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60화 (160/164)

< 세계수 - [2] >

로키는 의문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혼자서? 이런, 자네 혹시 발두르로 둔갑한 토르인가? 아니면 전능감에 정신이 나가버린 발두르인가?”

발두르는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후자에 가깝겠군.”

“이럴 수가, 그게 사실이라면 내 이보다 기쁠 수 없겠군그래. 갑자기 어디선가 묠니르가 날아오는 게 아니라면야······”

히죽거리며 로키는 손짓하여 자기 졸개들의 절반을 자기 앞에 옮겼다. 혼령들은 오딘과 그 무리를 지켜선 채, 늑대와 화염거인들은 롤랑과 발두르 근처로 다가와 포위망을 구성했다.

광전사는 자기한테 다가온 괴물들과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오딘이 명령했다.

“멈춰라!”

그리고 광전사는 멈춘바, 잠시간의 고요가 찾아왔다.

문득 뒤에 서있던 서리거인들이 입을 열었다.

“정말 발두르—인가?”

발두르는 슬레이프니르 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여긴 아스 신족이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불가침 조약을 잊었나? 조약을 맺은 왕 본인이 직접 약속을 어기는가—?”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거인이여. 외교적 해결을 하러 왔을 뿐. 상황이 급하여 내방을 위한 허락을 얻지 못했음에 유감을 표한다. 그 보상은 나중에 치르리라.”

거인들과 말 섞는 발두르를 바라보며 오딘은 생각했다. 롤랑에게 저 찬탈자를 언제 기습하도록 명령하는 게 좋을까 하고.

방금 명령은 잘 들어 먹히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때 로키가 물었다.

“그래서, 아비를 구하러 왔단 건 뭔 개소리인가. 토르 혹은 정신 나간 발두르? 혹시 그 늙은 육체에 속박된 아버지의 영을 해방시켜주겠다는 거라면 내 친히 목 자르도록 기회를 주겠네.”

“아니. 나는 수백 년간 유배되었던 내 아버지를 돌려받길 원한다. 거인들, 너희는 마땅히 이 분을 돌려주어야 한다. 아스가르드에서 추궁했을 때는 분명 오딘의 실종에 당신들은 관여되지 않았노라 주장하지 않았던가. 거짓을 고했으나 지금이라도 잘못을 수정할 기회를 줄 터이니······”

그 말에 로키가 웃었다. 그 박장대소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로키가 말했다.

“이 늙은이가 여기 매달린 데 거인들 잘못은 없어! 궁니르에 맹세코, 오딘 이 늙은이가 멋대로 나뭇가지에 자기 목을 맨 거란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오딘?”

오딘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모두들 로키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로키가 말했다.

“오딘 늙은이는 의식을 치르던 중이었지. 왜, 옛날 오딘 추종자들이 저지르던 야만적인 의식 있잖은가? 사람을 산 채로 나무에 목매달아 오딘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 말이야. 오딘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그 의식을 치르고 있었지.

아무런 호위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서 몰래······ 그런데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나였다네. 오딘을 몰래 따라왔거든. 그래서 지켜보자니 오딘이 가지에 목매달아 정신을 잃더군. 순간 장난기가 돌더라고? 그 목맨 밧줄을 내가 글레이프니르로 바꿔놓았다네. 목맨 장소는 사실 원래 여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세계수를 순찰하던 거인들이 나중에 발견하고 여기 모셔둔 게 아닐까 싶네.”

“결국 거인들의 짓이었다는 셈 아닌가.”

“아, 방금 그건 내 추측일 뿐. 사실 다람쥐 라타토스크 짓일 수도 있잖나? 그 앞니로 오딘을 물어다 여기 옮겼을 수도 있지. 하여튼 증거는 없어. 왜? 나한테 그랬듯 의심스러운 서리거인들을 모조리 동굴에 가둬버릴 텐가?”

발두르는 더 추궁하기를 포기하고 한숨 쉬었다. 문득 오딘을 돌아보더니 물었다.

“아버지, 왜 호위 하나 데려가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중 하나를 데려가셨더라면······”

그제야 오딘은 입을 열었다.

“호위? 누구를? 너를? 나 하나 사라지면 왕위를 차지할 아들한테 무력한 꼴을 보이란 말이냐?”

분노에 찬 목소리. 발두르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절 못 믿는다면 여기 이 롤랑이나, 토르라도 데려가지 그러셨습니까. 설마 토르가 누군가를 해치려거든 상대가 꼭 목 매달린 꼴이어야 한다고 믿진 않으실 텐데요.”

