 달려 나가 프레이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뒤로 당겨진 프레이의 가슴을 레바테인이 스치고 지나갔다. 끔찍한 고통에 프레이는 비명 지르면서도 어찌어찌 살아났음에 안도했다.

뒤를 돌아보고서 롤랑이 도와주었음을 알아채고는 중얼거렸다.

“고맙······”

그러면서 허겁지겁 자기 상처에 치유의 주문을 쓰려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방금 베여나간 프레이의 가슴은 계속해서 불타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수르트의 힘이 담긴 레바테인의 불꽃은 모든 치유를 거부하고 그 살과 뼈를 집어삼켰다.

고통이 갈수록 커졌다. 프레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비명지르는 프레이를 내려다보며, 롤랑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편해지도록 도와주겠소.”

이내 롤랑이 뒤랑달을 휘둘렀다. 그 칼날이 불꽃에 잠식된 프레이의 살을 뭉텅 베어냈다.

그리하여 프레이의 몸 전체가 불타오르는 것은 막아냈지만, 가슴 절반이 잘려나간 프레이는 죽음을 맞이했다.

이 자리에서 소생을 시도할 여유는 없었다. 롤랑은 프레이의 시체를 뒤로 던져버린 다음 오랜 친구에게 외쳤다.

“우리 차례가 돌아왔소, 빛의 신이여!”

발두르가 죽은 지금 빛의 신은 카를이었다. 그 지위에 걸맞게도 카를은 온몸에서 빛을 발하며 외쳤다.

“성기사들이여! 태초부터 우리를 기다린 시련이 저기 있노라! 예전에도 그랬듯 다시 한 번 맞서라! 아스가르드와, 그 아래 미드가르드와, 우리 영혼을 위해서, 돌격하라!”

롤랑이 그 앞에 선 가운데 카를과 성기사들이 말을 달렸다.

수르트 바로 옆을 날아가며, 그리폰을 탄 아스톨포가 뿔나팔을 불었다. 생전에 쓰던 것보다 강력한 마법의 뿔피리였다. 그 마법의 힘이 수르트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수르트를 거들려던 화염의 거인들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 틈에 성기사들이 전진했다.

그러나 뿔나팔 소리가 수르트의 눈길을 끌었다. 이내 덮쳐온 레바테인의 불꽃.

아스톨포와 그리폰은 한 순간에 불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젠장.’

수르트에 다가선 롤랑은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포 때문이 아니라 그 열기 때문에. 온갖 가호가 씌워진 그 몸뚱이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내 수르트의 목을 노리고 롤랑이 도약했지만, 수르트가 대충 휘두른 손에 맞아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왼손에 차고 있던 방패로 막아냈다. 불타오르는 방패를 바로 던져버렸다. 덕분에 온몸이 불타오르지는 않았지만······.

겨우 일어선 롤랑의 어깨 위에 카를이 손을 얹었다. 그리고 카를이 가호를 내린바, 롤랑의 몸은 보호막으로 뒤덮였다. 열기가 한결 견딜 만하게 느껴졌다.

“저 시뻘건 거인 놈은 우리 숙적이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카를이 중얼거렸고 롤랑이 말을 받았다.

“이번엔 이길 수 있겠나?”

“모르지. 하지만 시련이 저기 있다면, 우리는 나아가야 하네.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황제의 기사여.”

“그래, 예전처럼.”

롤랑은 그 시절에도 그러했듯 대제를 지키고자 그 앞에 섰다. 그러나 카를이 롤랑의 몸을 잡아당기더니 그 앞에 나섰다.

“예전에는 자네가 먼저 죽었지. 이번에는 반대로 하세.”

카를이 그리 말한 순간, 롤랑은 자신의 몸에 온갖 빛과 가호가 휘감기는 것을 느꼈다. 축복, 보호막, 치유의 빛 등. 빛의 신으로서 내릴 수 있는 모든 가호가 중첩된 것이다.

그러고는 카를이 달려 나갔다. 다른 성기사들을 이끌고, 수르트를 향해서.

그러나 역시, 카를 대제와 그 성기사들은 수르트의 검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수르트가 한 번 화염검을 휘두를 때마다 한 명의 성기사들이 불타 사라졌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가까이서 싸운바, 카를은 기어이 수르트의 옆구리에 성검을 꽂아 넣었다.

