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17화 (117/164)

< 언덕 - [1] >

음유시인, 그러니까 하프를 든 남자의 실제 직업은 예인이 아니었다.

남자는 아이스피시 휘하의 군종 사제였다.

본디 특별히 추종하는 신은 없었다. 신앙심이 깊지도 않았다. 그저 봉급쟁이 성직자로서 자기 앞가림 할 수 있게 되었음에 만족할 뿐.

게다가 군에서 쌓은 연줄로 자기 형제를 하급 지휘관으로나마 데려올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그러나 얼마 전, 바로 그 형제가 죽었다. 보어조아가 쏜 포탄에 맞아서.

듣기로는 보어조아와 그 휘하 염동력자들이 손수 쏜 것이라고 했다. 다른 범인은 있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 위층까지 대포를 가져간 인물이 그밖에 없었으므로.

원한에 가득 찬 남자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신께 기도드렸다.

이 미천한 놈의 복수를 도와주소서.

그 부름에 응답한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신이었다······.

그 신에게서 받은 하프를 들고 남자는 뛰었다.

추격자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 추격자 중에는 마땅히 복수해야 할 놈, 보어조아와 염동력자들도 섞여있었지만 마주치기 영 껄끄러운 작자도 여럿이었다.

롤랑과 영웅들 말이다.

멀리서 흘긋 보았지만 분명했다. 추격자들의 선두에서 달려오는 토르 같은 기사, 그 분노 어린 얼굴만 봐도 분명히 롤랑이었다.

‘젠장.’

어째서 저토록 격앙한 채 쫓아오는지 알만했다. 영웅들이 임무를 달성하려면 구입해야 할 사과를 이쪽에서 가로챘지 않은가. 그리고 남자가 보낸 괴물들은 롤랑을 추종하는 기사들을 해쳤으리라.

그 괴물들. 신이 내린 하프로 부린 것이었다.

하프의 사용법은 간단했다. 그저 현에 의지를 담아 튕기면 되었다. 그러면 그 소리를 접한 사람들의 몸은 굳고, 괴물들은 그 뜻에 복종했다.

겨우 물건 하나의 힘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이 대단한 힘이었다.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일까. 사용하다 보면 무언가에 홀린 듯 넋을 잃게 되고 몇 분간의 기억을 잃는 일도 종종 있지만 그 정도야 뭐······.

지금 순간도 그러했다. 남자가 추격자들을 피해 달리는 동안 그 손은 자신의 것이 아닌 손놀림로 하프 줄을 뜯으며, 자기 것이 아닌 어조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원천의 숲에 내장으로 묶여있었다

그나파 동굴 앞에서 가름이 울부짖으니

내 족쇄가 풀리었다. 그 의미를 아는가?

세계의 포식자는 늑대의 형상을 하였구나

달과 군신을 집어 삼킬 그 이름은 펜리르다

나는 그 아비라. 그 의미를 아는가?

모든 비늘 돋은 족속들의 조상은 뱀이며

미드가르드를 휘감을 그 이름은 요르문간드다

나는 그 아비라. 그 의미를 아는가?

군신의 다리 여섯 개 달린 말이, 그 자손이

저승의 여왕과 그 사냥개들이 모두 내 피붙이더라

나는 모든 이물(異物)들의 아비이자 어미이니

그 의미를 아는 자들은 내 부름에 응하라!”

로키 신이 명령했으므로 세계수의 괴물들은 그 뜻에 따랐다.

숨어있던 괴물들이 하프 소리에 홀려 다가오기 시작했다. 로키 신은 자신이 불러낸 괴물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여섯 마리. 그 수가 너무 적었다.

빌어먹게도 이 층에는 이미 괴물들이 많이도 쓸려나갔다. 뼈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다른 층에서도 끌어와 배치해둔바 제법 많이 모였더랬다. 그마저 죄다 죽어나간 모양이지만.

‘빌어먹을 롤랑. 뭐 그래도 다음 층에 가서 보충하면······.’

다음 층으로 올라가려다 말고 계단을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웬 시커먼 기사가 계단 중간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저 흑기사의 정체를 로키 신은 알아볼 수 있었다. 영웅 소환물. 발할라 기사 랑슬로의 분신일 것이다.

‘가짜 영웅이 가짜 영웅을 불러내 부려먹네.’

