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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트롤랑-124화 (124/164)

< 궁성 - [4] >

모지는 마치 닭 한 마리의 목을 비틀겠다는 것처럼 말했다. 말투마저 가볍기 그지없었다.

살인계획을 언급한 장본인이면서도 카를은 무심결에 물었다.

“정말 죽일 건가?”

“그럼 내버려둘 수 있나.”

“놈이 기아스를 건 것은 확실하고?”

그 질문에 모지는 더없이 한심스럽다는 투로 대답했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게 어디 있나?”

“그럼 확신도 없으면서 대뜸 죽이겠단 건가?”

“답답한 말을 하는군. 죽이지 않으면 당신이 죽을 판인데. 왜? 죽은들 발할라로 돌아갈 뿐이라 믿는 건 아니겠지, 이하종? 그 넋이 불멸이라 믿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 당신의 영혼은 불완전하고 죽음은 진정한 종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진짜 카를 대제가 아닌 그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카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스론을 죽여야한다고 직접 말을 꺼낸 마당이다. 그러나 새삼 생각해 보니 역시 증거도 없이 살해부터 시도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굳게 입을 다문 카를을 보며 모지는 비웃었다.

“당신은 방금 살해당할 뻔했지 않은가. 그런데도 증거가 없다고 죽이기 껄끄러워 하는 이유가 뭘까? 무죄추정의 원칙은 아니로군. 후환이 두려운 일을 하는데 도덕적 흠결마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거야. 저지르기 무섭고 더러운 일을 할 거라면 정당한 이유라도 있길 바랄 뿐이지?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겁먹은 게지, 당신?”

“왜 자꾸 당신, 당신······”

“뭐 죽이기 전에 명분을 쌓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발상이야. 뭐니 뭐니 해도 프레이 신의 후손을 죽이는 일이니까. 그 분노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정당성은 필요하지. 그럼 증거를 수집해오겠네.”

“증거라니.”

“우리를 소환한 계약서야말로 최고의 증거가 되겠지. 거기에 기아스가 언급되어 있으면 의심할 여지없이 오스론은 흉수인 거야. 하지만 그런 귀한 목줄을 아무 데나 두지 않았을 테니 당장 찾아내기는 힘들 테고, 그보다 못한 증거라도 찾아내야 할 텐데······”

말하다 말고 모지는 침대 위의 랑슬로를 가리켰다. 복도 밖이 소란스러운데 아직도 잠들어있는 모습. 명백히 비정상적인 그 태평함을 가리키며 모지는 말했다.

“수면제 탓이라네. 아주 강력한 마법적인 수면제. 오늘 자네들한테 준 벌꿀술에 들어있었지. 그 탓에 롤랑도 퍼질러 자고 있어. 롤랑은 고대 영웅이라면 벌꿀술을 마셔야한다는 편견이 있는 모양이라 벌컥벌컥 들이마셨거든. 발할라의 전사에게 통할 약이라면 한정되어 있지. 그런 게 만약 오스론의 수중에서 발견된다면······”

갑자기 모지의 모습이 사라졌다. 투명화 주문의 존재는 알았지만 거기 익숙하지 않았던 카를은 놀라 굳어버렸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모지가 돌아와 말했다.

“오스론의 방에서 수면제를 발견했다. 맨드레이크 비약, 희미하게 마력이 깃들었지. 악마를 시키니 간단하게 찾을 수 있더군. 계약서는 못 찾았지만 뭐······.”

“수면제 이름까지 아나? 익숙한 모양인데, 그 향이나 특징까진 몰랐던 건가?”

“알았지. 아니까 벌꿀술에 약 냄새가 나서 안 마셨어.”

카를은 잠시 굳어 있다가 물었다.

“왜 롤랑에게 경고하지 않았나?”

추궁이었지만 모지는 간단하게도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오스론 짓이라 짐작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오스론 짓이라면 놈을 죽여야 할 테니, 롤랑은 잠들게 해둬야 했어. 표정을 보아하니 그 이유도 모르는 눈치로군? 설명해주지. 오스론 살해에 롤랑이 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 말한 뒤 모지는 카를의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굳은 얼굴, 역시나 이유를 모르는 모양새였다.

