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37화 (137/164)

< 백일 층 - [5] >

하기야 포격 소리가 너무 요란했다. 다른 거인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더욱 이상할 만큼.

잠시 전투가 멎었다. 롤랑과 거인이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제이슨이 입을 열었다.

“야, 너. 서리거인······.”

유트문더스는 제이슨을 돌아보더니 고함질렀다. 급소마다 피를 흘리는 와중이라 그 목소리는 조금도 친근하지 않았다.

“뭐—!”

그 소리에 놀랐는지 제이슨은 말을 더듬었다.

“아니, 왜 여기에? 아니, 아니다. 그래. 평소에도 우트가르트, 하던 놈인데 뭐 이상하다고······ 하지만······.”

횡설수설. 제이슨 본인도 뭘 전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헛소리를 들어줄 가치를 느끼지 못한 유트문더스는 매정하게도 고개를 돌려 롤랑을 바라보았다.

문득 롤랑이 말했다.

“거인 유트문더스, 이 전투는 우리가 이겼다. 그리고 이 싸움도 계속되면 내 승리로 끝날 것이다. 그대로 출혈이 쌓이면 제 아무리 거인도 버티지 못하는 법이니.”

“그건 대봐야 아는 거—지—!”

유트문더스는 기세등등했지만 롤랑은 조용하게 말했다.

“그러니 유리한 입장에서 제안하겠다. 싸움은 중단하고 저기 오고 있는 네 동족에게로 가라, 거인. 전투는 끝내고 말이다. 그 누구에게도 수치스럽지 않은 제안인데, 어떤가?”

기사도 따위는 내버리고 여럿이서 공격한들 저 거인을 바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당장 롤랑의 칼도 먹히지 않는 마당이니. 차라리 아군의 퇴각을 방해하거나 쫓아오지 못하도록 보내버리는 것이 나을 법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추리하지는 못했는지 유트문더스는 버럭 소리 질렀다.

“감히 온정을 베풀어? 감히 내—게ㅍ!”

“우리에게도 그것이 이로워 하는 제안이다. 유트문더스.”

유트문더스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 시간은 짧았다.

“미리 말해두건대, 내가 이후 같은 자비로 갚으리라 기대하지 말—라!”

그리 소리 지르더니 유트문더스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쿵쾅거리며 숲속으로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볼 시간은 없었다. 롤랑은 아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 우리도 얼른 물러나야지. 부상자와 사상자는 당장 기력이 남은 사람들이 업고, 뜁시다!”

먼저 롤랑이 바닥에 널브러진 병사의 시체를 짊어졌다. 다른 기사들도 따라서 누군가를 업었는데, 힘겨운 전투를 막 마친 마당이지만 그러고도 모두 누군가의 무게를 감당하고 뛸 체력이 있었다. 다들 이제 평범한 남자들이 아니었으니까.

‘레벨 업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지.’

새삼 느끼며 롤랑은 모두를 이끌고 달려 나갔다.

뛰면서 문득 모지의 표정을 살폈다. 지혜의 샘물을 챙기겠다고 했던가? 그러나 무언가 챙길 틈도 없이 달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모지는 그리 낙담한 기색이 아니었다. 롤랑이 말을 걸어보았다.

“모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해 유감·······”

롤랑의 말에 모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웬 병을 내보이며 말했다.

“아니, 얻었는데?”

“샘물을 얻었다고? 전투 중에 어찌?”

“내 몸은 하나가 아니잖나.”

롤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투 중에 그 분신을 보내 샘물이나 뜨게 하고 있었단 말인가? 보이지 않던 모지의 분신은 투명해진 채 싸우는 줄 알았더니만 그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전투를 등한시할 만큼 샘물이 귀중한가?’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고 계속 달렸다.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 앞에 이르러서야 롤랑은 모두를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바닥에 누인 부상자와 사상자를 살폈다.

언뜻 보니 사상자는 마흔여덟 명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수.

롤랑은 이를 악물었지만 잘 보니 사상자 대부분은 보어조아의 병사들이었고 오직 네 명만이 롤랑을 따르던 기사였다.

본디 그 외에도 여럿 죽거나 죽을 상처를 입었지만 회복된 것이다. 성기사들은 물론 발키리까지 나서 그들의 소생에 열중한 덕분에.

롤랑은 일순 안도하려다가 말았다. 거인들과 직접 치고받고 싸운 것치고는 매우 적게 죽었다. 그렇다고 썩 좋은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가뜩이나 소수였던 기사들 중 넷이나 죽다니, 이 손실은 쉬이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롤랑은 새삼 느꼈다. 역시 이 정도 전력으로 거인들과 전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몇 번의 전투는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뿐일걸. 전쟁에서 이기려는 건 어림도 없어······.’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롤랑은 머리를 털어내고는 기사들을 불러 모으고 할 일을 했다.

“우리 중 넷이 승천했습니다. 육 잃은 그들의 넋이 발할라에 가 닿기를.”

롤랑이 눈을 감고 읊조리자 기사들도 따라했다.

“발할라에 가 닿기를.”

