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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트롤랑-128화 (128/164)

< 제실 - [3] >

이후로 나흘이 지났다. 연이은 장례와 외교관들의 출입으로 메디아 궁성은 고요한 동시에 소란스러웠다.

한편 아서 왕이 섭정으로 인정받기 위한 절차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요 며칠 아서 왕은 여기저기 얼굴을 비치고, 귀족들을 상대하고, 외교관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리 바쁜 가운데 지금 롤랑과 마주한 것은 겨우 시간을 낸 결과였다.

롤랑과 아서 왕은 탁자를 마주보고 앉아 펜 한 자루씩을 쥐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시작했다.

말이 아니라 필담으로. 한글을 종이에 적어 대화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롤랑의 물음에 카를은 담담하게 적어 내렸다.

‘세간에 투명화 주문은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더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았다. 롤랑은 분노에 차 펜을 움직였다.

‘역시 네 짓이었나? 투명해져서, 오스론의 팔을 강제로 움직여 그 목을 베었다고?’

롤랑에게는 애석하게도, 아서 왕은 부정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란슬롯이 했다. 내 지시로 말이야. 원래는 다른 사람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 했는데 란슬롯이라면 내 오른팔이니 괜찮겠다 싶더군.’

‘란슬롯이 설마 랑슬로 말하는 건가?’

‘물론. 뭐 사실 같은 이름인데 발음만 좀 바꿨을 뿐이지.’

‘이 일을 꾸미고자 성검을 빌려갔던 거고?’

‘그래. 그 성검으로 모지와 이런저런 실험을 해보았다. 내가 성검을 들었을 때 그 광채는 어느 정도인가? 직접 들어보니 그 광채가 실로 눈부셨다. 들고 있기만 하면 인세에 내려온 신으로 보이는 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 란슬롯이 성검을 들 수 있는가도 시험해보았더니 다행히 축복 한 번 걸어주면 들 수 있더군. 하기야 네가 가능하다면 란슬롯이 못할 리 없었지. 란슬롯은 네 복제 캐릭터 아닌가? 네가 처음 성검 광전사 트리를 개발했고 란슬롯은 그걸 베낀 것이니까.’

묻지도 않은 것까지 주절주절. 적어내리기 힘들 텐데 굳이 그러는 이유야 뻔했다. 말을 돌리려는 것이다.

롤랑은 짜증을 숨기지 않고 적었다.

‘대체 일을 어찌 감당하려고 그랬던 건가? 모두 앞에서 암살하여 쿠데타라니, 미친 건가?’

‘성공했지 않나. 아무도 투명화를 언급하지 않는 걸 보니 우리를 범인으로 의심하지 않는 모양새던데.’

‘신들은? 후손의 약혼을 두 눈 뜨고 지켜보고 있었을 프레이 신은 그냥 넘어가겠고? 대체 신의 분노를 어찌 감당하려고 그 후손을 죽였지?’

‘즉각 보복해오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리 한가롭게 생각하나? 여긴 신들이 실존하는 세계고 우리의 존재가 그 증거다. 왜 무사히 넘어가리라 생각하나?’

롤랑은 도저히 저 친구가 저지른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감히 신들이 지켜보는 세상에서 그 후손을 해칠 수 있단 말인가?

롤랑은 약혼식을 방해하려는 계획만으로도 신의 분노가 두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것은 프레이 신의 체면을 구기는 일일지도 몰랐으므로.

그에 비해 저 친구가 저지른 일은 상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아서 왕이 펜을 끄적였다.

‘모지가 말하더군. 프레이 신도 명예로운 발할라 전사들의 복제를 제 후손만을 위해 멋대로 만든 주제에 당당하지는 못하리라고. 당당하지 않은 일인 만큼 보복도 대놓고 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옛 마법사가 그리 말했으니 믿을 만하지 않은가?’

‘대놓고 못할 뿐 음습하게는 보복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그 정도의 보복은 감당할 가치가 있다.’

‘왜?’

‘우리의 고삐를 쥔 음모꾼 추기경을 제거하고 나라의 수장 자리를 차지했다. 정말 가치가 없겠나?’

‘족보도 모를 현대인이 중세국가의 왕좌에 걸터앉는다니? 거의 불가능하거나 끔찍하게 힘든 일을 왜 굳이?’