과연 카를은 질문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이 중요한 일에 롤랑을 빠지게 한다고? 왜?”

이것까지 설명해주어야 한다니. 모지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고귀한 기사가 왕족을 죽여선 안 되니까. 위대한 롤랑을 반역자, 고용주 살해자로 만들 수는 없어. 그 역할은 네 몫이다. 카를의 그림자. 왕족을 죽이는 것은 황제여야 하는 거야.”

카를은 그 이유마저 물으려다 말았다. 기사는 왕족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들어본 적 없는데, 중세적 관념일까?

아니었다. 모지는 되는 대로 지껄였다. 이 일에 롤랑이 끼지 않기를 바랐기에.

오스론은 프레이 신의 후손이다. 그 후손도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 그자를 죽인다면 프레이 신은 복수할 것이다. 자기가 내려 보낸 전사들이 감히 자기 후손을 죽이다니, 하고 분노하면서.

모지는 생각했다.

‘롤랑이 그 분노를 받아서는 안 돼. 설령 프레이 신이 넘어간다 할지라도 이런 더러운 일에 가담해서는 안 돼. 롤랑은 고생해서 위업을 쌓았다······. 그 영광스러운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게 만들 수 없어. 그 명예를 얼룩지게 해서는 안 되니까. 그러니 더러운 피를 손에 묻히는 건 네 역할이다, 이하종. 친구가 사투를 벌일 동안 신전에서 무위도식한 비겁자의 역할.’

여전히 굳어있는 카를에게 모지가 말했다.

“우선 기아스에 저항할 방법부터 생각해보지. 사실 벌써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아마 리모컨? 그게 있는 것처럼 불러낸 영웅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러 명을 동시에 조종할 수도 없을 테지. 기아스가 그리 편리한 마법도 아니거니와 오스론 본인부터 강력한 마법사도 아니니까. 약간의 수단을 강구하면 당신은 기아스의 속박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이름을 바꾸어라.”

“이름을?”

“그래, 계약서에 카를의 이름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 계약관계에서 이름은 중요한 법이다. 그것을 바꾸는 것만으로 계약의 속박이 한결 헐거워질지도 몰라. 다른 이름을 골라 개명해라. 바꿀 이름을 미리 생각해둬. 대충 짓지 마라. 이름에 힘이 깃드는 법이니······.”

*******

아침이 되자 오스 왕의 부고는 롤랑의 귀에도 들려왔다.

롤랑은 당황스러워 물었다.

“자결이라고?”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오스론이었다.

“예,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롤랑은 오스 왕의 자살 동기를 생각해보느라 애썼다.

역시 회장에서는 관대한 척 넘어갔어도 실은 분통이 터졌나? 자기 아내가 예전에 바람났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아니면 황금사과를 웬 계집애에게 빼앗긴 나머지 자기 아내가 이대로 죽으리란 사실에 절망했나?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았다. 물론 화날 일이지만, 바로 제 목숨을 끊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게 뭔······.”

중얼거리는 롤랑에게 오스론이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답답하시겠지만 한동안은 방에 계시는 것이 좋겠군요.”

뒷말은 짐작할 만했다. 사람들은 롤랑이 사과를 엉뚱한 자에게 주어버린 탓에 이 사태가 벌어졌다고 수군거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것이 나았다.

이후로 시간이 흘렀다.

롤랑의 일행도 가만히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말릭이 오스 왕의 시체에 치유와 소생의 주문을 걸어보기도 했다. 그저 시체가 꿈틀하고 말았지마는.

결국 그대로 장례식 일정이 잡혀가던 와중이었다.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들어온 얼굴을 보고서 롤랑은 침대에 누워있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스마 공주?”

앤지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롤랑 경이라 부르십시오. 여기는 어떤 일로? 앞으로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남자 있는 방에 고귀한 여성이 홀로 발을 디뎌서는 흉이 됩니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앤지에게 롤랑이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앤지는 조금 뜸 들여서야 말을 꺼냈다.

“저는 이제 기사님의 종자가 아닌가요?”

“아쉽게도. 처음부터 앤지는 제게 과분한 종자였는데 이제는 저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감히 시중을 요구할 수 없는 신분임이 드러났지 않습니까.”

