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덕 - [3] >
오스론은 메디아 공작이요, 교회의 왕자 추기경이다. 단순 이 직함 두 개만 두고 보면 오스론은 천하에 다시없는 권력자쯤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스론을 포함한 모두가 알고 있다.
본래 추기경은 출신 국가의 대교구장인 법이지만 메디아는 오스론의 교구가 아니다.
메디아 왕가는 자기네가 반신인즉 교황보다 권위 있음을 주장했으며 그 어느 성직자도 이 주장을 헛소리로 치부하지 못한다. 프레이 신이 직접 그 권위를 인정해주었기에.
그래서 메디아는 교황청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 교구다. 그 교구장은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이 아닌 메디아의 전통적 직위인 제사장이다. 그리고 보통 제사장은 메디아 왕이 겸하는 직위다.
결국 오스론이 추기경직을 달고 하는 일이라고는 교황청 전담 외교관 노릇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교황청과 사이가 틀어진 이제 와서는 다 소용없게 되었지마는.
쓸모없기로는 그 작위도 추기경직 못지않았다.
본래 메디아 공작이 권위 있는 작위이기는 하다. 그것은 메디아 여왕의 남편이자 섭정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므로.
그러나 오스마 여왕과 결혼한 것은 메디아 공작 오스론이 아니라 오스 왕이다.
본디 오스론은 그 여동생 오스마와 약혼한 사이였다. 그런즉 메디아 궁성에서는 곧 교황청에 유학할 오스론의 권위를 높여주고자 결혼하기도 전에 작위부터 미리 수여해주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자신이 메디아 왕이 될 터였지만 오스론은 그 순간 불안해졌다. 자신이 공작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마 여왕은 자신보다 그 동생 오스와 더 친하게 지내는 눈치였기에.
질투를 느낀 오스론은 오스마 여왕은 강제로 취했다.
약으로 재워놓고 바지를 벗은 터였지만 오스론 스스로는 그 행위를 강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약혼도 한 마당에 무슨 문제란 말인가? 오스론은 그저 얼른 씨를 뿌려두어 어미로 만들면 한결 정숙해지리라 생각하고 일을 벌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물론 오스마 여왕은 그 행위를 강간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강간범과 결혼할 수 없는 법이라고도.
결국 오스마 여왕은 오스와 결혼했다.
덜 떨어진 남동생. 착하다는 것 외에 장점이라곤 없어 도저히 경쟁자라고도 생각해본 적 없는 놈. 오스를 그리 여겨온 터였기에 오스론이 그 순간 느낀 굴욕은 더욱 컸다.
아내도, 권력도 한 순간에 뺏긴 것이다. 그놈의 멍청한 남동생에게.
이제 메디아 공작자리를 반납해야 할 터였지만 형의 자리를 차지했음을 미안하게 여긴 오스 왕은 그 작위를 그냥 형에게 주기로 했다.
물론 오스론은 그것을 전혀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이름뿐인 직위만 줘놓고 자기 인덕을 보인 수작이라 여기고는 더욱 분노했을 뿐.
게다가 제사장직마저 오스 왕에게 돌아갔다. 추기경직과 결합되어 오스론을 종교적으로도 더욱 권위 있게 만들었어야 할 자리였는데.
부아가 치미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스론이 일을 벌인 후 오스마 여왕은 임신했는데, 그 사실을 오스마는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결국 오스마 여왕은 딸을 낳자마자 오스론에게 내팽개치더니 급기야는 아예 죽이려 들었다.
오스론은 자기 딸을 지키기로 했다. 어떻게? 다른 아기를 내주면 되었다. 그리하여 급한 불은 껐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여자애를 키우다 보면 오스마 여왕이 분명 눈치 챌 것이므로.
오스론은 아이를 위장시키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저 남장을 시키려 했지만 더 안전한 방법을 강구했다. 그리하여 오스론은 마녀를 찾아갔다.
고대의 마녀 모르가나. 변신술의 대가로 유명한 그 마녀에게 오스론은 딸을 남자로 변신시켜 달라 요구했다. 여왕의 시선에서 안전하도록.
모르가나는 경고했다.
‘성전환 변신? 가능하긴 한데, 걸린 마법이 너무 오래되면 점점 굳어질 거야. 거의 저주가 되는 거지. 영구적인 저주. 황금사과라도 먹이지 않으면 해주할 수 없게 될 걸. 그러니 그리 되기 전에 마법을 풀어두도록 해.’
그 말에도 불구하고 오스론은 자기 딸의 변신을 제때 풀어내지 못했다. 오스마 여왕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감시했기 때문이다.
