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트가르트 - [1] >
거인들의 땅 요툰헤임에 불청객들이 발 디딘 적이 있다.
그 불청객들은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그 부하였다. 늑대의 아비 로키와 천둥신 토르 그리고 그 종자 티얄피.
요툰헤임의 왕은, 그러니까 우트가르달로키는 이 불청객들을 무시하는 대신 몸소 상대하기로 했다.
변신한 우트가르달로키는 세 불청객들의 여행길에 따라붙어 한껏 희롱하다가, 끝내 세 명을 자신의 우트가르트 성채에 맞아들였다.
그러고는 세 명에게 승부를 청했는데, 믿을 수 없게도 패배한 것은 이 망측한 거인 왕이 아니라 위대한 세 명쪽이었다.
천둥신의 종자 티얄피는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번쩍이는 빛처럼.
그러나 거인 왕이 내세운 부하에게 달리기 승부에서 지고 말았다.
불의 신 로키는 누구보다 빨리 먹을 수 있었다. 죄다 집어삼키는 불꽃처럼.
그러나 로키 역시 일개 거인과 벌인 먹기 승부에서 힘없이 패배했다.
마지막으로 천둥신 토르는 세 번의 승부를 벌였는데, 그 세 번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토르는 거인 왕이 내놓은 술잔을 비우지도 못했고, 거인들의 애완고양이를 아주 조금밖에 들어 올리지 못했으며, 웬 거인 노파와의 씨름에서도 이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초라한 전적에 위대한 세 명은 낙담했다. 이 패배자들을 정성껏 대접하며 거인 왕, 우트가르달로키는 말해주었다.
그토록 실망할 이유가 없다고. 그 모든 승부가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했다고.
*******
롤랑이 마주한 헤임달 신은 그저 거대한 남자로만 보였다.
거구 중의 거구, 롤랑보다도 머리 하나 크다는 점이 대단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이외 신적인 특징은 없었다.
그저 두꺼운 모자와 외투를 입었을 뿐, 마법적인 무언가나 휘황한 후광 따위도 없었다.
삽화와 다른 그 모습을 보고 롤랑은 당황했다. 정말 헤임달 신이 맞나? 혹시 헤임달은 잠시 볼일 보러 자리를 비웠고 눈앞의 저 남자는 소신격 문지기 아닌가?
실수할 수는 없다. 발할라의 전사 롤랑이라면 헤임달 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정상 아닌가.
초조한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헤임달이었다.
“아, 롤랑. 여기까지 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 보게 될 줄이야. 이토록 많은 병력을 이끌고······ 매일같이 뿔피리 하나 들고 먼 경치나 바라보는 나보다 훨씬 낫군그래.”
목소리마저 평범했다. 도저히 신성한 누군가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는 것을 보아 헤임달이었으므로 롤랑은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헤임달······”
그 말에 헤임달은 작은 소리로 경고했다.
“내 이름을 여기서 말하지 말게. 혹시라도 거인들이 엿들을까 두렵군. 나는 본디 이곳을 지키던 문지기의 자리를 대신하여 여기 서있네. 거인들에게는 새로운 문지기의 정체가 헤임달임을 밝히지 않은 채 말이야.”
그 말에 롤랑은 다시금 혼란에 빠졌다. 어쩐지 헤임달이 자신을 대하는 말투가 꽤나 정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의 말투도 조정해야 하나?
대체 저 남자를 어찌 대해야 하나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자그마치 신이 눈앞에 서있는 것이다. 오딘과는 자주 만났지만 그 때는 맨 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롤랑은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함께 데려온 다른 지휘관들이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당이지만 롤랑만은 당당해야 했다. 그것이 자연스러울 터였다.
“어째서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몸소? 성소를 관리하는 임무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롤랑의 물음에 헤임달이 대답했다.
“로키가 우트가르트 앞에서 어슬렁거렸다는 보고가 올라왔거든. 우트가르트의 거인 로키 말고, 라우페이의 아들 로키 말이야. 아스가르드는 이것을 로키의 괴물 자식들과 서리거인들이 손잡을 위험이라고 여겼네. 그동안 마법이나 옥좌 따위를 써 멀리서 우트가르트 성채를 감시해왔지만 이제는 맨눈으로라도 가까이서 감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지. 그 감시자로는 내가 제격이리라 생각했고. 여기까지 파견되었어.”
