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14화 (114/164)

< 창고 - [4] >

모지의 사안이 요사하게 빛났다. 그 시선이 돌격해오던 코뿔소 괴물과 마주친 순간, 괴물은 달리던 와중 몸이 굳었다.

그러나 달리던 관성이 있어 기어이 괴물은 계속 닥쳐오고 있었다.

그에 맞서 롤랑이 성검을 들고 달려갔다.

“죽어라, 미물아!”

그리고 격돌, 밀려난 것은 당연히도 롤랑이었다. 중량차가 명백했으므로.

롤랑은 튕겨나가 공중에 그 몸이 떴다. 그리고 그 몸이 땅에 떨어지기 전 모지가 그 옷깃을 붙잡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순간이동, 둘은 괴물의 목 위에 이동했다.

한편 괴물도 방금 그 격돌로 무사하지 못했다. 성검이 그 이마를 뚫고 파고들었기에.

마비가 풀린 후, 머릿속에서 타오르는 고통을 못 이기고 괴물은 발광했다.

요동치는 그 몸 위에서 롤랑과 모지는 털을 쥐고 버텼다. 이내 괴물의 발버둥이 잦아든 순간, 롤랑이 벌떡 일어나 성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아래로 내리찍은 성검이 괴물의 목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발광. 목으로 파고든 태양열에 괴물이 울부짖는 가운데, 결국 성검은 그 두꺼운 목을 뚫고 그 뼈를 태웠다.

그럼에도 아직 괴물은 죽지 않았다. 호흡이 끊기는 것을 느끼면서도 괴물은 최후의 발버둥으로 몸을 땅에 뒹굴려 했다. 그 위에 달라붙은 것들을 깔아뭉개고자.

그러나 그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 괴물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염동력자들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괴물 위에 있던 모지와 롤랑도 덩달아 공중에 떠올랐다. 물론 볼썽사납게 내려달라 부탁하지는 않았다.

모지는 다시금 롤랑의 몸을 잡고 입술을 달싹여 순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둘은 염동력자들의 앞에 당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경······.”

염동력자가 더듬거리며 감사를 표했지만 롤랑은 손을 내저었다.

겸양의 표시? 아니었다.

경고. 롤랑이 말했다.

“쉿, 누가 온다.”

불러내두었던 흑기사 소환물도 그 사실을 먼저 알아챘다. 흑기사는 이미 방패를 들고 무리의 맨 앞에 나와 있었다.

흑기사는 숲속으로 시선을 보냈다.

숲속에서 안광들이 빛났다. 기괴하고 큼지막한 안광들.

어둠 속에서 수많은 괴물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염동력자들은 넋을 잃고 숲속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이게 뭔?”

이내 수풀에서 나온 괴물들은 거대했고 제각각이었다. 거대한 뿔사슴 무리, 날개호랑이, 개과에 속할 법한 괴물, 그리고 거대 고릴라인지 아니면 돌연변이 트롤인지 모를 거대한 영장류 괴물까지.

롤랑마저 듣도 보도 못한 괴물도 여럿 섞여있었다. 이미 괴물들을 소탕한 층이었는데, 아직도 이토록 다양하고도 많은 괴물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괴물들이 다가오는 가운데 기사들이 무기를 빼들었다.

아말릭이 중얼거렸다.

“다 뭐지, 대체? 어째서 저 많은 괴물들이 다 함께?”

“뭐 어차피 다 적이지—!”

어느새 제이슨이 불러낸 서리거인이 외쳤다.

“다 죽여—야 할—적—!”

정찰을 나갔던 발키리도 무리의 위기를 알아채고 돌아왔다. 그리고 기사들은 진형을 형성했다. 종자들을 비롯한 약자들을 둘러싼 대형.

그 모두의 앞에서 롤랑이 버티고 서있었다.

롤랑은 저 괴물 무리에서 가장 강력해 보이는 괴물을 노려보았다.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는 트롤 비슷한 괴물.

그 괴물이 포효함으로써 다른 괴물들이 달려왔다.

그 돌격에 맞서 기사들은 무기를 앞으로 뻗었다. 이내 양 무리가 충돌하기 직전 롤랑은 예의 영장류 괴물에게 달려갔다.

“오딘이여!”

그리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 함께 달려온 괴물들이 그 중량으로 밀어붙였다.

맨 앞에 있던 기사들이 그 몸에 깔렸다. 그리하여 괴물들의 돌격이 멈춘 틈을 노리고 후열에 있던 기사들이 반격했다.

그리하여 다가온 괴물들을 죽였지만, 깔린 동료들을 구해줄 틈도 없이 또 다시 덮쳐온 다른 괴물들과 싸워야 했다.