결국 오스마 여왕이 병에 걸려 그 기력을 잃고서야 오스론은 자기 딸의 저주를 풀어볼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모르가나가 경고했듯 너무 늦었지마는.
이후로 오스마 여왕의 병환은 갈수록 심해져 아예 드러눕게 되었다. 그 병을 메디아에 악덕이 너무 쌓인 탓이라 여긴 오스 왕은 아내를 위해 종교적인 대행사를 계획했다.
비프로스트 원정 말이다. 그리고 오스 왕의 지지 하에 오스론이 그 원정사령관이 되었지만, 원체 패도적인 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던 메디아는 오스론에게 제대로 된 병력을 지원해주지 못했다.
그 사실에 오스론은 한 차례 분노했다.
그리고 비카파에게 비프로스트를 빼앗긴 뒤에도 오스 왕은 변변한 보복을 하지 못했는데, 국력 소모도 문제거니와 신들과 외국인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리싸움이나 해서는 안 된다 여긴 판단이었다.
오스왕의 그런 태도에 오스론은 다시금 분노했다.
그처럼 분노가 쌓이고 또 쌓인 끝에 오스론은 복수를 맹세했다.
빼앗긴 것들을 다시 빼앗겠노라고.
탈환 계획은 간단했다. 저주에 걸린 딸과 황금사과, 그리고 황금사과로 유명한 영웅을 얽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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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론은 일행의 선두에서 걸어가는 롤랑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최고의 영웅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계획에서 롤랑이 황금사과를 구해낸 순간, 오스론은 자기 딸에게 독을 주입할 예정이었다. 그리 중독된 앤지에게 롤랑이 황금사과를 먹이면 계획이 완성될 터였다.
냉혹하게도 롤랑이 제 종자는 내버려두고 여왕에게 사과를 먹이려 든다면, 그래도 계획은 실패하지 않을 터였다. 사과를 메디아 본국에 운반하는 역할은 오스론이 맡을 예정이었으니까.
그 경우 오스론은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자기 딸도 데려가면 되었다. 가는 도중에 영웅이 여왕에게 주라고 내준 황금사과를 자기 딸의 입에 넣으면 계획이 달성될 터였다. 물론 그 경우 영웅의 분노가 두렵겠지만 뭐······.
그 계획을 위해 오스론은 미리 독도 준비해두었다. 요새 웬 거대도마뱀들에게서 채취되는 독이 싼지라 한 병 사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독을 쓸 필요도 없이 계획이 자연스레 완성되었다. 그것도 영웅이 자신을 탓할 수도 없는 식으로.
오스론이 딱히 간섭하지도 않았는데 영웅 본인이 알아서 황금사과를 그 종자에게 주었다. 어찌 불평할 수 있겠는가?
고마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오스론은 롤랑에게 자기 딸을 종자로 주면서 내심 불쾌했다. 수도원에서 수도사 행세를 시켰으나마 험한 일은 시키지 않고 나름 고이 키웠는데, 웬 고대 기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요새 기사들도 자기 종자 부려먹기가 험하기 그지없는데, 그보다 덜 문명적일 고대 기사라면 얼마나 흉악할 것인가?
그러나 웬걸, 지금 시대보다 고대가 더욱 신사적이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고대 기사 롤랑은 그 어느 기사보다도 자기 종자를 곱게 챙겼던 것이다.
덕분에 그다지 굴욕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고 오스론의 딸은 자기 모습을 되찾았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위대한 기사 만세.’
한편 롤랑은 반쯤 넋이 나간 채 걷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뭔 일인가? 왕자의 입맞춤을 받은 공주가 제 모습을 되찾기라도 했나? 애초에 이쪽은 왕자도 아니거니와 동화에서는 그 반대 아니었나?
머릿속으로 대강 예상이 가기는 했다.
‘모르가나······’
아마 그 마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녀가 경고했듯 오스론과 이번 사태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 짐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롤랑은 마땅히 무얼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오스론에게 수작 부렸음을 추궁하고 화를 내야하나? 아니면 그 딸이 목숨을 건진 동시에 원래 모습을 되찾았으니 아비된 자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하나?
어느 쪽이 올바를지 알 수 없었으므로 롤랑은 차라리 입 다물기로 했다.
계속 걸어가자니 머릿속이 복잡해 미칠 것 같았다. 달리 관심 둘 데가 필요했다.
롤랑은 긴 흑발을 찰랑거리며 업혀가는 앤지, 아니 오스마 2세에게서 애써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제이슨에게 물었다.
“음유시인 놈은?”
제이슨은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깨어날락 말락.”
그 말에 롤랑은 누워있는 음유시인에게 다가갔다. 오스마 2세나 그나 정신을 잃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물론 대우는 딴판이었다.
