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48화 (148/164)

< 우트가르트 - [2] >

롤랑은 우트가르달로키를 노려보았다. 저 거인이 무슨 명분을 말한들 새겨들을 생각은 없었다. 설령 도끼와 창검이 세상을 휩쓸지라도 오딘은 구해야 하므로.

하지만 듣고 있는 귀가 너무 많아 입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롤랑은 어떻게든 말을 쥐어짜냈다.

“납치 따위나 벌인 간악한 족속이 우릴 위해주는 척하는구나! 들을 가치도 없다만 굳이 입을 열자면, 오딘께서 설령 유배당한 원한을 갚으려 하신들 무엇이 문제더냐? 그게 어찌 개인적인 원한이더냐? 오딘께서는 미드가르드 만물의 아버지요 그 분의 원한이 모두의 원한이거늘!”

“그래서······ 기어이 그놈의 아버지를 구출해내겠다 이건가?”

“그러지 않고 어찌 배길쏘냐?”

우트가르달로키는 허 하고 웃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효자가 있군그래. 아니, 충견인가? 그도 아니면 광견? 하기야 롤랑 그대는 광전사로 유명하던가? 오딘의 개, 한시라도 빨리 주인 앞에서 꼬리 흔들고 싶어 미칠 지경이야? 좋아, 그대와 더 말 섞은들 내 입만 아플 뿐임은 잘 알겠다. 하지만 들으라, 인간들이여—.

신들이 신탁을 내려 그대들을 여기로 인도했는가? 세계수를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발할라에 가 닿으리라고?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그런데 정말 그걸 원하나? 발할라는 전사들이 끝없도록 투쟁하는 땅이다.  거기서 영원히 죽고 죽이고 싶어? 그토록 전쟁이 좋은가—? 아닌 것 같은데. 내 보기에 그대들은 지치고 두려움에 가득 찼다. 가엾은 화살받이들, 발할라에서라면 더 나은 대접을 받을 것 같은가?”

병사들의 사기라도 꺾으려는 것인가? 롤랑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 저 주둥이를 다물게 하고 싶었지만 창을 던질 수는 없었다. 대화 중에 그랬다가는 기사도에 어긋날뿐더러 더없이 치졸해보일 테니까.

“······돌아가라, 작은 것들. 고향에 돌아가. 고생만 하다가 개죽음 하지 말고 어서—. 발할라 따위는 꿈꾸지 말고. 죽어서라도 편해야 할 것 아닌가?”

우트가르달로키가 읊조렸고 롤랑이 쏘아붙였다.

“헬로 꺼지라 이거로군? 숫제 욕을 하는데, 알고서 모르는 척 그러는 건가 아니면 우둔해서 모르고 그러는 건가?”

“아, 내 이런 무례를. 사죄의 의미로 헛소리는 그만두지. 마지막으로 지껄이겠다. 거인의 왕이 그대들에게 연민을 보낸다. 불쌍한 것들. 이 먼 타지까지 찾아와 죽게 되다니—.”

“그게 안타깝다면 나는 너희에게 질투라도 보내야겠군. 제 고향에서 죽을 수 있다니 얼마나 즐거울 일인가? 내 이 칼을 휘둘러 너희 모두에게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리라. 지금껏 그대 졸개들에게 베푼 바와 같이.”

우트가르달로키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와 함께 성벽 위 깃발이 내려감으로써 대화는 끝났다.

롤랑은 수만 명의 시선을 받으며 묵묵히 걸어 돌아왔다. 그 모습을 두 유저가 지켜보고 있었다. 아서와 제이슨.

“믿을 수가 없군. 정말 옛 영웅 그대로의 모습인데. 누가 저걸 현대인 대학생이라 믿겠나? 내 친구지만 대단해, 정말······.”

아서가 중얼거렸고 제이슨이 히죽거렸다.

“저 새끼 사실 현대인 아닐 가능성이야 나도 자주 생각해. 미친 새끼, 모지는 인격 교체라도 당했지 저놈은 그런 것도 없었는데 왜 저렇게 변해버린 거야?”

아서는 얼굴을 굳히며 말을 받았다.

“모지는 뭐······ 보고 있자면 나도 정말 무섭더군. 변고를 당해도 그런 식으로 당하다니? 내가 죽고 웬 기사가 대체한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

그 말에 제이슨은 조금 욱했다. 모지가 요새 자신을 욕하지 않은 덕에 슬슬 동료애가 부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십새끼가, 너 지금 고인드립 하냐?”

