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옥 - [1] >
롤랑이 비프로스트의 성벽 앞에서 느낀 것은 어쩐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이렇지 않았다. 본래 성 밖은 관문을 오가는 상인들과 순례자들, 그리고 구덩이를 소굴 삼은 부랑자들로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이 죄 빠져나간 탓일까?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끼며 롤랑은 관문 앞에 섰다.
그리고 평소와 다른 것이 하나 더.
“성문을 열라!”
롤랑의 요구에 성벽 위 초소에서 병사가 나와 외쳤다.
“통행자는 신분을 밝히시오!”
롤랑은 잠시 병사의 외관을 살폈다. 그 차림은 어쩐지 익숙한 것이었다.
‘아이스피시와 보어조아의 병사들이 저리 입었던가?’
아마 대오공국의 복장일 터였다. 어쨌건 비카파의 용병들이 평소 입던 것과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롤랑이 계속 바라보고만 있자니 병사는 언성을 높여 외쳤다.
“못 들었나? 당장 신분을 밝히시오! 그러지 않으면······”
재촉하다 못해 협박까지 할 모양새였다. 저 역시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는데, 순례자들의 대표는 대개 귀족인즉 평소 관문지기들은 저렇게 막무가내로 고함지르지 않았더랬다.
어쨌건 롤랑은 순순히 대답했다.
“메디아 후작, 롤랑. 이 도시에 거주권이 있으며 지금은 막 귀환한 참이다. 어서 문을 열도록.”
롤랑, 그 말에 성 위의 병사는 잠시 몸이 굳었다.
병사는 눈을 크게 뜨더니 롤랑의 얼굴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경.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성에다 연락을 넣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성에다 연락이라니? 난 여기 거주권이 있다니까. 출입 검사는 필요하지 않아.”
“그게······ 절차가 바뀌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경.”
그리 말하더니 병사는 성벽 위에서 넙죽 절했다.
그 움츠러든 모습을 올려다 보며, 롤랑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척 보기에도 수상한 모양새 아닌가.
“절차가 바뀌다니? 통행인이 줄어 고민인 마당에 출입을 더 엄격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롤랑의 물음에도 병사는 우물거릴 뿐이었다.
“제가 대답 드리기 곤란한 부분이라······”
십 분을 내리 기다린 끝에야 관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나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군악대를 대동한 보어조아가 외쳤다.
“비프로스트에 영웅들이 귀환했도다! 다시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롤랑 경!”
롤랑이 물었다.
“왜 그대가 나를 맞이하오?”
“영웅께서 귀환하셨는데 제 어찌 하던 일이나 계속하겠습니까?”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외다. 비카파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아닐 텐데, 보어조아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뜸 들인 끝에야 겨우 대답했다.
“경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정세에 변화가 좀 있었다고만 말씀드리지요.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 드리기는 곤란하군요. 자, 어서 도시에 드실까요?”
롤랑은 더 물으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야 겨우 도시에 들어섰다.
도시 내부는 조용하다 못해 엄중한 분위기였다. 무장한 병사들이 창을 꼬나 쥐고 도시를 순찰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보다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나무 곳곳에 매달린 시체들이었다.
교수형 당한 시체들.
롤랑은 부릅뜬 눈으로 도시를 가로질렀다. 옆에서 걷던 보어조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익숙한 풍경이지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강은 유추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입에 담기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요······.”
물론 롤랑도 예상할 수 있었다. 굳은 얼굴로 확인 차 물었다.
“당신께서 이 도시의 새로운 군주가 되셨소?”
“그리 되었습니다.”
“비카파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뭐······ 많지요. 이것저것. 어쨌건 도시의 미래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롤랑은 걷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무 위에 매달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낯빛이 변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는 얼굴이었다. 롤랑이 자주 고용했던 청소부 대표였던 것이다.
“저자는 또 왜?”
롤랑이 가리킨 시체를 보고 보어조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죄송한데 모르는 얼굴이군요. 나무에 매달린 것을 보니 고귀한 신분은 아닌 듯한데, 중요한 인물입니까?”
군악대 연주에 질문이 들리지 않은 척, 롤랑은 대답을 보류하고 걸어나갔다. 계속 걸으면서 속으로 불안하게 생각했다.
‘저렇게 많이도 죽었는데, 내 동료들은?’
그리하여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롤랑은 먼저 동료들의 안위를 살폈다.
“제이슨? 아말릭, 알론소?”
다행히 부름에 응하는 자들이 있었다. 맨 먼저 아말릭이 나와 어설프게 미소지었다.
“아, 롤랑 경. 오셨습니까? 용무는 무사히 마치셨는지요?”
