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수 - [1] >
괴물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알론소는 쉬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악착같이 찌르고 또 찔렀다. 용맹이 아닌 흥분과 생존본능이 그 팔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발두르여.’
애원하듯 기도하며, 늑대의 콧잔등에 창날을 쑤셔 넣었다. 늑대가 발악하며 내뿜은 입김이 알론소의 시야를 가렸다.
알론소는 비명지르며 뿌연 적에게 창을 더 깊숙이 쑤셔박았다. 그렇게 늑대 하나를 겨우 죽였다. 헤임달 신이 네 마리는 죽인 마당에.
다시금 알론소는 기시감을 느꼈다. 백 마리 늑대 괴물들과 싸울 때도 비슷했더랬다.
그때는 신들의 선물도 받지 않았건만 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나? 그 의문이 이제 와서 풀렸다.
그 앞을 지키고 선 제이슨과 그 소환물들 덕분이었다. 알론소는 그들에게 보호받으며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철없는 노인은 그때도, 지금도 보호받았다.
알론소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토해냈다. 요툰헤임에서 불어온 차가운 공기가 그 머리를 식혔다.
달아오른 흥분과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이제라도 좀 더 도움이 되도록, 맨 앞에서 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알론소가 한 발짝 내디딘 순간이었다.
‘노인.’
사방이 괴물 울부짖음으로 가득 찬 가운데 들려온 목소리.
알론소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고는 속삭였다.
‘발두르 신이십니까?’
빛의 신은 긍정했다.
‘그래.’
알론소는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위기에 빠졌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발할라의 전사들도요. 그리고 오딘께서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럴 테니, 우선 내 지시에 따라라.’
*******
사라지기 전에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내 연명하기. 모지는 이 짓거리가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신 생성은 쉬운 주문이 아니었다. 정신적인 소모가 지대했다. 더없이 머리가 무거웠다. 정신의 소모는 생겨난 분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겨우 여력을 짜내어, 롤랑과 몇몇 소환물에게 가속 주문을 걸어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지의 정신적 여유는 사라졌다.
모지는 침잠하는 정신 속에서 생각했다.
이걸로 끝인가? 주문 몇 번 걸어주고 사라지게 되나?
나름 도움은 되었을 테지만, 역시 이대로 끝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유예가 거의 없었다.
모지는 어지러운 가운데 전장을 살폈다.
이곳은 세계수 가지 위였다. 저편에는 요툰헤임이, 그 반대편에는 우트가르트 성채가 위치했다. 후퇴를 하려거든 왔던 길, 그러니까 우트가르트 성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당장 괴물들에게 포위당한 것은 벗어날 방법이 있었다. 모지에게는 주문이 있다. 편리하기 그지없는 순간이동 주문. 그것을 써서 일단 포위에서 벗어난 다음, 모두 함께 달린다면······.
가능할지 여부를 생각해보았다. 일단 포위에서 벗어난다면, 성채로 무작정 달린들 살아날 수 있을까?
힘들 터였다. 우트가르트 성채 안에는 왕이 죽어 분노한 거인들이 다시금 자리잡았을 것이며, 심지어 서리거인들이 저 뒤쪽에 있었다.
요툰헤임에서 온 서리거인들은 지금이야 그저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키가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난쟁이들이 자기네 성채로 달려간다면 분명히 쫓아올 것이다.
역시 무작정 도망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가망 없어보여도 어차피 지금 이대로도 답이 없지. 차라리 시도라도 해보는 게······’
그렇게 모지가 마지막 행동을 도주로 결정한 차였다.
모지가 입술을 달싹거리려던 차, 알론소가 말을 걸어왔다.
“모지 경, 부탁이 있습니다.”
모지는 힘겹게 그쪽에 시선을 돌렸다. 무슨 용건이냐 묻지는 않았다. 말 섞을 여력조차 없었다.
알론소가 우물우물 말했다.
“저를······ 저기 빛나는 구체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실 수······”
빛나는 구체? 그게 무엇인지 모지는 알지 못했다. 또한 거대한 괴물들이 가로막고 있어 당최 그 너머가 보이지도 않는 마당이었다.
모지는 겨우 물었다.
“구체가······ 뭔가.”
알론소가 설명했다.
“아서 왕께서 만들고자 하셨던······ 그겁니다······. 아까 두 분께서 계신 그곳에 있는데······ 발두르께서 제게 그것을 완성하라 명하셨습니다······”
말하는 본인으로서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일까. 알론소의 말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모지는 일순 무시할까 생각했지만, 발두르의 명이란 말이 신경 쓰였다. 흘려 넘기기는 곤란했다. 바로 납득할 수도 없었지마는.