헤임달의 말은 자세하고 부드러웠다. 그 말투에서 친근감을 느낀 어느 지휘관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았다.
“이 만남을 자손대대의 영광으로 여기리라 미리 말씀드리며, 이 미천한 것이 감히 여쭙······”
그 말 도중 헤임달이 목소리를 내었다. 말을 걸려던 지휘관에게는 눈길조차 보내지 않은 채.
“미천한 제 분수를 알면 닥쳐야지, 왜?”
그 목소리는 울렸고, 고막을 난폭하게 휘저었다. 질문한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휘관들까지 모두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신음소리. 롤랑은 지휘관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좋지 않았다. 방금 말을 꺼내려다 무시당한 지휘관은 거느린 병력이 두 번째로 많으며 포병대까지 꾸려온 중요인물이었다. 신에게 저토록 홀대 당하여 성전의 의욕을 잃었다가는······.
롤랑은 지휘관을 몸소 일으켜주며 속삭였다.
“묻고 싶은 게 있거든 내게 말씀하시오. 대신 물어줄 테니.”
그 말에 지휘관은 웅얼웅얼 롤랑에게 자기가 하고픈 말을 전했다. 헤임달에게 그 목소리가 닿을까 두려운 듯이 작게.
다 듣고 난 롤랑은 그 말을 헤임달에게 전해주었다.
“저희는 우트가르트 성채와의 싸움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줄로 압니다. 그 성전에 헤임달 신께서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헤임달은 실제 질문자가 한낱 인간 지휘관임을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롤랑도, 지휘관들도 쳐다보지 않은 채 허공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된다.”
롤랑은 지휘관을 쳐다보고는 다시 헤임달에게 물었다.
“어째서?”
“우트가르드와 아스가르드 간에 체결된 평화협정 때문이다. 서로의 영역에 침입하지 말 것을 규정한 그 협정에 따르면 어느 신도 우트가르드에 발 디뎌서는 아니 된다. 내가 거인들의 땅에 발 디디다 못해 전투에 끼어들기까지 할 경우 평화협정은 파기될 것이며, 전쟁이 시작되리라. 어차피 머지않아 파기될 협정이라 한들 벌써 깨어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신께선······”
“지켜볼 것이다. 전투의 경과를. 내 눈으로 용맹하게 싸운 자들을 가려 발키리들의 손에 그 넋을 인도하리라······. 이로써 내 말은 끝이다. 이제 가라. 이토록 오래 만나서야 저 우둔한 거인들마저도 인간들이 신명을 받들고 있음을 눈치 채고 말겠구나.”
‘눈치고 뭐고 이미 다 알고 있던데.’
그리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롤랑은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너머로 집어삼켰다.
헤임달의 전쟁참여 의사 말고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저기 성채 뒤에 오딘이 잡혀있음을 알고 있는가? 알고서도 방치하고 있는가? 등등.
그러나 이 자리에서 묻기는 위험할뿐더러 헤임달이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다.
헤임달은 신답게 오만했다. 그 오만한 성정에 자기가 내린 축객령이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모욕으로 느낄 터였다.
어쩔 수 없었다. 롤랑은 모든 의문을 속에 묻어둔 채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최대한 많은 전사들을 발할라에 보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늑대의 시간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전사들이 필요한 줄로 압니다.”
헤임달은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롤랑 자네의 부탁이라면 내 그러지.”
그 다음에는 여기 모인 지휘관들에게 독려의 말을 던져줄 법도 하건만, 헤임달은 끝내 그러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신과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롤랑은 지휘관들을 이끌고 계단을 벗어나 야영지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제이슨이 물어왔다.
“헤임달 만났어? 어떻던?”
롤랑은 말을 가렸다. 신화에 따르면 천상의 파수꾼 헤임달의 청력은 초월적이었으므로.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자기 임무에 충실한 모습이 과연 거룩한 파수꾼이더군.”
그리 말하면서 롤랑은 뜬금없이 문서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이슨이 볼 수 있도록 아라비아 숫자를 두 개 적었다.
18, 50000.
제이슨은 그 수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보고는 물었다.
“모지보다?”
“훨씬.”
그 말에 제이슨은 탄식했다.
모지보다 오만한 십팔 새끼라니?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다.
*******
원정대의 포위망은 빠른 속도로 완성되고 있었다. 성채 주변을 둘러싼 참호 사이사이에 대포가 설치되었다. 또한 성벽의 약한 부위가 발견되면 바로 포구를 돌릴 수 있도록 바닥을 잘 다져두기까지 했다.
