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41화 (141/164)

< 계단 앞 - [4] >

비프로스트에 온 원정대는 제 역할을 해냈다. 세계수에 막 오른 자들은 처음 보는 괴물들과의 흉흉함에 당황하고 겁에 질렸으며 심지어 달아나기도 했지만, 그 힘겨운 전투의 대가로 신과 마주할 수 있으며 자기 사후세계를 준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

또한 직접적인 선물, 그러니까 싸움을 거듭하면 초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학자들마저 매료 시킬 혜택이었다.

롤랑은 그 새로운 순례자들을 선두에서 이끌었는데, 새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권위를 다시 획득하고자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발할라에서 내려온 전설의 기사임을 증명하고자 영웅적으로 활약할 필요도 없었다.

순례자 중에는 강력한 인물들이 많았다. 귀족들과 순례군 지도자들, 그 모두가 롤랑의 권위를 존중했다. 심지어 발할라의 전사들이 내려왔다는 허무맹랑한 말에 혀를 내둘러야 할 성직자들까지도.

옛날과는 명백히 다른 반응이었다.

얼핏 듣기로는 신들이 다시금 신탁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신탁의 내용 중에 지상에 강림한 발할라의 전사 롤랑의 존재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롤랑으로서는 진작 그래줄 것이지, 하고 투덜거리기 전에 아연해질 일이었다.

신전에 소환된 영웅들은 실제 발할라의 전사가 아닐 터였으므로. 아서 왕에게 오스론이 직접 그리 밝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신들이 왜 그런 신탁을?

대강 추측하기로 신들로서는 원정대에 구심점을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신들이 인정해준 영웅이라면 그 권위로 인간들을 한데 묶을 수 있을 것 아닌가.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신들이 대놓고 거짓말을 하다니? 게다가 발두르에게 또 다른 의도가 숨겨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어쩔 것인가?

롤랑은 신들의 의도대로 행동했다. 전설적인 영웅으로서 모두를 이끌어 트롤들을 쓰러뜨리고, 끝내 거인들의 영토까지 인도했다.

그러기 위해서 총사령관 따위 직함을 달고 모두를 지휘할 필요는 없었다. 뭇 장군들은 어쨌건 자기 지휘권을 보존하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롤랑은 그저 그 장군들에게 목적만을 전달해주면 되었다. 그러면 모두들 자기 병력을 이끌고 괴물과 거인을 향해 뛰쳐나갔다. 그 거대하고 흉포한 죽음을 향해서.

한 거인을 죽이려거든 인간 수십 명, 혹은 백 명이 우습게 죽어나갔다. 그 많던 병력이 거인들의 영토에 발 디딜 때마다 잔뜩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당장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다.

어쨌건 인간은 온 대륙에 들끓는 종이요, 좁은 세계수와 추운 요툰헤임에만 사는 거인들보다 그 개체수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한 순례자 군단이 전멸하면 다음 날 새로운 군단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그러니까 더 많은 병력을 불러모으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신들은 신탁을 열렬히 내리고 있었다.

그 신성한 명령에 따라 제국에서, 메디아에서, 여러 왕국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물론 열강의 대표 대오공국에서도.

지금도 대오공국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실은 함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역시 순례자였으나, 비프로스트 주민들은 근심했다.

함대의 주인은 아이스피시 사령관이었다. 대오공국의 공작,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누구인가 하면 황제보다 먼저 언급되는 인물.

*******

아이스피시 사령관이 복수하고자 함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은 비프로스트에 널리 퍼졌다. 일설로는 그 수가 일만을 넘어 이만에 가깝다고 했다. 또한 그 중 절반은 오합지졸 용병 무리가 아닌 정예 상비군들이라고. 얼핏 듣기에는 허무맹랑했으나 아무도 그 주장을 우습게 여기지 못했다.

그런 대군에 맞설 수 있을 것인가?

당장 비프로스트에는 병력이 많았으나 보어조아의 편은 적었다. 아이스피시 사령관이 보어조아에게 감금당했을뿐더러 그 동맹은 별 다른 명분 없이 자리를 빼앗겼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마당에 대오공국의 공작과 척지면서까지 편들어줄 순례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 강력하고 원한에 찬 함대가 다가오는 지금, 보어조아가 찾아오리라고 롤랑은 예상했다.