모지로서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발두르가 도와주겠다던가? 그런데 이 난국에 발두르 혼자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등등. 그러나 말할 시간도, 고민할 시간도 아까웠다.
모지는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어쨌건 늙은이 하나 옮긴들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
모지는 말없이 알론소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순간이동의 주문을 외우던 차, 오딘이 고함질렀다.
“막아라, 롤랑!”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친 듯이 싸워대던 광전사의 시선이 모지와 알론소를 향했다.
광전사는 괴물과 싸우다 말고 다가와 모지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주문이 완성되었다. 모지와 알론소, 광전사는 저 너머 공간으로 순간이동 했다.
시야가 바뀌었다. 모지는 저편을 바라보았다.
알론소가 말한 대로 저기 빛나는 구체가 있었다.
거의 꺼져가는 빛의 통로. 그 아래에는 아서가 입고 있었던 갑옷이 떨어져 있었다.
모지는 그곳을 향해서 연달아 순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구체 앞에 알론소를 옮겨놓았다.
그러고는 할 일을 다 했다 여기는 차, 옆에서 광전사의 포효가 들려왔다.
광전사는 순식간에 이루어진 장면전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딘? 오디이이인!”
지금 오딘은 보호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 충실한 대전사가 그 옆에서 벗어나버린 것이다.
모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워낙 혼미한 와중이라 누군가 자기 몸을 건드렸는지, 만졌는지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모지가 뭐라 말하려는 가운데 광전사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뭘한, 거냐!”
광전사가 주먹을 후려갈겼다. 분노의 손길.
모지는 저 멀리 밀려나 바닥에서 널브러졌다. 세계수 가지 위였으므로, 거의 떨어질 뻔했다.
뭐 그런들 별 상관 없었을 것이다. 모지는 이게 마지막임을 알았다.
마지막 길, 동료의 얼굴이나 보기로 했다.
모지의 희미한 시야 너머로 광전사의 얼굴이 보였다. 분노에 찬 얼굴, 그러나 분노가 사라지고 당혹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째서?
광전사는 사라져가는 모지를 보고 당황했다.
“왜?”
모지의 몸이 희미해지다 못해 반쯤 투명해졌다. 이제 연명하려면 분신 주문을 써야겠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다.
어차피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모지는 순응하고, 눈을 감았다.
모지는 사라졌다.
사라져버린 동료를 보며 광전사가 비명 지르는 가운데, 알론소는 주문을 완성시켰다.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임하십시오, 빛의 신이시여!”
기도가 힘을 발휘했다. 알론소는 자기 몸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그 소용돌이가 눈앞에서 빛나던 빛의 통로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을 느꼈다.
빛의 소용돌이 그 자체가 된 느낌, 더없이 충만한 가운데 발두르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애썼다, 늙은 기사. 네 혼을 발키리가 거두리라······’
한편 모든 것을 주겠느니, 임하라느니 하는 말을 오딘도 듣고 있었다. 광전사의 눈과 귀를 통해서. 사실 그럴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오딘을 지키고 있던 제이슨과 그 소환물들, 그리고 아말릭은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아군 세 명이 동시에 빠져나가버려 공백이 생겨났으므로.
괴물들은 여전히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헤임달은 뿔피리를 다시 한 번 불었다. 괴물들이 멈춰섰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아말릭은 토르에게 계속 기도하면서도 무기를 휘두르느라 여념없었다. 제이슨과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필사적으로 숨 가삐 싸우는 와중이었지만 지금 오딘은 거기 신경 쓰지 않았다.
오딘이 보기에 지금 위기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위대한 대전사가 함께였다. 저까짓 괴물들이 앞을 가로막아도 결국에는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껏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권좌에 눈이 먼 빛의 신이 개입한다면, 결국에는 끝장일 것이다!
오딘은 고함으로써 명령을 내렸다.
“뭐하느냐, 막으라고 했지 않느냐! 롤랑!”
전쟁신의 명령에 광전사는 허겁지겁 반응했다. 광전사는 알론소의 양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알론소의 몸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그 몸은 이미 빛의 통로와 일체화 되어버렸기에.
광전사는 알론소의 얼굴에 대고 고함질렀다.
“하지 마, 하지 마라!”