이 모든 작업이 순조롭게 이어지는 가운데 롤랑은 의아했다. 거인들이 대체 가만히 서서 뭐하는 것인가? 왜 막으려 들지 않나? 밤에 기습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러던 와중이었다. 성벽 위로 가죽 깃발 하나가 올라 오더니 뿔피리 소리가 울려왔다.
비록 거인들이 인간과 문화가 다를지라도,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만 했다.
아말릭이 중얼거렸다.
“저들이 대화를 원하는군요.”
그리하여 롤랑이 나섰다. 양 옆에 두 영웅을 거느린 채.
성벽 위에는 당연히 거인이 서있었다. 그러나 갑옷이 아니라 화려한 법복을 입은 거인이었다.
고위 성직자처럼 차려입은 그 거인이 주문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인간들이여, 느릅나무와 물푸레나무의 자손들이여! 물러가라!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롤랑은 정해진 대사를 마주 외쳤다.
“단호히 거부한다—!”
그 외침에 거인은 롤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참동안 내려다 보더니 물었다.
“그대가 인간을 대변하는가? 아니라면 자격 있는 자를 불러와 나와 대면시키라. 내가 바로 우트가르트의 군주 로키임을 알라. 나는 서리 종족의 오랜 통치자이며 우트가르드, 혹은 요툰헤임의 왕이다. 그러니 묻노라, 거인 왕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인가—?”
로키. 그 이름에 롤랑은 일순 얼어붙었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악신 로키일 터였다. 게임 메디아의 운영자가 트릭스터 로키였으니까.
그러나 그 로키는 저 로키일 수도 있었다. 어쨌건 같은 이름 아닌가? 저 마법사 거인이라면 무엇이 가능할지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신들까지 희롱한 놈이니······.’
롤랑은 긴장을 숨기며 외쳤다.
“롤랑! 친애하는 대제의 기사이자 오딘의 대전사이다! 지금은 이 무리의 대표자로서 이 자리에 섰다!”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왕은 아니지만 그 자격을 인정하지. 이제 우트가르트의 군주가 고결한 기사에게 말하건대, 롤랑이여. 모두를 이끌고 물러가라—! 그 어떤 명분이나 이로움이 있어 이 성을 침범하려 드는가?”
그 질문에 롤랑은 고민했다. 저 말은 주문의 힘으로 모두에게 들리고 있으니 이 말싸움에서 밀리면 안 될 것인데, 어떤 명분을 내놓는 것이 좋을까?
일단은 준비한 명분을 꺼내놓았다.
“복수! 옛 원한을 갚으러 왔다! 현 인류의 조상들, 그리고 내 전우들의 원수를 갚으러 이 땅에 다시금 발을 디뎠다!”
“수백 년 전, 카를의 전쟁 말인가? 그 전쟁의 명분도 이쪽이 정당했다. 너희가 침략자였으니.”
“당시 너희 족속은 우리를 노예로 부림으로써 인류의 영혼에 수치를 안겨주었다! 그 간악한 족속을 벌하기 위한 전쟁이었거늘, 무슨 명분 없는 침략인가?”
“미안하지만 지상에서 너흴 지배하던 그들은 우리와 다른 족속이다. 너희 보기에야 거인들은 다 같은 무리로 보일지 몰라도······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거인 족속의 다양함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왜냐하면 방금 그건 진정한 이유가 아닐 테니까. 내 맞혀보지. 오딘 때문인가—?”
롤랑은 당황했다. 오딘이 저기 잡혀있음을 모르는 척 할 예정이었는데, 저쪽에서 대놓고 밝혀버렸다.
그러나 당혹을 숨기고, 그 대신 분노를 담아 외쳤다.
“역시 너희가 흉수인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어느 쪽이건 내 할 말은 간단하다. 그러지 말라! 오딘은 풀려나선 안 된다. 풀려난 오딘은 자신의 본업으로서 전쟁을 벌이려 들 것이다. 유배당해 있던 원한, 그 개인적인 분노를 풀기 위한 전쟁을! 도끼와 창검이 만물을 휩쓸 것이다! 굶주린 늑대의 시간이다! 요툰헤임도, 그 아래 세계수와 미드가르드도 전쟁신의 광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거듭 경고하건대, 물러가라! 오딘이 풀려나서는 안—돼—!”
< 우트가르트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