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옥 - [2] >
“새로운 영주 관련 일인가.”
롤랑의 물음에 청소부들은 대답을 하려다 말고 우물거렸다.
“그게······.”
“맞나 보군. 거리에 매달린 당신네 대표를 보았지. 다른 청소부들도 새로운 영주에게 처형당하거나 잡혀간 것인가?”
이번에도 청소부들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나 바로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니 롤랑의 물음 자체는 옳은 것 같았다.
롤랑은 저들이 왜 저리 답답하게 구나 생각해보고는 쉬이 답을 얻었다.
하기야 대답을 주저할 만도 하다. 감히 일개 평민이 군주의 일처리에 반감을 품고 다른 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 요청에 응하여 다른 귀족이 도우려 나선다면, 자기 통치에 간섭 당한 군주로서는 체면을 구겨도 잔뜩 구길 일이리라.
이럴 때 귀족답게 굴려면 어찌 해야 하나?
간단했다. 이 주제 파악도 못하는 평민을 타이르거나 엄하게 꾸짖어 쫓아내기. 훌륭한 귀족이라면 다른 귀족이 자기 땅을 통치함에 끼어들지 않는 법이잖은가.
‘거만한 귀족 기사 롤랑 경이라면 노성을 내지르며 이들을 두들겨 패도 어색하지 않겠지만 뭐······.’
그리 생각했지만 롤랑은 그 선택을 염두에 두지 않기로 했다. 이제 와서 그러기는 어색할 터였으니까.
옛날, 그러니까 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에야 귀족 기사답게 거만하게 굴려는 계획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현대인이 느끼기에 전혀 고결하지 않다 보니 어느새 그런 연기는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롤랑은 거만하지도, 그다지 귀족적이지도 않았다. 결국 지금 연기하는 롤랑은 처음 생각해두었던 롤랑과 차이가 많았다.
그러나 롤랑은 굳어진 캐릭터를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굳이 왜 그래야하는가? 옛 마법사 모지 경도 지금 이 기사를 마음에 들어 하는 바에야.
결국 롤랑이 꺼내든 캐릭터는 거의 언제나 그랬듯 고결한 기사였다. 그것이 남들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마음에 들었기에.
“동료들, 잡혀갔나 잡혀가지 않았나?”
롤랑의 물음에 청소부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끌려가 갇힌 동료들이······.”
“잡혀간 것이 부당하다고 느끼는가?”
이번에도 청소부들은 대답을 망설였다.
‘자기네 영주의 일에 왈가왈부하는 건 반역적이라 느끼는 모양이지.’
그리 추측한 롤랑은 질문을 바꾸었다.
“무슨 이유로 잡혀간 것인가? 설마 청소부들이 이번 영주의 정변에 맞서 전 영주를 비호하기라도 했나?”
그제야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왔다.
“결코 아닙니다! 힘없는 백성들이 감히 어딜 끼어들었겠습니까? 저희 모두 주제를 알아 어려운 일에는 감히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청소부는 입술을 달싹거려 무언가 말했다. 너무 작게 말해서 잘 들리지도 않았지마는.
롤랑이 눈살을 찌푸리자 그제야 다시 말했다.
“이번 영주께 지원금을 부탁 드렸더니······.”
“무슨 지원금?”
“전 영주님이 후원하던 조합에서······ 조합원들에게 약간씩이나마 주던 게 있습니다. 저희도 일단 조합에 속한지라 입에 풀칠할 만큼은 받았는데요. 영주님이 바뀌고 나니 지원금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어서 혹시 그 존재를 모르시나 싶어 모두 가서 간곡히 다시금 은혜를 베푸시도록 부탁드렸지요.”
“그러나 거절당했고?”
“예, 그런데 일이 죄 사라진 마당에 지원마저 끊기면 정말 아무런 수입이 없게 됩니다. 목숨이 걸린 문제라 저희도 바로 물러날 수가 없어서, 물러나란 말에 응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모두 납작 엎드려서는 하소연을 했더니······”
다음 일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롤랑은 뚱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이번 영주가 반역이다! 하고 소리치며 그대들을 잡아가두라 하던가? 대표자는 가두다 못해 아예 목을 매달아버린 게고?”
“비슷했지요······.”
“너무하긴 하지만 이해 못할 일은 아니군. 가뜩이나 보어조아 그자는 새 영주로서 모두에게 위엄을 보여야 할 판이었을 텐데. 자기 명령에 거부한 백성들을 곱게 넘어가주지는 않았겠지.”
“저희 따위가 가소롭게도······ 하지만 이건 너무한······ 딸린 몸도 있는데······”
청소부들이 웅얼거리는 가운데 롤랑이 말했다.
“대강 뭔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겠군. 무얼 바라는지도 알겠고.”
청소부들은 불안한지 몸을 움찔거렸다. 겁먹은 눈치였는데, 아마 롤랑의 말투가 동정적이거나 자비에 넘치지 않은 탓이리라.
잠시간의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롤랑이었다.
