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20화 (120/164)

< 언덕 - [4] >

오딘이 잡혀있는 곳이라.

롤랑은 세계수 위에서 빛나는 광채를 생각하며 말했다.

“관심이야 있다마는, 이미 어디 계신지 짐작이 가는데.”

음유시인이 외쳤다.

“짐작 정도가 아닙니다!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롤랑은 우리도 꽤 정확하게 예상했노라고 쏘아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방금 황금사과가 사라졌다. 이제 기댈 데라고는 정말 오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구출을 등한시할 수 없다.

롤랑이 말했다.

“우리는 그 분께서 계신 위치가 약 백오십 층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틀렸음을 지적할 수 있거나, 더 정확한 위치를 지적할 수 있나?”

“백오십 층이요? 저······”

“맞나, 틀린가. 아니면 모르나?”

그 질문에 음유시인은 명백히 당황하는 눈치였다.

롤랑이 눈을 좁히는 가운데 음유시인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 층수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장소를 알아요······”

“장소라니?”

“성채. 오딘께서는 성채 뒤에 계십니다.”

“헛소리. 그 분께서는 세계수 가지에 묶여계신다.”

“야외에 묶여계시긴 할 겁니다. 하지만 그 묶인 장소를 지키는 성채가 그 앞에 있어요!”

“그걸 어찌 아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롤랑은 지금 이놈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목소리가 심히 절박하기는 한데 그것은 음유시인다운 연기력 아닐까?

한 대 후려칠까 고민하던 차 음유시인이 이어서 외쳤다.

“알게 되었습니다! 저 아닌 다른 초월적 존재의 시선으로······ 세계수 위에 세워진 성채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로키가 음유시인에게 강신했을 때, 음유시인은 로키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음유시인은 로키가 잠시 머릿속에 그렸던 그 성채를 알게 되었다.

그 성채는 아마도 목 매단 오딘을 감시하는 시설이었다.

그 성채를 생각하며 로키는 히죽거렸더랬다. 어쩐지 오딘이 너무 오래 풀려나지 않더라니 거인들이 잘 지켜온 덕이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당시 로키의 사고를 떠올리자니 음유시인은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파왔다. 머릿속이 불타는 느낌.

그러나 어떻게든 살고자 부르짖었다.

“그 성채에는 아마 거인들이 있을 겁니다!”

거인들의 성채,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알론소가 물었다.

“우트가르트? 그 요새는 요툰헤임에 있지 않은가?”

“이름까진 모릅니다! 하지만 세계수 위에 거인들의 성채가 있단 것을, 전쟁신이 풀려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롤랑이 물었다.

“느낀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냐. 네게 예언 능력이라도 있다고 주장하려는 건가?”

“접신 중에······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아무튼······”

음유시인은 더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차마 로키와 이어져있었다고 고백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어이 모지가 물었다.

“접신? 악신 로키와 말인가?”

“아니······”

모지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심하게 당황하는군. 정말 로키였나? 바른 대로 고하라. 진실인지 아닌지 알아낼 방법이 있으니.”

모지의 말에 음유시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였는데, 그 침묵은 곧 긍정의 대답이 되었다.

모지가 중얼거렸다.

“정말 로키? 그 악신이 이 일에 관련되었단 말인가? 겨우 사과 한 알 때문에 나섰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말 겨우 황금사과 때문에 그럴 리는 없을 터인데.”

아까 모지에게 한참 비난당했던 염동력자가 쏘아붙였다.

“풀려난 이후 먹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먹으려던 걸 수도 있잖습니까? 제 알기로 신들도 황금사과를 먹지 않으면 늙는 걸로 아는데요.”

모지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마치 스스로에게 들려주려는 듯이.

“로키는 예외다. 아스 신족도, 바나 신족도 아닌 정체 모를 출신. 어째서인지 로키는 황금사과 없이도 늙지 않는다. 그렇기에 젊음의 여신 이둔이 납치당해 신들이 늙어 무력해졌을 때 오직 로키만이 젊은 모습 그대로 여신을 구출하러 나설 수 있었어. 그에게 황금사과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물건이다. 그런데도 굳이 나섰다는 것은? 이번 사태는 로키에게 단순 사과 한 알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는 것······.”

중얼거리면서 모지는 오스론을 흘긋 보았다.

이번 사태로 저 남자가 가장 이득을 보았다.

로키와 얽힌 남자가 괴물들을 조종했다. 그리하여 바실리스크와 코카트리스가 나타난바 이 결과에 이르렀다.