그 말에 오딘은 아틀란티스의 천둥신을 떠올렸다. 자기 강력함을 믿고 제 아비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신.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자기 처신에 잘못은 없었다. 아틀란티스 천둥신의 행위를 아스가르드의 천둥신이 본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나 오딘이 굳이 변명하지 않고 입 다문 가운데, 로키가 말했다.

“저 늙은이한테 누군갈 신뢰하거나 믿으라고 설득하는 것보다 쓸데없는 짓이 없지. 누구보다 오래 산 결과 누구보다 많이 배신하고 다닌 늙은이거든. 자기부터 남을 어찌 등쳐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기 바쁜 늙은인데 누굴 믿겠나?”

그 말에 롤랑이 으르렁거렸다. 로키는 비웃음을 지어보였지만 그러면서도 뒷걸음질 쳐서 롤랑과 간격을 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발두르가 서리거인들을 향해 말했다.

“수다가 너무 길었군. 이제 외교를 하지, 거인들이여. 지금까지 그래왔듯 대화로 이번 사태를 해결하길 원한다. 아스가르드의 왕이 요구하건대, 이번 일을 보아 넘겨주게. 내 그 부탁을 하려고 홀몸으로 여기 왔다네.”

로키가 웃었다.

“거인들과는 협상할 수 있다 치고, 날 상대로는 어쩔 건가?”

발두르는 로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성검 발뭉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외쳤다.

“이렇게 하지!”

자신에게 공격하는 줄 알았던 로키는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발두르의 검이 향한 것은 로키가 아니었다.

성검은 바닥에, 그러니까 세계수 가지에 내리꽂혔다.

성검은 칼자루만 보일 만큼 깊이 박히더니, 가지 안에서 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세계수와 요툰헤임을 잇는 길이었던 세계수 가지는, 내부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빛과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그래서 타닥타닥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나무껍질을 보고서야 로키는 뒤늦게 그 의도를 깨달았다.

이쪽이 쫓아가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하려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슬레이프니르를 탄 발두르는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롤랑의 손목을 붙잡고, 건너편에 있는 오딘을 향해서.

로키는 눈에서 불을 피워 올리며 고함질렀다.

“내 새끼, 이리 와!”

어미의 말에 슬레이프니르는 복종했다. 슬레이프니르는 바로 방향을 선회하여 자기 어미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통제권을 상실한 신마 위에서 발두르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할 일을 했다. 공중에서 발두르가 외쳤다.

“내 아버지를 지켜라, 기사!”

발두르는 붙잡고 있던 롤랑을 건너편으로 던져버렸다. 그러니까 오딘 근처로.

던져진 롤랑이 건너편에 착지했을 때, 슬레이프니르는 자기 어미 로키에게 돌아와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등 위에 올라타 있던 발두르는 그저 짐이었다는 양 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발두르에게 괴물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로키는 이 말 잘 듣는 자식을 쓰다듬어줄 생각도, 포로가 된 발두르를 속박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로키는 불꽃과 연기 속에 휘감긴 성검을 바라보았다. 앞쪽 세계수 가지, 그러니까 요툰헤임과 세계수를 잇는 길 한복판에 깊숙이 꽂혀버린 성검. 성검은 계속해서 열을 발했다.

그 열기로 세계수 가지는 속이 전부 타버렸다.

이내 세계수 가지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한 성검도 나무파편과 함께 저 아래로 추락했다.

로키는 자신마저 떨어져 내리지 않도록 황급히 뒤로 내뺐다. 그리고 눈앞에 생겨난 절벽을 노려보았다.

결국 요툰헤임과 세계수를 잇던 길이 끊겼다.

장기적으로 보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세계수의 재생력은 강력하니 가지는 다시 자라날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분명히 문제였다. 건너편으로 추격자들을 보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로키는 절벽 너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지시도 내리지 않았건만 혼령 전사들은 이미 싸우고들 있었다.

정확히는 쓸려나가고 있었다. 광전사와 그 손에 쥔 칼 한 자루에 의해서.

“오딘이시여! 제가 갑니다—!”

지금 이 순간, 광전사의 몸놀림은 광포하기 그지없었다. 제 주인을 지키며 싸우던 방금과 달리, 지금은 그런 자제심을 발휘할 이유가 없었다. 제 주인 곁에 돌아가고자 날뛰는 것이다.

광전사의 칼이 한 번 회전하자 혼령 둘이 목 날아가는 꼴을 로키는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절벽의 틈을 뛰어넘어, 이쪽에 있던 늑대들이 건너편으로 도약했다. 도약하느라 드러나게 된 늑대들의 배에 광전사의 칼이 족족 꽂혔다.