“아니, 그런 의도가······”

“그럼 욕하지 마, 새꺄! 소름 끼치기론 네가 제일이지. 모지야 그 일 때문에, 롤랑은 죽어라 연기연습도 하고 고생도 해서 변한 건데. 신전에서 편히 지냈을 넌 씹할 왜 그따위로 흑화 한 거냐? 피 흘리며 싸우느니 탈주하자던 놈이 왜 남들까지 데리고 전장에 기어왔어? 데려온 그 새끼들한텐 왜 그리 권위적으로 띠껍게 구는 거고?”

“신전에 있을 때와 사상이 달라진 건 아니다. 이 세상을 위해 싸우러 온 게 아니라 너희를 돕고자 온 거야. 그리고 권위적으로 보인다고?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모두를 이끌어야 했고 얼마 전부터는 섭정 노릇까지 해야 했으니까.”

“섭정이 대수냐? 중세 왕도 그따위로 상명하복 강요하진 않을 건데, 너 이 십새끼 구는 거 보면 아주 절대군주가 따로 없어. 무슨 자기가 조선시대 왕인 줄 알아······.”

아서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의문을 표했다.

“조선? 너 일본인 아닌가?”

“인천 남동구 토박인데요, 왜? 나 원숭이 닮았다고 그러는 거냐? 이거 내 면상도 아닌데 왜?”

“아니, 너 국가보안법도 몰랐고······.”

“국가보안법 그런 거 모를 수도 있지. 나 급식 처먹다 왔는데.”

“급식? 학생 말인가? 혹시 중학생······”

“고딩, 새꺄! 고딩! 아, 중2병이라 욕하고 싶은 거냐? 이 새끼가 왜 자꾸 나한테 시비지? 이 칼로 확 배때기에 칼침 넣어주고 싶네? 롤랑이 넘겨준 거라 좆나 잘 들 건데······”

중얼거리는 제이슨을 아서는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학생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다면 이 못난 어른들은 학도병 내보내고 편히 지내고 있었단 말이군.’

문득 아서는 생각했다. 왜 전장에 남들까지 데리고 왔느냐 비난받은 마당이지만, 역시 오길 잘한 것 같다고.

출전이야말로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았다······.

*******

포위망이 얼추 완성되었을 때, 롤랑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포효하여 지시를 내렸다.

“전군, 발포!”

그 명령과 함께 색색의 깃발이 펄럭였다. 그리고 깔려있던 대포들이 다 함께 불을 뿜어냈다.

포성이 아니라 폭탄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듯한 굉음. 정말 폭발인 양, 일순 진공상태를 연상케 하는 고요가 찾아왔다. 적어도 그리들 느꼈다. 고막이 너무 울린 나머지 일순 그 기능을 상실했기에.

포격소리는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백 문에 가까운 대포들이 모두 불을 뿜자니 시간차가 발생한 것이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드러난 성벽의 모습에 롤랑은 일순 실망했다.

성벽의 어느 부분도 붕괴되지 않았다. 그저 포격 당한 부분에서 파편이 떨어져 내릴 뿐.

만족스러운 성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었으므로 롤랑은 포격보다 우렁차게 포효했다.

“계속 발포!”

깃발이 연신 펄럭였고 각 포병들은 명령에 충실했다. 그리하여 지진과 천둥을 합친 것 같은 굉음이 계속해서 지축을 울렸다.

단순 소리만 요란한 것이 아니었다. 각 포신이 뜨겁게 달아올라 더 이상 쏠 수 없게 되기를 두 번 반복했을 즈음, 성과가 드러났다.

“저기, 무너진다!”

누군가의 외침에 롤랑은 희열에 차 성벽의 어느 부분을 바라보았다.

성벽을 구성하던 암석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지면에 부딪친 거대한 암석들은 거대한 흙먼지 폭풍을 피워냈다.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성벽을 보니 여전히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벽이 여러 겹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거인들은 역시 성벽을 견고하게 쌓아올렸고 그것을 부수는 것은 끔찍하게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과연 거인들도 이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지, 성채의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성난 거인들이 뛰쳐나와 돌격해왔다.

“티탄 신들—께 영광 있으—라—!”

뛰쳐나온 거인들의 수는 약 팔십, 만만찮은 수지만 충분한 수는 아니었다. 혹시 참다못해 지시를 어기고 멋대로 뛰쳐나온 놈들일까?

상관없었다. 롤랑이 할 일은 하나였으므로.