“덕분에 잘 되었소. 그런데 나머지 둘은? 다 있소?”
“다른 두 분 말씀하시는 거라면 무탈하게 있습니다.”
그 말대로 곧 제이슨과 알론소도 모습을 드러냈다.
알론소가 활짝 웃는 가운데 제이슨이 물어왔다.
“앤지는? 결혼 막았냐?”
“그래, 그건 어떻게든 됐다. 그런데 대체 어찌 된 건가? 왜 도시 꼴이 이 모양이지?”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아말릭이었다.
“저희가 비프로스트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추기경께서 메디아의 새로운 섭정으로 등극했다는 소문이 퍼졌더군요. 게다가 예하의 따님은 정식후계자로 임명받았다는 소문도······. 발 빠른 누군가가 메디아에서 바로 말을 타고 달려와 소식을 전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예하와 비카파 백작의 불편한 관계는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주민들이 불안해한 게지요. 메디아의 섭정이 맘을 먹는다면 비프로스트는 물자공급 없이 고립되는 것 아닌가? 잠시 폭락했던 식량가격도 이미 원상태인 마당에, 이후로는 정말 금값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사태를 막으려면 이대로 비카파가 영주인 것은 도시에 해롭지 않은가?”
“그리하여 영주를 교체하는 데 다들 찬성했단 말이오? 하지만 겨우 그런 논란이 돌았다고 해서 군주가 바뀌다니 가능한 일인가?”
롤랑은 당장 이해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탄핵도 그리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닐 텐데, 어떻게 절대군주가 자리 잡은 이 도시에서?
아말릭이 말했다.
“단순히 밀가루 포대 가격에 전전긍긍할 주민들만 군주 교체에 찬동한 게 아니었지요. 도시에 자리 잡은 귀족들도 기꺼이 동의한 모양새더군요. 얼마 전에 비카파가 귀족들에게 빌려준 돈을 막무가내로 회수했다던데, 그 일로 다들 앙심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보어조아는 귀족들의 동의 하에 주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백작성에 밀어닥친 거지요. 그리하여 이제 비프로스트의 영주는 보어조아가 되었습니다.”
문득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오스론, 비카파 다음에는 보어조아가 영주? 롤랑, 네 후임들 꼬라지가 왜 다 이따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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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정변 소식을 접하게 된 상황이었다. 당황한 롤랑은 전우들이 무사한지 살폈다. 서둘러 심부름꾼을 시켜 자기 추종자들을 불러 모았다.
걱정과는 달리 롤랑의 귀환을 환영하러 온 기사들은 다들 무사한 모습들이었다.
“다시 오지 않으실까 얼마나 두려웠는지! 이제 곧 모험이 재개되겠군요!”
기사들의 환영인사를 대강 흘려들으며 롤랑이 물었다.
“물론 나도 여러분을 다시 뵈니 기쁘기 한량없구려. 그런데 이번 정변으로 여러분 중에 휘말린 사람은 없나?”
웬 기사가 대답했다.
“아마 없을 겁니다. 사실 이번에 사람이 그리 많이 죽지는 않았지요. 비카파의 용병들도 죄다 자기네 대장을 배신하고 보어조아 밑에 들어간 마당이니까요. 우리네 기사야 뭐, 이번 일과는 별 관련이 없었고. 걱정이 너무 크신 것 아닌지요?”
“괜한 걱정은 아니외다. 정변과 별 상관이 없을 사람이 휘말린 것을 보았거든. 웬 시체청소부가 나무에 목매달려 있던데?”
기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죄송하지만 모르는 일이군요. 이번 일에 그리 소식이 밝지는 못한지라.”
다들 마찬가지였기에 마땅한 정보는 들을 수 없었다. 또한 아말릭과 알론소도 그 일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거리에 시체가 깔린 와중에 바깥을 쏘다니며 서로 소식을 나누지는 못했으리라.
결국 롤랑은 짐을 풀고 침대에 누운 와중에도 답답함을 느껴야했다.
잠시 후 제이슨이 방에 들어왔다.
롤랑이 벌떡 일어나 물어보았다.
“너도 모르지? 그 시체청소부 왜 죽은 건지.”
제이슨은 무신경하게도 대답했다.
“몰라, 마. 그건 됐고. 결혼 막았다고? 어떻게 된 건데? 계획대로 잘 됐어? 정말 오스론이 성검 좀 못 뽑았다고 이번 약혼은 무효라고 인정하던?”
그 질문에 롤랑은 궁성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다 듣고 난 제이슨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양반 정말 죽었다고?”
“그리 되었네. 그래서 기쁘냐?”