“지원금이니 뭐니 하는 건 내가 끼어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군. 군주에게 자선을 강요하는 건 지나치게 오만한 짓일 테니.”
“하오나······”
무언가 하소연하려는 청소부들의 말을 끊고 롤랑이 말했다.
“그만. 도와는 주리다. 당신네가 바라는 대로 다 해줄 의무도, 그럴 수도 없으니 충분히 돕지는 못하오. 그래도 잡혀간 자들이나마 풀어주도록 부탁해보지.”
그제야 청소부들은 살짝 고개를 들고 감격한 표정을 내보였다. 그러고는 외쳤다.
“절대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경!”
“하지만 명심하시오. 이건 영주의 잔인한 처사에 반발하는 것이 아니야. 그저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부탁함에 불과해. 이번 영주가 그 부탁을 거절한다면 달리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소. 알겠나?”
청소부들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알겠습니다, 예! 정말로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경······”
롤랑은 납작 엎드린 청소부들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가지. 영주에게 자비를 권하러.”
이내 걷기 시작한 롤랑을 청소부들이 따라나섰다.
저기 보이는 백작성을 향해 나아가며 롤랑은 생각했다.
역시 꼭 이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청소부들에게 잘 보인들 썩 이롭지도 않다. 오히려 부탁을 거절당할 경우 이쪽의 체면이 구겨진다는 점에서 해로우면 모를까.
그러나 롤랑은 모지의 말을 생각했다. 영웅답게, 자기 뜻대로 하라고.
그래서 그러기로 했다. 어젯밤 나무에 매달린 청소부의 얼굴이 어른거렸고, 맘이 불편했던 것이다.
영주성 앞에 선 롤랑이 외쳤다.
“속히 가서 알려라! 메디아 후작 롤랑이 비프로스트의 새로운 군주를 뵙고자 한다!”
탐탁찮은 표정으로 서있던 병사는 부리나케 성안으로 달렸다. 과연 성안에서의 답변은 금세 돌아왔다.
성안에서 다시 뛰쳐나온 병사가 말했다.
“경사로운 손님께 환영의 뜻을 전하며, 들어오시랍니다!”
그리고 롤랑은 성안으로 들어갔다. 청소부들은 바깥에 남겨두고서.
비프로스트의 새 군주, 보어조아는 만면의 미소를 머금고 롤랑을 맞이했다.
“이게 누굽니까!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위대한 기사여!”
더없이 행복해보였지만 롤랑은 지금 보어조아가 정말 기뻐서 저런다고 믿지는 않았다. 저 남자의 가식을 어찌 믿을 것인가.
오래 마주보고 싶지 않았다. 롤랑은 적당히 예를 표하고는 본론을 꺼냈다.
“그대가 잡아가둔 자들 중에, 세계수에 올라 청소업을 하던 자들이 있을 텐데.”
“그렇긴 하지요. 그런데 왜?”
“나와 안면 있는 자들도 잡혀가서 말이오. 구원을 탄원하러 왔소이다.”
그 말에 보어조아는 조금도 눈살을 찌푸리는 등 불쾌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보어조아는 그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그랬습니까? 제가 면목 없는 짓을 저질렀군요. 죄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경!”
그러더니 보어조아는 고개를 꾸벅 숙여왔다. 롤랑은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며 물었다.
“풀어줄 텐가?”
“당연히 그래야지요. 제가 어느 분 말을 거절하겠습니까?”
잠시 후 보어조아는 자기 말을 이행했다. 사람을 불러 잡힌 청소부들을 모두 석방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롤랑과 안면이 있는 자들만 풀어주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전부.
얼마 지나지 않아 갇혀있던 청소부들은 비틀거리면서나마 옥을 나왔다.
“빚을 졌군.”
롤랑의 말에 보어조아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니요, 아뇨. 이따위 것은 빚이라 할 수도 없지요. 어차피 풀어줄 놈들이었습니다! 그저 살펴가시기를.”
더없이 관대한 표정이요 말이었다.
롤랑은 몇 마디 감사의 말을 던지고는 풀려난 청소부들과 함께 성을 나섰다.
한편 보어조아는 롤랑의 뒷모습을 창문 너머로 흘긋 보았다.
보어조아로서는 정말 빚을 지우기 위해 부탁을 들어준 것이 아니었다. 보어조아는 그저 저 남자에게 잘 보이고자 허리를 숙였다.
보어조아는 별 윤리적인 명분 없이 영주를 갈아치웠다. 비프로스트 주교는 이것을 반역이라 규정하고는 땅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제사도 지내주지 않는 마당이었다.
이 위태로운 와중에 오스론마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언뜻 믿기 힘든 소문까지 들었는데, 이제 메디아의 섭정 자리에는 아서 왕인지 뭔지 하는 발할라의 전사가 앉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저 롤랑과 같은 출신의 인물 말이다.
지금 이 상황에 롤랑에게 밉보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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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이 피투성이 청소부들을 데리고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소부들은 오열했다.
모두들 롤랑을 향해 엎드린 채 감사의 말을 부르짖었다.