과연 저택에 찾아온 보어조아가 말했다.

“놈과 그 군대가 오면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롤랑의 대답은 뻔했다.

“미안하지만 안 될 일이오. 발할라의 전사씩이나 돼서 사사롭고 정치적인 싸움에 끼어들 수야 없지.”

롤랑은 그 거절에 덧붙일 말들을 미리 잔뜩 준비해둔 바였다. 어떤 명분을 꺼내들든, 혹여 협박을 하든 응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준비가 무색하게 보어조아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말했다.

“천군만마와 같은 영웅을 한편으로 둘 수 없다니,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어쨌건 알겠습니다, 롤랑 경.”

저토록 깔끔하게 거절을 받아들이다니? 의외의 반응에 롤랑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거절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나?”

롤랑이 묻자 보어조아가 대답했다.

“뭐 그렇지요. 아무튼 중립, 맞습니까?”

“그럴 거요.”

“그렇담 됐습니다. 만족합니다. 제 편도 아니겠지만 아이스피시의 편도 아니실 거라 이거죠. 제 어찌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더니 보어조아는 씩 웃었다. 처음부터 아이스피시의 편이 되지 않으리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잠시 후 보어조아는 물러갔다.

저택의 문을 닫고서 롤랑은 안도했다. 이내 방에 돌아와 유저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고비를 넘겼네. 보어조아가 참전을 강요할까봐 걱정했는데.”

제이슨이 비웃었다.

“감히 신들에게서 보증 받은 영웅을 핍박해?”

“보어조아라면 그럴지도 모를걸. 천하의 대오공국 공작을 적으로 만들어놓고 태평한 작자 아냐?”

그 말에 제이슨은 대꾸하려다 말았다. 그럴 듯했으니까. 제이슨은 그저 중얼거렸다.

“하기야 보어조아 그 새끼, 머리가 아니라 좆으로 생각하는 거 같으니까. 강간하는 새끼들이 후환 생각하지 않고 일단 좆부터 휘두르고 보는 것처럼······ 그리 좆대로 굴었으니 이제 좆될 시간이군?”

좆, 좆, 좆. 그 더러운 단어를 내뱉는 제이슨의 옆에 모지가 있었다. 얼마 전이라면 바로 윽박 지를 법도 하건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어쩐지 얼마 전부터 모지는 기운이 없었다. 제이슨을 구박할 기운마저 상실한 것처럼.

이후로도 롤랑과 제이슨이 잡담하는 동안 모지는 거의 끼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이길 것 같나, 모지?”

보다 못한 롤랑이 일부러 말을 걸어서야 모지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거야 모른다.”

“왜?”

“세상일은 모르는 것 아닌가. 운명의 여신들이 아니고서야.”

롤랑은 잠시 긴가민가했다. 마법사다운 현학적인 대답인가?

아마도 아닐 터였다. 그저 적당한 대답을 내놓은 것이리라.

저토록 신경 쓰이게 변화한 동료는 모지뿐이 아니었다. 모지가 기운을 잃은 시기와 동일하게 알론소도 축 늘어졌다.

요새 알론소는 세계수 원정에 자주 빠졌고, 저택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기운이 없었다······.

뭐 어쨌건 지금은 상관없었다.

보어조아의 함선들이 도착하기 며칠 전, 롤랑은 저택의 하인들에게 가족과 친지들을 저택에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아이스피시의 군대가 도시를 점령한 순간, 혹시 있을지 모를 약탈에 대비해서.

자기가 이끄는 병사들도 안전한 장소에 모여 있도록 했다. 그러고는 저택의 모든 문과 창문을 걸어 잠갔다.

저녁을 먹으며 롤랑이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보어조아가 몰락한단 말이지? 내심 아쉽기는 하군. 보어조아는 그 인성이야 어쨌건 세계수 원정에는 훌륭한 조력자였지. 그 염동력자들도······”

그 말을 받은 것은 아말릭이었다.

“아이스피시가 보어조아를 죽이지 않고 강제종군을 시키면 좋겠는데요.”

“그거 좋군.”

