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31화 (131/164)

< 감옥 - [3] >

늙은 집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기억하시는군요.”

“기부까지 받은 처지에 잊을 리가. 그런데 도움이라니? 대오공국의 공작, 아이스피시는 미드가르드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하나 아니오? 천하의 아이스피시 사령관에게 기사 한 명의 도움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저도 이런 식으로 도움을 청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에요!”

“대체 무슨 상황이기에?”

늙은 집사는 하도 울분에 겨워 더듬거리며 말했다.

“보어조아가······ 그놈의 배신자가 공작님을 잡아가뒀습니다.”

롤랑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누가 누구를 잡아가뒀다고?

“아니, 왜?”

“이유는 모릅니다. 뭔가 이유를 설명하긴 하는데 죄다 횡설수설이에요.”

이어진 집사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정변 당시, 아이스피시 공작은 실의에 빠진 와중에도 보어조아의 반역을 비난했다. 도시에 찾아온 손님이 주인을 내치는 것은 사악한 짓이라면서.

그러나 말뿐인 훈계였는데, 아이스피시의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마저 대부분 귀향한 지 오래였던 것이다.

결국 병사들을 거느린 보어조아를 막을 수단이 아이스피시에게는 전혀 없었다.

아마 아이스피시도 그 사실을 알았겠지만 이 난리 중에 멍하니 있기는 뭐했으리라. 비카파와는 구두로나마 동맹을 맺었던 사이이므로.

그래도 의리라도 지키고자 아이스피시가 나선 순간, 비카파가 소리 높여 부르짖었더랬다.

‘보어조아, 이 반역자! 저 위대한 군주 아이스피시 사령관께서는 예전에 나와 동맹을 맺으셨다! 지금 병사가 없는 와중에도 날 위해 나서주신 분이 병사를 충원하면 어찌 될지 모르겠느냐?’

그에 맞선 보어조아의 대응은 간단했다.

비카파는 물론 아이스피시까지 구금해버리기.

여기까지 들은 롤랑이 물었다.

“그저 가둬두기에는 후환이 두려울 텐데. 걱정하지 않아도 곧 풀려나는 거 아니오? 적당히 이 일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맹세라도 시키고서.”

“저도 처음에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풀려나지 않는 건 어째서입니까?”

“모르겠는데.”

“저도 모릅니다! 모르니까 답답한 거예요! 가뜩이나 보어조아는 공작께 반감을 품은 놈인데, 그저 가둬두다가 풀어줄 마음이 없는 것 아닙니까? 저를 내버려두는 이유도 수상합니다. 절 연락수단으로 삼아서 터무니없는 몸값을 뜯어내려는 건 아닌지······”

물론 보어조아가 무슨 생각인지 롤랑은 알지 못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롤랑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공작을 구해내길 바라는 게요?”

“어떻게든······”

롤랑은 한숨 쉬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선뜻 받아들일 수도,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중립을 고수하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이 땅의 영주와 척지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니까.

그러나 공작의 구출을 거절하여 훗날 그가 풀려났을 때 앙심을 품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 어찌 해야 하는가?

초조한 얼굴의 집사에게 롤랑이 말했다.

“일단 사람들에게는 거절당했다고 말해두시오.”

“일단? 그렇다면 결국에는 도와주시겠단 뜻입니까?”

“어쩌면. 하지만 당장 결정할 수는 없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찌 된 것인지 좀 더 알아보고 행동을 취하겠소.”

“제발, 롤랑 경······.”

늙은 집사는 지금 자신이 완곡한 거절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좀 기다려달라는 말을 들은 것인지 긴가민가했다.

더 설득하고 싶었지만, 롤랑이 떠나기를 재촉했다.

“일단은 떠나주시오. 여기 오래 계시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작당하는 것처럼 보이면 곤란해.”

어쩔 수 없었다. 늙은 집사는 뒤돌아서며 말했다.

“말씀대로 지금은 떠나겠습니다. 위대한 기사라면 마땅히 해야 할 선택을 하리라 믿고서요.”

그리 늙은 집사가 떠난 뒤, 롤랑은 굳은 얼굴로 동료들의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동료들의 의견을 묻자 먼저 대답한 것은 제이슨이었다.

“좋은 기횐데? 아이스피시를 아군 삼을 상황이겠다, 이참에 보어조자 그 새끼 족치고 롤랑 네가 변경백 감투 다시 달지?”

제이슨으로서는 아마 진담 반 농담 반이었을 것이다. 롤랑도 그러려니 하는 차, 갑자기 옆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모지가 고함질렀다.