끝내 늑대들마저 전멸한 가운데 광전사는 기어이 혼령들을 파헤치고 오딘 옆에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오딘 앞에서 광전사가 외쳤다.

“제가 왔나이다!”

그러나 그 순간, 오딘은 광전사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오딘은 건너편에서 괴물들에게 둘러싸인 발두르를 보았다.

아비를 구하려다 고립된 차남이 저기 있었다. 지금 발두르를 보는 오딘의 외눈은 툭 튀어나온 채 흔들렸다.

일순 발두르를 적들 사이에 남겨놓고 떠나도 되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마음을 다잡았다. 당장 어찌 구해줄 수도 없거니와, 어쨌건 지금 신들의 왕은 발두르 아닌가. 모름지기 사로잡힌 왕은 예우 받는 법, 당장 죽지는 않을 테니 나중에 구해주든 몸값을 치러 돌려받든 하면 될 일이다.

우선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오딘은 한 박자 늦게 중얼거렸다.

“롤랑, 네 주가 명하건대, 날 지키려 할 것 없다. 내 몸이야 시체라도 주워가면 되니, 괴물이 날 해치건 말건 온힘을 다해 싸워라.”

오딘은 광전사의 등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아껴두었던 룬을 모조리 전달했다.

광전사의 몸이 룬으로 빛났다. 그리하여 새로운 힘을 얻어, 지금껏 소진된 기력 그 이상의 힘을 받아 날뛰기 시작했다.

더없이 생생한 모습. 로키는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구원이 될 수도 있던 발두르의 강림을 방해하더라니. 기회를 엿보다 힘을 준 광전사를 시켜 자기 몸만 챙겨 달아나려는 속셈이었던 모양이다.

더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로키는 슬레이프니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여덟 개 발굽을 움직여 슬레이프니르가 저 편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광전사는 혼령들 사이에서 분투하고 있었다. 그 옆을 노리고 로키가 날아갔다.

공중에서 덮쳐오는 기마돌격을 광전사는 흘긋 보았다. 그 순간 로키가 명령했다.

“붙잡아!”

모든 혼령들이 그 명령에 응했다. 혼령들은 다른 행위를 그만두고 모조리 롤랑에게 달라붙었다.

어떻게든 달라붙는 데만 집중하느라 광전사의 칼질에 속절없이 베여나갔다. 그 결과 순식간에 일곱이 베여나갔지만, 그 손실을 감수한 결과 혼령 셋이 광전사의 다리와 몸통에 달라붙을 수 있었다.

이제 광전사는 로키의 가공할 돌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방어뿐이겠지만, 기마돌격은 몸으로 받아내기에는 너무 위력적인 법.

로키가 충돌한 순간, 인마의 무게를 실어 휘두른 미스틸테인은 방어를 하든 말든 광전사의 몸을 쳐 날릴 터였다.

로키는 그리 믿고 말을 달렸다. 이내 광전사의 앞에 다다른 순간 슬레이프니르의 앞발, 그러니까 네 개의 말발굽이 광전사의 몸을 짓밟았다.

광전사의 몸이 뒤로 넘어지는 가운데, 로키는 정지한 충격을 담아 미스틸테인을 휘둘렀다. 큰 동작, 위력적이었다.

그래서 생겨난 빈틈을 광전사는 짓밟히던 와중에도 놓치지 않았다.

반격의 요령은 거인의 돌격을 상대할 때와 같았다. 적의 공격이 얼마나 위력적이건, 공격 도중 드러난 급소에 한 번 찔러 넣을 수 있으면 끊어버릴 수 있다.

롤랑은 그럴 능력이 있는 기사였다. 상대가 수천 년 묵은 검사일지라도.

미스틸테인의 칼몸을 뒤랑달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거기 연결된 손등을 베어냈다.

이내 슬레이프니르의 발굽이 광전사의 배를 걷어찼다. 광전사는 저 멀리 나가떨어졌지만 로키는 거기 신경 쓸 수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손이 날아간 로키가 비명 질렀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로키는 어떻게든 잘린 손을 주워 챙겼다. 그러고는 슬레이프니르 위에 올라탄 뒤, 자기 졸개들 옆으로 허겁지겁 피신했다······.

한편 쓰러져 무방비가 된 광전사의 몸 위로 혼령들의 무기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로키의 명령이 바꾸지 않은바, 혼령 모두가 광전사에게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사정없이, 여러 번 마구 내리꽂았다. 그 힘에 밀려 광전사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끝내 광전사에게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는 마당이었다.