“이 은혜를 대체, 정말로······”
피눈물을 흘리는 청소부들을 롤랑은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차고 있던 전낭에서 은화 몇 닢을 꺼내 내주며 말했다.
“며칠 끼니나 하시오.”
청소부들이 눈을 크게 떴다. 이제 감격을 표하려는 그들의 말을 끊고 롤랑이 계속 말했다.
“말해두겠는데 이건 금전적 지원도, 적선도 아니오. 사과 한 알 사느라 나도 빈곤한 처지거든. 난 그저 세계수에 올라 당신네 도움을 받을 테니, 그 삯을 약간이나마 미리 치른 거요. 이해하겠지?”
“암요, 물론입니다. 경. 이 은혜를······”
“은혜가 아니라니까. 그럼 난 가오.”
롤랑은 얼른 뒤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청소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날 있었던 사건은 곧 비프로스트에 소문이 퍼졌다. 자비로운 롤랑 경이니 뭐니 하는 소문들. 그런 평판이 들려올 때마다 롤랑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역시 괜히 부탁을 들어줬나? 다른 어중이떠중이가 기회다 싶어 또 부탁하러 오는 것은······’
롤랑은 이내 걱정했다. 다음에 누가 비슷한 부탁을 하러 오면 이번에는 거절하자고. 이놈 저놈 다 석방해 달라 하는 것은 영주에 대한 결례를 넘어 모욕이 될 터였다.
이틀 뒤, 걱정했던 손님이 찾아왔다.
저택 문을 열고 나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비프로스트 주교는 지친 얼굴로나마 미소 짓더니 입을 열었다.
“경께서 가여운 자들을 돌보았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 성직자씩이나 되어 나서지 못하던 판인데, 참으로 면목이 없으면서도 탄복을 금할 수가 없어요······.”
뜬금없이 찬사부터 퍼붓는 이유는 쉬이 알 수 있었다.
‘비슷한 일을 또 해달라 이거지.’
그렇다면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속으로 결심을 굳히며 롤랑이 물었다.
“주교님이 여긴 무슨 용무로?”
과연 비프로스트 주교의 말은 롤랑이 예상한 그것이었다.
“구원을 청합니다! 이번 반역은 전혀 명분 따윈 없이 힘으로 강행한 것으로······”
롤랑은 무례를 무릅쓰고 딱 잘라 말했다.
“미안하오만 나서지 않겠소.”
“제발, 경! 이게 말이나 되는 짓입니까? 여긴 옛날 경께서 다스린 땅이 아닙니까! 그런 장소가 반역으로 더럽혀지다니 끔찍한 일이잖습니까!”
“비카파 백작도 같은 일을 저질러 그 자리에 앉았을 텐데?”
“그건 반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천상에서도 백작의 제사를 받아주시어 그 자리를 인정해주셨지요. 그러니 그 자리를 빼앗은 것은 강탈이요, 신들의 뜻을 어긴 짓입니다! 대체 무슨 명분이 있어 멀쩡한 통치자를 내쫓는단 말입니까?”
“비카파가 멀쩡했는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오. 물론 이번 정변의 당위성도. 하지만 말이오, 주교님. 그 명분의 옳고 그름을 따져 편을 드는 것은 발할라의 전사가 할 일이 아니외다. 내 임무는 이 지상이 아니라 저 세계수 위에 있단 말이오.”
“못 들으셨습니까? 이건 천상의 신들께서도 용납하지 않을 반역이란 말입니다!”
“정녕 그러하다면, 기도드리시오. 성직자답게 말이오, 주교님. 그리하여 신들께서 신탁을 내려 이 미천한 종이 움직여야 한다고 분부하시면 그 고귀한 뜻에 따르겠소. 하지만 그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테요.”
이후로도 주교는 설득에 나서려 했지만 롤랑은 끝까지 버텨내는 데 성공했다.
결국 주교는 잔뜩 실망한 채 물러갔다.
그 처량한 뒷모습을 보며 롤랑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초 결심했던 대로 부탁을 거절한 마당이다. 그러나 미리 걱정한 만큼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하기야 비카파 따위가 갇혀있다 해서 뭐 그리 양심에 가책이 올 것인가?
한결 밝아진 마음으로 롤랑은 생각했다. 새로운 영주와도, 정치와도 거리를 두는 이 중립 자세를 유지하자고. 또 무언가 이번 영주에 관련된 부탁을 듣게 되거든 이번처럼 거절하자고.
그리고 그런 부류의 손님은 또 다시 찾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롤랑이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저택에 홀로 찾아온 노인이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롤랑 경. 면목 없지만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그 미천한 자들에게 그러했듯 도움이 절실합니다······.”
롤랑은 저 노인의 얼굴을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리느라 애썼다. 바로 기억나지 않는 것을 봐서는 자주 보지 않은 것 같은데······.
겨우 떠올려낸 롤랑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기억이 옳다면 저 노인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이유가 없는 인물이었기에.
롤랑은 확인차 물었다.
“노인장께선 아이스피시 공의 집사가 맞으시오?”
< 감옥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