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고 - [6] >
게다가 두 괴물은 롤랑이 기억하는 것보다 강력했다. 비록 게임에서나 접했던 놈들이지만 느낌이 그러했다.
게임으로 치면 챔피언 몬스터쯤 될까? 코카트리스만 해도 움직임부터가 기민한 것이 빌어먹게 강했다.
예의 음유시인이 조종한 덕분일까.
그렇다면 당장 강적을 물리쳤음에 기뻐하거나 안도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토록 효과적으로 기선을 제압했다면 본 병력을 투입해올 것이다.
곧 다른 괴물들이 덮쳐올 것이다.
그러기 전에 아군을 돌봐야 했다. 롤랑은 아말릭에게 말했다.
“정화기도······ 아마 통할 거요. 해봅시다.”
둘이서 기도를 시작했다. 우선은 성기사 알론소부터.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굳어있던 알론소는 곧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방금 뭔······”
알론소가 비틀거렸지만 기력을 회복하도록 내버려둘 여유가 없었다. 롤랑은 다른 기사에게 기도하며 외쳤다.
“알론소, 정화의 기도를 시작하시오! 얼른!”
알론소는 대단히 피곤해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세 명의 성기사가 기도를 외워나갔다.
점차 석화가 진행 중이던 기사들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도하는 와중 롤랑은 초조했다.
치유되는 속도가 느렸다. 다음 습격에 대비하기에는 너무.
다행히 곧 전열에 있던 기사들을 거의 다 치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열의 기사들은 그럭저럭 무사했다.
그렇다면 중심에 있던 종자들은?
“너희는 괜찮나?”
롤랑이 종자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은 롤랑에게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한 모양이었다.
롤랑은 안도하려다 말고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앤지는?”
종자들 중에 오직 앤지만 보이지 않았다. 가장 어린 녀석이 왜 무리에서 빠져나갔단 말인가?
미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린 끝에 바위 뒤에서 익숙한 머리칼이 보였다.
롤랑은 허겁지겁 다가가서 그 어깨를 잡아보았다.
딱딱했다.
롤랑은 기겁하여 바위에 등을 기댄 앤지를 내려다보았다.
앤지는 소피를 보고 있었는지 바지춤을 내리고 있어 조그만 성기가 드러나 있었는데, 그것을 가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역시 석화의 저주에 걸렸다는 것이 명백했다.
롤랑은 그 바지를 끌어올려 꼴불견만 면하게 해주고서는 바로 무릎 꿇었다.
그러고는 정화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저 발악에 가까운 시도였지마는.
신성 주문이 효과를 보려면 사용자뿐만 아니라 대상자에게도 일정 수준의 신성이 요구된다. 그리고 당연히 앤지에게는 신성이 없을 것이다.
그것을 예상하면서도 롤랑은 연신 기도를 읊조렸다.
‘위대한 오딘이시여, 지존자 오딘이시여. 만물을 가호하는 오딘이시여······.’
눈 감은 채 기도 올리는 동안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조그만 녀석이 이대로 죽게 생긴 것이다······.
기도문을 다 외운 후 롤랑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겁에 질려 앤지를 바라보았는데, 다행히 미동이 있었다.
기도가 효과가 있나?
얼핏 맥을 짚어보니 아까보다 나았다. 정화의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주문이 잘 드는 것을 보아 앤지에게도 신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본래부터 혈통이 남달랐던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앤지의 신성이 신들의 선물을 받은 기사들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기사들은 기도 한 번에 나은 반면 앤지는 그저 숨이 약간 돌아온 정도였으니.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딘가. 이대로 계속 기도하면······.
그리 안도하던 차였다.
기사들이 고함질렀다.
“또 옵니다!”
예상했던 적들이 또 다시 나타나버렸다.
롤랑은 내겐 할 일이 있으니 당신네끼리 잠시 막아보라 외치려다가 그만두었다.
석화의 저주는 게임에서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그 저주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사들은 아직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아까 만전의 상태에서 싸웠을 때도 부상자는 물론 사상자가 여럿 나왔다. 지금 싸운다면? 무리의 손실이 아니라 존망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 누구도 빠질 수 없이 싸워야했다.
롤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워있는 앤지를 뒤로 하고 걸어 나갔다. 바닥에 꽂혀있는 성검 앞에서 자신을 축복했다.
‘오딘이여.’
온몸에 영혼이 충만해진 것을 느낀 다음에야 성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앞에서 흉흉한 안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놈들이 닥쳐오기 전 롤랑은 아군이 얼마나 남았는지 돌아보았다.
소수의 멀쩡하지 않은 기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선 염동력자들도.
