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수 가지 - [1] >
로키. 그 이름 하나에 거의 모두가 뻣뻣하게 굳었다. 누구나 이름을 아는 트릭스터가 저기 있는 것이다.
심지어 로키는 혼자도 아니었다. 졸개들, 강력한 졸개들을 거느렸다. 무스펠헤임의 화염거인만 열둘이요, 용인지 엄청나게 큰뱀인지 모를 괴물들이 그 옆을 따랐다. 진정한 용 한 마리는 피막 덮인 날개를 퍼덕이며 로키를 그 등에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망자들. 갑주를 차려입고 무기를 든 혼령들이 로키를 따랐다. 아마 저승의 여왕 헬이 저들에게 자기 아비를 호위하도록 명했을 것이다.
저들이 언제 덮쳐올지 모른다. 롤랑은 오딘을 목매달던 끈을 풀려다가 포기했다.
이내 나뭇가지만 잘라내어, 마침내 상반신과 하반신이 결합된 오딘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뒤랑달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새로이 나타난 적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만만치 않은 적들이지만 어쨌건 감당하지 못할 적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길했다. 한기마저 느껴질 만큼.
“네가 왜 여기에?”
헤임달의 말에 로키는 그쪽을 흘긋 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오, 신들의 문지기 헤임달. 여기 있어도 되나? 협정 위반 아닌가, 이거?”
“여기 있는 건 내 본신이 아니라 그 그림자에 불과하다.”
“아, 그러신가? 그렇다면 내 굳이 옛정에 연연하지 말고 죽여주겠네. 그리고 내가 왜 여기 있느냐? 그야 외교 목적 아니겠나? 난 지금 사절이라네.”
“사절이라니, 쫓겨난 죄인 주제에 무슨? 늑대와 괴물들의 나라라도 세웠느냐, 늑대의 아비야?”
“걔네들 말고, 무스펠헤임의 사절일세. 무스펠헤임은 요툰헤임과 군사동맹을 추진 중이거든. 솔직히 지금까지는 잘 안 됐어. 나랑 이름 같은 그 영감, 어찌나 이기적이던지······ 글쎄 방어를 함께하는 동맹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지만 공격도 함께해야 하는 동맹이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우기지 뭔가? 아스가르드와 전쟁하고 싶지 않다는 게지. 하여튼 겁 먹어가지고는······ 심약한 마술쟁이는 이래서 윗대가리로 두면 안 돼.”
투덜거리면서도 로키는 거인 왕의 심정을 이해했다.
옛날 우트가르트의 거인 왕은 로키와 토르와 그 종자를 환영으로 농락했다. 그리 실컷 골려먹고서 거인 왕이 내보인 표정은 승리자로서의 의기양양함이 아니었다.
핏기 가신 얼굴. 정색한 표정으로 우트가르달로키는 세 명을 배웅했다. 자기 환영에 속아 토르가 벌인 짓을 두 눈으로 보았기에.
거인 왕이 토르와 벌인 첫 번째 내기 시합은 술잔 비우기였다. 우트가르달로키는 술잔 속과 이어진 바다를 비우도록 요구했다. 토르는 애써 들이켰지만 역시 바다를 비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날, 해수면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두 번째로 토르와 벌인 시합은 씨름이었다. 거인 왕은 노파의 모습을 한 ‘세월’을 씨름 상대로 내놓았다. 당연히도 토르는 이겨내지 못했다. 어느 장부든 세월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니.
그러나 토르는 세월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텼으며, 끝내 한쪽 무릎만을 꿇었다.
마지막 시합은 고양이 한 마리 들어올리기였다. 우트가르달로키는 고양이처럼 보이게 만든 요르문간드를 들어 올리도록 요구했는데, 토르는 결국 예의 고양이를 충분히 들어 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잠시나마 들어올리기는 했다. 그 어느 산맥보다도 거대한 바다뱀이 처음으로 부양을 느낀 순간이었으리라.
요툰헤임의 거인들 모두가 힘을 합쳐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것을 토르 혼자서 해냈다.
그날 이후 우트가르달로키는 아스가르드와 대적할 생각을 버렸다. 본래 요툰헤임 중심에 있던 우트가르트 성채를 최전방으로 옮겨 수호기지로 삼고는, 아스가르드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죽더라도 그 조약을 깰 생각이 없을 터였다······.
로키가 물었다.
“내 여기 숨어서 엿들었는데 충격적인 대화가 들려오더군. 글쎄 거인들이 말을 주고받길, 자기네가 버려두고 온 왕이 사로잡힌 채 죽을까봐 걱정된다는 거야. 그런데 여기 자네들이 직접 온 걸 보니 협상은 결렬된 모양이지? 서리거인들의 왕은 죽은 모양이고, 맞나?”