“육은 덧없으나 영은 영원하도다······”

이후로도 롤랑이 선창하면 나머지 기사들이 후렴구를 반복했다. 그리 기도문을 중얼중얼.

‘발할라, 그놈의 발할라.’

제이슨은 눈살을 찌푸렸다. 발할라 타령이 사람들을 사지로 끌어들이려는 사기인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도 제이슨 역시 모두를 따라해야 했다. 옆에서 모지가 더없이 진지한 자세로 읊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할라 만세.”

롤랑이 말하자 기사들이, 모지가 따라했다. 그리고 제이슨 역시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발할라 만세.”

그리하여 제이슨이 겨우 이 지겨운 짓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차, 모두들 눈 감은 그대로 그 자리에 무릎 꿇었다.

그러더니 모두 개인적으로 기도 올리기 시작했다.

제이슨도 모지의 눈치를 살피고는 기도 올리는 시늉을 시작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프레이여.”

그 순간 이미 눈을 감고 있어 어두웠던 제이슨의 눈앞에 빛이 나타났다.

제이슨뿐만 아니라 모지,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도. 전투에 참여한 거의 모두가 빛을 보았다.

그리고 각기 자기가 섬기는 신을 만났다.

*******

눈 뜬 순간 제이슨은 숨을 헐떡거리다 못해 땀을 흘렸다. 언제나 신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은 특히 그러했다.

롤랑이 다가와 물었다.

“괜찮나?”

제이슨은 애써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어, 그래.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레벨 업 했거든.”

난데없이 게임 용어가 언급되자 롤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다들 기도하느라 이쪽에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롤랑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어 선택에 주의해라. 그래서, 어떻던가? 프레이 신께서 분노를 터뜨리시던?”

“아니.”

롤랑은 일순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제이슨의 표정을 보고서는 그 생각을 접었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새파란 얼굴, 떨리는 입술로 제이슨은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아서 좆같이 무서워.”

“프레이 신께서 어떠시던?”

“날 보자마자 두들겨 패는데······ 무지하게 패더니······ 날 엎어놓고는 내 등에다 룬을 새겼어. 그리 축복을 받자 내 시야가 암전되면서 다시 이곳으로······”

롤랑은 조용히 한숨 쉬었다. 역시 프레이 신은 분노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제 후손이 살해당했으니까. 그것도 자기가 보낸 전사의 손으로.

‘그래도 제이슨을 패긴 했지만 레벨 업은 시켜줬군. 제이슨이 그 사건과 무관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영웅들이 죽인 걸 모르나? 그렇다면 제이슨을 팬 것은 단순 화풀이?’

롤랑이 고심하는 가운데 제이슨은 중얼거렸다.

“진짜 좆같아······”

롤랑은 프레이 신의 비위를 상하지 않을 말을 골라서 꺼냈다.

“고생했다, 제이슨. 아직도 아픈가?”

“쌍, 내가 아파서 엄살 부리는 줄 아네. 처맞아서 좆같은 거 아니거든? 처맞느라 하려던 말을 못 해서 좆같은 거야. 씹할.”

“하려던 말이 뭔가?”

“새 소환물 달라는 거. 거인 새끼 이제 못 써먹잖아. 근데 뭔가 지껄이기도 전에 프레이 새끼가 날 좆나게 패데? 씹할, 좆나 좆같네. 레벨 업 하면 새 소환물 얻겠구나 하고 기대했는데. 나 이제 계속 소환물 셋만 써야 하는 거야? 뭐 이래?”

그리 말하다 말고 제이슨은 찔끔했다. 옆에서 모지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헛소리 하기는. 신께서 주시는 건 룬뿐이다. 룬을 빚어 새 주문을 얻거나 새로운 힘을 얻거나 할 뿐이지. 그런데 소환물? 그걸 왜 신께서 준비해 주셔야 한단 말인가? 신이 하찮은 중개업자라도 된단 말인가?”

제이슨은 일순 안도했다. 걱정한 것과 달리 프레이를 함부로 말했다며 비난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툴툴거리며 물었다.

“새 소환물 얻으려면 레벨 업만으로는 안 된다고? 그럼 어째야 하는데?”

모지는 어느 단어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그 분신을 불러낼 당사자와 계약을 맺어야지.”

“어떻게?”

“직접 만나서. 눈앞에서든, 마법적인 수단을 통해서든 만나 계약을 주고받으면 된다. 젠장, 내 이것까지 설명해주어야 하나? 아, 그리고 제이슨?”

“왜?”

“프레이 신을 더러운 입에 담더군.”

제이슨은 문득 움츠러들었다.

‘아, 역시.’

그러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자 작게 소리 질렀다.

“왜, 떫어, 새꺄?”

그러나 모지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비웃었을 뿐.

“아니. 그저 우습다 싶어서. 하기야 네가 뭘 어쩌겠는가? 이아손, 너 프레이 신의 노예야. 천한 입으로 천한 욕설을 지껄이는 것, 노예가 주인에게 울분을 풀 유일한 방법이거늘 내 어찌 잔인하게도 그걸 방해하겠나?”

그 말을 롤랑이 가로막았다.

