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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트롤랑-145화 (145/164)

< 백사십구 층 - [3] >

지원군의 찬란한 모습을 모두들 홀린 듯이 지켜보는 와중이었다.

롤랑 또한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반가움에 앞서 경악이 먼저 덮쳐왔다. 유저들이 대체 여긴 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지원군, 유니콘 위의 남자와 그들이 이끄는 전사들이 지척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멀거니 서있던 지휘관은 롤랑의 눈치를 살피다가 쭈뼛쭈뼛 유니콘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 꿇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심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께서는 혹시 발할라의 전사들이십니까?”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유니콘 위의 기사가 아닌 그리폰 위의 기사였다.

아스톨포가 낭랑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아스톨포, 친애하는 황제 폐하의 기사이자 저기 서있는 롤랑 경의 조카라! 그리고 이 전사 집단의 대표이신 저 고귀한 분이 누구인가 밝히자면, 그 무엇보다 먼저 여기가 곧 왕의 어전임을 밝혀야 할 터!”

아스톨포는 유니콘 위의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하여 모두가 빛나는 검의 주인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스톨포가 외쳤다.

“위대한 왕을 소개하노라! 모두들 무궁한 경애를 담아 신성하신 카를 대제의 후계요, 천상왕국의 지엄한 군주이시며 성검 발뭉의 주인이신 아서 왕을 맞이하라!”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아서 왕은 중얼거리듯 짧게 입을 열었다.

“이토록 많은 전사들을 보아 반갑군.”

그 순간 굳어있던 지휘관은 바로 무릎 꿇어 예를 취했다. 왕에게나 바치는 예법. 그러자 지휘관이 부리던 병사들도 무릎 꿇었고, 덩달아 그 자리에 있던 병사들 모두가 무릎 꿇었다.

롤랑은 이제 자신은 어찌 예를 표해야 하나 고민했다. 자기도 무릎 꿇어야 하나? 그러나 생각에 잠기다 말고 기겁했다.

아서 왕이 롤랑을 바라보더니, 모두에게 들릴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내 부친의 가장 든든한 친우께서 여기 계시는군.”

아서 왕은 유니콘에서 내려와 롤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와 함께 고개도 살짝 숙임으로써 롤랑이 어찌 처신해야 할지 알려주었다.

롤랑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마주잡았다. 그리고 말을 받았다.

“아, 젊은 아서가 여기에! 그대의 위대한 아버지께서 일찍이 밟았던 이 타지에 어떤 일로 왔는가? 전사들을 위문하기 위함인가?”

“겨우 위문뿐인가? 내 여기 당도했음은 그대 전사들을 도우기 위함이라!”

아서의 위풍당당한 말에 롤랑은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아, 이토록 기쁠 수가!”

그리 외치고는 자기 표정이 흐려지지 않도록 신경 썼다.

롤랑은 계속해서 안면근육에 힘을 주며 아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서 왕 또한 롤랑을 껴안았다.

두 영웅이 서로에게 고귀한 우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서사시적인 현장에 사람들은 무릎 꿇은 채로 환호했다.

그 열렬한 함성에 파묻힌 채 롤랑은 아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메디아는 어쩌고?”

“거기야 뭐 나 없어도 잘 굴러가지. 뭐 어차피 중세국가에서 왕이 친정하는 거야 다반사 아닌가.”

둘은 포옹을 그만두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서는 롤랑이 무슨 말을 하길 기다리듯 가만히 서있었지만, 끝내 롤랑은 입을 열지 않았다.

도저히 잘 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롤랑은 저들을 봐서 반갑지 않았다.

오딘을 구하려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동포들을 이 위험한 세계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함 아니던가.

롤랑은 생각했다. 저들은 여기 올 필요도 없거니와 와서도 안 되었다.

*******

“대체 왜 온 거야?”

롤랑의 힐난에 아서가 대답했다.

“도우러 왔다니까.”

“그렇다고 이 전장에? 그것도 딴 유저들까지 데리고 와? 싸움 한 번 있을 때마다 얼마나 많이 죽는 줄 알아? 지금 우리가 싸우는 상대는 잡몹이 아니거든? 거인들, 좆나 세고 위험한 거인들이 우리 상대야! 그 새끼들은 마법도 쓰는데, 씹할 저번에 웬 거인들이 투명화 쓰고 잠입해 와서 지휘관들 포함 사백 명이 하룻밤에 죽었다! 아스타로트가 겨우 발견해내서 망정이었지 하마터면 전멸할 판······”

“그 위험한 전장에 너희를 보내놓고 우리는 편히 있으란 말인가? 우리가 뭐 보호받아야 할 어린앤 줄 아나, 롤랑?”

“우린 이미 적응이 됐어! 너흰 안 됐고!”