굳이 석화의 저주를 지닌 괴물 둘을 조종한 이유는? 그저 두 괴물이 강력해서 부려먹은 것인가? 아니면 앤지에게 저주를 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놈들을 불러낸 것인가?

모지는 문득 게임 메디아를 기억했다. 로키가 얽혀있다는 의혹을 받는 오락.

만약 그 기억 자체가 정말이라면 이번 소환으로 불러낸 영웅들의 상태가 맛이 가버린 것은 로키가 연관된 일이리라.

‘그리고 영웅들을 불러낸 장본인은 오스론······ 로키가 수작 부리는데 저자가 일조했다고? 프레이 신의 자손이? 무엇 때문에?’

음유시인을 추궁하느라 일행이 잠시 멈춰선 지금, 오스론은 정신을 잃은 자기 딸의 머리를 가다듬고 있었다. 여자 머리를 손질해본 적이 없어 그 손놀림은 서툴렀지만 더없이 경쾌했다.

저 경쾌함을 위해 모든 것을 꾀한 것인가?

정말 그렇다면 죽일 것이다.

모지는 생각했다.

메디아 혈족을 해친다면 프레이 신은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분노를 감당하더라도 죽일 것이다. 이후의 계획을 막기 위해서.

그것은 곧 롤랑을 위한 일이 될 것이다······.

한편 자기 딸을 돌보는 와중에도 대화를 듣고 있던 오스론이 중얼거렸다.

“거인의 성채? 정말 우트가르트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아니더라도 우트가르트에 준하는 강력한 성채일 테고. 전쟁신을 감시하는 곳이라니 그 경비는 얼마나 엄중하겠습니까?”

그 말을 받은 것은 제이슨이었다. 제이슨 역시 앤지, 혹은 오스마 공주 옆에 붙어있었다.

제이슨은 오스마 공주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물론 그럴 거요······”

“당장 세계수에서 병력이 잔뜩 빠져나간 마당에 적들의 방어시설을 알게 되다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영웅들께서 아무리 강력하신들 소수 인원으로는 한계가 있을 테지요. 당장의 전력만으로 그 요새를 공략하기는 어려울 테지요?”

제이슨은 오스마 공주를 보느라 바빴다.

“아마도······”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겠지요?”

오스론의 말은 병력충원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론이 충원할 수 있는 병력이라면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신전에 남은 영웅들.

그제야 제이슨은 대화에 관심을 돌렸다.

놈들이 돌아온다고?

제이슨은 눈을 크게 뜨고 무어라 말하려 했다. 더 이상의 영웅은 필요 없다느니, 우리끼리만 있어도 충분하다느니 해서 놈들을 불러오는 것을 막아내야 할 터였다.

그러나 문득 롤랑과 모지를 보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저 영웅 둘 사이에 있자니 제이슨은 정신적인 피로를 느꼈다.

롤랑은 물론 든든하다. 싸움이든 정치든 간에 뭐든 내버려두면 알아서 잘 해내는 남자 아닌가. 대체 사회에서 뭐 하던 인물이기에 저리도 영웅적인지.

함께 있으면 존경심이 절로 솟아난다.

그리고 주눅이 든다.

또 다른 동료 모지. 원래 제이슨은 그 움츠러든 모습을 보며 우월감을 느껴왔다. 이 녀석이라면 내 보호가 필요하리라고 믿으면서.

그러던 녀석이 이제 변해버렸다. 이렇게 된 모지와 함께 있자니 든든하기는커녕 그저 피곤하다.

이제 제이슨은 동질감을 느낄 만한 동료가 절실했다. 영웅적인 동료들이 아닌, 찌질하고 평범한 동료들이.

평범한 그들의 약하고 비겁한 요소들은 다 참아줄 수 있었다. 롤랑과 모지만큼 잘 해내지도 못할 머저리들이겠지만 이제는 그래도 괜찮았다.

제이슨은 그 어느 때보다 신전의 동료들이 그리웠다.

제이슨은 문득 롤랑을 보았다.

롤랑은 음유시인과 대화하느라 바빴다. 지금이라면 이곳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터였다.

제이슨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전에서 전사들을 데려오시려고?”

오스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러분도 다시 전우들과 재회하게 되어 기꺼우시겠군요?”

“나는 그렇지. 하지만 롤랑에게는 말하지 말고 불러오시오.”

“왜요?”

제이슨은 어떻게든 핑계를 토해냈다.

“자신이 있는데 굳이 대제까지 움직이도록 만들 필요가 있느냐, 하고 싫어할 테니까. 하지만 대제께서는 충분히 다시금 이 세상을 위해 일할 의욕이 충만하실 게요. 그러니 조용히 불러와.”

