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단 앞 - [2] >
물론 여기서 계단지기 노릇이나 계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인들이 피해를 보면서까지 끊임없이 습격해오는 이유야 뻔했다. 정찰을 꾸준히 하면서 이쪽을 지치게 만들려는 것이리라.
아직 롤랑은 탈진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리 되고 말 것이다.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은 간단했다.
대규모 지원군.
보어조아가 말하기로는 이미 각국에서 서신이 도착해 병사들을 들여도 될지 문의해왔다고 했다. 또한 대오공국에서도 다시금 순례자들이 모집되었다고.
현실적인 길보도 있었다. 얼마 전에 소식이 전해져왔기를, 지금 비프로스트에 웬 귀족이 병력을 이끌고 왔다고 했다.
지금 보어조아가 세계수를 내려간 것도 예의 원정대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롤랑으로서는 제발 보어조아가 환영식이니 뭐니 하는 것은 집어치우고 가능한 빨리 그들을 이 전선에 보내주기를 바랐다.
롤랑과 알론소가 방벽 앞에 발을 디뎠다.
야영지에서 또 다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롤랑은 손이라도 흔들어주려다가 그만두고 막사에 들어섰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가죽위에 누워 짧게나마 잠을 청했다.
*******
모지는 잠든 롤랑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웬 병이 있었다. 함부로 열지 못하게 입구를 단단히 막아둔 병.
병 안에 든 것은 전에 구해둔 샘물이었다.
아직 롤랑은 저 샘물을 마시지 않았다.
본래 모지가 샘물을 구하려던 목적을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었다. 모지는 단지 롤랑이 후환 없이 미쳐 날뛸 수 있도록 저 샘물을 구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모지는 저 샘물에 깃든 효능, 그러니까 이성을 되돌리고 머릿속을 깨끗이 닦아내는 그 효능이 거의 모든 정신적 결함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치매나 정신병이라든가. 마법적인 환영이라든가.
혹은 영웅의 정신을 혼탁하게 만드는 이세계 출신 영혼이라든가.
영혼이건 뭐건 어차피 고결한 정신을 망치는 이물질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니 샘물의 효능이 롤랑의 몸을 차지한 한국인 현성의 인격을 옅게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아직 그 효능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물론 롤랑에게 마시도록 할 필요 없이, 그 효능을 시험할 더 쉬운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모지도 알았다.
모지 본인이 마시면 된다. 왕은지의 인격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영향마저 사라지는지 확인할 수는 있을 것 아닌가.
그리 생각한 모지는 샘물이 든 병에 손을 가져갔다.
마개를 연 다음 그 목을 잡았다. 그리고 들어 올린 순간 그 손이 덜덜 떨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결국 모지는 병을 입에 가져가지 못했다.
샘물을 마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체 왜? 왕은지를 죽이기 싫어서?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자살이 될 테니까?
이미 죽고 없는 여자를 지우는 것이 왜 자살이란 말인가? 그리 의문이 들었지만 다 허사였다.
모지는 한참동안 병을 노려보았다.
‘이대로라면 롤랑에게 마시도록 할 수도 없는데. 본인이 겁나서 못 마시는 걸 어찌······ 차라리 제이슨에게? 아니, 지금도 천둥벌거숭이인데 이아손의 인격이 부활한들 나아질 것 같지 않군.’
모지는 병의 내용물을 쏟아버리려다 말았다. 바로 그러기는 아까웠으므로.
대신 마개를 대충 닫아두고 한 구석에 치워두고는 잠을 청했다. 그 역시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다. 끔찍하게 피곤했다······.
알론소가 막사에 들어온 것은 잠시 후였다.
“롤랑 경? 제이슨 경이······”
말하다 말고 두 영웅이 잠든 것을 보았기에 알론소는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나가려던 차, 웬 병이 보였다.
술인가?
다가가서 냄새를 맡아보니 그것은 아니었다. 물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마셔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전투를 치르고 온 지금 알론소는 몹시 목이 말랐다.
그래서 마셨다.
*******
“롤랑 경! 롤랑 경······”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롤랑은 눈을 떴다. 더 잠들고 싶은 충동이 강렬했지만 얼른 몸을 일으키고는 입을 열었다.
“또 습격인가?”
“예! 그리고 심상치 않은 게······ 악마가 말하기를······”
횡설수설. 더 기다리지 않고 롤랑은 막사 밖을 나섰다.
아스타로트가 그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피막이 달린 날개를 접고 지상에 내려선 악마의 모습.
“악마여, 무엇을 보았나?”
롤랑의 물음에 아스타로트가 대답했다.
