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27화 (127/164)

< 제실 - [2] >

바닥에 꽂힌 성검은 은은한 빛을 퍼뜨렸다. 자연스럽게 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낸 신성한 빛.

오스론도 성검을 바라보고는 팔짱을 끼었다.

불만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대체 바닥에 박힌 칼을 뽑아내는 것과 결혼의 합당성 여부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어떤 칼인지 모르는가?”

“알기야 알죠. 하지만······”

“무슨 칼인지 말해보라.”

“예?”

“무슨 칼인지 말해보란 말이다.”

롤랑의 요구에 오스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스론도 저 칼이 서사시에도 떡 하니 나오는 전설의 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여기 모인 모두들 진귀한 것을 보았다며 탄성을 내지를지도 모른다.

괜히 칼에 권위를 실어주기 싫었던 오스론은 에둘러 말했다.

“오딘께서 당신의 아들을 위해 내리신 칼이지요.”

“그렇지. 아주 옛날, 영웅의 아비가 물푸레나무에 박혀있던 이 칼을 뽑아들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될 여성에게 청혼하며 헌신과 사랑을 맹세했다. 그리하여 사랑을 증명하자 오딘께서 물푸레나무에 꽂아 넣으셨던 이 칼이 뽑혀 나왔다!”

롤랑은 지금 옛 서사시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장면을 언급하고 있었다. 영웅 지크프리트의 아비 지크문트가 성검을 차지하는 장면. 그 장면과 서사시가 너무나도 유명했기에 좌중의 모두는 저 칼이 어떤 물건인지 알아차렸다.

“노퉁?”

“발뭉······.”

그람, 노퉁, 발뭉. 악룡 파프니르를 벤 오딘의 성검. 하도 유명한 나머지 가리키는 이름도 여럿인 전설의 검을 가리키며 롤랑이 외쳤다.

“그런데 왜 관련이 없단 말인가? 당신의 청혼이 유효하며 진실하다면! 그리하여 그 혼약을 신들께서 가호할 가치가 있다면! 프레이 신은 물론 위대한 오딘께서도 그대를 축복하리라! 그리고 그 증거로 옛 영웅의 아비가 청혼하였을 때 그러했듯 성검이 뽑혀 나올 것이다!”

옛 일화까지 들먹이다니. 오스론은 골치가 아파왔다.

저 칼의 전설이야 어떻든 오스론은 자신이 저 칼을 뽑을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았다. 이미 몇 달 전에 롤랑 몰래 뽑아보려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것이다.

당시 오스론은 자신이 반신인즉 그 혈통에 깃든 신성이 남다르리라 믿었다. 그리 자신감 있게 칼자루에 손을 가져간 순간 칼자루가 달아오르더니 손을 데어버렸다.

오스론은 생각했다. 그때 저 칼은 자신을 거부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프레이 신도 답하지 않은 마당에······.’

오스론은 노려보다시피 성검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는 끄트머리만 살짝 꽂혀있던 성검은 점차 바닥에 파고들고 있었다. 칼 끄트머리에 눌어붙어 있던 반지는 이미 녹을 대로 녹아 잔뜩 퍼진 상태였다.

롤랑이 다그쳤다.

“어서 칼자루를 쥐어라!”

오스론은 그 외침에도 멀뚱히 서 있다가 말했다.

“굳이 뽑아들 필요가 있나 싶은데요. 보세요. 반지가 다 망가졌지 않습니까?”

“형체만 잃었을 뿐이며 반지를 구성하던 금은 증발하지 않았다! 칼을 뽑아내어 회수한 다음 다시 모양대로 굳히면 될 일 아닌가?”

“어느 왕가에서 금이 아까워 한 번 망가진 반지를 주워다가 다시 만든답니까······.”

오스론은 웅얼거리다시피 했지만 롤랑은 소리 높여 외쳤다.

“어째서 반지의 변화 따위에 주목하는가? 지금 중요한 것은 그대의 청혼이 유효함을 증명하는 일, 그러기 위해 옛 전설을 재현하는 일이다! 저놈의 조그만 반지가 아니라!”

그 목소리는 회장에 쩌렁쩌렁 울리며 모두의 귀에 확실하게 파고들었다. 훌륭한 웅변가가 외치는 것처럼,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과연 모여든 귀족들은 롤랑과 칼만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오스론은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저 썩을 놈의 기사가.

상황을 보아하니 이 자리의 귀족들이 알아서 이쪽 편을 들어 저 요구의 부당함을 지적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오스론 혼자 알아서 해야할 텐데, 어떻게?

