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트가르트 - [4] >
적군의 사이에 서서 우트가르달로키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을 바라보았다.
집채보다 큰 늑대들. 자기네를 한 입에 집어삼킬 괴물들 앞에서 도망치지 않은 병사들은 칭찬해줄 만하다.
그러나 그 용기 있는 자들 사이에 오줌을 지리는 자들이 속출했다. 달의 살해자 펜리르가 울부짖었기에.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디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인!’
달을 찢는 포효였다. 일부 병사들은 귀가 울리다 못해 심장이 멎어 사망했다. 누군가는 주저앉았으며, 누군가는 맞서겠다던 각오 위에 공포가 덧씌워져 뒤늦게나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도주는 치명적이었다. 도망자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망자든 반항자든 모두 물어뜯고야 말겠다는 듯, 늑대들은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웃고들 있었다.
병사들이 든 창은 벌벌 떨렸다. 지린내가 흥건했다.
우트가르달로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은 먹혀들었다. 주문과 마약가루를 통해서.
눈처럼 내리고 있는 가루들을 흘긋 바라보았다. 사실 저 가루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잘게 흩뿌려도 효과가 있다. 그래서 환영을 부릴 때는 들키지 않게, 가루를 숨겨 뿌리곤 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군대를 상대로 세심하게 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눈에 뻔히 보일 만큼 잔뜩 가루를 뿌렸지만 그다지 많은 적군을 환영에 가두지는 못했다. 적들이 이쪽 술수를 발견하고 대응하는 시간이 너무 빨랐다.
그보다 당황스러운 사실이 하나 더.
우트가르달로키는 저기 서있는 세 남자와 신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세 남자는 환영에서 벗어났거나 처음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멀쩡했다.
‘어떻게? 이 환영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인데. 괜히 가루까지 뿌리는 게 아니야······.’
혹시 너무 많은 이들을 상대로 효력을 발휘하게 하느라 주문의 힘이 약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저 신으로 보이는 남자는 뭔가? 저 신은 언뜻 보니 환영에 걸려도 제대로 걸린 것 같은데.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옛날 우트가르달로키는 그 누구보다 위대했던 신을 환영으로 골탕 먹인 적이 있다. 신들조차 이 재주에는 한 수 접어줘야 했다······.
“진정하십시오. 펜리르와 늑대들? 다 가짜입니다. 환영이지요. 그 환영을 물리치는 데 이 샘물이 도움 될 것입니다. 부디 마셔 주시기를······”
모지의 말에 헤임달은 벌컥 성냈다.
“환영? 너희는 안 걸리지만 신은 걸리는 환영 말인가? 말 같잖은 수작을······ 샘물? 그건 또 뭐냐? 안에 대체 뭘 넣었기에 마시란 거지?”
“지혜의 샘물입니다.”
“오딘께서도 눈알 하나 내주고서야 겨우 구한 샘물 말인가? 멋지군. 보아하니 너희는 애꾸가 아닌 것 같은데, 주신보다 협상 재주가 좋았노라 주장할 셈인가 보지?”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독이라 이거냐? 아니, 됐다. 이 끔찍한 것들, 대체 뭔 생각이냐? 이렇게 대놓고 배신하다니.”
“결코 아닙······”
“나를 사로잡는 대가로 로키가 무얼 약속하더냐? 암말로 변해 하룻밤 자주겠다고 제안하더냐? 프레이가 대체 복제를 어찌 했기에 이런 긍지도 없는 배신자들이······”
말하다 말고 헤임달은 눈살을 찌푸렸다. 울분과 증오에 가득 찬 펜리르의 포효가 들려왔기에.
잠깐 그쪽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헤임달의 앞에 웬 큰난쟁이 하나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신이시여, 노여움을 거두소서. 이 분들의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샘물의 효능은 진짜이며, 저기 저 늑대들은 분명히 가짜입니다······”
저리 나불대는 것은 가면을 쓴 큰난쟁이였다. 가면이 가리지 못한 입가는 나병이라도 앓은 듯 얽어 보기 흉했다.
헤임달은 말없이 칼을 뽑아들었다. 종말의 늑대가 다가오는 마당이지만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가뜩이나 헤임달은 울분이 쌓이고 또 쌓였다. 아스가르드에서 자신을 한낱 문지기처럼 이곳에 파견 보낸 것부터 자존심이 박살난 차였는데, 이제는 이런 버러지마저 수작질이라니?
헤임달이 칼을 내리치자 섬광이 번뜩였다. 난쟁이들이 신들을 위해 벼려낸 룬검의 빛, 그 신벌의 일격은 웬 방패 앞에 가로막혔다.
