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사십구 층 - [1] >
알론소는 침대에 누워 책장을 바라보았다. 거기 꽂힌 수많은 기사도 소설들이 보였다.
‘저 잡서들 때문에 다 늙어서 망상증이 왔단 말이지.’
죄다 찢어버리고 싶은 것을 알론소는 애써 참았다.
지금 알론소의 근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지금 와서는 도저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지니게 된 괴력조차 망상의 일부가 아닐까 의심스러웠기에.
정말이지 정신 나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골 지주 알론소가 발할라의 전사들과 함께 싸워왔다니? 황당무계한 기사도 소설이 왜 눈앞에 펼쳐져있단 말인가?
알론소가 기사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수백 년 넘게 침략을 당해본 적 없는 메디아에서 기사란 혈통 있는 지주를 높여 불러주는 칭호에 불과하다.
기사로서 창술을 연습하기는 했지만 멧돼지를 상대로도 써먹어본 적이 없었다. 변변한 법적 분쟁조차 겪어본 적 없는 목가적인 소지주 생활. 아내는 먼저 죽었고 아들들은 이미 상속을 받은 뒤 독립했다.
외롭고 한가했다. 땅은 이미 모두 물려주었지만 보내주는 연금이 넉넉했으므로 고달픈 생활은 아니었다. 생활비를 쓰고도 돈이 남아 모두 취미생활에 쏟아 부었다.
소설들, 기사도 소설들을 사다가 서고를 가득 채웠다.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괴물이며 공주가 나오는 비현실적 이야기들, 실제 기사들과 달리 이상한 모험에나 몰두하는 기사들이 나오는 소설들 말이다.
알론소는 식사할 때마다, 잠들기 전마다 자기가 그 소설에 나오는 기사처럼 활약하는 망상을 즐겨왔다······.
너무 오랫동안 그래왔다. 말려줄 사람 하나 없이.
쭉 망상에 젖어있다 보니 기억이 점차 변했다. 알론소는 자기가 마상시합에서 몇 번 좋은 성적을 거두어봤으며, 취미는 사냥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런 자신은 꽤 괜찮은 기사라고. 실전은 경험해본 적 없어도 막상 싸우면 당연히 잘 싸우리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느낀 순간, 시골 지주 알론소는 거인들과의 최전선에 있었으며 전설의 기사와 전설의 마법사가 그 앞에 서있었다.
그리 싸워온 기억 자체는 더없이 선명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그것이 정녕 현실인지 긴가민가하거니와 앞으로도 그럴 자신이 없었다.
거인과 싸우다니? 동네 덩치 좋은 농부와 싸우라 해도 기겁할 마당에 어찌 그 농부의 두세 배 덩치와 싸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롤랑과 그 무리가 원정을 나간 지금, 알론소는 빠졌다.
핑계대기는 간단했다. 대강 허리가 너무 아프니 뭐니 하면 노환이겠거니 이해해주었으므로.
다시 책장을 노려보았다. 곱게도 정돈된 싸구려 책들,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역시 찢어버려야겠다. 그리 생각한 알론소는 가장 눈에 띄는 책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찢으려던 순간 멈칫했다.
뽑아든 책은 광란의 아마디스였다. 그 표지에는 금박으로 롤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찢어버리다니, 불가능했다. 돌아버린 알론소도, 지금의 알론소도 그럴 수 없었다. 어느 쪽의 알론소가 보기에도 표지 속 기사는 존경스러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알론소는 광란의 아마디스를 다시 정중히 꽂아넣은 다음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습게도 정상이 된 알론소 경은 돌아버린 알론소 경보다 쓸모없었다. 도저히 싸움 나갈 용기도 기력도 없는 판이니.
대체 이 쓸모없지만 초인이 되어버린 늙은이는 무얼 해야 하는가?
*******
롤랑은 거인들과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절반 이상 끼어들었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인 것보다 많은 수의 거인을 홀로 죽여대곤 했다.
병사들이 도움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아군의 물량이 뒤를 받쳐주기에 롤랑은 고립되거나 포위당할 걱정 없이 안심하고 날뛸 수 있었다.
동료와 지휘관들을 이끌고 롤랑은 언제나 선두에 섰다. 그리고 자신의 옛 칼에 거인들의 피를 적셨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딘의 창에 영광 있으라! 모두, 돌격!”
롤랑이 전투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뒤에 따르는 자들이 일만을 넘었지만 아무도 롤랑을 따라잡거나 함께 달리지 못했다. 그 달리는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기에.
뒤에서 보는 아군들이 보기에도 그랬지만 마주 달려오던 거인들의 눈에도 그러했다.
