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32화 (132/164)

< 감옥 - [4] >

자신의 집사 앞에서 아이스피시는 잔뜩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요. 아저씨가 이 분들을 보냈다고······. 보어조아 놈이 아저씨마저 가뒀을까봐 걱정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었소.”

“그러지 않은 대가를 치를 겁니다.”

“물론. 그 대가를 치르게 하고말고. 미친 자식, 감히 누굴 가둬? 놈이 제 분수를 안다면 감히 날 붙잡지도, 설령 그랬더라도 진작 용서를 빌며 날 풀어줘야 했소. 그러지 않고 결국 영웅들까지 나서게 만들다니, 그 대가는 실로 무거울 것이오.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롤랑 경. 마우그리스 경. 치졸하게 험담이나 퍼뜨려온 제가 이런 은혜를 입을 줄이야. 대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고개 숙이는 아이스피시에게 롤랑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쓰지 않소. 옛일인 데다 어차피 별일도 아니었잖소. 그리고 지금 은혜라 해봤자 잠시 성안을 산책했을 뿐이외다. 다만 하나 부탁드리자면, 우리가 귀공의 구출에 개입되었음을 말하고 다니지 말아주기를.”

“어째서? 의로운 일을 하셨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세계수에 올라야 하는 판이오. 이제 이 땅을 다스리게 된 보어조아에게서 그 포로를 빼앗았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소. 괜한 분란은 피해야 해.”

“그게 걱정이라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겁니다. 영주가 되었다? 이곳을 다스린들 잠시뿐입니다! 그 권좌는 다시 비카파에게 돌아갈 겁니다!”

그 말에 롤랑이 물었다.

“귀공이 힘으로라도 돌려주겠다 이거요?”

“기꺼이 그럴 겁니다! 본래는 군대까지 동원할 맘이 없었지요. 본국으로 귀환할 예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보어조아 놈이 이따위로 군 이상, 이대로 돌아가는 건 도망치는 꼴이 되겠습니다. 보어조아 놈, 비카파를 전 영주 예우해주기는커녕 컴컴한 감옥에 처박으며 하는 말이 이랬던가요? 은행가 따위가 누구 맘대로 백작을 자처하느냐? 제가 비카파에게 자리를 돌려주며 정식으로 작위를 수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허황된 것 같아도 반쯤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었다. 다름 아닌 대오공국의 공작이 말한 것이니까.

‘전쟁까지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기야 본토에 있는 병력을 끌고 오면······.’

롤랑이 생각에 잠긴 차, 늙은 집사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감사를 표했다.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영웅들이여. 부탁드린 지 한 나절도 지나지 않아 다시금 주인을 뵐 수 있게 되다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판이군요.”

“수고스럽기야 해도 뭐 어렵지 않은 일이었소. 이 친구가 있었으니까.”

롤랑은 말하면서 모지의 어깨를 두드렸다.

모지는 작게 웃더니 문득 아이스피시에게 물었다.

“보어조아가 대체 당신을 왜 가둔 거였습니까? 격의 차이가 확연하건만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놈이 처음에는 흥분해서 제정신 아닌 가운데, 반역에 방해가 되니까 멋모르고 절 포박한 모양새더군요. 일단 그리 잡아두고도 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지요. 그럼에도 기어이 가둬놓더라니 몸값과 복수 포기 맹세를 요구하지 뭡니까?”

“그걸 받아들였나?”

“복수를 포기하겠단 맹세는 했지요. 하지만 몸값은 거부했더니 아직까지 가둬두었던 겁니다. 무슨 배짱으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돼. 돌았지 아주······.”

모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복수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이미 했다고?”

아이스피시는 조금 얼굴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랬긴 하지만 강요된 맹세였습니다. 부당한 맹세였어요. 그 효력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서약 파기를 이 기사 앞에서 당당히 말하는 건 매우 껄끄럽군. 여기 있는 이 기사의 신이야말로 모든 서약의 주인인 분인데.”

궁니르의 주인, 오딘. 그 기사 롤랑이 여기 있었다. 뒤늦게나마 아이스피시는 롤랑의 눈치를 살폈다.

“아, 미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경. 용서하소서.”

그러면서 고개 숙이는 모습에 롤랑은 당황했다. 저 남자는 굳이 기사에게 숙여야 할 위치가 아닐 텐데?

