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사십구 층 - [4] >
롤랑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다면······”
랜슬롯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네 책임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어차피 그건 내 추측일 뿐이야. 게다가 아서가 여기 온 데는 감정적인 이유 말고 정치적인 이유도 있어. 메디아의 오스마 여왕이 죽었거든.”
“뭐?”
“못 들었나? 이제 오스마 2세가 정식으로 여왕이 되었지. 그와 동시에 왕가의 가신들이 섭정에 대한 견제를 시작한 거야. 정체불명이지만 권위만은 무지하게 높은 섭정에게서 어린 여왕의 왕권을 보호하기 위한 견제 말이야. 아서는 거기 정면으로 맞서는 건 모양새가 안 좋으리라 여기고는 피신하는 게 낫다 생각했지······. 뭐 정치적 피신하겠답시고 사람들까지 끌고서 전장으로 오는 게 옳다는 건 아니지마는.”
새로 얻은 정보들 탓에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롤랑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물어보았다.
“그래서 내가 뭘 어쩌면 좋겠어? 아서한테 가서 당장 돌아가라고 윽박지를까?”
“아니, 괜히 자극하진 말고 그냥 이대로만 해주면 만족한다. 후방지원, 충분히 감사한 조치지.”
“후방도 위험한데······.”
“됐어. 직접 싸우는 너희보다 위험하겠냐?”
그 말을 끝으로 롤랑은 자기 막사에 돌아왔다. 그리고 시름에 잠긴 가운데,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뭐 새삼 생각해 보면 아깝긴 하네. 힐러랑 소환사, 광전사 등으로 레벨 15짜리 열 명이면 엄청난 전력 아니야?”
“15라 해봤자 알론소랑 비슷한 레벨이잖아.”
롤랑은 대충 말했지만 제이슨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훨씬 강력하지. 여기서의 레벨 업은 게임의 레벨 업보다 별로잖아? 게임에서는 레벨 업 하면 검술이며 방패 숙련 따위 기술도 향상됐는데 여기선 아니니까. 알론소도 우리랑 싸워오면서 창술이 발전하긴 했는데, 그래봤자 몰라볼 정도로 나아진 건 아니지.”
“하기야 기술적인 면에서는 그저 실전 좀 겪은 기사 수준이지. 기술이 부족해도 원체 용맹한 덕에 그동안 큰 도움이 됐지마는······.”
이후로도 롤랑과 제이슨은 알론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얼마나 유쾌한 노인네였는가, 겁도 없이 돌격해서 괴물 죽여 대는 모습이 얼마나 놀라웠는가 등등.
그러다 보니 평소 알론소와 자주 어울리곤 하던 제이슨은 우울해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팔팔하던 영감이 골병들어 앓아눕다니, 대체 뭔 일이래? 레벨 업 하면 신체 건강해지는 거 아니었어? 최종결전에서 동료가 노환으로 빠지다니 무슨 병신 같은 전개냐고 씹할······ 사실 저 방구석 유저들보다 훨씬 듬직한 양반인데······”
제이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론소의 이탈이 정말로 아쉬운 것일까.
그 모습을 보며 롤랑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롤랑은 오딘의 경고, 그러니까 발두르와 그 신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을 동료들에게도 발설하지 못했다. 동료들이 섬기는 천상의 신들에게도 그 말이 전해질까 두려웠기에.
뭐 지금 와서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알론소는 저 아래에 있으며, 현대인 출신 아서 왕이 신의 명령에 복종할 리 없지 않은가······.
롤랑은 그리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이틀 뒤, 세계수에 돌아온 늙은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알론소! 몸 좀 괜찮아요?”
제이슨이 달려가 반기자 알론소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예, 덕분에.”
“어째 목소리에 힘이 없는데? 아직 다 안 나은 거 아냐?”
“괜찮습니다. 아마도요.”
롤랑은 문득 섬뜩해졌다. 알론소의 말이 예전과는 달리 너무나도 차분했다. 샘물을 마신 탓인가, 아니면 병으로 기운이 사라진 탓인가?
‘만약 전자라면 그 인격이 변한······.’
롤랑이 다가가 물어보았다.
“다시 뵈어 반갑소, 알론소 경. 그런데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더 쉬는 게 낫지 않겠나?”