오스론은 어찌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을지 고민했다. 더 뻗대봤자 추하기만 할 것 같은데. 일단 항복하고 약혼은 롤랑 저자가 비프로스트로 떠나가면 진행하는 것이 나을까······.

오스론이 침묵하는 가운데 롤랑이 외쳤다.

“뽑아들지 못하겠는가? 그것은 이 약혼이 부당함을 그대 스스로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궁니르에 맹세하라! 이 약혼을 파기하고 오스마 공주에게는 다른 배필을 찾아주겠노라고!”

오스론은 순간 욱해 부르짖었다.

“다른 배필 따윈 없단 말입니다!”

“메디아 가문에는 그저 혈통의 순수가 의심스러울 뿐인 남성들이 그대 이외에도 남아있다고 들었다! 그들 중 하나와 짝지어주면 될 일 아닌가!”

“피의 순수를 더럽히면서 말입니까!”

“메데이아 공께서도 완전한 반신은 아니셨을 터, 거기에 인간의 피가 조금 더 섞인들 뭐 그리 문제인가? 피가 더러워져? 딸과 아비가 맺는 것보다는 더럽지 않다!”

그리 외치는 롤랑의 목소리에 깃든 힘, 그 포효와도 같은 위압감에 오스론은 주눅 들었다. 역시나 이쪽이 밀리는 느낌이었다.

패배, 그 사실에 오스론은 굴욕감을 느꼈다. 그리고 굴욕감은 이내 분노로 화해 입을 움직였다.

“닥쳐!”

오스론은 일순 놀랐다. 자신이 저 롤랑에게 화내다니? 거대한 늑대괴물에게 홀로 뛰어 들어 죄 죽여 버리던 기사에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오스론은 움츠러들었고, 더한 굴욕을 느꼈으며 분노 또한 절로 커졌다. 그리하여 고함질렀다.

“감히 누구 집안일에 이래라저래라 큰소리냐! 당신이 뭔데! 한낱 가······”

뒷말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오스론은 자기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억센 손으로 자기 팔을 강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실제 오스론의 팔은 강제로 움직여 앞으로 뻗었다. 미지의 힘이 그 팔을 붙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악!”

오스론의 비명과 함께 팔이 앞으로 당겨졌다. 그리하여 팔과 연결된 몸도 앞으로 움직였다.

이내 오스론은 바닥에 꽂힌 성검 앞으로 끌려갔다.

오스론은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놀라 비명 지르며 눈을 감았다. 성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너무 눈부셨기에.

눈 감은 와중에도 팔은 알아서 움직였다.

오스론의 팔이 앞으로 뻗었다. 그 손가락마저 강제로 펼쳐지고, 오스론의 손은 성검을 쥐게 되었다.

그 손이 위를 향하자 성검이 뽑혀 나왔다.

그 장면을 좌중의 모두는 크게 뜬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칼이······”

롤랑 또한 뽑혀 나온 성검을 붕 뜬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롤랑이 예상하기에 오스론이 저 칼을 뽑는 것은 불가능했다. 반신이니 뭐니 해도 같은 일족인 앤지는 정화 기도의 효력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오스 왕은 소생 주문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부활하지 못했다.

그것은 메디아 혈족이라 하더라도 그 신성이 초월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니 저 성검을 뽑아드는 것은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롤랑은 문득 앤지, 어린 오스마를 바라보았다.

그 작은 몸은 얼어붙어 미동조차 없었다. 저 아이 또한 직감했으리라.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을.

앤지와 함께 롤랑 또한 절망했다. 프레이 신의 권위에 맞서 오딘의 권위를 빌려 결혼을 망치는 일을 꾀했는데 실패해버린 것이다.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더 이상 일을 저질렀다가는 프레이 신뿐만 아니라 오딘에게도 분노를 살 것이다.

‘미안, 앤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롤랑은 눈을 감아버렸다.

한편 뭔지 모를 감촉을 느낀 오스론은 미칠 것 같은 와중에도 눈을 떴다.

그리하여 자신이 들고 있는 성검, 그 칼날에 새겨진 늑대 문양을 보게 되었다.

자신이 성검을 뽑았다?

어떻게?

설마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은 프레이 신의 의지였나?

환희가 그 몸을 흠뻑 적셨다. 오스론은 이 감격을 표하고자 뽑아든 성검을 높이 들어 모두에게 내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성검을 쥔 팔은 여전히 미지의 힘에 붙들려있었고 오스론 자신이 움직일 수 없었다.

오스론은 기쁜 와중에도 답답함을 느끼며 기도했다.

