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성 - [2] >
또한 카를의 양 옆에 서있는 두 명의 얼굴, 롤랑은 그 또한 알아보았다.
둘 모두 유저였다. 이름은 시난과 랑슬로였나?
롤랑이 굳어있는 가운데 랑슬로가 다가왔다.
랑슬로가 한 손을 내밀었다. 롤랑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그 단단한 손의 감촉을 느끼고서야 롤랑은 겨우 현실성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너희가 여긴 왜?”
롤랑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카를이었다.
“우릴 부르더군.”
“누가?”
“아마 오스론이. 신전에 서신을 보내왔다.”
“그럼 지금 모두 다 온 거야?”
“아니, 우리 셋만. 대관식에 권위를 부여할 영웅들이 필요하다더군.”
그 말에 롤랑은 당혹스러웠다.
대관식? 앤지가 오스마 공주로 인정받는 행사를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대관식은 왕이나 황제의 경우 아닌가. 공주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도 대관식으로 칠 수 있나?
그리고 그보다 큰 의문이 있었으니, 바로 저 셋의 직업군이었다.
성기사 카를을 부른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척 보기에도 신성한 것이 도축장에 서있어도 신성해 보일 법했으니까.
그러나 다른 두 유저를 보며 롤랑이 물었다.
“대관식에 자객과 광전사는 왜? 행사에서 이 영웅 나리는 살아생전 광견처럼 날뛴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열심히도 사람 죽이고 다니셨더라 소개할 셈인가?”
광전사 롤랑은 이 세계에서 실제 직업 광전사가 아닌 성기사로 더 유명했다. 그처럼 저들도 게임에서의 직업과 다른 직업으로 유명한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체 왜?
롤랑이 머리를 굴리고자 애쓰는 가운데 카를이 다가왔다.
카를이 팔을 내밀자 롤랑은 악수할 손을 내밀었는데, 카를은 그 손을 붙잡지 않았다.
멀거니 서있는 롤랑의 앞에서 카를이 입을 열었다.
“의아한 점이야 많지만 차치하고, 인사부터.”
카를은 양 팔을 벌렸다. 그리고 롤랑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세게. 아주 세게.
한참 후에야 놔주고서는 말을 끝맺었다.
“정말 고생했다.”
롤랑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울컥한 나머지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러나 끝내 삼켜내고서 롤랑이 말했다.
“너희도.”
“고생이야 너희가 했지. 우리가 고생하긴 무슨.”
“이 망할 곳에 온 것부터 고생 아닌가.”
카를은 허탈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그건 그래.”
*******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 무섭게 카를이 한 말은 명령이었다.
카를은 대동한 두 유저에게 지시했다.
“각각 옆방에 가서 방음 잘 되는지 살피고 와라.”
그 순간 롤랑은 질겁했다. 카를이 자연스럽게 명령하고, 나머지 둘은 그 명령에 따랐기 때문에.
둘이 나가있는 동안 카를은 아,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잠시 후 방을 나섰던 두 명이 돌아와 말했다.
“소리 냈나? 밖에선 안 들리던데.”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음은 괜찮나보군. 손님방이라 그런가본데, 그래도 조심은 해야지. 시난? 문 앞에서 망 좀 보고 있어라.”
그 말대로 자객 유저 시난은 방을 나갔다. 그리고 시난이 문을 닫아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카를은 말했다.
“하고 싶은 말 많지? 다 토해보자.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롤랑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래. 뭐부터?”
“지금 이 상황부터. 궁내에 별별 소문이 다 돌더군. 누구는 너희가 황금사과를 구해서 돌아온 것이라 하고, 다른 누구는 롤랑이 그 사과를 자기 종자에게 먹여서 사과하러 온 것이라 하던데. 어느 쪽인가?”
“후자. 설명하자면 긴데······”
롤랑은 이번 일, 그러니까 오스론과 사실 그 딸이었던 종자에 얽힌 사건을 읊어나갔다.
다 듣고 난 카를이 말했다.
“그 사기꾼 새끼가.”
롤랑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뭐 그래도 그 사과를 제 딸에게 먹인 것도 임무 달성으로 쳐주겠다는데? 그래서 이번에 공주로 임명받기만 하면 이후로 우리는 자유라고.”
“그 말의 신뢰성은?”
“그럭저럭. 얻을 거 다 얻었는데 우리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 뒤통수를 더 후려갈기려 하겠나? 용무 끝났으니 방생해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싶네. 물론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 토끼를 잡은 사냥개를 놀게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다음 사냥에 대비해 마당에 묶어두려 할 수도, 아니면 삶아먹으려 할 수도 있는 법이니. 일단 경계하고 있어.”
