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수 가지 - [2] >
프레이가 제 후손들을 위해 전사들의 그림자를 내리던 날, 로키도 그 자리에 있었다. 거인 왕에게서 훔쳐온 환영의 가루를 준비하고서.
원래부터 환영의 가루는 지독한 물건이지만, 로키는 한결 더 지독하게 만들고 싶었다. 주문과 마약이 섞인 그 가루에 헬에서 떠돌던 영혼까지 섞어 넣은 것이다. 어디서 흘러왔는지 그 출신성분도 알 수 없는 정신병자의 영혼을.
그 영혼은 와우가 하고 싶다느니, 햄버거를 먹고 싶다느니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들을 지껄였는데, 하여튼 썩 건강한 영혼은 아니지 싶었다.
그 영혼을 가루에다 담아서 잘 섞었다. 그것을 강림한 발할라의 전사들에게 뿌렸다. 그들의 정신이 오염되도록. 환영임을 알아차릴 수도 없는 환영에 갇히도록. 로키의 추측대로라면 가루에 담긴 영혼과 전사들은 환영을 공유할 테니, 그들이 볼 환영은 정신병자의 환영이 될 터였다······.
그 시도는 성공했다. 생각 이상으로 성공했다. 위대한 발할라의 전사들께서 정신이 어찌나 오염됐는지, 일개 도적들한테 당하는 그 장면을 보고서 얼마나 웃었던가?
그래도 발할라의 전사들은 강력한 자들이었다. 어찌어찌 살아남고는 시키는 대로 세계수에 오르려는 것이 아닌가.
로키는 이미 충분히 재미를 보았으니 그만둘까 했지만, 문득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염된 마당에도 생각보다 잘 싸우는데, 그렇다면 달리 쓸 데가 있지 않을까?
문득 꼴 보기 싫은 거인을 떠올렸다. 예전에 자신을 농락한 데다 지금은 군사동맹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거인 왕. 그가 부리는 환영은 지독하여 신조차 당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미 환영에 갇힌 놈들은 어떨까? 환영에 갇힌 와중이라면 또 다른 환영에 걸리지는 않지 않을까?
시도해볼 가치가 있었다. 이후로 로키는 발할라의 전사들이 순조로이 세계수로 진격하기를 기원했다. 그놈의 거인 왕을 죽이도록.
*******
로키는 웃었다. 모든 의도가 이루어진 지금, 이제는 조롱이나 실컷 하면 되었으니.
용 위에서 느긋하게, 동료끼리 죽이는 살육전을 구경하고자 했다. 그러나 로키가 바라던 그 혼돈의 도가니는 벌어지지 않았다.
마법사 모지가 입술을 달싹였다.
모지의 사안이 빛난 순간, 그 눈에 마주친 사제 유저가 굳었다. 그에게 아서가 다가가 목을 졸랐다. 사제 유저는 게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한편 아스톨포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뿔피리를 빼들었다. 그리고 힘껏 불었다. 마법의 뿔피리. 듣는 이들을 도주하게 만들거나 그 몸을 굳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그 마법의 힘은 발할라의 전사들을 굳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불러낸 소환물들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으르렁거리며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던 소환물들이 멈춰섰다. 그 사이 롤랑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유저들 사이를 종횡무진 달리며, 가장 위험한 소환사들부터 그 목을 후려갈겼다.
소환사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했다. 그들이 불러냈던 소환물들은 그 힘을 잃고 사라져갔다······.
그것을 보며 로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네가 자기네 편을 무력화시키면서 전력을 깎아먹고 있기는 하다. 그래도 로키가 의도한 상황, 그러니까 동료가 동료를 죽이며 처절하게 울부짖는 장면은 아니었다.
용 위에서 로키는 자세를 바꿔 비스듬히 누운 채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된 것인가?
‘프레이를 분노하게 하고자 수작 부렸던 게 경계심을 키운 게로군. 자기네가 기아스에 걸려있단 걸 저번에 알게 됐으니까 나름 대비를 했나 본데.’
또 한 명의 발할라 전사가 쓰러져 혼절했다. 게거품을 물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이제 로키는 다 집어치우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잡생각은 집어치우고 자기 졸개들에게 돌격이나 명령하려던 차였다.
로키는 저기 있는 모지를 흘긋 보았다.
모지는 힘겨워보였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모지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롤랑······ 조금 후에는 나도 기절시키든가, 아니면 죽여······”
그제야 로키는 저 마법사가 룬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을, 그저 고강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을 뿐임을 알아챘다.
좋아, 한 놈 멀쩡했던 이유는 알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 놈은 왜 멀쩡한가?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로키는 흥미를 잃었고 저들이 뭘 하건 심드렁할 뿐이었다.
로키의 눈에 모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롤랑의 모습이 들어왔다. 롤랑은 모지와 달리 멀쩡해 보였다.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마는. 혹시 그 신인 오딘이 가호해주고 있는 것인가?