‘학생회장 자리를 인수인계 받는 것과는 천지차이임은 안다. 물론 어렵겠지. 하지만 잘 되도록 해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롤랑은 눈살을 찌푸리며 펜을 적으려다 말았다. 대신 입을 열어 물었다.

“왜 그래야 하는데?”

“무슨 소린가?”

“왜 난데없이 왕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건데? 쉽지 않으리란 건 둘째 치고 왜 그러고 싶은 거냐고? 자식을 낳아 그 감투 물려줄 수도 없는데 대체 왜?”

“모두를 위해서.”

“모두? 신전의 동료들?”

“그래. 내가 왕이 되는 순간 그들은 신전보다 나은 안식처를 얻게 된다. 언제 메디아 왕족이 고삐를 휘둘러 전장에 내보낼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게 되고. 그러다 죽으리란 걸 두려워할 필요도 없게 된다. 우리가 주도권을 쥠으로써 말이야. 노예에서 진정한 전사 집단으로 승격하는 셈이다. 이것보다 큰 가치가 어디 있나?”

아서 왕은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롤랑을 쳐다보았다.

물론 롤랑은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그리 쉽게 말하느냐고. 정말 대뜸 살해하는 것이 최선이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결국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마는.

이미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이 밝지는 못했다. 롤랑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 안색을 살피더니 아서 왕이 말했다.

“그리고 이제 너도 자유다, 롤랑. 오스론이 죽은 이상 목숨 걸고 싸울 필요가 없으니.”

그제야 롤랑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뭐?”

“난 계속 싸워야 해.”

“오딘을 구하려고?”

“그래. 그래야만 진정한 완결이니까.”

아서 왕은 탁자 위에 팔을 얹더니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 역시 한동안 입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정말 계속 싸우겠단 말인가?”

“그래.”

“오딘 구출은 게임으로 치면 트루 엔딩이겠지. 주신을 구해내 소원을 빌기······ 물론 그리 되면 좋겠지만······ 지금 이것도 완결이다, 롤랑. 노멀 엔딩이지만 그래도 배드 엔딩은 아니라고.”

“하기야 그리 볼 수도 있지. 소환되어 벌벌 떨던 쭉정이들이 왕궁을 차지한 상황이니까. 출세한 셈이네.”

“그래, 출세 엔딩. 최고의 엔딩은 아니라서 거슬리나? 하지만 이것도 게임이라면 해피 엔딩으로 봐줄 만한 엔딩이다. 여기서 한 단계 끌어올리겠답시고 사투를 계속할 필요는 없어.”

“사투를 계속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궁에서 그저 시간만 죽이라고?”

“시간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거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넌 이미 충분히 싸웠다, 롤랑. 이제 그만해도 돼.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다. 오딘? 목매단 신은 그냥 거기 있게 내버려 둬. 그런들 아무 탈 없지 않나.”

롤랑은 어디서 감히 주신을 함부로 말하느냐 화낼까 생각했다. 신들이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지금, 롤랑만은 광전사답게 구는 것이 안전했으니까.

그러나 이내 그런 연기 따위는 집어치우고 롤랑은 말했다.

“아니, 그렇겐 못해.”

“대체 왜?”

“이미 해온 게 있으니까. 전쟁신이, 비프로스트의 주민들이 날 기다리고 있어. 모든 걸 다 내팽개치고 그저 앞으로 일이 무탈하게 흘러가기만을 바랄 수는 없어. 그럴 수는 없는 거야······.”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싸우러 나가겠다고?”

“그래.”

롤랑과 아서 왕은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았다.

롤랑은 눈앞의 남자를, 이하종을 잘 알고 있었다.

이하종이 판타지 매니아이며, 판타지 매니아라면 으레 그러하듯 중세 이야기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이하종이 중세국가를 쉽게 운영할 수 있으리라 믿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롤랑은 이하종의 집에 갖가지 판본의 그리스 신화들이 꽂혀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옛 신화에 나오는 신들.

인격신들.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으로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진 그들의 분노는 불합리하면서도 끔찍하다. 그런 신의 분노를 이하종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머릿속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롤랑과 같은 두려움이.

미래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영웅답게, 더 나은 길을 개척해야 했다.

한참의 눈싸움 끝에 롤랑이 말했다.

“비프로스트에 돌아가서 제이슨한테 말을 전해줄게. 더 안 싸워도 될지 모른다고······ 모지한테 말하면 거절할 것 같은데, 그래도 말은 전해야겠지?”

