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고 - [5] >
그 목소리에서 짜증을 넘어선 경멸이 묻어나왔다. 염동력자는 애써 착각이려니 넘기고는 말했다.
“그 사과 때문에 강림한 신들은 눈앞에도 계시지 않습니까?”
“눈앞의 신들? 우리 말하는 건가?”
“예, 발할라의 전사들 또한 반신이잖습니까? 그 사과 하나를 구하는 것이 여러분의 임무입니다. 그 사과 한 알 구하고자 고귀한 영웅들이 지상에 내려왔어요. 그런데도 정말 황금사과가 그리 보잘 것 없는 겁니까?”
염동력자는 말을 끝낸 뒤 생각했다. 한 방 먹였다고.
그러나 모지는 더없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응, 보잘 것 없지. 그리고 우리의 임무 또한 그래. 적어도 그대 헛소리를 참고 들어줘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임무는 결코 아니라오.”
이번에야말로 참지 못하고 염동력자가 말했다.
“심기가 불편하신 듯한데, 제가 무슨 실례를 저질렀습니까?”
“물론 실례지. 당신네 존재 자체가.”
“예?”
모지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당신네는 당신네 행동이 이상해진 거 못 느끼나? 무모해지고, 무모하게 굴다 못해 아군한테 포격하고, 괴물 양식을 꾀하고······ 롤랑은 혹시 당신네가 저주 걸린 유물이라도 주웠나 의심하더군. 하지만 난 그런 게 아니란 것을 알아.”
“우리가 이상해졌고, 그 이유를 아신단 말씀입니까?”
“그래. 그대들, 신들의 축복을 받았지? 당신네는 신께서 무슨 선물을 원하느냐 하시매 더 고강한 정신을 바랐지. 정신적인 초인으로 변모한 거야······ 눈에 보이듯 선하군. 나 역시 거친 과정이거든. 그런데 그대들과 내가 다른 게 뭔지 아나? 바로 그 변화의 속도라오.
내가 활동할 적에는 괴물이 훨씬 더 많았지만 당신네처럼 수월하게 죽일 수가 없었어. 병사들은 적고 그들이 쥔 무기는 조잡하던 시절이거든. 괴물 한 마리가 보이면 그저 소수의 전사들끼리만 가서 사투를 벌여야했어. 그래야 괴물 한 마리 겨우 죽일 수 있었소.”
“갑자기 옛 이야기가 왜······”
“잠자코 들어. 왜 못 배운 티 내지 못해 안달인가? 아무튼 그 비루한 시절에 인간 족속은 그저 거인들의 노예종족이었지. 당연히도 신들께서는 우리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 인간 전사가 겨우겨우 괴물을 죽이고 천상에 영혼을 바친들 보상도 별 거 없었소. 신들께서는 그저 영혼을 받은 값만 겨우 치러주실 뿐.
지금 와서는 그 보상을 잘 치러주시는데, 그건 다 옛 사람들이 성과를 보인 덕분이야. 신들께서 조금 신경 써주면 이 보잘것없는 족속도 신들과 비견될 업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였으니.”
염동력자로서는 이 마법사가 왜 갑자기 자기네 자랑을 늘어놓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불평하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그랬다가는 한 소리 더 들을 것 같았기에.
염동력자는 입 다문 가운데 모지만 계속 말했다.
“과연 당신을 포함한 현 시대 사람들은 그럴 수 있을까? 세계수의 괴물들을 소탕하고 천상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어. 당시에는 수천 병력이면 인류의 명운을 짊어진 셈이었는데 지금은 각국에서 무리 좀 하면 수만 대군을 조직할 수 있지. 제식무기는 또 얼마나 좋아졌는가?
그 훌륭한 군대를 이끌고서 당신네는 쉽게도 괴물들을 죽여 왔고 많은 선물을 받았소······ 그리하여 탄생한 그대 초인들, 강력한 염동력자들! 자, 그 정신성은 어느 정도인가? 저기 롤랑 보이나? 저 친구야 당연히 정신적으로도 굳건한 친구지.”
모지는 문득 게임 메디아를 생각했다.
거기에서 영웅들의 능력은 정확한 숫자로 표현되었다. 그 기준으로 보아······.
“롤랑의 정신은 5. 인류 해방을 위해 괴물과의 사투를 거듭해온 저 위대한 기사의 정신은 5요. 그리고 당신네 염동력자들? 6이야.”
“저희가 롤랑 경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하단 말씀입니까?”
“일단은. 그런데 그게 말이 되나? 황금에 눈이 멀어 아군한테 포격한 작자들이 위대한 롤랑보다 우월한 정신을 지녔다는 게? 그러나 사실이 그렇단 말이지. 어째서냐면 당신들의 정신은 성장한 게 아니라 부풀어 올랐어. 폭발적으로. 비대해진 게지. 그 결과 당신네는 영웅적인 정신성을 지니게 되었네. 그 머릿속에서 자제심과 자기분별 따위 소인배적인 요소는 싹 다 사라지고 영웅적인 자신감과 행동력만 남은 거야. 품성과 지혜가 결여된 채.”