“그만 지껄여라, 모지. 그러지 말라고 몇 번 말했나? 아무튼 제이슨과 모지 네 경험치는 비슷할 텐데. 혹시 모지 너도 신의 선물을 받았나?”

모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받았다.”

‘모지도 레벨 업.’

이후로 다른 기사들도 기도를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몸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고 입가는 고통으로 일그러져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만은 밝았다.

기사들의 환호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발두르여, 감사합니다!”

“토르 신에게 영광 있으라······.”

롤랑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혹시?

그리고 직접 가서 물어본바, 혹시나 싶었던 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이번 전투로 말미암아 거의 모두가 신들을 만나 선물을 받았다. 그러니까 죄다 레벨 업 한 것이다.

롤랑의 현지인 동료들도 그러했다. 아말릭은 작게, 알론소는 크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롤랑은 보어조아와 그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 또한 기쁨을 감추고 있지 않았다. 그들도 신들의 선물을 받아 축복을 그 몸에 새긴 것이다.

‘거인들 경험치가 많다더니 정말이었나.’

문득 보어조아는 만면의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왔다. 그리고 롤랑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경! 정말 업혀갔다 온 셈입니다! 덕분에 죽은 줄 알았던 부하도 되살아나고······”

롤랑은 담담히 말을 주고받았다.

“경의 부하를 되살린 것은 내가 아니라 저기 저 아말릭 경이오. 가면 쓴 기사.”

“그거야 압니다. 아무튼 간에 정말 기분이 최고로군요. 날아갈 것 같습니다! 이제 정찰을 마치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

롤랑이 그 말을 끊었다.

“아니, 돌아가서는 안 되오.”

보어조아는 눈을 크게 떴다.

“돌아가서는 안 된다니요? 할 일이 남았습니까?”

“앞으로 이 층은 거인의 변경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변경이기도 해야 하오. 거인들이 이 밑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해야 해. 혹시 거인들이 사자를 보내 트롤들과 다시금 동맹을 맺으려 한다면······”

보어조아도 그 말에 납득했다.

“거인들이 트롤들과 접선하지 못하도록 막아야겠군요. 이 계단을 지키고 단단히 틀어막아야겠습니다.”

“그렇소. 세계수를 걸어오고 있는 병력들이 여기 도달할 때까지는 우리가 그 문지기 역할을 해야겠지. 넉넉잡아 이틀이면 행군을 마치고 여기 오려나? 그럼 모두 이틀은 못 돌아가겠군.”

당연히 씻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할 터였다. 교대로 인원을 돌린들 한계가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 말을 듣는 보어조아의 표정은 그저 밝기 그지없었다.

“괜찮습니다. 성전을 위해서인데 그 정도 고생을 못 하겠습니까?”

롤랑은 굳이 레벨 업이 그리도 달콤하던가 묻지 않았다. 다만 모지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모지? 샘물은 바로 쓸 수 있겠지?”

롤랑의 물음에 모지는 긍정했다.

“그래.”

“앞으로는 조금 위급하다 싶으면 바로 광폭화 해도 되는 건가? 이후로는 네가 알아서 해줄 테고?”

“아마도. 사안으로 그 몸을 굳게 만들어서는 입에다 샘물을 넣을 거다.”

이후 롤랑과 그 무리는 방어준비에 전념했다. 계단 앞에다 흙이 든 자루를 쌓아올려 임시 방벽을 만들고, 그 사이에다 대포를 설치했다. 그리고 롤랑을 비롯한 영웅들이 계단의 좁은 입구를 틀어막고 섰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거인들이 들이닥쳤다.

이번에 거인들은 제대로 전투준비를 해왔다. 전쟁용 활을 비롯한 전쟁병기들로 무장하고서.

거인들은 거의 미사일 같은 화살을 쏘아 포대를 통째로 날려버리더니, 공성병기 같은 무기를 휘두르며 돌파를 시도해왔다.

그들에 맞서 롤랑은 싸우고 또 싸웠다. 말 그대로 먹거나 쌀 틈도 없이. 가장 강력한 전사이자 지휘관이 전선에서 빠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은 교대할 수 있어 그나마 나았지만, 그래도 밤낮없이 경계에 나서거나 직접 싸워야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기어이 계단 앞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세계수를 걸어오던 아군 병력이 합류했고 그것을 확인한 거인들은 물러났기에.

그리 고생한 마당이지만 유독 기뻐 보이는 자들이 있었다. 롤랑과 그 기사들이 거인들과 싸우는 것을 거들면서 잔뜩 ‘레벨 업’한 보어조아, 그리고 가장 선두에서 치열하게 싸웠고 그 결과 남들보다 더욱 레벨 업을 거듭한 알론소.

알론소는 기쁨에 넘쳐 외쳤다.

“발두르 신께서 이토록 저를 자주 부르신 적은 처음입니다!”

그리하여 알론소가 도달한 레벨은 게임으로 치면 10이었다. 롤랑은 그 사실에 새삼 전율했다.

이제 ‘5’만 더하면 알론소의 레벨은 15가 된다. 그러니까 메디아가 게임이던 시절의 최고 레벨에 도달하는 것이다.

*******

< 백일 층 - [5]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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