“거인 병력. 사백이 넘는 규모더군. 직접 전해주는 게 낫겠다 싶어 직접 왔다.”
롤랑은 말 더듬지 않기 위해 애썼다.
“고맙군, 악마.”
그러면서 표정을 관리했다. 남 앞에서 경악을 드러내지 않고자.
사백 병력이라니? 수십과의 싸움도 힘겨운 판에 그 규모를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끔찍한 소식이지만 어떻게든 주저앉지 않았다. 어쨌건 롤랑도 예상한 일이기는 했으니까.
거인들로서는 소규모 부대를 보낸들 별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죄 살해당하는 마당이었다. 그런데도 계속 조금씩만 부대를 보내 이쪽에 경험치를 헌납해줄 리 없지 않은가. 인간 병력이 적다는 것도 슬슬 눈치 챘겠다, 거인들이 아예 병력을 동원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촉박한 상황이었지만 롤랑은 천천히 뿔나팔을 집었다. 그리고 불었다. 야영지의 모두에게 들리도록 세게.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웬 졸병이 부는 줄 알았는지 막사 곳곳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모두 지쳤고 잠을 방해받기 싫은 것이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불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계속 불자니 롤랑이 부는 힘을 견디지 못한 뿔나팔이 부서져버렸다. 그래도 그 보람이 있어 야영지의 모든 전사들이 한 데 모였다.
롤랑의 손에 들린 부서진 나팔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기사들도, 병사들도 상황이 삼상치 않음을 눈치 챘다.
롤랑의 옆에는 두 영웅이 서있었다. 모지와 제이슨. 모지는 평상시 차림 그대로였지만 제이슨은 평소 잘 입지 않던 두꺼운 갑옷에 예비용 칼까지 찼다.
‘소환물 하나가 사라져 그 전력이 줄어든 몫을 직접 싸워서라도 채워야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긴장이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기사와 병사들 앞에서 롤랑은 입을 열었다.
“성전에 임한 전사들이여, 거인 군대가 몰려온다!”
그 말에 병사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야 충격적인 소식이었으니까. 열 명씩 올 때도 잔뜩 죽어나가던 판에 군대라니?
그 소식이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않기를, 그리하여 대규모 탈주와 전선붕괴로 이어지기 않기를 롤랑은 바랐다. 그래서 대비를 해도 모자랄 마당에 연설을 하기로 했다.
롤랑은 계속 외쳤다.
“강력한 적들이 몰려온다! 분투한들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적들이! 그 적들에 맞서 오늘 우리는 이곳을 지키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대들, 그리고 나 또한 죽을지 모른다! 분명 많은 자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 순간 롤랑이 신호를 보내자 제이슨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발키리가 두 날개를 펴고 천천히 지상에 내려왔다.
싸구려 연출. 자조하며 롤랑은 계속 외쳤다.
“그 운명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파멸이 아닌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하리라! 육 잃은 전사들을 받아들이고자 발할라의 문이 활짝 열려있으리라! 그러니 싸워라! 지금도 날아다니고 있을 발키리들에게 싸우다 죽는 모습을 보여라! 발할라를 위하여!”
맨 먼저 모지가, 제이슨이 외쳤다.
“발할라를 위하여!”
그리고 기사들이, 병사들이 외쳤다.
“발할라를 위하여!”
롤랑은 그 외침이 멎기를 기다렸다. 문득 보니 아말릭은 가장 열렬히 외치고 있었다.
“발할라를······”
그러나 그 옆에 서있는 알론소는? 입 다물고 있었다. 평소라면 가장 흥분해서 외쳐댈 노인인데 어째서?
‘자다가 깨서 너무 피곤한 탓인가?’
의아했으나 롤랑이 신경 써줄 상황은 못 되었다. 저기 거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롤랑은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전사들이여, 죽음을 향해 진군하자! 발할라의 기사를 따르라!”
******
롤랑과 영웅들, 기사와 병사들이 마주한 거인 병력은 악마가 경고해준 규모였다. 사백이 넘어 보이는 군대.
그러나 악마가 말해주지 않은 사실이 있었으니, 바로 그 군대를 이룬 거인들의 면면이었다.
우선 서리거인 유드문터스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선 거인들도 유드문터스 못지않게 거대하고 험상궂었다.
놈들의 흉악한 모양새를 본 롤랑의 뇌리에 웬 게임 용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예 몬스터.
롤랑은 50층에서 다리를 가로막고 있었던 거인들을 떠올렸다. 고향을 떠나 지상 가까이 내려온 거인들답게 그들은 투지에 불탔고 수많은 기사들의 도전을 물리칠 만큼 강력했다.