염동력자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결국 신들께서 내려주신 축복이 저희를 망쳤다 이 말입니까? 그리 신들을 비난해도 되겠습니까? 천상의 전사께서?”
“무슨 소리? 내가 비난하는 건 신들이 아니라 당신네인데. 뻔뻔한 사람 같으니. 궁니르의 맹세를 저버린 자들이, 신들을 공경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주제에 신들을 들먹이는가?”
염동력자는 얼굴을 붉히며 팔짱을 꼈다.
“집요하게도 그놈의 옛일을 거론하시는군요. 계속 그러시겠다면 전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든가. 아무튼 난 당신네를 동정하오. 그 부풀어 오른 두뇌로 생각하기에 신들은 썩 두렵지 않지? 지상에 제대로 간섭하지도 못할 작자들이니. 하지만 최후의 순간, 결국 모든 인간은 여신을 마주한다오. 헬 혹은 발키리를.”
그때 모지의 눈이 빛났다. 마력으로 빛나는 사안. 염동력자는 시선을 피한 와중에도 그 몸이 굳었다.
허옇게 질린 그 얼굴에 대고 모지는 예언했다.
”그러나 그 어느 여신과도 편히 마주할 수 없으리. 그대들은 죽기 전 신의 심판을 받으리라. 그 비참한 꼴이 내 눈에는 뻔히 보여.”
마비가 풀리자마자 염동력자는 숨을 헐떡거리며 헛구역질했다.
모지는 롤랑 옆에 돌아와 걸터앉았다.
그리고 자괴감에 빠졌다. 드높은 정신성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비단 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방금 모지는 화풀이를 했다. 우울한 사람답게.
정말이지 모지는 우울하고 의욕이 없었다.
한국인 유저 왕은지에게는 살아남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단순히 생존을 목적 삼기에 마우그리스 경의 정신은 지나치게 고결했다.
이제 모지는 얼른 황금사과를 구하길 바랐다. 임무를 달성하여 소멸하든, 발할라로 돌아가든 상관없었다. 빨리 할 일을 해서 이 지긋지긋한 짓거리를 끝낼 수 있길 바랄 뿐.
얼른 다 집어치우고 싶었다. 당장 그러지 않는 것은 저기 옛 동료가 있기 때문이다.
‘롤랑.’
모지는 저 기사에게만은 강렬한 동료의식을 느꼈다. 비록 가짜겠지만 어쨌건.
살아남기에도 관심이 없어진 지금, 모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저뿐이었다.
*******
잔뜩 욕먹고 저주까지 들은 나머지 염동력자는 다시금 영웅들에게 적의를 불태웠다. 목숨을 구원받은 은혜 따윈 까맣게 잊은 채.
염동력자는 롤랑을 바라보았다.
역시 저놈이 황금사과를 가져간 것이 아니겠는가?
‘황금사과는 별 가치가 없다고? 개소리. 훔쳐놓고서 별 귀중한 걸 가져가지 않았노라 자기합리화 하려는 건가?’
그러나 오래 관찰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걸터앉아 방금 전 전투의 피로를 풀기 바쁜 와중이었다.
롤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또 다시 적들이 온다. 모두 준비하시오.”
그와 함께 숲속에서 안광이 빛났다. 그 말대로 모두 일어서려던 차, 선열에 있던 기사들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석상처럼.
이 정신 나간 사태를 이해한 것은 오직 한 명이었다. 모지가 외쳤다.
“석화의 눈! 코카트리스나 바실리스크다. 모두 지면을 바라봐!”
과연 그 말대로 숲속에서 나타난 것은 거대한 바실리스크였다. 뱀들의 왕.
전설에 따르면 그 시선과 마주한 생물은 돌로 변해 굳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전설은 사실이다.
그 석화의 마안의 존재로 말미암아 게임 메디아에서도 두 괴물, 코카트리스와 바실리스크는 강적 중의 강적으로 통했다.
각각 13레벨과 14레벨, 그 높은 레벨도 문제거니와 그 레벨과는 상관없이 골치 아팠다. 순수한 전사계열 유저라면 석화에 대비하지 않았을 경우 그 시선에 닿은 순간 곧바로 죽음을 당하곤 했다.
저 사기적인 능력에 게임에서는 어찌 맞섰는가? 두 직업군이 유효했다. 사제 아니면 마법사.
이 경우는 마법사가 도움 될 터였다.
“모지!”
롤랑의 외침과 동시에 모지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눈을 빛냈다.
모지의 사안이 바실리스크의 마안과 마주쳤다. 이내 둘은 서로 안광을 뿜으며 눈싸움을 시작했다.
저 둘이 눈싸움하는 동안 다가가서 칼을 찔러 넣으면 된다. 게임에서처럼.
“다들 가서 저 목을 베시오!”
그리 생각하고 롤랑이 달려들려던 그때였다.
수풀에서 또 다른 안광이 빛났다.
