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44화 (144/164)

< 백사십구 층 - [2] >

롤랑은 침묵했고 오딘은 만족했다.

오딘은 다시금 즐거운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전쟁을 지켜보았다. 바글바글한 인간의 무리, 수가 정말로 늘었더구나. 네가 활약하던 그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늘었어. 그 옛날 인간의 수는 트롤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 신들께서 보우하신 덕분입니다.”

“아니, 너희가 잘나서 그런 게지. 그 누가 알았더냐? 보잘것없는 큰난쟁이들이 미드가르드의 주인이 될 줄이야! 당시 너희는 작고 약하며 보잘것없는 족속이었다. 거인들로서는 그저 노예로나 쓸모 있어 살려두는 무리. 나조차 너희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어.”

오딘은 옛날을 추억했다. 인간이 인간이라 불리지 않고 그저 덩치가 조금 큰 난쟁이 족속으로 취급받던 시기를.

롤랑이 읊조렸다.

“카를 대제가 한낱 노예 대장장이였던 시절입니다.”

“그래, 당시 너희 무리는 영역싸움에도 밀린 나머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그 약소종족이 강대한 괴물들과 거인들을 쓸어버리던, 그 믿을 수 없는 전쟁에 네가 있었다. 미드가르드에서 가장 위대했던 전쟁마다 최선두에 네가 있었어! 그리하여 너희는 번성했구나. 그 옛날 카를이 사천 명의 전사들을 데려왔을 때 그것이 곧 인류의 전력(全力)이었건만, 지금은 수만 대군이라니. 이게 다 너와 그 영광스러운 전사들의 업적임을 실감하느냐?”

롤랑은 겸손을 내보이는 대신 웃음을 내보였다. 자신감을 내보이기 위해서.

그러나 오딘이 질문을 던진 순간 그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서 그 우글우글한 인간 무리를 이끈다면, 우트가르트 성채를 함락시키기는 쉬운 일이겠느냐?”

오딘이 바랄만한 대답은 뻔했다. 그래서 롤랑은 그 반대되는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에 풀이 죽었다.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또한 번성하고 발전했으나 거인들 또한 그러하기에. 그 두꺼운 성벽 앞에서 병력이 많음은 그저 군량보급이 힘들어짐을 의미할 것이나이다.”

“예전에도 그러했듯 말이지. 하지만 성벽이 아무리 두꺼운들 정녕 뚫을 수 없겠더냐? 너희에게는 재미난 장난감이 생기지 않았던가? 포라는 물건, 보어조아 그 역겨운 것이 잘 가지고 놀던데.”

그 말에 롤랑은 의문을 드러냈다.

“보어조아를 아십니까?”

그 순간, 오딘의 말에 노기가 서렸다.

“내 잡것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않아도 그 반역자의 이름은 잊지 못하지! 너는 알고 있느냐? 보어조아 그놈은 발할라에 갈 생각을 진작 접어버렸음을? 반역을 저지른 후, 신들이 자기 제사를 받아주지 않자 상심하고는 웬 악신을 모시게 되었음을?”

“설마 로키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놈은 신들의 눈조차 속이고 그리하였다! 그러나 내 눈마저 가리지는 못했지. 나는 물밑의 전쟁을 보고 있었다. 보어조아를 벌하러 오던 함대를 가라앉힌 것은 자연적인 태풍이 아니었어. 뱀이었다. 요르문간드, 그 바다뱀이 아니고서야 그 무엇이 함대를 침몰시킬 수 있었으리? 그리고 로키가 아닌 그 누가 요르문간드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었으리?”

롤랑은 이를 악물고는 중얼거렸다.

“놈이 로키를 섬긴다면······ 배신자라면 마땅히······.”

“벌하겠다고? 내버려두어라.”

오딘의 말에 롤랑이 외쳤다.

“어째서입니까? 놈이 정말 로키를 섬긴다면 그 누구보다 위험한 방해자가 될 것입니다!”

“그건 염려할 필요 없다, 롤랑. 네가 준 반지는 내 귀 또한 좋게 만들어주었다. 이제 나는 여기 매달려 두 로키의 대화를 듣곤 한다. 거인 로키와 악신 로키의 대화······ 둘은 사이가 나쁘더구나.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롤랑?”

롤랑은 생각해보고는 끝내 죄송한 얼굴을 내보였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소서.”

“보어조아 그 보잘것없는 것은 영웅의 행사를 막을 능력이 못 되지. 그러지도 않을 테고. 네가 성채를 공격할 그날, 보어조아는 조금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악신 로키가 그리 명하지 않을 것이니까. 잊지 말거라. 로키보다 위험한 것은 발두르임을.”

“예, 전쟁신이여······.”

울화를 참는 롤랑에게 오딘은 웃음을 내보이며 말했다.