그저 시뻘건 무언가가 커지는 것만 같았다. 그 붉은 돌격에 대비하려던 거인이 도끼를 들어올리기도 전에, 그 시뻘건 것이 다가왔다.
롤랑은 달려오던 속도를 실어 거인의 배에다 칼을 찔렀다.
어억, 하는 비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내장의 감촉이 느껴졌다.
거인이 입고 있던 판금갑옷은 그 칼날을 막지 못했다. 판금은 그대로 살과 함께 뚫려버렸다.
그 칼이 성검 뒤랑달이었기에. 바위에 내려치면 바위를 갈라버리는 전설적인 검.
“난—쟁—이—놈—이—!”
옆에 있던 거인이 포효했지만 롤랑의 몸을 굳게 만들지 못했다. 뒤랑달의 가호가 그 몸뚱이는 물론 귀까지 보호하고 있었다.
롤랑은 시끄러운 거인에게 뛰어들었다. 거인이 기둥 같은 쇠창을 들어 제 머리를 보호했다. 그리고 쨍, 하고 쇠 갈라지는 소리.
롤랑은 공중에서 칼을 휘둘러 창대를 두동강 냈다. 또한 그 아래에 있던 머리통마저도.
허연 뇌수를 흩뿌리며 거인이 뒤로 쓰러졌다. 뇌가 드러난 그 머리통이 지면에 닿기 전, 롤랑은 그 안면을 짓밟고 도약했다. 저기 저 거인들을 향해서.
“오딘을 위하여!”
그리 거인들의 한복판에서 뒤랑달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맘껏.
이제 롤랑은 거인들의 타격을 최대한 흘려내고자 눈치를 보며 싸울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제 롤랑의 힘은 거인들과 동등했고, 축복이 더해진 힘은 거인들을 압도했다. 롤랑이 뒤랑달을 휘두르면 거인들은 무기가 잘리거나, 무기가 찌그러지며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거인을 상대로 롤랑은 강맹하게 공격을 퍼부으면 되었다.
저 앞에서 거인들을 죽여대자니 마침내 아군이 달려왔다.
맨 선두에 선 기사들, 다 함께 달려와 거인들과 충돌했다.
“롤랑을 위하여!”
그 한 번의 충돌로 꽤나 죽었다. 기사들이 달려 나가는 가운데, 그 뒤에서 병사들은 장창을 앞으로 쭉 뻗어 지원했다.
이토록 병력이 많으면 화살을 비처럼 퍼부을 법도 하건만, 그러지는 않았다. 궁수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평범한 화살은 거인이 입고 다니는 말도 안 되게 두꺼운 갑옷은커녕 그 피부조차 뚫을 수 없었으므로.
사실 장창인들 별 다를 효용은 없었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인간 기사도 찔러 죽이기 힘든 법이다. 하물며 갑옷을 입은 거인이라면 성인남성이 창을 들고 아무리 용쓴들 그 갑옷 틈새에 가시를 박는 수준의 타격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거인들이 가시 째로 죄다 짓밟아버리기에는 그 가시가 많았다. 너무, 너무 많았다.
수많은 병사들이 수많은 창을 겹쳐 앞으로 내민바, 창날의 숲이 빽빽이 돋아났다. 혼자서는 거인의 손가락 힘 하나 버텨내기 힘든 인간들이라도 여럿이서 버티고 있으면 거인의 돌격을 어찌어찌 막아낼 만한 저지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창의 숲 사이사이에 괴물들이 끼었다. 신들의 선물을 받아 홀로 거인을 당해낼 수 있게 된 초인들.
거인 하나를 수십 병사들이서 감당하는 사이, 초인적인 기사가 달려와 거인의 목에다 칼을 꽂아 넣었다.
그 위에는 발키리가 날아다니고, 외곽에서는 불타오르는 푸른 야수에 올라탄 흑기사가 검을 들고 돌격했다. 정체불명의 고함을 내지르며.
“원탁 만세!”
흑기사 소환물의 안면은 입가까지 가리개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심히 살피면 그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흑기사는 자신을 불러낸 소환사를 보고 있었다. 제이슨,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 지팡이를 쥔 채 저 앞에서 몸소 싸우고 있었다.
그 힘이 거인 졸개만도 못해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었다. 가끔 밀리는 쪽을 거드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제이슨은 분투하고 있었다.
그 용맹한 모습이 흑기사가 보기에는 흡족했다.
그 즐거운 미소를 거둔 것은 저편에서 비명이 울린 때였다.
한두 명이 아닌 여럿의 비명소리. 사람들이 내지르는 것이었다.