롤랑은 한가로이 생각했다. 아이스피시에게 은혜를 입혀두었으니, 보어조아를 앞으로는 백의종군 시키도록 권유해볼까?

저녁을 먹은 뒤로는 할 일이 없었다. 모두들 그저 기다렸다. 도시가 점령되고, 영주가 바뀌기를. 혹시 점령 후 약탈행위가 심하다 싶으면 끼어서 중재할 계획도 있었지만 그것은 전투가 끝난 후의 일이었다······.

밤이 깊어짐과 함께 창문 흔들리는 소리가 울렸다. 걸어 잠근 문과 창문을 모래바람이 쉼없이 두들겼다.

롤랑은 자다 깨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을 노려보았다.

‘약탈인 줄 알고 얼른 깨어났더니.’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비프로스트에 폭풍이 휩쓸었다. 주변이 사막인지라 모래를 동반한 폭풍이었다.

심각한 봉변은 아니었다. 모두들 소란을 예상하고 미리 자기 집에 들어가 문과 창문을 굳게 걸어 잠근 뒤였기에.

그리고 비프로스트는 조용한 아침을 맞이했다. 모래바람은 이미 그쳤지만 그 흔적이 고스란했다. 길거리에 모래가 잔뜩 쌓여있었고, 창문 몇 개가 깨져 있었다.

점령군이 오기도 전에 벌써부터 약탈 당한 듯한 꼬락서니라니. 불길했다.

그러나 소란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로는 그저 조용했다. 몇 시간이고.

그 고요에 모두들 의아하던 차, 누군가 밖에서 문을 마구 두들겼다.

혹시 약탈이 시작된 것인가 싶어 롤랑이 문에 대고 물어보았다.

“무슨 용무요?”

그리고 추종하던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롤랑 경!”

“아······ 왜 왔소? 지금 거리를 돌아다니면 위험할 텐데?”

“위험하지 않습니다. 다 끝났어요!”

롤랑은 눈을 크게 떴다.

“다 끝났다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던데, 무혈입성 했단 말인가? 보어조아가 전력 차를 보고 바로 백기를 올리기라도 했나? 하지만 수십 차례 포성을 들었는데? 전투가 있었는 줄······.”

“아니, 아닙니다. 롤랑 경! 물론 포격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일방적인 것이었습니다. 보어조아는 이미 반쯤 전멸한 함대를 상대하면 되었습니다. 침몰하기 일보직전이던 아이스피시의 함대가 우연으로라도 항구에 정박하지 못하도록 포격을 갈겨줬을 뿐······”

이후 기사가 한 말을 요악하자면 간단했다.

아이스피시의 함대는 전멸했다.

*******

비프로스트에 모래폭풍이 휘저은 밤, 항구와 바다에는 모래바람 대신 비바람이 불었다. 요란한 정도가 아니라 광포하게.

그날 바다를 휩쓴 것은 태풍이었다.

순풍을 타고 오던 아이스피시의 함대는 항해를 멈추고 밤을 보내던 중이었다. 선원과 병사들 모두 잠든 사이, 별 다른 전조도 없이 재해를 맞이했다.

바다가 분노한 밤이었다.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성난 파도는 거대한 함선을 뒤집고 단단한 노를 부쉈으며, 돌풍은 얌전하게 접혀있었던 돛을 찢어발겼다.

그리하여 항구에 드러난 아이스피시의 함대는 거의 파도에 떠밀려오다시피 하던 차였다. 그저 육지를 애타게 바라던 거지꼴 함대를 보어조아의 포병대가 반겨주었다.

그리하여 항구에 닿은 것은 오직 아이스피시가 탄 대장선 한 척뿐이었다.

비프로스트 사람들은 모두들 그 현장을 구경하러 항구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신들께서 노한 게요. 신들이 가호하는 도시를 침략하러 오다니······”

“보어조아가 이미 패악을 부렸으니 공격해올 명분은 충분하지 않았나?”

“그런들 하찮은 인간들의 사정일 뿐이야. 그런 원한을 가지고 감히 신성한 대의를 망치려 드니까 그런 꼴을······”

< 계단 앞 - [4] > 끝

ⓒ 검미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