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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트롤랑-121화 (121/164)

< 궁성 - [1] >

예로부터 메디아는 조그만 변방국이었지만 그 어느 나라도 이곳을 넘보지 못했다. 프레이 신이 언제나 두 눈을 부릅뜨고 제 후손들을 가호했기에.

한때는 메디아 여왕이 기도 한 번 올리면 프레이 신이 분노 어린 신탁을 토해낸바, 황제가 뒷방 늙은이가 되고 교황은 시골 사제로 전락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아틀란티스의 신들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미드가르드인들이 달리 신을 선택할 기회가 없던 때였다. 그 당시 아스가르드 신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간섭이 심했고 그 후광을 업은 메디아의 위세는 가히 신들의 대변자나 다름없었다.

이후로 아틀란티스 사제들이 진출해온 바, 정 천상의 신들이 싫으면 개종할 수 있게 된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메디아 왕가는 최고의 명가이며, 그 어느 강국도 메디아를 침략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

마차는 천천히 달려 사막을 가로질렀다.

고급 마차들. 롤랑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다지 덜컹거리지도 않았다.

그 안에서 롤랑은 공주를 마주보고 있었다.

앤지, 오스마 공주는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리며 빵을 먹다 말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기사님.”

“롤랑 경이라 부르시지요, 공주.”

롤랑이 오스마에게 공손히 말할 필요는 없었다. 발할라의 전사쯤 되면 드높게도 반신인 것이다. 그동안 공작이자 추기경인 오스론에게도 편히 말해오지 않았나.

그러나 굳이 공손하게 말했다. 기사라면 가녀린 공주에게 그리 대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았고, 무엇보다 당장은 거리를 두고 싶었기에.

오스마가 깨어난 지 나흘째 되는 지금도 롤랑은 자기 종자의 변화가 당혹스러웠다.

물론 변한 본인도. 오스마 역시 떨떠름하게 말했다.

“예······”

기운 없는 대답.

그래도 지금은 전보다 나아진 셈이었다. 정신이 들어 자기가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스마는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하반신에 치마가 걸쳐져 있었다. 오스마는 종자 노릇하던 사내아이답게 여성스러운 것을 혐오해왔다. 그런데 치마라니, 질겁하여 얼른 벗어버렸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바지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바지는커녕 변변한 일상복 하나 없었는데, 이미 오스론이 죄다 내다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결국 하반신이 휑한 채 오스마는 한참을 서 있다가 제 아비를 맞이해야 했다. 오스론이 헤벌쭉 웃은 순간 오스마가 내지른 비명은 구석방에 있던 아말릭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이후로 한참을 설명한 끝에야 그 공황상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혼란과 충격의 여파는 아직도 모두를 잠식하고 있었다.

마차 안에 둘밖에 없는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에야 겨우 오스마가 입을 열었다.

“롤랑님.”

“말씀하십시오, 공주.”

“그냥 앤지라 불러주세요. 어차피 계집애 이름이니······ 물을 게 있는데요. 예하는 이걸 처음부터 알고 계셨나요?”

“그런 눈치더군요. 저주가 풀렸다며 좋아했으니까.”

“그럼 절 기사님 종자로 들인 것도? 다 의도된 거였나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 깊은 뜻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롤랑은 이 화제를 넘기고 싶었지만 앤지는 그러지 않았다.

“기사님이 언젠가 제게 황금사과를 먹이게 하려고 그런 건가요? 자기 종자쯤 되어야 사과를 주든 말든 할 테니까?”

롤랑은 침묵했고 앤지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예하가, 그러니까 아버지가 기사님을 속인 건가요?”

롤랑은 겨우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래서 화나셨나요? 그래서 제게 변변한 대화도 하지 않으시는 거고?”

“아니오. 그다지 화나진 않았습니다. 그저 뒤통수가 좀 얼얼할 뿐인데요.”

그 표현 자체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앤지는 롤랑이 분노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기껏 구한 황금사과를 내주었더니 이 모든 것이 계획이요 사기였다는 상황을 깨달은 것이다.

앤지가 생각하기에는 롤랑이 광분하여 날뛰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가뜩이나 분노에 미친 광전사로 유명한 기사 아닌가.

어쩌면 저 서먹함도 굉장히 인내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리 해석한 앤지는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실제 롤랑은 그다지 화나지 않았다. 롤랑이 이 일을 따지자 오스론이 말했던 것이다.

‘물론 경의 노고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제 어찌 그러겠습니까?’