정예 중의 정예들, 그러나 괴물의 무리에 맞서기에는 모자란 수였다.
모두가 사투를 예감했다. 죽기 싫으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할 것이다.
롤랑이 말했다.
“제이슨, 흑기사만 그곳에 남기고 나머지 소환물들을 모두 불러내라.”
“그래······”
“난 광폭화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사령탑은 너다. 알겠나? 맡긴다.”
제이슨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롤랑은 전방에 시선을 향했다.
수풀을 헤치는 소리, 뒤이어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타난 괴물들은 그 거대했고 그 수가 많았다. 언제나 그렇듯 단순 그 사실만으로도 놈들은 위협적이었다.
저들과의 싸움은 사냥이 아니라 전쟁에 가까울 것이다.
거대한 야수가 한 발짝 다가온 순간, 롤랑이 외쳤다.
“이 전쟁을 오딘께 바친다!”
붉은 세상에서 광전사가 달려 나갔다.
*******
보어조아는 병력을 이끌고 롤랑의 무리를 찾아 나섰다. 쉬운 일이었다. 그저 소란스러운 방향을 따라 나서면 되었던 것이다.
그 방향에서 찢어지는 야수 울부짖음도 들려왔지만 보어조아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걸어 나갔다.
괴물의 포효 따위 두렵지 않았다. 더 이상 보어조아는 수많은 함선들의 선주, 아이스피시 공작에게 고용되어 아양 떨던 제독이 아니었다.
이제 보어조아는 염동장군이었다. 위대하고 강력한 영능력자.
그 의지의 행사를 만물이 거부하지 못한다. 하찮은 괴물들 따위가 뭐 그리 위협이란 말인가?
그리고 어차피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똑같을진대, 그놈의 영웅들보다 자신이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보어조아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그 영웅들과 동급이었다. 그리고 영웅답게도 그 걸음걸이에는 힘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뒤에 이천 병력이 뒤따르는 중이었으니.
보무당당하게 행군하는 도중 뒤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병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걸어오던 오스론이 고함질렀다.
“이 정신 나간 천것이. 감히 반신을 속박해? 신벌이 두렵지도 않느냐?”
보어조아는 태연히도 대꾸했다.
“속박한 게 아닙니다. 추기경. 모셔온 거죠.”
“뭔 개소리냐!”
“황금사과가 도둑맞았는데 그건 예하께도 필요한 물건 아닙니까. 사과 한 알 구하라고 프레이 신께서 영웅들까지 내려주신 성의가 실로 망극할 것입니다. 그러니 예하께서는 그 물건을 찾는 데 협조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좀 걷게 된 걸 가지고 불평하신단 말입니까?”
오스론은 그저 기가 차서 물었다.
“내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사과를 찾는단 말이냐?”
“예하께서는 신의 후손 아닙니까? 신의 후손 반신족이요. 황금사과 같은 신물은 그 고귀한 혈통에 반응할 겁니다.”
되는 대로 지껄이며 보어조아는 계속 걸었다. 그리하여 소음의 근원지에 다다랐다.
예상했던 대로 거기 있는 것은 롤랑과 그 무리였다. 그리고 그 옆에 널브러진 수많은 괴물 시체들도.
한바탕 전투가 일었던 현장을 보며 보어조아는 속으로 웃었다.
기사들의 시체도 여럿인 것을 보아 그 전력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잔뜩 지쳤다면 이쪽 뜻대로 주무르기 한층 쉬워지지 않았을까?
보어조아가 다가가 입을 열었다.
“롤랑 경, 이런 데서 뵙습니다! 큰 전투였던 모양이지요? 이것 참 봉변입니다! 애도와 존경의 뜻을 바치는······”
말하다 말고 보어조아는 롤랑의 안색을 살폈다.
롤랑의 충혈 된 눈에 분노 어린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평소의 점잖은 얼굴과는 딴판인 얼굴. 게다가 온몸은 피로 범벅이었으며 그 어깨에는 괴물의 내장이 얹혀있었다.
성기사라기 보다는 광전사에 가까운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보어조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지금 오딘의 축복을 받고 계신지?”
롤랑이 대답했다.
“광폭화해서 미쳤느냐는 말인가? 그랬는데, 지금은 원래대로 돌아왔지. 시간 좀 흘렀거든.”
평소보다 말투가 난폭했지만 보어조아는 감히 그 사실을 따질 수 없었다. 감히 광전사를 자극하면 안 되는 것이다.
움츠러든 보어조아에게 롤랑이 물었다.
“황금사과, 정말 가지고 있었나?”