“적응이야 물론 안 됐지. 하지만 준비는 됐다고 자부한다.”

롤랑은 문득 아서 뒤의 유저를 노려보았다. 랑슬로, 아니 이제 랜슬롯이 그 시선을 받고 얼굴을 흐렸다.

“너도 정말 그리 생각해? 다 싸울 준비 됐다고?”

롤랑의 추궁에 랜슬롯은 말을 흐렸다.

“준비야 꽤 했지. 실제론 어찌 될지 몰라도······”

우물쭈물하는 투, 아서는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랜슬롯, 헛소리 할 거면 입 다물어라. 그리고 롤랑······.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다. 여기는 험악한 전장이고, 우리는 막 차출된 신병들처럼 어버버 하다가 죽을 위험이 크다 이거지?”

그 말을 받은 것은 옆에 있던 제이슨이었다.

“곱게 죽으면 다행이지. 벌벌 떨면서 달아나가지고 망신 시킬까봐 무섭다, 마. 나도 요즘은 칼 들고 뛰쳐나가다 보면 똥오줌 지릴 것 같거든? 거인 새끼들 발걸음 소리 좆나 커서 심장 떨리는 거 하며, 거인 새끼들이 화살 쏠 때마다 그냥 다 집어치고 얌전히 메디아 궁성에나 처박힐까 고민되더라. 아, 화살이라고 해서 무슨 방패 들어 막으면 되는 그런 건 줄 알지? 아냐! 갑옷 입었건 말건 정통으로 맞으면 진짜 사지가 날아간다? 놈들이 철화살 쏘면 크레이터 비슷한 것도 생기더만 그게 미사일이지 진짜······”

롤랑은 새삼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저런 심정으로 싸움에 임하고 있었던 줄 미처 몰랐다.

‘이미 싸움에 익숙해져서 용맹한 줄 알았는데.’

롤랑도 제이슨의 말을 보탰다.

“아래층에서 싸울 때 왔으면 또 몰라, 여기는 진짜 안 돼. 거인들과 싸우는 건 예사 중세전투가 아냐. 굉음이 울리고 사람 육편이 휘날리고······”

“그토록 끔찍한 곳이라면 왜 평범한 병사들은 아직 남아있나? 그들이 싸울 수 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어.”

“그들은 달아날 데가 없으니까. 하지만 너희는 아니잖아?”

“그럼 그냥 달아나라고? 모두를 도우러 왔노라 선언하고는 뻔뻔하게? 그대로 귀국했다간 천 년쯤 망신살 뻗치겠군.”

“지금 망신살 문제가······”

“아니, 난 지금 왕이고 체면에 신경 써야한다. 지금 돌아가면 궁성 뒷담 수준이 아니라 국제망신감이야. 우리, 준비 해왔다고 했지? 랜슬롯이 찬 칼 보이나?”

롤랑이 보니 랜슬롯은 예장용 아닐까 싶을 만치 근사한 갑옷에 칼 한 자루를 찼다.

“보검인가? 저게 왜?”

“그냥 보검이 아니라 끔찍하게 비싼 룬검이었다. 고명한 기사 랑슬로 경이 생전에 썼다는 칼로 유명하거든. 아론다이트!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아닌가? 제국 박물관에 소중히 모셔져있더군. 그야말로 국고를 털어서 사야했다!

그리고 아스톨포가 들고 온 뿔피리도 아스톨포 본인이 생전에 쓰던 물건인데, 그건 아예 좋은 물건 수준을 넘어 성유물 취급이더군?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반납요청을 해야 했지. 준비에만 그 지랄을 해놓고 밥만 축내다 돌아갈 수 있겠나?”

롤랑은 질린 표정으로 애써 말했다.

“못 돌아갈 건 또 뭐야.”

“이대로 돌아가면 다들 내가 보물수집 하느라 핑계 댄 줄 알고 횡령 및 사기 혐의로 잡아가둘 텐데? 그리고 준비한 건 장비뿐만이 아니야. 근위병들 동원해서 훈련도 실컷 했거니와, 아무나 보냈다가는 너희들을 돕기는커녕 폐나 끼치리란 염려는 우리도 이미 했다. 그래서 폐 끼치지 않을 자들만 가려서 데려온 거고.

우리 열 명 중 셋은 소환사고, 두 명은 마법사다. 한 명은 사제요 날 포함해 두 명은 힐러형 성기사. 그리고 여기 있는 랑슬로는 광전사······ 모두 직접 싸울 필요가 없는 치들이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직종 아닌가?”

아서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롤랑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절대, 안 돼.”