당시 롤랑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이미 충분히 무시하고 기만했지 않나?’

‘화나신 것은 이해합니다. 종자와 황금사과를 동시에 잃었으니 얼마나 허탈하시겠습니까?’

‘그래, 당신 수작으로 말이지. 알면서 그랬나?’

‘이해해주십시오. 어쩔 수 없었고 절박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한 것도 아니에요. 전 음모꾼이라기에는 지극히 단순한 놈입니다. 맘을 비우는 성직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까 복잡한 셈은 하지도 못해요. 경께 그 아이를 종자로 붙여준 것은 정말 그 아이가 위대한 기사 밑에서 가르침 받길 원해서였습니다. 아마 이후로도 남자로 살아야 할 테니까! 정말입니다!’

물론 롤랑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토록 딱 맞아떨어진 상황이 모조리 우연일 리 없었다.

그러나 한참을 변명한 끝에 오스론이 말했더랬다.

‘물론 이미 구한 사과, 하나 더 구하라고 요구할 맘도 없습니다! 이미 임무는 달성되었으니까요!’

‘임무가 달성되었다고?’

‘예! 오스마를 구해주셨지 않습니까? 곧 여왕이 될 오스마를 말입니다! 이게 계약 이행이지 뭡니까?’

‘그러면 더 부려먹지 않겠다, 이건가?’

‘물론입니다! 물론 그래야지요! 제 어찌 더 요구하겠습니까? 이제 다 끝이에요! 이후로는 뜻대로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번에 황금사과를 구한 이후로도 다른 숭고한 사업, 그러니까 전쟁신을 구출하는 일에 골몰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러시면 되겠군요!’

그 말은 곧 모두의 자유를 의미했다. 이제 유저들은 더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걱정한 대로 계약이 달성되자마자 유저들의 몸이 소멸하거나 천상으로 송환되는 일도 없었다. 농락당했다는 사실만 빼놓고 보면 그다지 나쁜 결과가 아니었다.

바로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었지마는. 오스론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을 했더랬다.

‘염치 불구하고 하나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본국에 가서 그 아이가 혈통을 인정받도록 도와주십시오.’

‘무슨 수로?’

‘그저 뒤에 서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주시기만 하면 돼요. 위대한 영웅이 보증해준다면 가차 없이 내치지는 않을 테니까, 훨씬 수월하게 고귀한 신분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오스마 2세는 정식 혼인관계에서 출생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메디아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롤랑이 보증해주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놈의 보증을 해주고자 롤랑은 다시금 메디아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은 공주가 아닌 앤지와 함께.

오스마 공주. 그리 만들어주고 나면 더 이상 저 지긋지긋한 추기경과 얽힐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믿고서 맘 놓을 수는 없었다.

모르가나가 무어라 경고했던가?

‘오스론에게 황금사과를 주지 말라고······ 그리고 지금 그 경고한 일이 반쯤 이루어진 셈이지.’

그러니 아직은 경계해야 했다. 이후로 자기 딸을 이용해 오스론이 어찌 구는지, 그 행위가 유저들에게 해로울지 어떨지를 지켜보아야 했다.

롤랑은 팔짱을 끼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앤지는 그 맞은편에서 빵이나 조물조물 먹는 가운데 마차는 계속 달렸다.

*******

영웅들을 태운 마차가 도착했을 때 메디아 수도거리는 다시금 환영인파로 들썩였다.

전보다도 열렬한 환영이었다. 메디아 궁정은 굳이 환영인파를 돈 주고 고용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몰려나왔다. 영웅들을 맞이하고자.

영웅들은 저번에는 그저 소환되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괴물과 싸우고 싸우며 업적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미 메디아 전역에 그 위업은 소문이 자자했다.

롤랑의 마차가 지나가는 가운데 둘러싼 사람들이 부르짖었다.

“위대한 기사 롤랑 만세!”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함성. 앤지는 귀가 아픈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내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마차는 메디아 궁성에 들어섰다.

궁성 정원에도 귀족들과 시종들이 영웅들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심지어 왕 본인도.

오스 왕은 예복을 갖춘 채 무리의 맨 앞에 서있었다.

마차에서 영웅들이 나온 순간 오스 왕은 양 팔을 벌려 그들을 맞이했다.

“진심으로 환영하오이다, 영웅 분들! 여러분 고귀한 기사들이 이루어낸 업적들은 언제나 제 귀를 즐겁게 했더랬지요!”

사람 좋은 왕의 얼굴. 롤랑은 자기 표정을 어둡게 하지 않고자 애써야 했다.