방패 아래 있는 것은 웬 흑기사였다.
제이슨은 자기 소환물을 제때 움직였음에 안도했다. 하마터면 아말릭이 죽을 뻔했다······.
헤임달은 으르렁거렸다.
“감히.”
마저 이 무엄한 놈을 벌하려다 말고 저쪽을 바라보았다. 말발굽 소리. 이쪽으로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뭐냐? 뭔 일이냐, 너희?”
헤임달은 그리 외치는 기사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카를, 정확히는 카를의 복제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내 달려온 가짜 카를과 아홉 명은 헤임달을 둘러쌌다. 카를의 복제는 제이슨을 바라보며 외쳤다.
“도우러 왔다. 거인을 상대하기는 처음이지만 방해는 안 될 거다!”
거인? 나? 헤임달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펜리르와 그 무리는 달리다 말고 천천히 접근해오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지면 다시 돌격해올 것이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저 카를의 복제와 그 무리는 태연했다. 헤임달이 보기에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한 편이라 이거지.’
어떻게 해야 이 배신자들을 싹 다 찢어죽일 수 있을까 고심하던 차, 모지가 입을 열었다.
“입 다물라, 아서.”
아서라 불린 카를의 복제가 입을 열었다.
“왜, 이 거인은 적이 아닌가?”
다시금 모욕 받았다는 사실에 헤임달은 각오를 다졌다. 종말의 늑대가 오건 말건 이 버러지들부터 찢어죽일 각오를. 분통이 터진다면 살피거나 주저하지 말아야 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그리 배우고 자랐다······.
헤임달은 카를의 복제를 향해 말했다.
“아서? 원본의 이름은 버렸나 보지? 영웅의 이름을 더럽히기 싫었나? 그나마 양심이 있구나, 그림자야. 치하의 의미로 내 손수 찢어주리라.”
모지가 외쳤다.
“오해입니다. 제발, 헤임달 신이시여······.”
“왜, 또 환영 타령할 셈인가? 보아하니 그놈의 환영에 너와 네 동지들은 하나도 걸리지 않았나 보군. 신마저 속일 만큼 강력한 환영이 너희만은 속이지 못한 게로군. 어떻게? 너희가 신들보다 위대해서인가? 그렇다면 어디, 증명해 봐라!”
헤임달이 다시금 칼을 치켜든 순간 모지가 눈을 번뜩였다. 마비의 사안.
그러나 헤임달은 그 같잖은 수작을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이내 그 목을 치려던 차, 흑기사와 카를의 복제가 그 앞을 동시에 가로막았다.
칼을 내리쳤다. 콰득 하고, 흑기사의 방패가 우그러졌다. 헤임달이 그 위로 맹공을 퍼부으려던 차, 그 머리에 불덩이가 날아왔다. 웬 큰난쟁이가 주문을 갈긴 것이다.
귓가가 달아올랐다. 헤임달은 노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간악한 배신자들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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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포효하며 찍어오는 도끼에 맞서 롤랑은 뒤랑달을 휘저었다.
뒤랑달의 칼날은 덮쳐오던 도끼 자루를 갈라버리고 거인의 가슴팍마저 베어버렸다. 그러나 기뻐할 틈이 없었다. 지금 죽인 거인의 옆에도 거인이, 그 옆에는 거인들이 서있었다.
빽빽이 어깨를 맞댄 거인들은 입구를 틀어막고는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롤랑이 하나를 쓰러뜨리면 둘이, 둘을 쓰러뜨리면 셋이 와서 그 자리를 채웠다.
이내 거인들의 우악스러운 반격이 덮쳐왔다. 사방에서 수많은 무기들이 롤랑 하나를 노렸다. 롤랑은 거인 한둘의 느려빠진 공격은 웃으면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열 명을 상대로는 그럴 수 없었다.
한 거인의 칼날이 롤랑의 배를 노리고 덮쳐왔다. 롤랑은 그 공격을 만족스럽게 피하지 못했다. 양 옆에서 덮쳐오는 창과 철퇴를 쳐내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결국 칼날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야 롤랑은 겨우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결국 칼날은 롤랑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뒤랑달의 가호는 가뜩이나 단단한 롤랑의 피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역시 끔찍하게 아픈 가운데 피가 흘러내렸다.
“이대로 두들—겨!”
외치던 거인을 찔러 비명 지르게 만든 뒤, 롤랑은 또 다시 덮쳐오는 무기들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살짝 거리를 벌린 가운데 롤랑은 거인들을 노려보았다.