이 상황에 유난히 두드러지는 것은 롤랑은 물론 알론소였다. 그 노인은 유령군마에 올라탄 채 전투의 외곽에서 달리다 괴물들의 옆구리를 찌르고 다녔다.

“발두르여!”

그가 든 창은 빛을 머금고 번쩍였다.

제이슨은 그쪽을 쳐다 보다 말고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어딜 보나? 집중해라.”

투명해진 모지의 목소리. 이내 제이슨의 몸에 실바람이 휘감겼다. 가속 주문.

본래 제이슨은 이 탁월한 주문의 혜택을 받지 못했는데, 모지 혼자로서는 롤랑과 소환물들에게 주문을 걸어주고 유지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제이슨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그 주문의 힘을 받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에 모지는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모지는 이곳뿐만 아니라 저곳에도 있었다. 당연히도 분신이었다.

다만 투명해진 이쪽 모지와 달리 저쪽 모지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칼을 들고 외쳤다.

“사람을 깔아뭉갠 시체들부터 거둬내라!”

이제 모지는 분신 주문을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싸우는 기사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기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칼솜씨나 주문의 활용성 등은 딱히 향상되지 않았지만, 단순 그 두 가지 변화만으로도 모지는 전투에서 전보다 훨씬 도움이 되었다.

제이슨으로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변화였지만.

눈썹을 꿈틀거리며 제이슨은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난전이었다. 곳곳에서 괴물 울부짖는 소리와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찢어지는 야수 울부짖음.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아아아아아아악!’

저쪽 괴물이 아니라 이쪽 푸른 야수의 비명이었다. 늑대 괴물들이 그 온몸을 물어뜯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 주둥이가 타들어가지만 상관 없다는 듯 집요하게.

이내 푸른 야수가 소멸했고 제이슨은 다시 불러내고자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그 와중, 푸른 야수의 비명이 사라지면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악기의 연주 소리. 소리로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하프 소리 같았다.

그리 느낀 순간 제이슨은 생각했다.

‘이걸 내가 하프 소리인지 어떻게 알아들었지?’

간단했다. 전에 들어본 소리였기에. 얼마 전 연회에서였던가?

‘음유시인?’

뭔가 이상했다. 그리 느낀 제이슨은 이내 칼을 들고 전선에 합류하려다 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그리고 소리를 듣는 데 집중하자니 역시 저기서 들려오는 것은 하프 소리였다.

괴물들의 수가 줄어들어 전투 중의 소음이 줄어들면서 그 사실은 명백해졌다. 이제 제이슨은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도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숲속에서 연주하고 있어.’

괴물들이 나온 숲속에서.

결국 전투는 끝났다. 물론 인간들의 승리로. 베어낸 거대한 고릴라 괴물의 목을 들어 올리고서 롤랑이 승리를 선언하는 중이었다.

“오딘이여, 이 제물을 받아주소서!”

베어낸 괴물의 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절단된 목에서뿐만 아니라 눈과 입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그 머리통이든, 그걸 쥐고 포효하는 롤랑이든 보기만 해도 제이슨은 움츠러들 것 같았다.

그러나 허세로 온몸을 포장하고서 제이슨이 롤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머리통을 바라보지 않고자 애쓰며 물었다.

“하프 소리 들었나?”

“뭔 하프?”

“숲속에서 들려오는 하프 소리 말이야······”

제이슨이 그리 말하자 롤랑의 뒤에 서있던 ‘투명하지 않은’ 모지가 핀잔했다.

“아틀란티스 놈답게 이 와중에도 문화생활을 영위하나? 전투 중에 아주 여유가 있었나 보지? 뭔 소리가 들려오는지 감상이나 할 수 있고.”

그러나 그 말에 반박한 자가 있었으니, ‘투명한’ 모지가 말했다.

“그 소리는 나도 들었다. 지금은 거의 들려오지 않지만, 아까는 야수들 소리에 섞여 드문드문 하프 현 튕기는 소리도 들려왔어.”

투명하지 않은 모지가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지. 난데없이 종족 불문하고 연합한 괴물들이 튀어나온 숲속에서 하프 연주? 그저 멍청한 짓도, 우연한 일도 아닐 거다. 아스톨포가 살아있을 때 불어대던 뿔피리 기억나나? 불기만 하면 적군이 달아났지. 그 비슷한 마법 도구가 이 기현상을 일으킨 거라면······”

모지 둘이서 토론하는 가운데 롤랑이 끼었다.

“누군가 괴물들을 조종했다 이건가?”

“아마도.”

그게 가능한 일인가 롤랑은 굳이 묻지 않았다. 판타지 세계에서 괴물들을 사역하는 물건쯤이야 흔한 법 아닌가.