로키는 문득 롤랑의 뒤에 서있던 오딘과 눈을 마주쳤다. 수백 년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늙은이. 당장 제 힘으로 서있는 것도 힘겨운 모양새였지만 그 입술이 열렸다.
“원하던 대로 되지 않아 슬픈가, 로키?”
“뭐······ 그렇네. 이젠 다 빨리 끝내고 술이나 처마시고 싶은데.”
“달아나겠다는 거냐?”
“외눈마저 멀었나보군, 의형제. 상황 파악 안 되나? 거기 네 졸개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잖아.”
“전부는 아니지.”
“그리 될 거야, 곧. 나 이제 지겹거든······.”
로키는 다시금 계약서를 펼쳤다. 그리고 롤랑은 저 악신이 더 이상 무슨 수작을 부리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아서와 롤랑의 눈이 마주쳤다. 롤랑이 뭐라뭐라 지시하자, 아서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바로 한다!”
아서가 염동력을 발휘하여 롤랑의 몸을 공중에 띄웠다. 그러고는 저 멀리, 로키를 향해 내던졌다.
공중으로 날아오는 전사. 로키는 흠칫하여 용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롤랑은 용에게 명중했다. 충격에 비명지르던 용의 목에 롤랑이 칼을 꽂아 넣었다.
용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롤랑과 용이 함께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먼저 착지한 로키는 졸개들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로키가 손짓하자 화염 거인들과 괴물들은 떨어지던 롤랑을 덮치려 했다.
그렇게 롤랑이 괴물들에게 둘러싸이기 직전, 공중에서 롤랑의 몸을 발키리가 낚아채더니 로키를 향해 날아갔다.
“나머지도, 가!”
제이슨의 외침에 따라 그 소환물들이 진격했다. 흑기사가 방패를 들고 앞장선 가운데 푸른 야수가 달려 나갔다. 그리고 헤임달은 제이슨을 노려보았다.
“어디서 명령이냐, 분수도 모르고.”
그리 쏘아붙이더니 결국에는 헤임달도 달려 나갔다.
롤랑과 제이슨, 최초의 삼인방 중 둘이었다. 롤랑은 물론 제이슨까지 방금 그 기아스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은 모양새였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마침내 제이슨의 소환물들이 로키의 괴물들과 충돌했다. 그리 시작된 전투를 아서는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결국 저 삼인방이서 다 하는가?
아서는 저들끼리만 싸우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도 안 되거니와, 저 수를 상대로는 이기기도 힘들 것이다.
이쪽도 도와야 했다.
아서는 자기 동료들이 얼마나 남아있나 살펴보았다. 힘껏 뿔피리를 불던 아스톨포는 진작 기절시킨 뒤였다.
이제 남은 것은 모지와 란슬롯뿐이었다. 모지는 그 사안을 발휘하여 란슬롯이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두고 있었다.
이제 그마저 기절시키면 되겠지만, 아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서는 마비된 란슬롯의 어깨를 잡고 그 면전에 고함질렀다.
“란슬롯, 기억하지? 이런 상황에 처할 경우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광폭화, 해!”
광기에 몸을 맡기면 마법적인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기아스는커녕 일반적인 명령도 듣지 못하게 될 테니.
그러나 아서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란슬롯의 눈이 충혈 되지 않았다. 광기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아서는 란슬롯을 더 윽박지르려다 말고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광기의 주인을 향해 외쳤다.
“오딘이시여, 당신의 축복을 이자에게 베푸소서!”
오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을 들자 회색 빛이 허공에서 빛났다.
비로소 란슬롯의 눈이 까뒤집히고, 야수적인 광기가 그 머리를 잠식했다.
광전사 란슬롯이 적들에게 뛰쳐나갔다.
아서는 겨우 안도했다. 그러고는 광전사의 뒤를 따라나서려던 가운데, 오딘이 입을 열었다.
“내가 부탁을 들어줬으니 너도 내 부탁을 들어줘야 공정하지. 너는 여기 남도록.”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딘이여?”
“신들의 왕을 지켜야 할 것 아닌가. 거기 너, 가면 쓴 놈이랑······ 너, 망령든 늙은이도 일단은 여기 있어라.”
마지막 말은 알론소를 향한 것이었는데, 정작 알론소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알론소는 상황에 따라가지 못해 이리저리 눈만 굴리느라 바빴다. 당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왜 발할라의 전사들이 자기들끼리 싸운 것인지, 저기 저게 정말 그 악명 높은 로키인지. 게다가 저기 저 영감은 또 오딘이라고?
이 망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에서 알론소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보니 저기 한때 동료였던 영웅들이, 시골 기사 알론소의 우상이었던 광란의 아마디스가 싸우고 있었다.
이내 맘을 다잡고는 달려 나갔다.
*******
로키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발키리와 그 품에 안긴 롤랑을 보고서 뒷걸음질 쳤다.