심지어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던 거인, 놈은 지금 생각하기에도 괴물이었다. 당시에는 반칙 같은 무기를 써서 쉽게도 이겼지만 지금 다시 싸우려면 애먹지 않을까?
그리고 롤랑은 어느 트롤 전사를 떠올렸다. 난데없이 맞닥뜨린 그 트롤은 이상할 만치 강력해서 롤랑이 광기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처럼 같은 종족 중에서도 유독 강력한 적들이 존재했다. 인간들 중에서 롤랑을 비롯한 영웅들의 능력이 유별나듯이. 거인 유드문터스만 해도 그렇지 않던가.
‘그리고 저 거인들 중에 그런 놈들이 여럿 섞여있을지도······.’
우지끈, 쾅. 우르릉, 쾅. 거인들이 다가옴에 따라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까지 온 병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정에 공포가 깃들었다.
롤랑은 뭔가 해볼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외쳤다.
“거기 군을 이끄는 지휘관은 누구인가?”
그리고 익숙한 거인이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나 유드문터스—다.”
“일개 전사가 아니었나?”
“훌륭한 전사는 훌륭한 지휘관이기도 한—법, 아닌—가? 그래서 왜 불러냈나, 롤—랑?”
“지휘관 대 지휘관으로 겨루길 원한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의 기사이자 전쟁신의 대전사, 롤랑이 거인 전사 유드문터스에게 도전한다!”
일부러 큰 목소리로 그리 외쳤다.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도 잘 들리도록.
이 상황이 어쩌면 몰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상황을 하나의 연극처럼 연출해야 했다.
유드문터스가 말했다.
“지겹—군. 전투에 앞선 결투? 사실 너희 기사들도 잘 그러지 않는다—는 걸 안다. 롤—랑. 나는 너희에 대—해 잘 알아. 직접 부림까지 받은 몸 아닌—가?”
“염탐하고자 소환에 응했던 것인가?”
“염탐꾼 취급은 하지 말—라. 내가 부림당한 이유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영혼을 모으기 위해—서. 너와 네 동료들과 싸우며 원하던 것을 많이 얻었—지. 썩 나쁘지 않았—어. 썩 나쁘지는······.”
문득 유드문터스가 롤랑의 뒤에 선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작별인사도 못했군. 너, 괜찮은 놈이었—다.”
제이슨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래, 뭐 나도······.”
“그러니 널 죽이고 그 죽음을 애도—해주마. 전 동료로—서—!”
헛된 도발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으니까. 제이슨은 공포를 잊고자 욕설을 지껄였다.
“저 십새끼가 참 고마운 걸 해준다네. 트롤 좆새끼, 씹할.”
롤랑이 물었다.
“그래서 도전은? 받아들일 텐가?”
“내가 받아들일 이득이 뭔—가—?”
“설욕이지. 저번 패배를 설욕할 기회 아닌가?”
롤랑의 말에 유드문터스는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을 구겼다.
“저번에 난 지지 않았—어.”
“아니, 너는 졌다. 그리고 또 질까봐 두렵지 않다면, 덤벼라. 유드문터스.”
그리 말하면서도 롤랑은 초조했다. 너무 값싼 도발이라 자신조차 절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기에.
그러나 잠시 간의 고심 끝에 유드문터스는 말했다.
“좋아, 롤—랑. 덤벼라. 다 끝내—게—!”
롤랑은 앞으로 나가면서 생각했다.
삼국지에서 자주 나오던 일기토. 그것을 어찌 재현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유드문터스는 단칼에 죽지 않는 몸이니 싸움은 쓸데없이 길 것이다. 롤랑으로서는 아군이 싸움구경을 하면서 지친 가슴을 쓸어내린 뒤, 결국 영웅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길 바랐다.
물론 계획대로 잘될지 어떨지는 모른다. 이미 지치고 지친 롤랑을 혹시 유드문터스가 이길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싸움은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니.
그리고 롤랑이 긴 싸움 끝에 유드문터스를 죽이더라도 상황이 썩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군의 사기가 약간 오른들 그 전력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결국 애써 이긴들 그저 정예 거인 하나를 죽인 것으로 끝일지 모른다. 어쩌면 자기네 지휘관을 잃은 거인들을 격분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롤랑은 칼을 겨누고 자리에 섰다.
유드문터스도 자리에 섰다. 마주 보고 선 둘은 별 다른 신호가 필요하지 않았다.
“우—트—가—르—트—!”
유드문터스가 외치더니 땅을 박찼다. 땅 울리는 소리. 롤랑은 그보다 큰 소리를 내기 위해 온힘을 끌어 모아 고함질렀다.
“이 전쟁을 오딘께 바친다!”
그리고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
< 계단 앞 -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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