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일 층 - [4] >
거인은 거대한 벌목도를 들어 자기 앞을 가로막았다. 알론소의 빛나는 창이 그 검신에 충돌했다.
쇳소리, 불꽃이 튀더니 창과 벌목도 모두 부러져 파편이 튀었다.
“이게—!”
거인은 다 망가진 벌목도라도 들어 적을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휘둘러지기 전, 알론소는 재빨리 군마의 방향을 전환해 달려 거리를 벌렸다. 새로운 창을 뽑아들고 다시 돌격하기 위해서.
거인으로서는 괜히 무기만 잃은 격돌이었다. 이를 갈던 거인에게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그 무릎과 오금에 기사들의 무기가 박히면서 거인은 무릎 꿇었다.
이제 그 상반신에도 거리가 닿게 되었다. 기사들은 그 몸통에 사정없이 무기를 찔러넣었다. 거인은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자루만 남은 칼을 마구 휘둘렀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다른 거인들과 치고받던 롤랑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꺼—져!”
그러나 롤랑이 흘긋 보니, 공격하던 기사들은 거인의 발악을 쉽게도 피해내고 있었다. 그놈의 ‘레벨 업’은 동체시력도 강화해준 것이다.
롤랑이 자기 앞의 거인을 꿇어앉히고 그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피투성이가 된 거인은 헛손질만 하다가 헉헉거린 끝에 앞으로 엎어졌다. 그리고 죽었다.
그러나 기사들 중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
강적을 쓰러뜨려 희열에 젖은 기사들의 사이로 무언가가 회전하며 날아왔다. 그리하여 기사의 갑옷을 뚫고 가슴 한복판에 박혀버린 뒤에야 날아온 그것이 도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료의 복수를 성공한 거인은 새 도끼를 뽑아들고는 다음 도끼를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흑기사가 철컹거리며 달려 나갔다.
그 뒤에서는 아말릭이 쓰러진 기사를 잡아끌고 있었다. 후방으로 끌고 가서는 바닥에 눕혀 도끼를 뽑아낸 뒤, 피 흘리는 몸에다 치유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편 롤랑은 기사들과 거리를 벌리고 저 앞에 있었다. 거인 부대 사이에서 종횡무진하며 놈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 피해낼 수 있는 공격은 피해내고, 어쩔 수 없으면 막아내면서 롤랑은 여섯 거인들을 동시에 상대했다.
다수의 공격을 받아내느라 자기 몸 건지기 급급할 것 같은 와중에도 롤랑에게는 적들의 틈이 보였다.
그 순간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리고 활을 들어 드러난 거인의 겨드랑이 사이에 칼을 쑤셔 박았다가 뽑았다.
거어어억, 하는 신음소리 위로 다른 거인의 기합소리가 뒤덮였다.
“난쟁이 좆같은 놈이—!”
덮쳐오는 벌목도를 보며 롤랑은 생각했다. 피할까, 막을까?
롤랑은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왼손을 뻗었다. 그리고 칼을 쥔 거인을 손목을 붙잡아서는 칼을 휘두르던 거인의 힘에 자신의 힘을 보탰다.
손목을 붙잡힌 거인은 이 조그만 난쟁이의 힘이 자기 못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 칼날의 궤적이 바뀌어 어디로 향하는지를 뒤늦게 깨닫고는 비명 질렀다.
“호얄피, 피—해!”
그리고 거인 호얄피는 피하지 못했다. 그 벌목도는 호얄피의 옆구리에 박혔으며 내장이 분출되었다.
호얄피가 휘청거리다가 즉시 쓰러졌다.
충격을 받아 경악하던 거인의 손목을 롤랑은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렇게 상반신을 자기를 향해 당기고는 드러난 그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거인을 죽였다.
거인들로서는 여럿이서 공격하던 와중에 둘이나 절명한 판이었다. 그 충격적인 사실에도 그 옆에 있던 거인들은 물러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미—친—!”
여전히 흉포하게 달려오는 거인들을 피해내며 롤랑은 아군을 바라보았다.
롤랑의 기사들은 전진해왔던 거인들과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쓰러진 거인들의 수보다 쓰러진 기사들의 수가 더 적었다. 이 정도 교환비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이토록 기사들이 잘해주는데 보어조아와 그 기사들은 뭐하고 자빠졌나?
흘긋 보니 그들도 다가오고 있었다. 육중한 흑요석 갑옷을 입은 염동력자들이 쿵쾅거리며 걷고 있는 것이다.
그 흑요석 견갑 위에 도저히 휴대용이라 볼 수 없는 철포를 짊어진 채.
염동력자들은 어깨 위의 철포를 겨누고 자세를 잡았다. 그 뒤에 대기하던 병사들이 포구에 탄을 넣고 불을 붙여주었다.
보어조아가 고함질렀다.
“발포!”
포구가 불을 뿜은 순간, 전장에 벼락이 울렸다.
가까이서 쏘았기에 포탄은 영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절반이 빗나갔다.
그러나 명중한 절반의 포탄은 충분한 성과를 내었다.
