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33화 (133/164)

< 백일 층 - [1] >

비카파는 이 모든 사태가 모르가나 탓이라고 생각했다.

마녀의 경고는 뜬구름 잡는 듯 이해할 수 없었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도둑질만 성공적으로 해냈으면 다 잘 풀릴 일 아니었는가.

분개한 와중에도 대놓고 화낼 수는 없었다. 비카파로서는 속으로 화를 삭이던 차, 메디아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오스 왕이 죽고 오스론이 그 뒤를 잇는다는 정신 나간 소식. 걱정한 것보다 끔찍한 사태였다.

불안감을 잊고자 술을 마시던 비카파 옆에 까마귀 여인이 다가왔다. 그동안 잘 참아왔지만 취한 와중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하여 폭언이 비카파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떤 폭언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술 취한 와중에도 아뿔싸 하던 차, 까마귀가 창문 너머로 날아가 버린 것만은 기억했다.

마녀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

롤랑은 보어조아가 습격을 걸어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리고 영웅들이 낀 이 무리를 해치우려면 수적 우세밖에 믿을 것이 없을 테니 병력을 잔뜩 끌어모으리라고.

그 예상은 틀렸다. 세계수에 나선 보어조아의 군대는 불과 천 명에 불과했다.

“용병들까지 전부 성전에 보낸다 하지 않았나?”

롤랑의 물음에 보어조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들도 싸우러 나갑니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가지는 않아요. 그럴 수 없지요. 신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일개 범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대뜸 강력한 괴물들과 맞붙여 잔뜩 죽게 만드느니 보다는 그 전력강화가 우선입니다.”

“훈련 중이란 말인가?”

“아니오. 그들 또한 실전 속에서 강해질 겁니다. 그들에게는 중간층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겼지요.”

중간 층, 그러니까 칠십 층부터 백 층 사이에 많은 것은 트롤과 거대 도마뱀들이었다.

트롤과는 협정을 맺었으니 주 싸움 상대는 도마뱀들이 될 터였다. 치명적인 맹독을 지녔지만 어쨌건 성인 남성이라면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을 법한 괴물들. 용병들과 나머지 잡다한 병력들은 놈들을 정리하고 길을 뚫어낼 예정이었다.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 롤랑도 이해했다.

‘그러니까 적당한 괴물들과 싸우게 하여 레벨 1, 2의 병사들을 육성해내겠다 이거로군.’

롤랑이 물었다.

“그럼 그대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더 위로 가겠다는 건가?”

“예. 백일 층에 갑니다.”

“벌써?”

“트롤들과 협정을 맺어 백 층 위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잖습니까? 그러기 위한 비용까지 지출하는 마당에 그 아래층만 쏘다니긴 아깝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얼마 전에 영웅들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올라가보았더니······ 살벌하더군요. 거대한 괴물들이 넘쳐났어요.”

“세계수의 괴물들은 원체 다 크지 않은가.”

“백일 층은 특히 그러하더군요. 정신 나간 활을 든 거인 궁수들······ 그 거인들이 데리고 다니는, 거대한 늑대인지 사냥개인지 모를 짐승들······ 심지어 웬 용까지 지축을 울리며 걸어갑디다. 저흰 그저 거인 부대 하나와 마주쳤을 뿐이지만 엄청나게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겨냈어요. 그 뼈 아픈 승리의 대가로 신들께서 선물을 주시더군요.”

그리 말하는 보어조아의 눈은 환희로 번뜩였다.

롤랑이 물었다.

“선물이라면 예의 그건가? 보다 강력해지는······.”

“예, 신의 축복! 그 위대한 선물을 당시 거인들과의 전투에 기여한 모든 자들이 받았지 뭡니까? 그동안 괴물들을 잔뜩 죽여야 선물 하나 받았는데, 거인 부대와 싸워 이기니 바로 선물을 받은 거예요! 제가 추측하건대, 앞으로도 거인들을 쓰러뜨리면 신들께서는 축복을 거리낌 없이 내려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째서? 우연일 수도 있을 텐데.”

“아니오, 우연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죽여 온 괴물들이야 신들께서 보시기에는 죽이든 말든 별 상관도 없는 놈들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거인들은 명백히 신들의 적 아닙니까? 그러니 놈들을 죽이면 신들께서 더욱 적극적으로 보상해주시는 건 합당한 일이에요.”

게임으로 치면 경험치가 월등하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보어조아는 그에 혹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거인들은 언제나 벅찬 상대임을 잘 알 텐데?”

롤랑의 물음에 보어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거인들은 터무니없이 강한 괴물들이죠. 부대까지 갖추어 행동하니 어쭙잖은 전술로 사냥하듯 쓰러뜨릴 수도 없고······. 하지만 괜찮습니다. 예로부터 이름 높은 거인 사냥꾼, 롤랑 경께서 함께하실 것 아닙니까?”

********

세계수의 승강기를 타고서 롤랑과 기사들, 그리고 보어조아와 부하들은 순식간에 백 층에 이르렀다.