“프레이 신이시여, 도움에 감사드리며 이제 그만 당신의 후손이 알아서 해낼 수 있게 해주시기를······.”

그러나 그 기도에 반응한 것은 프레이 신이 아니었다.

성검과 그것을 붙잡은 오스론의 팔이 함께 움직였다.

오스론의 눈에 그 검신이 비췄다. 검신에 새겨진 늑대가 자신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이내 오스론의 팔이 휘둘러졌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딸려 성검의 칼날이 궤적을 그렸다.

피와 연기가 튀었다.

그제야 눈을 뜬 롤랑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확장된 동공으로 바라보았다.

오스론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쳐 쿵 소리를 내더니 구르기 시작했다. 그 절단면에서 피와 연기를 뿜어내며.

머리가 사라지고 남겨진 오스론의 목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피는 화산처럼 피를 산발적으로 뿜어내며 연기를 피워냈다.

오스론의 몸이 비틀거리다 말고 쓰러졌다. 그리고 성검을 쥐고 있던 손은 그 칼자루를 놓지 않았지만, 칼이 그 손을 거부했다.

쓰러지던 오스론의 손이 불탔다.

그리하여 그 손에서 벗어난 성검은 옆으로 떨어지다가 수직으로 곧추 서더니 바닥에 깊숙하게 박혔다.

머리와 손을 잃은 오스론의 몸이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처럼, 롤랑은 이 상황에 무어라 말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다 함께 멀거니 서있던 그때였다.

침묵이 깔린 가운데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뒤이어 강철 신발이 바닥을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들 힘없이 고개를 돌려 난입자를 바라보았다. 롤랑도 그 인물을 바라보고는 숨을 죽였다.

찬란한 은발의 중년사내.

중무장한 카를은 망토를 휘날리며 힘 있게 다가왔다. 그리고 오스론의 시체와 그 앞에 꽂힌 성검 앞에 서서는 입을 열었다.

“신의 징벌을 보았는가?”

“너······”

무언가 말하려는 롤랑을 무시하고 카를은 계속 외쳤다.

“왕의 암살자에게, 자기 딸과 몸을 섞어서까지 왕좌를 차지하려던 반역자에게 내린 신의 분노를 보았는가!”

때마침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롤랑이 중얼거렸다.

“카를······”

그러나 카를은 외쳤다.

“내 근원은 빛의 수호자 카를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그 분의 모습과 신성한 피가 이 몸에 흐른다! 그러니 나 또한 왕을 자처할 수 있는 신분이라! 내 이름은 아서! 아서 왕이다!”

모두들 그런 이름의 왕을 알지 못했다. 그저 의문에 차 중얼거렸다.

“그게 뭔?”

그리고 카를, 자칭 아서 왕이 외쳤다.

“나는 발할라에서 내려왔노라!”

“소환된 영웅이란 말입니까?”

“그렇다! 저 간악한 자의 부름에 응하여, 그 가문을 돌보고자 지상에 강림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저렇게 죽어버렸으니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이제 우리의 책무는 어찌 되는가? 우릴 부른 장본인의 목숨과 함께 사라지는가? 그러나 우리의 임무가 사라졌다면 이 육신은 소멸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책무는 사라지지 않은 것인가? 천상의 신들이여, 대답해주십시오!”

그리 묻더니 아서 왕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바로 그 앞에 성검이 꽂혀있었다. 이제 롤랑이 다시 뽑으려면 애먹을 법하게 깊숙이.

아서 왕은 그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마치 두부에서 이쑤시개를 뽑아내듯,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성검은 아무런 저항 없이 뽑혀 나왔다.

검신에서 폭발하듯 빛이 발산되었다. 그 광원을 높이 들어올리며 아서 왕이 외쳤다.

“이것이 신들의 대답이다!”

난데없이 태양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모두들 눈부신 동시에 그 광원에서 열기를 느꼈다. 성검은 넓은 회장 전체를 덥히고 있었다.

그리고 아서 왕은 지상에 내려온 태양신처럼 외쳤다.

“나 발할라의 전사로서 우리를 보낸 신들을 대신하여 선언한다! 우리의 책무는 이행될 것이다! 우리는 이 나라 메디아를 구하러 왔으니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다! 그리고 섭정이 징벌로 사라진 지금,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아서 왕이 검을 내렸으나 성검의 빛은 여전히 강렬했다. 그래서 좌중의 사람들은 신성한 왕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자연스레 모두가 고개 숙인 가운데 아서 왕이 선언했다.

“혼란의 시기가 끝날 때까지 위대한 대제의 자손, 나 아서 왕이 이 나라를 돌볼 것이다!”

*******

< 제실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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