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42화 (142/164)

< 계단 앞 - [5] >

문득 롤랑의 귀에 웬 단어가 파고들었다.

“신의 바람이야.”

“그걸 어찌 아나?”

“함대를 전멸시킨 태풍이라니, 예사로운 일인가? 아니지······.”

롤랑은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항구는 거의 쓰레기장이었다. 떠밀려온 널빤지와 나뭇조각 등이 가득한 가운데 피와 기름이 수면 위를 뒤덮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수백 척의 배가 작살난 것이다.

유일하게 남은 배, 아이스피시의 대장선은 나포된 꼴이 숫제 인간 포로였다. 여러 배에 쇠사슬로 묶여 끌려오는 꼴이라니.

선주 아이스피시 또한 곱게 끌려오고 있지 않았다. 양손이 묶인 채 창을 든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다.

보어조아는 지금 아이스피시를 그저 죄수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는 이유를 롤랑도 알만 했다.

‘더 이상 후환이 두렵지 않다 이거지. 그 많은 병력과 함대가 전멸했으니 몰락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일개 천민처럼 끌려오는 공작, 그 처량한 꼴을 구경꾼들이 지켜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호송단의 선두에는 보어조아가 보였다. 개선행렬을 하듯이 의기양양한 얼굴.

롤랑은 그 앞에 다가갔다. 그리 길을 가로막히자 병사가 창을 꼬나 쥐며 나섰다.

“웬 놈이······”

뒷말은 잇지 못했다. 병사는 갑자기 비명 지르며 배를 움켜쥐고 무릎 꿇었다.

병사의 배가 움푹 파여 있었다. 염동력.

보어조아는 병사를 노려보다가 문득 롤랑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더없이 상냥하고 온화한 얼굴로 물어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롤랑 경. 신병인지 인물 구별도 못 하는군요. 단단히 혼을 내줄 테니 너무 분개하지 마시고······ 이 자리에는 웬일로? 승리를 축하하러 와주신 겝니까?”

“아니, 이의를 제기하러 왔소. 한때 상관이었던 공작을 저런 식으로 데려오는 이유가 뭐요?”

“굴욕을 주기 위해서지요.”

보어조아가 너무나 당당하게 말했기에 롤랑은 일순 말문을 잊었다.

“굴욕을?”

“예. 감히 신들께서 보우하는 도시를 침범하려 하다니? 저자의 죄가 천상에 가닿았으니 지상에선들 용서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죄를 엄히 묻겠다고? 그만두시오. 신분에 맞는 예우를 하란 말이오.”

보어조아는 잠시 뜸 들이더니 말했다.

“이번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일은 이미 다 끝났을 텐데? 지금 당신이 하는 건 그저 분풀이에 불과하고 말이오. 손은 또 왜 묶은 거요? 아이스피시가 풀려나면 괴력을 발휘해 이 자리의 모두를 추풍낙엽처럼 베어넘기기라도 할까봐?”

“신에게 반역한 죄수라면 마땅히······”

“제발 그러지 마시오. 자비를 베풀길 청원하오, 보어조아. 지금 이 순간 아이스피시는 그 누구보다도 무력하오. 더 이상 수치를 주지 말고, 무사히 돌려보내 주길 바라오.”

보어조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나서다니, 대체 왜?

롤랑 본인도 그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깊은 관계도 아니거니와 저토록 몰락한 마당에 그를 위해 나서준들 마땅한 보답은 받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보고 있기 착잡했다. 왠지 몰라도 매우.

롤랑과 보어조아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편 보어조아는 생각했다.

주변에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롤랑 경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기는 뭐하다고.

모두들 신들이 도와 승리했노라 떠들고 있는 상황 아닌가. 그 마당에 신들을 대변할 발할라의 전사가 말하는 것이다.

이내 보어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떨떠름했지만 그 안면에 관용을 드러내려 애쓰며.

“롤랑 경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기꺼이 따르지요.”

“관용에 감사하오.”

롤랑이 고개 숙이자 주변이 술렁거렸다. 보어조아는 당황하여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고개를 드세요. 제 잠시 승리의 기쁨에 들떴던 것 같군요. 어리석은 짓을 바로잡아 주셔서 더없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보어조아도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겸손을 보이는 것은 귀족다운 일이었다.

이후 일은 롤랑이 바란 대로 되었다.