“좋······”

카를의 얼굴에 미소가 생기려다 말고 사라졌다. 수르트의 몸속에서 성검마저 불타 사라졌기에.

수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 옆에 선 카를에게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카를은 거기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아예 양 팔을 벌리고는 외쳤다.

“빛이여!”

그렇게 불에 휩쓸린 카를의 몸은, 불타오르는 것을 넘어 섬광이 되었다.

빛이 모든 것을 휩쓸었다.

모두의 눈을 가린 빛 속에서, 롤랑은 수르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마 카를의 축복 덕분일 것이다.

빛 속에서 롤랑은 수르트를 향해 달려 나갔다. 모지가 걸어준 마법이 그 발소리를 지웠기에, 힘껏 뛰면서도 은밀하게.

지금 광기에 몸을 맡길 수는 없었다. 광기의 근원이 사라진 뒤였다. 어느 샌가 오딘이 죽은 것이다. 아마도 다른 전선에서 펜리르에게 잡아먹혔으리라.

하지만 룬은 남았다. 어쩌면 주문은 쓸 수 있을지도······.

수르트의 열기를 느끼면서 롤랑은 생각했다. 이 전쟁을 누구에게 바쳐야하는가?

일단 아스가르드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사실 미드가르드를 위해서인지도 애매했다. 아스가르드에서 지낸 시간이 너무 오래된 데다 현성의 기억마저 자리 잡은 지금, 롤랑에게 미드가르드는 고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지난 짧은 시간, 현성은 미드가르드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먼 옛날에 롤랑도. 기사도 소설에서 어찌 칭송하건, 롤랑은 그저 친구 카를의 무모한 요구에 부응하기 벅찼던 기사였다. 생존을 넘어 숭고한 목적으로 싸울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얼 위해 싸워왔나?

간단했다. 롤랑은 외쳤다.

“이 전쟁을 내 삶에 바친다!”

룬이 빛났다. 그로써 맹목적인 광기가 아니라, 취기와도 같은 전투흥분이 롤랑의 몸에 덧씌워졌다. 그와 함께 육체의 한계가 사라진 것을 롤랑은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전쟁의 주인은 롤랑이었다.

그 사실을 만물이 인정했다. 이내 전장을 휩쓴 빛을 뚫고서 한 자루의 창이 롤랑을 향해 날아왔다.

롤랑이 궁니르를 쥐고 달렸다. 그 창이 갑작스레 왜 날아왔는지 새삼 놀라지 않았다. 오딘이 죽은 지금, 자기가 바로 전쟁신임을 알 수 있었다.

전쟁신으로서 궁니르를 던졌다. 수르트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그러나 직선으로 던진 것이 아니라 수르트의 위치보다 멀리 날도록 던져버렸다.

그 의도대로, 수르트를 스치고 지나간 궁니르가 공중에서 방향을 선회했다. 던졌다가 돌아오는 창답게 주인의 손에 돌아오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궁니르와 롤랑 사이에는 수르트가 있었다.

이내 날아온 궁니르는 수르트의 어깨에 박혔다.

창이 날아온 방향에 적이 있다고 생각한 수르트가 허리를 돌려 광포하게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물론 빈 허공이었다.

이제 롤랑에게는 수르트의 등이 보였다.

더욱 빠르게, 롤랑은 달려 나갔다.

바로 앞에 수르트가 보였다.

그 기척을 눈치 챈 수르트가 뒤늦게나마 뒤돌아섰다. 그리고 드러난 수르트의 가슴에 롤랑이 뒤랑달을 꽂아 넣었다.

아까 수르트를 해치려던 수많은 무기들이 녹아내린 것을 목격한 마당이지만, 롤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깊숙하게 박아 넣었다. 먼 옛날에도 수르트와 이 칼을 들고 싸워보았다. 그때 뒤랑달은 녹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었다······.

칼자루를 통해 뜨거운 심장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제 해치웠나?

물론 아니었다.

수르트가 왼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 불꽃의 손길마저 치명적이었기에 롤랑은 바로 몸을 굴러 내뺐다. 그 틈에 수르트는 제 가슴에 박힌 뒤랑달을 뽑아내 뒤로 던졌다.