이제 롤랑은 저 왕에게 자기 임무가 달성되었노라 선언해야 했다. 자신은 자유의 몸이라고. 더 이상 당신네 심부름으로 사과를 구하러 다니지는 않으리라 말해야 했다.

그리하여 왕의 드러누운 아내는 영영 병이 낫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나겠지만 이제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 순간 저 왕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슬퍼할까, 분노할까? 그리고 끝내 속았다고 느끼고는 보복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롤랑이 고민하는 가운데 뒤에서 오스론이 속삭였다.

‘황금사과에 관련된 담판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제 가문 일이니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경께서는 괜히 얼굴 붉히실 필요도, 나서실 필요도 없어요.’

롤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편이 오히려 반가웠다.

이쪽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스 왕은 살갑게도 계속 말을 걸어왔다.

“자, 이제 드시지요! 영웅들을 맞이할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롤랑과 무리는 궁전으로 들어가 연회에 참석했다.

알론소 역시 저번에 영웅들을 맞이하는 궁성 연회에 참여했는데, 지금도 그때처럼 흥겹게 연회를 즐겼다. 주변에 모인 귀족들에게 자기 모험담을 떠벌리면서.

“그러니까 내가 ‘발두르여!’하고 외치면서 달려들면 제 창이 신성하게도 빛나는데······”

그 즐거운 모습이 지금 롤랑은 더없이 부러웠다. 이런 자리가 더없이 영광스러울 아말릭조차 썩 흥겨워 보이지 않는 판이었다. 상황이 복잡하다는 것은 명백했기에.

롤랑이 그저 벌꿀술을 홀짝이는 가운데, 제이슨이 옆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오스 왕? 그 인간이 우리 보고 너무 좋아하더라. 그거 보고 속 좀 쓰리데.”

“그러게.”

“오스론이 정말 잘 처리하려나 몰라. 자기 영지도 날려먹은 거 보면 교섭능력이 썩 특출 난 양반은 아닌데 괜히 왕을 분노하게 만드는 거 아닌가? 아니면 아예 왕이랑 같이 다시 한 번 통수치거나?”

롤랑이 물었다.

“그런 위기상황일 경우 우리는 어찌 구는 게 좋겠나?”

“달아나야지 뭐. 우리라면 충분히 가능할걸? 보니까 여기 병력이 많지는 않더만. 모지 투명화도 있고 하니 빠져나가는 게 어렵지는 않겠더라.”

역시 제이슨도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점에 롤랑은 새삼 안심하며 말했다.

“그래도 잘 되면 좋겠네. 임무 달성, 자유. 좋잖아?”

“좋지 물론.”

“그리 되면 이제 신전에 있는 치들은 이계 모험물 말고 이계 일상물 찍으면 되겠고. 그게 너한테도 좋지? 너 다른 유저들이랑 모험해야 한다는 말만 들으면 질색했잖아. 잘됐네?”

롤랑이 웃으며 말했지만 제이슨은 정색했다. 그것을 보며 롤랑은 의아해졌지만 이내 다른 연회 참석자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러는 것으로 해석하고는 넘겼다.

연회는 한참 후에야 끝났다. 롤랑은 취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해졌다.

자기 숙소에 돌아와 침대 위에 쓰러져 누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분명 여기서도 골치 아픈 일들이 범람하겠지?’

그 일들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출생도 모를 계집애를 공주로 인정받게 만들기, 아내를 치유하지 못하게 된 왕의 분노, 그리고 혹시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오스론의 음모.

그래도 혹시 잘 풀린다면 동포들은 모두······.

문득 신전에 남은 동료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보앗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그 얼굴이 선명하게도 떠올랐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사실 그다지 오래 보지도 않은 얼굴들인데 이토록 그 기억이 생생하다니.

심지어 카를의 얼굴도 사진처럼 그 뇌리에 떠올랐다. 카를의 정체, 한국인 대학생 이하종의 얼굴보다도 서양인 카를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그 머릿속에 그려졌다······.

계속 침대에 누워있던 와중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고 롤랑은 기겁했다. 귀빈실에 이토록 무례하게 들어오다니 대체 누군가?

얼른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보게 된 불청객들의 얼굴을 보고서 롤랑은 다시금 기겁했다. 방금보다도 훨씬 더.

“너?”

롤랑이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오랜 친구가 인사했다.

“오랜만이군, 롤랑.”

문 앞에 카를이 서있었다. 특유의 은발을 찰랑이며.

< 궁성 - [1]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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