“예. 가지고 있었는데 도둑 맞았······”
“그럼 도둑을 족치러 가지.”
롤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사들도 따라 일어섰다. 그 무리는 잔뜩 지친 와중에도 모두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의 난폭해진 몸짓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보어조아는 그 무리에 섞여있던 자기 수하들, 염동력자들에게 다가가 작게 물었다.
“뭐 저리 흉흉한가?”
염동력자 역시 사투로 잔뜩 지쳐 힘없이 대답했다.
“연전으로 잔뜩 죽었는지라.”
그 말에 보어조아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흠칫했다.
아까 봤을 때도 괴물들의 시체는 충분히 많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저 외곽에 수많은 괴물들의 시체가 벽을 이루고 있었다. 롤랑과 유저들이라면 그것을 시체 바리케이드라고 불렀으리라.
“저 전부와 싸워 죽였나?”
보어조아의 숨죽인 질문에 염동력자는 허탈하게 대답했다.
“예······.”
둘이서 대화하던 와중이었다. 기회를 엿보던 오스론이 달려 나갔다.
“롤랑 경!”
보어조아는 흠칫하여 염동력으로 그 몸을 옭아맸다. 오스론은 달리다 말고 얼굴에 핏줄이 솟은 채 멈추어야 했다.
“이 천······”
다음 순간 보어조아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롤랑이 한 발짝 다가왔기에.
롤랑이 오스론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뭐지? 왜 추기경이 여기 있나?”
오스론이 외쳤다.
“이놈들이 끌고 왔습니다!”
“어째서?”
롤랑의 시선을 받게 된 보어조아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혹시 몰라서 말입니다.”
“혹시 몰라? 아, 도둑이 우리 아닌가 싶었나 보군. 그런 건가?”
“꼭 그런 것은······”
“감히 전쟁신의 대전사를 의심해?”
그 말을 자르고 롤랑이 말했다.
“죽고 싶나?”
그리 말하더니 롤랑은 허리춤에서 룬검을 빼들었다. 발리사다였다. 갑옷 입은 기사를 찔러 죽이기에는 최고인 검.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보어조아의 말에 롤랑은 윽박질렀다.
“곤란함을 기꺼이 무릅써주지. 그래서 계속 이러겠다면? 데려온 병력을 동원하기라도 하겠단 건가?”
“물론······”
그 순간 보어조아의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병 지휘관이 소리 질렀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이런 부류의 분쟁과 무관합니다! 결코 끼어들지 않을 것임을 이 자리에서 궁니르에 맹세합니다!”
보어조아는 뒤돌아서 용병들을 노려보며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저 겁먹은 들개들이 감히?
보어조아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게 된 것에 순간 주저앉을 뻔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룬검의 서늘한 칼날이 목젖까지 와 있었다.
롤랑이 말했다.
“이제 나도 포로가 생겼군. 서로 교환할까?”
보어조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스론을 저쪽에 돌려보낸 뒤에야 겨우 칼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인질극 작전은 어이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 일인지라 보어조아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는 사이 오스론은 숨을 헐떡이며 롤랑의 무리에 합류했다.
잠시 후, 오스론은 빳빳하게 굳은 아이를 보고 비명 질렀다.
“앤지!”
오스론은 앤지를 껴안았고 그 딱딱한 몸의 감촉을 느껴야했다.
롤랑은 그 옆에 서서 고개 숙였다.
전투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모두 살기 바빠 싸우는 와중에 이 아이의 안부를 신경 써줄 겨를이 없었다. 뒤늦게 세 성기사가 달라붙어 정화기도를 올렸지만 그것은 저주의 진행을 늦추는 데 불과했다.
이대로라면 천천히, 앤지는 죽을 터였다.
그 사실을 오스론도 깨닫고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롤랑은 애써 오스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보어조아를 향해 명령했다.
“자, 뭐하고 있소? 이제 사냥하러 갑시다.”
“사냥?”
“도둑 사냥. 그러려고 온 거 아니오? 내 최선을 다해 도와주리다.”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염동력자들이 도둑맞은 황금사과를 찾는 데 도와 달라고 할 당시까지는 대충 찾는 시늉만 할 작정이었다. 꼭 찾고 싶지도 않거니와, 보어조아에게서 사과를 훔친 음유시인이 회장에서 자기 형제가 죽었다며 하소연했던 것을 기억하고 연민마저 느꼈으므로.
그러나 그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분노만이 자리 잡았다.
그 음유시인의 정체며, 어떤 사정으로 일을 저질렀는지 이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잡아서 족칠 것이다. 살려서 잡기 힘들겠다면 죽여서라도.
광전사가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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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고 - [6]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