너무 많은 인원을 번갈아 옮기면 승강기 줄이 끊어질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와야 할 병력들이 뒤에 남았지만 보어조아는 당장 행동에 나서자고 주장했다.

“소수인원이지만 최고의 정예들이 모였으니 마땅히 할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정찰을 하는 게 어떨까요, 롤랑 경?”

롤랑은 혹시 보어조아를 따라나설 경우 거기에 매복한 병력이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고는 그 생각을 접었다.

산악지대.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저 거대한 나무들 뒤에는 마찬가지로 거대한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이 미지의 땅에 병사들을 미리 남겨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롤랑이 동의한바, 무리는 탐색을 시작했다.

롤랑과 그 일행, 그리고 보어조아와 염동력자들이 최선두였다. 그리고 롤랑의 기사와 보어조아의 정예들은 그 뒤에서 거리를 두고 뒤따르는 형태였다.

거대한 나무 사이를 걸어 나가던 와중이었다.

제이슨이 문득 말했다.

“여기가 거인들의 영역 맞나? 그런 것치고는 손이 닿은 흔적이 없는데. 나무들 베면 목재가 넉넉하게 나올 텐데 벌목한 흔적도 없고······”

“그건 너무 인간 기준 아닌가?”

롤랑이 말했지만 제이슨은 제 주장을 고집했다.

“거인들도 좀 큰 인간이잖아? 철제 무구도 쓰는 놈들인데. 연료가 필요하지 않을 리 없단 말이야.”

그럴 듯했다. 그렇다면 왜?

롤랑은 문득 이곳이 GOP 같다고 생각했다.

최전방. 영역의 일부임은 분명하지만 군사적인 용도로만 쓰이는 곳이라 굳이 개발하지는 않은 지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롤랑의 입에서 웬 말이 튀어나왔다.

“하기야 이곳은 거인들의 변경이니. 인간 국가의 변경이 그러하듯 우트가르트 거인들의 가장 훌륭한 유격부대가 이곳을 경계한다. 놈들이 게으르고 우둔하기를 기대하지 말라. 위대한 토르 신과 교활한 로키를 동시에 능멸한 거인군주가 그들을 다스려왔으니.”

롤랑은 말하다 말고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에 당혹했다. 왜 저리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인가?

문득 제이슨이 물어왔다.

“무슨 거인군주?”

“거인군주 로키. 오딘의 의형제 로키가 아닌, 우트가르트의 왕 로키를 말함이다. 그 유명한 마법사 거인을 어찌 모르는가?”

롤랑은 그리 말한 스스로도 당혹했다. 마치 무의식중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제이슨 또한 당황했다. 그리 말하던 롤랑의 말투는 평소와 명백히 달랐기 때문에.

그러나 그저 우연이려니 여기고 다시금 탐색에 집중했다.

계속 나아가니 방대하여 끝이 없을 것 같던 숲이 사라지고 웬 들판이 드러났다. 그리고 들판 주변에 절벽이 솟아났으니, 이곳은 계곡인 셈이었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절벽, 보기만 해도 웅장하고 신비로웠다.

“장관이군요······”

감탄까지 터뜨리며 모두들 절벽을 감상하던 와중이었다. 롤랑 또한 그 절벽을 올려다 보았지만 그 눈길은 남들과 달랐다.

분노, 그리고 슬픔이 섞인 눈으로 롤랑은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고정됨과 함께 그 몸이 굳더니, 롤랑의 몸이 일순 휘청거렸다.

아말릭의 놀란 목소리를 뒤로하고 롤랑의 정신은 침잠했다······.

******

기암괴석이 즐비한 절벽, 그 위에서 트롤 궁수들이 화살을 퍼붓는다. 사상자가 속출하는 마당이지만 롤랑은 놈들을 쓰러뜨리러 달려갈 수 없다.

계곡 너머에서 적의 본대가 몰려온다.

거인들. 도끼 한 자루씩 들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어느 괴물보다 매서운 거인들이 달려오고 있다.

저 거인들의 선두에서 불타오르는 존재를 롤랑은 알고 있다.

수르트.

세 달 전, 카를 대제의 성기사들과 그 군대는 세계수를 오르고 또 올라 우트가르트 성채를 포위했다.

공성전을 벌이다 보면 으레 그러하듯 그 전투는 너무나도 길었다. 그리고 황제의 군대는 기나긴 소모전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철수를 결정했다. 성채를 굳건하게 지키던, 저 화염거인 수르트와 그가 이끄는 결사대를 끝내 돌파하지 못했기에.

당연히도 적의 군대가 무사히 철수하도록 거인들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추격을 거듭하여 괴롭혀오더니 끝내 여기에 병력을 매복시켜 덫을 놓았다. 그리고 적들이 덫에 걸린바 포위공격.

당했다. 아주 훌륭히 당했다.

수르트마저 몸소 출정한 마당이다. 거인들에게서 이 지긋지긋한 인간 족속을 끝장내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보인다.