롤랑은 등 뒤의 별동대에게 고함질렀다.

“위대한 전사들이여, 신들에게 보일 싸움을 시작하자!”

그러고는 뒤랑달을 들고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뒤따르는 이들을 따돌리기라도 하려는 듯 빠르게. 혼자서 거인들을 가로막아 그 돌격의 충격력을 약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선두의 거인들 앞에서 뒤랑달이 섬광을 뿜어냈다. 섬광 뒤에는 포효가 잇따랐다.

“오딘을 위하여—!”

그 아군도 금세 뒤따라온바, 인간과 기사들은 죽고 죽였다.

십 분 뒤, 뛰쳐나온 거인들은 모두 죽었다. 멍청한 돌진이었음을 느꼈으면 후퇴할 만도 하건만 그 어떤 거인도 물러서지 않았기에.

그 광포한 돌격에 아군도 잔뜩 죽었지만 그래도 이득에 가까운 교환이었다. 거인들은 그저 멍청하게 각개격파 당해준 셈이니까.

‘거인들은 전사에 집착하던가? 앞으로도 이렇게 멍청히 굴어주면 일이 수월할 텐데······’

그리 생각하며 롤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체가 잔뜩 깔려있었다. 거인들의 거대한 시체,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인간의 시체가 보였다. 시체 사이에 선 늙은 기사의 움츠러든 모습도.

알론소였다. 어찌어찌 싸움은 치러낸 것 같지만 잔뜩 지쳐보였다. 게다가 그 안색은 잔뜩 사파래져 있었다. 끔찍한 것을 보고 속이 메슥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기야 전투 초기부터 이상했던가? 유령군마에 탄 알론소는 롤랑보다 앞질러 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다른 기사들과 발을 맞추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 모습을 롤랑은 똑똑히 보았더랬다.

그러나 알론소에게 다가가 의문을 표할 틈은 없었다. 주변에 널린 시체 사이에는 부상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데려가도록 거인들은 방관하고 싶어하지 않을 터였다.

과연 그러했다. 방금까지 중간지대에서 얽혀 싸우다 보니 거인들의 사격도, 인간들의 포격도 멎은 상태였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거인들의 사격에 방해될 자들은 전부 죽어버렸으니까.

성벽 위로 거인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롤랑이 이끈 별동대는 그 사격거리에 닿을 만했다.

결국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롤랑은 서둘러 외쳤다.

“모두 부상자들을 옮겨!”

그리고 시체들 사이에 섞여 끙끙거리는 인간들을 향해 거대한 화살이 쏟아졌다. 거리가 아슬아슬하게 모자랐는지 대부분은 닿지 않았지만, 몇몇은 기어이 닿아 부상자들을 완전하게 으깨놓았다.

“어서······”

롤랑이 독려하던 차, 아군 측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수는 불과 다섯 명이었지만 롤랑은 눈을 크게 떴다.

유니콘에 탄 아서가 달려오고 있었다. 다른 네 명의 유저들을 이끌고.

맨 먼저 아스톨포를 태운 그리폰이 한 기사를 낚아채더니 아군 진영으로 날아갔다. 그 다음 랑슬로가 흑마를 타고 달려와 두 명을 양 어깨에 짊어지더니, 아서가 도착해 유니콘에서 내려섰다.

“지금 뭐하는······”

롤랑의 물음에 아서는 고함을 질러 대답했다.

“후방지원!”

그 순간 파공음이 울렸다. 거대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다.

아서는 화살을 향해 똑바로 달려 나갔다. 롤랑이 기겁하는 차, 아서는 방패를 들어올렸다. 그와 함께 방패에서 확장되듯 샛노란 보호막이 생겨나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부딪쳐온 화살은 보호막 위에 거미줄 같은 금을 뻗어 내리게 만들었지만, 끝내 그 아래 보호되던 부상자와 아서를 으깨놓지는 못했다.

이후로도 부상자들을 옮기려는 분투가 계속되었다. 끝내 절반은 구하지 못하고, 절반은 화살에 으깨졌다.

다행히 아서는 살아있었다.

그리고 아군 진영으로 돌아온 아서는 애써 구해낸 부상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쉬지 않고 치유의 기적을 내렸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분명하던 부상자들이 살아났다. 소위 ‘레벨 업’을 하지 않은, 신성 따위는 없을 일개 병사들마저도.

말 그대로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롤랑은 문득 자신의 친구를 보았다.

빛에 휘감긴 아서의 얼굴은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 우트가르트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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