그 순간 허공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롤랑.”

그리고 허공에 그림이 그려지듯 모지가 나타났다. 순간이동이 아니라 투명화 주문의 해제일까.

“여기 있었나?”

롤랑의 물음에 모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아무튼 네가 계속 싸운다면 나도 당연히 함께한다. 앞으로도.”

롤랑은 조금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아니, 모지. 넌 남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진짜 영웅의 기억을 가진 네가 옆에서 보좌해주면 카를이 여기서 자리 잡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모지가 눈살을 찌푸리려던 차, 카를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알아서 잘해보지.”

“정말 자신 있는 건 아닐 텐데?”

“그래도 해봐야지. 칼로 싸우느니 보다 입으로 싸우는 게 나으리란 건 분명하니까. 그래, 앞으로도 싸우겠다고? 당연히 말리겠다. 친구로서. 하지만 정 가겠다면······ 가라. 죽지 말고, 현성.”

“너도, 하종.”

*******

며칠 후. 롤랑과 모지는 조용히 메디아 궁성을 나섰다.

귀빈이 궁성을 나서는 것이니 말없이 나설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궁성 차원에서 배웅이 있기는 했지만 그 인원은 많지 않았다. 궁성은 여전히 바빴으므로.

그러나 배웅하러 나온 인원에 조그만 얼굴이 섞여있었다.

오스마 공주가 입을 열었다.

“기사님.”

“예, 공주. 말씀하십시오.”

“예는 됐어요. 그냥 전······”

“감사는 표하지 마십시오.”

오스마 공주는 그것이 겸양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고귀한 여성에게 봉사한 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기사다운 말.

“그럴 수가 있나요. 정말 고······”

그 말이 더 나오기 전에 롤랑은 딱 잘라 말했다.

“감사를 표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슬픔이겠지요. 아버지를 잃은 공주라면 그래야 합니다.”

“저는······”

오스마 공주는 전혀 슬프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롤랑이 지금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럼 달리 누구를?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 궁녀와 귀족들이 있었다. 공주가 앞으로 그 시선을 신경 써야 할 사람들.

오스마가 질린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 보는 가운데 롤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

“예, 기사님?”

“혼란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그 얌전하면서도 가끔 이상하게 건방졌던 종자 아이라면요.”

앤지는 씩 웃었고 롤랑이 말했다.

“모쪼록 몸 건강히.”

이제 롤랑은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오스마가 외쳤다.

“잠깐!”

그러더니 궁녀를 시켜 무언가를 지시했다. 분부 받은 궁녀는 잠시 궁에 들어갔다가 웬 칼을 들고 나왔는데, 당장은 천으로 꽁꽁 싸여있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메디아 가문에 내려오는 명검이래요. 그래봤자 이름도 모를 검이지만요. 그래도 지금 기사님한텐 필요할 거 같아서.”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지금 롤랑이 찬 칼이라고는 장검 한 자루뿐이었으니까.

성검은 아서 왕에게 내주었다. 나라를 통치하려면 권위가 있어야 할 터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발리사다마저 내주어야 했는데, 자기네 가문이 룬검의 주인이라는 남자가 궁에 나타나 반납을 요구했던 것이다. 보물을 돌려받기 원하는 탐욕스러운 얼굴이 아닌, 아들을 잃어 창백해진 아버지의 얼굴로.

“더없이 고마운 전송선물이군요. 감사히 받지요.”

롤랑은 공손하게 양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앤지는 궁녀에게서 뺏어든 그 칼을 바로 내주지 않았다.

롤랑이 의아해하는 차 앤지는 칼을 싸고 있던 천을 벗겨내었다. 그러고는 이미 잔뜩 손질해서 번들거리는 칼을 다시 한 번 닦아내며 말했다.

“신께서 돌보시는 바, 이 무기가 결코 주인을 배신하지 않길.”

익숙한 축사. 롤랑은 웃으며 마주 말했다.

“괜한 걱정이노라. 주인이 먼저 그러지 않으면 도구는 그저 사용될 뿐이니.”

“잘 가요, 기사님. 안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정말 고마웠어요.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앤지라 불러주세요. 예전처럼.”

롤랑은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씩 웃더니 말했다.

“오냐, 앤지. 나도 즐거웠다.”

이제야말로 롤랑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어린 소녀, 혹은 소년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 제실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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