그 말에 헤임달이 고함질렀다.
“그렇다면? 복수라도 해주겠다 이거냐?”
로키는 헤임달의 말을 흘려 넘겼다. 분신의 말 따위, 새겨들을 가치가 없었다······.
“좀 닥치고, 애도 좀 하지. 방금 욕한 건 다 진심이 아니었음을 밝히겠네! 위대한 서리거인 왕이 죽었다니? 내 사절로서 외교적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애도할 수밖에 없군.”
그리 말하면서 로키는 훌쩍거렸다. 지금까지는 그 겁쟁이 왕이 짜증나서 미칠 노릇이었지만, 죽어버린 이제는 기꺼이 애도해줄 만한 것이다.
평화주의자 왕이 죽은 지금 그 전사들은 분노했을 테니.
모든 일이 기대한 이상으로 이루어졌다. 로키는 흘러내린 적 없는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위대한 거인 왕을 해친 잔악한 자는 대체 누군가?”
롤랑이 앞으로 나섰다.
“나다, 로키. 그대가 데려온 군세로 덤비려들거든, 그대 또한 같은 이름을 가졌던 거인과 같은 운명을 맞으리라.”
“아, 롤랑 자네가 그 분을 죽였다고? 참으로 슬픈 일이야, 슬픈 일······.”
로키는 롤랑을 바라보며 사랑을 고백하고픈 충동을 애써 참았다.
원래 로키가 발할라의 그림자들에게 기대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군사동맹에 도움이 안 되는 평화주의자 왕 살해하기.
혹시 성탑에 침입하기 힘들까봐서 변신해 도울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런 도움 없이 해내줄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까지 로키가 몸소 기울여온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지금까지 쭉 그 분을 내심 존경해왔더랬지. 내 옛날에 토르랑 같이 다닐 때 그 분한테 제대로 골탕 먹었거든? 나도 누구 골탕 먹이기는 자신이 있던 놈인지라, 나보다 우월한 분을 보고서 동경할 수밖에 없었던 게야.
그리고 동경 하는 분이 살해당했다면 복수하는 게 도리 아니겠나? 암, 그게 도리고 말고. 이 로키가 다른 건 몰라도 의리 하나는 끝내주지. 아스가르드의 상것들과 달리······.”
로키의 말은 나긋나긋했으나 그 의미는 날카로웠다.
공격해오겠다는 암시. 이미 긴장하고 있던 유저들은 더욱 더 긴장했다. 불안하게들 전투에 대비하던 와중이었다.
“너 또한 한때 아스가르드의 일원이었으면서 어찌 그따위로 지껄이느냐, 로키?”
쉰 목소리. 로키는 목소리의 주인을 보며 웃었다.
“아, 오딘. 내 의형제, 기침하셨나?”
저기에 오딘이 일어나 있었다.
오딘은 툭 튀어나온 안구로 로키를 노려보는 한편, 자기 목을 맨 매듭을 풀어내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 그 모습을 로키가 비웃었다.
“잘 안 풀릴걸? 그 줄, 글레이프니르거든. 기억하지, 오딘? 네가 내 늑대 아들내미 묶을 때 쓴 그 줄이란 말씀이야.”
그 말에 오딘은 매듭을 풀려던 시도를 그만두었다. 난쟁이가 아니고서야, 어쩌면 난쟁이도 풀 수 없는 마법의 끈임을 알고 있었다.
오딘은 쏘아붙였다.
“좋은 물건을 썼다마는 기어이 풀려난 걸 보니 어떠냐, 로키? 옛 의형제로서 환영이라도 해주겠느냐?”
“아니. 그대의 좆같이 비틀어진 면상 보니까 역겨워 죽겠는데.”
“그럼 꺼져라. 보잘것없는 배신자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 롤랑, 내 대전사······.”
적들이 저기 있는 마당이지만 롤랑은 오딘에게 무릎 꿇었다. 주신께서 이름을 불러주셨건만 어찌 다른 데 신경 쓸 것인가?
눈물마저 흘리기 시작한 자신의 대전사를 바라보며 오딘은 말했다.
“기어이 여기 당도했구나. 기어이 당도했어. 내 묶여있는 동안 지극한 찬사의 시구를 여럿 생각해보았다만, 그건 나중에 몸소 자리를 마련하여 읊겠다. 일단은 아스가르드로 귀환하는 게 먼저다. 이해하겠지, 나의 대전사?”
“물론입니다, 나의 주.”
로키가 중얼거렸다.
“누가 돌아가게 내버려둔대?”
오딘은 로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말을 계속했다.
“저기 내 옛 의형제가 우리 귀환을 방해하려는 모양이다. 놈이 졸개를 좀 데려왔다마는, 해치울 수 있겠지? 롤랑······.”