“경계하다가, 놈이 뭔가 저지른다면 어쩔 셈이었나?”
“탈출, 아니면······”
롤랑은 발리사다 칼을 뽑아보였다. 그 서늘한 칼날만 보고서도 모두들 그 말뜻을 알아챘다.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미 피를 볼 각오가 돼있었군.”
롤랑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뭐 걱정할 건 없어. 어지간히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서야 칼부림하지 않을 거니까.”
“우리를 걱정해서 그런 거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 말해두지. 우리도 사내새끼들이다. 전투 정도야 충분히······”
“실제 칼부림은 않을 거라니까. 왕가의 궁전에서, 프레이 신에게 우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고용주를 족칠 수 없지. 그랬다간 무슨 꼴을 당하려고? 정말 칼을 휘두를 상황은 뭔가 하지 않으면 우리 안위가 위태롭게 될 상황뿐이야. 오스론이 이제 일 다 끝났으니 불러낸 영웅들을 죄다 소멸시키려 한다든가, 발할라로 반납하려 한다든가 하는 상황. 그리고 오스 왕이 빡쳐서 우리를 족치려 하는 상황도.”
“그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도 싸울 수 있음을 말해두겠다.”
카를은 엄숙하게 말했지만 롤랑은 웃으며 말을 넘겼다.
“됐어, 마. 쪼렙들이 전투는 무슨? 탈출에나 전념하면 돼. 실제 일은 우리 고렙 세 명이 알아서 할 테니까.”
카를은 순간 무시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말았다.
롤랑은 그다지 위엄을 차려 말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히도 친구에게 말하는 것이니까.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쪼렙이니 고렙이니 별 진지하지 못한 어휘까지 섞어 말한 바였다. 그러나 그 편한 말투와 어휘가 청자에게 경쾌함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그리 말하는 롤랑의 얼굴이 경쾌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청자, 카를과 랑슬로는 롤랑의 얼굴에서 담담한 각오와 분노를 읽었다.
시련에 절어버린 얼굴. 고난에 찌들어 이제는 어떤 위기에도 무감각해져버린 전사가 눈앞에 있었다.
그런 상대에게 진지해지라느니, 자기네 투지를 업신여기지 말라느니 요구하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었다. 참전용사 앞에 선 밀리터리 오타쿠가 된 기분으로 카를은 입을 다물었다.
카를은 조용히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더 이상 한국인 대학생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기사를 바라보았다.
‘너무 변했군. 그야 당연히······.’
카를은 롤랑의 얼굴을 살폈다. 광전사 특유의 재생력으로 말미암아 그 얼굴에는 별 다른 흉터나 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타다 만 수염이며, 아직 다 빠져나가지 않은 붓기 따위 시련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카를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릴 감싸줄 것 없다. 보호하려 들 필요는 더더욱 없고. 너희 앞에 선 우리는 한낱 신병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훈련을 해왔으며 자기 무기 정도야 얼추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거대한 괴물 상대면 모를까 한낱 사람 상대로 움츠러들 이유가 없어.”
“실제 사람 앞에 칼 들이대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아니, 아니더군. 그놈의 흉기, 생각보다 간단히 휘두를 수 있었어.”
그 말에 롤랑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사람 상대로 칼 휘둘러봤다고?”
카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기가 죽인 김치 삼형제의 맏이를 생각했다. 뭐 다시 되살렸지만, 지금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때의 감촉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한 명 죽였다. 그때 나는 얼지 않았어. 그러니 나머지 둘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 랑슬로?”
랑슬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카를은 얼굴을 찌푸렸다.
카를이 쏘아붙였다.
“대답할 땐 말로 해라. 턱짓만 하지 말고.”
랑슬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싸울 수 있을 거다. 롤랑. 맡겨줘.”
그 말에도 카를은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지적했다.
“‘있을 거다’가 뭐지? 아닐 수도 있다 이건가? 나중에 상황 터져 얼어붙을지 모를 미래를 위한 보험이냐? 맹세해라, 랑슬로. 우리 모두 싸울 수 있다고. 만약의 경우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맹세해라.”
롤랑은 눈을 크게 떴다. 저리 말하는 것이 정말 이하종이 맞나?
학교 수련회, 선후배 위계질서 따위 군대식을 혐오하던 진보적 대학생이 정말 저런 식으로 말하게 되었단 말인가?