“억······”
병사는 신음 한 번 겨우 내뱉고는 바로 으깨졌다. 용맹한 거인 넷이서 돌격하여 기어이 창의 숲을 돌파해내고 그 너머의 병사들을 짓밟아버린 것이다.
병사들 틈에서 거인들이 거대한 무기를 휘두르자 그 무기에 걸린 병사들의 신체는 어김없이 날아갔다. 무기 끄트머리에 머리가 닿으면 그 머리통이 목에서 뽑혀버리거나 수박처럼 깨졌다.
불과 네 명의 거인이 십 초도 안 되는 시간에 수십 병사들을 산산조각 내었다. 그리고 일 분이 지나면 수백이 죽으리라 걱정한 흑기사가 달려나갔다······.
인간도, 거인도 대규모 병력을 내세운 전투였다. 많은 거인이 죽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인간이 뭉개졌다.
곤죽이 된 병사들의 시체 위로 거대한 거인의 몸뚱이가 쓰러지기를 수백 번 거듭했다. 그리 살덩이가 가득 쌓인 가운데 전투는 끝났다. 인간들의 승리로.
잘라낸 거인의 목을 들어 올리며 롤랑이 고함질렀다.
“이 승리를 천상의 신들께서 지켜보신다!”
모두들 피곤한 와중에도 환호성을 내질렀다. 롤랑, 롤랑! 발두르 만세! 토르에게 영광을, 티날트 영주께 감사를 바친다······.
수많은 환호에 파묻혀 롤랑은 시체들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인들이 지키고자 하던 지형물이 보였다.
계단,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계단이었다. 여기는 백사십구 층이니 다음 층은······.
‘오딘이 있는 층······..’
여기까지 도달한 시간은 생각보다 빨랐다. 혹시 이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웠을 만큼.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롤랑과 군대는 여기까지 다다르면서 수많은 거인들의 전초기지를 불태우고 망루를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 중에 돌로 지은 요새는 거의 없었음을 기억했다. 강철은 물론 석재도 희귀한 이 세계수에서 성벽을 쌓기란 힘든 일이므로.
그동안 인간 군대가 진격하는 와중 거인들은 방어자로서의 이점이 거의 없었던 셈이다.
거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병력은 단단한 요새에 고이 모셔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우트가르트 성채에.’
예전에도 그랬듯, 거인들이 지키는 성채를 뚫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리라.
롤랑은 새삼 불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기도 올렸다. 무릎 꿇고서 가장 위대했던 전쟁신을 입에 담았다.
‘지존자 오딘이시여, 제가 승리하도록 가호해주셨으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당신 덕에 승리한 이 전쟁을 바치나이다······.’
그리고 그 눈이 감겼다.
*******
다시 듣게 된 오딘의 목소리는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졸린 목에서 새어나오는 그 말소리에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이제! 이제 너와 나의 거리는 수직적으로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 시어빠진 심장이 마구 뛰어오르는구나! 이 흥분을 어찌 감추어야겠느냐? 응? 롤랑, 대체 어찌?”
오딘의 기쁨은 롤랑에게 그 무슨 말보다 더 큰 치하가 되었다. 롤랑은 절로 감격하여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다 당신 덕분에 이루어낸 일입니다, 전쟁신이시여.”
“내가 뭘했다고?”
“당신의 존재야말로 무엇보다 큰 힘이나이다.”
“성탑에 갇힌 공주는 그저 멍청하게 있기만 해도 기사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것처럼? 거참 안됐구나. 네 공주 역할은 목이 졸려 혀를 쭉 내민 늙은이라니. 하지만 비록 네가 공주를 구출할 순 없더라도, 공주를 얻을 수는 있으리라! 신왕의 공주를!”
오딘은 지금 자기 딸을 내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롤랑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말했다.
“제 어찌 그런 망극한 생각을······ 제가 감히 분수도 모르고 그런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디 저를 시험하지 마소서······”
“분수를 모르다니, 그야말로 미친 소리다! 내 딸년이 많건만 그 중에서 하나 내준들 뭐 그리 아까울 것인가? 그 어느 신을 짝지어주더라도 이 가장 위대한 기사만 못할 것인데! 딸이 아니라 아들인들 네게 견줄 수 있으랴? 절대 그러지 못하리라! 내 어느 아들이 나서 네 발치에 닿을 충성을 내보였단 말이냐? 이 눈물이 나오도록 만족스러운 상황에 더 요구할 염치야 없다마는, 마침 그 보기 싫은 늙은이도 보이지 않는구나.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론소는······”
“되었다! 네 곁에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니, 더는 실랑이를 벌이지 않겠다.”
< 백사십구 층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