뒤에는 아군 병력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병력이 수의 이점을 살리려면 적어도 입구는 뚫어내야 했다. 그래서 먼저 달려가 길을 마련해두고 싶었는데,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광폭화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운명을 신에게 맡겨버리면 편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럴 수는 없었다. 롤랑은 신을 구해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어야 했다······.
*******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는 늑대들, 그 거대한 발이 닿을 때마다 돌무더기가 흩날리고 소음이 울려왔다.
저 실제같은 환영을 우트가르달로키는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저 환영 앞에서는 누구라도 속지 않을 수 없었다. 환영의 소재는 꿈이었으니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 비논리적이어서 가끔 꿈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곤 하는 예사 꿈이 아닌, 여럿의 머릿속 기억을 한 데 묶어 만들어진 완성도 높은 꿈이었다.
강력한 정신력과 진실을 꿰뚫어볼 마법의 눈은 꿈 앞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환영은 신들조차 농락할 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저것들은 대체 어떻게?’
우트가르달 로키는 웬 신과 싸우기 시작한 큰난쟁이들을 심란하게 바라보았다. 환영에 걸리지 않은 큰난쟁이들.
그리고 저 신은 저기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스가르드에서 보낸 문지기인가 본데, 저놈이 혹시 다친다고 평화협정이 깨지지는 않겠지?
여러모로 걱정스러웠지만 오래 지켜볼 수는 없었다. 얼른 돌아가서 지휘라도 해야 했다.
우트가르달로키는 주문을 연달아 외워 이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그리 성벽 안에 들어선 순간, 일 대 다수의 난투가 눈에 들어왔다.
“계속 패라, 계속 패!”
필사적으로 거인들이 힘을 합치는 가운데, 롤랑이 그 모두를 상대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 조그만 몸에서 거인보다 강력한 힘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거인들은 반격다운 반격을 하지 못했다.
롤랑의 칼이 번뜩이면 거인들은 무기와 함께 베어 넘겨지는 판이었다. 그리 학살당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선바, 몇몇 거인이 롤랑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내긴 했지마는.
우트가르달로키는 이 상황에 어찌해야 하나 생각했다.
저대로 내버려둬도 쓰러뜨릴 수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 클 것 같을뿐더러 저 하나와 싸우는 동안 거인들의 방어선은 뒤로 꽤 밀려나버렸다. 이대로 인간 군대가 들어오면 위험할지 모른다.
우트가르달로키는 손수 힘을 쓰기로 했다.
손에 쥔 가루에 조용히 주문을 외워 환영의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투명한 모습으로 롤랑의 뒤에 다가갔다.
원래는 안전하게, 조금 멀리서 환영을 걸 생각이었지만 혹시 실패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아까 웬 큰난쟁이들은 환영에 걸리지 않았지 않은가.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일을 더 확실히 처리하기로 했다.
롤랑의 뒤에 다가간 로키는 우선 가루를 뿌렸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분명 넉넉히 뿌렸지만 롤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싸움을 계속했다. 환영에 걸렸다면 저기 저 펜리르의 포효가 들릴 터요, 총사령관으로서 달려오던 군을 물려 늑대 군대에게 맞서야겠다고 생각할 텐데······.
어쩔 수 없었다. 위험하지만 칼을 쓰는 수밖에.
우트가르달로키는 작게 주문을 외워 비수에 룬을 빛나게 했다. 화염의 룬, 강력했다. 다름 아닌 불의 신 로키가 새겨준 것이었다. 이 비수라면 갑옷을 녹이고 그 안의 살을 태워버릴 수 있을 터였다······,
우트가르달로키는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멈춰섰다가, 롤랑이 잠시 멈춰선 그 순간에 비수를 찔러 넣었다.
그 등을 제대로 찔렀다.
갑옷을 녹이기는 성공했다. 그러나 더 깊이 찌르지는 못했다. 웬 무형의 힘까지 뚫어내기는 했지만 정작 피부를 뚫지 못하고 막혔다.
낭패, 우트가르달로키는 기겁했다. 갑자기 롤랑이 허리를 휙 돌려서는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롤랑이 느끼기로, 웬 작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닿은 것 같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던가?
“로키?”
롤랑이 중얼거렸고 우트가르달로키는 달아나고자 했다.
얼른 입술을 달싹였다. 단거리 순간이동, 그 몸이 점멸하기 직전 롤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잡고자 했다.
뻗은 손이 우트가르달로키의 하반신에 닿은 그 순간, 둘은 순간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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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트가르트 - [4]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