게임 메디아에서 카를은, 거의 모든 유저와 그랬지만 랑슬로와는 유독 친한 사이였다. 술이나 한 잔 하자더니 정말 만나서 놀았던 적도 있을 만큼.
그러나 랑슬로는 껄끄러운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기어이 카를의 말에 따랐다.
“정정한다. 나 역시 싸울 수 있음을 맹세한다.”
그제야 카를은 만족하고는 롤랑에게 말했다.
“허언이 아닐 거다. 우릴 믿어줄 수 있나?”
“그래, 믿을게.”
씩 웃는 카를을 보며 롤랑은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고.
*******
다음 날 롤랑은 오스 왕과 그 신하들 앞에 섰다.
양 옆에는 모지와 제이슨, 두 영웅을 거느렸다. 오스론이 부탁한 대로 고급 병풍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서 오스론이 외치고 있었다.
“모두 이 아름다운 소녀를 보라!”
지금 오스론은 딸이 된 자기 자식을 데려온 바였다. 그리고 왕에게 그 신분의 고귀함을 인정하도록 요구할 예정이었다.
그 요구에 왕이 어찌 반응할 것인가?
롤랑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허리춤에 칼까지 두 자루 차고 왔다. 그것을 휘두르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정말이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뒤에 친구와 동포들까지 있는 상황임에야.
롤랑이 곁눈질하니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카를과 나머지 두 동료.
세 명의 유저들은 롤랑 일행처럼 영웅다운 화려한 복장을 하지 않았다. 그저 흰색의 정갈한 사제복을 입었을 뿐.
카를이 말하기를 당장 그들의 정체는 비밀이었다. 감춰둔 비밀무기로서. 오스 왕이 분노할 상황에 대비해서였다.
오스 왕이 격앙하다 못해 자기 아내에게 주기로 한 사과를 웬 꼬마한테 처먹인 롤랑은 천하에 다시없는 배신자이며, 영웅이고 뭐고 존중하지 않겠노라 선언할지도 모른다. 그 순간 카를이 나서기로 되어있었다. 인류의 구원자 카를 대제라면 분노한 왕이라도 진정시킬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저들이 나설 상황은 오지 않기를. 롤랑은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표정만은 엄숙하게 전방을 향했다.
한편 오스론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께서 제 죽어가는 종자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음이니, 그 간절한 자비가 귀물을 쓰게 만들어 이 어린 오스마는 자기 원래 모습을 되찾았던 것이오. 이 아이가 그 고결함에 구원받은 소녀, 오스마 2세요!”
모두의 시선이 앤지, 오스마를 꼭 빼달은 소녀에게 쏟아졌다. 앤지는 고개를 숙이려다가 오스론이 어깨를 두드리자 겨우 어깨를 폈다.
존재한 적도 없었던 공주가 돌아왔다.
여기 모인 귀족들의 반응은 다양각색이었다. 기겁한 자, 충격을 받은 자, 입술을 떠는 자 등등.
그리고 오스 왕의 입은 굳게 다물려 열릴 줄을 몰랐다.
오스론이 계속 말했다.
“내 우리의 위대한 선조 프레이 신께 맹세하건대, 이 소녀야말로 오스마 여왕의 딸이며 그 누구도 그녀의 피가 순수함을 의심할 수 없으리! 천상의 신들과 프레이 신께서 이 소녀의 고귀함을 보증할 것이라! 그러니 메디아 가문의 장으로서 네 동생 오스께서는 말해주시오. 이 아이를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겠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계승자의 권리도 인정하겠는가?”
그 순간 롤랑은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금 오스론이 제 딸의 권리를 주장하는 왕은 그 누구보다 피해자였다. 지금 오스 왕은 아내의 약을, 예전에는 그 순결마저 빼앗겼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스 왕은 이내 말했다.
“인정하지요. 어린 오스마?”
오스 왕의 시선에 앤지는 움츠러들었다.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예, 폐하······”
오스 왕은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전하란다. 메디아에서는 여왕에게나 폐하라 부르지. 사실 전하도 과분한 게 왕이라 해봤자 공식 직함도 아니다. 난 그저 섭정에 불과해.”
“그럼 어찌 불러야······”
“숙부라 부르거라, 오스마 공주. 그리고 형님?”
오스론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말씀하시오.”
오스 왕은 옥좌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오스론에게 다가오더니, 그 앞에 고개를 숙였다.
좌중의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오스 왕이 말했다.
“역시 저는 형님의 아내를 빼앗았던 것이로군요. 지금 이 자리를 빌려 사죄드립니다.”
< 궁성 -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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