한 포탄이 거인의 머리에 맞았다. 거인이 쓰고 있던 강철 투구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투구와 함께 머리통이 그 몸통에서 뽑혀나갔기에.
어느 포탄은 거인의 어깨에 맞았는데, 즉사할 피격 부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충격에 뒤로 날아가 자빠진 거인은 자기가 벼락에 얻어맞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온몸을 달리던 격통을 감전으로 생각하여 벌벌 떨다가 심장이 멎어 죽었다.
포탄에 무릎에 맞은 거인은 무릎 꿇지 않았다. 무릎 꿇을 무릎이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달리다 말고 엎어진 거인은 다리 아래로 피를 쏟아내며 발버둥 쳤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여섯 거인이 절명하거나 무력화되었다. 염동력자들은 떨리는 어깨를 진정시키며 철포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병사들이 다시금 장전을 해주었다······.
“저 무슨?”
몇몇 기사들은 벼락 소리에 놀라더니 벌어진 참상에 다시 한 번 기겁했다.
포의 위력쯤이야 알고 있는 롤랑은 그 위력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경계했을 뿐.
‘예상보다 더 강한데······.’
전진포격이라니. 처음 들었을 때는 기상천외한 전술이라고만 생각했건만 정말 실현된 것이다. 걸어가며 포격하는 염동력자들은 숫제 인간전차였다.
그리 시작된 포격은 기사들도 움츠러들게 만들었지만, 거인들을 상대로는 동요시키다 못해 아예 혼란시키고 있었다. 토르가, 그의 망치 묠니르가 강림한 상황인 것이다.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괴물기사 롤랑에게도 물러나지 않던 거인들이 비명 지르고 있었다.
그리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거인들은 용케 꽁무니를 빼지 않고 돌격했다. 정체 모를 저 벼락쟁이들을 향해서.
보어조아가 자기 목소리에 마법을 실어 고함질렀다.
“이쪽에 온다! 창, 들어!”
염동력자들을 둘러싼 창병들이 창을 앞으로 쭉 뻗어 돌격에 대비했다. 서로 어깨를 맞댄 그들은 촘촘한 창날의 숲을 만들어냈다.
충분히 견고했지만 거인들을 상대로는 어떨지 모른다. 창병들은 숨을 죽이고 기도 올렸다.
그러나 각오를 다지다 말고 환희에 차 미소 지었다. 달려오던 거인들 앞을 롤랑이 가로막은 것이다.
롤랑이 거인의 오금을 걷어차자 거인은 달리다 말고 앞으로 쓰러졌다. 창병들로서는 저것이 어찌 가능한 것인가 놀라워하던 차 쓰러진 거인의 등에 롤랑의 칼이 꽂혔다.
그리고 롤랑은 다른 거인들의 돌격도 기어이 따라잡아 방해했다.
결국 그 어떤 거인들도 거기 가 닿지 못했다. 격전 와중에도 롤랑은 등 뒤에서 환호성을 들을 수 있었다.
“롤랑 만세!”
한편 염동력자들로서는 자기 포격방향에 웬 기사가 끼어든 마당이었다. 당장 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놀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철포는 지면이 아닌 염동력자들의 어깨에 얹혀있었다. 그러니까 염동력자들이 포구를 돌려 사격방향을 전환하려면 그저 다른 방향을 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바라본 방향을 향해 발사.
다시금 울려퍼진 천둥소리가 고막에 파고들었다.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롤랑은 다시금 저기 보이는 거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 칼을 휘두르고 또 휘두른 끝에 거인들이 줄어나갔다. 슬슬 이겼다고, 승리를 축하할 만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아, 아!”
날카로운 비명소리. 롤랑은 고개를 돌려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염동력자의 비명이었던 것이다. 흘긋 보니 거인 중에서도 유난히 거대한 거인이 저기 보였다.
거인은 자기 앞을 가로막은 창병들을 짓밟고, 포격하던 염동력자 앞에 가 닿아 있었다. 그 손에 웬 염동력자의 목이 붙들려 있었다.
거인의 손에 붙들린 염동력자는 바로 목이 졸려 죽지는 않았다. 염동력이 실린 흑요석 갑옷 덕분이었다.
그러나 거인은 염동력자가 바로 깨부숴지지 않자 그 발목을 붙잡고는 마구 휘둘렀다.
더 이상 포격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염동력자 셋이 거인의 둔기가 된 동료에게 얻어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거인은 그 발목을 쥔 염동력자를 땅에 여러 번 후려갈겼다.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그제야 흑요석 갑옷이 깨졌다. 그리하여 드러난 염동력자의 모습은 거의 곤죽이 되어있었다.
죽어가던 염동력자의 시선과 롤랑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움을 청하는 시선.
롤랑은 지금 보어조아와 저들이 위협적인 전력임을, 차라리 줄어들게 내버려두는 쪽이 나을 수도 있노라 고민할 수 없었다. 그런 잡생각을 하기 전 이미 그 발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가, 롤랑.”