“닥쳐라, 망나니야! 네 머릿속엔 그저 그런 권력욕뿐이지! 숙부를 죽여 왕위를 얻으려 하고! 그러다 탈출해서는 그동안 성심껏 도와준 아내를 갈아치워서라도 권좌를 차지하려 발악했던 게 네 행적 아닌가! 영웅이라 불릴 자격도 없는 놈! 롤랑마저 네 수준으로 떨어뜨릴 셈이냐!”

아마 이아손의 행적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이리라. 난처해진 제이슨이 말했다.

“그건 진짜 내 짓이 아니고······ 그저 기사로 행세하느니 보다야 변경백으로서 행동하는 게 앞으로의 행동에도 유리······”

“닥치란 말이다, 개자식!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아서 왕, 그 정체 모를 발할라의 전사가 섭정 자리를 차지한 것도 비난 받는 마당이다. 그런데 이제 롤랑까지 비슷한 일을 벌이자고? 발할라의 전사로서 명성을 쌓아온 게 다 반역하려고 그래온 것이라 비난당하도록 만들 셈인가? 영웅의 명예를 진창에 처박겠다고!”

“명예 따위가 뭐······”

“중요해!”

그 순간 모지와 눈이 마주친 제이슨은 몸이 굳었다. 모지가 사안을 발동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법사의 눈에는 힘이 깃든 법이다.

제이슨은 겁 먹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물었다.

“그래서 명예를 지키고자 얌전히 처박혀 있자고?”

“아니. 명예롭고 싶다면 그렇게 행동할 뿐이지. 롤랑, 어쩌고 싶나?”

롤랑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명예를 바란다면 부당하게 사로잡힌 공작을 구하는 게 옳겠지. 하지만 앞으로의 활동에 지장이 없어야 한다. 공작을 구출하더라도 몰래 구출해야 해. 아무리 우리에게 투명해져서 잠입할 재주가 있다지만 혹여라도······”

“그만, 롤랑.”

롤랑의 말을 끊더니 모지가 말을 이었다.

“잡생각이 너무 많다. 걱정은 나중에 해도 돼. 아무튼 몰래 구출하겠다면 그러지. 자, 그럼 갈까?”

그리 말하더니 모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롤랑은 눈을 크게 뜨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지금?”

“그래. 달리 잡아둔 기일이 있나?”

“그건 아니고······”

결국 롤랑도 모지와 함께 일어났다. 그러고는 문으로 향하다 말고 제이슨을 흘긋 보았더니, 역시나 우울한 표정이었다.

저택의 문 앞에서 모지가 입술을 달싹였다. 마법 주문. 그리하여 둘은 투명해졌다.

두 흐릿한 인영이 비프로스트 시내를 가로질러 성을 향했다.

걸어가면서 롤랑은 보이지 않는 모지에게 작게 말했다.

“모지, 제이슨에게 너무 그러지 마라.”

그러나 모지는 코웃음을 치더니 대답했다.

“이아손을 보아 넘기라고? 내 그럴 수는 없지.”

“정말 이아손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내가 진정한 롤랑이 아니듯.”

“물론 그렇지. 하지만 난 네게서 롤랑을 본다. 그 행동거지는 달라도 롤랑이 지니고 있던 영웅성이 빛나기 때문이다. 또한 제이슨에게서 이아손을 본다. 실제 행동이 어땠을지는 몰라도 그 한심한 짓거리를 보자면 절로 경멸감이 들기 때문이지. 가끔은 둘 다 진짜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다, 롤랑.”

“둘 다 진짜로 느낀다면? 너 혼자만 가짜라 느낀단 말인가?”

“가끔은······.”

“참으로 정체성의 혼란이 극심하겠군. 그럼 넌 무얼 위해 행동하지?”

“너와 네 임무를 위해서, 롤랑.”

“가짜 롤랑의 임무인데?”

“그 고귀함만은 진정 롤랑의 것이다. 그러니 함께 할 가치가 충분해.”

“그러면 내가 영웅답게 연기해야 한다는 걸 잊고 현대인답게 군다면? 날 위해 행동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순간 바로 내버릴 건가?”

“그러지 않겠노라고 궁니르에 서약한다. 한 번 돕겠다 말한 이상 어찌 번복이 있겠나?”

“고마운 말이군. 하지만 내게서 영웅답지 않은 모습을 보아 실망한 순간, 네 맘에서는 의욕이 싹 사라질 텐데. 이후로는 억지로 돕는 셈이 되겠지. 그러니 나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건 당장 듣기에야 좋아도 곱씹어보면 썩 든든한 말이 아니야.”

“너 아니면 달리 누굴 위해 행동하겠나?”

“왕은지.”

모지는 걷다 말고 잠시 멈춰섰다.