보어조아는 사람들 앞에서 외쳤다.

“이 승리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신들께서 도우신 결과였으니, 내 보상을 바랄 자격이 없으리라! 내 이번 승리에서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으리라!”

그 선언의 의미는 간단했다. 사로잡은 아이스피시에게서 몸값 따위를 요구하지 않고 무사방면 해주겠다는 것.

모여든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누군가는 아예 감격했는지, 바닥에 무릎 꿇고는 신들에게 기도 올리기 시작했다.

이 종교적이고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보어조아는 자기 인격의 훌륭함을 보였음에 만족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물러갔다. 고귀한 포로는 남겨두고서.

롤랑은 남겨진 아이스피시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거기 쏠렸다.

위대한 영웅이 신의 뜻을 거역한 패배자에게 접근하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그 대치를 흥미롭게 생각하고는 환호하고 있었다.

롤랑은 그들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그 모두를 노려보며 짧게 포효했다.

“썩 꺼—져—!”

천둥이 울렸다. 다가오던 사람들은 뒷걸음질치고, 나자빠지거나, 아니면 아예 혼절했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롤랑은 다시금 포효했다.

“안 들리나? 십을 센 후에도 남아있는 개자식은 손수 내장을 드러내주겠다. 십, 구—!”

그제야 사람들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땅을 기면서까지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롤랑은 아이스피시를 바라보았다.

방금 그 포효의 바로 옆에 있었기에 아이스피시 역시 떨고 있었다. 어젯밤 비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잔뜩 젖어있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더없이 처량했다. 도저히 함대를 몰고 오던 군주로 보이지 않는 모습.

롤랑은 무어라 말을 걸려다가 말고 아이스피시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역시 그 군주와 함께 방면된, 아이스피시의 얼마 남지 않은 부하들을 데리고 저택에 돌아왔다.

*******

“보어조아가 진짜 뭘 한 건가?”

제이슨의 말을 롤랑이 받았다.

“하긴 뭘 해?”

“신에게 제사를 바쳐 폭풍을 불러 일으켰다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신들이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초월적이면 인간군대가 왜 필요해?”

“모르는 거지. 가능할 수도 있잖아? 신들의 능력 상한을 우리가 어찌 안다고.”

롤랑은 반박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한숨 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모르지.”

아이스피시와 그 수하들은 롤랑의 저택에 며칠 머물다가 가장 빠른 배편으로 떠나기로 했다.

아이스피시에게는 가장 좋은 방을 내주었는데, 공작 예우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환자인 탓이었다.

아이스피시는 앓아누웠다. 밤새 젖어있던 탓인지, 아니면 전멸의 충격 탓인지 몰라도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병문 차 롤랑이 그 방에 들어갔다.

아이스피시는 기침하다가 겨우 몸을 뒤틀어 롤랑을 보았다.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롤랑이 그것을 만류했다.

“그만두시오. 누워계시면 돼.”

“어찌······”

“편히 쉬며 기운을 차리셔야지. 다시 배에 타셔야 할 몸인데.”

아이스피시는 한동안 감사의 말을 마구 내뱉었다. 과분한 은혜니 뭔 하면서. 그러다가 흐느끼며 자기비하를 시작했다.

“정말 과분한······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자격이 없는 놈인데······ 이 몸이 부덕한 탓에 같이 오던 치들은 죄다 빠져죽고······ 이게 어디 대오공국 공작이 벌이는 일이랍니까?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놈이 귀한 자리에 앉으니 모든 일이 이 꼴입니다!

쫓겨 오듯 비프로스트에 왔습니다. 대오공국에서 웬 건방진 놈 손봐주려고 군을 일으켰다가······ 제 인덕이 하도 없는 탓에, 웬 놈들이 죄 연합해서는 맞서려 들었습니다. 그때 전 그저 겁을 먹어서는······ 도망쳤습니다! 전쟁에 쓰려던 군대를 이 비프로스트에 데리고 왔습니다. 처음부터 성전을 위해 모은 군대인 것처럼 굴어 체면 유지하려고······”

롤랑도 전에 들어본 소문이었다. 아이스피시가 대오공국에서 자신에게 맞서려던 연합군을 피해 비프로스트에 온 것이라는 소문. 그 소문이 사실로 밝혀진 역사적 상황이지만 롤랑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아이스피시의 고해성사는 계속되었다.