“하지만 전 기사님을 따라가고 싶은데요······.”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것인가. 롤랑은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나 어린 공주에게 화내는 것은 기사답지 않다. 롤랑은 여전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성이 되어 아직도 혼란스럽습니까? 이해합니다.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면 더 이상 험한 종자 노릇 따위에 관심가지 않을 겁니다. 고귀한 여성을 위한 많은 것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요.”

“남편도 말인가요?”

“예, 어쩌면. 물론 남자와 결합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겁니다.”

롤랑은 다독이려 애썼으나 앤지는 거의 울 것처럼 말했다.

“그 남편이 늙어빠진 추기경이라도 말인가요?”

“무슨 소리입니까?”

“예하가, 그러니까 제 아버지가 섭정이 죽은 지금은 비상상황이라 선언했어요. 그리고 이제부터 자신이 섭정하리라 선언했어요.”

지나치게 빠르기는 해도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왕이 죽자마자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너무 속보이는 짓이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 죽은 것은 진짜배기 임금이 아니라 일개 섭정이 아닌가. 그 빈자리를 대신하겠다는 것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앤지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메디아 가문의 수장이자 섭정으로서 첫 임무을 수행하겠다고 했어요. 우선 혼처가 정해지지 않은 오스마 공주의 배필을 정하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남편은 메디아 공작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게 법도라고요.”

그 말에 이르러서야 롤랑은 충격을 받았다.

“오스론이 공주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단 말입니까?”

“예. 저 말고 딴 사람들도 다 경악했는데 예하만 목소리를 높였어요.”

“현재 여왕은 공주가 아닐 것인데. 여왕과 결혼해야 한다면 그건 지금 병석에 누운······”

“그런 건 몰라요. 아무튼 예하가 그리 주장했고, 지금 그걸 아무도 막지 못할 거 같아요. 예하 말고 달리 사내 구실할 순수혈통도 없다니까······ 그리고 전 예하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미친 짓이잖아요? 아버지랑, 그 늙은 성직자랑 딸이 결혼한다니?”

롤랑은 조금 뜸 들여서는 물었다.

“그래서 제가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그 약혼을 막아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설마 예하가 기사님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런 간절하고 타당한 부탁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 거절하는 것은 기사답지 않은 것은 물론 롤랑 스스로도 구역질나는 일이었던 것이다.

기껏 황금을 털어 살려낸 아이가 웬 음모꾼 추기경 배 밑에 깔리게 생겼다. 이 무슨 정신 나간 일인가?

롤랑은 단번에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대뜸 오스론을 찾으려 하니 웬 근위병이 가로막았다.

“정지, 여기 계신 분은 메디아 공작으로 선약 없이는 뵐 수 없습니다.”

롤랑은 말문이 막혔다. 섭정이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국가원수 행세라니.

롤랑이 뭐라 따지기 전에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롤랑 경이시군요. 들여보내주시게.”

그제야 근위병이 비켜섰다. 롤랑은 문을 열고 들어가 오스론을 마주보았다.

오스론은 더 이상 평소 걸치던 추기경의 자줏빛 법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이제 그 몸에 걸친 것은 황제나 걸칠 법한 황금색 모피였다.

오스론이 말했다.

“어수선한 와중에 어찌 방에 계시지 않고······”

롤랑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앤지와 약혼하신다고?”

“쑥스럽지만 그리 되었습니다.”

롤랑은 목소리를 높였다.

“미친 짓 그만두시오. 수치를 모르는 건가?”

“수치라니요?”

“세상에 딸과 붙어먹는 아비가 어디 있나?”

“많지요. 이 땅에도, 그리고 천상에도. 전 성직자로서 말씀드립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이번 혼약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어미와 아들이, 아비와 딸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것은 신들께서도 자손을 늘려온 방법이었습니다.”

“당신이 신이라 주장할 셈인가? 그래서 신을 따라하겠다고?”

“반신이지요. 고귀한 피의 반신. 마땅히 가문에 남자가 많으면 모르겠으나 당장은 저 말고 죄다 그 혈통을 의심해야 할 반푼이들뿐입니다. 그러니 당장 고귀한 피를 이으려거든 좀 보기 껄끄러운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어요.”

< 궁성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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