아마도 멀리 던지려 했겠지만, 롤랑은 염동력을 뻗어 뒤로 날아가던 뒤랑달을 회수했다.

그렇게 다시 뒤랑달을 쥐고서 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심장이 찔린 마당이지만 수르트의 기세는 전혀 죽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롤랑에게 레바테인을 휘둘러왔다.

뒤랑달이라도 거기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반격, 오직 반격뿐이다. 롤랑은 그렇게 했다.

머리를 스친 레바테인을 어떻게든 피해내고는 그 무릎을 찔렀다. 그 순간 수르트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롤랑은 피하고자 했지만 살짝 늦었다. 기어이 불꽃의 숨결이 롤랑의 발목을 스쳤다.

그것만으로도 롤랑의 하반신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롤랑은 계속해서 반격하고, 공격하며 수르트의 몸을 찌르고 또 찔렀다.

그리 상처를 거듭 냈지만 수르트는 여전히 빠르고 강맹했다. 심장이 찔리지 않았다면 롤랑보다 더욱 빨랐을 것이다.

도저히 피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일격이, 다리가 불타올라 상당한 기동력을 상실한 롤랑에게 덮쳐왔다.

그러나 롤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롤랑은 그 자리에서 더 빠르게 반격했다. 후속동작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모든 힘을 담아 칼을 휘둘렀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 곁에서 죽어간 모든 것을 위해서.

*******

나글파르 안에도 혼령이 많았다. 너무 많았고, 끔찍하게 잘 죽지 않는 놈들뿐이었다.

제이슨과 그 소환물들은 한 시간째 이 배 안에서 분투했다. 그 분투로 말미암아 사 미터가량 전진했다.

그러나 저들의 여왕 헬에게 가 닿지는 못했다.

아직도 많은 호위병들 너머에서, 헬은 물끄러미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이슨은 문득 배 아래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날뛰는 망자들과 놈들을 막으려는 원정대 병력들.

아직까지는 원정대가 그럭저럭 우세했다. 하기야 그 수가 원체 많았으니까. 각지에서 모여든 수만 병력이 비프로스트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지쳐가고 있었다. 어스름한 와중에도 허덕거리는 병사들의 숨결이 보였다.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헤임달? 뿔피리 불어줘.”

“그건 별 효력이 없다.”

헤임달이 거부했지만, 제이슨은 재차 요청했다.

“그냥, 불어줘.”

헤임달은 괜히 실랑이할 여력이 없었다. 그 역시 너무 피곤했다. 그 이유는 몰라도 일단 뿔피리를 불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그리 소리를 내어 많은 이들이 이쪽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커다란 고둥소리가, 얼떨결에 임명된 맹주는 아직 위에서 싸우고 있음을 모두에게 알렸다.

그 사실이 모두를 북돋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무엇이라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금 싸웠다. 헤임달의 한 번 칼질이 제이슨의 세 번 칼질보다 나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제이슨 홀로 싸우는 것처럼 열렬하게.

지상에도 힘겨운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투 와중에도 병사들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앞에 적들이 있는 마당이지만 그 사실을 신경 쓰지 못했다. 다들 너무 오래 싸웠고, 지쳐서 넋이 나갔다.

그러다 제이슨이 한 발짝 내디딘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병사들 또한 전진했다. 앞으로.

끈질긴 동작을 이어나가는 와중에도 점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지하세계의 군대에는 이로운 조건이지만, 저승의 여왕은 심드렁했다.

헬은 선박 아래 풍경과 선박 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징그럽게도 많은 산자들과 징그럽게도 죽지 않는 침입자들이 보였다.

우울하게 그것들을 노려보던 차, 헬은 자기 영역에 떨어진 두 영혼을 느꼈다.

로키와······ 수르트.

둘이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헬은 아버지가 실패했음을, 라그나뢰크는 사실상 끝났음을 깨달았다. 그저 제 아버지의 사업에 한 손 거들러 왔을 뿐인 저승의 여왕은 그로써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헬이 명령했다.

“모두, 그만.”

그러고는 멈춰선 혼령들 사이로 기진맥진해있는 침입자들이 보였다.

그들을 향해 헬이 중얼거렸다.

“너희, 내려가. 그럼 난 돌아갈 테니.”

제이슨은 가쁜 숨을 참고 물었다.

“어디로?”

“왔던, 곳으로. 헬로.”