잡담을 나누는 대신 롤랑은 아군들을 바라보았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괴물들의 시체에 깔린 동료들을 구출하랴, 그리고 치료하랴.

문득 롤랑은 아말릭을 보았다. 부상자에게 기도 올리느라 바삐 움직이는 모습.

그때 모지가 물었다.

“어쩔 건가, 롤랑? 하프 소리의 근원을 추적할 건가?”

롤랑은 계속 부상자들을 지켜보며 대답했다.

“물론 해야지. 하지만 그것은 네 악마의 힘을 빌리는 것이 좋겠다. 네 악마는 특유의 시야가 있어 잠복한 자를 찾아낼 수 있지 않나?”

“그럼 나머지는? 모두 이 자리에서 가만히 있느니 보다 다 함께 나서는 편이 좋을 것인데.”

“추적보다는 방비에 힘쓴다.”

“적들의 군세가 빠진 틈에 공세를 퍼부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고? 만약 놈이 괴물들을 끌어 모을 수 있다면 이후로는 더욱 위험하다. 더 많은 군세를 끌어 모으게 내버려둘 셈인가?”

“그렇다고 미지의 연주자를 찾아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나 혼자 들어가면 모를까, 잘 찾아낼 자신도 없군. 차라리 여기서 아군의 합세를 기다리겠다.”

“아군?”

“보어조아. 아마 오고 있겠지. 맞나?”

롤랑이 염동력자를 바라보았다.

그 속내를 들킨 듯한 심경에 염동력자는 말 더듬지 않고자 애쓰며 겨우 말했다.

“예, 오고 계십니다. 병력을 이끌고요.”

“그럼 됐군. 기다린다. 물론 멍하니 있을 수는 없지. 제이슨?”

롤랑의 부름에 제이슨은 급히 대답했다.

“응?”

“별동대다. 소환물들을 다음 층 입구에 보내둬라. 놈이 위층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그래······”

이후로도 롤랑은 세세한 지시를 내렸다. 소환물들과 연결이 끊기면 바로 보고하라든가, 추적 대상이 변신했을 가능성을 감안해 평범한 짐승이 입구에 다가와도 적극 막게 하라든가.

제이슨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저토록 당연한 듯이 지시하는 롤랑이 예전에는 어떠했던가?

적어도 지금과 같지는 않았음을 기억했다.

‘지휘관 노릇할 자신 없다고 유저들끼리만 행동하자 주장하던 게 엊그제같은데.’

그러나 이제 롤랑은 수백 명을 이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어쨌건 제이슨도 그 지시에 따랐다. 소환물들을 모아놓고, 롤랑에게 지시받은 그대로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소환물들이 무리를 이탈했다. 한편 롤랑도 직접 몸을 움직여 성기사답게 굴고 있었다.

롤랑이 무릎 꿇고 기도하자 죽어 나자빠진 시체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 가슴이 박동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롤랑은 다른 부상자 앞에 기도했다. 그 몸에 빛이 감돌더니 출혈이 멈추기 시작했다.

아말릭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롤랑보다 약간 더 빠르게. 그리고 알론소도 솜씨 나쁘게나마 기도문을 외워 미약한 치유의 힘이나마 부상자들에게 베풀었다.

그처럼 바빠 보였기에 염동력자들은 감히 롤랑의 기도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래서 염동력자는 다른 지도자, 그러니까 모지에게 말을 걸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마는, 마우그리스 경.”

모지는 염동력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읊어보시오.”

“하프 소리가 났다고? 웬 하프가 괴물들을 조종했다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까?”

“아마도.”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쫓고 있는 음유시인이?”

“그럴 수도 있겠지. 뭔 수로 그런 재주가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염동력자는 조금 뜸 들인 끝에 물었다.

“혹시 그자, 로키가 아니겠습니까?”

악신의 이름이 나오자 모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린가?”

“황금사과를 보관하고 있던 금고는 불타서 구멍이 났습니다. 그런데 로키는 불로 유명한 신 아닙니까······ 게다가 괴물들을 조종하는 힘이 있다니 그것도 로키 아닌가 싶습니다. 로키는 괴물들의 어미이자 아비인 신 아닙니까?”

“그래서 그 시인이 미드가르드에 내려온 로키라 주장할 셈인가?”

“아니겠습니까?”

모지는 생각할 필요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물론 아니지. 신씩이나 되어 그리 값싸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신화에서는 로키가 지상을 활보하며······”

“신화는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 신들은 그러지 않아. 겨우 황금사과 하나 훔치고자 로키 신이 강림했다 주장하다니, 기가 차는군.”

< 창고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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