화염의 거인들이 불타는 무기를 휘둘러 발키리를 덮치려던 차, 그 공격을 피해 발키리는 위로 솟구쳤다. 무거운 짐을 로키에게 집어던진 채.
“로키—!”
날아든 롤랑의 손에서 뒤랑달이 빛났다.
그에 맞서 로키는 자기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휘둘러 맞섰다.
두 검객의 충돌에서 튕겨나간 쪽은 롤랑이었다. 로키도 그 힘이 롤랑 못지않았고, 덩치가 더욱 커 무거웠으며, 그 발이 땅을 단단하게 디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떨어진 롤랑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로키에게 달려들고자 했지만, 그 등 뒤에서 거인들이 덮쳐왔다.
롤랑은 그들과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로키를 향해 똑바로 달려 나갈 뿐.
“대장부터 잡겠다 이거지?”
로키는 다시금 칼을 잡으며 그 돌격에 대비할 준비를 했다. 롤랑이 썩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썩 무섭지는 않았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로키는 협잡꾼이기 전에 썩 괜찮은 전사였다. 발할라의 전사들이 그러하듯, 오랜 세월 남아도는 시간 동안 검을 단련해온 검사. 로키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이내 롤랑이 달려들었을 때 로키는 그저 방어에만 집중했다. 빠르게 덮쳐온 뒤랑달을 칼몸으로 방어한 다음 힘껏 떨쳐내고자 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롤랑은 로키의 강격을 중간에 끊어버리고는, 연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로키의 방어가 뚫렸다. 눈을 크게 뜬 로키에게 다음 공격을 퍼부으려던 차였다.
롤랑은 공세를 그만두고 옆으로 뛰었다. 등 뒤에서 쫓아온 화염 거인이 방망이를 휘둘렀고 롤랑은 피해야 했기에.
롤랑이 이리저리 땅을 굴렀다. 그 모습을 로키는 찡그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쓸데없이 강했다. 그림자치고는 너무.
“거기 가만히 있어라, 로키!”
롤랑이 윽박지른 순간 로키는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롤랑이 덮쳐오지 않았다.
롤랑은 로키가 아니라 화염거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정면으로.
화염거인의 방망이에서 피어오르던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 불꽃이 롤랑의 앞에 벽처럼 가로막았지만, 롤랑은 신경 쓰지 않고 달려 나갔다.
불의 벽에 롤랑이 돌진했다.
이내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불꽃을 뚫고 드러난 롤랑은 칼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그리고 휘둘러진 뒤랑달에 화염거인은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다른 화염거인들이 달려오자 롤랑은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로키를 노려보았다.
로키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른 놈들은 어떤가, 흘긋 보았다.
“오디이인이이시이여어어어어어어—!”
광전사 란슬롯은 울부짖으며 아론다이트를 사방팔방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괴물들 모두를 동시에 상대하듯이. 그 명검이 빛날 때마다 괴물들은 비명 질렀다.
그 옆에서는 헤임달과 웬 흑기사가 어깨를 맞대고 광전사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전투, 전투다운 전투였다. 수적 열세 탓에 저쪽이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건 그럭저럭 그림이 되는 전투.
‘저놈들한테 비장한 장면을 내주려던 게 아닌데.’
로키는 한숨 쉬려다 말고 다시금 칼을 쥐었다. 롤랑이 달려오고 있었다. 화염거인 하나를 또 해치우더니 다시 이쪽을 노리려는 것이다.
‘저 광견부터 치우고 봐야지.’
이내 롤랑이 덮쳐온 순간 로키는 허리를 푹 숙여 검을 피했다. 롤랑의 검은 채찍처럼 표적을 쫓았고 로키는 굴러서 피해야했다.
그러느라 고개 숙였던 로키가 얼굴을 들어올렸다. 롤랑은 그 얼굴을 바로 앞에서 보게 되었다.
강맹한 일격으로 로키의 목을 베려다 말고, 롤랑은 몸이 굳었다.
“주여?”
로키의 몸에 오딘의 얼굴이 달려있었다.
로키가 변신술의 대가라는 것, 그리고 저것도 변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롤랑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오딘의 대전사, 롤랑은 그럴 수 없었다.
오딘이 당신의 목소리로 명하셨기에.
“멈춰라, 대전사!”
세차게 휘두른 검을 멈추느라 그 몸이 잠시 굳었다. 짧은 틈이었지만, 검객들간의 대결에서는 충분히 치명적인 빈틈이었다. 상대가 수천 년 묵은 아스가르드의 신이라면 특히.
오딘의 얼굴을 한 로키가 칼을 찔러 넣었다.
롤랑의 몸은 단단하고, 염동력까지 두르고 있었지만 그 칼은 막을 수 없었다. 로키가 신을 죽이고자 준비한 마검 미스틸테인은 축복받은 피부를 뚫고 롤랑의 목을 관통했다.
< 세계수 가지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