“뭐?”

“잠시나마 그 몸의 주인이었던 여자를 위해 헌신할 수는 없나? 사라지고 없는 여자를 위해 활약하는 기사 마우그리스 경. 한결 근사하잖나.”

그 이름이 언급된 순간, 마치 왕은지가 그랬던 것처럼 모지는 더듬거렸다.

“왕은지라니······ 내가 왜 그 여잘 위해······ 고귀한 신분도 아니었는데. 기사가 모실 가치도 없······”

“여성비하라니? 기사답지 않은 발언이다, 모지. 하찮은 신분인들 여성을 보호하는 건 기사의 의무 아닌가······. 그런데 지금 네 말은 제이슨을 욕할 때와 달리 영 분노가 없군. 마치 자기비하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자기비하?”

“그래, 경멸하면서도 차마 마지막 남은 애정을 거둬내지 못한 행위 말이다. 혹시 넌 아직 왕은지를 자기 자신이라 여기는 건가?”

여전히 모지는 말을 흐렸다.

“모르겠어······ 그 여자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분간이 안 돼. 자신으로 절반, 타인으로 절반······.”

“그렇다면 더 좋은데. 네가 그녀를 위한다면 자기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셈 아닌가. 역시 그게 더 나아. 진짠지 가짜인지도 모를 동료 롤랑 경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것보다야 그쪽이 한결 굳건한 맹세가 되지 않겠나?”

모지는 대답이 없었다. 롤랑은 그 표정을 살피려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빈 허공을 보게 되었다.

둘은 말없이 시내를 지나 성 앞에 도달했다.

성을 감싼 외성이 따로 있었지만 그것을 넘어가고자 순간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성벽은 이미 잔뜩 부서져 길이 뚫려있었다. 정변의 날, 보어조아가 자기 포병을 동원한 흔적이리라.

둘은 성벽의 잔해를 밟고 지나갔다.

이후로는 천천히 성 주변을 걸으며 여러 창문 안을 살폈다.

문득 한 창문 앞에서 멈춰섰다. 그 창문 너머의 방은 비어있었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모지가 말했다.

“여기로 들어가지.”

창문은 몸을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비좁았지만, 상관없었다.

모지는 조용하게 입술을 달싹여 순간이동했다.

이렇듯 성안으로 침입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이후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투명한 침입자들이라니, 어찌 막겠는가? 둘이서 작게 속삭인들 그 누구도 그것을 투명한 누군가가 작당하는 중이라고 여길 리가 없었다.

둘은 그저 천천히 성안을 활보했다.

“아이스피시, 감옥에 있을까?”

롤랑의 물음에 모지가 대답했다.

“모르지. 험한 곳에 가둬두기에는 귀하신 몸이니 좋은 방에 연금해두었을 수도, 하지만 원한 탓에 신분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지하에 처박아놨을 수도······.”

결국 두 장소 모두 뒤져야 했다. 우선은 지하 감옥부터.

눈 뜬 장님과도 같은 병사들을 지나, 두 영웅은 지하에 내려갔다.

정변 탓인지 잡혀있는 자들이 많았다.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었지마는.

죄수들을 지나치다 말고 둘은 문득 웬 옥실 앞에서 멈춰섰다.

익숙한 얼굴, 전 영주 비카파가 갇혀있었다. 비카파는 연신 창문에 대고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모르가나······ 모르가나, 모르가나······”

뜻밖의 이름이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롤랑과 모지 모두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당장 왜 그 이름을 연호하는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둘은 계속해서 지하를 수색했다. 끝내 발견되지 않자 지체 없이 계단을 올라 다른 방들을 뒤져나갔다.

그리고 끝내, 찾았다.

*******

늙은 집사는 망치 목걸이를 쥐고는 중얼중얼 기도 올렸다. 위대한 토르 신이시여, 제발 우리 도련님을 가호하소서.

그러던 와중이었다. 창문이 벌컥 열렸고 늙은 집사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순간 허공이 칠해지듯, 세 사람의 모습이 그 자리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게 웬 기괴한 일인가. 늙은 집사는 비명 지르려다 말고 입을 다물게 되었다. 허공에 생겨난 남자가 그 입을 붙잡았기에.

꺽꺽거리면서 늙은 집사는 자기 입을 틀어막은 남자가 롤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서있는 남자는 모지이며, 그 옆에 멀뚱히 선 중년인은······.

“알아보겠나? 큰소리치지 않겠다 약속하면 놓아주겠소.”

롤랑의 말에 늙은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롤랑이 손에서 힘을 풀기 무섭게 늙은 집사는 작게 외쳤다.

“공작님!”

< 감옥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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