물론 알론소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만둘 방법도 몰랐거니와, 더 이상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희미하게나마 무언가가 보이기는 보였다. 그래서 알론소는 그저 저 위대한 기사가 자신을 걱정해주려는 것이니 여겼다.
그래서 웃어보였다. 그것을 본 광전사는 더욱 처절하게 고함질렀다.
“하지 말란 말이다!”
오딘은 물론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하지 않았다. 저게 무슨 얼간이 짓인가? 명령이 정확하지 않은 탓인가?
그리 생각하고는 명령을 수정했다.
“베어라! 늙은이의 목을, 베어!”
오딘의 명령이 내려진 순간, 광전사는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광전사는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뒤랑달을 들어 올렸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칼끝이 동료인 늙은 기사를 향하고 있음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칼날 앞에서 알론소는 방금보다 훨씬 더 환하고 강렬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통로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오딘이 명령했다.
“베란 말이다!”
광전사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칼을 쥐었다.
방금 동료가, 고결한 마우그리스가 죽었다. 그런데 지금 신께서는 또 다른 동료마저 죽이라 명하고 계셨다.
충격이 취기를 몰아내듯, 약간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리고 오만가지 감성과 이성이 충돌했다.
결국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지만, 오딘의 말씀은 절대적이었다. 광전사는 이내 명령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더러운 일이라 여긴 탓일까. 이 일에 성검을 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롤랑은 성검 발뭉을 바닥에 꽂고는 뒤랑달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늙은 기사를 향해 칼을 가져갔다.
그리고 휘두르기 직전, 뒤에서 늑대가 울부짖었다.
뭔가 저지르려는 것을 감지한 괴물들이 이쪽에 덮쳐온 것이다.
적을 감지한 순간, 광전사의 반응은 신속했다. 바로 허리를 돌려 원심력을 담아 칼을 휘둘렀다. 그리하여 동료를 해치려던 늑대의 두개골을 베어버렸다.
뒤늦게 자기가 벌인 일을 알아차렸다. 롤랑은 서둘러 알론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이상 알론소는 없었다. 오직 소용돌이뿐이었다.
빛나는 소용돌이는 회전을 멈추고 완전해졌다.
롤랑은 죄책감에에 몸을 떨었다. 결국 위대한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
마침내 통로가 열렸다.
통로 안에서 한 짐승과 거기 올라탄 남자가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통로는 빠르게 수축하여 사라졌다.
로키는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다리가 여덟 개 달린 말이었다. 신마(神馬) 슬레이프니르, 그 위에 한 남자가 올라타 있었다.
남자는 팔을 뻗어 바닥에 꽂혀 있던 성검을 주워들었다. 그 순간 아서 왕이 들어 올렸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욱 환한 빛이 이 공간을 밝혔다.
빛의 신 발두르는 성검으로 로키를 가리키며 말했다.
“천상 왕의 어전이노라. 모두 싸움을 멈추고, 왕의 말을 들어라.”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싸움을 구경하던 서리거인들도, 분투하던 인간들과 오딘 그리고 괴물들의 시선도 모두 발두르에게 쏠렸다.
로키가 손을 들자 괴물들은 공격을 멈추었다. 그러나 혹여라도 인간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로키가 괴물들을 움직여 인간들의 후방을 지키게 했다.
그런 다음에야 로키가 말했다.
“네가 여긴 왜?”
발두르는 대답 대신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로키.”
“네가 날 동굴에 잡아가둔 이래 말이지?”
“그 원한으로 복수하려는 것인가.”
“웬 멍청한 질문인지 모르겠군. 내 그러지 않고 배기겠나?”
“그대는 그저 온당한 죗값을 치렀을 뿐이다.”
“미친놈. 다짜고짜 오딘을 납치한 장소를 불라면서 동굴에 묶어놓고는, 불 때까지 풀어주지 않겠다며 수백 년 내내 묶어둔 것이 온당한 죗값이야?”
“오딘을 가둔 게 정말 그대가 아니라 주장할 셈인가?”
로키는 잠시 고민하더니 중얼거렸다.
“사실, 내가 그런 게 맞아. 하지만 증거도 없이 그랬던 주제에 당당한 척 지랄하진 말게.”
“증거라면 있었지. 그대는 협잡꾼 로키 아닌가? 그대 말고 달리 누가 그런 짓을 하겠나.”
로키는 혀를 차더니 말했다.
“아, 아주 논리적인 증거로군. 그래서······ 행차하신 이유가 뭔가? 복수 당하러 와주신 건가, 발두르?”
“아니. 내 아버지를 구하러 왔다.”
< 세계수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