롤랑은 고개 숙인 채 긍정했다.
“물론입니다. 여기 제 동료들까지 있지 않습니까? 한낱 괴물들은 저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롤랑은 유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딘이 돌아가서 보상해줄 때 저들에게도 몫이 돌아가길 바라며.
한편 유저들, 그러니까 발할라의 그림자들은 엉거주춤 서있었다. 그런 그들을 로키는 짐짓 노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것들이 아닐 수 없었다. 공들인 보람이 있는 것들.
하지만 그들의 임무는 이미 달성되었다. 그 임무를 달성케 한 유용함이 이쪽에 칼날을 겨누기 전에, 어서 치우기로 했다.
로키가 중얼거렸다.
“자, 의로운 왕의 복수를 하자꾸나······.”
거인들이, 괴물들이, 혼령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에 맞서 롤랑을 위시한 발할라의 전사들도 대적할 준비를 했다.
로키는 생각했다. 이 괴물 무리와 저 영웅 무리,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이쪽 졸개들도 꽤 강력했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로키는 저 그림자들이 상당히 세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나 강력한지 우트가르트의 마술사 왕도 살해하지 않았는가.
로키는 발할라의 그림자들에게 중얼거렸다. 애절하고 비장하게, 연극조임을 굳이 숨기지 않은 채.
“발할라의 전사들이 간악한 신들의 술수에 말려들어 악한 길을 걷고 있구나. 명예로운 전사들이 왕의 살해자를 편들다니, 이 어찌 통탄한 일이 아닐꼬? 나 로키는 그대들의 의로움을 아는바 죄 씻을 기회를 주리라. 옳은 편을 선택할 기회를!”
로키가 품에서 웬 양피지를 빼들었다. 룬이 가득 새겨진 양피지, 마치 계약서 같았다.
“자, 전사들이여! 내 그대들의 전향을 받아 주리라! 위대한 프레이의 이름으로, 여기에 이름 새겨진 모두 내 뜻을 받들라!”
로키가 그리 외친 순간, 양피지에 새겨진 룬이 빛났다. 꽤 거리가 있었지만 모지는 그 룬을 알아보고는 비명 질렀다.
“기아스? 어떻게?”
로키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마치 자랑하듯이 떠벌렸다.
“프레이가 소환 계약서에 새겨준 룬문자를 보고서, 오스논? 오수른? 아무튼 그 늙은이는 겁에 질렸지. 자기가 받은 영웅들이 진짜가 아니란 걸 들킬 증거를 남기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그래서 어처구니없게도 계약서를 바로 불태우려 하더라고?”
로키가 말하는 도중에도 양피지의 룬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로키에게 창칼을 겨누었던 발할라의 전사들은, 뻣뻣한 동작으로 무기 끝을 다른 방향에 돌리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서.
로키가 계속 말했다.
“병신. 그 유용한 걸 왜 태워? 아까우니까 내가 홀랑 집어삼켰지! 어떻게 그랬느냔 멍청한 질문이랑 하지 말게! 나 불의 신이라네. 모든 불꽃이 나는 아니지만, 그 불꽃은 나였어.”
그리 말하면서 로키는 손에 든 계약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혹시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은 일절 없었다. 비밀을 자랑스레 밝히는 짓거리도 지금은 썩 미련한 짓이 못 되었다.
아무도 로키에게 신경 쓸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롤랑은 오딘을 감싼 채 눈을 부릅떴다. 크게 뜬 그 눈에 소환사 유저 뒤프가, 사제 유저 튀르팽이, 광전사 유저 랑슬로가 서로 혹은 롤랑을 향해 무기 겨눈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적에게 조종되는 동료들, 뻔한 상황 아닌가.
로키는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만족스레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장 위험한 적들, 그러니까 롤랑 그리고 롤랑과 함께 다니던 둘은 기아스에 속박된 모양새가 아니었다. 제이슨은 긴장했지만 멀쩡했고, 모지 또한 굳은 얼굴로나마 롤랑과 등을 맞대고 있었다.
그리고 카를의 그림자도. 어째서인지 카를 역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롤랑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어째서일까? 로키는 느긋하게 생각해보았다.
‘프레이의 가호인가? 계약서로도 그 몸을 무조건 속박하지 못하게 조치한 안전장치? 하지만 내가 카를한테 프레이의 피붙이를 죽이게 만들었으니 프레이가 열 받았을 텐데? 그 가호를 진작 벗긴 줄 알았는데······ 직접 가담하지 않은 셋만은 가호를 거두지 않았나? 그럼 실행범인 카를 저놈은 왜?’
바로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뭐 상관없었다.
로키는 신성한 계약에 의거하여 명했다.
“명예로운 발할라의 전사들이여! 서로 죽이거나, 죽어라!”
< 세계수 가지 -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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