제이슨은 어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발키리를 잡고 제이슨이 뛰어내렸다. 그 다음에는 헤임달이 자기 주문을 써서 지상에 착지했다.

제이슨은 숨을 헐떡이며 성벽 위에 올라섰다. 지휘관들의 깃발이 보였다. 헬이 약속을 지키건 말건, 거기서 잠시 숨을 돌릴 생각이었다······.

다가온 제이슨에게 지휘관들이 물어왔다.

“어찌 된 겁니까?”

제이슨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겠다던데.”

말하면서도 제이슨은 자신감이 없었지만, 잠시 후 헬은 약속을 지켰다.

나글파르는 천천히 선회했다. 그리하여 뱃머리를 돌리더니,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내 세계수 뿌리에 난 구멍이 망자의 배를 집어삼켰다. 나글파르와 거기 올라탄 저승의 여왕은 그렇게 사라졌다.

이 자리에는 여전히 들끓는 혼령들만이 남았다.

질질 끌던 싸움에 질린 헬은 정말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데려온 병력을 굳이 회수하지는 않은 것이다.

“씹할 쌍년이, 고 투 헬 하면서 지 부하들은 안 데려가?”

제이슨의 목소리는 허탈함에 떨렸지만, 이 상황을 지휘관들은 보다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한 지휘관이 주문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발할라의 전사 제이슨 경이! 저승의 여왕 헬을 물리쳤다—!”

순간 헤임달이 어이없다는 듯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군대 사이에서 돌아온 반응에 당황했다.

당장 눈앞에 남은 혼령 전사들은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거의 반나절 종일 몸을 움직인 병사들은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외쳤다.

“미드가르드 만세!”

“우둔한 큰난쟁이들······.”

헤임달이 다 들리도록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차였다. 병사들이 모두 함성을 내지르는 가운데, 전장에서 들려오던 망자들의 괴성이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함성에 묻힌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왕이 물러났다는 외침을 혼령들도 들었다. 그리고 정말 나글파르가 사라진바, 혼령들은 모두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여왕의 부재를 알게 된 어떤 혼령들은 목적의식을 잃고 멈춰 섰고, 어떤 혼령들은 아무런 변화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혼령들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막 쪽으로 달려가는 혼령들은 내버려둬도 될 터였다. 알아서 말라죽거나, 지상에서 체내의 영혼이 고갈되어 죽고 말 테니까. 그러나 그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혼령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 혼령 무리가 달리는 방향에는 비프로스트의 인접국이 있었다.

메디아가.

거기까지 달아난 혼령들이 무슨 짓을 할 것인가? 알 수 없었다. 그저 비껴갈 것인지, 아니면 고갈되어가는 영혼을 보충하고자 산자들의 뇌를 뜯어먹을 것인지.

어느 쪽이건 내버려둘 수 없었다. 프레이 신이 가호하기에 그 어느 나라도 메디아를 침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메디아는 상비군은커녕 궁성 근위병들이 병력의 전부인 나라다.

아마도 일천 혼령이라면 메디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충분할 터였다.

막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병사들을 보내 쫓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다들 지친 마당에 달려서 따라잡기는 불가능할 테니까.

그렇다면 말을 타고 달려야 한다.

다행히 제이슨의 옆에는 롤랑을 추종하던 기사들이 많았다. 저들이라면 자신을 따라줄 것이다.

제이슨은 지친 와중에도 지휘관들에게 고함질렀다.

“지금 나 필요 없지? 자리를 비울 테니, 아마도 오래 비울 테니 지금 여기서 맹주 자리 반납하겠소. 영주 대리도 이제 끝이오! 어차피 다 끝난 싸움, 이젠 알아서들 하시고! 그리고······ 기사들에게 전해주시오. 지금 발할라의 전사 제이슨이 메디아를 구하러 갈 것이다! 함께하려거든, 따라와! 이렇게!”

그리 외치더니 제이슨은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헤임달과 함께 말을 달려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기 메디아를 향해 달려 나가는 혼령 무리를 향해서.

혼령들보다 앞서 달려 메디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리 마구 달리던 제이슨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지휘관들은 제이슨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뒤따라 달려오는 기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제이슨은 씩 웃고는 다시 달렸다.

*******

< 아스가르드 - [2] 수정본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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