어느새 다가온 모지가 입술을 달싹여 롤랑의 몸에 주문을 걸어주었다. 가속에 힘입어 롤랑은 순식간에 거인과 거리를 좁혔다.
온몸의 힘을 실어 칼을 찔러 넣었다. 동작과 함께 포효했다.
“죽어—!”
그러나 롤랑의 포효가 거인을 움츠러들게 만들지도, 그 일격이 거인의 살에 박히지도 않았다.
분명 상대의 오금을 강타한 칼날에서 둔탁한 충격만 느껴지자 롤랑은 신음했다. 마치 두터운 판금 위를 내려친 것 같은 감각이었다. 분명 갑옷 틈새를 공격했는데 어째서?
문득 롤랑과 거인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롤랑은 어쩐지 거인의 모습이 낯익다고 느꼈다.
특히 갑옷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저 비늘은 대체?
롤랑이 당혹하던 와중에도 거인이 포효하며 도끼를 휘둘러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익숙한 도끼였다.
“우트가르—트—!”
그 도끼날을 피해내며 롤랑은 다시금 거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지금은 투구를 쓴 데다, 그 눈마저 붉게 충혈 되어 살짝 달라보였지만 그래도 아는 거인이었다.
“서리거인?”
무심결에 평소 부르던 대로 불렀다.
그러나 제이슨이 불러냈을 때 그리 부르면 화내지 않았건만, 지금 이 순간 롤랑이 그리 부르자 서리거인은 노성을 터뜨렸다.
“내 이름은! 유트문더스—다—! 그리고 네 이름은 말할 것 없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롤—랑—!”
제이슨도 뒤늦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거인이 자기가 불러내던 소환물임을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겨우 정신을 추스른 염동력자가 포격한 것이다.
그 포탄은 거인의 등에 정확히 명중했다. 그러나 서리거인 유트문더스는 그 포격에 맞아 조금 휘청거렸을 뿐, 쓰러지지 않았다. 두꺼운 갑옷을 입은 데다 갑옷 아래 피부도 갑옷 못지않게 단단했기에.
롤랑이 사냥한 용 오나추스의 피를 뒤집어쓴 덕분에 그리 되었다.
유트문더스는 다시금 염동력자들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롤랑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동안 함께했던 거인은 롤랑에게 도끼를 겨누더니 외쳤다.
“네가 내 상대—냐? 롤랑?”
롤랑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기사다운 대답을 꺼냈다.
“그대가 덤벼든다면.”
“덤벼주마! 우트가르트의 유트문더스가 전사 대 전사로 승부를 청한다—! 받아들여라, 기사!”
롤랑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는 이미 이쪽의 승세가 굳어져가고 있었다. 롤랑이 서리거인 하나를 붙잡고 결투 놀이를 할 여유는 있어보였다.
이내 롤랑이 대답했다.
“결투를 받아들인다, 전사 유트문더스.”
그리고 유트문더스는 그저 서리거인으로 불리던 때와 달리 유창하게 고함질렀다.
“결투 따위로 포장하지—마라, 기사! 지금 벌이는 건 전쟁—이다! 너와 나는 그 일부에 불과—하다!”
말을 끝맺더니 유트문더스는 바로 도끼를 휘둘러 덮쳐왔다. 기사도고 뭐고 없는 기습이었지만 롤랑은 굳이 입을 열어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피해내고는 즉각 칼을 겨누고 맞붙었다.
그 후로 시간이 흐르자 싸우던 둘의 주변으로 기사들이 다가왔다.
이미 전투는 끝났다. 이쪽 승리였다. 거인들의 야영지를 감싼 목책은 포격을 퍼부어 밀어버렸고 기사들이 돌격하여 점령을 마쳤다.
그러나 아직 롤랑과 유트문더스의 전투는 판가름 나지 않았다.
기사들은 굳이 가세하지 않았는데, 둘이 진지하게 무기를 겨누는 모양새가 숫제 결투였던 것이다. 유트문더스는 부정했지만 어쨌건.
기사들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품평까지 할 여유를 되찾았다.
“역시 롤랑 경에겐 적수가 없군요. 가지고 노는데요.”
그 말처럼, 둘의 싸움은 롤랑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롤랑이 찌르고 벨 때마다 거인의 몸에 어김없이 상처가 났다. 반면 거인 유트문더스의 일격은 죄다 회피당하거나 손쉽게 가로막혔다.
괴력을 지녔다는 점만 제외하면 유트문더스는 롤랑에게 상대하기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이미 제이슨의 서리거인을 상대하며 그 버릇을 습득했으므로. 그때 서리거인 또한 롤랑의 버릇을 봐두었지만 유트문더스는 옛 기억을 활용할 만큼 재주 좋지 못했다.
그러나 번번이 유트문더스의 갑옷 틈새에 파고든 롤랑의 칼날은 상처를 냈고, 출혈을 냈지만 그뿐이었다. 치명상은 내지 못한 채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롤랑은 숨을 고르느라 잠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심호흡하자니 유트문더스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롤랑도 그쪽을 바라보고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인 지원군인 것이다.
< 백일 층 - [4]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