“더 쉰들 나아질 게 뭐 있겠습니까? 늙어서 골병 든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 더 나빠질 뿐이겠지요. 차라리 완전히 몸이 삭아버리기 전에 싸우다 죽고 싶어요. 이 늙어빠진 영혼을 위해서······. 침대에서 편히 누워죽은 자는 발할라에 가지 못하는 법이잖습니까?”
핑계를 대어 알론소를 돌려보내려던 롤랑은 입을 다물었다.
‘싸우다 죽겠다고······.’
롤랑이 굳어있는 가운데 제이슨은 알론소의 어깨를 두드리며 외치고 있었다.
“그래, 그동안 잘 싸워놓고 마지막에 빠지는 건 억울하지! 잘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발할라 가겠다며 바로 죽진 말고!”
제이슨은 알론소가 함께 싸우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롤랑은 그것을 말리려다가 그만두었다.
발할라. 그동안 롤랑이 지겹게도 입에 담아온 단어였다. 롤랑은 그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기사와 병사들에게 괴물들과 싸우도록 명령해왔다.
그래왔던 롤랑이, 늙은 동료에게 헛된 생각 말고 곱게 죽으시라 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발할라는 곧 롤랑의 업이었기에.
결국 롤랑은 말했다.
“재회를 환영하오, 알론소.”
어설프게 웃는 알론소를 보며 롤랑은 생각했다.
그래, 하기야 알론소가 정말 위험하다면 보이지 않는 장소에 두는 것이 더욱 불안하다. 차라리 손에 닿는 곳에 두는 것이 낫다.
‘그러다가 만약 발두르 신의 명에 따라 배신하려 한다면, 내 손으로······.’
롤랑은 자기 허리춤의 뒤랑달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잘 드는 칼에 거인 아닌 인간, 그것도 늙은 동료의 피를 묻혀야 할지 모른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오기로 한 병력이 모두 모였다. 삼만 명에 가까운 대군, 그 앞에서 롤랑은 뒤랑달을 들어 외쳤다.
“간악한 거인들의 요새가 저기 있다. 그곳이 곧 발할라의 계단이 될 것이다!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 될 것이니, 어두운 종말이 아닌 영광스러운 죽음을 향해 돌격하라!”
지겹게 들어온 환호가 잇따랐다. 롤랑, 롤랑!
롤랑은 마지막으로 외쳤다.
“전사들이여, 진군하라!”
그리하여 수만 대군이 계단을 올랐다. 끝이 없을 것 같은 행렬이었다······.
백오십 층에 오른 이후로도 아래 층에서와 비슷한 일을 시작했다. 주변을 정리하는 작업, 그러니까 매복이 가능할 만한 장소을 비우고 보급로를 마련하는 일에 열중했다.
가끔 거인들과 마주할 때마다 롤랑과 기사들은 굶주린 늑대처럼 뛰쳐나갔다. 그리고 거인의 목을 들고 돌아오면 다시금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롤랑, 롤랑!
결국 군대가 거인들의 성채 앞에 다다른 것은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저 먼 곳을 가리키며 기사가 물었다.
“저기가 우트가르트 성채일까요?”
“아마도······.”
섣불리 다가갈 수는 없었다. 모두 거인들이 쏘아대는 화살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롤랑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저기가 우트가르트 성채요. 그 뒤가 바로 요툰헤임이고.”
옛 영웅이 보증해주었으니 틀림없었다. 저기가 바로 결전의 장인 것이다.
모두들 질린 표정으로 저기 우뚝 선 성채를 바라보았다. 그 거대한 성벽은 협소한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물이 채워지지 않은 공호(空濠)가 성벽을 빙 둘러있었는데, 누군가 몰래 보고 오니 참 깊이도 파두었더랬다. 거인 기준에서도 깊게, 인간 입장에서는 가히 절벽이나 다름없도록.
지형 등 조건이 갖추어지면 난공불락의 성이 정말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봐도 저 요새가 딱 그래보였다······.
롤랑이 생각하는 저 요새의 공략방법은 하나였다. 중세로부터 난공불락으로 악명 높았던 성들을 수두룩하게 함락시켜온 물건, 반항적인 영주들과 강도 기사들을 결국 왕 앞에 무릎 꿇린 무기.
대포.
롤랑은 어쩌면 이 시대 최고의 포병대를 거느렸을지도 모르는 남자, 염동장군 보어조아에게 물었다.
“포 사거리가 많이 개선되었다고 했던가?”
보어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적어도 거인들의 사거리 짧은 화살보다는 멀리 나갈 겁니다.”