보어조아가 롤랑은 두려워하는 주제에 아이스피시를 구금한 것도 어이없는 일인 것이다. 가진바 명성이야 어찌 됐든 실제 발휘할 수 있는 힘에서 저 공작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아이스피시 사령관보다 강력한 인물은 이 미드가르드에 없었다. 설령 그 ‘인물’에 지상에 내려온 영웅들을 포함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저 남자의 본거지에 만 단위의 정병이, 그 병력 모두를 나를 수 있는 함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롤랑은 새삼 겸손을 떠올리며 말했다.

“내게 사과할 게 아니오. 사죄를 청하고자 한다면 나중에 오딘께 기도 드리길.”

아이스피시는 여전히 고개 숙인 채 대답했다.

“마땅히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죄 말고도 제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일이 또 하나 있지요. 바로 보답 말입니다!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을 제 반드시 해드리겠습니다. 제 군대가 돌아오는 그날, 기필코 롤랑 경께 본래 당신의 차지였던 것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차지였던 것을 돌려줘? 그 말에 롤랑은 질색하여 대답했다.

“되었소! 이미 비카파를 다시 영주 자리에 앉히겠노라 말하지 않았나? 그대로 하시는 게 낫소.”

“예? 아, 변경백 자리를 돌려드리겠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돌려드릴 것은 다른 물건입니다. 다른 물건. 물론 둘 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경께서 다시금 비프로스트를 다스릴 수도 있겠지요. 원하신다면 말이에요.”

“원하지 않소, 절대.”

“그럼 다른 것이나마 돌려드리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겠습니다, 경.”

그리 말하며 아이스피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떠나갈 시간이 되자 모지는 다시금 주문을 외워 자신과 롤랑의 몸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은밀하게 뒤돌아선 둘을 주종은 허리 숙여 전송했다.

“그동안의 무례를 깊이 사죄드립니다. 결코 이번 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경! 기억하십시오! 대오공국의 공작은 은혜도 원한도 잊지 않는 법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외침을 뒤로하고 두 영웅은 문을 나섰다.

조용히 걷는 와중 롤랑이 중얼거렸다.

“이제 비카파가 영주로 복귀하리라는 건 기정사실이군.”

모지도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아마도. 무슨 이변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리 되겠지.”

“결국 풀려날 거라면 그 전에 우리가 구출해버리는 건 어떤가? 은혜를 팔아둘 기회니까 말이지.”

롤랑의 제안에 모지는 딱 잘라 거부했다.

“그건 안 된다, 롤랑. 오스론이 했던 말을 잊었나?”

“비카파가 도적들을 신전에 보낸 원흉일지 모른다는 것? 그거야 원한 가진 자의 발언이니 믿을 수는 없을 텐데?”

“확실하지야 않지. 하지만 정말 그러할 경우 네 구출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롤랑. 그래선 안 돼.”

“명성에 흠이 가니까? 하지만 누가 진범인지 모를 마당에 그 누가 흠을 잡아 우리 명성을 깎아내리겠나?”

“명성은 깎이지 않아도 명예는 추락한다. 명성과 명예는 달라. 그리고 너는 명성도, 명예도 드높은 기사다. 롤랑.”

“그건 진짜 롤랑 얘기지. 내 명성이야 연기로 쌓은 거고.”

롤랑이 투덜거렸지만 모지는 진지하게 말을 받았다.

“연기로 명성은 쌓을 수 있어도 명예는 쌓을 수 없다. 명예는 행위로 쌓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넌 명예롭다. 그 점에 자부심을 가져야 해.”

********

며칠 뒤 보어조아가 저택에 찾아왔다.

롤랑은 보어조아가 자신을 추궁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설령 아무런 증거가 없더라도 자기 포로가 귀신처럼 사라졌다면 그 범인을 특정하기는 어렵지 않은 것이다. 영웅들 중에 마법사 모지가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롤랑이 마주하게 된 보어조아는 만반의 웃음을 지은 채 그저 장황한 인사치레를 건네왔다.

이어진 시시한 잡담 끝에 보어조아가 꺼낸 본론은 범인추궁 따위가 아니었다.

“그럭저럭 안정된 것 같으니 이제 저도 본래 일에 돌아갈까 합니다.”

“본래 일이라면 성전 말인가?”