매복했던 병력은 어떻게든 물리쳤다. 퇴로는 어떻게든 뚫었다. 도망은 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대로 대책 없이 도망치다가는 수많은 용사들이 죄 죽어나갈 판이다.

‘프레이여!’

용감히 맞서던 용사가 불타 죽는다. 수르트가 화염검을 휘둘러 그 몸을 불살랐기에.

얄궂게도 그 화염검의 이름은 레바테인으로, 프레이 신이 얼마 전 잃어버린 룬검이다.

불타는 룬검을 쥔 화염거인의 돌격을 아무도 막아내지 못했다. 화염답게 수르트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달려오고 있다.

위대한 영웅들, 성기사들이 그 앞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열두 성기사들의 수좌로서 롤랑은 성검 뒤랑달을 들고 나섰다.

한 발짝 발을 내딘 롤랑의 속내는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찼다.

뒤랑달이 과연 저 화염검과 맞설 수 있을 것인가? 바로 녹아내리지 않기라도 하면 다행이련만.

그러나 언제나 그러했듯 위풍만은 당당하게 롤랑은 고한다.

‘저명하신 폐하, 모두가 빛의 수호자를 기다리니 당신만은 기필코 돌아가셔야만 하오이다.’

기사의 말에 카를은 부르짖는다.

‘내 어찌 벗을 버리고 도주하는 비겁자가 될 것인가?’

‘당신이 돌아가심은 곧 이 기사를 위한 결정이 될 것이오이다. 변경백의 임무가 무엇이던가? 변방을 나서는 군대를 돕고, 그 철수를 지키는 것 아니던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곱게 죽는다면 이 넋은 발할라에 가 닿지 못하리라.’

그 말에 호응하듯 다른 성기사들이 앞으로 나선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훤칠한 미남 아스톨포의 모습이다.

날개 달린 그리폰에 탄 아스톨포. 장난기 넘치던 그 얼굴에 지금은 미소가 없다.

아스톨포가 마법적인 뿔나팔을 불자 절벽 위 트롤들의 사격이 일순 멎는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가소서, 벗이여!’

포효하며 롤랑이 달려 나간다. 거대한 화염거인을 향해서.

*******

침잠했던 정신은 금세 다시 수면 위로 솟구쳤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롤랑의 머릿속에는 ‘가소서, 벗이여!’하는 외침과 함께 웬 뿔나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머릿속을 메운 뿔나팔 소리보다 크도록, 롤랑이 외쳤다.

“제이슨, 야수를 불러내라! 엄폐물을 불러!”

제이슨은 본능적으로 그 말에 따랐다. 까마귀 지팡이를 쥐고 웅얼거린 즉시 푸른 야수가 나타났다.

야수의 거대한 몸뚱이가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일행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야수로서는 불운하게도 화살이 날아와 그 몸에 마구 꽂혔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야수가 몸을 뒤트는 가운데 롤랑은 고함질렀다.

“모지! 언덕 위로 이동한다!”

그리 외치며 롤랑은 칼을 양손으로 들고 휘둘렀다. 그리고 조용히 날아오던 화살이 그 칼날에 부딪쳐 부러져 꺾였다.

기습용 화살이니 작게 만들었을 테지만 그래봤자 거인 기준이었다. 충분히 큰 화살. 롤랑은 화살을 막아낸 팔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축복 받은 몸이라 그 충격은 전보다 덜했다.

모지가 그 옆에 다가왔다.

“간다!”

롤랑은 그 팔목을 단단히 움켜쥐고는 달려 나갔다. 붙잡힌 채 끌려 가며 모지가 물었다.

“어디로?”

롤랑은 저기 보이는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뭇가지 위로!”

그리고 한 줄기 화살을 피해 모지는 여러 번 순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둘의 몸이 사라졌다가 롤랑이 가리킨 나뭇가지 위에 나타났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절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 위에 중심을 잡고 선 채 롤랑은 거인 궁수들을 노려보았다.

열두 놈. 다행히 그동안 봐온 철갑옷으로 무장한 놈들은 아니었다. 저들을 상대라면 발리사다가 아닌 칼도 먹힐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주저할 틈은 없다.

“모지, 넌 이제 가라. 제이슨을 보조해.”

모지는 잠자코 그 지시에 따르며 마지막으로 주문을 외워주었다.

가속. 몸에 실바람이 휘감긴 채 롤랑은 나뭇가지 위를 달려 나갔다. 그리고 도약하는 롤랑의 몸을 거인들은 너무 늦게 발견했다.

공중에서 내려오던 롤랑을 향해 한 거인이 화살을 쏘았다. 그 궤도는 정확했다. 롤랑은 공중에서 칼을 휘둘러 막아내야 했다.

그 충격에 몸이 튕겨 공중에서 뒤로 밀려났지만, 잠시 후 거인들은 탄식했다. 결국 그 기민한 사격도 롤랑이 절벽에 안착하는 것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절벽 위에 선 롤랑은 열두 거인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 백일 층 - [1]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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