“이제 줄 것을 주어야겠지. 너와 그 수많은 동족이 바친 전쟁은 감사히 받았다. 그 많은 거인들의 넋을 빚어 룬을 빚어냈노라. 어느 가호를 원하지?”

“화완의 가호를 한 겹 더해 주소서.”

“여전히 수르트를 신경 쓰는군. 바라는 대로 해주리라. 뒤돌아서라, 롤랑······.”

이번에도 고통의 시간을 지나 롤랑은 선물을 받았다. 그 피부가 더욱 두꺼워지고 견고해졌다. 이제 웬만한 불꽃은 그 몸을 해하지 못할 터였다.

롤랑은 기쁨에 가득 차 머릿속에서 새로 빛나는 룬을 읽어내렸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뜨고는 외쳤다.

“룬이 새로운 주문을 구성하는군요. 제 해석이 옳다면 이 주문을 통해 위대한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롤랑은 자기가 새로 습득한 주문을 보고 희열에 젖었다. 신내림 주문, 말 그대로 신을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그것도 분신 따위가 아닌 본신을······.

그러나 오딘은 착잡한 투로 말을 끊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신을 불러내다니, 혼자서 입술 좀 달싹인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지. 신 또한 온힘을 다해 준비하고······ 술자가 희생해야만 가능한 일이야. 너는 시도조차 하지 말라. 묶인 나를 불러내려 해봤자 실패할 것이며 그 헛짓의 대가로 너는 죽을 테니.”

롤랑은 실망하다 못해 그 눈에서 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애써 입을 틀어막았지만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오딘은 굳이 탓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롤랑을 돌려보냈다.

*******

눈을 뜬 롤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도하는 자신을 따라 모두들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휘관들도, 병사들도 모두.

그 틈에 롤랑은 나뭇조각을 꺼내 끄적였다.

롤랑 LV 27

- 광전사 LV 15, 성기사 LV 12

근력 9

민첩 8

정신 4(혹은 5)

지혜 4

건강 6

신성 9

* 특기 : 장검 숙련 LV 4, 방패 숙련 LV 3, 중갑 숙련 LV 3, 반격 숙련 LV 3, 전투함성  LV 3

+ 염동력 LV 1

* 주문 : 원소 룬, 축복, 회복, 소생, 정화, 신 내린 무기,

신내림(사용불가)

* 가호 : 초재생, 바람의 화신, 부활하는 자, 불가침 피부, 화완*3 지치지 않는 힘

신내림 주문부터 얼른 적었는데, 결코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롤랑이 기억하기로 저 주문은 12레벨 성기사 주문이었다. 그리고 알론소는 12레벨을 넘었다. 물론 15레벨인 카를 또한.

그 말인즉 발두르의 신자들은 정말로 발두르만큼 위험해질 수 있는 셈이었다. 발두르 본인을 행사시킴으로써 말이다.

롤랑은 착잡한 눈으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저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발두르의 신자가 한가득하다. 지금 주신은 발두르이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롤랑은 모두에게 들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아직 모두 여유가 있는가? 그렇다면 어서 부상자와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하시오!”

그 외침에 현실로 돌아온 전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중에서 비틀거리며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들이 꽤 있었다. 소위 레벨 업, 신을 만나 선물을 받은 모양이었다.

“발두르여, 감사하나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롤랑은 착잡하게 들었다.

‘거인들을 죽이며 얻은 경험치가 쏠쏠했지. 내가 모르는 12레벨에 도달한 발두르 신자가 더 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리고 게임과는 달리 성기사가 아니더라도, 12레벨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예의 주문을 쓸 수 있을지도······.’

그리 잡생각을 하면서도 할 일을 했다. 롤랑 또한 아말릭과 함께 부상자들을 찾아 헤맸다.

내장이 드러난 기사에게 롤랑이 다가갔다. 그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다. 치유의 기도, 내장이 들어가고 그 위에 새 살이 돋아나 덮었다.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기사는 울면서 감격을 표했다.

“롤랑 경께서 직접······ 더없는 영광입니다. 이번 전투의 기억을 자손대대에 물려줄 것······”

물론 부상자는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병사들, 훨씬 많은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롤랑은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저 뒤에 고통을 호소하는 병사들이 많았지만 롤랑은 그 상처를 돌볼 수 없었다.

신음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롤랑은 그 소리를 파묻고자 큰 목소리로 고함질렀다.

“이번 전투에서 죽은 전사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모두들 애원합시다! 발키리 천사들이 그들의 넋을 데려가도록! 발할라에!”

그리고 모두들 외쳤다. 심지어 죽어가는 병사들마저도.

“발할라에!”

*******

승리했으니 바로 도시에 돌아가 연회나 즐길 수는 없었다. 고귀하신 지휘관들은 그래도 되겠지만, 롤랑은 세계수에 남아서 지휘를 계속했다.

롤랑의 지휘에 따라 병사들은 거점을 만들고, 창고를 지었으며, 길을 만들었다. 보급이 원활하도록.