그리하여 돌격하려던 기사들이 달리다 말고 몸이 굳었다.
안광의 주인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숲속에서 또 한 마리의 괴물이 나타났는데, 그 붉은 볏이 유난히 두드러졌다.
롤랑도 그 괴물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실리스크만큼이나 널리 알려졌고 그만큼 위험한 괴물이었으므로.
‘코카트리스.’
용의 날개와 꼬리를 가진 수탉 괴물. 저 역시 석화의 시선을 가진 놈이다.
저놈은 또 어찌 처리해야 하나? 모지는 바실리스크를 상대하느라 몸이 묶였다. 사제는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 했다.
롤랑이 외쳤다.
“다들 멈춰서 바닥을 보고 있으시오! 내가 처리한다!”
롤랑은 땅을 보며 달렸다.
어쩔 수 없지만,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그 움직임을 보지 못한 채 싸워야 한다니.
이내 코카트리스에게 달려든 롤랑은 그 그림자를 주시했다.
코카트리스의 거대한 부리가 아래로 내리 찍힌 순간, 롤랑은 그 그림자의 각도를 계산했다.
롤랑이 옆으로 빠진 그 자리에 코카트리스의 부리가 꽂혔다.
그리하여 롤랑이 다시 지면을 박찼다. 그 칼을 휘두르려던 차, 지면에 박힌 코카트리스의 머리가 기괴하게 목을 틀었다.
그리하여 코카트리스는 그 시선을 롤랑과 마주쳤다.
곧바로 석화의 저주가 닥쳐왔다. 롤랑은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온몸이 굳는 느낌. 그러나 과연 영웅은 범인과 다른 것인지 그 몸이 단번에 굳지는 않았다.
롤랑은 속으로 기도를 읊조렸다.
‘오딘이여, 이 비루한 몸을 순수하게 하소서.’
정화 주문. 그러나 그 효과가 단번에 몸의 석화를 몰아내지는 않았다. 저 눈알을 계속 보고 있으면 결국 정화도 소용없이 돌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 롤랑은 눈감은 채 달려들었다.
놈의 숨결이 느껴진 순간, 그 머리에 칼을 꽂으려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성검이 그 볏에 박혔다. 이제 그 머리를 뚫기만 하면······.
그러나 코카트리스는 자신의 고통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광전사처럼.
코카트리스가 앞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두개골을 깨기 일보직전이던 롤랑을 걷어찼다.
롤랑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코카트리스는 긴 목을 빼어 땅을 구르는 롤랑을 바라보았다.
짐승의 복부를 걷어차면 그 내장을 파열시키고도 남는 발차기였다. 코카트리스는 저놈이 죽었으리라 여겼지만, 그렇지 않았다.
롤랑에게도 그 일격은 피를 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났다.
어떻게든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역시 눈 감고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차라리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리하여 롤랑이 눈을 뜬 순간, 손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던 성검이 한순간 더욱 붉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오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함께하니 두려워할 것 없다, 롤랑.’
그 태양빛이 온몸을 감쌌다. 그리하여 롤랑은 오딘의 성검이 자신을 가호해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정말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롤랑이 달려들었다.
“죽어라, 닭대가리!”
그리고 코카트리스는 한쪽 앞발을 들어 그 돌격에 대비했다. 롤랑이 다가온 순간 반격으로 걷어차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롤랑은 코카트리스에게 달리던 와중 방향을 전환했다. 그러고는 아직도 모지와 눈싸움 중이던 바실리스크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도약하여 그 뱀의 목에 성검을 휘둘렀다.
그 목이 워낙 커 단번에 목을 잘라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보랏빛 피를 뿜어내며 바실리스크는 온몸을 뒤틀었다. 비명 대신 입에서 독액을 뿜어내면서.
끼에에에에엑, 울부짖는 바실리스크에게서 롤랑은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그 독액에 몸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코카트리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롤랑이 놈과 맞서려던 차, 제이슨이 읊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푸른 야수가 달려들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제이슨의 목소리.
“미안! 저 멀리 보낸 놈 역소환시키고 다시 부르느라 늦었······”
이내 코카트리스는 푸른 야수에게 덮쳐져 지면을 굴렀다. 그리 엎어진 괴물쯤이야 간단히 처리할 수 있었다.
롤랑은 그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수탉의 단말마를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롤랑은 다급히 바실리스크도 끝장을 내고는 아군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상태가 심각했다. 태반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쩐지 달려들지 않더라니, 알론소조차 그러했다. 그 역시 온몸이 굳은 채였다.
롤랑이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려던 차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돌이 되어가는 게지요. 정화 기도가 통하겠습니까?”
아말릭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아마도 신성이 높아서.’
아말릭처럼 제이슨과 모지도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안정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수십 명의 인원이 일순간에 무력화되어버린 것이다. 뜬금없이 나타난 두 괴물 때문에.
‘게임에서 분명 바실리스크와 코카트리스는 영역을 다투는 앙숙이었는데.’
< 창고 - [5]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