제이슨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니, 뭔가 좀. 그 양반 죽을 짓 한 건 맞는데 말이지. 오랜 음모를 기어이 성공시켜서는 네 뒤통수 후려갈기지 않나, 제 조그만 딸이랑 결혼 하겠다고 지랄하지 않나. 그래도 그 양반, 우리한텐 잘 해줬지 않냐? 그것도 카를 새끼한테 죽었다고 들으니까 기분이 좀 뭐하네.”
제이슨이 저런 심정이라면 다른 두 동료, 특히 아말릭은 더할 터였다. 기사 서임식은 물론 사제 서품식도 오스론이 해준 터였으므로.
롤랑이 그들 앞에서 말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차, 제이슨이 물어왔다.
“카를 그 새낀 뭔 깡으로 일 저질렀냐? 프레이 그 새끼가 날 갈구는 것만 봐도 이런 일에 그냥 넘어갈 새끼가 아닌데? 아무튼 그 새끼가 이제 왕이라고? 신전에서 독재자 노릇하던 것도 모자라 정말 왕이 된 거야?”
“그래. 그래서 너한테 말 전해줄 게 있는데, 싸움을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자기네한테 돌아오라더군.”
그 말에 제이슨은 딱 잘라 대답했다.
“집어치워, 씹할. 카를 새끼 왕답게 거들먹거리는 꼴이나 보며 지내라고?”
“감정 때문에 그러는 거야? 신전에서야 잠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다 지나간 일이야. 모두를 대신해 싸워온 동료가 돌아가는 건데, 겨우 개인적인 일로 홀대할 리가 없어. 영웅 대접해주면 모를까······.”
롤랑의 말에 제이슨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 불안이 깃든 표정으로 제이슨이 물었다.
“야, 롤랑. 너 지금 나 보내버리려는 거냐? 나 이제 쓸모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롤랑의 말을 끊고 제이슨이 물었다.
“쓸모 있어, 없어?”
“쓸모야 당연히 있지. 지금 네게 돌아갈 것을 권하는 것은 전력 문제가 아니라······”
“도움 되는 거지? 그럼 됐어. 쫓아내든 말든 난 그냥 여기 있으련다.”
제이슨은 궁성에서 만난 유저들을 떠올렸다. 카를을 따라다니던 두 유저, 마치 왕과 그 부하 같은 모습이었다. 제이슨이 합류하길 바랐던 동료들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보지 못한 사이에 신전에 남은 그들마저 변해버린 것일까? 그 변화를 제이슨은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나 빼고는 다 변했다고? 왜?’
방안에 침묵이 깔렸다.
이후로는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다.
정변 후 아직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보어조아로서는 자기 자리를 다지느라 바쁜 마당이었다.
보어조아는 그 인품이야 어찌 됐든 세계수 공략에 빼놓을 수 없는 전력이다. 그런 그가 세계수에 오를 상황이 아닌 이상 롤랑도 당장 세계수를 오르는 데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그동안 쓰지 않은 무구를 정비하고, 새로 얻은 칼의 성능을 시험하는 등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던 와중이었다.
저택의 하인이 말을 걸어왔다.
“롤랑 경? 손님이 왔습니다.”
롤랑이 물었다.
“손님이라니, 누군가?”
“이름을 밝힌들 모르실 거라 했습니다만, 몇 번 세계수를 같이 오른 사이라 주장하더군요. 내쫓을까요?”
“아니, 일단 나가보지.”
롤랑은 예의 정체 모를 손님을 만나러 저택을 나섰다. 그러고는 대문 앞에 웅크리고 서있는 꾀죄죄한 행색들을 마주했다.
거지꼴을 한 남자들. 어디서 두들겨 맞았는지 퉁퉁 부은 그 얼굴들을 롤랑은 어떻게든 알아보았다.
한 남자가 터진 입술을 열어 인사했다.
“롤랑 경······ 만나주셔서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이 미천한 몸을 소개하자면······”
롤랑이 말했다.
“두 분은 알아보겠군. 넬, 이슨. 괴물들 시체청소 관련으로 몇 번 도움주신 분들 아닌가. 어쩐 일로?”
롤랑이 그 얼굴을 알아보자 청소부들의 얼굴에 핏기가 살짝이나마 돌아온 것 같았다. 그저 피멍이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마는.
“도움이······”
말하다 말고 청소부들이 엎드려 절한 순간 롤랑은 놀라지 않았다. 예상한 일이었으므로.
청소부들은 이마를 지면에 박은 채 고함질렀다.
“도움이 절실합니다, 롤랑 경!”
< 감옥 -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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