“그러지요. 충고 감사합니다, 경.”

오스론은 웃으며 자기 딸, 오스마 공주를 쓰다듬었다. 그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을 따라 제이슨의 눈길이 오갔다.

어째서인지 제이슨으로서는 저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왜? 사내새끼일 때는 별 관심도 없었는데, 여자애가 되니까 갑자기 관심이 생겼나?

‘내가 소아성애자도 아니고 대체 웬······.’

제이슨은 당황하면서도 계속 오스마 공주를 바라보았다.

오스론도 그 시선을 느끼고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메디아 가문의 여성들은 메데이아 공을 닮았지요. 이 아이는 유독 그렇군요. 검은 머리칼과 이목구비 모두 메데이아 그 분을 닮았어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아손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렇군. 정말 아름답구려.”

*******

롤랑과 보어조아의 무리가 귀환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환영인파가 모여 있었다.

“위대한 기사 롤랑 만세!”

그리 부르짖는 무리의 선두에 웬 여인네들이 보였다.

백 층에 데려간 난민들의 유족들. 그녀들은 남편이 죽은 지금, 롤랑이 낸 돈으로 비프로스트에서의 생활을 영위해나가고 있었다.

나름 잘 먹게 되어 얼굴에 살이 붙은 그들을 보자니 롤랑은 새삼 힘이 솟았다.

역시 좋은 일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부류의 선행은 다시하기 힘들 것이다. 모아둔 돈을 죄다 사과 하나에 내버린 판이니.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롤랑 경?”

보어조아였다. 그는 환영식 따위 본체만체하고 롤랑에게 말했다.

“대금은 언제? 가능하다면 빨리······”

롤랑이 대답했다.

“지금 가서 바로 주겠소. 됐나?”

“예, 정말 감사합니다. 경!”

과연 롤랑은 저택에 가자마자 바로 창고를 열어 대금을 치러주었다.

무거운 황금들. 옮기는 것만 해도 큰일인지라 보어조아의 병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것들을 실어 날랐다.

혹시라도 빼돌리지 못하도록, 그 작업을 보어조아의 염동력자들이 감시했다. 그 모두를 지휘하며 보어조아는 웃었다.

‘황금······ 엄청난 황금.’

보어조아가 새삼 생각하건대 그다지 나쁜 구매자는 아니었다. 적어도 떼먹지는 않았으니.

게다가 괜히 적대심을 불태워 보복하기에는 버거운 상대 아닌가. 보어조아는 더 이상 롤랑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황금사과를 이토록 맥없이 팔게 된 것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 원한을 돌릴 상대가 필요했다.

누가 나쁜 놈인가?

‘비카파. 이 개자식.’

보어조아가 생각하기에 지금 그놈보다 괘씸한 놈이 또 없었다. 자신을 모욕한 음유시인을 석방하질 않나. 용병들에게 제대로 협조하지 말도록 따로 지시해두지를 않나.

보어조아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무시한 처사가 아닌가?

그리하여 원한의 화살을 향할 과녁이 정해졌다. 보어조아가 속으로 욕설을 읊조리는 가운데 비카파가 다가왔다.

멍청한 얼굴. 비카파는 정신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사과를 파셨다고요?”

보어조아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 좋은 값에.”

그 목소리에 서린 분노를 비카파는 읽어내지 못했다. 그럴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이미 팔았다고? 그거 살 돈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한 판인데?’

비프로스트에 거하는 사람들은 현물이 부족한즉 많은 돈을 비카파의 은행에서 꾸어다 썼다. 그리고 황금사과를 구입하고자 현금을 모아야 했던 비카파는 그들을 닦달해서 빌려줬던 돈을 반강제로 회수했다.

‘젠장······.’

비카파가 속으로 욕설을 읊조리던 가운데 보어조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 도둑놈 잡아왔소. 롤랑 경이 정보를 얻어내는 대가로 죽이진 않기로 약조했지. 대신 당신께 넘기기로 했는데, 어찌 처벌하실 테요?”

보어조아가 은근히 기대한 대답은 ‘도둑은 예외 없이 사형이다’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비카파는 그 기대에서 벗어난 대답을 들려주었다.

“뭐 일단 가둬야겠지······”

대답이 건성이었다. 보어조아는 다시금 분노를 불태웠다. 그리고 맹세했다.

언젠가 이 분수도 모르고 수작질 부리는 돈놀이꾼을 족치고 말겠노라고.

*******

< 언덕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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