음유시인은 온몸이 결박된 채 실려 가고 있었다. 시체 나르는 청소부들의 수레에.
수레가 덜컹거리면서 음유시인은 연신 신음했다. 롤랑은 이 혼란스러운 사태에 대한 분노를 담아 그 뺨을 두 번 쳤다.
음유시인은 비명 지르며 깨어났다. 그리고 굳은 얼굴의 롤랑을 마주해야 했다.
“아으아아악!”
“닥쳐.”
롤랑이 윽박지르며 다시 갈길 모양새였기에 음유시인은 겨우 입을 다물었다.
겁에 질린 음유시인에게 롤랑이 말했다.
“이 개자식, 무슨 수작이었나? 실토하지 않으면······”
음유시인은 필사적으로 비명 질렀다.
“용서하십시오! 결국 사과도 되찾았지 않습니까?”
“네가 돌려줬나? 아니지. 나와 우리 기사들이 피를 흘리며 겨우 되찾은 것이었다. 목숨마저도 말이다, 이 개자식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노린 게 아니에요! 전 롤랑 당신을 존경합니다! 제 어찌 위대한 롤랑을 해코지하고자 했겠습니까? 전 그저 보어조아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란 말입니다!”
“복수하는 거야 네 자유다 쳐도, 장소와 시간을 좀 분별할 생각은 없었나? 누가 휘말려 죽으면 제 운명이겠거니 여길 셈이었단 말인가?”
“복수에 눈이 어두워 괜한 희생을 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복수란 게 그리 사리분별하면서 벌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담 나도 사리분별하지 말고 복수할까, 지금?”
롤랑이 칼을 빼들자 음유시인은 다시금 비명 질렀다. 롤랑은 그 뺨에 손바닥을 후려갈겨 닥치게 했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음유시인은 신음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보어조아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지금 죽이시지요?”
롤랑은 그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왜?”
“비프로스트에 돌려보내면 그 무도한 비카파 놈이 제대로 처벌하지 않을 겁니다. 하프로 괴물들을 조종했단 것도 대강 흘려 넘기겠죠. 그냥 뭐 사과 도둑이니 크게 처벌한들 손목 하나 자르고 끝내려 할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여기서 죽이는 게 후환을 없애······”
그 말 도중에 음유시인이 끼어들어 외쳤다.
“하프! 그 하프는 어디 있습니까?”
롤랑은 가만히 음유시인과 함께 실려 있던 재를 가리켰다. 음유시인은 멍하니 재 무더기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태웠습니까?”
“당연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마법의 하프인데?”
“그 점에 주목한 네 원수가 탐내긴 하더군.”
“보어조아가 말입니까?”
“그래. 그 하프를 넘겨주면 사과 값을 조금 깎아주겠노라 제안하던데. 응하지 않고 태웠다. 왜? 그 거래에 응하면 더 좋았을 것 같나?”
음유시인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니, 잘하셨습니다. 롤랑 경······”
“어디서 감히 칭찬이지. 그래서 네 처분을 어찌 해주길 바라나?”
음유시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기사들의 시선이 실로 흉흉했다.
적의 어린 시선들. 자신이 조종한 괴물들이 많이도 해친 모양이다. 사실 음유시인으로서는 조종할 당시의 기억이 거의 없어 자기가 벌인 짓이란 실감이 나지 않았지마는.
어쨌건 애걸해보았다.
“살려주십시오.”
“무슨 자격으로?”
“전 귀족입니다.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권리가 있습니다.”
“문명적인 도시에서 그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이 오지에서 얼른 처형해 달라는 말로 들리는군. 그 말이 맞나?”
“아닙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롤랑은 그저 분노한 시선으로 음유시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에게 적의를 품었으면서도 사실 어찌 처분해야할지는 롤랑도 알지 못했다.
이놈 탓에 많이 죽었고 모두 크게 고생했다. 풀어주기는 물론 껄끄러웠다. 그러나 처형하기도 껄끄러웠다. 어쨌거나 롤랑은 한국의 기준을 기억했으므로.
다른 처벌을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그 침묵을 그저 분노라 생각한 음유시인은 애타게 고함질렀다.
“살려주신다면 드릴 정보가 있습니다!”
“사로잡힌 주제에 협상이라도 할 셈인가? 꿈도 크신데.”
롤랑이 짜증에 겨워 쏘아붙이자 음유시인은 얼른 외쳤다.
“오딘이 묶인 곳!”
롤랑이 눈을 크게 떴다. 음유시인이 계속 외쳤다.
“어딘지 짐작이 갑니다! 관심 있지 않습니까, 오딘의 대전사?”
< 언덕 -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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