내심 비웃으면서도 로키 신은 이 상황이 난처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 빈약한 몸뚱이로는 그저 노래 부르고 하프 뜯는 것이 한계였다.  얼마 전에 창고를 녹이고자 불 좀  피워내려니 얼마나 힘들었던가.

이대로는 저 소환물 하나를 처리하기 벅찰 터였다.

앞뒤가 막힌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원래의 자신이라면 변신이든 뭐든 해서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마저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간단했다.

약 올리기.

남자는 뒤돌아서서 여섯 마리 괴물들을 거느리고 나아갔다.

괴물 중 하나는 뱀들의 왕 바실리스크였다. 진짜 뱀들의 왕은 요르문간드지만, 바실리스크는 그 먼 친척쯤 된다. 그러니 이놈은 로키의 먼 후손인 셈이며 그 덕분에 다른 괴물들보다 부려먹기도 편했다.

이내 발소리가 들려왔다. 추적자들이 지척까지 다다른 것이다.

남자는 언덕 위에 괴물들과 함께 섰다. 그리고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에서 추적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우선 보이는 것은 롤랑, 그리고 그 졸개들. 몸의 주인이야 보어조 어쩌고 하는 염동력자에 관심 있는 모양이지만 물론 로키 신은 그 잡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가짜 영웅들. 이상한 불순물까지 섞인 잡것들.’

그리고 저기 있는 가짜 롤랑.

그래도 롤랑 행세를 하고 있으니 롤랑을 대하듯 굴면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로키 신은 하프를 뜯으며 외쳤다.

“고귀한 기사 롤랑은 들을지어다! 나 알비스는 명가의 자손이요 지금 이 이물들을 이끄는 지휘관이니, 지휘관 대 지휘관 대 명예로운 결투로······”

그리 시간을 끌면서 바실리스크에게 독액을 분사하도록 명령하려던 차였다.

롤랑은 로키 신의 결투 신청을 주의 깊게 경청하지 않았다. 아니, 듣기나 한 것인지 모를 기세로 계속 달리더니 웬 창을 집어던졌다.

창은 궁니르처럼 시뻘겋게 변해 날아왔다. 로키 신이 타고 있던 거대한 뱀, 바실리스크의 왼쪽 눈을 꿰뚫었다. 눈을 파고들면 뇌에 닿는 법이다.

기에에에에에엑, 바실리스크는 통곡하며 거꾸러졌다. 그 위에 올라타 있던 로키 신은 중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어떻게든 잘 떨어지고자 발악했다. 그리하여 로키 신은 바실리스크의 몸뚱이에 깔리지 않고 떨어지기는 성공했다.

그러나 낙하의 충격에 하프를 놓쳤다. 그 순간 남자는 더 이상 로키 신이 아니게 되었다.

로키 신이라면 지금 저 서리거인에게도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으련만. 남자는 그럴 능력이 없었으므로 서리거인의 기행을 막을 수 없었다.

롤랑이 도약했다. 허공에 뜬 그 몸을 서리거인이 붙잡았다.

그리고 던졌다.

“가—라—!”

롤랑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남자, 음유시인은 골이 깨질 것 같은 와중에도 그 장면을 겁에 질린 채 바라보았다. 저 무서운 롤랑 경이 날아오다니.

다행히 롤랑 경의 몸은 포물선을 그리더니 이내 비행하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저대로라면 언덕에 닿지 않고 추락할 것 같았다.

남자는 일순 안심했지만 사실 그 정도는 던져진 측도 예상한 바였다.

비행하는 힘이 완전히 잃기 전, 투명해진 채 대기하던 발키리가 그 몸을 붙잡고 계속 날았다. 그리고 기어이 언덕 위로 던졌다.

괴물들의 앞에서 롤랑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눈길. 남자는 별 흉흉한 안광을 빛내는 괴물들에게 익숙해진 채로도 주눅이 들었다.

남자는 변명하듯 고함질렀다.

“잠깐! 내 말 좀······”

롤랑은 듣지 않았다.

착지하자마자 롤랑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남자는 겨우 하프를 주워들고는 외쳤다.

“나를 보호해라!”

그 명령에 반응하여 괴물들이 벽이 되어주었다. 그들을 뒤로 하고 남자가 달아나고자 달리기 시작한 차, 등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의 단말마들.

