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성 - [3] >
듣고 있던 롤랑의 입술마저 씰룩거릴 뻔했다. 저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가?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은 자기네 왕에게 무어라 말하고픈 표정으로 왕과 오스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롤랑의 머릿속에서 부처, 호구, 병신 같은 단어가 맴도는 가운데 문득 오스 왕이 시선을 보냈다. 롤랑은 다시금 자세를 가다듬었다.
오스 왕이 물었다.
“롤랑 경, 참으로 고결한 행동을 하셨소이다.”
롤랑은 저것이 비꼬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애써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임무를 방기했음에 책망하실 줄 알았는데.”
“책할 생각은 없소이다. 위대한 기사가 기사다운 선택을 하였거늘 무엇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그저 언질 하나 받고 싶군요. 기사의 모험은 계속될 테지요?”
“그럴 거요.”
“그 모험 중에 사과 하나 더 주우신다면······”
예상했던 발언. 이런 상황은 미리 의논해둔 바였다.
롤랑은 어제 아말릭이 했던 말, 자신은 사과를 받을 차례가 미루어지거나 아예 사라진들 전혀 개의치 않으리라는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물론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드리겠소.”
“그럼 아무 문제없군요.”
오스 왕의 웃음을 보고 롤랑은 안도했다.
저 정신 나간 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어쨌건 일이 생각보다 훨씬 온건하게 풀려나간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었다.
이후로 진행된 일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돌변해 분노를 드러내거나 하지 않고, 오스 왕은 오스론이 바란 대로 일을 처리해주었다.
오스 왕은 모두의 앞에서 선언했다.
“오스론 메디아와 오스마 메디아의 딸, 오스마를 뒤늦게나마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오. 그리고 그녀의 혈통과 행실에 흠결이 없기에 왕위계승권 또한 인정하노니. 이 결정에 불만 있는 자라면 속히 나와 그 뜻을 밝히도록 하시오.”
그 선언을 들은 귀족들은 불만보다는 의문이 가득해보였다. 자기네야 상관없지만 당신으로서는 정말 그래도 되겠느냐는 표정들.
어쨌건 당장 반대를 표한 귀족이 없었다. 그리하여 식이 끝났다.
이제 앤지는 오스마 공주가 되었으며, 무슨 변화가 없다면 장차 여왕이 될 터였다.
롤랑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지려는 것을 애써 관리했다. 이토록 쉽게 일이 풀릴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제 오스론이 부탁한 건 전부 완수한 건가? 그렇다면 모두 자유? 아니면 이제야말로 용무가 끝났으니 배신?’
롤랑은 집까지 데려주자마자 용이 되어 불을 뿜었던 난쟁이를 기억했다. 아직도 놈이 왜 배신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약속한 보상을 내주기 싫다는 이유였을까.
경우는 달라도 오스론 또한 어떨지 모른다. 이상한 핑계를 지어내어 영웅들을 계속 부려먹으려 든다면 그나마 온건한 배신이 되리라. 최악의 경우는 소환된 영웅들의 안위가 위험할 테니.
롤랑은 충분히 각오해두자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결국 모두의 경악 속에서 행사는 끝났다. 카를 대제가 나타나 권위로 모두를 찍어 누를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롤랑은 일행을 데리고 귀빈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종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아무 일 없이 침대에 누웠다. 미지의 침입자가 들어올 경우 언제든 깨어날 수 있도록 대비하며.
그리 잠들기 전에 생각했다. 오스 왕은 대체 왜 그리 굴었던 것일까?
메디아 왕가는 근친혼을 이어간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조카의 탄생을 새 아내의 탄생으로 여긴 것인가? 늙고 병든 마누라를 젊다 못해 어린 계집애로 갈아치울 기회라고 생각했나?
오스 왕의 표정이 내내 복잡 미묘했는데, 역시 속으로는 이 상황에 분통이 터졌지만 그래도 인내한 것인가? 오스마 여왕의 병이 어찌 될지 모르는 판에 새로운 가문원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할 수 없어서?
아니면 아무런 계산 없이 그저 사람이 너무 좋았던 것인가?
어느 쪽인지 의아했지만 끝내 알 수는 없게 되었다.
그날 밤은 조용했고 개구리 울음소리만 나직하게 울렸다. 평화로운 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아침이 오기도 전에, 예상하지 못한 부고가 궁내를 뒤덮었다.