포탄이 과연 성벽을 뚫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거인들의 성벽인 만큼 엄청나게 두꺼울 테니까.
그러니 쉼 없이 쏘아댈 계획이었다. 성벽을 뚫는 것이 아니라 깎아내는 식으로라도 포탄을 쭉 퍼부을 것이다. 하루 종일, 며칠이고 계속.
꽤 오래 그럴 수 있을 터였다. 포탄은 충분했고 대군을 먹일 보급로도 마련되었다. 그리 계속해서 성벽을 두들기다 보면 거인들은 계속 성안에만 있지 못할 것이다.
끝내 견디지 못한 거인들이 성 밖으로 뛰쳐나오면 롤랑이 마주 달려 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결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당장 롤랑이 세워둔 전략의 골자는 그러했다······.
“그 전에 주변을 정리해야겠지. 다시 할 일을 합시다.”
롤랑의 말에 따라 다시금 정찰병을 사방에 보내고, 데려온 학자들에게 거리를 계산하도록 지시했다.
거인들의 사격이 닿지 않을, 그러나 이쪽 포격은 닿을 거리가 얼추 잡히자 공병들을 부려 참호를 파도록 지시했다. 거인들의 돌격에 대비해야 하니 그 참호는 유례없이 견고해야 했다.
세계수 그 자체를 뚫을 수는 없겠지만 그 위의 흙을 치워 구덩이를 파는 것은 가능했다. 그리하여 병사들이 죽을힘으로 삽질을 한바, 점차 참호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거인들이 이쪽을 보고 있군그래.”
모지의 말에 롤랑이 고개를 돌리던 차, 성채 위의 거인 하나가 거대한 활을 들어올렸다. 뒤이어 활 못지 않게 거대한 화살이 날아왔다.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단순 그 소리만 듣고도 많은 병사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급기야 일하다 말고 엎어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아, 아아아아악!”
비명소리를 가르며 화살은 지면에 충돌했다.
쿵 하는 소리. 롤랑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화살은 참호와 떨어진 곳에 명중했다. 학자들의 거리계산은 정확했던 것이다.
그리 피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들거리는 병사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한심한 새끼들······”
보어조아가 끌끌거렸지만 롤랑은 함께 비웃어주지 못했다. 롤랑이 보기에는 이해할 만한 일이었으므로.
거인들과의 전쟁 동안 저 화살 소리는 모두의 악몽이 되었다. 공기 한 번 갈라진 다음 쿵, 하고 울린다. 눈을 감았다가 떠보면 주변 동료가 고기조각이 되어 널브러져 있다. 거인들과의 싸움에서 숱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어쨌건 진짜 위기는 이 다음부터였다. 거인들도 이제 자기네 화살이 인간들의 포위망에 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포위를 완성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을 테니, 거인들이 예상보다 일찍 회전을 걸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인들은 당장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인간 군대의 포위망은 점차 완성되고 있었다.
롤랑으로서는 혹시 거인들이 돌격해 오면 바로 응수하고자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던 와중이었다.
한 정찰병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정찰병의 보고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계단 위에 한 남자가 서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두세 개는 클 법한 남자가······”
“좀 작은 거인이던가?”
“아니오! 아닙니다!”
정찰병은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지휘관 앞에서 그러다니 무례하다며 모두들 혀를 끌끌 차던 차, 정찰병은 겨우 진정하고는 외쳤다.
“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뭔가.”
“신······ 신이었습니다!”
신. 짧은 단어 하나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신이 계단 위에 있었다고?”
함께 보고를 듣고 있던 롤랑은 문득 게임 메디아의 확장팩 예고를 떠올렸다. 거기에 무슨 적들이 예고되어 있었던가?
‘소신격 문지기?’
소신격, 그러니까 지위 낮은 신이라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발키리 천사였다.
그 정도라면 설령 싸우게 되더라도 큰 위협은 못 되리라. 롤랑이 그리 생각하던 차, 정찰병의 말은 또 다시 모두를 경기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롤랑마저도.
“예! 계단 위의 그 분께서는 당신 이름을 헤임달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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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임달은 천상 아스가르드의 파수꾼이다. 라그나뢰크가 닥쳐온 순간, 뿔피리 걀라르호른을 불어 신들에게 이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임무를 맡은 신.
그 임무가 막중하듯 그 지위 또한 낮지 않다.
적어도 소신격 따위는 아니리라. 신들의 계보를 확인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
< 백사십구 층 -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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