공성전을 준비해야 했다. 결전의 날 비프로스트의 모든 전사들이 참전하기로 약조되어 있었다. 그 인원은 어림잡아 이만육천 명이나 되었다. 준비가 조금이라도 소홀하다면 그 모두 드높은 세계수 위에서 굶어죽고 말 것이다.

“여기도 승강기 설치하면 보급이 쉬워질 텐데. 그람인가 발뭉으로 세계수에 벽 뚫어버리면 가능하지 않나?”

제이슨의 말에 롤랑이 대답했다.

“벽만 뚫는다고 승강기를 설치할 순 없어. 그리고 승강기 몇 대로는 수만 명을 먹일 수도 없고.”

“그래도 없느니 보다는 낫잖아. 게다가 결전의 장인데, 발뭉 그거 다시 달라고 할 수 없냐? 세계수 벽을 녹일 수 있다면 우트가르트 성채의 성문을 녹이거나 하는 식으로도 쓸 수 있을 거 아냐?”

그 말은 타당했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롤랑은 편지를 썼다. 메디아 궁성에, 곧 중요한 전투가 있을 예정이니 성검을 돌려줄 수 없겠느냐는 편지를.

정성 들여 편지를 부친 다음에는 다시금 지휘에 전념했다.

계단 위로 병사들을 보내어 정찰을 지시했다. 망루며 거점의 위치를 염탐하고자. 그러나 성채의 위치며 지형 따위는 조사해오라 시키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롤랑이 기억했기 때문이다. 위층의 지형, 산봉우리 숫자부터 골짜기 깊이까지 기억에 선했다.

이후로는 거인들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계단 앞을 굳게 지키며 기다렸다. 오기로 한 지원군들이 마저 다 도착하기를. 결전의 날 최대한 많은 병력과 지휘관들이 이 층에 서있기를 바랐다.

그리 세계수에서 숙식을 거듭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새로 오기로 한 날, 롤랑은 그들을 몸소 맞이할 준비를 했다. 신들이 보증한 전설의 기사를 만나면 모두의 전의가 끓어오를 테니까.

“순례자들이 옵니다!”

병사의 외침에 롤랑은 갑옷 위에 예복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위풍당당한 자세로 동료들과 함께 자리에 섰다.

이제 전설의 기사로서 위엄 어린 대사를 읊으면 되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저 너머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보였다. 저들이 아마 오기로 한 지원군일 테지만, 롤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리 위로 날아다니는 저 짐승은 뭔가? 날개 달린 것을 보니 독수리인가? 하지만 저토록 큰 독수리라니? 혹시 일개 짐승이 아닌 괴물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무리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 느긋한 것을 보면 괴물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롤랑은 그저 의문스럽게 저들이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저들의 얼굴이 확인된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새로운 전사들이 온다. 모두 힘껏 맞이하라!”

지휘관의 외침에 의장대는 힘껏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원군에서도 응수하듯 웬 소리를 냈는데, 뿔나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내 의장대의 연주를 압도하고 크게 울렸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묘하게 경쾌한 소리, 롤랑은 저 소리를 기억했다······.

지원군이 다가옴에 따라 뿔나팔 소리는 더욱 생생하게 울렸다. 의장대 연주가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의장대를 지휘하던 지휘관은 분노하여 고함질렀다.

“뭐하나! 더 크게 울려!”

그리하여 이쪽 의장대는 더 힘껏 북을 두드리고, 징을 울렸지만 다 소용없는 짓임을 롤랑은 알고 있었다.

이내 지원군의 모습이 드러난 순간, 모두들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의장대를 다그치던 지휘관마저 이기려던 시도를 그만두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섰다.

모습이 드러난 지원군에는 의장대가 없었다. 그저 단 한 명, 한 기사만이 뿔나팔을 쥐고 있었다.

그리폰 위에 탄 기사였다. 더없이 잘생긴 미남자, 자그마치 왕자였음을 롤랑은 알고 있었다.

“아스톨포.”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아스톨포를 태운 그리폰은 뿔나팔 소리에 화답하듯 울부짖었다. 그리폰의 거대한 맹금류의 날개는 정체 모를 빛을 머금고 펄럭였다.

그리고 괴수 아래에 영웅들이 있었다.

발할라의 전사들. 롤랑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선 모두가 그 정체를 알아챘다.

유령 군마에 올라탄 전사들. 그뿐만 아니라 불타는 야수를 비롯한 온갖 괴수들이 탈것으로서 이 자리에 나타났는데, 그 중에는 아무리 봐도 유니콘인 말도 보였다.

그러나 뿔 달린 백마는 그 위의 기수보다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 기사의 손에 들린 칼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기에.

저들을 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집단은 하나였다.

전설의 영웅들, 발할라들의 전사들이 저기 있었다.

< 백사십구 층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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