오스 왕이 죽었다. 목에서 피를 흘리며.
*******
복도가 떠들썩했다. 왕이 죽었느니 자결했느니 하는 소리로.
카를은 불안하게 방안을 서성였다.
원래라면 이토록 신경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붕어(崩御)라지만 남일 아닌가.
그러나 카를은 이 사건을 자기 일행과 관련 없으리라 믿고 넘길 수 없었다.
지금 방안에 랑슬로는 보였다. 그러나 자객 유저 시난이 보이지 않았다. 밖이 소란스러워 깨어나 보니 녀석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뜬금없는 왕의 죽음. 때마침 자객이 방을 비웠다. 무언가 연관이 있어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비록 그놈의 자객이 바퀴벌레보다 큰 생물을 죽여본 적 없는 현대인이며, 누군가 죽일 동기가 전혀 없을지라도.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유저들뿐인 것이다.
‘혹시 지금 자리 비운 그놈의 정체가 자객임을 궁성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랑슬로 이 새끼는 왜 깨워도 안 깨고 퍼질러 자는 거야?’
누군가 찾아오기 전에 시난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대체 왜 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변소라도 간 것인가? 혼자서는 길도 모를 테니 시종의 안내를 받아 갔기를. 그렇다면 알리바이를 입증할 사람이 있는 셈이니까······.
그리 안절부절 못하던 때였다. 문이 조용히 열린 순간 카를은 숨을 죽여 비명 질렀다.
조용히 들어온 시난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자객다운 모습. 어쩐지 섬뜩했다.
카를은 복도 밖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시난? 어디 갔다 온 거냐. 지금 큰일 터진 거 알······”
말을 이어나가려던 와중이었다.
시난이 조용히 다가왔다.
카를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움츠러든 그 모습. 시난은 사냥감이 이쪽의 살의를 느껴 도망친다고 판단했다.
아주 도망치기 전에 숨통을 끊고자 달려들었다.
시난의 맨발은 대리석 바닥을 부드럽게 밀쳐내 그 몸을 앞으로 튕겨냈다. 시난은 아무런 소리 없이 쏘아졌다.
그 과녁이 되어버린 카를은 방어자세를 취했다. 날렵하게도 허리를 숙이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미 눈앞에서 시난은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위였다. 시난은 특유의 도약력으로 위로 솟구쳐 카를의 등 뒤를 노렸다.
카를이 그 사실을 눈치 챌 수는 없을 터였다. 당장 어두워 그림자도 깔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시난의 몸놀림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끝내 시난이 자기 등 뒤에 내려앉은 순간에도 카를은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했다. 결국 카를이 무언가 이상을 느낀 것은 제 등에 칼날이 쑤셔박힌 때였다.
“억······.”
살갗에 박힌 칼은 서늘하지 않았다. 칼은 따뜻했다. 이미 다른 피를 머금은 채였기에.
그 순간 카를은 왕을 죽인 자객이 시난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왕에 이어 황제가 죽을 시간이라는 것도.
카를이 비명지르지 못하도록 자객의 손이 그 입을 틀어막았다.
카를은 반항하려 했지만 허튼 발버둥이었다. 게임 메디아에서 자객들은 민첩뿐만 아니라 근력에도 능력치를 투자했다. 근접전투를 치르기 위해서다. 그런 자객 캐릭터에게 카를 같은 힐러 캐릭터가 반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내 칼날이 척추를 뚫으려던 찰나였다.
문이 열리더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체 모를 안광과 함께.
“멈춰.”
그리고 시난은 멈췄다.
새로운 침입자, 카를도 아는 얼굴이었지만 당장 알아보지는 못했다.
모지가 옆까지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직도 카를에게 붙어있던 시난의 몸을 힘주어 떼어냈다.
겨우 풀려난 카를은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뭐냐? 누구냐?”
“모지.”
“모지?”
처음 듣는 목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 표정과 어조가 너무 달라져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던 것 같다.
카를은 애써 진정하려 애쓰며 말했다.
“이게 미쳤어······ 날 죽이려고······”
모지는 조용히 대답했다.
“봤다. 그래서 막았지 않나. 그런데 왜? 유저 아닌가, 이자?”
“그래······ 한국이름 전상국······”
“무슨 이유로 칼부림을? 원한이라도 있었나?”
“아니······”
“모르겠다고? 그럼 직접 알아내야겠군.”
모지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난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시난의 몸은 마비된 채였다.