겁에 질린 남자는 하프를 마구 튕겼다. 그 하프를 튕기면 사람들의 몸이 일순 마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톱이 부러져라 튕기면서 마구 달렸다. 저놈의 끔찍한 추격자에게서 벗어나고자.

그러나 괴물의 비명소리마저 잦아들더니, 이내 강철이 땅을 찍는 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기사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남자는 더욱 미친 듯이 하프를 튕기며 도망치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포효가 울려 퍼졌다. 사람이 내는 괴물의 울부짖음. 그 소리를 등으로 받아낸 남자는 역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는 목에서 억센 감촉을 느꼈다.

그 발이 지면에서 벗어났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저 버둥거리며 남자는 고함지르려 했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목에서 느껴지던 조임이 사라졌다. 롤랑이 손을 놓은 것이다.

남자는 풀려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앞에 롤랑이 다가왔다. 남자의 동공이 확장되더니 점차 다가오는 롤랑을 확대해나가듯 비췄다.

롤랑이 손을 뻗었고 남자는 뿌리칠 수 없었다.

롤랑은 다시금 남자의 목을 쥐고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정면에서.

그리하여 남자는 롤랑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끔찍하게 분노한 토르의 얼굴. 그 너머에는 상처가 불타 절명한 여섯 구의 괴물 시체가 널브러졌다.

롤랑이 움켜쥔 목에 힘을 주기 전, 남자는 겨우 소리 질렀다.

“억울합······”

남자는 변명하려 했다. 나는 지금 복수를 할 뿐이다. 고명하신 경께서 거기 섞여있을 줄은 몰랐다. 만약 피해를 보았다면 사과할 테니 어쩌고저쩌고.

그러나 말을 잇기 전에 그 배에 격통이 덮쳐왔다. 롤랑이 남자를 들어 올린 그대로 복부를 가격한 것이다.

말을 쏟아낼 공기가 한 순간에 빠져나갔다. 고통에 질린 남자는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발버둥 쳤다.

남자가 그 손을 마구 휘두르니 롤랑의 머리칼이 잡혔다. 남자는 마치 구명줄을 잡은 듯 그 머리칼을 움켜 쥐었지만 롤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롤랑은 남자의 몸을 패대기쳤다. 그와 함께 남자가 움켜쥐고 있던 롤랑의 머리칼이 뽑혀 나왔지만 역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롤랑은 말없이, 바닥에 엎어진 남자를 짓밟았다.

그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는 칼을 뽑아들었다.

이내 내리찍으려던 차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롤랑! 죽여서는 안 된다!”

모지의 목소리에 롤랑은 고개를 돌렸다.

모지가 계속 외쳤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괴물은 어찌 부렸는지 따위 추궁할 것이 많잖은가!”

롤랑은 긍정하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모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남자를 짓밟은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을 뿐.

모지는 애타게 그 상황을 바라보았다. 분노한 롤랑은 말리기 힘들었다. 예로부터 그 분노가 일을 망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지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지금 롤랑은 그가 기억하던 롤랑이 아니었다.

잠시간의 고요 끝에 롤랑이 말했다.

“안 죽는다. 정신을 잃을 만큼만 힘을 조절했으니.”

“그런가······”

“그래.”

롤랑은 다시금 자신이 밟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심지어 그 정체가 로키 아닐까 의심받았을 정도로 수상했던 남자. 그 수상한 만큼이나 힘겨운 추격전을 걱정했지만 예상 외로 쉽게도 잡혔다.

심지어 하프에서 느껴지던, 그 정체 모를 마력도 롤랑의 몸을 굳게 만들지 못했다. 오딘의 성검이 그 몸을 가호했으므로.

허탈할 만치 일이 쉽게 풀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롤랑은 웃을 수 없었다.

추격은 예상보다 쉽게 끝났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롤랑은 정신을 잃은 남자의 몸을 손수 뒤져나갔다. 그 소매, 허리, 심지어 바지까지 벗겨가며 그 소유물을 뒤졌다.

그리하여 롤랑은 노란 사과 하나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여전히 웃을 수 없었지마는.

추격도 끝나고 도둑맞은 물건도 되찾은 지금. 이 순간부터가 진짜임을 롤랑은 알고 있었다.

*******

< 언덕 - [1] > 끝

ⓒ 검미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