“그리 끌고 온 병사들은 끔찍하게 타죽었습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악룡의 불에, 못난 공작을 따라온 탓에 개죽음을······”

“그건 그저 불운이었소. 악룡이 뭔 놈의 심판자라고 못난이를 판별하여 따로 태워 죽인단 말인가?”

“애초에 그들을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 병력이 없었더라면 세계수 정벌은 수십 년 늦춰졌을 터요. 웬 코끼리 괴물들이 지축을 울리며 다가온 날, 거기 있던 모두가 죽었을 거고. 나를 포함해서 말이외다. 당신과 그 병력은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었소, 공작. 나와, 비프로스트와, 신들에게도.”

“그럼 이번 일은요? 신들께서 노해 이 불충한 공작을 벌하시매, 거기 휘말린 죄 없는 젊은이들은요?”

“그건 신벌이 아니었소.”

“그럼 대체 뭐랍니까?”

“불운이오, 공작. 그냥 불운. 당신은 그저 운이 없었어.”

“운이 없어서 몰살을 당한단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 살다 보면. 운명의 여신의 계획을 그 누가 알겠나.”

아이스피시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롤랑이 입을 열었다.

“절망하지 말라곤 말 못하겠소. 절망스러운 불운이었으니. 하지만 자책하진 마시오.”

“아니······ 그럴 수가······ 제가 못나 도망쳐온 것을 시작으로 이 참상이 벌어졌는데······ 저 하나 못나서 모든 게 망가졌습니다. 망쳐먹는 아이스피시가 모든 걸 망쳤습니다! 수만 젊은이들의 삶도, 제 가문도 모두! 고향에 돌아가면 가문 사람들은 절 더 이상 가주로 취급해주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 망쳐먹지 말라고 골방에나 모셔둘 겁니다. 그리 편히 침대에 누워서 죽어 헬에 갈 겁니다. 결코 고귀한 죽음은 못 될 겁니다. 패배자의 죽음, 딱 그 꼴일 겁니다······.”

“설령 헬에 가더라도 당신을 위한 좋은 자리가 마련돼 있을 거요, 공작.”

“망쳐먹는 아이스피시를 위한 자리요?”

“그 악명에 얽힌 소문은 익히 들었소. 그러나 혹자는 이렇게 말하더군. 대오공국에서 당신의 병력이라면 똘똘 뭉친 군소영주들의 연합과 대등했을 거라고. 분명 치열하고 오래갔을 전쟁을 당신이 피해준 덕에, 대오공국이 끔찍한 내전의 위험에서 벗어난 거라고. 그 덕에 수많은 목숨이 살아났노라고.”

사실 롤랑은 그런 평가를 듣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즉석 창작해낸 말일 뿐.

과연 우스운지 아이스피시는 피식 웃었다.

“어느 병신이 망신스러운 도망행위를 그리 포장해준답니까? 제가 무슨 돈이라도 바친 줄 알겠군요.”

“그리 생각하는 병신은 당신 눈앞에도 있소, 공작.”

롤랑이 아이스피시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문득 롤랑은 아이스피시의 눈이 자기 눈과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그 초월적인 시력으로는 남의 눈에 비친 자기 눈 색깔이 또렷하게 보였기에.

롤랑이 말했다.

“끝이 어쨌건, 당신의 싸움은 끝났소. 이제 돌아가시오. 돌아가서 그대 가문과 영토를 챙기는 일에 몰두하시오. 그러면 발할라는 아니더라도 그 못지않은 곳에 갈 수 있을 거요. 훌륭한 넋이야말로 모든 신들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니.”

아이스피시는 롤랑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아이스피시는 열이 올랐지만 끙끙거리지 않고 편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자기 수하들을 이끌고 배에 올랐다.

저택에 장문의 감사 편지와 웬 칼 한 자루를 남겨두고서.

“뭐야, 그거?”

제이슨의 물음에 롤랑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몰라. 편지에 쓰여 있기론 작별 선물이라던데.”

“룬검인가? 뽑아봐.”

롤랑은 그 말을 따랐다. 칼집에서 검신을 뽑아낸 순간, 염동력과 같은 막이 그 몸을 감쌌다.

이 마법적인 감각에 롤랑은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모지가 이쪽을 돌아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모지는 그 칼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뒤랑달?”

*******

< 계단 앞 - [5]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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