이후로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막사 밖으로 들려서는 곤란했으므로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지만 점차 언성이 높아졌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병사들 죄 죽어나갈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 줄 아냐? 이 좆같이 위대한 롤랑께서 발할라, 발할라 헛소리로 꾀어낸 탓에 젊은 놈들이 아주 떼죽음을 당하는구나! 내가 바로 비행기 타고 함모에 꼴아 박으라고 강요하던 일제 장교들만큼 나쁜 새끼구나! 그리 자괴감에 미칠 것 같은데, 이제 너희 뒈지는 꼴도 보라고?”

롤랑이 외치자 아서가 물었다.

“그들은 그리 죽어도 되고, 우린 안 되나?”

“그래! 너흰 뒈지지 말라고 우리가 싸우고 있는 거 아냐!”

롤랑이 숨을 가다듬는 가운데, 아서는 조용하게 말했다.

“내 기억하기로 너흰 처음에 그런 목적으로 간 게 아니었는데. 물론 자원해서 가긴 했지. 숭고한 일이었지만 궁극적으론 어쩔 수 없어서 간 거 아니었나. 우리 중에 셋은 가야하니까 너희가 희생한 것이었어.”

“지금은 그리 희생할 필요가 없고, 너희까지 싸울 필요도 없어!”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세계수에 끌려갈 수밖에 없던 원인이 제거된 지금, 너희 셋이 정말 이대로 쭉 싸울 수밖에 없느냐면 그건 아닐 거다. 너흰 자발적으로 싸우는 거지. 너희가 그런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어.”

이후로도 말씨름이 계속되었지만 아서는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먼저 굽힌 것은 롤랑이었다. 롤랑이 계속 반대하자 아서 말하길, 당장 막사 밖에 나가 발할라 전사들이 다음 전투에서 영광스러운 선봉을 맡으리라고 선언해도 되겠느냐 협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롤랑은 말했다.

“그럼 후방지원 해. 내 부관으로 임명시켜 줄 테니까 부상자들이나 돌봐. 다른 유저들은 네 호위로 두고. 그리 체면치레 하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

“더 할 수도 있······”

“나는 직접 싸워도 되는데 너흰 왜 안 되냐면, 난 그래도 안 죽지만 너흰 분명 죽을 거니까 그런다! 난 지금껏 거인들이랑 잔뜩 싸워봤을 뿐더러 놈들이 쏘는 화살에 맞아도 끔찍하게 아플 뿐 즉사하진 않아. 하지만 너희가 그 화살에 맞으면 형체도 못 남겨······.”

문득 아서가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새끼 구라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롤랑이 말했다.

“아무튼 전투에 직접 나서는 건 절대 안 돼. 말해두겠는데 나 지금 여기 총지휘권 있으니까 병력 배치할 권한 나한테 있다? 내 말 어기고 멋대로 굴면 책임을 물어 추방령 내릴 수 있어. 아주 정당하게.”

그제야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리 말씨름이 끝나자 롤랑은 피곤해졌다. 지난 싸움에서의 피로가 한꺼번에 덮쳐오는 기분이었다.

롤랑은 의자 위에 쓰러지듯 앉고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자, 이제 가서 잠시 쉬고들 있어. 뭘 하면 될지는 내가 사람 보내서 알려줄 테니까······.”

“그래. 그럼 잠시 물러가지.”

아서가 발걸음을 옮기자 따라온 유저들도 따라나섰다.

유저들의 맨 뒤에서 걸어 나가던 것은 랜슬롯이었는데, 롤랑의 옆을 지나치던 와중 랜슬롯은 자칫 놓칠 법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진짜 고맙다, 롤랑.”

그 말에 롤랑은 잠시 굳었다.

아서가 말하는 동안 다른 유저들은 입 다물고 있어 모두 한마음 한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나? 사실 다른 이들은 전장에 나서기 싫은가?

‘그렇다면 그 핑계로 돌려보내야······.’

그리 생각한 롤랑은 시간이 지나 랜슬롯과 몰래 만났다. 그러고는 아서 말고 딴 사람들의 뜻은 어떤가, 물으니 랜슬롯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일단 다들 자원하긴 했어.”

“일단?”

“그래. 병장이 ‘지금 일손 세 명 필요한데 자원할 사람?’ 하고 물으면 일병 이병들이 손 번쩍 들어 올리는 느낌으로.”

“대체 왜?”

“그러지 않고 별 수 있나? 진짜 임금님이 눈치 주는데······.”

랜슬롯은 한숨 쉬었다.

롤랑은 혹시 모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물어보았다.

“아서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발두르 신이 계시라도 내렸다던?”

“아니, 신 때문은 아닐걸. 누구 탓은 아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너 때문 아닐까?”

갑자기 지목되다니. 롤랑은 기겁했다.

“나?”

“친구를 전장에 보내놓고 자긴 남았다, 이 사실에 죄책감 느끼는 모양이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출전하려고 벼르다가 나선 모양새던데.”

< 백사십구 층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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