모든 혼령이 광전사 하나만 둘러싼 가운데, 거기 포위되어 있던 자들은 지금 이 상황을 기회로 해석했다.

모두들 마지막까지 남긴 여력을 동원했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울부짖으며, 푸른 야수가 그 몸뚱이를 옆으로 굴렸다. 막무가내였다. 그 큰 몸에 깔아뭉개진 혼령들은 푸른 야수와 함께 가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하여 도주로가 생겨난 순간, 헤임달이 뿔피리를 불었다. 있는 힘껏 불었다. 이제 절반밖에 남지 않은 혼령들은 우뚝 멈춰 섰다.

헤임달이 오딘을 둘러메더니 광전사에게 고함질렀다.

“달려라!”

광전사는 헤임달의 명령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가 오딘을 업고 있다는 사실에는 신경 썼다.

일어서려는 롤랑에게 제이슨이 손을 내밀었다.

“잡아!”

그 손을 잡고 광전사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 앞을 가로막은 혼령들을 밀쳐내고는, 제이슨과 함께 헤임달 뒤에 달라붙었다.

헤임달이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헤임달을 따라 모두들 달렸다. 뒤늦게 마비에서 풀려난 혼령들이 도망자들을 따라잡고자 달렸지만, 그 앞을 흑기사와 발키리가 가로막았다.

저 너머로 멀어져가는 도망자들을, 로키는 잘려나간 자기 손을 손목에 이어 붙이는 와중에도 노려보았다.

도망자들 중 오딘을 향해 발두르가 외쳤다.

“아버지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 모두 고생했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왕좌는 조금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아버지의 부재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그 사실을 알아주소서!”

헤임달에게 업혀가던 오딘이 고개를 돌려 발두르를 바라보았다. 아들과 시선이 마주친 오딘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도망자들은 우트가르트 성채에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발두르는 웃었다.

한편 분노 어린 로키의 눈길은 포로에게 옮겨갔다.

“누가 맘대로 지껄이래.”

불의 신답게 로키의 눈은 화염으로 타올랐다. 코에서는 콧김을 내다 못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잘려나간 제 손은 이미 다시 붙인 마당이었지만, 그 사실이 위안을 주지 못했는지 지금 로키는 척 보기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분노한 악신 앞에서 발두르는 즐거운 투로 말했다.

“저들이 도망친 게 아쉬운가? 내버려두라, 로키. 그 누구도 그대가 소득 없었다는 말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지금 신들의 왕을 사로잡았지 않은가. 이보다 귀한 포로가 어디 있다고 더 많은 포로를 원하는가?”

로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없이 역겹게도, 지금 발두르의 목소리에서 절망을 느낄 수 없었다. 흉악한 거인들과 괴물들에게 둘러싸인 와중에도 발두르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위대한 빛의 신답게 그 어떤 상황에도 희망이 넘쳐흐르는 것인가? 만물에게 사랑받는 발두르, 세상 만물이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사로잡히기는 했지만 왕으로서 외교수단을 발휘하면 결국엔 풀려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인가?

어느 쪽이건 로키는 참아줄 수 없었다.

로키가 발두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포로 따윈!”

분노 어린 외침과 함께 로키는 미스틸테인을 휘둘렀다.

신음소리.

그 마검은 발두르의 심장에 정확히 꽂혔다.

“필요 없어!”

발두르는 입에서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경련하듯 온몸을 떨면서.

그리하여 신들의 왕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만, 그저 허망하게.

지켜보고 있던 서리거인들은 당황해 외쳤다.

“우리 영토에서 아스가르드의 왕을 살해하다니, 무슨 짓이냐—?”

따지다 말고 서리거인들은 주눅들었다. 로키는 활활 타오르는 눈길, 그 증오 어린 눈길을 보내며 마주 고함질렀다.

“왜, 전쟁이 시작될까 두려우냐? 덩치만 큰 겁쟁이 새끼들! 아까 저 자식들 손에 너희 왕이 살해당했고, 발두르 이 새끼는 협정을 어기고 침입해온 불청객에 불과해! 그것만으로도 좆같은 평화협정은 이미 깨졌다! 아스가르드에 변명할 생각일랑 말고, 거기 진격할 생각이나 해라, 천치들아!”

*******

빛의 신이 죽었다.

한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태양이 구슬피 물러난 자리에 달과 별들이 나타나 예를 표했다.

짧게 드리워진 어둠속에서, 로키와 가시나무를 제외한 만물이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는 모두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

< 세계수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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