지난 레벨 업에서 모지가 선택한 것은 ‘사안 강화’였다. 덕분에 모지의 사안은 저주에 저항력이 있는 상대에게도 먹혀들게 되었다.
새로운 주문이나 기술을 습득하지 않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나 강화하다니. 마법사 마우그리스다운 선택은 아니었다.
‘짧은 인생에서 실패하고 실패한 끝에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게 된 왕은지의 사고방식······.’
그 방식대로 모지가 신에게 예의 선물을 요구했던 것이다.
새삼 그 사실에 불만을 느끼며 모지는 시난의 몸을 앞으로 고정했다. 계속해서 사안이 그 몸을 굳게 만들도록 시선을 마주한 채로.
그 안면을 살피다가 이마에서 웬 정체 모를 마력을 느꼈다.
모지는 흠칫하여 시난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웬 문양을 보게 되었는데, 모지는 그 문양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기아스?”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단어. 카를도 그 단어를 알고 있었지만 확인하고자 물어보았다.
“뭐라고?”
“기아스. 맹약의 저주. 지금 그것이 강하게 작용하는군. 의지에 반해 행동을 강제할 만큼 말이다.”
“그게 웬······”
“나야 모르지. 신전에서 무슨 일 있었나? 기아스도 마법의 일종이니 사제나 마법사의 짓이겠지만, 아무리 솜씨 좋더라도 걸고 싶다고 멋대로 걸 수 있는 저주가 아니다. 특정한 의식을 치르고 맹약과 계약으로 묶어야만 걸리는 마법이야. 신전에서 무언가 마법적인 계약을 맺었나?”
“아마 아닐······”
“그럼 역시 그 계약이겠군. 소환 의식. 그 의식에 기아스도 포함돼 있던 거다.”
어조도, 말하는 내용도 전혀 카를이 기억하는 모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그 사실에 신경 쓰지 못한 채 카를이 물었다.
“소환 의식이면 우리도?”
“그래, 아마. 모두가 이 기아스에 걸려있겠군.”
“나도?”
“그렇겠지. 물론 당신은 위대하신 빛의 수호자, 현인신이니 마법적인 명령에 저항쯤이야 가능할 거야······. 하지만 당장 그 사실이 위안을 주진 않겠지?”
물론 그러했다. 그놈의 마법에 걸려 동료가 자길 죽이려 한 마당 아닌가. 그런데 아예 모든 동료가 그런 마법에 묶여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카를이 중얼거렸다.
“시난은? 그럼 어째야?”
“해주해보겠다. 기다려라.”
그리 말하더니 모지는 입술을 달싹여 주문을 외웠다. 시난의 몸에 퍼진 마력을 풀어내기 위해서. 게임 메디아에는 없었던 수법이지만 지금의 모지라면 쉽게도 가능했다.
일을 마친 모지가 말했다.
“일단은 해주가 되었다. 당장 당신을 해치려 하지는 않을걸.”
“그럼 이제 안전한 건가?”
“아니. 당장 이 몸의 행동을 강제하는 마력만 제거했을 뿐, 영혼을 속박하는 기아스 자체는 풀어낼 수 없어. 아직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확인할 수는 있겠지······.”
그리 말하더니 모지는 눈의 안광을 거두었다. 사안을 해제한 것이다.
잠시 후 시난의 마비가 풀렸다.
시난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왕을 죽였어.”
카를이 대답했다.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왜?”
“명령을 받아······”
“오스론이?”
“몰라······”
그 말을 모지가 받았다.
“아마 오스론이겠지. 소환 의식을 치러낸 장본인이고 왕을 죽일 이유도 충분했을 테니.”
모지가 생각하기에 추리가 어렵지는 않았다. 오스론은 아마 자기 딸이 오스 왕과 결혼하게 될지 모른다고 걱정했을 것이다. 섭정 역할도 여전히 오스 왕이 하게 되리라고.
카를을 죽일 이유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었다.
모지가 입 다문 가운데 카를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할 일은 간단하다 이건가? 오스론을 죽여야······.”
“바로 그러기는 힘들 텐데. 왕이 죽은 마당에 그 형마저 참살하겠다고? 궁성의 분노를 살 일이다.”
“그럼 내버려두겠다고?”
모지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말했다.
“아니. 그럼 오스론 살해를 전제로 계획을 꾸며볼까.”
< 궁성 -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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