“그렇습니다. 비카파 그 천한 것은 허우대 멀쩡한 자기 용병들을 도시 경비에나 썼지만 전 그러지 않을 겁니다. 전 그들 모두 신성한 전투에 내보낼 겁니다! 그리고 모두와 함께 천상에 가 닿을 겁니다! 경께서도 그리 하시겠지요?”

롤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리해야지. 검에 녹이 슬 판이니 얼른 다시 싸워야 해. 언제부터 다시 성전에 복귀할 텐가?”

“모레부터입니다.”

“그럼 나도 그쯤에 기사들을 모아 다시금 세계수에 오르리다.”

그 말을 끝으로 보어조아는 허리 숙여 절하더니 물러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롤랑은 얼떨떨해졌다.

분명 의심스러울 만도 한데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고 물러난다고? 어째서? 이쪽 기분이 상할까봐?

‘천하의 아이스피시도 잡아 가둔 놈이 영웅들은 두렵단 말인가? 그리고 모레 다시 세계수에 오르자고?’

어쩌면 세계수 위에서 남들이 보지 않는 와중에 일을 저지르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스피시를 잡아가두었듯 이번에는 영웅들을 붙잡아서 심문하려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다시금 세계수에서 성전 활동이나 하려는 것일지 모르지마는.

어느 쪽이건 롤랑은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새삼 각오를 다지던 와중이었다. 문이 두드려지더니 저택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다시 손님이······”

이번에는 또 누군가. 롤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에 나가보았다.

그리고 보인 장면에 잠시 숨을 삼켰다.

일천 명이 넘는 무리가 저택 앞에 엎드려 있었다.

비루한 차림의 그들, 청소부들은 엎드린 그대로 소리 높여 외쳤다.

“위대한 기사 롤랑 경 만세!”

“만세!”

롤랑은 당황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이건 또 뭔가?”

청소부들은 일제히 외쳐 대답했다.

“위대한 기사께 감히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설마 적선을 부탁하려는 것인가. 롤랑이 표정을 구기려던 차 청소부들이 이어서 외쳤다.

“저희들을 데리고 가주십시오! 저기 저 세계수에!”

“다음에 싸우러 갈 때 그대들을 고용해 달라 이건가?”

이해할 만해도 부담스러운 부탁이었다. 이제 와서 청소부를 천 명씩이나 고용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청소부들은 그마저 부정했다.

“아닙니다! 더 이상 뜯어먹을 시체도 사라진 마당이니 까마귀 짓은 그만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저희도 칼을 들고 싸울 것입니다! 이제 전사가 될 것입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세계수에서 성전을 벌이던 군대가 대폭 사라진 지금, 군대가 만들어낸 시체 밭을 찾아다니던 청소부들의 일은 거의 다 사라졌다.

이제 청소부들은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별 다른 기술도 자본도 없는 그들에게 남은 일터는 여전히 세계수뿐이었다.

롤랑은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갑작스레 천 명의 병사를 받아들이라고?”

“어려운 부탁이란 건 압니다. 하지만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절대!”

썩 믿을 만한 맹세는 아니었다. 청소부들은 이미 성전에서 한 차례 물러난 자들이었으므로.

청소부들도 처음부터 시체나 치우자고 이곳 세계수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 모두 전사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이곳 비프로스트까지 순례를 왔다. 그리고 괴물들과의 전투에서 공포를 느끼고는 칼을 버린바 청소부로 직종을 전환했다.

이미 도망쳐버린 패배자들. 옛 영웅 롤랑이라면 이런 겁쟁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만······.

롤랑이 말했다.

“성전의 재개는 모레부터요. 함께할 텐가?”

승낙의 뜻, 청소부들은 소리를 높여 외쳤다.

“기회를 주신다면 기꺼이!”

“각기 들고 싸울 병장기는 있는가? 내가 준비해주어야 할까?”

“아니오! 보잘것없으나마 다들 준비는 이미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괴물들과 싸울 각오도 되었고?”

“물론!”

“그럼 부족할 것 하나 없군. 함께 갑시다, 전사들. 미리 채비를 하시오.”

청소부들은 계속해서 절하며 영광, 감사, 축복 따위를 부르짖었다. 롤랑은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제 롤랑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무리가 천 명이나 늘었으니 그들이 먹을 군량도, 예비로 쓸 무기도 갖추어야 했다.

전투가 기약된 사흘 동안, 롤랑은 내내 그 준비에 전념했다.

********

< 감옥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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